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草觀(마음이 머무는 곳)

조사선의 문제

통융 2017. 12. 1. 16:57

조사선은 어쩔수 없이 의리선으로 갈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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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쳤는데 일면불 월면불에 걸렸다?  이게 뭣인가? 글자 의심합니다. 제자를 구렁

텅이로 끌어 들이는 출발점입니다. 고로 세월이 지나면 도리어 처음보다 어두워집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 아닌 것도 아니라' 는 마치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 몇년간 머리를 돌리다 보면 佛門에서 처음 배운 '콩심은데 콩난다' 는 인과법의

기본 마저도 착각을 하게 됩니다.  智慧가 경직되어 도리어 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화두타파자는 물어볼 것 없이 눈빛만 봐도 압니다.  빨리 진행시켜줘야 합니다.

"三界는 火宅이다 安住하지 말고 가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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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선지식이  이땅에 불국토를 만들려고 어린아이때 부터 가르쳤습니다.

새나라에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나라 우리나라 좋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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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깨쳤나 못깨쳤나 검증해 봅니다.

스승 :  "새나라에 어린이는 ?"    제자 :  "일찍 일어납니다"

스승 :  "강사로구나"            

제자... 멍청히 돌아가 골돌히 생각합니다.

 

通----벌떡 일어나 눈을 비비면 된다.


스승이 넌즈시 한마디 합니다. 나는 매일 뒷산 옹달샘에 가서 물을 먹고온다.

제자가 눈치를 번쩍 채고 찾아와 답하길  "새벽!"     스승 :  "아니다"

어째서 아닐까? "겨울에는 7시가 새벽이고 여름에는 4시가 새벽이다." 때도 모르다니 

 

왜?  왜?  이  뭣꼬 하다가 

홀연히 산 아랫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꼬끼오"   아앗!

 

단걸음에 스승에게 달려가 "야반삼경(寅時)에 나무 닭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스승 : "됐다"     저에게 오면  "아니다"

 

조금 수승한 사람이 왔기에 일러보라 했더니 방바닥을 세번 '탁,탁,탁, 치고 꼬끼오'

스승 : "훌륭하구나"     저에게 오면 "아직 아직 멀었다"

 

드디에 방거사가 옵니다.

양팔로 엉덩이를 세번 '툭,툭,툭' 치더니 목아지를 쭉빼고 "꼬끼오"

인가 잘하던 스승은 도리어 몰라보고 "아니다"   나에게 오면 "눈은  떳지만 아직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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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無所有處天을 발견한 無學者 아라한이 와서

1)엉덩이를 세번 치고, 2)목을 길게 빼고, 3)꼬끼오 하고, 4)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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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더 배울 것이 없다"  글자(理致)를 버리고 이제부터 손가락 들고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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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책에 나오는 무차선 법문을 보고..  용ㅇ 대선사가 법상에 오르시어 법문하시길,

나의 참모습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보지 못함이니 여기 모인 대중은

어느 곳에서 산승의 참모습을 보려는고?   운ㅇ선사가 일어서서  "유리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하고 멋진 답을 하였다. 만약 당시 산승이 있었다면 '빗장 關'이라고 달리

답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시 운ㅇ선사가 '유리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라고 답하자

조실이신 용ㅇ대선사께서 아무말 없이 법상을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유리독은 은유가 그럴듯하나 생각이 가리고

빗장간 또한 오른쪽 다리가 가려운데 왼쪽다리를 긁는다.

通--- 산승을 처다보고 '스님의 코구멍이 두 개인데 입이 하나입니다.' ... 卽見如來


모두 무명무상절일체의 첫소식 공무변처천의 아무 것도 모르는 곳에서 글자를 보니

앞에 나오는 華는 보지 못하고 뒤에 나오는 藏, 嚴, 만 보이더라 그래서 '감췄다' 하여 

'유리 독 속에 감췄느니'  또는 '빗장 속' 이라느니'  참으로 신기하지요

유리독을 보십시요 달팽이와 우렁입니다. 쇠 빗장은 한술 더 떳으니 기약이 없습니다.

생각이 이렇게 갇혀 있습니다. 無影塔을 보여줘도 모르고 그림을 그려줘도 모르니.. 

