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간화선) 집중수행

수행단계 2

통융 2017. 8. 12. 21:09

수행 단계   2

깨달음의 세계/구차제정

크게 소승(小乘)의 선과 대승(大乘)의 선으로 나눌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소승불교의 4선, 4무색정(四無色定), 멸진(滅盡)정이 9차제정(九次第定)이다.
먼저 '4선'은 8정도(八正道) 중 정정(正定)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의의를 지니는데, 곧 석가모니 생존시 사문(沙門)이라 불린 자유사상가들이 실천하고 있던 선정이 그 원형으로, 이것을 불교의 관념적 세계관인 삼계(三界)에 적용시켜 수정하여 편성한 것이 4선이며, 이는 색계(色界)에 해당된다.

제1선(初禪)은 온갖 욕구를 버리고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기쁨과 안락을 느끼지만, 분별과 사려가 남은 상태이다.
제2선(二禪)은 분별과 사려가 가라앉고 마음이 통일되어 기쁨과 안락을 느끼는 상태이며,
제3선(三禪)은 기쁨과 안락도 버려서 마음이 평정하게 되고 정념(正念)과 정지(正知)가 작용하여 몸에 안락을 받은 상태이다.
제4선(四禪)은 몸의 안락도 없게 되고 고락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에 의해 염(念)이 청정하게 된 상태이며, 이 단계에 이르러 마음의 안정과 지(知)의 활동이 동등하게 되어 해탈을 얻는다.

'4무색정'은 삼계 중의 무색계(無色界:육체가 없는 세계)에서의 선정이다.
제1의 공무변처(空無邊處)는 허공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며,
제2의 식무변처(識無邊處)는 마음의 작용이 허공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고 관찰한다.
제3의 무소유처(無所有處)는 아무것도 대상이 없다고 관찰하며,
제4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상념(想念)도 없고 무상념(無想念)도 없다고 관찰하는 수행이다.
'9차제정'은 당초에 서로 관계없이 설해졌던 4선·4무색정(八等至)에 멸진정(滅盡定)을 더한 것이다. 멸진정이란 마음의 작용도 완전히 없게 된 삼매를 말한다.

한편 소승불교에서는 선의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하는데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부정관(不淨觀)·자비관(慈悲觀)·인연관(因緣觀)·계분별관(界分別觀)·수식관(數息觀)이라는
5정심(五停心)이다.
부정관은 외관의 부정한 양상을 관찰하여 탐하는 마음을 바로잡는 관법이고,
자비관은 일체중생을 관찰하여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관법이며,
인연관은 온갖 사물의 현상이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도리를 관찰하여 어리석은 마음을 바로잡는 관법이다.
계분별관은 5온·18계 등을 관찰하여 사물에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바로잡는 관법이며, 수식관은 호흡을 헤아려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관법이다.
한편 남방 상좌부에서는 10변처(十遍處)·10부정관·10수념·4범주·4무색정·식염상·사계차별관이라는 40업처(四十業處)를 제시한다. 10변처로는 색깔이나 형태를 지닌 10가지 구체적인 관찰 대상으로부터 점차 일반적인 개념을 마음에 떠올려 관찰하도록 노력하고, 10부정관은 묘지 등에 있는 시체가 변모하는 모습을 10단계로 나누어 관찰하는 것이다.

* 대승불교에서의 선정은 6바라밀 가운데 제5의 선정바라밀에서 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칙적으로 대승의 선은 소승불교와 같은 번쇄한 체계화를 피하고, 단계적인 실천을 내적으로 통일하는 근거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선은 번뇌를 끊지 않고서 깨달음을 얻는 근거이며, 어디에도 머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낳게 할 수 있는 원리가 된다.
그러나 선의 종류로는 엄청난 수에 이르는 대승경전이 제각기 선정에 대해 설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은 〈능가경 楞伽經〉에서 설하는 다음과 같은 '4선'이다.
즉,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소승불교도 및 외도의 선정)·
관찰의선(觀察義禪:의미를 관찰하는 선정으로서 공관의 선정)·
반연여선(攀緣如禪:진리에 안주하여 망상을 낳지 않는 선정)·
여래선(如來禪:모든 삼매를 포괄하는 최고의 선정)이다.


구차제정(九次第定)은 사선정(四禪定)과 사무색정(四無色定), 멸진정(滅盡定)을 합한 아홉 단계의 선정을 말하며 진리를 인식하는 단계적 성찰을 의미한다. 앞에 설명한 오정심관(五停心觀)과 사념처(四念處)가 선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라면,
구차제정은 선의 방법론이자 동시에 그 결과로 얻어지는 선정(禪定)의 단계이기도 하다.
 
구차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세계관인 삼계(三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삼계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이다. 먼저 욕계는 욕구를 본질로 하는 존재의 세계로서 가장 밑으로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색계는 욕계 위에 있으며 색계사선(色界四禪:初禪.二禪.三禪.四禪)의 선정의 심리상태에 있는 중생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色)은 있어도 감관의 욕망을 떠난 청정(淸淨)의 세계이다. 그 다음은 무색계로 물질적인 것도 없어진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로 사무색정(四無色定:空無邊處定.識無邊處定.無所有處定.非想非非想處定)을 닦아 무색계 4선의 심리상태를 가진 중생들이 머무는 곳으로, 욕계와 색계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이므로 공간(空間)에 의지하지만 무색계는 물질을 떠난 세계이므로 공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선정(四禪定)은 색계의 선정의 단계로 색계의 18천상에 해당되는 선정의 경지에 따라 네 단계로 분류한 것으로 사정려(四靜慮)라고도 한다.
 
사선정 사무색정 멸진정 합쳐
아홉 단계 선정…‘선의 방법론’
 
초선(初禪)은 욕계의 본질이 욕탐(欲貪)임을 자각하여 욕탐에서 벗어남으로써 생긴 희락(喜樂)에 의식이 머물고 있지만, 일상적인 사유 활동은 계속되는 상태이다.
 
이선(二禪)은 오관에 의한 지각과 사유를 멈추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함으로써 새로운 희락을 느끼게 되며 그 희락에 의식이 머물게 된다. 이때는 소유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한곳에 머무르는 경계(心一境性)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초선과는 다르게 일상적인 사유 활동은 중지된다.
 
삼선(三禪)은 자신의 의식이 희락에 머무는 이유가 자신이 희락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을 자각하여 희락에 대한 욕구를 버림으로써 우리의 의식이 욕탐에서 완전히 벗어나 희락에 대해 차별상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평정한 마음으로 행복감에 머물며 지혜가 발현된다.
 
사선(四禪)은 행복과 괴로움의 행(行)이 없어지고 이전에 있었던 기쁨과 근심도 제거되어 괴로움도 그치고 행복감도 그친 평정심에 의해 염(念)이 청정해지는 단계를 말한다.
 
사선에서는 모든 행(行)이 점차적으로 그치게 되는데, 초선에서는 언어(口行)가 멈추게 되고 이선에서는 일상적인 사유활동, 심사(尋伺), 각관(覺觀)이 멈추게 되며, 삼선에서는 즐거운 마음(喜心)이 멈추게 되며, 사선에서는 호흡마저 멈추게 된다고 한다.

깨달음의 세계/구차제정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관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자료는 방대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중점으로 설명했습니다.
<구차제정>
각 수행 단계에 따른 아홉 가지 선정의 종류. 4선정(禪定), 4무색정(無色定), 멸수상정(滅受想定)의 9가지 선정(禪定)을 말한다. 중아함, 분별 관법경과 맛지마 니까야(138)의 경전.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류하여 설명하리니, 그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 기억하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은 것을 탐구해야 한다. 밖으로 식이 산란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게 하며, 안으로 불안한 집착이 없고,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밖으로 식이 산란하지 않고 안정될 때, 내부에 불안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없으며, 미래에 생 노사의 괴로움이 모이거나 생기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다,... 이에 비구들이 존자 대가전연의 처소에 가서 대가전연에게 말했다. " "원컨대 존자 대가전연 께서는 자비로 어여삐 여겨 그 뜻을 자세하게 일러주소서" 이에 대 가전연께서 설법하셨다. "벗들이여, 어떤 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고, 흩어진다고 하는 것일까? 벗들이여. 비구가 눈으로 색을 볼 때, 색의 겉모습을 쫓는 식이 있으면 ,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묶이고, 속박된다. 이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고 흩어진다고 말한다.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법을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벗들이여, 어떤 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벗들이여, 비구가 눈으로 색을 볼 때 색의 겉모습을 쫓는 식이 없으면,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고, 색의 겉모습의 즐거움에 묶이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다. 이것을 밖으로 식이 산란해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법을 분별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벗들이여, 어떤 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하는 것일까? 벗들이여, 욕탐을 멀리하고 불선법을 멀리하면, 추론이 있고 사찰이 있는, 욕탐과 불선법에서 분리됨으로써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된다. 거기에 욕탐에서 분리됨으로써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쫓는 식이 있으면, 분리됨으로써 생긴 기쁨과 즐거움에 집착하고,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기쁨과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벗들이여, 나아가서 비구가 충분히 탐구하여 마음이 적정해지면, 안으로 조용히 가라앉아 마음이 하나로 집중된 ,추론이 없고 사찰이 없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쫓는 식이 있으면,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집착하고, 그 기쁨과 즐거움에 묶이고,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벗들이여, 나아가서 비구는 기쁨과 탐욕에서 벗어난 무관심에 머물면서, 즐거움을 마음 모아 사려 깊게 주의함으로써, 그것이 "펑온한 무관심에 주의 깊은 사람은 즐겁게 지낸다."라고 성자가 이야기한 바로 그 즐거움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험한다. 그는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 된다. 거기에서 무관심을 쫓는 식이 있으면, 무관심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무관심의 즐거움에 묶이고, 무관심의 즐거움의 속박에 속박된다. 이것을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멋들이여, 나아가서 비구가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을 버리고, 전에 있던 정신적인 안정과 근심을 소멸하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한 무관심에 집중된 청정한 마음인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하여 머물게된다. 거기에서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마음을 쫓는 식이 있으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마음에 집착하고, 묶이고 속박된다. 이것을 안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물질에 대한 생각을 초월하면, 감관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 소멸하여. 서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끝없는 공간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것을 무량공처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무량공처를 초월하면, 무량한 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무량식처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무량식처를 초월하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벗들이여 비구가 일체의 무소유처를 초월하면, 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것을 비유상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닌다고 말한다, 벗들이여 어떤 것이 집착이 없고, 걱정이 없는 것일까? 벗들이여.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육체를 '자아' 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아' 속에 육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육체 속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때 육체는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육체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육체를 쫓는 식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때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육체를 쫓는 걱정이 생기지 않고, 법의 集이 없으므로, 마음이 [그 법을] 붙잡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붙잡지 않으므로 두려움도 없고, 고뇌도 없으며, 무관심(사)에 집착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벗들이여, 이것을 집착이 없고 걱정이 없다고 한다. [분별 관 법 경]
 

