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융의 이야기

중도는 무엇입니까?

통융 2017. 5. 15. 14:23

중도가 무엇입니까?

 

* 중도는 무엇입니까?

방안은 어둡고 문밖에는 밝습니다.


* 중도가 무엇이냐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동풍이 불면 봄인 줄 알고 서풍이 불면 가을인줄 안다.

 

*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쉽게 설명을 해 주세요.

물은 얼음이 되고 끓으면 수증기가 되지만 그 물의 속성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림이다.

 

덧말을 하자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구나 다 알고 스스로 행하여 쓰고 있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다만 깨어서 알고 쓰는 자와 모르고 쓰는 차이다.

    

중도의 당체(堂體)를 말이나 글로써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곧장 알아차림 하는것이 선()적인 알아차림이다.  

알고자 하는 생각만 내려놓으면 중도의 바탕이 그대로 드러난다.

늘 성성하게 깨어서 작용하는 순간이 중도이다

     

그래서 선문답을 통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한다고 한다.

그래서 알면 너무 쉽지만 머리로 생각을 따라잡으니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집이 있는데  집 전체를 단밖에 알아차림 하는 것이 선(禪)적인 깨달음이라면 

그 집은 누가 설계했고 크기와 모양은 어떻고 재료가 무엇이 쓰였으며 어떤 방법으로 짓고 언제 세워 졌는지 등등 시시콜콜 설명을 해서 집을 알아치리는 방법이 교학(敎學)적이라 한다.


이렇게 집을 이해 하는 방법처럼 부처님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84천 법문을 법설(法說)하신 것이다.


* 그러면 중도를 좀더 이해가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중도에 대해서 구체적인 설명을 교학(敎學)적으로 알아보자.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중도인 불법이다.

그리고 깨닫고 난 후 최초로 말씀하신 것이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하였다"고 했다.

 중도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알았다는 말이다.

 

중도의 이치(理致)는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차림한 것이다.

즉 나는 우주속에 인연(因緣) 연기(緣起)된 이치로 생성소멸하는 것으로 내가 우주 전체임을 깨달은 것이다. 

연기란 우주의 모든 만물은 그물망(인드라망) 처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된 존재가 있을 수 없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비유비무(非有非無)라 하며 즉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有卽是無, 無卽是有)이다.

 

*화엄경, 법화경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가 우주이며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 一切卽一 ) 제법실상(諸法實相)이나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진법계(一盡法界)를 말한 것은 모두 중도에 입각한 일심사상( 一心思想)이다.

 

그런데 현실세계는 선()과 악()의 상대, ()와 비()의 상대, ()와 무()의 상대, ()와 낙()의 상대 등, 이렇듯 모든 것이 서로 상대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어 늘 투쟁과 시비가 일어난다.


* 부처님 외에 중도와 맥을 같이하거나 대비되는 여러 견해를 알아보자.


1, 노자의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스스로 그러함이 진리임을 말한다.

 <도덕경>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지식으로 이야기 할 때는 도가 될 수 없다.

왜냐면 도(道=中道)는 말과 뜻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말인데 화두(話頭) 참선의 핵심과 같다.

 

 2, 소크라테스의 중도적 부지(不知)의 앎.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할 때 누가 질문을 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앎니까?' 라고 하자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을 안다.'라고 대답을 했다.

지식(知識)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다는 깨달음이다.


같은 맥락의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가 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질문했다.“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 만법은 텅 빈 것. 성스럽다고할 것이 없습니다.”
양무제는 의아하여 다시 질문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달마대사는 말했다.
“불식(不識).” 알지 못 한다.

3, 중용(中庸)은 중도와 다르다. - 그 중간을 선택한다

취우치지 안고 변하지 않는 것 성선설의 바탕이 된 주자의 학설로

중용(中庸)은 유교사상에서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음. 이를 테면 태과(太過)불급(不及)으로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을 취하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은 단순한 중간의 의미에 있다.


4, 예수도 진리가 창조(創造)와 중도의 이치를 밝히는데 요한복음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다.

 진리는  성부(聖父)와 성자(聖子) 성령(聖靈)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여호와 하나님인 전체의 나를 강조하며 '나는 길이요 진리료 생명임'을 설명 한다.