 

차라리 흉내라도..  "묘체담연무처소 산하대지현진광" 그러나 이것도 틀렸습니다.--- 글자의 소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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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河大地라 하면 일체 모든 것을 다 말하기에 죽은 몸뚱이에도 있다는 말이됩니다. 

세존께서 붓다를 만나고 십어하던 제자에게 말씀 하시길  "이까지 죽으면 썩어빠질

몸뚱이를 만나서 무엇하려 하느냐?" 그리고  "法을 보거라 法을 보는자 나를 본다"  

이렇게 밝게 빛나는 海印에서 무엇을 감춘다는 말인가? '나는 봉사요' 자복했을뿐..

        * 세존께서는 두 손바닥 활짝 펼치시고 나는 감춘 것이 하나도 없다. *

 

내가 대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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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 나를 보려는가?  풀 끗!(草觀) ....산승이 어찌 풀 끗인가

어떻게 보이는가? 華!  ..... 부처로 보입니다.

무엇으로 보는가? 照見!    여기까지가 法眼이고 아직 佛眼의 涅槃이 남아 있습니다..... 눈으로 봅니다.

한마디로 이르면  受用(받는다!)  涅槃 .........

 

독속에서 無我를 찾는 그대는 어느 세월에 유리 독을 깨고 나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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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慧는 내버려 두고 받기(受用)만 해야지 흔들면 도로 어두워집니다.

지구가 도는 속도를 보십시요. 隨緣, 내버려두고 따라만 가야 합니다. 

 

世間解

세간사람이던 과학자던

한마디만 하면 곧바로 알아듣고 그 이치까지 꿰뜷어 보고 說할수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화두 타파한 사람은 화두를 건넬때 '조주가 어떻고 혜능이 시심마를 한다' 는둥

말꼬리 안가르치고, 의정이 안들때 입염불 하라고 안가르칩니다. 화두타파가 의심됩니다.

 

제목 [황금빛 봉황이] 불교 tv 에서 보건데 제눈에 비친분들 중에 안국선원 수불수님은

확실히 화두타파 하신 분 입니다. 그외 '간절히' 만 말하다 내려가시는 분 어둡습니다.

의정을 일으켜 줌이 서툴러서 늦고 빠름은 있을 지언정 가르키는 손가락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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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반복하여 주지 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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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입색성향미촉법(不受汚染)를 깨친 수다원이 아라한을 능멸하면 안됩니다. 그러다 보니

황벽은 전심요법에서 無心道人을 말하고, 다른 조사들은 無心을 道라 말하지 마라 無心도

하나의 무거운 關門이다. 하며 서로 다투지만, 조과선사가 착한 것을 말하지 못하듯 모두

횡설수설만 할뿐 無心 後의 다음 말은 못합니다. 제가 말하지요 無心 後에 隨緣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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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들이 깨친 첫소식 無名無相絶一切의 無心 이던, 無心을 한단계 더 뛰어 넘은 방거사던 

아직 受想行識 안에서 맴도는 벌과 같습니다. 이러한 견처로는 經展과 하나도 안맞습니다.

자신이 깨친 것과 經展이 맞지 않으니, 經展은 창고에 집어 넣고 조사어록을 뒤지게 됩니다.

 

보십시요! 이글을 보시는 모든 분들은 이해가 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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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먼저 소의경전이라는 금강경에도 안맞고, 화엄경은 물론이요, 三法印에도 안맞고,

깨침의 見處를 가장 자세히 설해놓은 無色界 四天,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에도 안맞고, 깨치는 순서를 설해 놓은 원각경에도 안맞고, 범망경에서

깨친 후 一聲 '부모에 효순하라, 일체처를 따르라" 와는 십만팔천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自歸依 法歸依는 글자로만 전해 졌으니...

 

부처의 깨달음은 中道의 發見으로 中道란 "나 라는 몸뚱이가 이와같이 생겨났구나" 를

發見하는 것입니다. "내몸이 왜 생겨났는가?, 왜 범천의 그물에 걸렸는가?" 를 발견하고

다시는 범천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지요. 범천은 본래 없습니다. 자신이 만든 줄

모르기에 범천을 핑게 대는겁니다.  '無作 無生' 짓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살아있는 如來의 肉身도 먹고 마시고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치를 깨친 여래는 肉身으로 존재하는 동안 少欲知足으로 入滅時까지 거스르지 않고

받아 들이기 때문에 다시는 어떠한 몸을 받지 않는다 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확한

因果法으로 이렇게 行(涅槃)하면,  因도, 緣도, 果도 없는 本來 無法이 됩니다.

