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제1편
삼보에 귀의 하옵고...
현각스님이 화계사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현각스님 소개
1964년 미국 뉴저지 카톨릭 집안에서 출생
1987년 예일대학에서 서양철학 및 영문학 학사학위 취득
1988-89년 하버드대학에서 숭산스님 친견 후 불교입문
1992년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학위 취득
1992년 숭산스님의 ‘세계일화’ 영문판 번역
1992년 중국 조계산 남화사에서 사미계 받음
1996년 청허불교문화원에서 2년간 불교강좌
1996년 통도사에서 비구계 받음
1997년 숭산스님의 ‘선의 나침반’ 영문판 편역
1997-98년 재미 홍법원[미국 관음선원] 주지 역임
2001년 숭산스님에게 인가를 받음
현재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장
*** 불자 여러분들의 수행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현각스님- ***
[ 금강경강의 1회 ]
금강경은 불교의 가장 유명한 경전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아시다시피 금강경은 오랫동안 아시아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서양에서도 매우 유명하지요.
금강경은 매우 짧으나 이 경은 불교 뿐 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철학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는 위대한 경전이랍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학문적인 지식을 설하는 경이 아닙니다.
저는 경전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이 없는 참선 하는 스님입니다.
그로 인해 저의 강의는 때때로 학문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사실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인 ‘공’ 모든 것의 공함과 연관이 있겠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지식이나 학문적인 강의를 기대하지 않으시길 부탁 드립니다.
대신 여러분께서는 금강경의 정수를 이해하여
여러분 각자의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청강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금강경을 열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지 들어볼까요?
아, 그전에,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금강경은 대승불교 가르침입니다만
부처님이 약 55세에서 75세 사이에 설법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처님이 약 80세때 열반하셨으니, 거의 생애 마지막 즈음에 전해진 것이겠네요.
우리가 부처님의 다른 여러 가르침에 대해서 공부한 듯이,
금강경은 대승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의 가장 핵심은 바로 ‘공함’ 입니다.
‘텅 비어 있음’ 입니다. 텅텅 비어 있음 입니다.
하지만 ‘공’ 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허무주의나,
부족하다는 그런 뜻의 부정적 의미가 아닌,
모든 생명 본질 자체의 공함을 뜻합니다.
이기심이나 또는 의지와 같은 ‘나’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것이 본래 텅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까,
내가 베푸는 ‘보시’ 조차도 사실은 공한 것이겠죠.
이 가르침은 모든 불교 경전 뿐이 아닌, 그리스도 경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금강경은 가장 완벽하게 간결 명료 합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 30분도 채 안 걸려서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짧은 금강경이지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읽을 수 있는 최상의 진리를 담은 경전일 것입니다.
금강경은 모든 것이 공함을 밝혀 줌으로서 우리가 잘못된 아상과 이기심등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내’가 공하니 내가 받는 고통이라는 것도 본래는 없는 것이지요.
결국은 자신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아가서는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공함’ 입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자, 그럼 저는 이 금강경의 ‘공함’의 가르침을 최선을 다해 전달하여 여러분의 수행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금강경의 제1품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그 때 부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이 때 세존께서는 식사시간이 되어, 옷을 입고 바리때 들고서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걸식하셨다. 성 안에서 한 집 한 집 차례로 걸식을 하시고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끝내고 의발을 수습하신뒤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으셨다.’]
내용이 꽤 흥미롭지요. 부처님이 설법을 펼치기 전의 준비 단계 같네요.
저는 옛날 이 경을 읽을 때 1품은 그냥 대충 흘려 읽고 다음 품으로 넘어갔었습니다.
‘뭐 그냥 밥먹을 시간되서 밖으로 나가 걸식하고 들어와서 앉아서 …밥 먹고 뭐….그랫었겠지~ 다음 페이지는 뭐가 있을까~
여러분!
사실 금강경의 모든 가르침은 바로 이렇게 짧은 제1품에 모두 나와있습니다.
이게 금강경의 전부입니다.
이게 다 입니다.
바보 같죠?
하지만 여기서 부처님은 바로 이 순간 ‘깨어있음’을 행동으로 모두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완전히 깨어있는 행입니다.
전혀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교가 뭐 대단히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또한 참선도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적인 체험들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종종 일으키신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뭔가 특별한 기적 같은 것들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매우 특별해 지신거지요.
하지만 부처님은 이렇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은 예수님도 이런 기적들은 단지 방편에 불과한 당신의 진정한 일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적들, 마술들은 내 직업이 아니다.’
‘이건 내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지만,
단지 너희들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도 부족하기에 내가 이런 기적을 가끔 보여준 것이다.’
금강경을 보십시요.
매우 평범합니다.
오직 이것이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오직 이게 전부입니다.
여러분들은 금강경이 매우 얇은 줄 아셨지요?
하지만 사실 훨씬 더 짧고 훨씬 더 얇습니다.
바로 이 몇 글자 안에 금강경의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5분 안에 다 외울 수도 있습니다.
‘왜 금강경이 이렇게 평범한 것인가’ 라고 의문을 내시겠지만
금강경에는 비밀스런 또는 특별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바로 제 1품이 금강경의 전부입니다.
오늘 이후의 강연들은 아마도 모두 시간낭비일 것입니다.
자, 여기서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치시는지 같이 보시지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불경은 모두 ‘이와 같이 들었다.’
라고 시작되는데요.
이것은 제자인 아닌이 부처님의 대화를 있는 그대로 듣고 받아 적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비구 1250명과 함께 계셨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초기의 불교 수행은 산에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 한국에서는 ‘입산’ 이라고 스님이 되면 출가하여 입산한다고 말합니다만,
초기의 불교는 입산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산 속 깊이 있는 불교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이 사위국은 인구가 무려 900만명이나 되는 당시 인도의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거대한 도시 였어요.
그리고 부처님은 도시 바로 옆에 있는 공원에 사셨답니다.
여기서의 첫번째 요점은 ‘산중불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요.
부처님은 도시에 있는 서울대공원 혹은 어린이 대공원 같은 곳에서 사신겁니다.
‘어느날 [이 때], 세존께서는 [우주의 가장 존경 받는 부처님은] 천명이 넘는 제자들과 함께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때를 [밥그릇] 들고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요.
눈 하나 깜빡하지 마세요.
한번 깜빡이면 놓칠 수도 있답니다.
‘옷을 입고 바리[그릇]을 들고서’ 당신의 음식을 구걸하시러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만약 부시나 노무현 대통령이 편한 복장을 하고 도심 속으로 들어가 걸식을 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바로 내일 아침 특종이 되겠죠?
이게 바로 불교 입니다.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은 몇 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지겠지만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 자체로서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때나 비고플 때, 아무렇게나 걸식을 하고 싶을 때 하신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시간에,
옷을 갈아입으시고, 바리를 들고 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 걸식을 하신 것입니다.
가마에 타거나 에쿠스를 타고 가신게 아니구요.
도시 한 복판에 들어가,
부처님 자신이 직접 걸식을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정하신 규율에 따라 말이죠.
당시에 부처님은 이런 걸식 또한 수행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 집으로부터 다음의 여섯집을 차례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 그랫을까요?
요즘은 잘사는 동네와 그렇지 않은 동네가 나위어져 떨어져 있지만,
당시 인도에는 모두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제일 맛있는 카레를 만드는 부자집만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겁니다.
혹은 맛있는 시금치나 치즈로 만든 음식이요.
그런 차별심을 없애는 것이 수행인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집을 건너뛰지 않고 차례로 방문하라고 하신 겁니다.
어떤 음식을 주던 받아야 했습니다.
부처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서 만드신 계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 실천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계율을 무시하지 않으신 겁니다.
‘그 때 점심 식사를 하실 때’.
불교 전통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들은 아침에 식사를 하고,
부처[인간]은 점심에 먹고,
동물들은 오후 늦게 먹고,
귀신들은 저녁에 밥을 먹는 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부처님은 오직 낮에 한끼만 드셨습니다.
오직 한끼만요.
식사 전에는 물론 배가 고프셨겠죠.
이렇게 당신 스스로 규율을 지키신 겁니다.
(‘이 때 세존께서는 식사 시간이 되어, 옷 입고 바리때 들고서 사위성 안으로 들어가 걸식하셨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시내 한 복판에서,
규율에 따라 집집마다 가시며,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올바른 깨어있음 입니다.
