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저번 주에 27~28장까지 마쳤는데요.
오늘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강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보살의 길로 인도해주는
경전인데요. 경전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질문,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면 부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어떻게 부처가 되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금강경의 질문이자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전부는 부처님께서 가장 첫 번째 장인 1장에서
행동으로 다 보여주시니깐 요.
1장에 모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제자 수보리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처럼 삶을 온전하게, 아무런 잡념 없이,
순간순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 수 있냐고 말이죠.
아무런 색이나 냄새도 남기지 않고요.
순수하고 투명한 거울처럼 아무런 불평불만 없는 하나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냐고 부처님께 묻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은 질문이죠. 그러자 부처님께선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대답을 하십니다.
이름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에도 집착을 하지 말며,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마음 등 어떠한 마음에도 걸리지 말고요.
아, 인, 중생, 수자상 등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십니다. 부처님에게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그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성불하십시오~'
사실 이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불 하십시오'는 사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을 잘 보면, 우리 모두는
이미 부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한국 사람에게 한국 사람이
되라는 것과 비슷하자나요. 그렇죠?
아니면 미국 사람에게 미국 사람이 되라고 하던지요.
그럼 그 사람은 아마 당신에게, '너 바보냐?'
한국 사람한테 한국 사람이 되라니?'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금강경은 우리가 이미 부처라고, 완전하며, 완벽하게
공함을 가르쳐 줍니다. 온 우주가 완전히 텅 비어있으며,
그 안에는 어떠한 신성스러운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가 달마대사에게, '난 사찰도 많이
지었고, 불교를 위해서 많은 위대한 일을 했으며, 음식과
돈을 스님들께 많이 공양했는데, 나는 얼마나 많은 공덕을
지은 것입니까?' 내 영적 은행에 얼마나 많은 복이 쌓인
것인가요? 라고 묻자, 달마대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공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말도 안 돼! 불교 경전에 보면, 선행을
많이 하면 복을 많이 받는 다고 나와 있잖아요'
모든 종교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럼 불교의 진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라고 황제는 다시 물었습니다.
선행을 끊임없이 해서 좋은 덕을 많이 쌓는 것이
불교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불교의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냐고 묻는 것이지요.
달마대사는 '신성한 것은 없습니다. 온 우주가 완전히
공 한 것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불교가 가리키는, 모든
가르침은 바로 '이와 같이' 공 입니다.
텅 텅 비어있는 거대한 우주와 같이 말입니다.
무엇을 얻거나, 만들고, 복을 쌓는 것 같은 유한한 범위를
초월해서 무한한 우주와 같은 것이 불교의 진정한 가르침인 것이지요.
우리 각자와 본성은 이와 같이 무한한 우주와 같이 광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교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당연히 중국의 황제는 엄청나게 화가 났겠지요?
그렇게 불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돈을 많이 쓰고, 스님도 많이
양성하면서, 아마도 다음 생, 또 다음 생 등, 계속해서 황제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달마대사가 복이 하나도 없다고 하자 황제는 무지하게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대체 누구 길래 그 따위
말을 내게 하느냐? 넌 도대체 누구야!?'
그러자 달마대사는 '모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 순간 달마대사는 이름과 모양도 우주와 같이 공해져 버렸지요.
'난 달마대사야! 엄청난 수행을 통해 성불한 달마대사라고!
그러니깐 당신 황제에게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거지.'
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말입니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불교가 처음 탄생한 곳 아니겠어요.
한국 김치의 대가가 미국에 가서 김치 만드는 법을 전수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겠죠. 이와 같이 달마대사도 불교의 탄생지인 인도에서
온 대 화상이지만서도 아무런 아상이 없이 '나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완전히 무아의 상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황제가 ,
'넌 누구냐!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완전 미친 거 아냐?'
라고 했을 때, 달마대사는, '모릅니다~ ' 하며 황제의 마음을
그 순간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입니다. 이름과 모양을 모두
초월한 우주와 같이 공한 상태로 말이죠.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금강경의 마지막 가르침을 공부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금강경을 잘 보시면 이미 느끼셨겠지만,
똑같은 가르침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긴 하지만요.