 
 중아함<분별관법경>과<najjhima-Nikaya,138,> 참고하여 충실히 번역하고자 합니다.--이중표
불교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산란한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인데 이것을'samatha'라고하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지'라 합니다. 둘째는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법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것을 'vipassana' 라 하고 불교의 선정은 이 둘을 함께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다른 이름으로 '지관'이라고 부릅니다. '
지'를 통해 안정된 것을'정'이라하고 '관'을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것을 '혜'라고 합니다..
보조국사가 주장한 '정혜쌍수"는 바로'지관'을 바로 닥자는 말입니다.
구차제정은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한 '지관' 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십이연기와 구차제정)를 묶어 설명합니다. 그것은 십이연기가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지에서 나왔기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이연기를 설명하는일도 어렵습니다. 간단히 십이연기가 이렇게 구차제정의 각지에서 나왔다는 개념만 파악하는데 그치도록 합니다. 그 외 오온과 삼행도 간단히 피력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사유과정에는 몇 차례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지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사선을 통해 한 차례의 깨달음을 얻고 비유상비무처를 통한 깨달음이며 마지막 멸진정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십이연기                                                         중생의 세계
무명(無明)을 원인으로 행(行)이 일어나고                              욕계,색계, 무색계행(行)을 원인으로 식(識)이 일어나고식(識)을 원인으로 명색(名色)이 일어나고명색(名色)을 원인으로 6입(六入)이 일어나고육입(六入)을 원인으로 촉(觸)이 일어나고촉(觸)을 원인으로 수(受)가 일어나고수(受)를 원인으로 갈애(渴愛)가 일어나고갈애(渴愛)를 원인으로 취(取)가 일어나고취(取)를 원인으로 유(有)가 일어나고유(有)를 원인으로 생(生)이 일어나고생(生)을 원인으로 노사(老死)가 일어납니다.
 
욕계구차제정은  욕계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중생의 생각이 욕에 머물고 있는 세계입니다.
즉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을 존재로 인식하면서 갖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인간이 지각된 내용에 대하여 책상, 의자라고 분별하여 인식합니다.
-----욕계 세계의 중생은 같은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인식합니다. 영화 부시맨에서 부시맨은 콜라병을 절긋공이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감자를 읏깨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긋공이로 인식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콜라를 넣어두려는 욕구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콜라병으로 인식됩니다. 이와 같이 욕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중생의 욕구에 의해 존재화 됩니다. 욕구의 중생들은 외부의 사물이 자신의 욕구에 의해 존재화 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물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외부의 존재로 향하고 있습니다. 외부 가운데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나뿐 지를 분별하여 좋은 것을 소유하면 즐거워하고 나쁜 것을 만나면 괴로워합니다.  " 우리의 마음이 외부의 사물을 쫒아 다니면서 그것에 묶여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하여는 식이 밖으로 산란해지지 않게 하고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겠다."
-----십이연기의 有(유) -- (취(取)에 의해 취착된 것을 존재로 대상화)
 
 이렇게 마음이 외부로 흩어지지 않게 하여 마음을 안으로 묶어 둠으로 써 마음의 안정을 얻은 세계가  다음에 말하는 색계의 세계입니다.
 
 
초선
욕계를 자각하고 욕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수행하는 선정이 초선입니다.
초선은 욕계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유가 현실을 토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초선을 바르게 이행하면 언어가 적멸한다고 합니다.
이 경지에서 부처님은 "언어의 본질은 욕구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셨을까요? 부처님이 초선의 경지를 욕탐을 떠난 경지라 하고서 그 경지에서는 언어가 적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본질이 욕구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모든 언어는 욕구가 있을때 우리가 구성한 관념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생각입니다.
언어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욕유, 즉 우리의 욕구가 있을 때 그 욕구에 상응하는 것을 만들거나 발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우리의 현실세계, 즉 언어로 존재를 인식하는 세계를 욕계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욕계의 모든 존재는 욕유가 있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이며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유가 초선입니다.
초선에서는 욕유의 본질이 추구됩니다. 왜 욕유가 있게 될까요? 그것은 취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이연기의 取(취)--(애(愛)를 갈망하여 취함)에 해당합니다.

마음이  외부의 사물에 속박되는 원인이 욕탐에 있는 줄 알고 욕탐을 멀리하여 마음이 욕탐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수행입니다.
이것은 외부의 사물에 대하여 나의 마음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은 어떤 것이고 무엇이 나의 마음을 속박하는 것인가 사유하고 주의 깊게 살피는 것입니다.
중생이 인식한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는 선정단계 입니다.
책상, 의자와 같은 존재의 본질을 추구한다. 우리는 흔히 이것들의 본질이 나무나 강철로 되어있다 생각합니다. 책상은 나무로 된 것이든 강철로 된 것이든 책을 놓고 보기 알맞은 것이면 우리는 책상이라고 인식합니다. 우리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책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의 본질은 재료가 아니라 우리의 욕구, 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선에서는 인식되는 존재의 본질이 욕구임이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초선을 멸하면 욕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초선에서는 외부의 사물에 대하여 욕탐을 없애기 때문에 외부의 대상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인식하지 않고 동일하게 인식합니다.
즉 사물을 인식하되 그것의 겉모습을 욕구로 취하여 책상이나 의자로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은 물질[색]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아주 자세히 초선을 경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선
욕구(초선)를 벗어나 오는 희락에 생각이 머물고 있는 상태이다.
무념(無念)무관(無觀)이란 말은 이 경지에 해당 합니다. 초선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상태입니다. ---십이연기의 愛(애)--(갈구, 목마름-즐거운 것은 갖고 나쁜 것은 피합니다.)에 해당합니다.

삼선초선, 이선으로 생긴 희락심, 괴롭다는 느낌, 즐겁다는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의 3수를 멸하는 경지입니다. 생각이 이런 희락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사유합니다.  그리고 이런 희락은 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내부에서 발생함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그 희락을 바라보므로 생김을 알고 희락의 욕구를 버리는 상태입니다.
이 경지에서 욕탐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납니다. ------십이연기의 受(수)--(촉(觸)에서 생긴 느낌)에 해당한다.
---탐욕을 벗어나 무관심에 머물면서 평정한 무관심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즐기는 경지입니다.
 
사선(제일처)일체의 욕탐, 감정에 생각이 머물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경지에서는 대상에 대한 욕탐, 감정을 멸하여 대상이 순수하게 인식되는 세계입니다 ------십이연기의 觸(촉)--(육입(六入)에서 생긴 대상에 대한..)에 해당한다.
------전에 있던 정신적 안정과 근심을 소멸하여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청정한 무관심에 집중된 삼매입니다.공처 
공처는 물질이 무상하고 물질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경지입니다.
바꿔 말하면 색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공처에 도달하면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끝없는 공간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식이 공간을 대상으로 사유합니다. 공간에 대한 인식은 물질이 존재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색은 공간과 함께 있습니다. 공간이 없다면 색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간은 색계의 바탕이 됩니다. 공간이 무한한 존재다. 라는 생각을 멸진시킵니다. ------십이연기의 6入處(육입처)--(안이비설신의)에 해당한다.
--물질은 존재하지 않고 한계가 없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  입니다.
 
식처정
의식은 대상에 대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하여(공간, 색계) 일으키는 관념을 멸진시킵니다. -------십이연기의 明色(명색)--(대상)에 해당 합니다.
-공간도 존재가 아니고 한계가 없는 의식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무는 상태 입니다.무소유처정
모든 의식을 멸진시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경지 입니다.-------십이연기의 識(식) (의식)에 해당한다.
-의식도 존재가 아니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의식이 머무는 상태 입니다.비유상비무상처정
있다. 라는 것은 유에 대한 관념 없다. 라는 것은 무에 대한 관념에서 생깁니다. 이와 같은 유상, 무상은 유상도 무상도 아님 어떤 미묘한 본질적 존재에서 생긴 관념이라는 것인데 이 경지에서는 있다는 생각도 아니고 없다는 생각도 아닌 상태를 사유합니다. -------십이연기의 行(행)--(의도)에 해당한다.
-------있고 없고를 사유하는 상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멸진정
비유상비무상처의 성취를 통하여 모든 존재의 본질이 비유상 비무상이라는 미묘한 존재임을 알게 되는데 이것도 유위이고 조작되고 유상과 무상을 부정하는 관념일 뿐 실재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경지, 즉 무명으로 부터 해탈하게 됩니다. -------십이연기의 無明(무명)--(진리의 무지. 연기의 무지)에 해당한다.
 