‘내가 만들고, 난 이미 성불했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
난 이미 부처다.
난 이런 규율이 더 이상 필요 없다.
네가 필요하지 난 필요없다.
부처님은 단 한번도 이런 마음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당신 스스로에게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 우리 대통령이나 고위관직자가 간다면
모든 교통신호를 멈추게 할 것이고,
아무도 운전을 못하게 할 것이며,
경찰은 도로를 통제하겠지요.
이렇게 현세에서의 우리와 그들이 지키는 법은 다릅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부처님도 그렇게 안전하시지는 않았는데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당신을 위해하고 싶은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매일 당신의 규율을 지키신 겁니다.
걸식이 끝나고 나면,
수도원으로 돌아와 조용히 공양[식사]를 하십니다.
공양이 끝나고 나면,
가사를 벗고 발은 씻으신 후 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이게 금강경의 전부인 것일까요?
여기서 부처님은 바로 ‘깨어있음’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규율을 지키고 상황에 맞는 ‘깨어있는’ 행동입니다.
아주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종교적인 경험들은 매우 특별하다거나,
미스터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성현들이 가르치셨듯이,
이렇게 순간 순간 상황에 맞게 깨어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옛날 중국에는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갓 출가한 스님이 입산을 했는데요.
당시 유명한 선시님인 조주선사님께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사님 저는 방금 입산했습니다. 제발 선사님의 고명한 가르침을 전해 주십시요. 당신의 가장 어렵고 깊은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저는 이제 준비가 되었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요!”
아침 먹었냐?
‘아… 네.. 이게 무슨 관련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먹긴 먹었지요.
‘그럼 가서 밥 그릇을 닦거라’
제자 스님은 이 말을 듣고 바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일화[공아]의 가르침은 바로 평범한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입니다.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죠.
그리고 양치질을 해야죠.
아침에 일어나면 기지개를 펴고 샤워를 해야죠.
바로 이겁니다.
매우 간단하죠.
이런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 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내일은 뭘해야하고, 누구를 만나야 하고, 또 뭘하고… 또 뭘하고….뭘하고…
그래서 스트래스가 생기죠.
그래서 이 컴퓨터는 항상 고장이 나는 겁니다.
요즘 세상은 점점 이렇게 변해갑니다.
옛날에는
마음이나 수행이나 진리나 이런 것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13~4년전에 처음 한국에 왔을때는 요즘처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수행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종교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요즘에는 이런 질문들이 별로 없습니다.
‘아 제 상황이 너무 어렵습니다.
제 삶이 너무 부족합니다.
결혼생활도 문제고~
모두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입니다.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단지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금강경 제 1품은 이렇게 간단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너무 간단해서 바보 같습니다.
너무나 바보스럽습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예수님 가르침처럼,
천국에 들어가고 싶으면 어린 아이처럼 되라 그게 다다~
어린아이는 밥을 먹으면 ‘아 맛있어요’ 하죠.
피곤하면 잠을 자구요
불면증에 걸린 아이를 보신적이 없으실 겁니다.
혹시 있으세요?
아니면 다이어트 문제거나요?
거의 없으실 거예요.
배가 고프면, ‘으아~’
밥을 주면… 입을 다물지요.
피곤해지면, 차 안에서도 쿨쿨 잡니다.
콘스트 홀이나 극장 같은 아주 시끄러운 곳에서도 피곤하면 잘 잡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많은 사람들은 이게 아주 바보 같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여기 오신 분들중에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자려고 누웠는데
‘아~ 잠이안와… 아유… 아유…
내일은… 이걸 해야하구…
그래서 컴퓨터나 티비를 보구요.
하지만 절은 매우 간단합니다.
절에서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잠을 자거나 아니면 꼬박새야만 하지요.
아주 쉽죠.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삽니다.
‘잠이 안온다~ 친구한테 전화나 할까?
컴퓨터 게임이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도[길]인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겁니다.
아주 아주 아주 간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으로 가는 길이 매우 쉽다고 하신 겁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면 된다구요.
여기 바로 이 제1품에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순간순간의 마음가짐입니다.
순간 순간의 마음입니다.
‘이 때 식사 시간이 되어’
우리 절에서는 목탁이 있지요.
‘따따다다다다’ 그 소리요.
공양[식사]시간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아침은 5시반, 점심은 11시반, 저녁은 5시 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공양간[부엌]에 가서 식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쉽지만, 소리를 듣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요즘 스님 생활도 매우 바쁠 때가 많은데요.
저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컴퓨터로 일을 할 때나 다른 일을 할 때 목탁소리가 들리면,
‘아 10분 뒤에 가야지’
‘10분만 더 일하고 가야겠다.’
‘지금 일을 못 끝내면 바빠서 아마 한 이틀동안 이 일을 못할 거야”
부처님이 바로 여기 1품에서 하신 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아주 빨리 읽을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십시요.
스케쥴을 직접 짜보세요.
‘아침 7시 정시에 먹고, 점심은 12시에 먹고, 또 저녁은 5시에 드셔 보세요.’
만약 여러분께서 1주일 동안 이렇게 정확히 하신다면,
제가 여러분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쉽습니다.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거나 상관 없어요.
오직 우리 마음이 삶을 복잡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이 매우 복잡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세상은 매우 심플합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의 생각이 복잡하니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생각이 그렇게 만듭니다.
오직 어린아이만 복잡하지 않게 삽니다.
부처님은 바로 여기서 완벽한 삶을 보여 주십니다.
깨어 있는 삶입니다
순간순간
아주 쉽지요.
그리고 분명합니다.
(“이 때 식사 시간이 되어, 세존께서는”)
세상에서 존경받는 이런 분이 깨달음을 얻어셨어도.
자유를 얻어셨어도
완전하게 무지에서 벗어나셨어도
이 마음을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착, 착, 착, 아주 간단합니다.
이런 간단한 일을 매일 매일 반복하면서,
당신의 그런 마음을 간직하신 겁니다.
식사시간이 되면 드시고
드시고 나면 그릇을 닦으시고
그리고 그릇을 치우신 후,
가사를 벗으시고…
자리에 앉으시기 전에 발을 씻으시구요.
당시 인도의 스님들은 신발을 신지 않으셨습니다.
고무신이 없었습니다.
신발이 없었어요.
그래서 발이 무척 더러워지지요.
참선을 하기 위해 그대로 앉게 되면 옷이 더러워지겠죠?
발이 옷에 닿으니깐요.
그래서 당시의 인도에서는 발을 씻지 않으면 옷이 무척 더러워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더 자주 빨아야겠죠.
그러면 더 많은 옷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거 하나로 우리 삶이 훨씬 복잡해 지거나 간단해 질 수 있는 겁니다.
걸식하고 와서 먹고 나면 옷을 벗어 올려 놓고,
그릇을 닦고 나면 올려 놓고, 발을 씻고….
(‘걸식을 하시고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오셨다.)
식사를 끝내고
의발을 수습하신 뒤 발 씻고 자리 깔고 앉으셨다.
끝이다! 다 끝난겁니다.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깨어잇는 마음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아주 위대한 가르침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 행동들에서 아무 잡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우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오직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삶은 이미 간단해 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절에서는 이런 목탁소리와 같은 사인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스님들은 다 알고는 있습니다.
저도 점심이 11시 반에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저녁은 5시에 있는 걸 분명히 알고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국의 어떤 절을 가셔도
아침은 5시반, 어떤 절은 6시지만
어떤 절은 가셔도 점심은 11시 반이구요.
저녁은 오후 5시에 먹습니다.
항상 똑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인이 있습니다.
따따다다다다~
왜 일까요?
왜냐면 우리는 그때 다른 생각을 하니깐 종종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목탁소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사인입니다.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지금 넌 뭘 하고 있냐.
바로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라.
오직 할 뿐입니다.
이게 바로 첫번째 핵심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이미 보여주고 계십니다.
금강경의 위대함은 바로 행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전은 바로 선의 가르침입니다.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오직 행동 뿐입니다.
일상 생활의 삶입니다.
이게 바로 금강경 입니다.
질문있습니까?
어떤 질문이라도 좋습니다.
……..
없으시면 넘어가겠습니다.
제 2 장 수보리가 질문합니다.
1장이 끝나고 부처님은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당시에 부처님은 매일 법문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입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앉아서 참선을 하신 겁니다.
