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불법은 자비다ᆞ

통융 2017. 5. 28. 14:31

불법은 무엇입니까?

 

불법은 자비다. 

홍익중생 혹은 요익중생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불법이 아닙니까?  

그렇다.

부처님 뿐 만 아니라 이웃을 자비하는 마음을 내는 모든 뜻이 불법이다.  

弘益 혹은 饒益은 널리 인간뿐만 아니라 뭇 우리들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롭게 한다는 것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공생공존의 관계이며 나의 삶이다.

      

중생의 뜻은 무엇입니까? 

중생은 우리다. 우리는 우주 전체인 함께이다.

      

일심(一心)과 요익중생(饒益衆生)이라는 원효의 근본 사상이 전편에 깔려 있는 원효의 대표작인 화엄경소(華嚴經疏)에 보면

 중생은 여럿이 함께 라는 뜻이다.

 중생은 중생이란 글자 그대로 뭇 생명이란 말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뭇 생명이란, 자연계를 의지하여 살아가면서 그 삶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업력에 따라 생활하는,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면서 생존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중생은 중연소생[衆緣所生]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대체로 중생의 갈래는 태를 의지하여 탄생하는 태생, 알로서 태어나는 난생, 습기를 의지하여 태어나는 습생, 그리고 변화하여 태어나는 화생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중생이 생겨나는 양식을 태(((() 4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수많은 중생이 몸담아 살아가는 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하는 것도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산하대지를 통틀어서 하는 말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은 중생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다는 뜻에서 이를 기세간 이라 한다.

       

윤회는 무엇입니까?

윤회는 거듭남을 말한다.

중생은 끝없이 유랑하면서 자기의 업을 따라 승침(昇沈)하는 것이 윤회를 뜻한다.

윤회에 의해 개인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업의 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기에 중생이라 이름한다.

중생은 업력에 의해 괴로움을 느끼고 그 업력에 의해 끌려 다닌다.

그것을 바로 중생의 윤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결국 윤회가 없는 것은 중생의 삶이 아닌 부처의 삶이 된다.

 

중생(衆生)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더 찾아보면

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이 세상에 을 얻은 것. 산 것. 살아있는 것. 살고자 하여 살 수 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여러 사람. 세상 사람.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생에는 중인(衆人)과 함께 산다는 의미.

중다(衆多)의 법이 거짓으로 화합하여 산다는 의미. 중다(衆多)의 생사를 거치는 의미 등이 있다.  

유정(有情), 살타(薩埵), 살다바(薩多婆), 복호선나(僕呼善那), 보특가라(補特伽羅) 다른 표기 언어 sentient being , 衆生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는 중생(衆生)은 산스끄리뜨어의 바후자나(bahujana), 잔뚜(jantu), 자가뜨(jagat), 사뜨빠(sattva)’ 등을 한역한 것이지만 원래 불교 용어가 아니라 예기(禮記), 장자(莊子)등의 중국 고전에 등장한 단어였다.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3~413)이라는 걸출한 대역경사 등장 이전인 고역(古譯)의 시기는 불교의 개념을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을 차용하거나 음차로 한역하던 시기로, 이때부터 윤회하는 존재을 중생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뿌드가라윤회하는 존재를 구분하기 위해서 현장은 중생을 유정(有情)’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며 옮겼으며 그 반대되는 정을 가지지 않는 존재무정(無情)’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4(四大)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정과 같이 무상(無常)하지만 윤회하지 않는 존재인 초목과 바위 등의 사물과 구분하였다. 현장의 이와 같은 새로운 역경 언어에 대한 집착은 유식사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팔식(第八識)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 bīja vijnāna)을 뜻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의 전변을 통한 윤회를 설명할 때 정(), 마음[], 또는 식()에 관련된 것을 명확하게 표현해야 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홍익인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우리 민족의 단군역사의 건국 이념이 아닙니까?

그렇다 .

우리 민족은 일찍이 인간을 위한 평등의 치국을 펼쳤다.


금년 정유년을 단기 4350년 불기는 2561년으로 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부처님이 오시기전 2000년 전에 벌써 인간을 이롭게 하는 제세이화를 펼쳤다.

즉 하늘 하나라는 천민 사상은 결국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전재한다.

인간의 본 성품은 하나의 님이 되는 것.

그 하나라는 본성 자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본질을 꿰뚫어 깨달음을 갖게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수천 년이 지난 역사적 사건을 스님이라는 시각으로 일연스님이 쓴 역사서이다.

그래서 적확한 사료의 검증이 더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역사서로 인정하고 사용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다.

 

홍익인간은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가 없던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인류 역사상 이렇게 인간평등 사상으로 앞선 의식과 성정을 가지고 살아온 민족은 없다.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못 우리를 존중해야 되는 것과 본래 뭇 우리가 중생과 하나라는 사상은 다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 했는데 어째서 홍익중생이라 하십니까?

깨달음의 궁극은 모든 중생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자비만 있게 된다.

부처님이 깨닫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 나아가 신이라는 절대의 권력에 의존하지만 인간만이 선택받은 신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별이 없다.

그동안의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본 신본이든 인본이든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불법의 진리를 알지 못한 사람이나 신앙들은 지금 까지도 모든 것이 인간 위주의 사회로 구성되고 인간 위주의 세상을 펼치고 모든 동물과 사물에 대한 분별로 인식하는 인간 위주의 의식이라는 점에는 한계를 갖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주 속에 모든 존재의 근원과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한 철처한 탐구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거나 없는 거나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로 서로 소통되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진리를 연기법이라 한다.

모든 만물은 서로 연기된 인연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그래서 나와 남 그리고 모든 자연과 생물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햇살과 물과 공기와 땅이 없으면 존재 할 수 없다. 이웃이 없이 나 혼자만 독단적으로 살 수 없다.

즉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된 존재는 없고 모두가 서로서로 연기되어 있는 거대한 하나의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 하물며 물건 하나까지도 나와 동등하다는 평등사상인 홍익중생이라 한다.

 

깨달음이란 참된 진리를 터득함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내가 생로병사인 어떻게 창조되어 존재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 어떻게 살다가 죽는 지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생주이멸, 성주괴공이라 모든 이치가 연기된 중도의 진리임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이것을 알게 되면 자비가 불법임을 안다.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 가족들과 인연을 끊거나 담을 쌓고 은둔 생활을 하는데 어째서 자비라 할 수 있습니까?

      

언뜻 보기는 그렇게 보인다. 또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출가 의도가 세속을 도피하는 목적으로 출가를 했더라도 불법을 공부하게 되면 스스로 진리의 참 쓰임을 깨닫게 된다.  

출가자들을 크게 2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출가의 목적이 속세를 떠나는 출가가 있고 수행을 목적으로 출가하는 부류가 있다.  

도피적인 출가는 부모나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살고 싶지만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다 보면 생각과 뜻이 달라지고,  

또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기 위해 출가자들도 처음에는 대승적인 깨달음 보다는 자신의 안위나 해탈을 목적으로 출가하는 것이 소승적인 수행자들이지만 불법을 바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대승적 자비를 펼치게 되는데

 

2부류 모두가 혈연적인 가족이나 뭇 모든 중생들이 나와 인연됨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모든 중생을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된다.

     

스스로 자비의 목적이며 수단이 되어 요익중생, 홍익중생의 육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그 행함은 행함 만 있을뿐이지 행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이 대비심이라 하고 무가행이며 칭법행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