 
 간단히 설명합니다. 
초선 --- 욕탐을 없애기 때문에 외부의 대상에 대하여 다르게 인식하지 않고 동일하게 인식 합니다. 그것은 사물을 지각하되 겉모습을 욕구로 취하여 책상 의자로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 이 아니라  다 같은 물질[색]이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대인경]
이선----외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자신의 마음속으로는 색이라 생각하지 않고 외부의,색 을 본다. ' 라고 써 있습니다. [중아함 대인경]삼매에 든 마음에는 색이 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외부의 색을 보더라도 분별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선--- 초선, 이선에서  멸하고 나타난  좋다는 느낌, 나쁘다는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느낌(희락)을 멸한 경지 입니다.
사선 --- 생각도 없고[무상] 지각도 없다[무각] 그러니까 마음이 청정하여 모든 망념이 사라진 상태로써  자아'나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사라진 경지입니다. --[중아함, 분별관법경]
공처 ---------- 공간도 멸진한 경지
식처정 -------- 식을 멸진한 경지
무소유처정---- 존재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경지
비유상비무처정-----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미묘한 상을 여원 경지
멸진정---------무명이 멸한 경지이상은 아주 간단히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을 통해 십이연기를 알게 되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또, 다음은 중생의 세계인 삼계(욕계,색계,무색계)와 삼행(구업.신업.의업)을 구차제정을 통해 알아봅니다. #욕계-----------제1식주,  색계-----------초선,2선,3선,4선,  무색계---------공처,식처,무소유처,비유상비무상처. #구행(언어)적멸---초선,2선.                                     
#오온의색------초선,이선 신행(身)적멸--- 삼선,사선.                                  수------삼선, 사선 의행(意 )적멸---공처,식처,  
식 -----공처정,식처정 무소유처     
행------무소유 비상비무처                                                 상------비유상비무처   
 
제4장 중도의 존재론적 체계 - 2.연기설의 인식론적 근거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구차제정이 진리를 인식하는 단계적 성찰이라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제 그 내용과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차제정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경>의 모든 교리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멸진정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 구경의 경지이고, 사선, 사무색정은 멸진정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이라고 할 때, <아함경>의 여러 교리들은 이 같은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거나, 멸진정에서 발견된 진리를 설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장에서는 이들은 모두 다룰 수는 없으므로 구차제정을 단계적으로 행할 때 도달하게 되는 의식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七識住二處를 통해 구차제정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칠식주이처는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들이 소위 구중생거九衆生居라고 하는 그들의 세계에서 세계와 자아를 인식하는 의식 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이에 대한 <중아함 대인경大因經>의 설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第一識住; 色衆生, 若干身 若干想, 人及欲天         욕계중생
     第二識住; 色衆生, 若干身 一想, 梵天(초선천)      색계중생
     第三識住; 色衆生, 一身 若干想 晃昱天(이선천)    색계중생
     第四識住; 色衆生, 一身 一想, 遍淨天(삼선천)      색계중생
 
     <第一處>; 色衆生, 無想 無覺, 無想天(사선천)       색계중생
     第五識住: 無色衆生, 度一切色想 滅有對想 不念若干想
                   無量空處 是空處成就遊, 無量空處天      무색계중생
     第六識住: 無色衆生, 度一切無量空處 無量識處 
  是識處成就遊,無量識處天                                   무색계중생
 
     第七識住: 無色衆生, 度一切無量識處 無所有處
  是無所有處成就遊,  無所有處天                         무색계중생
 
     <第二處>: 無色衆生, 度一切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 是非有想非無想處成就遊, 非有想非無想處天                  무색계중생
    
 
멸진정은 이같은 중생들의 의식 상태에서 완전히 해탈한 경지이다. 
 
칠식주이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의 집, 멸, 미, 환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바르게 알아서 마음이 이들 의식상태에 물들거나 붙잡히지 않고 해탈한 경지가 멸진정이다. 
 
<대인경>에서는 멸진정에 이르는 해탈에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 즉 팔해탈이 있다고 하고 있다.
 
제일해탈; 色觀色
제이해탈; 內無色想 外觀色
제삼해탈; 淨解脫身作證成就遊
제사해탈; 度一切色想 無量空處成就遊
제오해탈; 度一切無量空處, 無量識處成就遊
제육해탈; 度一切無量識處, 無所有處成就遊
제칠해탈; 度一切無所有處, 非有想非無想處成就遊
제팔해탈; 度一切非有想非無想處 상지멸해탈신작증성취유
               급혜관자누진지
 
이 팔해탈은 중생들의 세계(칠식주이처)에서의 해탈을 의미한다. 칠식주이처를 참되게 알아 마음이 칠식주이처에 염착(染著)되지 않을 때 팔해탈이 있게 되며,
멸진정은 제팔해탈을 얻게 되는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구차제정과 칠식주이처 그리고 팔해탈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칠식주이처라는 중생계의 본질을 사유하는 것이 구차제정이고, 구차제정을 통해 그 본질을 앎으로써 단계적으로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팔해탈인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식주(인, 욕천):초선수행: 제일해탈 <제이식주(초선천)>
제이식주(초선천):이선수행: 제이해탈 <제삼식주(이선천)>
제삼식주(이선천):삼선수행: 제삼해탈 <제사식주(삼선천)>
제사식주(삼선천): 사선수행: 제일처 성취(사선천)
 
제일처(사선천): 도일체색상, 공처성취: 제사해탈
                         <제오식주(공처천)>
제오식주(공처천): 도공처상, 식처성위: 제오해탈
                         <제육식주(식처천)>
제육식주(식처천): 도식처상, 무소유처성취: 제육해탈
                         <제칠식주>
제칠식주(무소유처천): 도무소유처상, 비유상비무상처성취:
     제칠해탈, 제이처 성취(비유상비무상처천)
제이처(비유상비무상처천):도비유상비무상처상, 
    지멸해탈신작증성취: 제팔해탈[멸진정(想受滅)]

제 3 장 중도의 인식론적 체계 
 
     2. 구차제정九次第定과 칠식주이처七識住二處  
第一識住는 욕계 중생의 의식이 머무는 상태이다. 욕계 중생의 의식은 욕에 머물고 있다. 욕계 중생은 안, 이, 비, 설, 신 등 몇 가지의 감관(약간신)에 지각된 색, 성, 향, 미, 촉 등을 존재로 인식하면서 그 존재를 욕탐으로 분별하여 갖가지 분별상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욕계 중생인 인간은 감관에 지각된 내용에 대하여 그것을 책상이나 의자라고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초선(初禪)은 이 같은 욕계 중생이 인식한 존재의 본질을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선정이다. 즉 책상이나 의자와 같은 존재의 본질이 추구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문들은 이 같은 존재의 본질을 사대와 같은 불변의 요소라고 주장했고, 바라문들은 브라만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상적 존재의 본질을 어떤 불변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각하는 존재의 배후에 브라만이라는 불멸의 실체가 있으며 그것이 변해서 현실세계의 다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라문 사상의 전변설이고, 몇 가지 불멸의 요소가 있어서 그것들이 모여서 다양한 현실적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사문들의 적취설인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현상적 존재의 배후에 불멸하고 불변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사상은 다같이 현실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불멸의 실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독단론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도들은 존재의 본질을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질료나 재료로 보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을 질료와 재료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의 질료나 재료도 존재이므로 우리는 다시 그 존재의 분질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같은 본질의 추구는 결국 순환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은 결코 질료나 재료가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질료나 재료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이라는 존재는 재료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책상은 나무로 된 것도 있고 강철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책상은 그것이 나무로 된 것이건 강철로 된 것이건 책을 높고 보기에 알맞은 것이면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한다. 우리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나 의지를 가지고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 책상인 것이다. 따라서 책상의 본질은 질료나 재료가 아니라 우리의 욕구나 의지라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불타는 <중아함 諸法本經>에서 '모든 존재(一切諸法)는 欲(chanda; will, desire for, wish for) 을 본질로 한다(以欲爲本)'고 하고 있다. 
  
초선에서는 이와 같이 욕계에서 인식되는 존재의 본질이 욕구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초선에서는 의식이 욕탐을 떠나서 대상을 관찰, 사유함으로써 욕계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것이 지각의 대상(色)을 욕구없이 관찰하는 (色觀色) 第一解脫이다. 그리고 여기세어 의식은 오관(若干身)으로 대상을 인식하되 그것에 대하여 차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곳을 '若干身一想'의 第二識住라고 한다. 
  
제이식주는 색계 초선의 경지에 의식이 머무는 상태이다. 욕계의 본질이 욕탐임을 자각하여 욕탐에서 벗어남으로써 생긴 희락에 의식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락은 모든 색을 욕탐없이 일상으로 觀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즉 의식이 비록 욕탐을 벗어나 있으나 대상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二禪에서는 이같은 의식 상태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色을 一想으로 관함으로써 생긴 희락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희락은 우리의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 지각된 색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관에 의한 지각과 사유를 멈추고 자신의 마음을 관조함으로써 새로운 희락을 느끼게 되며, 이것이 '無覺無觀 定生喜樂'의 이선이다. 
  