매일 참선을 하시고 나면 옷을 가다듬으시고,
바루를 들고, 시내로 들어가….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죠.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모두 다 함께 걸식을 하시고
똑 같은 음식을 받으셔서 모두 함께 드시구요.
식사 중에는 모두 함께 묵언을 지키시구요.
식사를 끝내면 의발을 수습하신 뒤 자리를 깔으시구요.
요즘은 그냥 방석을 깔고 앉으면 되지만,
당시에는 방석이란게 없었습니다.
그냥 잔디밭일 뿐이죠.
아마 근처의 잔디를 모으거나 해서 수건 같은 것을 덮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겠죠.
그리고 그냥 명상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렇게 명상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앉아 마자 항상 입을 열고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앉아 계신 겁니다.
그리고 온전히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계시는 겁니다.
항상 어떤 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앉아 계신 겁니다.
자 제 2장을 보시지요.
‘사부띠가 질문합니다.’
(“당시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 있다 일어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릅을 꿇고 합장 공경하며 부처님께 말했다. “세상 드문 세조이시여! 여래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해 주시고 여러 보살들에게 잘 일러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휼륭하도다. 휼륭해! 수보리여! 그대의 말은 여래가 여러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여러 보살에게 잘 일러준다는 것이었지. 그대는 이제 잘 듣게,
그대를 위해 말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머물고,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감사히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
네. 이것이 금강경의 제 2장입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금강경이 어렵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아주 분명하지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금강경을 유리와 비교하곤 합니다.
한 장의 유리창처럼 매우 투명합니다.
분명히 물체로서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투과하여 볼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을 헷갈리게 만들지요?
하지만 2장도 1장처럼 아주 쉽습니다.
당시의 장로 수보리는 부처님의 위대한 10대 제자중의 한 분 이셨습니다.
또한 수보리는 공의 도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보리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공으로부터 태어났다는 뜻이지요.
공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당시에 이미 대단한 수행자였습니다.
참선을 매우 많이 한 수행자이죠.
절대 멍청하지 않은 아주 지혜로운 분입니다.
여기 제 2장에서는,
수보리가 뭔가 느낀 것입니다.
1장과 그대로 연결이 되서 말이죠.
그는 부처님을 유심히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저렇게 살고 싶다.’
그래서 여기 2장에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직접 금강경을 쓰셨다면,
바로 여기 제 2장부터 쓰셨겠죠.
어떻게 수보리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질문을 하기 전에,
부처님은 모두 행동으로 두두두두 짠~ 보여 주십니다.
모든 스님들이 다 이 모습을 보신겁니다.
그 중에서 특히 수보리가 부처님의 일상생활의 마음을 보고 감화한 것입니다.
수보리는 아무 흔적이 없는, 군더더기 없는,
전혀 따지지 않는 부처님의 그런 모습을 관찰한 것입니다.
‘어떤 과거나 현재 미래의 일들,
이 그릇이 맘에 드네.
어제는 뭐했지.
음식은 별로야, 기분도 별로 안좋구,
내일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전혀 없는 부처님을 본 것입니다.
부처님의 유리와 같은 마음을 말이죠.
유리와 같아요.
완벽히 투명한 마음입니다.
도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걸식하는 모습,
음식을 받는 모습등에서 조차 말입니다.
어떤 때는 음식이 정말 맛이 없어도 말이죠.
하지만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두.두.두 행동하시는 것을 수보리가 유심히 관찰한 것입니다.
‘아, 이것이 올바른 삶이구나’
‘나도 이런 삶을 살고 싶구나’ 하고 느낀 겁니다.
제 2장은 바로 수보리가
‘부처님 우리가 어떻게 부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천국으로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까?
이게 바로 수보리가 질문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건가요.
어떻게 이렇게 공한 삶을 살 수 있는 건가요.
하나씩 하나씩 아무 흔적 없이 말이죠.
아무 자국 없어요.
집착과 같은 군더더기의 생각들 없이 말이죠.
모두 부처님의 일상샐활의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금강경은 첫번째 장에서 끝납니다.
부처님은 이미 침묵으로 법을 전달하셨습니다.
일상생활이 행동으로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그대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지만, 수보리는 여기서 말로서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당시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 있다가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자, 여기 가사가 보이시죠?
이 가사로 본래는 오른쪽 어깨를 감싸는 것입니다.
이 가사는 어떤 장식용이 아니구요.
입는 옷입니다.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오른쪽 어깨를 감싸는 것입니다.
존경의 표시입니다.
여기에서 안녕하십니까 하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게 다 존경의 표시이지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안녕하세요’ 하면
아 저 사람은 예의 없는 사람이구나 할 수 있죠.
존경을 표하는 매우 간단한 예의입니다.
자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다 앉아 있습니다
당시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 있다 일어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릅을 꿇고
이건 하심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합장을 합니다.
이건 아무 무기가 없음을 표시합니다.
그래서 합장이 중요합니다.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여쭙니다.
(“ 세상드문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해 주시고
여러 보살들에게 잘 일러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시켜야 할까요?)
세존이시여~ , 부처님 입니다.
온 세상에서 존경 받는 분입니다.
타타가라께서는 여러 보살들을 잘 보호해 주시고,
여러 보살들에게 잘 일러 주십니다.
여기서 타타가라는 여래를 뜻합니다.
여래입니다.
이 뜻은 ‘이와 같이 온다.’ 는 뜻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온다’는 뜻이에요.
이와 같이 나타나심입니다.
여래의 뜻은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이죠.
또 다른 뜻은 ‘이와 같은 경험’을 의미합니다.
비오는 소리가 들리시죠.
그것이 바로 여래입니다.
이 뺨에 느껴지는 선풍기 바람이 여래입니다.
이 삶에서 경험하는 이와 같은 모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타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런 모든 경험들 자체가 이미 부처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미 부처입니다.
비오는 소리를 들을 때, 그게 바로 부처입니다.
팔 위에 땀이 느껴질 때 그게 부처에요.
뺨에 느껴지는 바람, 이게 부처입니다.
이 마이크는 이걸 못 느낍니다.
이 마이크는 비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부처입니다.
여래여, 어떻게 우리가 이런 깨어있는 마음을 얻을 수 있나요?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건가요?
이렇게 수보리가 묻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금강경은 무슨 아주 어려운 과학 문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수보리는 단지 ‘우리는 어떻게 당신처럼 살 수 있는 건가요?’
라고 묻는 겁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할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어떻게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최상승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
어떻게요?
당신처럼 말입니다.
어떻게요?
아주 재밌습니다. 잘 보세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나요?
여기서 선남자 선여인은 단지 스님만을 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 대승불교의 경전이죠.
스님들 뿐만 아니라,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 마음을 얻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마음을 발하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요?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할까요?
이와 같은 질문은 사실은
매우 소승불교 스타일의 질문입니다.
수보리 제자는 사실 여전히 소승불교 스타일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 같네요.
‘어떻게 생각을 콘트롤 하나요’
‘어떻게 억제할 수 있나요’
이건 할 수 있지만, 이건 하면 안된다.
어떻게 억제할 수 있나요?
여기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보입니다.
여기서부터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지금부터 이 긴장감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시거든요.
생각이 억제하는 것이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 ‘휼륭하도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은 여래가 여러 보살을 잘 보호하고,
여러 보살에게 일러준다는 것이었지,
그대는 이제 잘 듣게.
그대를 위해 말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약삼복리의 마음을 발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머물고,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감사히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2장의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제자는 질문을 하고 스승은 답을 합니다.
부처님은 자주 설법을 하지 않으셨어요.
입을 자주 열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여기서 수보리가 질문을 하고
부처님이 입을 여시니.
모든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구나
하고 아시는 겁니다.
어떤때는 누가 질문을 하면,
부처님은 그냥 이렇게 침묵으로 대답을 하시곤 했답니다.
단순한 행으로의 가르침이요.
그게 여래이니깐요.
그게 바로 ‘이와 같이’ 입니다.
오직 행동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말없이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금강경 입니다.
그래서 수보리는 행복합니다.
부처님이 말씀을 해주시니까요.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감사히 즐겁게 듣고자 합니다.
자, 여기까지 내용에서 질문 있으신 분 계십니까?
제2장
*** 위대한 도의 진정한 가르침 ***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항복시켜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나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들을 내가 모두 남김없이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 시키리라.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 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 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복잡해 보여요’
‘이제 진짜 어려운 부분이 시작 되는가 봐요’
아마 걱정이 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지금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이제 진짜 어려운 금강경이 시작되는 가보다.’