예를 들어서, 우리 화계사가 삼각산에 자리하고 있잖아요?
삼각산의 정상은 인수봉이고요.
인수봉에 가서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수봉우리의 모양은
굉장히 오묘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수봉 사진을 찍을 때 정면에서만 찍지요. 그런데 의정부 방향
이나 구파발 방향에서 찍은 인수봉 사진을 보면 전혀 색다른,
그리고 특이한 인수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인수봉인데도 말이죠!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도 여기 금강경에서 똑같은
얘기를 약간 다른 시각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금강경의 가르침은 가장 첫 번째 장에
모두 들어있다고요~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필요 없다고요.
그런데 대부분 못 알아들으니깐,
다음 장에서 말로써 설명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깐, 다른 방법으로 다시 설명을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오직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공 함을 말이죠.
어떤 현상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한 어떤 목에도 집착하지 말라고요.
자 그럼 28장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덕에 대한 집착'
"수보리여! 만약 어느 보살이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하고, 또 한 보살이 있어 일체의 법이
무아라는 것을 알아 인내를 얻어 도를 성취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클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공덕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룁니다.
"세존이시여! 왜 보살이 공덕에 연연하지 않는 다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뜻은 공덕이라는 것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재미있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매일 무슨 일을 하지요.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항상 어떤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행을 하면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에 대한 댓가나 기대를 바라지요.
칭찬이나 보상, 감사함 등 뭔가를 항상 기대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나 직장 등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말이죠.
그런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란 참 힘들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극소수의 사람만이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보살행을 실천하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선 무소유, 그리고 복[보시에 대한 열매]에
대한 무집착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보시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요.
돈을 보시하는 것도 있고요,
친구에게 안주 전화를 하는 것도 보시에 포함 될 수 있겠고요,
며칠 전 우리 화계사 신도님의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셔서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병문안을 하시고 염불기도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이것도 굉장한 보시입니다.
보시는 스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도가 스님한테 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보시란 매일 매일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모든 행위입니다. 기독교도 똑같죠.
누가 배고플 때 음식을 주고, 옷이 없으면 옷을 주고,
교도소의 죄인을 방문한다던가요, 예수님도 항상 이런 기본적인
보시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소유물을 나누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선행을 하면서 아무 기대도
하지 않기란 참 힘들지요. 그래서 금강경은 바로 이점, 복이나 댓가를
바라는 이런 마음을 완전히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뭔가 댓가를 받는 다고 해도 우리는 항상 그 양을 재고
평가하지 않습니까? '난 이만큼 좋은 일을 했는데,
나한테 오는 것은 에게~ 겨우 이 정도야.
난 저 사람을 위해 다섯 번이나 도와줬는데,
저 놈은 두 번 밖에 날 안 도와줬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아주 미묘한 상황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무소유 그리고
무집착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이 선행이라는 것도 사실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그 일도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친구의 고민을 들어줬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지금 그 행위는 어디에 있지요?
절에 보시한 돈, 또는 친구 아버님의 병원을 한 그 일,
이 행위들이 지금은 ...
모두 21장을 이해하셨습니까?
그 행위들은 '어떤 물건'도 아니고 지금 존재하지도 않잖아요.
붙잡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으며, 맛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지요.
네! 선물을 주기 전에 사진을 찍어 놓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사진이 진짜 보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진짜 보시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아무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니깐 아무 보상이나 댓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이것이 보시에 대한 진리이자, 과학입니다.
온 우주가 미세 소립자들로 구성되어져 있다고 하는데,
당시 보시했던 그것의 소립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찾을 수 없자나요 지금!
그래서 우리 마음이 이런 댓가나 보상에 집착을 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보상을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망상입니다.