 

어느 가난한 사람에게 말하길 "나는 절대 가난을 몰랐고 때로는 큰 돈을 만졌어도

먹는것, 입는 것등, 내 몸뚱이를 위하는데 사용한 것은 당신의 절반도 안될겁니다.



因果法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깨달음도 因果法의 作用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뜻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판치생모'라 했다 합니다.

조주는 '달마의 앞니에 털이 났다' 그런데 달마의 앞니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뭣꼬? 하면 야반삼경의 나무 닭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즉 텅빈 방에 들어간듯 한 무심처를 발견합니다.

공무변처천입니다. 허공을 생각으로 알수 있느냐 불가사량입니다 / 금강경

 

한마디로 달마가 말한 不識이고  혜월스님이 말한 "나도 너도 모릅니다"

板齒生毛 모릅니다. 고로 화두 타파한 지혜로 요리 조리 꿰맞추며 義理禪을

시작합니다. 왜 판자때기 같은 앞이빨에 털이 날까?  얼마 안가 알아챕니다.

'털난 원숭이가 나무 위를 오른다' 달마의 전법게송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왜 義理禪인가?!

진정으로 板齒生毛를 보았다면 달마가 굴속에서 9년 면벽하지 않고 포대화상

처럼 운수행각을 했을 것이고, 앞에서 說한 대로 손가락 들고 다녀야 합니다.

조주가 보았다면 이미 죽은 고양이는 소용없고 남전을 살려야 합니다. 여기서

남전을 살리면 고양이도 살아납니다. 역시 앞에서 설한대로 지은자가 받으면

때린 자도, 죽인 자도 果가 없습니다.  춘다에 죄가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또 성ㅇ스님이 보았다면 백천을 죽여도 因果가 없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용ㅇ

스님이 보았다면 유리독이니 關이지 하지 않습니다. 모두 문자풀이를 했기 때문

에 조과도 모르고, 달마도 모릅니다.

 

불교는 아주 지극한 實存철학입니다. 어쩔수 없이 철학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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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보살이 자연의 실존현상을 보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중국을 거치면서

老子와 장자의 영향을 받아서 玄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玄 글자 그대로 가물

가물하게 변질되어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혼자 아는 지식이 되어버렸지요.

 

세존께서는 듣는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던지 듣고 이해하고 조복하고 귀의

하는데 조사들은 '내가 맞다' 아니다 '틀렸다' 서로 다투며 말로 키재기 합니다. 

도덕경에 가물한 곳, 谷神(계곡의 신)을 말했더니 김용옥이가 여인의 자궁이라

했지요. 곡신 이전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혀야지...도덕경도 모두 헛소리 입니다.

 

老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無爲自然이란 누가 행하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는 것

을 깨친 緣覺입니다. 역시 일화개오엽 결과자연성과 같은 뜻으로, 법화삼매를

自然에서 깨친 獨覺과 같으나 自然이 존재하는 실제현상의 中道는 아닙니다.

 

동녁 海東,

仙人의 자손들이 어찌 비게덩어리 같은 땅에서 자라난 중국인들과 비교하리오

 

판치생모란 저 넓은 大地 위에 온갖 초목들이 돗아 나는 자연현상을 말합니다.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한몸뚱이에 다섯 잎(안 이 비 설 신)이 피어나면 結果는

自動이다.  義理禪 아니면 풀수 없습니다. 여기서 義理禪이 아니라고 우겨 본들

다음 行이 틀려버렸기 때문에 들키는 것입니다. 

 

이 곳은 法華三昧를 체득한 보살지입니다. 상불경보살처럼 사람은 물론 온갖

초목들이 모두 부처입니다. 내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몸을 관해도 내 것이

아니요, 밖의 경계를 살펴봐도 내것이 아닌 각자가 만든 천백억 화신불입니다.