아닙니다. 어렵지 않아요.
아주 아주 쉽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보살은…’
한국 불교에서는
여성 불자들만 보살이라고 부르는데요.
불공평해요~
다른 모든 분들도 다 보살이에요.
뒤에 4분의 위대한 보살님이 보이시죠?
여성처럼 보이네요.
사실은 여성이 아닙니다.
남성도 아니에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 마음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색이나 모양 등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양이나 그림 등을 만들어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눈이나 코를 보려고 사용하는 거울처럼 말이죠.
하지만 보살은 진정 남성이나 여성이 아닙니다.
보살의 진정한 의미는 깨달음으로 항해가는
우리 마음의 성품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수행하는 그 마음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비를 향한 서원입니다.
‘마지막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열반에 들지 않겠다’
라는 큰 서원입니다.
절대로!
당신이 그리스도 보살이라면,
마지막 중생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천국으로
가서 신 옆으로 가지 않겠다라는 서원입니다.
이게 바로 불교의 끝이 없는 자비로움입니다.
무한한 자비입니다.
‘난 이 수행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고 맹세한다.’
‘난 절대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는 않겠다.’
라는 서원입니다.
몇몇의 소승불교 수행자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생, 또 내생, 끝이 없도록…’
이게 바로 보살입니다.
아시겠죠?
어떤 물건도 아니고, 어떤 사람을 가르키는 단어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품을 뜻하는 것입니다.
큰 서원입니다. 또한 방향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걸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내 자신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마음을 항복 시켜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즉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들을 내가 모두
남김 없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시키리라.’
자 불교의 대상은 이렇게 모든 생명입니다.
절대로 인간만이 아닙니다.
불교인만이 아닙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을 제도하는데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생명도 내 생명과 같다는 것입니다.
저기 한 방울의 빗 방울이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한 방울의 빗방울의 본성이 태평양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H2O라는 바로 이 본성 말입니다.
한강, 허드슨강, 태평양, 대성양…
평창산 물….
혹시 아세요?
여러분이 마시는 물이 사실은 십만번 재활용된거 아세요?
계속 재활용된거예요.
이 말은 십만번 더러운 물 이었다는 겁니다.
십만번 강물이었고, 바닷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물의 98프로가 물로서 되어 있자나요.
그래서 저 빗방울과 나와 허드슨강, 새와 또는 오사마 빈라덴과도 똑 같은 겁니다.
모든 본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는 단지 우리 신도들, 우리 종교만 좋고,
다른 종교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면, ‘오 잘됐어!’
그들이 우리 종교를 안 믿었으니깐.
지옥에 간 거야.
하지만 불교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왜냐면 모든 생명들의 본성품은 나의 이것과 똑같으니까요!
내 성품과 여러분의 본성은 똑 같습니다.
이미 보여 드렸잖아요.
다 똑 같은 본성이에요.
본성품은 다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겁니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의 종류, 그렇죠?
여러분은 고통 받고 싶지 않죠?
불교의 자비는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제가 만약 여러분 바로 앞에 가서 이렇게 한다면?
아니면 물이 들어있는 작은 그릇안에서 행복하게 헤엄치고 있는 임메바도 말이죠.
직업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고 말이죠.
정치에도 관심 없고, 문제도 없고,
근대 만약 레몬 주스 한 방울 거기에 떨어뜨려보세요.
아마 아메바는 멀리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쓸 거예요.
여러분이 고통 받기 싫어하는 것처럼 아메바도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를 설하시는 겁니다.
우주와 같은 자비입니다.
‘어떤 종류의 생명’
알에서 태어난 것이나, 닭이나 물고기처럼요.
자궁에서 태어난 포유류 동물이나 인간들과요,
습기에서 태어난 아메바나요.
아니면 영혼들과 같이 화생한 것들요,
모양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종교는 귀신이나 악마와는 싸워야만 한다고 하죠.
‘악마를 무리쳐라!’
‘이것은 거룩한 싸움이다.’ 라고 하죠.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제사 지낼 때 귀신에게 조차도 음식을 드립니다.
그들은 행복하지 않잖아요.
우리는 제사 지낼 때 상에 귀신들을 위해서도 음식을 놓잖아요.
그들의 마음을 안식 시켜주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마음을 가라 앉히세요.
두부와 떡들도 드시구요.
그리고 바로 법문을 합니다.
매우 흥미롭죠.
'모양이 있거나[유색], 없거나[무색]'
'생각이 있거나[유상], 없거나[무상]'
'이성이 있거나 없거나'
이 뜻은 '인간이거나 동물이거나' 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모두를 위해 자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를 내가 모두 남김없이 열반에 들게하여")
'부처님은 모두를 구제하십니다.'
'중생무변서원도'
'모든 생명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우리는 이 모두를 구제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벽 이렇게 서원합니다.
매일 새벽 법당이나 선방에서 우리는 이렇게 서원합니다.
'모든 생명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우리는 이 모두를 구제하겠습니다.'
좋은이나 나쁜이 상관없어요.
예쁘나 예쁘지 않으나, 불교인이나
그렇지 않으나 상관없어요.
예전에 위대한 선사님이신 경허스님 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법맥을 이으신 우리 숭산 스님의
스승님의 스승님의 스승이셨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경허스님은 제자인
영성스님과 함께 산으 오르고 계셨는데요.
지나가다가 작은 연못 옆에서 개구리를
파는 소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년들은 연못에서 개구리를 잡아
다리를 묶어 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는데요,
저도 어렸을 적에 레몬쥬스를 만들어 길거리에서
한 잔에 5센트(50원) 팔기도 했답니다.
다 팔면 한 2달러 정도 벌었는데요,
적은 돈이지만 당시에 전한테는,
부자가 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레몬쥬스 대신 개구리가 있었어요.
개구리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에
묶인 실 때문에 꼼짝없이 잡혀 있었어요.
그래서 허기진 등산객들에게는
아주 좋은 간식이 될 수 있었겠죠?
돈을 내고, 집으로 가서 불을 지피고...
맥주 한잔과 함께 개구리를 튀기겠죠.
그러니깐 이 소년들은 생안주 노점상 주인들인가요?
아마두요...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경허스님은 제자인 영성스님과
함께 산책을 하고 계셨습니다.
명성스님은 '경허스님 좀 앉아서 쉬십시요' 하시고,
영성스님은 소년들에게 다가와서,
'얘들아, 여기 있는 개구리가 모두 얼마니?'
아이들은, '와 대단하시다! 천원이요~.
아니다 오천원이요.
영성스님은, '어 그래. 문제없지.
자 여기 돈 있다.
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개구리들으
모두 포장해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신나서 짐을 챙기고 집으로
일찍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요.
영성스님은 개구리들을 모두 연못으로 다시 놓아주셨습니다.
바로 방생을 하신 겁니다.
개구리들은 다시 행복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겠죠.
영성스님도 매우 행복해 지셨어요.
'어 나는 아주 좋은 일을 한거야~'
'스님 가시지요.'
경허스님은 그 상황을 안 본 척 하셨지만,
모두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영성아, 너 뭐했니?'
'스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 개구리들을 모두 구제할 수 밖에 없어서요.'
'어 그래?'
'네! 다른 사람들이 사면 집에 가서 구어
먹으니깐 제가 대신 사서 다 구제했지요.'
"어, 그래? 그래 네가 이 개구리들을 다 살려 주었으니깐,
넌 지옥에 떨어 질거다."
"넌 지옥에 갈 거야~"
영성스님은 너무 충격을 받으시고,
"제가 지옥으로 간다구요?"
경허스님은, "응, 넌 지옥에 갈거야."
"왜 제가 지옥에 갑니까?
왜냐하면, 넌 지금 바로 '내가 구제했다ㅏ'는
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그 아상은
너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할 거다~"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좋은 일을 해도,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의 뜻은 고통을
좀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교외에 와서 아주 천천히 현금을
지갑에서 빼서 넣잖아요.
십만원 짜리 수표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게끔 말이죠.
봉투도 없이 딱 넣습니다.
예수님은 그건 아주 차원이 낮은 보시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교회를 돕는다는 그 보이고자 하는 보시는
아주 낮은 수준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음 아주 가난한 신자가 들어와서,
작은 동전 하나를 넣습니다.
이게 더 나은 보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라는
상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여기 나와있는 금강경의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제도 시키
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내가 했다'는 그런 마음입니다.],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흥미롭죠.
