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앞에서 부처님에게 제석천이 꽃을 올리며 부처님에게 설법을 요청한다.
부처님이 꽃묶음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다.
모든 대중이 어리둥절하여 침묵을 하는데 .....
가섭만 빙그레 웃는다.
부처와 가섭은 통해 한 마음이 되었네.
그래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정법안장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 가섭을 보고 "당신은 왜 웃습니까?" 질문을 해 보라.
그러면 가섭은 그냥 웃을 것이다.
그 웃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런데 왜 또 웃지? 라고 의문을 가진다.
그 웃음의 의도를 어떻게 해야 알아차리지?
그 웃음이 부처가 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는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인데...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지.
부처가 들어 올린 꽃은 부처가 깨달은 진리인데 무엇을 어떻게 가섭이 알아차리고 웃은 거지?
아니면 가섭은 그냥 뜻 없이 웃은 건가?
부처가 들어 올린 꽃에 대한 예의로...
그렇게 당신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웃는 것이 당신이라고 생각해 봐라.
가섭이 왜 웃는지를 묻지말고 가섭의 마음이 되어봐라.
당신이 웃는다.
당신은 웃을 때 무엇이 작용을 하는가?
웃을 일이 생기면 마음작용을 통해
입이 웃고 얼굴이 표정이 웃는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신경이 혹은 마음이 세포나 기관을 작용해서 웃는다고 한다.
하지만 가만히 봐라.
당신이 생각하는 그 어느 것도 웃지 않는다.
입도,마음도,정신도,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웃을 수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가 독립된 스스로 의지가 없다.
모두가 허수아비이며 꼭두각시이다.
그러면 그러한 모든 대상들이 인연 연기된 작용성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 인연연기성을 최초로 작용시키는 것은 그러면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조건이 있어야 반사작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당신이 머리로 이해하고 그 어떠한 논리나 법칙으로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
무엇이 웃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연기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상대성이다.
상대성은 변화한다.
하지만 웃음은 웃음 전체이며 자체뿐인 절대성이다.
절대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웃는 것인가?
웃는 것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
당신도 모르는 어떤 것이 작용하는 것,
그 어떤 것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자.
법이라고 하자.
그것들을
우주가 웃는다.
부처가 웃는다.
하느님이 웃는다.
하늘이 웃는다.
허공이 웃는다.
마음이 웃는다.
당신이 웃는다.
웃는 놈이 웃는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그냥 웃을 뿐이다.라고 한다.
결국 웃는 것은 모두가 웃는 것이다.
특정한 당신이 가섭이 그 누가 웃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누구가, 무엇이,라는 이름하여 붙일 수 가 없다.
도가도 비상도요.
원리전도몽상이요.
무시무종이요.
아뇩다락삼약삼보리라고 한 뜻이다.
그러면 왜 웃는지 답이 없단 말인가?
천만에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다만 답을 말이나 글로써 설명 할 수 없을 뿐,
왜냐면 진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고 오직 지금 살아 있는 작용성이기 때문이다.
가섭은 왜 웃습니까?
내가 지금 웃는 모습을 어떻게 글로 말로 설명하지?
ㅋㅋㅋ
그대도 한 번 웃어 봐라. 지금
< 덧말>
꽃 한송이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네.
달은 휘영청 밝아 곳간데 없이 두루한데
어찌 달을 보지 않고 손을 보려 하는가.
부처가 꽃든 소식도 가섭이 웃는 소식도 그렇지.
부처가 꽃 한송이 들면 나도 꽃을 들고, 가섭이 웃으면 나도 웃는다.
오가는 것이 없는데 무엇을 주고 받는가!
부처도 정법안장도 가섭도 두루하여 밝은데 어디에 무엇이 있다고 전하는니 마느니 하겠는가?
글짜에 속지말고 뜻에도 속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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