갈라디아서에서는 '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가 아님을 아는 것은 전체인 나(하나님)를 앎인 중도의 원리다.

    

5, 헤겔의 변증법(辯證法)적 중도 - (), (), (), 이 세 가지가 변증법의 기본 공식으로 중도와 비슷하지만 역사의 발전 과정 즉 조건(출발이 절대성)과 시간을 전제로 변하는 점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정()이 모순이 생기면, 다시 반()이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것이 서로서로 융합 되어서 합()이라는 사상이 나온다는 이론이다.

시간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말하는 헤겔의 정, , 합 이론도, 정과 반을 완전히 버리고 정과 반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도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6, 아인슈타인의 중도적인 이론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질량 에너지 보존의 법칙 E=mc^2은 에너지는 질량과 속도의 변화와 같다.

질량은 상태 변화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한다는 법칙이다.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존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도의 순환연기(循環緣起)의 원리와 맥을 같이 한다.

이상의 중도에 관한 설명은 다른 분들의 논고에서 참고를 한 것들이 있고

중도의 분분적인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중도의 이치를 깨달음을 통해서 이해 한다고는 불 수없다.

왜냐면 부처가 깨달은 중도의 진리는 연거법에 근거를 두고 있고

연기법의 3법인인 재행무상과 재법무아 그리고 열반적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러한 확철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못한 지식적인 앎이라고 판단할 수있다. 


*  여기에 한 예를 보자. 식탁위에 사과가 하나 있다.

이 사과를 내가 먹으면 사과라는 형상은 없어진다.

하지만 그 사과의 수분과 각종 물질들은 내 몸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로 변화한다.

사과는 내가 된다.

그리고 그 변한 사과의 에너지들은 다시 내 몸 밖으로 배출 된다.

그 에너지가 다시 과수원에서 거름이 되거나 공기 중에서 동화작용을 통해서 다시 사과가 열리게 되고 식탁위에 올라 오게 된다. 

결국 사과라는 존재는 형태가 변할 뿐이지 지속적으로 그 질과 량의 에너지는 변하지 않으며 그 에너지 들이 변화하다가 조건과 인연이 맞으면 다시 사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을 예로 들어보자.

물은 찬물 뜨거운 물이 본래 절대성이 없다.

물은 얼음이 되고 더우면 수증기가 되지만 그 물의 속성과 량은 변함이 없다.


중도는 본래 찬물 더운 물이 없듯이 본래 우리 마음도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조건에서 선행을 하느냐 악행을 하느냐에 따라 악한사람 나쁜 사람으로 보일 뿐이지 본성은 하나임을 말한다.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인간들의 인식의 생각이 잣대를 만드는 것이지 절대 기준이 없다.

그 본래의 순수한 마음인 본성을 불교에서는 불성, 자성, 진여, , 불 등이라 한다. 하느님의 성품이라 해도 좋고 도,ᆞ 진리,ᆞ 진아, , 등 뭐라 해도 이름일 뿐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 그러면 中道는 우주가 만들어진 原理이며 眞理인 法이네요?

    그렇다.

 중도의 진리는 누가 만들거나 창조한 것도 아니며 본래부터 있다.

우주는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듯 모든 것이 그러함으로 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론에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십시오.

 

부처님은 출가 6년 만에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나니 그 진리는 우주의 생성소멸의 이치이다.

그 진리는 불생불멸하며 늘 여여한데 우리 중생들이 각 마음의 분별심이 잠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처님도 그러한 마음을 바로 깨달아  모든 생사고뇌에서 벗어나고 해탈과 보살의 살림살이를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중도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 알지 못해서 고해(苦海)의 삶을 산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통해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바로 가르쳐 주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삼처전심(三處傳心)이 있다.

이는 선지(禪志)로 깨달음을 증득함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중생들의 각 근기에 맞춰서 중도의 이치를 교학적으로 세분하여 

4법인(法印)을 통해 4성제(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8정도(正道) 12연기를 설법했다.


*진리의 이치를 보면

1, 나는 제행무상(諸行無常)한 존재이다.

즉 모든 것은 중도(연기성)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자필멸(生者必滅),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이치로 한 순간도 고정된 실체가 없이 변해 간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멸성제(滅聖諸)의 원이이 된다.