1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깨어있는
마음을 얻고 싶으면,
'나'를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나'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미 당신은 자유를 얻으신 겁니다.
우리의 불교 전통의식 중
방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방생'의 의미는 생명을 놓아준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처음 방생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약간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스님이었음에도 불구하구요.
홍콩에 갔었을 적 일인데요.
한국에서는 가끔 하지만, 중국에서는
방생을 참 크게 하더라구요.
믿을 수 없을 만큼요.
우리 문중에 대관스님이라는 휼륭한 비구니스님이
계신데요, 정말 대단한 분이시죠.
한번은, 홍콩에서 그 곳 신도님들이 보시하신
돈을 모아 큰 시장에 갔었습니다.
중국 시장에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참 별에별
희한한 동물들이 다 팔리고 있더라구요.
중국인들의 식성에 관한 무슨 속담도 있지 않나요?
"다 먹는 거요?"
중국에서는 뭐든지 움직이는 건
다 먹더라구요.
이런 책상이나 마이크 빼구요.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건 다 먹더라구요.
재미있는 요리문화예요.
스님들이 시장에 가시면 방생 하실 새들과
돼지, 원숭이, 쥐, 뱀 등 거기 있는
모든 동물들을 다 사버리십니다.
시장의 상점 주인들이 우리 스님들을 보잖아요?
그럼 진짜 기뻐합니다.
스님들이 오시면 남김 없이
모두 사버리시거든요.
그럼 상점 종업원들은 일찍 문닫고
집에가서 TV를 보겠지요.
저는 당시에, '아.. 이런 돈으로 병원이나 짓지..
아니면 절을 짓던지... 왜 이 동물들을 사는데
이렇게 돈을 많이 쓸까.. 잘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가서 대나무 새장에 갇혀있는
새들을 다 샀습니다.
몇 주전에 이 얘기를 들어신 분도
여기 계시지만, 또 들어 주세요.
사실 새들은 아주 청결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시장에 있는 새장들은 겹겹이
위로 쌓여져 있잖아요.
그리고 정말 더럽습니다.
위에 있는 새장의 새들이 똥을 싸면
밑에 있는 새들 머리로 다 떨어지구요.
거기 새들은 정말 슬픕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움직이지도 못하구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새장에 갇혀있는 새들을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차를 빌려서 산으로 갔습니다.
저도 봉고차 안에서 그 많은 새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정말 불필요한 일 아닐까..'
결국 우리는 산 속 어디에 있는 강가에
도착해서 방생을 하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새장을 열기 전에, 우리 모두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 흥미롭다.'
염불을 깊게 하다 보면 마음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염불을 하면 마음이 모아집니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거울과 같은
투명한 마음이 됩니다.
거울을 잘 닦으면 더 선명하게 반사되잖아요.
스님들은 모두 함께 염불을 합니다.
모든 재가불자들도 함께 염불을 합니다.
새들은, '어 무슨 일이지?
재밌는 광경이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똑같이 그러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1분이 지나고 대관스님은 '자 열어라' 하시고
새들은 모두 날아갑니다.
그리고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새들이 모두 멀리 날아가지 않고
우리를 향해 다같이 날개 짓을 합니다.
그리고 모두 물 속으로 들어가
오물을 털어내더군요.
새장 안에서는,
'짹... 짹...짹' 합니다만.
방생 뒤 자유를 얻은 뒤에는 우리가 서로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염불을 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새드이 물 속에서 목욕을 하면서
정말로 행복한 소리를 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이 얘기를 했으면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직접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새들이 그렇게 행복해 하니깐
우리들도 모두 행복해졌습니다.
그 전 차 안에 있었을 때까지는 피곤했었어요.
새들을 사서 다시 새장 안에 넣고,
몸에 새똥들이 범벅이고..
홍콩도 정말 덥거던요..
봉고차 안에서 한 2천마리 새들이
다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덥고 에어콘은 잘 안되고,
어떤 사람이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어버렸답니다.
창문을 열어 바람이 휙 들어오자 새들의
온갖 깃털과 먼지가 뒤범벅이 되어 버렸습니다.
으... 다들 기분이 좀 안 좋아졌어요.
큰 봉고차에는 한 30명의 중국인들이 타서
시끄럽게 떠들어대지....
샬라 샬라 샬라
사실 전혀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단지 상황이 그러했다는 것이지요.
이제 염불을 하고 새들이 날아가자 상황은
갑자기 행복한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새들 중에 절반 이상이 날아가지 않고
우리 주위를 맴 돌았어요.
그 새들이 인간들을 증오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실 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정말 행복해 했습니다.
행복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새들과 저의 행복한 마음은
완전히 똑 같았습니다. 하나였습니다.
똑같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왜 그러가 깨달았어요.
그들이 차 안에서 슬퍼할 때,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슬픔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분이
가라 앉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방생을 할 때 동물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냄새처럼 우리에게 전달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유를 느꼈을 때
우리도 자유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새들을 자유롭게 했다'라고
말한다면 실수입니다.
새들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제도
시키더라도 실로 제도를 받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는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래 나와 네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 다시 증명하겠습니다.
탕!
몇 분은 '어!' 하고 고개를 드시네요.
만약 저분들이 저와 똑 같은 불성이 없었다면
저렇게 고개를 드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분리되어 있나요?
없지요?
방금 여러분 모두 새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아셨죠?
질문 있으세요?
아주 간단하죠.
자~ 제3장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차별 없이 모두가 다
똑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차별 없이 모두가 다
똑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
저는 자주 개를 비유로 듭니다.
우리가 슬퍼할 때, 개도 같이 슬퍼합니다.
당신이 울면 개도 따라 울어요.
그 개는 이미 당신과 하나가 된 겁니다.
당신이 슬프면 개도 슬퍼합니다.
당신이 즐거우면, 개도 막 뛰면서
조도 좋아하잖아요.
이렇게 본래 다 하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부처님이 가장 먼저 입을
여시고 말씀하신 가르침이랍니다.
그럼 이제 제 4장을 보시겠습니다.
(“다시 또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한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며
상[겉모습]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동쪽 허공의 양을 잴 수 있겠는가?’
‘불가능 합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쪽 서쪽 북쪽 사방과 위 아래의
허공의 양을 잴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은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면
그 복덕 또한 이와 같이 잴 수가 없이 많은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가릉침을 받은 대로 머물러야 하느니라.”)
아주 중요합니다.
보살은 아무 상에 집착 하지 않고
보살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예요.
헌금도 보시구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도 보시구요,
누구에게 물 한잔을 주는 것도 보시구요,
‘잘 지내십니까’ 하는 것도 보시구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보시입니다.
주고 받는 모든 것이 보시입니다.
아무 기대를 하지 말고 보시를 하십시요!
이해 하시겠죠?
‘내가 이걸 주면 나중에 뭔가 받겠지.’
‘그이에게 이걸 주면,
나한테도 오는게 있겠지’
우리는 머리 속으로 명단 까지 만듭니다.
다 기록하지요.
‘나는 그들에게 정말 잘해줬는데,
왜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그래서 보시에 집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아무 집착 없이 하셔도,
계속 보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하는 겁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 양나라에는 아주 유명한 무황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큰 사찰도 많이 짓고, 스님들에게 옷과
음식 등 많은 것을 보시한 왕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인도에서 아주 유명한 고승이신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왕은 고승을 궁궐로
초청을 해서 물었습니다.
‘음.. 유명한 스님이라고 들었다.
달마대사라고…’
달마대사는 불교에 대해서 다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무황제는 ‘난 당신을 아는데, 당신은 나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무황제요.’
‘그리고 난 불교를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했지.’
‘난 절도 많이 짓고, 경전도 많이 번역 시켰고,
스님들도 많이 도와드리고, 옷과 음식 등등…
정말 많이 보시했지.’
‘그럼 나는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가?’
‘전혀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난 정말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이것 저것 이것 저것,
이렇게나 많이 했는데,
나도 뭔가 분명이 많은 복을 받을 거야’ 라고
생각 했을 겁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잘라버렸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못된 기독교이기도 합니다.
황제는 뭘 얻었느냐고 물었지만, 달마대사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했지요.
황제는 ‘완전히 미?군, 넌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난 선행을 하면 좋은 과보를 얻을 거라고 배웠는데.’
‘그럼 불교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 뭐냐?
하며 황제는 다시 물었습니다.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씀했어요.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공합니다.
