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허공에 글을 쓸 수 있겠는가!

통융 2017. 6. 28. 09:24

허공에 끌을 쓸 수 있겠는가!


옴!

모든 소리가 허공에 글을 쓰는 것이다.

글은 문자만이 아니라 소리도 글이다.


불법을 이해하고 앎에는 확인 도장을 어디에 찍는냐?가 있다.

해인이 대표적이듯 바다물 위에 도장을 찍는것이다.

깨달음의 정도는 아직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깨달음은 진흙에 도장을 찍는것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나 찰나임을 아는 것은 물 위에 도장을 찍는 것이 있고

진리는 있고 없음을 완전히 벗어난 깨달음은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이 있다.


즉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말을 글로 쓰는 것인데 이것을 방편인 말로 쓸 뿐이다.

앎이란 스스로 그러함으로 경험없이는 알 수 없다.

그렇듯이 공이나 깨달음이니 자성이니 불성이니 성령이니 등 모든 것은 스스로 체험하고 경험 없이 말하는 것은 허공에 글을 쓰려는 것과 같다.

허공꽃이라 한다. 허공이 어떻게 꽃을 피울 수있겠는가.


결국 어떤 진리를 안다고 말하고 쓰는 글은 모두가 자신의 알음아리의 수준이다.

다만 지신의 식견수준에서 이해할 뿐이다.

그 수준인 경계를 넘어에 있는 실체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자신이 앎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것을 체험하고 깨달은 자가 직접 그것을 확인하는 벙법리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글이나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그의 세계를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깨달음을 확인하는 것은 깨달음 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사람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즉 깨달은 사람들이 확인한 것을 참고해서 알 뿐이다.

예를 들어 만공스님이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없었다고 한다.

종소리가 난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게 만공 스님은 종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용하면서 말이나 글로써 전달할 뿐 만공스님이 어떤 깨달은 진리를 깨달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만공스님이 종소리를 듣고 깨달은 진리를 이심전심으로 만공스님과 같은 진리를 채험하는 것이다.



내 몸도 내것이 아니듯 내 이웃도 내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모두가 내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내 것 니 것을 분별하는 마음의 본체가 있는데 그것이 그이다.

그는 있거나 없거나가 아니라 그냥 일뿐이다.

그래서 모두가 그것에 있고 그것을 우리는 법이라하고 도라하고 성령이라하고 공이라 한다.

그리고 자성이라하고 참 나라고 하고 불성이라하고 하나의 유일한 그라한다.


그는 본래 부모미생전에 나이고 삼세에 걸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서로 인연되어 일체동체인 것인데 그러함 때문에 자비하는 원리다.

동체대비 원륭회통 무시무종 등의 말로 말글로 나타내기도 한다.


자비는 모든 것은 나와같다고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다.

그것이 분별이 없듯이 자비 또한 분별없는 나눔이고 하는쓰임인  행위 일 뿐이다.

자비는 이름이 자비일 뿐이지 행함없는 쓰임이기 때문에 여여함이라 한다.

여여함이란 여래이다고 금강경에서 말한다.


그래서 불법은 자비이고 불교는 자비 쓰임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다는 성품이 불법의 연기성의 시작이며 마침표이다.

우주는 나이다.

매 찰나 살아있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하는 주인공이 나이다.


덕산이 점심을 먹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려 했기 때문이다.

만약 덕산이 바로 깨어 있었다면 배불리 점심을 먹었을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마음으로 점심을 간파하려 하니 배가 부를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먼저 몸 앞에 나서지 마라.

見性이란 봄의 성품이 如來라는 것이다.

보는 성품이 아니라 봄 그 자체가 불성이고 부처라는 뜻이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머뭇거리고 머리로 생각 굴리지 마라.


지금 그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살아 있는 매 순간에 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순간을 관조하라.


덕산이 신발을 찾으려는 순간 불을 확 불어서 끌 때

그 찰나에 덕산은 하나되는 개합으로 깨어난 것이다.

밝음과 어둠이 생각으로 둘이 아닌 지금 현실 앞에 둘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는 전체를 관통하게 된 것이다.


'몸도 허망한 것인데 하물며 마음이랴' '색즉시공 공즉시생 수상행식 역부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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