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칠불통계게

통융 2017. 12. 1. 20:20

七佛通戒偈에서 가르치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에 해당하며

이미 일어난 惡은 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惡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善은 일으키고, 이미 일어난 善은 증장시켜라.

 

칠불통계게는 四禪定(마음의 흐름)을 모르면 이해도 안되는 法門입니다.

 

이미 일어난 마음(善 惡)은 누구나 알수가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마음(善 惡)을 알수가 있습니까?.

일어나지 않은 마음을 알아야 끊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닙니까? 이해가 될겁니다.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머물고,  끊어진 곳을 아는가?

三身佛을 自覺하지 못하면 모두 文字 理解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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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들가는 門은 안이비설신의라는 여섯 門이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

으로 설법에 의하기도 하고, 화두에 의한 疑情으로 인도 하기도 합니다.

큰스님께 지도받았다는 사람에게 이런말 저런말 하던중, 그가 듣다 말고

"아하, 성소작지군요" 또는  "평등성지군요" 하기에 "당신은 어렵습니다"

글을 많이보거나 들은 것이 많으면 생각이 앞서기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뒷생각이 앞생각을 장애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비유하면 어떤사람이 자신의 슬펐던 경험을 말할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다

보면 간접경험이 되고 그사람과 같은 마음상태로 변해지고 같이 슬퍼집니다.

이때 상대의 말을 분석이나 한다면 이심전심이 되지 않는 이치와 같습니다.

 

죽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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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죽어야 살수가 있는데, 생각을 죽이는 방편 두가지를 설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할때 그말의 앞뒤(因果)가 맞아야 말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겨야 의심이 없고, 의심이 없어야 말을 듣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져야 法의 門으로 들어갈수 있습니다. 고로 경험없는

말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도 알고 너도 알수 있는 말'

듣는 귀가 있으면 누구던지 이해할수 있어야 합니다. 저혼자 아는 내용이나

말의 앞뒤가 안맞거나, 신비한 내용, 기적 같은 말은 혹세무민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머리가 둔해서 법문이 이해가 안되는 주리반특이나 삿된지식에 물든 

앙굴마라나 아는 것이 많으면 그의 생각(지식)을 죽이는 방편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이때 말로 죽이기도 하고, 理解 不可能한 말로 생각을 죽게도 합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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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짐승과 달리 知覺이 있습니다. 이러한 知覺作用이 깨달음으로 이끕니다.

비유하자면, 잠을못하거나 육신이 피로하면 하품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자연

(자동)입니다. 산소가 부족한 세포들이 살겠다고 아우성하는데 사람은 모릅니다. 

또, 긴장이 지속되거나,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근육이 경직됩니다. 육신의 경직은

죽음입니다. 세포들은 자신들이 경직되면 죽는 것을 압니다. 이때 근육 세포들이

죽기 싫어서 자동으로 기지게를 켜는데, 이 현상은 생각 이전에 육신의 작용이지

내가 하고 싶다고 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조건이 주어지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조건을 형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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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공안이 아니라도 어떠한 명제 앞에 진실로 의심이 들었다면 이사람은 분명히

깨치게 됩니다. 즉, 의심이 몸으로 들어가서 의정으로 변하면 당사자는 모릅니다.

깨친 후에나 알게 됩니다. 고로 의정은 조작할 수 도 없습니다. 일정한 시간동안

앉았다 일어났다를 아무리 반복해도 이것은 고요히 앉아있는 습관일 뿐 입니다.

고로 진정한 疑情에 들면 48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세포의 긴장은 오래 못갑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의심이 몸으로 들면 몸(세포들)이 긴장합니다. 세포란 정보의 집

산인데 자신의 정보로 이해가 쉽지않다는 것을 알고 세포들이 극도의 긴장상태로

들어갑니다. 긴장의 압력이 한계치에 다달으면 세포는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의하여

무시이래 저장했던 모든 정보를 검색합니다. 마치 컴퓨터의 검색기능과 같습니다.

그 정보를 함장식(팔식)이라 하고 인간의 육신은 지수화풍의 결합이고 하나의 티끌

마다 결합되는 원인(정보)이 있고, 그 원인(업력)에 의하여 물질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모르는 것을 깨치는 것이 아니고, 몸 안에 숨어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고로 중도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內在돼 있던 것을 發見하는 것

입니다.  肉身은 업의 고집체라고 했듯이, 나의 발견이란 業의 현상을 발견하는 것!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초선을 체득하면 얻었던 보물을 함부로 쓰거나 버립니다.

근본은 놓치고 작용(智解)만 따라갑니다. 즉, 體는 모르고 用만 따르듯,

燈과 빛의 상관관계에서 燈은 놓치고 빛(智慧)만 따르는 현상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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