우주가 완전히 텅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 공덕도 기대하지 마시구요.
오직 공함을 깨달으세요.
그러다 황제는 완전히, 완전히~
성질이 났어요.
'야 도대체 넌 누구냐? 감히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 넌 도대체 뭐야?'
'몰라요~'
충격입니다. 달마대사는 황제를 3번
충격 받게 만들었어요.
아무 보상도 못받고,
불교는 우주가 완전히 공 하다는 것이고,
공하니깐 너무 좋잖아요~.
마지막은 '모를 뿐'입니다.
아무것도, 진정 아무것도 모를 뿐입니다.
이게 바로 여기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한다.'
'보살은 집착이 없어야 한다.")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며, 소리, 향기,
맛, 감촉,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
무엇을 줄 때는 그냥 주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보시에요.
돈으로 하는 보시만 보시가 아니에요.
그것도 당연히 좋은 보시지만요.
돈도 여러 보시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누가 슬퍼하고 있을 때,
옆에 있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누가 목이 마르면 물을 주지요?
그것도 보시입니다.
누가 머리속이 복잡할 때
도와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마세요.
그들이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도 기대하지 마시구요.
만약 기대를 가지면, 고통을 받거든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 바로 이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래서 보살은 아무
머무름이 없이 보시를 해야한다.
아무 집착이 없이 말이다.
어떠한 기대도 하지 말고,")
아무 집착과 기대 없이 선행을 하게 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복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훨씬 높은 차원의 복덕 말입니다.
'어떤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동쪽과 여기 저기 사방 팔방의
허공의 양을 잴 수 가 있겠는가?'
'없습니다! 스승님 그 허공의 양을
도저히 잴 수 가 없습니다.'
'좋다, 수보리여! 보살이 그렇게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무한한 공간의 양만큼
복덕을 얻는 것입니다.
단, 명심하세요. 그렇게 무한하지만
비어있다는 것을요.
달마대사가 황제한테 말한 것 처럼요.
'난 무엇을 얻었나요?'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그럼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하셨죠.
'우주와 같이 완전히 순수한
공함을 깨달으세요.' 라구요.
그 깨달음이 바로 가장 큰 복덕입니다.
가장 위대한 복덕입니다.
주는 것 받는 것 모두 공합니다.
이게 최고의 복덕입니다!
다른 복은 변합니다.
하지만, 이 깨달음의 복덕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가르침을
받은 대로 머물러야 하느니라.")
오늘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제 5장입니다.
("여래를 바로 보라")입니다.
진리를 바로 이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장이 금강경에서 설법[말씀으로 하신]
중에 가장 핵심인 부분입니다.
("여래를 바로 보라.")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부처님의 말씀하시는 스타일이 참 좋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도 친구 같거든요.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니?
'타타가나[여래, 부처님을 말씀하시는 거죠]는
과연 어떤 겉 모습의 형상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님은 과연 어떤 특별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나요?
어떤 모양으로 생겨야
부처라고 할 수 있나요?
이게 부처고, 저건 부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요?
부처님은 서른 두 가지의 특별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 볼이 크다던가, 곱슬 머리이던가,
발이 크다던지 등등의 상 말입니다.
어깨가 어떻고, 코는 어떻고, 피부는 어떻고
하는 등의 32가지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형상이 있습니다.
또한 목에 주름이 세줄 있던지요.
제 스승도 하나, 둘, 세줄이 있으셨는데,
사실 비밀입니다.
숭산 스님을 뵐 때 저도 각끔은
'와~~' 하면서 목을...
'아! 아! 안돼, 저렇게 보면
안되지!' 했었답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이런 겉
모습에도 집착을 했었습니다.
'부처는 어떻게 생겼어?
아~ 저렇게 생겼다고? 적어 놔야지...'
'저 사람은 부처님의 저 모습이 없으니깐
부처가 아닐거야'
바로 이런 마음을 여기 5장에서
없애시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아~ 정말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 제 손이 있지요, 제 손입니다.
제 손 만의 특징이 있겠지요.
그런데, 한 80년 뒤에 오셔서
다시 제 손을 보세요.
아마 제 손이 없고, 뼈 만 남아 있을 겁니다.
어쩌면 먼지만 남아 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바로 이 모습은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이 책상, 제 몸, 이 법당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지구 조차도요.
잠시 동안 보이는 모습일 뿐입니다.
진짜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옳다~ 수보리여~ 휼륭하도다!"
'상이라 하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진정한 여래를 보리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어디 계실까? 난 부처님이
보고 ?은데... 부처님 어디 계세요~
어디 계세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불 수 있을까요?'
탕!
바로 여기입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
그 소리가 부처입니다.
이 기침 소리가 부처입니다.
바로 이 소리를 들은 그것!
바로 그것이 부처입니다.
어떤 특별한 모양이나 상이 없어요.
여러분의 마음, 진정한 본성이 부처입니다.
아무 모양도 없고 상도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은 부처님의
모습에 집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이 없었어요.
몇 백년 동안 불상이 없었답니다.
순수한 불교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불교입니다.
그래서 선방 안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송광사 선방 안에도 불상이 없어요.
아주 큰 거울이 있지요.
그래서 그 앞에 딱 서면,
'아! 미국식 부처님'
한국스님이 오시면 '한국식 부처님'
새가 앞으로 날아가면. '새 부처님'
모두가 다 부처입니다. 아시겠죠?
이게 5장의 요점입니다.
자~ 부처님은 처음으로 '진정한
보시는 공하다'라고 말씀하시고,
'오직 행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배고프면 밥을 주고,
목 마르면 물을 주고요,
'오직 할뿐' 그것이 진정한 보시입니다.
기대하지 않으면, 사실 보상은
이보다 훨씬 위대합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부처는 어떠한 특별한
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입니다.
부처 아닌 것이 있나요?
아시겠죠? 간단한 요점입니다.
제3장
지난주에 우리는 5장 까지 마쳤는데요.
여러분도 많이 아시는 스님이신
틱낫한 스님께서 저에게 처음부터
다시 5장까지 이번 시간에 읽어달라고
하셨기에 다시 읽겠습니다.
금강경의 요체는 바로
여기 안에 다 있으니까요.
5장 이후의 내용은 더 자세히 설명을
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 1장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비구 1250명과 더불어
기수급고독원에[기원정사] 함께 계셨다.
마침 공양 때가 되어 세존께서는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으로 가시어 한 집씩
차례로 걸식을 하셨다.
정사로 돌아 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우를 씻으신 다음
자리를 마련하고 앉으셨다."
금강경은 여기서 모두 끝납니다.
완전히 끝났어요.
부처님은 여기서 일상생활을 보여주십니다.
상황에 맞는 순간순간의 마음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금강경의 모든 내용은 바로 부처님의
이런 일상생활의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아무 잡념과 흔적 없이
어떤 상황도 따지지 않고
'오직 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수보리와 제자들은 이런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감명하여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의 옷을 걸쳐 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부처님께 여쭈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보살들에게 중생을 잘 제도 하도록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을 내고는
마땅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가짐을 다스려야 하옵니까?
착하고 착하도다 수보리야, 그대 말과 같이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보호하며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맡기고 당부하느니라.
자세히 듣거라.
내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심을
내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렇게 스스로의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는니라.
예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겠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 이들은 부처님의 모습을 모두
보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하여야 하나요?'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하나요?'
차에서 사무실에서 어떻게 그러한 마음을
간직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이게 2장의 내용입니다.
제 3장,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하느니라.
결국은 자신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의 생명 중 알에서 깨어난 것이거나
태로 생긴 것 이거나 습기로 생긴 것이거나
화(化)하여 생긴 것이거나
형상이 있건 생각이 있건 없건
그리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건 가리지 않고
모두 제도해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처럼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자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 마음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기서 수보리는 소승불교 스타일의 질문을 합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고 억제해야 하나요?"
하지만 수보리는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수행하고,
[우리!]는 어떻게 성불하냐고 물어봅니다.
'우리와 그들' 이라는 아직도 이런 소승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거지요.
여기서 부처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주 부드럽게 수보리를 한 방 때리시지요.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보살은' 우리들 스님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제자 수보리의
질분에 한 방 치십니다.
이건 단지 우리 비구와 비구니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생명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사실은, 당신이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셨어도
사실은 아무도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당신이 도를 깨우쳤다면
이미 당신은 본래 자연의 모습으로
이미 되돌아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따로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신이 완전히 자유인 것을 알아 차리는 것이죠.