그리고 고통은 망상에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느 보살이 갠지스강 모래 수 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하고..."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마어마한 돈을 남을 위해 쓰고요,
두 번째 사람은 순간순간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은 이 두 사람 중,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더 큰'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법과 규율, 감사함이나 감사해 하지 않는 마음 등]
실체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는 공덕이나 그 반대의
현상이라도 그것 자체로 아무 성질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보살의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훨씬 클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공덕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진정한 보살은 이와 같이 자기의 보살행에 대한
어떠한 공덕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불교 뿐 만이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에서도 분명히
가르치는 요점입니다. 당신이 하는 그 어떤 일에도 보상이나
댓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이미 대 자유인이고,
오직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누군가 배가 고프면, 오직 음식을
나눠 줄 뿐이고! 내일 또 배가 고프면, 또 음식을 주면 되고,
다음 날 또 배가 고프다고 하면, 또! 주면 됩니다.
그래도 고맙다고 하지 않더라도, 다음 날 또 음식을 주세요.
이렇게 하면 자아가 없는 [무아]의 보살행 입니다.
그러나 만약 계산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벌써 세 번이나 음식을 줬는데, 맛있는 케익도 줬는데 그 사람은
아무것도....]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은 이미 조건적인,
진정한 자비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시, 보시하는
자와 받는 자가 모두 본래 공 함을 알면, 아무 조건 없는 보시가
실천됨은 물론, 무한한 자비의 삶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자비의 실천은 끝이 없이 무한해서
그 양을 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치의 모자람도 없고 울타리가 없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듯, 불교의 가르침은 '공'에 기반을 둡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에 대해서 얘기할 땐, 정말로 진심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현상과 물체의 '공' 함을
깨닫는 것의 의미는 '대 자유'입니다.
이런 대 자유를 얻게 되면, 걸림 없이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룁니다.
우리 절에 오셔서 이렇게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지금 어디서 찾을 수 있냐고요?
아무데도 안 보이는데요―
어디에 담아 놓을 수도 없고요.
이렇듯 어쨌든 공 하니깐요.
아무 댓가도 바라지 마세요. 대자유인이 되세요-
그러면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도울 수 있고요.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진짜 자비이자 보시입니다.
아시겠죠? 질문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없어요? 좋습니다.~
29장은 아주 흥미로운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은 3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왜32장일까요? 33장도 또는 34장도 아니고 말이죠.
부처님은 32가지의 특별한 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액션 영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말이죠.
그런 영웅은 일단 체격이 좋아야 겠죠?
힘이 세고, 무섭게 생겨야 겠고, 총도 잘 쏴야겠고요.
요즘은 멋있는 선글라스도 끼고 나오지요. 하하~
이런 액션 배우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이 있지요?'
만약 최고의 액션 배우가 만약 아주 작고, 말라깽이에다가,
앞주머니에는 볼펜들이 꽃혀 있고, 항상 초조해하거나
자기 머릿결을 쓰다듬거나, 파리가 지나가도 깜짝 놀라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 사람이 액션 영웅이라고 믿겠어요?
우리는 그가 어떤 여러 조건을 갖추기를 기대하자나요.
어떤 유명한 액션 배우가 코미디 영화를 찍는 다고 하면,
'에이~ 그 사람은 안 돼, 액션이나 할 것이지 왜 또 코미디를 한데~'
하면서 불평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부처님에게 어떤
겉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32상이라고 하죠.
누군가 이 상을 갖추고 있으면, 쉽게 부처라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성인이
갖추어야 할 특정한 상이 있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32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강경도 32장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금강경은 이런 32상, 기다란 귀, 곱슬머리, 또는 눈 색깔 등의
이런 특정한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상에 집착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때립니다.
대신 진짜 부처는 바로 이것이죠.
바로 이것입니다! 라고 했을 때 만약 또 여러분이 바로 이 책 자체나
이 안에 나오는 단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 또한 실수이겠지요.
진짜 부처는 바로 이 32장의 내용이 가리키는 이것! 입니다.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금강경은 32상의 개념을
박살내어 버립니다.
자, 다음의 29장은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처는 과연 무엇인가?'
당시 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이미지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었는데,
29장에서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처님이 남자였다고 생각하죠? 틀렸습니다.
오! 그럼 여자라고요? 그것도 틀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이긴 한가요? 그것도 틀렸습니다.
한 분의 성인? 땡!
