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은 부처님의 마음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三處傳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 곳이란 세존께서 다자탑에서 설법하실 때 앉아 계시던 자리의 절반을 나누어 가섭에게 함께 앉게 하심이 첫째요.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실 때 가섭이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미소를 지어 응답했음이 둘째요.
세존께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돌아가실 때 임종의 시기를 놓쳐서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관속의 두 발을 밖으로 내 보이심이 셋째이다.
이것이 가섭존자가 세존으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따로 마음으로 전해 받은 선의 등불이다.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말씀하신 것이란 45년 동안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 다섯 가지 가르침(五敎)인데 첫째는 인천교(人天敎)
둘째는 소승교(小乘敎)
셋째는 대승교(大乘敎)
넷째는 돈교(頓敎)
다섯째는 원교(圓敎)이다.
이른바 아난다존자가 교학의 바다를 흐르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선문(禪門)과 교문(敎門)의 근원은 석가 세존이시고 선문과 교문의 갈래는 가섭존자와 아난다존자이다.
말이 없는 무언(無言)으로써 말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수행법이 선문(禪門)이고 대장경의 말로써 말없는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공부 방법이 교문(敎門)이다.
또한 마음으로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선법(禪法)이요 말로써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교법(敎法).
진리의 법은 한 맛이나 견해나 수행 방법을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 백봉 김기추거사>
【문】무슨 이유로서 교계(敎界)의 일부(一部)에서는 교문관(敎門關)이 선문관(禪門關)을 비방하고 선문관(禪門關)이 교문관(敎門關)을 비웃습니까?
【답】참으로 알쏭달쏭한 일이다. 선문관(禪門關)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상아탑(象牙塔)이라면 교문관(敎門關)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금자탑(金子塔)이라겠는데, 본래로 마음이 없으면 말을 굴리지 못하는 것이요 말이 없으면 마음의 씀이를 나투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부처님의 마음이신 상아탑(象牙塔)과 부처님의 말씀이신 금자탑(金子塔)이 둘이겠는가. 이러므로 상대(相對)가 끊어진 자리에서 상대(相對)를 세워놓고 서로가 비방하고 비웃는 짓은 자기 모순을 짊어지고 비방함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고 비웃음이니, 격외도리(格外道理)인 어디에 자기 모순이 있겠으며 팔만장경(八萬藏經)의 어디에 자기 고집이 있겠는가. 다 자기 나름대로의 문자(文字)풀이와 자기 깜냥대로의 지견(知見)놀음이 엇갈림으로 말미암은 의사(意思)의 반목(反目)에서 오는 짓거리니, 이러고서야 어찌 부처님의 참 말씀에서 참 마음인들 받들겠는가.
교문관(敎門關)에는 오도(悟道)에 바로 드는 비결(秘訣)이 있고 선문관(禪門關)에는 자성(自性)을 일찍 깨치는 방도(方道)가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밝힘으로써 도리를 깨치는 비결(秘訣)과 영지(靈知)를 닦음으로써 번뇌를 끊는 방도(方道)가 본래로 둘이 아닌 하나이건마는 이 뜻을 모르고 한쪽에만 치우친 비방이요 비웃음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을 짊어진 비방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은 비웃음이라는 말이다.
【문】만약 학인이 양쪽 문관(門關)중에서 택한다면 어느 쪽을 가짐이 좋습니까?
【답】교문관(敎門關)에는 선지(禪旨)가 잠겨 있으니 문자(文字)를 통하여 격외선(格外禪)을 닦음이나 만약 문자(文字) 위의 온갖 해의(解義)만을 끌어잡고 부처를 색신(色身) 밖에서 구하려는 행위라면 곧 외도(外道)인 짓거리리라, 애당초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들어 해탈문(解脫門)을 향하는 방향(方向)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하고, 선문관(禪門關)에는 교리(敎理)가 잠겨 있으니 의단(疑團)을 통하여 심성(心性)을 밝힘이나 만약 의단(疑團) 밑에 온갖 분별(分別)의 합리화(合理化)만을 지어가며 성품을 망심(妄心) 밖에서 찾으려는 행위라면 곧 사도(邪道)인 짓거리라, 애당초 교문관(敎門關)으로 뛰어들어 여래문(如來門)의 대의(大義)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러므로 숙연(宿緣)을 따라 성실(誠實)을 다할지나 한낱 고집쟁이라면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드는 것이 첩경(捷徑)이리라.
