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門열면 밝은 世上>
*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그것이 깨달음이다.(만약 깨달음이 있다. 없다고 생각하면 자꾸 뭔가를 찾으려 한다.
그 찾고자 하는 분별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 그러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깨달은 사람입니까?
아니,
그대는 이미 깨달음을 생각 하고 있지 않으냐.
* 그러면 말 없는 벙어리나 바보가 깨달은 사람입니까?
벙어리는 벙어리이고 바보는 바보일뿐이지 깨달음과는 상관치 않는다.
왜 그대가 마음을 내느냐.
* 그러면 왜 선사들은 깨달았다고 합니까?
그대가 지금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 선사들은 스스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진리를 쓸 뿐이다.
만약 깨달았다고 하는 자는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 그러면 어떻게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스스로 깨닫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깨닫지 않고는 깨달은 후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각자의 식견 만큼 이해 할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사과가 있는데 그대가 직접 먹어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참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또한 그 사과를 직접 먹어본 사람이 그대에게 사과 맛을 아무리 상세히 설명을 해 줘도 그대는 그대의 식견으로 이해 할 뿐이지 100%사과의 맛을 알지 못한다.
진리란 이와 같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진리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진리의 깨달음은 불교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모든 종교나 신앙들의 목적은 진리의 깨달음에 있다. 그런데 구원과 기복을 하는 것으로 전도된 것이 문제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주와 하나 되는 참 나가 되는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깨달음을 질문을 해봐라.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천천히 손바닥을 펴서 보인다.
봤느냐?
* 네.
무엇을 봤느냐?
* 손바닥을 봤습니다.
하나만 봤다.(손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분별마음이다.)
나는 손바닥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그대에게 온 몸으로 보였다.
그 속에는 내 마음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대는 보이는 손만 봤지 그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 했다.
즉 그대 마음과 내 마음이 같지 않다.
그대는 결과만 본 것이지 행동 이전인 (깨달음)의 본 마음을 보지 못 했다.
* 그러면 어떻게 봐야 진실(깨달음)을 바로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고 했다.
바로보고 바로안다.고 했다.
즉 정견正見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마음을 먼저 내지 마라. 오온은 색 과 수상행식이다.
색이 공함을 보면 마음은 절로 공하다.
그런데 원리를 전도몽상하여 마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본질의 실체를 노친다.
깨닫지 않는 마음(5온)으로는 답을 찾지 못한다.
그대의 생각 분별하는 모든 알음아리(18경계)를 내려 놓으면 그대 마음이 텅 빌 때 그 마음이 내 마음과 하나가 된다.
마음 챙김이라 한다.
만약 마음을 텅 비운 자는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보인다.'
혹은 다른 행동을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로는 그대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대는 지금 그대 생각으로 보는 것이지 나와 하나가 되지 못 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 한다.
이심전심 즉 모든 대상과 하나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사과의 맛을 100% 앎은 직접 먹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직접 먹어본 사과의 맛을 나에게 100% 전달 해 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대가 맛을 설명해도 내가 이해 할 뿐이지 직접 느끼지 못한다.
내가 직접 먹어보면 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설명이 아니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그대로 체험하고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냥 볼 뿐, 일 뿐, 행할 뿐이다.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일어나는 작용성'이다.
* 깨닫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있습니까?
위에서 말 했듯이 깨달음은 분별하는 마음(간택심)만 내려 놓으면 된다.
신심명(信心銘)에도 至道無難有嫌揀擇(지도무난 유험간택) 但莫憎愛 通然明白(단막증애 통연명백)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며 오직 가리고 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환하게 명백해지리라."
이러한 분명한 길이 있는데도 스스로가 자신을 100%로 믿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의 인습(업)에 마음이 늘 끄달려 다닌다.
*그러면 깨닫는 것은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무감각으로 사는 것 입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감각에 충실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자비롭게 마음이 바뀐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간택을 하지 않아야 된다 면서요.
불법을 바로 깨닫는 것은 중도의 근본인 연기성으로 무상 무아(고) 열반의 3법인을 바로 앎 이기 때문에 자비의 근본인 육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간택을 하는냐?
내가 간택이 되느냐는 다르다.
내가 앞서 손을 들어 보일 때
그대는 '손을 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인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손을 봤다'고 말한 것은 주관적인 내가 분별(간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손을 들어 보이는' 행동은 행위 자체만 있다.
왜?라는 간택심이 없다.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없다.
그러면 다시 그대 질문으로 돌아가면
간택은 이분법으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이 있다.
간택을 하지 않는 것은 오직 행위자체가 된다. 분별하는 주체인 '나'라는 것이 없어진 상태만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더 적극적이고 걸림 없이 사랑과 자비를 나눔하게 된다.
그러면 또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내가 없고 생각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 할 수 있다.
그 답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깨달은 후의 마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자유로운 영혼을 원하고
삶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 공부를 하면 된다.
*마음 공부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다양한 방법과 수행이 있겠지만 참선과 화두 수행을 권하고싶다.
화두는 공안이라 해서 말과 뜻을 도구나 수단으로 삼아서 공부하는 것이다.
화두(話頭)는 말과 뜻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보라는 것이다.
모든 화두 공안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는 것 즉 체험하기, 깨닫기 위한 작업이다.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은 말과 뜻을 의심 하는 것이 아니라 말 이전에 것을 알아 내는 것이다.
*좀더 쉽게 설명해 주십시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누가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다는 비유다.
의도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것인데 대부분 손가락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속 마음을 봐야하고 그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사람과 하나되는 마음이 되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게된다.
왜냐면 그사람은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수단인 도구로 썼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 화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화두를 통해 그 화두 넘어, 말 이전에 의도를 알아 차리는 것이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이 법회에서 말씀을 하지 않고 가만히 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는 법문을 했다.
모두가 어리둥절 했지만 가섭은 미소를 지었다.
가섭은 왜 미소를 지었는가?
내가 깨달아야 겠다는 마음, 알아야 겠다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오직 100% 모를 뿐으로 마음을 텅 비우면 가섭의 마음이 그대로 비추고 이심전심이 된 부처의 마음이 된다.
부처나 가섭의 마음은 깨달음을 주고받는 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그 뜻을 알아차리면 그대도 깨달은 마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가섭처럼 미소가 나온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행위가 초견성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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