부처님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중생 교화를 위해
길을 걸어내려 오고 계셨습니다. 내려오는 중에 소를 몰고 가는
한 농부를 만났는데, 농부는 부처님의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고
물었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부처님은 '아니오'
저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 반신반인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성인이세요? 아닙니다. 성인도 아닙니다.'
'그럼 법사세요? 아닙니다. 법사도 아닙니다.'
'그럼 남자세요? 아뇨. 남자도 아닙니다.
'그럼 인간이긴 합니까? 아니오. 인간도 아닙니다.
그러자 농부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뭐냐구요~?
'저는 '깨어있음' 입니다. 깨어나는 것이 부처입니다.
깨어있는 지금 이 순간 자체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핵심입니다.
'진정한 부처란 무엇인가?'
옛날 사람들은 남자만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진정한 부처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는 이런 말도 있지요. '당신을 깨어나게 하는 모든 것이 보살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당신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보살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깨어나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나는 것' 자체로 부처입니다.
우리는 항상 생각들을 ?지요.
어제 생각, 내일 생각, 스님 생각, 학교 생각, 집 생각, 또는
화나고 겁나고 걱정하는 이런 상태는 잠들어(꿈꾸고)있는 상태입니다.
왜냐면 이런 모든 생각들은 다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깨어나면,
저기 들리는 선풍기 바람소리가 온전히 들리지요.
그 깨어남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부처가 일반 사람들처럼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은 이런 생각에 한방 날리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음으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모양이나 성격, 또는 종교라고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깨어있는 마음, 티베트 불교에서 말하는 '순수한 인식'이 바로
부처라는 말이죠. 그 마음은 책에 의존하지도 않고, 종교, 가르침 등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실천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아가타의 뜻은 '이와 같이 오고, 이와 같이 간다'
는 뜻인데요. 진정의 의미로의 이 뜻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소리를 들으실 때, 탕! 이 소리를 들은
바로 그것! 그 존재, 그 뭔가가 있잖아요.
그게 오거나 가지 않지 않습니까?
항상 그 자리에 있지요?
항상 그 자리에서 기능하고 있잖아요.
단지 우리가 이런 경험에 늘 상 깨어있지 않을 뿐이지요.
항상 생각의 그림자를 쫓으니깐,
'아'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 다른 생각을 했어요.
뭐라고 하셨죠?' 라고 종종 되묻지 않습니까?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진짜 부처를 저 뒤에 있는 불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불교를 재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란 말씀입니다.
저 불상은 오직 진리를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 같은 것일 뿐이지,
부처가 오직 저 모양, 저 색깔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것 [마음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깨어난 상태에서 보는 것이 부처요! 듣는 것이 부처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제 뺨에 느껴지는 이 선풍기 바람 등 이 모든 것이
다 부처인 것입니다. 아시겠죠? 전혀 어렵지 않죠?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것
같기도 하며,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여래[마음]은 여기도 저기도 아니며, 여기로 오거나
저기로 가지도 않고, 너와 나라는 상도 없습니다.
'나는 깨어있는데, 너는 깨어있지 않아!'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깨어 있는 마음과 제가 가지고 있는
'여래'의 마음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은 두 개의 다른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두개의 다른 여래도, 부처도, 성질도, 능력도
아닙니다. 우리가 과연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요?
모두가 다 여래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냐구요?
탕! 이 경험!
이 순간!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똑같은 여래를 들으셨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래라고 합니다. 오지도 가지도 않았습니다.
아직도 여기 온전히 있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금강경을 어렵게 생각하는지 참 모르겠어요.
이렇게 분명하고 시원시원한데 말입니다.
그러니깐 진짜 부처는 '늘 깨어있는 마음'이에요.
저는 이 장의 제목, '완벽한 고요'가 참 맘에 듭니다.
우리의 본성, 완벽히 고요한 우리의 본래 면목 말입니다.
더 이상 진정 시킬 필요도 없이 이미 완벽하게 투명합니다.
그리고 항상 작용한답니다.
1분 전에 작용했는데 지금은 어떨까요? 한 번 보실래요?
탕~!
저 경험~
이 경험~
오지도 가지도 않지요?