 

2, 그리고 이러한 무상함으로 모든 것은 한 순간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진실한 자아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집성제(集聖諸)의 원인이 된다.

 

 

3, 그런데 만약 이러한 이치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세상은 늘 변하지 않는다는 착각과 일체는 변하여 나라는 존재가 없이 무상하다고만 생각을 가지면 모두가 괴로움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며 고성제(苦聖諸)의 원인이다.

 

오온(五蘊) (), (), (), (), (), () 작용으로 사고(四苦)인 생노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등과 헤어지는 아픔

원증회고(怨憎會苦)내가 싫어하는 것 원수같은 사람 등과 만나지는 아픔

구불득고(求不得苦)내가 원하거나 갖고자 하는것 등이 채워지지 않는 아픔

오음성고(五陰盛苦)육체적인 오욕락(식욕.수면욕.성욕.명예욕)의 아픔의 팔고(八苦) 등이 일어난다.

 

인간이 무상(無常),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永生)에 집착하여 그로써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4, 이러한 고()의 생성 원인과 소멸하는 방법을 찾아 깨닫게 되면 무상과 무아를 바로 알아차리고 참 나를 바로 쓰게 된다.

그러한 고()의 실체와 실상들이 영원한 것이 없고 한 찰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환연기 하며 돌아가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위의 세 가지의 진리가 생성되고 존재하고 소멸하는 것이 중도(12연기)실상의 이치라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면 도성제(道聖諸)인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든다.

이러한 진리는 팔정도(八正道)를 통해서도 계정혜(戒定慧) 3학을 깨달아 중도를 정등각 한다.

바른 알아차림인 정념(正念)을 통해서 계율(戒律)을 바르게 지키는 바른 말 정어(正語), 바른 행동 정업(正業), 바른 생계 정명(正命)이 있다.

바른 지혜(知慧)를 알아차림 하는 정념(正念), 바른 견해 정견(正見), 바른 사유 정사유(正思惟)가 있다.

바른 선정(禪定)에는 정진(正精進), 바른 집중인 정정(正定)]이 있다.

 

이러한 중도를 정등각 하는 교학(敎學)4법인(法印)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 열반적정(涅槃寂靜), 4성제(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8정도(正道) 12연기 등 진리를 확철히 알아차림 하여 불법의 실체와 실상과 쓰임을 늘 깨닫는 것이 열반이며 중도를 앎이라 한다.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무상법문 즉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삼처전심(三處傳心)으로

이를 선지(禪志)를 말함이며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을 말한다.

참선(參禪)을 통해 중도의 진리를 알아 차리는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본성과 나타냄과 쓰임인 체상용(體相用)으로 나타내어 설명 할 수 있다.


※ 중도의 실()는 본래 공()하다고 했다. 무상(無常)의 세계이다.

이것은 본성(本性),참나(眞我)라고도 한다. 즉 내가 세상을 알아차림 하는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참 나라는 존재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는 돌고 도는 세상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했다.

그대가 지금 마음이나 생각을 나타내 보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허공을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타내겠는가.

그래서 있다고 없다고도 못한다.

 

혹자는 무상(無常)하다고 없다는 무()로 착각하여 불교의 진리는 허무주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중도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식견이다.

 

우리가 혼돈하는 無와 空을 확철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舞라는 것은 없다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은 본래 없다는 표현이 맞다.

하지만 空은 있기도 없기도하는 것으로 色의 경계를 空이라 한다.

그래서 空은 없는것이 아니라 텅 빈 것, 다시말하면 유무를 초월한 상태를 말한다.

허공을 예로 들었던 것 처럼 말이다.

즉 오온이라는 것은 색과 수상행식인데 색은 빛으로 만든 물질이라면 수상행식은 색을 쫒아 생기는 마음이다.

즉 색이 공하면 수상행식은 절로 空하게 된다. 이것이 1차적인 照見이다. 見性이라 한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이 역부여시라고 했다.

 

이 중도의 본성이 나타남인 실상(實相)의 세계를 보자.

 

허공에 나타나는 세상이 다 그대 눈앞에 실제 한다.

실상이 있으므로 허공이 있다고 할 수 있지 허공 자체로는 있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산이 있으니 하늘이 있고 허공이 있어서 산이 나타나는 것이다.