그리고 이같은 이선의 성취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지각의 대상, 즉 色으로 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內無色想 外觀色'의 第二解脫이라 하고, 이 경지에서는 의식이 오관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생긴 다양한 희락에 머문다는 의미에서 '一身 若干想' 의 第三識住라고 한다. 
  
三禪에서는 제삼식주에 머물고 잇는 의식상태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즉 의식이 희락에 머물고 있는 까닭을 사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그 희락을 바라기 때문에 의식이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여 희락에 대한 욕구(喜欲)를 버림으로써 三禪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삼선의 성취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욕탐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淨解脫身作證成就遊(정해탈신작증성취유)' 의 第三解脫이라 하며 이 경지에서는 의식이 마음에 머물면서 모든 희락에 차별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一身一想'의 第四識住라고 한다. 
  
제사식주의 상태에서 희락에 대한 차별상을 없어졌지만 희락에 대한 一想은 남아 있다. 四禪에서는 이 一想을 관조한다. 그 결과 이 일상이 모든 苦樂과 喜憂의 근본임을 자각하여, 의식은 想을 떠나 無住의 상태가 된다. 
  
이 경지가 '捨念淸淨(사념청정)'의 사선을 성취한 경지이며, 이곳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욕탐과 의식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고락, 희우 등의 모든 감정을 떠나 의식이 이것들에 머물고 있지 않으므로 (無想無覺) 識住라 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욕탐과 의식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고락 등의 감정이 이곳을 바탕으로 생긴다는 의미에서 이곳을 處(ayatana)라고 한다. 그리고 맨처음 도달한 처라는 의미에서 제일처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사선을 차례로 닦아 제일처에 이름으로써 얻게 되는 해탈이 욕탐에서 마음이 벗어난 心解脫이다.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욕탐은 초선을 통해 극복하고, 내부에서 생긴 감정은 삼선을 통해 극복하여 사선에서는 일체의 욕탐이나 감정에 의식이 머물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처에서는 대상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인식하는 주관과 인식되는 객관이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대상에 대한 욕탐과 주관의 감정만 멸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욕망이나 감정을 떠나 대상이 순수하게 인식되고 있는 색계이다. 색계의 마지막 단계인 사선 즉 제일처에서는 이같은 색계의 본질이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주관적 존재와 객관적 존재는 공간 속에서 대립하고 있다. 즉 색계의 모든 존재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만약 공간이 없다면 색계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은 색계의 바탕이 된다고 할 수 있으므로 공간에도 處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공처(空處)라고 한다. 그리고 이같은 자각을 통해 의식은 제일처에서 벗어나 공간을 대상으로 머물게 되며, 이것이 제오식주(第五識住)이다. 
 
그렇다면 공간은 무엇인가? 공간은 色의 無다. 뿐만 아니라 색계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고 있으며 무량 무변한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다시 공간을 대상으로 머무는 것이 제오식주인 공처이며, 이 공간은 색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일체의 색상을 초월하고 감관에 대립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지각을 멸함으로써 (度一切色想 滅有對想) 무량공처를 성취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공처를 성취함으로써 색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사해탈(第四解脫)이다.
 
제오식주인 공처는 공간을 무량무변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의식상태이다. 공처정(空處定)은 이같은 의식상태에 대한 반성적 사유이다. 공간이란 전술한 바와 같이 '색의 없음'이다. 즉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량무변한 존재이다. 이와 같은 공간에 대한 인식의 내용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공간은 지각되지 않는 존재이므로 공간에 대한 지식은 지각을 통해 성립된 것이 아님이 분병하다. 그리고 공간이 무량무변한 존재라면 이같은 지식은 경험으로 통해 성립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색이 지각되지 않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관념(想)이다. 즉 우리는 색이 지각되지 않을 때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색을 유한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색의 없음' 즉 색과 대립되는 개념에 대하여 무량무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의 바탕은 이같은 관념을 일으키는 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같은 자각을 통해 공간에 대한 일체의 관념에서 벗어나(度一切空處想) 의식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제오해탈(第五解脫)의 경지인 식처(識處)의 성취이다. 이곳에도 處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곳이 공간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같은 식처에 의식이 머무는 것은 제육식주(第六識住)라고 한다.
 
식처정에서는 의식의 모든 영역이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그런데 감각적 지각의 대상인 색은 공간으로 환원되었고, 공간이라는 대상은 의식으로 환원되었기 때문에 의식은 대상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대상이 없는 의식이 있을 수 있을까? 
 
이같은 사유의 결과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무소유처를 성취하게 되며 이것이 '度一切識處想 無所有處成就遊'의 제육해탈(第六解脫)이고, 의식이 이같은 생각에 머물고 있는 상태를 제칠식주(第七識住)라 한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식의 바탕이 되는 영역이라는 의미에서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제칠식주 즉 무소유처에서 행하여지는 사유가 무소유처정이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의식에 인식되지는 않지만 이같은 사유의 주체는 없다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식이 있다는 것은 유에 대한 관념(有想)이 있다는 것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무에 대한 관념(無想)이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유상과 무상은 유상도 무상도 아닌 어떤 미묘한 본질적 존재에서 생긴 관념(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통해 무소유처상을 초월하여 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게 되며, 이것을 제七해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무소유처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에서 처라는 개념을 사용하며, 이 비유상비무상처는 모든 존재가 의지하고 있는 바탕이라는 의미에서 제二처(ayatana)라고 한다. 
 
제일처는 감정이나 욕망의 바탕이 되는 영역이고, 제이처는 물질적 존재(色)와 정신적 존재(無色)의 바탕이 되는 영역인 것이다. 
 
第一處 즉 四禪의 성취를 통해서 대상에 대한 욕탐이나 감정을 멸진하고서, 즉 욕계의 존재가 고락, 희우 등의 감정에서 비롯된 허구적인 존재임을 깨닫고서, 감정이나 욕탐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지각을 통해 인식되는 존재(色)의 본질을 추구한 결과 비유상비무상처에 도달하게 되며, 第二處 즉 비유상비무상처의 성취를 통해 모든 존재의 본질이 비유상비무상이라는 미묘한 본질적 존재임이 드러난다. 
 
비유상비무상처정에서는 이같이 모든 존재의 본질이 되는 비유상비무상이라는 본질적 존재가 반성적으로 사유된다. 그 결과 이것은 유상과 무상으로부터 상정된 관념일 뿐 그것이 결코 실재하는 존재가 아님이 자각된다. 공간이 '色의 부정(無)'에 대한 관념이고, 무소유가 '識의 부정(無)'에 대한 관념이듯이 비유상비무상도 유상과 무상을 동시에 부정하는 관념일 뿐 실재하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즉 조작된 것이며 생각해낸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비유상비무상처가 유위이며 무상하고 苦임을 여실하게 알아서 이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얻게 되는 것이 제八해탈이며 滅盡定이다. 그리고 이같은 멸진정을 성취함으로써 모든 해탈이 완성된다. 
 
제일처에서 欲漏로부터 벗어나고, 제이처에서 有漏로부터 벗어나며, 멸진정에서 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번뇌(漏)에서 벗어나 모든 해탈이 함께 하는 경지가 멸진정이며, 이것을 俱解脫이라고 한다. 
 
이상이 칠식주이처, 팔해탈과의 관계를 통해 살펴본 구차제정의 내용이다. 이같은 구차제정을 통해 무명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면, 무명에서 생노병사가 연기하는 것을 설명하는 십이연기설은 구차제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십이연기의 환멸문이 무명의 멸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은 환멸문이 멸진정을 성취한 결과 시설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노사의 근본을 사유하여 무명에 이르는 십이연기의 역관과 삼계의 본질을 추구하여 멸진정에 이르는 구차제정의 사유방법은 그 형식이 동일한 것이다. 
 
이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기법은 구차제정을 통해 깨달은 진리이고 십이연기설은 구차제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들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제 이들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활자본. 천태종(天台宗)의 지관수행(止觀修行)을 위한 지침서이다