이미 완전한 존재입니다.
모든 생명은 이미 완벽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공간을 더욱 공간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와 같은 질문이니
'이 공간은 공간답지 못해, 어떻게 하면 이 공간에
더욱 많은 공간을 넣을 수 있을까요?' 와 같은 이런 질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나요?' 와 비슷한 질문입니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은 이미 비어 있는 공간을
더욱 텅 비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공간을 어떻게 더 텅 비게 할 수 있겠어요?
이미 텅 비어 있는데요...
이미 공 한데 더 공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중생을 구제한다고
말한다면 사실 이건 실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이렇게 다짐합니다.
'모든 중생 구제하리다. 중생무변서원도'라구요.
근대 이 말은 사실 실수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위대한 보살의 길을
제시해 주시로 계십니다.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물로 예를 들면요. 아주 깨끗한 물이였는데,
더러운 것이 많이 들어갔어요.
모래나 먼지 같은 것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우리는 그 물이 너무 더럽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물을 더럽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이 물은 역시 물 그대로입니다.
H2O 라는 것은 더럽거나
깨끗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물은 마시는 것이 더럽다고
생각이 드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고양이한테 줘 보세요.
고양이는 잘 마실 겁니다.
이게 2장에서의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자유를 얻은 적이 없다.' 아주 간단하죠?
수행이라는 것은 A란 지점에서 B로 가는
여기서 저쪽으로 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여기에 온전히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이 사실을 아직 우리가
알지 못 할 뿐입니다.
이 사실은 딱! 깨달으면, 당신은 어디론가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도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제 3장 내용의 전부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리고 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할지니 색에
얽매이거나 성, 향, 미, 촉, 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되 상을 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상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느냐?
동쪽 하늘의 허공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수보리야 동서남북 그리고 4유와
상.하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을 내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이 마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오직 나의
가르침대로 행해야 하느니라."
자 여기서 가르침의 모든 보시가 다
공 하다는 것입니다. 보시는 공한 것입니다.
어떠한 '줌'도 모두 다 공한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공덕' 또한 공한 것이겠죠.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을 해줄 때
그들이 알아주길 바라거나, 보상을 바라거나,
또는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무엇을
줬을 때 그로부터 무언가를 바라자나요, 그렇죠?
부처님은 여기서 주는 것, 받는 것
모두 다 공 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5장입니다.
" 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당시에도 부처님 또한 성인은 어떻게 생겨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도 있잖아요.
성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원 같은 것요.
그런데 불교는 바로 이런 아이디어를 깨 부십니다.
그러니깐 바로 제 뒤에 이렇게 수백개의
부처님 상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생기신 모습이
진짜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고 가르침니다.
여기에 모두 비슷하게 생기신
수백개의 불상이 있잖아요.
대부분의 모든 종교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 있습니다. 유일신이죠
그런데 우리 불교에는
수천의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처가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예요!
수억 수조의 부처가 있어요, 무한입니다.
그렇다면 부처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불교의 부처에 대한 정의입니다.
하나인데 곧 전체입니다.
바로 '불이사상' 입니다.
만약 신이 하나 생긴다면, 사탄도
하나 생기자나요. 바로 적이 되어버리죠.
하나를 만들면, 그와 반대되는
것도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온 우주의 모든 것을
다 부처라고 한다면,
부처 아닌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입니다.
이게 바로 '불이'. 두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겉모습의 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
여래가 어떤 특별한 상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제가 처음 한국에 와서 아주 젊은 스님이었을 때의
일인데요. 어떤 한국 스님이 이런 말씀을 제게 하셨어요.
'외국 사람들은 동양인 같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 '왜요?'
그러자 그 스님이 그러셨습니다.
'저기 있는 불상을 봐요.
부처님 눈은 이렇게 생겼잖아요.
서양사람들은 이렇게 생겼어요,
부처님처럼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요.
거의 끝까지 갈 수 있는데
완전하게 될 수는 없다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감사하다고 했죠.
하지만 그 말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모습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저 새가 지저귀는 소리입니다.
저 선풍기의 바람 소리 입니다.
여름 공기를 마시는 것입니다.
손가락 사이에 흐르는 땀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느끼는 바로 그것이 부처입니다.
저 밖에 들리은 어린아이의
말소리를 듣는 바로 그것,
듣고 말하고 하는 아무 형상이 없는
바로 그것이 부처란 말씀입니다.
여기 금강경에서 말하는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이 뭐가 그리 어렵다 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깐 바로 여기서 금강경이
이 생각을 깨 부시는 겁니다.
부처는 바로 저렇게 멋있는 거야~~
하는 바로 그 마음을 말합니다.
아, 얼마전 전라도에선가 있었던 일인데요.
어떤 종교의 조각상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 조각상이 너무 유명해져서 전국의 신도들이
다 몰려가서 구경을 했다고 하더군요.
불교는 바로 이런 것을 깨버립니다.
아주 쉽습니다.
자, 아주 재미있는
제 6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수보리가 부처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먼 훗날에 중생들이 이 가르침을
듣고서 참다운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런 말은 하지 말라.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5백세가 지나가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분, 두 분, 세 분, 네 분,
다섯 분의 부처님뿐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처님 밑에서 갖가지
선근을 심었기 때문에,
이 경전을 듣고 보거나 잠깐 생각만 해도 청정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여래는 그들이 모두 이렇게 한없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느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법상도 없고 또 비법상도 없기 때문이니라.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상이 있으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만약 법상에 집착하면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법상을 갖는 다면
아, 인, 중생, 주자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이 아닌 것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땟 목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사실 제 6장이 나오기 전에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이미 끝났습니다.
설법을 마치셨는데,
아직 수보리가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군요.
여기서 아주 흥미로눈 일이 생깁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아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질문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치시고 계신데,
수보리가 때로는 잘 알아들어도 아직 이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질문합니다.
'스승님, 저는 대충은 이해하겠는데요,
후세 사람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말 법 시대에도 다른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종종 말법 시대를 애기하곤
하는데요, 어떠한 문명에서나,
우리가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을 하고 나면,
그 열정은 천천히 식고 결국에는
관심 속에서 사라져 버리자나요, 맞죠?
여기 계신 분 들 중에, 결혼을 해보신
분들은 모두 아실 겁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끌려서
만니다가 사랑에 빠져서요.
그리고 실수로 결혼ㅇ르 했다고 하더라구요.
어느 정도 참고 잘 지내다가 싸우기 시작하구요.
그러다가 완전 남남이 되서,
결국은 법정에서 다시 만난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를 불법시대라도 여겼습니다.
요즘 한국에 계신 우리 서양스님들을 보고
한국 불자님들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숭산스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불교에 아주 관심이
많았을 테지만, 지금은 관심이 많이 식었을거야.
어쩌면 한국을 모두 떠나겠지, 머리를 다시 기르고
환속할지도..' 하시는 말씀을 엿들은 적이 있는데요.
한 20프로는 가능성이 있다하시면서요.
이처럼 당시 사람들도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도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자가 있을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수보리 자기
자신에게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자기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것 결혼한 신부가 '자기야 20년 뒤에도
날 사랑해 줄거지?' 하는 질문과 같아요.
수보리가 지금 부처님 옆에 있듯이요...
정말 환상의 시간이겠죠, 신혼 첫 날인데요.
그런데 여러분이 옆에 계시다고 상상해 보세요.
수보리도 첫 날 부처님께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겁니다.
'부처님 20년 뒤에도 절 사랑해주실 건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아직도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만약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사랑에 대한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다는 것이겠죠.
만약 수보리가 완전하게 이해했다면, 한치의 의심이
남지 않고 사라졌다면, 이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의미는 이해했지만 약간 불안했던 겁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 부처님은 상황을 완전히 꽤 뚫어 보시고
한 방, '빵' 날리십니다.
'수보리야,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게'
'그건 네가 아직도 의심이 남아있다는 말이거든'
어쨌든요, 부처님은 상황을
다시 긍정적으로 돌리십니다.
제 스승이신 숭산 선사님도 누군가 좋은 질문을 하던
바보 같은 질문을 하던 무조건주장자를 휘두르셨습니다.
아주 세게요. 뻥!
그리고 나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처럼 말이죠.
부처님은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단지
우연히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불법에 대한 믿음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뿌리와 같이'
여러분이 사과나무에서 사과 하나를 딸 때, 사과
하나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듯요.