여래~ 오지도 가지도 않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귀에서, 코에서, 혓바닥에서, 몸,
그리고 마음에서 지금 이 순간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렇죠? 굉장히 쉽죠?
그러니깐 진짜 부처는 인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것이
아닌 걸 아시겠지요? 2500년 전에 왔다 가신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이지 진짜 부처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부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니깐요.
오직! 탕! 바로 이것입니다.
자 어떠한 종교더라도 신이 2000년 전에 대중들 사이로 오셔서 걸었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면, 아! 제가 어렸을 때에 교회에서 이 찬송가를
불러야만 했었는데요. '오 하나님이 우리들 사이로 거니시던 시절~'
이게 무슨 소똥 같은 소립니까? 만약 그 신이 우리 사이로 지나갔다면,
그건 진짜 신이 아니지요. 진짜 신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습니다.
인간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내지요.
월요일, 화요일, 지난 주, 다음 달....
진짜 부처, 진짜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직 이 순간, 탕!
이 경험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래라고 하고, 타타가타이고 부처입니다.
오케이?
자 그러니깐 여러분, '완벽한 고요'를 경험해 보고 싶으시면
참선을 해보십시요. 아주 도움이 많이 되실 겁니다.
자 30장 입니다.
"완벽한 원리"
아주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과학, 특히 물리학적으로 불교를
설명하시거든요.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내어 만든다면
그 티끌의 수가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그 티끌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티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은 곧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일합상이라는 것은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다만 범부들이 일합상이라는 것에 탐하고 집착하고 있을 따름이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니깐요. 이 장은 양자 물리학의 방법으로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사실은 절대 어려운 내용이 아니랍니다.
불교에서는 말이죠. 어떠한 존재라도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가르칩니다. 관계를 벗어나서는 어떠한 것도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밖에서 들리는 목탁 소리가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네요.
여러분은 저 소리가 저쪽에서 난다고 생각하시죠?
저쪽에 목탁 소리가 있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귀를 한번 막아 보십시오.
그 순간 저 목탁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탁 소리의 '존재'는 오직 생각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전 불교에서는, 어떠한 존재도 다른 존재와의 관계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어떠한 존재도 혼자 따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목탁소리가 들리냐고 물어보십시오.
그 죽은 사람에게는 이 목탁소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부산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세요.
'야 지금 화계사에서 들리는 목탁소리 어떻노?'
그 사람은 부산에 있기 때문에 이 목탁소리를 듣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그에겐 이 소리가 존재하지 않겠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공포라는 것도 오직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도 우리가 존재 한다고 생각하기에 존재합니다.
성공, 야망, 후회 등도 똑같이 우리가 그것들에게 존재성을
불어넣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모든 것들이 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지요.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내어 티끌로 만든다면,"
티끌을 원자로 표현하면 이해하기 더 쉬우시겠죠?
"그 원자의 수가 많겠느냐?"
이 온 우주의 세계를 가루로 내면 말이죠?
그러자 수보리는 대답합니다.
"당연하죠~ 왜냐하면 만약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원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작은 원자를 '원자'라고 이름 부쳐서 말하지요.
물질을 물질이라 하고, 사물들을 사물이라고 부르고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항상 이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이 탁자 보이시죠?
이 모양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 자체로 아무 자성이 없는 것이죠.
이 탁자는 이것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자 이 탁자를 불태우면 이 원소들은 모두 재로 변하지 않습니까?
탄소, 질소, 그리고 수소 등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것들은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자들은 다시 이원자로 나눠지고
양자와 전자 등으로 말이죠,
이 이 원자들을 입자라고도 하는데요.
이 미세한 입자를 다시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물체는 이와 같이 자성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물리학이 이것을 이미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공인데 이렇게
탁자가 있고, 제가 두드리는 이 탁자가 여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오직 우리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 자체로는
자성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데카르트가 이렇게 말을 했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고, 그것이 곧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이 책상을 책상이라고 말하지만, 이 책상은 자기가
책상이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안녕~ 책상아~ 넌 뭐니?
아직 대답을 안하네요.
이 마이크를 가까이 대 보면 이놈의 말이 잘 들릴까 모르겠습니다.