함부로 먹고 해칠 대상이 없습니다. 세존께서 길을 가시다가 제자에게 法眼이 

있는지를 떠봅니다. 이곳에 법당을 세우면 참 좋겠다. 

제자가 "길가에 풀한포기 옮겨 놓고 법당을 건립했습니다."

 

산부처가 무정물에 금칠해 놓고 그앞에 엎드려 노예가 되어 버렸으니 그곳에

부처는 없고 풀지못한 受想行識이 덕지 덕지 붇어서 귀신의 집이 되었습니다.

 

조사들이 왜 格外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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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心으로 먹으면 괜찮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自然이 無心으로 윤회합니다. 

소 돼지 모든 중생이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습니다. 자연의 근본현상입니다.

고로 無心으로 行하지 말고 항상 '깨어 다녀라' 明行입니다. 無心을 터득하고

格外를 말합니다.  格外란 파괴를 말합니다. 格은 질서요 格外는 파괴입니다.

 

無心이란 김유신의 말이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 가는 것처럼 습관이 반복되어

결국에는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가고 있는 현상입니다. 또 수십년 살던집에서

이사를 했는데 퇴근길에 몸뚱이가 저절로 옛집을 향해가는 현상과 같습니다.

또 佛畵 그리는 스님처럼 제자가 보따리 갖다줘도 불화 그릴 생각에 누가 줬

는지 모르는 멍청한 상태로 행동하는 것을 無心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중국조사들이 無心道人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無心을 道라 말하는 사람들은 마치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것과 같고, 귀를 막고 소리치며 '조용하다고' 하는 사람과 같다고 하는 겁니다.

 

中道란

格에도 걸리지 말고 格外에도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조사들은 모두 格外에

걸려있습니다. 쉽게 설하지요. 세상에 존재는 모든 것들은 生滅의 반복작용

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生과 滅에 걸리지 않아야 涅槃이 됩니다.

格外란 空道理(변화의 이치)를 말합니다. 그래서 空과 함께 윤회합니다.

 

다시

우주는 질서와 혼돈, 영어로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영속작용으로 존재합니다.

格外를 말하는 조사들은 혼돈의 무질서, 즉 죄의식 없는 무개념을 주장하지요.

 

자신의 배속에서 벌어지는 서로 엉크러졌어도 혼동하지 않고 뚜렸하게 드러

나는 잉불잡난격별성을 모르고 혼동의 파괴만 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품을

잃지 않고 깨친다 는 말의 뜻을 오해하고 자기 습관(버르장 머리) 안고치고도

깨친다 고 착각해서 하던 짓거리 그대로 하면서 무애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板齒生毛는 無色界 四天 中에서 세번째 단계 無所有處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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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모르고 진공묘유를 운운합니다. 眞空妙有는 如來地의 붓다 입니다.

마지막

비상비비상처천은 법성게의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의 실제상황입니다.

 

상수멸에 떨어진 無心으로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세존께서 피골이 상접하도록

찾았던 곳입니다. 그래서 화두타파 時의 禪定으로 肉身을 관찰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無心도 假無心이 있고 참무심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뒷사람들을 현혹

하여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짓이지요. 왜 그런 말을 하게 돼었는가?  저는 다 봅니다.

화두타파후 아무 것도 모르고 없으니까 수상멸처로 들어가서 깡그리 絶滅된 곳에서

안주하다 나와서 상수멸을 주장합니다. 장좌불와로 허공을 사량분별하러 다닌겁니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죽은 놈이 또 죽어야 한다. 앞은 가무심이고, 뒤가 참무심이다.

라는 훼괴한 논리를 펴게됩니다.

 

찾아와 묻기를 "개에게 佛性이 있습니까?"  "없다"  왜 없을까? 로 들어가면 수삼년

에 발견하면 기특한 일이요, 그 나마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항상 삼세근 삼세근 

하고 입염불 하고 앉아있으면 억겁을 앉아도 안됩니다. 끊어져야 산놈이 죽은놈을

찾을 것 아닌가?  滅해야 다음에 일어나는 生으로 滅 處를 찾을 것 아닌가?.