찰나의 세계이다. 모양과 이름을 초월해서 진리의 세계로 나라는 생각을 비우면 큰 나가 있게 된다. 이때 시간은 공간은 그대로 있다. 오직 모를 뿐이다. 이 소식은 사과는 사과이고 나무는 나무이다.

지금 그대가 보고 듣는 것이 전체가 진리다.

가는 것은 가는 것이요 오는 것은 오는 것이요. 참새는 짹짹하고 개는 멍멍 짓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완전한 세계 일체중생이 실유불성 부처 아닌 것이 없는 자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계이다.

 

 

이러한 중도의 실상이 나타나서 각자의 쓰임이 용()있다.

 

사람은 사람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흘러가고

의자는 앉는 것이요.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는 것이다.

처처가 불상이요 사사가 불공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쓰임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다.

불교의 목적이기도한 진리의 쓰임이다.



이상에서 중도의 진리에 대해서 선교(禪敎)의  이론적인 설명을 알아봤는데

()과 교()의 진리를 이해 하는데 직접 문제를 가지고 체험해 보자.


진리는 모두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말과 글이 다르게 쓰인다고 해서 그 본성과 질은 바뀌지 않듯 말이다.

물을 영어는 '워터' 일본말은 '미즈' 이고 중국어는 '스웨이'라 한다.

 

 

내가 당신이 보는 앞에서 물을 컵 안에 붓고 난 다음

컵을 들고 당신에게 질문을 하겠다.

이 컵 안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1, 당신이 미국 사람이라면 워터

2, 일본 사람은 미즈

3, 중국 사람은 스웨이

4, 한국 사람은

5,  또 한 사람은  'H2O' 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 것은 H2O원소를 가진 물질을 각 나라마다 워터, 미즈, 스웨이, 물로 각각 자신들이 이해하고 소통하는 약속의 지식이나 알음알이 즉 일반적인 물을 생각하며  말로 답하는 것이다.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컵의 물에게는 미안한 답이다ㅎㅎ

왜냐면 완벽한 컵의 물의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합니까?

 '물' 

     

* 같은 대답이 아닙니까?

소승이 컵에 물을 마셔버린다.


*...........


물을 마셔버리는 행위는

지금 컵 속에 있는 물을 가장 완벽하게 알아내는 답일 것이다.

물을 마시는 행위는 온전히 지식이나 알음알이 혹은 약속된 말과는 상관없다.

온전히 물이 나와 하나가 될 때 가장 완벽하게 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나= 물, 어떤 마음내어 쓰는 이차적인 언어나 말이 필요 없다.


진리는 지금에 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다 오직 지금 깨어 있는 작용이다.

물이나 미쯔니 하는 말들은 지난 과거의 말과 생각의 찌꺼기를 빌려쓰는 격이다.

그래서 말과 생각 화두의 글귀 이전의 것이라고 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물은  '이런 이런 것을 물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으로 과거에 물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등으로 이해하는 과거의 물이지 지금의 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컵 안에 물이 차가울 수도 더울 수도 아니면 맛이 각양각색으로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대답이 될 수가 없다.

다만 전체로  물이라는 것 밖에는 알 수 없다.

결국 추상적인 설명으로 지금 컵에 담긴 물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을 교학(敎學)적인 진리의 이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장 완전(完全)하게 물을 알아 버린 행위

물과 내가 일체동심(一體同心),이심전심(以心傳心)이 되었기 때문에

차가운지 따뜻한지 맛이 어떤지를 설명이 필요 없다.

어떤 말도 필요 없다.

단밖에 알아 차린다.

이것이 선()적인 진리의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진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 문자(不入文字)라는 말을 쓴다.

 

 

중도(中道)라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이와 같다.

교학 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식견(識見)으로 상상하는 상념(想念)일 뿐이다.

중도가 내 안에서 하나로 융통(融通)되어 돌아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체험하고 늘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대 자유인이 되며 해탈자이다.


깨달음의 방법은 각자의 근기와 인연법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지식으로든 화두이든 염불이든 간경이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진리에 체험하는 깨달음이 장땡이다.


* 중도가 무엇입니까?

오늘은 정유년 6월 열하루 일요일이 쉬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