권두에는 작자의 서가 있으며 최남선(崔南善) 등의 발문이 있다. 내용의 구성은 식문(息門)·색문(色門)·심문(心門)의 세 문을 세웠으나 심문은 생략하고 있다. 식(息)을 닦고 색(色)을 닦는 것이 본래 마음 밖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지관(止觀)을 중요시하고 있으면서도 지관문을 달리 세우지 않은 이유는 식과 색을 실천하는 것이 곧 지와 관을 실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선의 입문서이면서도 『차제선문(次第禪門)』과는 달리 수증(修證)을 앞에 두고 방편(方便)의 장을 뒤에 두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제1은 대의(大意)로서 입식문(入式門)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4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선바라밀』이라는 말뜻의 해석, ② 수증(修證)의 명의(名義), ③ 법문(法門)에 세가지 문이 대종(大宗)을 이룬다는 것, ④ 방편(方便)의 대강 등이다.
제2 식문(息門)에서는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식(數息)·수식(隨息)·관식(觀息)·욕계정(欲界定)·초선정(初禪定)·이선정(二禪定)·삼선정(三禪定)·사선정(四禪定)·사무량심(四無量心)·공처정(空處定)·식처장(識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육묘문(六妙門)·십육특승(十六特勝)·통명관(通明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의 색문(色門)은 부정관(不淨觀)이라고도 하는데, 구상(九想)·팔념(八念)·십상(十想)·팔배사(八背捨)·팔승처(八勝處)·십일체처(十一切處)·구차제정(九次第定)·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초월삼매(超越三昧) 등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는 방편문(方便門)으로서 구오연(具五緣)·하오욕(訶五欲)·기오개(棄五蓋)·조오법(調五法)·행오법(行五法)·삼지(三止)·정중험선근발상(定中驗善根發相)·변선근진위(辨善根眞僞)·험악근발상(驗惡根發相)·악장대치법(惡障對治法)·안심수선(安心修禪)·치병방법(治病方法)·변마(辨魔) 등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속에는 천태지관의 사상 중에서 『차제선문』과 『천태소지관(天台小止觀)』 두 개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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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과 3계[界]중생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 노닐으시면서 기수 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리라. 이 법은 뜻도 있고 문제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마음 먹은 대로 행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하여 뜻대로 되는 행이 생기는가? …… “
이렇게 시작되는 이 설법은, 초선으로부터 차례로 선정의 단계를 성취하여 머물면 이 욕계를 벗어나 자재로이 색계 이상의 하늘에 가 나게 되거나 무색계까지도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初禪을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범신천」에 가서 나게 된다.
범신천이란 어떠한 경계를 일컫는가? 색계 초선천에 이르는 중간 단계 하늘로서 욕계를 막 벗으난 경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럼 초선은 또 어떠한 경지인가? 욕계의 악을 떠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경지, 즉 이생희락(離生喜樂)의 경지이다. 그러니까 초선의 경지를 성취한 마음은 최소한 범신천의 경계로 비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초선의 마음은 욕계를 떠난 경지이기 때문이다.
일단 여기에서 이 설법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12종의 욕계중생과 22종의 색계 중생, 그리고 4종의 무색계 중생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한다(이에 대해서는 장아함의「세기경」<도리천품> 참조).
 
첫 번째로 욕계 중생에는 12종이 있는데,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4왕천 . 도리천 . 염마천 . 도솔천 . 화자채천 . 타화자재천 . 마천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지옥 . 아귀 . 축생을 일러 3惡道라 하고, 4왕천에서부터 타화자재천에 이르는 여섯 하늘을 일러 6욕천이라 한다. 그리고 6욕천을 일러 그냥「천」으로 통칭하여 지옥에서부터 천상까지 왔다갔다하며 윤회하는 것을 6道윤회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가 짓는 업에 따라 3악도로 떨어질 수도 있고 또 6욕천의 어느 하나에 날 수도 있으며, 색계 . 무색계의 어느 하늘에 날 수도 있고 무색계를 초월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문4과 중 수다원과를 성취한 사람은 앞으로 영원히 3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욕계를 7번 오간 뒤에 열반(무색계 초월)에 든다. 그리고 사다함과를 성취한 사람은 이 욕계를 1번 오간 뒤에 열반에 들게 되며, 아나함과를 성취한 사람은 색계 이상의 어느 하늘에 나서 열반에 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사람은 현재에, 즉 지금 이 욕계의 몸으로 무색계까지 초월하여 열반에 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태어난다」는 말은 胎를 통하여 난다는 뜻으로 축생 . 인간에게만 사용 가능한 말이고 나머지 경계들은 다 化生이라고 표현해야 옳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옥이나 아수라 . 6욕천 . 색계 하늘 . 무색계 하늘에 날 때에는 화생을 통하여 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색계 중생에는 22종이 있는데, 범신천 . 범보천 . 범중천 . 대범천 . 광천 . 소광천 . 무량광천 . 광음천 . 정천 . 소정천 . 무량정천 . 변정천 . 엄식천 . 소엄식천 . 무량엄식천 . 엄식과실천 . 무상천 . 무조천 . 무열천 . 선견천 . 대선견천 . 아가니타천이 그것이다. 이것은 색계 4선천인 18천과 그 나머지 4천으로 분류 되는데, 색계 4선천이란 初禪 3천 . 2선 3천 . 3선 3천 . 4선 9천을 말하며, 그 나머지 4천이란 각 禪天으로 들어 가는 중간 단계 하늘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초선천은 범보천 . 범중천 . 대범천이고, 2선천은 소광천 . 무량광천 . 광음천, 3선천은 소정천 . 무량정천 . 변정천, 4선천은 소엄식천으로부터 아가니타천에 이르는 9하늘, 기타 4천은 범신천 . 광천 . 정천 . 엄식천이다.
마지막으로 무색계 중생에는 4종이 있는데 공처천 . 식처천 . 무소유처천 . 비상비비상처천이 그것이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간다.
2.제2선을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황욱천」에 가서 나게 된다.
「황욱천」이란 하늘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을 못 해봤으나 색계 2선천의 경지인 2선천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 하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한다. 즉 황욱이란 말의 의미를 보아서 아마도「광천」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제2선의 경지는 어떠한 것이기에 이것을 성취하여 머물면 황욱천에 나게 된다고 하는가? 즉 제2선의 경지는 안으로 고요하여 어지러운 생각도 세밀한 생각도 없으며 定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경지, 즉 정생희락(定生喜樂)의 경지로서 이 경지는 황옥천의 경지와 같으므로 이러한 경지를 성취한 사람은 색계 2선천까지 비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3.제3선을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변정천」에 가서 나게 된다.
「변정천」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색계 3선천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하늘로서, 이 경계는 제3선의 경지와 같으므로 제3선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변정천의 경지, 즉 제3선의 경지는 어떠한 경지인가? 곧 기쁨까지도 떠나 모든 것을 버리고 구함이 없어 바른 지혜와 바른 생각에 머무는 경지, 즉 억염사락(憶念捨樂)의 경지이다.
 
4.제4선을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과실천」에 가서 나게 된다.
「과실천」이란 색계 4선천 가운데 하나인 엄식과실천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경계는 제4선의 경지와 같으므로 제4선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4선의 경지란 어떠한 경지인가? 즉 모든 기쁨과 괴로움을 멸하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청정한 마음의 경지, 즉 호염청정락(護念淸淨樂)의 경지이다.
 
5.空處를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 공처천에 가서 나게 된다.
「공처천」이란 무색계의 첫째 하늘로서, 이 경지는 공처(공처定)를 성취한 사람의 경지와 같으므로 공처정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처정이란 어떠한 경지인가? 곧 물질을 싫어하고 가없는 허공의 자재함을 기뻐하며 空이 가없다는 것을 아는 경지이다.
 
6.識處를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 식처천에 가서 나게 된다.
「식처천」이란 무색계의 둘째 하늘로서, 이 경지는 식처(식처정)를 성취한 사람의 경지와 같으므로 식처정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식처정이란 어떠한 경지인가? 곧 공을 떠나서 식과 상응하여 마음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아니하고 3世의 식이 다 定中에 나타나 청정하고 적정한 경지이다.
 
7.無所有處를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 무소유처천에 가서 나게 된다.
「무소유처천」이란 무색계의 셋째 하늘로서, 이 경지는 무소유처(무소유처정)를 성취한 사람의 경지와 같으므로 무소유처정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소유처정이란 어떠한 경지인가? 곧 식을 떠나 모든 인연이 실체가 없다고 관조하는 경지이다.
 
8.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여 그 경지에 머물면 목숨을 마친 뒤에 비상비비상처천에 가서 나게 된다.
「비상비비상처천」이란 무색계의 마지막 하늘로서, 이 경지는 비상비비상처(비상비비상처정)를 성취한 사람의 경지와 같으므로 비상비비상처정의 마음을 성취한 사람은 이곳에 가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비상비비상처정이란 어떤 경지인가? 곧 3계 중생의 최고점에 자리한 경지로 (중생 가운데는 가장 수승한 중생), 생각이 없으므로 외도들은 이를 참다운 열반처로 본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불교에서는 이것 역시 생사윤회하는 중생의 경지라고 본다.
 
9.想知滅定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물면 모든 漏를 끊고 괴로움의 끝을 보게 된다.
「상지멸정」이란 곧 구경열반에 드는 자가 성취하는 定으로, 이 정은 마음속의 모든 고통의 원인인 무명(의식의 자아와 말나식의 자아 그리고 이로 인한 무지와 사견)과 근본 무명(아뢰야식의 유루)을 끊어서 쉼에 드는 경지로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구경처이다.
 
총정리하면, 이 경은 각종 선정을 성취하여 머물면 이러이러한 경지에 가서 나게 되는데, 그 중에서 상지멸정을 성취하면 구경열반을 얻게 된다고 설함으로써 상지멸정 성취를 위해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은「아함경」의 내용이 너무 중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 정말로 같은 경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설법 내용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단 소재가 같은 설법은 많다. 예를 들어 초선으로부터 상지멸정에 이르는 선정에 대한 설법은 많은데 그 각각의 설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심득(心得)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또 욕계천 . 색계천 . 무색계천에 대한 설법이 많이 나오나 각각의 심득 역시 다르다. 예를 들면 장아함의「세기경」<도리천품>에서 얻어 지는 심득과 이 경에서 얻어지는 심득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잡아함에서 반복되고 있는「5온 무아」에 대한 설법 또한 기실 자세히 읽어 보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심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잡아함에서 반복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37수도법과 계 . 정 . 혜3학 등에 대한 설법들이나 잡아함에서 거듭 설명되고 있는 3독심 . 10선행 . 10악행 등에 대한 설법들도 기실 서로 다른 심득을 주고 있다. 우리는「아함경」을 읽을 때 하루 빨리 그 골자만 쏙 뽑아서 알고자 하는 급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함경을 모두 다 섭렵하지 않는 한(상근기는 제외하고) 아함경에서 이야기 하는 바를 깊이 있게, 유기적 .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즉 아함경의 교설이 내 것으로 소화 . 흡수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위의 5에서 8번에 설명한 공처정 . 식처정 . 무소유처정 . 비상비비상처정 이 네 가지를 「4무색정[無色定]」이라고 하고, 즉 네 가지 형체 없는 선정이라는 뜻이다(이에 대해 장아함의 「중집경」<11경>참조).
 