* 교문관(敎門關)에는 오도(悟道)에 바로 드는 비결(秘訣)이 있고 선문관(禪門關)에는 자성(自性)을 일찍 깨치는 방도(方道)가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하자면 정견(正見)을 밝힘으로써 도리를 깨치는 비결(秘訣)과 영지(靈知)를 닦음으로써 번뇌를 끊는 방도(方道)가 본래로 둘이 아닌 하나이건마는 이 뜻을 모르고 한쪽에만 치우친 비방이요 비웃음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을 짊어진 비방이요 자기 고집을 걷어잡은 비웃음이라는 말이다.
【문】만약 학인이 양쪽 문관(門關)중에서 택한다면 어느 쪽을 가짐이 좋습니까?
【답】교문관(敎門關)에는 선지(禪旨)가 잠겨 있으니 문자(文字)를 통하여 격외선(格外禪)을 닦음이나 만약 문자(文字) 위의 온갖 해의(解義)만을 끌어잡고 부처를 색신(色身) 밖에서 구하려는 행위라면 곧 외도(外道)인 짓거리리라, 애당초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들어 해탈문(解脫門)을 향하는 방향(方向)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하고, 선문관(禪門關)에는 교리(敎理)가 잠겨 있으니 의단(疑團)을 통하여 심성(心性)을 밝힘이나 만약 의단(疑團) 밑에 온갖 분별(分別)의 합리화(合理化)만을 지어가며 성품을 망심(妄心) 밖에서 찾으려는 행위라면 곧 사도(邪道)인 짓거리라, 애당초 교문관(敎門關)으로 뛰어들어 여래문(如來門)의 대의(大義)만이라도 아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이러므로 숙연(宿緣)을 따라 성실(誠實)을 다할지나 한낱 고집쟁이라면 선문관(禪門關)으로 뛰어드는 것이 첩경(捷徑)이리라.
【문】견성(見性)이란 지극히 어려운 것인데 금생(今生)에 복을 쌓았다가 내세(來世)에 닦아 작불(作佛)함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답】도대체 너의 성품을 네가 보는데 지극히 어렵다는 그 사고방식(思考方式)부터가 틀려먹었다. 그 따위 게으름과 편안함만을 좋아하는 망상(妄想)덩이로 몸을 바꿀 제 무슨 탈을 뒤집어쓰지? 사람의 몸 받기란 백천만겁(百千萬劫)에 어렵느니라 시는 부처님의 말씀은 잊었나? 이따위 말은 함부로 입밖에 내지 말지니, 왜냐면 부처씨를 말리기 때문이다. 작불(作佛)을 한다는 마음가짐 새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여윈 법신분(法身分)으로서의 결정이겠는데 삼세(三世)는 어디에 따로 있어서 현재(現在)와 내세(來世)를 구분하겠는가. 모름지기 상아탑(象牙塔)도 금자탑(金子塔)도 쓸어내고 무형탑(無形塔)에 오르라.
【문】견성(見性)을 하면 당장 부처를 이루어서 자재신통(自在神通)을 부리게 됩니까?
【답】어머니의 태(胎)에서 떨어진 핏덩이는 사람이 아니냐? 그 핏덩이가 자라면서 사람의 구실을 하듯이 성품을 보고 닦아 가면 다겁(多劫)을로 쌓였던 습기가 녹아남에 따라 온갖 신통(神通)도 굴리게 마련인 줄로 알라. 그러나 여기에서 시비(是非)만을 좋아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교리(敎理)를 모르는 선문관(禪門關)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기요, 선지(禪旨)를 모르는 교문관(敎門關)은 떡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格)이 라겠으니, 어찌 본래의 면목(面目)을 되찾아서 사람의 구실을 하며 신통(神通)인들 자재로이 굴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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