 

입으로는 話頭를 말했지만 習禪 造作禪 義理禪 한 것이 분명합니다. 현재 선방에서

모두 조작선 내지 習禪하고 있습니다. 수상멸처가 끊어지면 드디어 팔식이라는 肉身

의 본능식이 드러납니다. 화두깨친 순일한 마음으로 肉身을 살펴보니

 

無意識으로 짝을 찾아 번식하는 有情, 無意識으로 먹고자 하는 有情들의 존재의 욕구

가 보입니다. 이러한 無意識은 어데서 왔는가?  모두 내가 만든 習慣(業)이로구나. 를 

깨치는 것으로 '그렇게 왔구나' 가 如來입니다.

발견했으면 여기서 벗어나라!  無住無念으로 行하지 말고 항상 깨어서 살피고 行하라.

 

조사들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것과 어쩌면 이렇게 반대로들 행하는지...기가막힙니다.

내가 멸한 후에 삿된 무리들이 도처에서 깨쳤다고 날뛸 것이다!.  佛眼은 정확합니다.

 

생사열반 상공화 살아있는 생명(有情)들은 生老病死 生老病死의 반복이 涅槃입니다.

미진수 세포들이 찰라생 찰라멸 하면서 색신이 변하고 있습니다. 작세는 세포에서

조금 크면 육신, 조금 더 크면 지구, 태양계, 우주, 삼천대천.. 모든 것이 


生(산놈)이,  死(죽은 놈)을 찾는겁니다. 처음과 똑같습니다.

 

순일한 마음이 멸정처(무명무상절일체)입니다.  멸정처(순일한 마음)로 무엇을 찾는가?

老와 病을 찾는 것입니다. 老와 病은 변화(無常)의 흐름입니다.  육신의 변화를 觀하라

육신은 사대로 되어있고, 四大는 계속 음식을 통하여 내몸으로 들어가고 있다. 살펴라!

 

결국 무명무상절일체로 진성심심극미묘의 불수자성 수연성(몸의 변화)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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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일여 숙면일여 몽중일여를 타파합니다. 이것은 習禪이지 화두의정이 아닙니다.

설합니다. '삼세근 삼세근' 또는 '이뭣꼬 이뭤꼬'  끊어지지 않게 계속 입염불 하듯

반복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오나 가나 삼세근이 떠나지 않습니다. 눈을 감아도

삼세근, 잠을 자면 꿈에도 삼세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고시 공부나 일반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法展을 들고 종이가 달토록 뒤적인

사람은 눈을 감아도 몇폐이지 하면 민법 형법 몇조의 글자들이 환하게 보여집니다.

잠을 자도 꿈속에서 책한권이 다 보여 집니다. 저 역시 이러한 과정 겪어 봤습니다.

이런 것은 반복된 습관(習禪)에 의하여 나타난 수상행식(마음)의 조화작용입니다. 

고로 제가 "문밖의 똥파리가 창호지 뚫으려고 애쓰는 형국이다" 고 설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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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분도 화두타파한 것은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끊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순간 자신도 모르게 의식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 나올때 소리에 부디쳐

펏득 정신이 듭니다.  "악!" 세상이 달리 느껴집니다. 다만 어떻게 의정에 들어갔는지

를 모르기에 또 다시 후학들에게 입염불 하라고 우격다짐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소가

뒷걸음질 하다가 쥐잡은 형국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인과도 모르는 어리석음 이지요.

 

진정한 의정이란 몸(八識)으로 들어갔기에 본인이 의정에 든줄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드려도 보는 눈이 없으면 주고 받는 때를 볼줄 몰라 안됩니다.

조주가 손님을 어쩐다고..  강사가 어찌하다 화두타파한 지해종사의 참모습입니다.  

 

저에게 다가온 사람이 열중 여덟 모두 공무변처를 터득했지만 너무 쉽게 체득해서

오히려 자신들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그분들 스스로 말합니다.

 

백마디 거량보다 이보다 확실한 것이 어데 있습니까?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도 아닌데 왜 걱정이 안되는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不受汚染

불교는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마음에 걸림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지 문자로

다투며 키재는 것이 아닙니다.  

 

면벽 9년에 겨우 혜가 하나 "마음이 편합니다" 열중 여덟이라면 이해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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