중아함의「의행경」<168경>참조



1) 색계(色界)의 4선정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사마타 수행에는 여덟 가지 단계의 선정이 있다. 여기에는 색계 4선정과 무색계의 4선정이 있다. 각 단계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다.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즉 ① 위타카 (겨냥하는 마음) ② 위짜라 (고찰하고는 지속하는 마음) ③피티 (환희심) ④수카 (행복감) ⑤사마디 (일념/삼매)가 있다.


초선정(初禪定)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 중 ① 위타카와 ②위짜라가 현저하게 나타나며 피티(환희)와 수카(행복감)가 일어난다. 피티는 바라는 것을 성취함에 따른 만족감이라면, 수카는 성취했을 때 오는 실질적인 체험이다. 마음이 5장애로부터 벗어남에 따라 마음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그 결과 5장애는 더욱더 침범하지 못하게 된다. 청정도론에서는 피티와 수카를 이와 같이 설명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오는 환희가 피티이고 물을 먹었을 때 오는 시원함이 수카이다.” 초선정이 숙달되면 자유자재로  원하는 시간만큼 선정에 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지만 계속 연습하면 숙달된다. 수행에서 통달해야 할 것이 있다. 즉 ①입정(入定) ②성취(成就) ③선정(禪定)의 시간 ④출정(出定) ⑤다시 살펴보는 것 이것은 모든 선정수련(I~8선정)에 해당한다.


2선정(二禪定)


초선정에서 현저했던 위짜카와 위짜라가 고요하게 되면서 2선정으로 들어간다. 피티·수카·사마디와 함께 일념이 되어 내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초선정과 2선정의 차이점을 보면 초선정의 경우에는 5장애로부터 보호의 성격이 강한 반면 2선정에서 피티가 현저하면서 집중 상태가 일어난다.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나아갈 때는 지금까지 이용했던 주재를 이용하든가 아니면 다른 알맞은 주재를 이용해도 된다 (이것은 4선정까지 적용된다). 이 주재로서 배움의 상, 고정된 상, 우파자라 사마디, 앗파나 사마디로 나아가는데 숙달 될수록 거치게 되는 단계적인 시간 길이는 짧아진다.

마음은 더욱더 예리해지고 집중력은 깊어간다. 깊어진 체험에서 오는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된다. 계속 수행한다면 부처님이 약속한 결실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환희와 정신적 육체적 평온함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에 집착할 위험이 있다.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진보는 할 수 없다. 이때의 환희나 즐거움을 분명하게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집착이 일어나면 즉각 제거하고 배의 움직임(혹은 사념처 중 다른 주제) 관찰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계속 진보할 수 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


3선정(三禪定)


환희가 점차 줄어들고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계속 깊어진다.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점 깊어진다. 7각지 중 평등각이 나타난다. 마음은 순경계(즐거움), 역경계(불쾌함)에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깊은 평온이 일어난다. 수행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좌선할 수 있다. 몸은 청정해지고 가벼우면서도 건강해 진다. 이것이 3선정의 특성이며 행복감과 일념의 요소가 현전한다. 현상의 생과 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더욱더 깊어간다.

두 번째 선정에서 세 번째 선정으로 나아감은 수행상의 대전환점이다. 보통의 경우, 수행자는 마음이 설레이는 흥분이나 전율에 자연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피티 (환희 )가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이것은 수행의 사춘기이다.

이것을 체험할 때 틀림없이 정진력을 향상시킨다. 가능한 한, 주의 깊게 관찰해야한다. 수행자가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는 한, 더 이상의 진보는 없다. 경전에는 이것을 어미 소와 송아지 (2선정)에 비유한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제때에 젖을 떼지 않으면 사람에게 많은 젖을 줄 수 없게 된다. 세 번째 선정에서는 행복감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가장 달콤하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집착하지 않고 무심하게 계속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관찰해 나가야 한다. 그러면 통찰은 더욱더 예리해지고 명료하게 될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를 지나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로 접어듦에 따라 대상의 처음과 중간 부분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마음은 현상이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부분만을 감지한다. 알아차리는 순간 즉각 사라진다. 종종 몸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직 사라져가는 현상만이 계속하는 것 같다. 수행자가 혼란하거나 당황해 하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현상에 당황해 하고 불안 해 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다. 빈 허공만 남긴 채 그 다음 현상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린다. 현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채 계속 사라짐만 보게 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울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제는 조절할 수도 없고 하나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다. 이때는 냉정하게 계속적인 현상의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을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라 부른다. 여기에는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행복감이나 평온함이 없고 육체의 고통이나 불편함이 없다. 다만 중립적인 무심한 상태의 마음이다.


4선정(四禪定)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가 성숙되고 있는 동안에 두 번째 선정의 환희는 세 번째 선정의 요소인 행복감에 양보한다.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평온함이다. 세 번째 선정이 네 번째 선정으로 진보했을 때는 평등심과 일념만이 현전한다.

마음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으며, 편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고 무심한 평등심이 일어난다. 평등심은 마음을 균형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 음은 완전히 청정하고, 예리하고 날카롭다. 현상의 미묘한 성질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명료함과 함께 감지된다. 이러한 것은 초선정 ·2선정 ·3선정에서도 있어 왔지만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성질에 의해 감추어져 왔던 것이다. 마치 태양이 있으면 달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선정의 각 단계는 행복감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초선정에서는 5장애를 떨쳐버리고 보호되어 있는 즐거움이다. 두 번째는 선정에서는 집중의 행복감이다. 좋은 집중은 환희의 형태로 일어난다. 세 번째 선정은 평온한 행복감으로 알려져 있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지해의 행복감을 경험한다.

사마타 선정은 분별·관념과 착(着)이 따라다니는 유위법(有爲法)인 반면 위빠싸나 선정은 분별 ·관념과 착을 제거하면서 지혜를 계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은 모두 조건화된 상대적인 현상의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을 초월하면 궁극의 행복, 실재적인 행복을 맛본다. 그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궁극적인 대열반(Pari-flibbana)이다.


2)무색계(無色界)의 선정(禪定)


지금까지 살펴 본 색계의 4선정도 감각적인 인식과 마음의 자극을 정화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의 물질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주제를 집중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반면 무색계의 4선정은 인간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내·외적 요소들을 뛰어넘어 지극히 미묘한 의식의 상태로 들어간다. 이것이 형상이 없는 비물질적인 선정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5선정(무색계 초선정=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색계의 4선정을 성취했지만 아직도 물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색계의 선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색계의 선정은 무색계의 선정보다 섬세하지 못하고 거칠은 면이 있기 때문에 4선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공무변처로 집중을 돌려야 한다. 처음 대상에 집중한 후에 그 대상을 최대한으로 멀리 확장시켜서 공무변처로 집중을 전환함으로써 물질적인 대상을 제거한다. 이때 물질적 대상을 제거할 때는 이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오로지 집중을 공무변처 쪽으로 향한다. 예를 들면, 마치 독사에 쫓겨서 겁에 질려 정신없이 도망간 사람이 있을 때 그가 나뭇가지나 땅위에서 독사와 비슷한 형체를 보면 겁이 나서 얼른 고개를 돌리듯이 색계의 대상에서 공무변처로 향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렇게 하여 무색계의 첫 번째인 공무변처로 성취한다.


6선정(무색계 2선정=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5선정에서 나온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5선정의 상태를 다시 살펴 본후 아직도 보다 높은 단계의 수준만큼 평화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이것은 1선정에서 8선정까지는 모든 과정에서 이와 똑 같은 식으로 살펴봄) 공무변처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났던 식무변처에 집중한다. 즉 공무변처정에 머물며 현저하게 나타났던 의식에 집중한다. 이렇게 하여 식무변처의 근접삼매와 고도의 삼매를 성취하게 된다. 공무변처를 완전히 뛰어 넘게 됨에 따라 식무변처에 머물게 된다.


7선정(무색계 3선정=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7선정은 글로 표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6선정에서 나온 후, 아직도 다음 단계의 선정 수준만큼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살펴보고 무소유처로 집중을 전환한다. 이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체험하기는 어렵다. 수행이나 철학에서 ‘0’의 순자나 무(無)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인식하기 어렵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해서 설명했다.

“법당에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한사람이 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승려들이 회함을 끝내고 모두 돌아간 후 그 사람이 돌아와서 문 입구에서 법당을 봤을 때 거기에는 오직 아무것도 없는 격리되어 있는 빈 상태만 있다. 그 사람은 그 많은 승려들이 죽었거나 이곳을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없는 것만 바라볼 뿐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무소유처정의 근접삼매와 고도의 삼매를 성취한 후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을 뛰어넘어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머문다.