이 사과는 아주 긴 과정을
통해서 생겨 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부처님과
이 가르침에 믿음이 생기시면요,
그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여러분이
불법과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스승들이나 혹은
부처님과의 인연말이죠.
제가 아주 어렸을 적 불교와 처음
인연을 맺었을 때가 기억이 나는군요.
가장 처음 부처님의 작은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인데요.
당시는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친구가 부처님 사진을 자기 방 액자에
넣어놨었거든요, 지나가다가 사진을
흘낏 보고 지나쳤는데, 다시 돌아와서
빤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저를 붙잡는 느낌이었어요.
무언가가 저를 흥분하게 만든 것이죠.
이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요...
그 경험은 제 마음 속 아주 깊은 곳 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근대 저는 당시 고등학생이어서, 락앤록 이나
그런 것들에만 관심이 많았겠죠.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공부를 하거나요.
'난 친구가 얼마나 많나, 난 친구가 얼마나 많지,
내 친구들은 잘 나가는 애들이구...'
이게 다 업입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 사진도 내 마음 속에 씨앗처럼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쳐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보려는데,
고등학생으로의 업이 더 강해서 그냥 어쩔 수 없이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겁니다.
무언가, 뭔지 모르는 무엇이 내게
친숙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독일에 유학 갔을 적인데요,
프라이버그 시에서 친구가 집으로 초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안에서 아주 커다란
부처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기 전에, 제 친구는 향을 올리고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있었어요.
저는 사진을 보고 매우 벅찼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같이 음악을 듣고 얘기를 하는
그런 습관적인 일을 하면서도 제 관심은
자꾸만 그 그림으로 쏠려 있었어요.
초대한 친구는, 향을 올리고,
삼배를 하더라구요,
그 순간 무언가 더 깊이
내 마음 속을 울렸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사진은
석굴암 불상 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마 미술 전시관
같은 곳에서 샀겠죠.
하여튼 제가 처음 그 곳에 들어가서
그림을 보았을 때 내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았던 친척이나 친구같이 말이죠.
사진을 봤을 때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억을
못해도, 왠지 친숙한 그런 느낌 말이죠.
뭔가 오래되고 깊은 그런 인연을
만나게 된 것 같았습니다.
이 점을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설하고 계시는 겁니다.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5백세가
지나가도 계율을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으면 능히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람이 한 분의 부처님과만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권의 불교 책을 읽었던지
설법을 한 번 들었던지,
아니면 우연히 들은 불교TV에서 10분간의 설법을
듣고 나서 불교가 갑자기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그냥 쉽게 인연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겁니다.
여러분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은
사람이 있잖아요.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그런 인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깊고,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먹는 사과도 지금 당장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과정을 통해서 입 안으로 들어오듯이 말이죠.
물론 지금 그 순간 사과의 맛을 보지만, 그 인연들이
갑자기 아무렇게나 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오래 된 인연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잘 보라고 하신 겁니다.
아주 쉬운 가르침 입니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세 부처, 네 부처,
다섯 부처에서 선의 뿌리를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와
선의 뿌리를 심었기에,
이 구절을 듣거나 한 생각만으로도
깨끗한 믿음이 생길 것이다."
저도 우연히 계획하지 않고 금강경을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제가 금강경 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지는 않았었거든요.
아 또 이름이 너무 좋잖아요.
다이아몬드경-
잘 나가는 힙합 가수들이 목에 메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처럼요.
모든 사람들이 다 다이아몬드 좋아하죠?
오- 다이아몬드 경, 꽤 대단하게 들리는결..'
가장 비싼 보석인 다이아몬드와 같은
금강경 경전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처음 읽게 되었는데,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도 깊은 곳에서 뭔가 꿈틀 거렸습니다.
금강경은 그 어떤 다른 경전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에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훨씬
더 깊이 요점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전혀 지능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반지적인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제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었는데,
그 때가 금강경과의 만남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베토벤 음악을 들을 때 처럼요.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따다라라---
처음 그 음악을 듣는 사람도
단지 그 리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항상 느껴왔던
어떤 강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베토벤이 유명한 이유는 그가 단지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서가 아닙니다.
----따라라 단... 이런게 아니라,
'와- 악! 하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아~ 내 운명을 느낀다. 이 음악을
듣기 전에도 운명을 느낀 적이 많거든...
아 음악이 내 마음을 울리는 구나~
바로 내 얘기네! 하면서 말이죠.
베토벤은 내 '마음의 소리'를
그려낸 것입니다.
와 정말 대단한 천재다.
어떻게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숭산 스님도 '넌 누구냐!'
'오직 모를 뿐이다' 하시면
전 '맞아요. 모릅니다.' 했었어요.
'오직 모를 뿐' 임을 느낀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계신 미스터 리나, 관행 스님이나,
보행스님이나, 관현수나, 김귀자님도
그때가 처음 '모를 뿐'을
경험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숭산스님이 그러셨을 때, '아 맞아! 나도 그렇게 느껴,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걸 느꼈어!'
부처님은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이 경을 읽으시고
믿음이 생기시면, 그건 아주 오래 전부터
쌓여져 왔던 인연들에 의해서 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을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건 이렇게 뒤에 있는 수천의
금강불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죠.
당신 스스로의 경험이
바로 부처라는 말씀입니다.
숭산스님이 이렇게 주장자를
딱 내려치셨을 때,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아, 전에도 이 얘기를 한 적이 한 두번
있습니다만, 제가 어렸을적의 얘기입니다.
제 친구 하나와 저는 아주 못 된 놈이엇거든요.
요즘도 그렇지만요.
우리는 종종 슈퍼마켓 같은
곳에 놀러 갔었는데요.
아주 큰 곳이었죠. '뮤잭' 이라고 표현했지만,
음악도 흘러나오구요, 딴다단 따----
그런데 아무도 음악을 듣지 않아요.
큰 슈퍼마켓에서 장을 볼 때 배경으로
깔아주는 그 음악 말이죠.
중간에 '오늘 김치는 이천원입니다.' 라는
광고도 나오구요.
그래서 저는 친구와 슈퍼마켓에 놀러가서,
'와우, 저 사람들은 다 꿈꾸고 있구나!'
그리고 우리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전에도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진요.
들어셨다구요?
정말 못 된 장난이었지만, 아주머니들이 얘들과 함께
장을 보고 계시면 옆에 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악!
그리고 유심히 관찰을 했는데, 모르더라구요.
누가 방금 옆에서 소리를 질렀는데도 불구하구요.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웃음을 멈 출수가 없었어요.
누가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도 모르더라구요.
뭐 떨어진 거 줍는 척 하면서
'땝!' 하고 지르고 주위를 둘러보지요.--
한 5-6명이 주변에 있는데요, 어쨌든 시외 근교에서
살았던 저는 너무 심심해서 그런 장난을 쳤었어요.
아무도 우리가 그 소리를
지른 것에 무감각 했습니다.
정말 세상에서 제일 웃긴 일이었어요.
아주 악동 같은 짓이었지만요.
전에도 그런 비슷한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쌓인 눈 위에다가 욕도 쓰기도 하구요.
눈 덮인 차 위에다 뭐라고 장난으로 써 놓고
몰래 숨어서 구경하는 거요.
이것도 몇 면 동안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장난의 다음 단계는 '소승불교의 다음 단계 처럼요.'
어쨌든 그런 장난을 하고 놀았었어요. '뗍'
아무도 못 들어요
여러분도 해보세요.
주차장에 가보시거나,
아니면 해운대 해수욕장요.
똑같이 정말 해보세요.
아무도 못 알아 챌 겁니다.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누가 다쳤다면,
아무튼 잡념이 끊이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숭산스님이 처음 주장자를
딱! 내려 치셨을 때
저는 '와 저건 뭔가가 있다!'
'뭔지는 잘 몰라도 느낄 수 있어.'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이 한 분, 두 분,
수 없이 많은 부처를 말씀하시는 건,
그 부처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경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넌 누구냐?' 오직 모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걸 한번만 듣고도 교감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관심도 없어요.
무슨 말인지 원... 난 이거나 해봐야지.'
안녕히 가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번만 들어도 딱 교감
해버립니다. '그래 모를 뿐! 음... 그래 난 몰라...'
아주 재미있지요.
이 가르침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계속 열심히 수행 하시면 다음 생에도
또 다시 이 가르침을 만니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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