8선정(무색계 4선정=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7선정도 인지하기가 어려운데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8선정을 묘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상(想)도 아닌 비상(非想)도 아닌 상태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오직체험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청정도론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7선정을 체험한 수행자는 보다 높은 단계의 8선정을 목표로 나아간다. 상(想)은 병이며, 종기이며, 창살과 같은 것이다.”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평화스럽고 장엄한 것이다. 그리하여 무소유처정의 집착을 버리고 비상비비상처의 평화로움으로 집중을 향한다.”

이렇게 8선정을 완전히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8선정은 요가·수피·도가 등의 수행법과 본질적으로 틀린다고는 할 수 없다. 부처님 자신도 깨치기 전에는 이 수행법을 통달했지만 만족할 수 없어 두 분의 스승을 버리고 보리수나무 아래로 갔던 것이다.(8선정에 대한 설명은 개요만 살펴봤다. 체험으로 수행하고 싶은 사람은 선정과 위빠사나를 완전히 통달한 선지식 밀에서 수행하길 바란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1부 부처님의 견성체험담과 청정도론 참조) 그 수행법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멸진정(滅盡定),  오매일여(寤寐一如) 이상의 경지


사마타 수행에서는 8선정이 최고의 단계이다. 여기에서 소개할 멸진정은 사마타의 8선정과 위빠싸나의 아나함(불환과 不還果) 이상의 경지를 성취한 사람 (구경각 아라한)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다. 이것은 지고의 장엄한 선정이다. 이 멸진정은 비상비비상처정의 성취와 아나함 이상을 성취한 상태이므로 모든 의식과 정신작용·감정·인식 등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로 엄격히 구분된다. 8선정만 수련하면 비상비비처정에만 머문다. 위빠싸나만 수련하면 아나함, 아라한과에만 도달한다. 이 모두를 수련한 사람은 멸진정에 든다. 초선에서 8선정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혜로써 삼법인을 철견하고  8선정을 성취한 후 멸진정(滅盡定)에 든다. 실제로 이 양자 모두를 성취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위빠싸나 지혜 수련으로 열반을 성취한 사랑에게는 사마타 선정은 관심이 없고 마치 어린애들 장난처럼 생각한다.

청정도론에서는 멸진정에 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자는 사마타의 정(定)과 위빠싸나의 지혜[慧]로써 1선정에서 7선정까치 차례로 올라간다. 매번 단계의 선정에 들어서 묘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삼법인을 관찰한다. 이렇게 하여 7선정까지 들어간다. 7선정에서 나온 후, 얼마동안 멸진정에 머물 것인가를 미리 마음으로 시간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8선정에 든 후 바로 멸진정으로 나아간다. 이 상태에서 7일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의식과 신체의 기능이 정지되어 마치 죽은 사람같이 보인다.”

중부경전에서 사리풋타와 다른 비구와의 대화에서 멸진정과 죽은 상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죽은 사람의 경우는 목숨이 끝나고 몸(호흡)·말(생각·의식) 정신적 기능이 모두 파괴되고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다, 그러나 멸진정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는 몸(호흡)·말(의식)·정신적 기능(行)이 정지되었지만 목숨이 다한 것은 아니다.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 깃이 아니고 기능들도 파괴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선문정로에서 성철스님은 멸진정을 '사중특활(死中得活)' '승묘경계(勝妙境界)'로 설명하여 구경각 이전의 '오매일여(寤寐一如)'와 유사한 경계로 보았으나 경전상의 멸진정은 오매일여와. 구경각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분리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선문정로의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일념불생(一念不生)한 앞뒤가 끊어진 경계를 규봉은 돈오돈수라했다. 그러나 명안종사들은 승묘경계라 하여 배척했다. 승묘경계도 대병(大病)이니 정안지식(正眼知識)을 참견하여 심신이 적멸한 사지(死地)에서 대활하지 않으면 정오가 아니다. 이 경계에도 언구(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대병이다. 승묘경계(勝妙境界)에도 오매일여의 몽중일여(7지)와 숙연일여(8지)가 있는 것과 같이 7지 무상정(無想定)과 8지 멸진정(滅盡定)이 있다. 여기에서도 불조공안은 투과 못한다. 6식의 거친 의식이 멸진한 8식의 무기가 대사(大死)이다. 이 대사의 무기까지 영멸해야 진대사(眞大死)이고 상적상조(常寂常照)이다. 이것이 구경열반이다.”

멸진정 ·우상정 ·무소유정의 차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라자가하 성에 노니시면서 죽림 칼란다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에 존자 사리풋타는 오후에 연좌에서 일어나 존자 마하 코오티라가 있는 곳으로 가서 문안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사리풋타 존자는 말하였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들어 주겠소" 코오티라 존자는 사뢰었다 "사리픗타 존자여! 마음대로 물으시오 나는 들은 뒤에 생각해 보리다. "존자 사리풋타가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착하지 않은 것[不善]은 착하지 않다고 말하고 착하지 않은 뿌리[不善根]는 착하지 않은 뿌리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착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뿌리인가요?"

"몸의 악한 행과 입과 (신구의)뜻의 악한 행은 착하지 않은 것이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탐진치) 착하지 않은 뿌리요. 이것을 착하지 않은 것이라 하고 이것을 착하지 않은 뿌리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착한 것은 착하다 말하고 착한 뿌리는 착한 기관이라 말하는데, 무엇이 착한 것이며 무엇이 착한 기관인가요?"

"몸의 묘한 행과 입과 뜻의 묘한 행은 착한 것이요 욕과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착한 뿌리요 이것을 착한 것이라 하고 이것을 착한 뿌리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는 지혜라 말하는데 어떤 것이 지혜인가요?”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하오. 어떤 것을 아는 것인가. 괴로움의 진리를 알고 이 괴로움의 집기를 알며 이 괴로움의 멸함을 알고 이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 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다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식별(識別)은 식별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이 식별인가요?”

코오티라 존자는 대답하였다. "식별은 식별하기 때문에 식별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식별하는가, 색을 식별하고 소리를 식별하고 냄새를 식별하고 맛을 식별하고 촉감을 식별하고 법을 식별하는 것이다. 식별은 식별하기 때문에 식별이라 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픗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와 식별의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合]인가, 갈라지는 것 [別]인가. 또는 이 두 법을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요?"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으로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요."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아는 것을 당신은 무엇으로써 아는가요?"

"아는 것을 나는 지혜로써 아오.(알아차림이 지혜(반야)의 전주곡이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푼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지혜는 어떤 뜻이 있고 어떤 훌륭함이 있으며 어떤 공덕이 있는가요?"

"지혜는 싫어하는 뜻이 있고 욕심이 없는 뜻이 있으며 진리를 보는 뜻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요?"

"괴로움을 참답게 알고 괴로움의 집기를 알며 괴로움의 멸함을 알고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알면 이것을 바른 소견이라 하오." (정념(알아차림)에서 정견(正見)이 나온다. 정념은 8정도를 내포한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바른 소견이 생기는 가요?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생기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남에게서 듣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요. 이것을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존자 사리풋타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거둠이 있어 바른 소견을 거두어 마음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는 가요?"

"다섯 가지 거둠이 있어 마음 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소. 어떤 것이 다섯이오. 첫째는 진리의 거둠이요 둘째는 계의 거둠이며 셋째는 널리 들음의 거둠이오, 넷째는 그침의 거둠이며, 다섯째는 관찰의 거둠이오, 이것을 다섯 가지 거둠이 있어 바른 소견을 거두어 마음 해탈의 결과와 슬기 해탈의 결과를 얻고 마음 해탈의 공덕과 슬기 해탈의 공덕을 얻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떻게 미래의 존재 [有]가 생기는 가요?"

"어리석은 범부는 무지하고 들은 것이 적고 무명에 덮이고 애욕에 얽매이고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고 거룩한 법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법을 모시지 못하고 그러므로 미래의 존재가 생기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어떻게 미래의 존재가 생기지 않는 가요?"

"만일 무명(無明)이 이미 다하여 혜명(慧命)이 생기면 반드시 괴로움이 다할 것이니 그러므로 미래의 존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느낌이 있는 가요? 

"세 가지 느낌이 있소. 곧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소. 이것들이 무엇을 인연하여 있는가 하면 부딪침을 인연하여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느낌[受]과 생각[想]과 의도[思]의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인가. 갈라지는 것인가.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요?"

존자, 코오티라는 대답하였다. "느낌과 생각과 의도의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오. 갈라지는 것이오.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이오. 무슨 닭인가. 느낌이 느끼는 것은 곧 생각이 생각하는 것이고, 의도가 의도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오. 갈라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이 세 가지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오."("가지 법은 합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념처(위빠싸나)는 동시에 작용한다는 것을 경전에서 설명한다. 몸의 움직임이든 호흡이든 마음이든 하나를 관찰하면 신·수·심·법이 동시에 수행된다. 이것의 극치가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사리풋타 존자는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탸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滅)은 어떤 상대가 있는가요?" 코오티라 존자는 대답하였다. "멸은 상대가 없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다섯 가지 감각기관[五根]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낀다. 곧 눈·코·귀·혀·몸 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끼는데 무엇이 그들 때문에 그 대상을 다 느끼며 무엇이 그들의 의지[依]가 되는 가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낍니다. 곧 눈·귀·코·혀·몸이 다섯 기지 감각기관은 제각기 다른 행과  다른 대상이 있어서 각각 제 대상을 느끼는데, 의지에 의하여 그 대상을 다 느끼며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의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모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차여! 의지는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르는 가요?"

"의지는 목숨을 의지하고 목숨을 의지하여 머무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목숨은 무엇을 의지하여 머무르는 가요?

"목숨은 따뜻한 기운을 의지하여 머무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락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목숨과 더운 기운,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인가 갈라지는 것인가요.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인 가요?"

"목숨과 더운 기운,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이요 갈라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요. 무슨 까닭인가 목숨으로 인하여 더운 기운이 있고 더운 기운으로 인하여 목숨이 있으며 만일 목숨이 없으면 곧 더운 기운이 없고 더운 기운이 없으면 곧 목숨이 없기 때문이오. 마치 기름과 심지로 인하여 등불을 켤 수 있는 것과 같소. 거기에 불꽃으로 인하여 빛이 있고 빛으로 인하여 불꽃이 있으며 만일 불꽃이 없으면 곧 빛이 없고 빛이 없으면 곧 불꽃이 없소. 이와 같이 목숨으로 인하여 더운 기운이 있고 더운 기운으로 인하여 목숨이 있으며, 만일 목숨이 없으면 곧 더운 기운이 없고 더운 기운이 없으면 곧 목숨이 없는 것이오. 그러므로 이 두 법은 합해지는 것이요. 갈라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이 두 법은 따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터티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한가요?"

"세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는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해지오. 어떤 것이 셋 인가. 첫째는 목숨이오. 둘째는 더운 기운이며, 셋째는 식별이오. 이 세 가지 법이 있어 산몸이 죽은 뒤에는 몸이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처럼 무정해지는 것이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죽음과 멸진정(滅盡定)에 듦과는 어떤 차별이 있나요?"

"죽음은 목숨이 이미 끝나고 더운 기운이 이미 떠나며 모든 감각기운이 무너지는 것이요. 비구가 멸진정에 든 것은 목숨이 끝나지 않고 더운 기운이 떠나지 않으며 모든 감각기관이 무너지지 않소. 죽음과 멸진정에 듦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진정에 든 것과 무상정(無想定)에 든 것과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 들면 생각과 느낌이 멸하오. 그러나 비구가 무상정에 들면 생각과 느낌이 멸하지 않소. 멸진정에 든 것과 무상정에 든 것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치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멸진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나는 멸진정에서 일어난다.’라고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비구가 무상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생각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오, 멸진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사람과는 이러한 차별이 있소."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 들어갈 때에는 몸의 행과 입과 뜻의 행 가운데서 어느 법이 먼저 멸하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 들어갈 때에는 먼저 몸의 행이 멸하고 다음에 입의 행이 멸하며 나중에 뜻의 행이 멸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픗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입과 뜻의 행 가운데서 어느 법이 먼저 생기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먼저 뜻의 행이 생기고 다음에는 입의 행이 생기며 나중에 몸의 행이 생기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 몇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는가요?"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세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움직이지 않는 부딪침이요, 둘째는 소유가 없는 부딪침이며, 셋째는 모양이 없는 부딪침이오.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에는 이 세 가지 부딪침에 부딪치는 것이오."(오매일여·무상정·멸진정을 구체적으로 점검, 탁마하는 과정이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공(空), 원이 없음, 모양이 없음의 이 세 법은 뜻도 다르고 말도 다른가요. 혹 뜻은 하나인데 말이 다른가요."

"공(空)과 원이 없음과 모양이 없는 이 세 법은 뜻도 다르고 말도 다르오." (평등지(平等智) 아닌 차별지(差別智)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법 거량은 이렇게 서로의 체험담을 진솔하게 나누는 것이 진정한 탁마일 것이다. 서로의 경계를 문자로만 거량하다가 뒤에서 비판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오매일여가 되는지 동정일여가 되는지를 진실하고 냉정하게 살려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정(定)이 생기는 가요?"

"네 가지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는 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넷 인가? 만일 비구가 탐욕을 떠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떠나 내지 제사선(四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네 인연이 있어 움직이지 않은 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언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無所有定)이 생기는가요?"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셋 인가? 만일 비구가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지나 내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소유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無想定)이 생기는 가요?"

"두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이 생기오. 어떤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을 생각하는 것이오, 이것을 두 인연이 있어 무상정이 생기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 머무르가요?"

"두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無想定)에  머무르오. 어던 것이 둘인가?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오.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을 생각하는 것이오. 이것을 두 가지 이연이 있어 무상정에 머무르는 것이라 하오."

"착하고 착하오, 어진 이, 코오티라여! "사리풋타 존자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물었다

"어진 이, 코오티라여! 몇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는가요?"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오. 첫째는 일체의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요 둘째는 생각이 없는 계층(無想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이 몸과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을 인으로 하고 목숨기관(命根)을 연으로 하는 것이오. 이것을 세 가지 인연이 있어 무상정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하오." 이와 같이 그 두 분은 착하고 착하오, 라고 서로 찬탄하고 서로 말한 바를 기뻐하며 받들어 행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절대의 세계

열반은 시간·공간의 제약적인 조건에서 벗어난다. 열반은 모든 부정적 ·긍정적· 상대적· 분별적 개념을 벗어나므로 부정도 긍정도 아닌 중도(中道)이다. 열반은 어떠한 논리나 표현도 넘어선 법부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이다.

잡아함경 249에서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기관이 다하고 욕심을 떠나 멸하고 쉬고 마친 뒤에도 '남음이 있는가'한다면 이것은 곧 빈말이요, '남음이 없는가'하면 이것도 빈말이다. '남음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면 이것도 빈말이다. '남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가'하면 이것도 빈말이다. 만일 여섯 가지 부딪쳐 들이는 곳이 다하고 욕심을 떠나 멸하고 쉬고 마친 뒤에는 모든 거짓을 떠난 반열반이라고 말면 곧 부처님 말씀이다."이것은 아난 존자의 질문에 대한 사리풋타 존자의 설명이다. 열반에 관해서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여!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없으며 갓이 없는 공간[空無邊處]도 아니며, 갓이 없는 의식 [識無邊處]도 아니며,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아니며, 이 세계도 아니며, 저 세계[非想非非想처]도 아니다. 비구여!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서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도 아니며 태어남도 아니다. 거기엔 세움도 없고, 소유도 없고 근거지도 없다. 고(苦)의 멸(滅) 이것이 열반이다. 비구여, 태어나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형상(조건)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도 없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하지 않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느니라.

조건 지워진 곳에는 변화가 있다. 조건 지워지지 않는 곳에는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곳에는 평온이 있다. 평온이 있는 곳엔 욕망이 없다. 욕망이 없는 곳엔 가고 옴이 없다. 업이 소멸한 가고 옴이 없는 곳엔 죽음도 태어남도 없다. 음도 태어남도 없는 곳엔 이 세계도 아니고 저 세계도 아니고 그 둘 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고(苦)의 끝인 열반이다."

그러면 열반은 어디에서 실현되는가?

밀린다 왕문경에 의하면 "계를 지키고 올바른 지혜를 가진 자는 열반을 실현한다. 그가 어디에 있더라도 특별한 장소에서 불은 일어나지 않지만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 지면 불은 일어난다. 마찬 가지로 열반은 특별한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열반은 달성된다."

상응부경전에서 로히탓사가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은 "고(苦)의 존재, 고(苦)의 시작, 고(苦)의 멸(열반), 열반에 이르는 길은 의식을 가진 이 육체 안에 있다고 선언하노라."라고 했다. 그러므로 열반은 죽은 다음이나 천상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계· 정· 혜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탐·진'·치를 제거하고 실상을 견할 때 지금, 여기 오온이 생 ·멸하는 곳에서 실현된다.


대승경전에 나타난 열반

대승경전 모두가 열반의 상태와 열반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수행과 관련된 부분만 간략히 살펴보겠다.

현재 남방불교에선 오온을 무상·고·무아로 보아 열반을 오온과 분리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북방불교에서는 오온, 12연기와 사제, 열반, 깨달음, 중도, 견성해탈을 하나로 보는 특성이 있다. 능엄경에서도 오온, 육입, 십이처, 십팔계에서 여래장을 보인다. 이러한 것은 잡아함경 296, 인연경에 12연기가 진여이며 공(空)이라는 내과 상통한다. 그리고 대승 불교의 또 하나의 수행상 특징은 번뇌를 제거 한다기 보다는 번뇌 즉 보리이므로 번뇌가 지혜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치 흙탕물이 맑은 물이 되듯이.

그리하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한 것이 상(常), 락(樂), 아(我),정(淨)으로. 탐·진·치가 계·정·혜의 완성으로. 무명이 지혜로. 6근6식이 6신통으로 전환한다.

결국 불교의 핵심인 사제, 연기, 증도를 공(空)의 측면에서 보아 우주전체를 대상으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입장에서 지혜와자비로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를 대승불교의 요체로 한다.

부처님의 최후 가르침은 "마음집중으로 게으르지 말고 해탈을 이룰 때까지 정진 하여라"였다. 지금 현재 이 순간 우리들의 몸 안에서 부처님이 찾아낸 위빠싸나가 전승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위빠싸나로 열반에 이르기만 하면 된다. 그므로 우리자신의 내부에서 탐·진·치의 독화살을 뽑고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견해야 하는 것이 당면 숙제이다. 체험으로 열반을 증득했을 때 지금까지 설명한 군더더기 말들은 환(幻)처럼 사라지고 일체의 고통이 없는 영원한 열반을 우리 스스로 맛볼 수 있으리라.

각묵스님의 아비담마외

[출처] 1) 색계(色界)의 4선정 |작성자 bhu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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