여기도 아무소리 안 들리고, 여기도 안 들리네요. 대답이 없네요.
미국인들은 데스크라도 부르지요.
한국 사람들은 책상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의 이름들은 이것들의 진짜 이름이
사실은 아닌 것입니다. 오직 개념일 뿐입니다.
이 책상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오직 생각으로 만들어 낸,
스스로는 아무런 자성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최종회)
금강경의 진짜 놀라운 점은 완전히 과학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성이론과 완전히 부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소한 시간과 공간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시죠?
책상은 쉽게 부러지거나 연소되니깐 그렇다고 쳐도
최소한 시간이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지금 여기 한국 화계사에 있는 대적광전에 앉아있는데,
이 공간은 존재하는 거잖아. 시간도 존재하는 거 아냐?
그래 많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쳐도 시간은
존재하는 거 아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모두 생각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란 말이죠.
불교의 가르침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제가 이 장의 처음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생각함으로 존재합니다.
데스크라고 말하면 데스크가 되는 것이고, 책상이라고 말하면
책상이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들어 냅니다.
불교에서만 주장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곧 우주는 모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말이죠.
보는 자의 새끼손가락 또는 엄지손가락에 의한 것이 아닌,
바로 '생각'에 따라 말입니다.
그러니깐, 우주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정말 대단한 이유는 이렇게 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원자를 '원자'라고 부르지만, 그건 단지 이름일 뿐이죠?
부처님은 이미 이 원자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또는 시간과 공간 모두가 본래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이름과 모양은 스스로의 자성이 없음을 말이죠.
아주 굉장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고요.
이 책상의 모양은...
이렇게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책상은 사실 공한 것입니다.
본래 공 그 자체입니다.
또한 이 공한 가운데 형상이 임시로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말이죠.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책상이 진짜 책상이라고 느끼지만,
만약 여러분 눈을 가리면 여러분에게 이 책상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으로는 만질 수 있지 않겠냐구요?
만약 그 손이 없다면요?
눈과 손이 없다면, 책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혓바닥으로 만지겠다고요? 그럼 혀를 잘라버리겠어요.
이렇게 모든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자, 그럼 다시 보겠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그 티끌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티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은 곧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나무도 곧 나무가 아닙니다.
여기 불교 법문을 처음 들으시러 오신 분에게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정말로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고양이라는
것도 '고양이'가 아닙니다. 강아지도 '강아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 말을 믿지 마세요. 어쩌면 불교의 쇼일 수도
있으니깐요. 대신, 우리 절에 개 한마리가 사는 데요.
가서 한 번 직접 물어보세요. 너 개니?
정말로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절이니깐 합장 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개님!! 정말 개입니까?
그리고 대답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인간들은 그들을 개라고 불러서 그들은 '개'가 되었습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30장은 바로 이런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티끌은 곧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의
무리인 까닭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갤럭시[시계]라는 물건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 세계가 어떠한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완전한 모양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라도 분리할 수 있어야겠지요.
여기 있는 이런 모든 물건들을 부셔서 먼지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부처님은 이런 모양들을 임시 합쳐진
복합물이라고 하셨답니다. 합성물이라는 것이죠.
완전히 가루가 될 때까지 말이죠.
합성된 물질만이 아닌 합성된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존재성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 이 마이크, 책상, 책, 이 소리 등의 이 모든 것을
부시고 또 부시고 또 부시면, 부서질 수 있는 데까지 끝까지
잘게 부셔버리면, 마늘을 잘게 써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늘처럼, 책상, 주장자 등의 이 모든 우주가 다 이렇게
공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물건이라도 스스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작게 다른 물건 등으로 분리시킬 수
없어야겠지 않겠습니까? 이 책상을 부숴버리면, 그냥
나무가 되겠죠. 나무를 또다시 계속 잘게 부수면 원자 등으로
나눠지겠지요. 이렇게 책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존재성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존재성이 있다면, 그렇게 그 물건을 잘게 만들 수 없겠지요.
우주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어떠한 물체라면,
그것을 분리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 또한 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뿐입니다.
세계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티끌들이 모여 잠시
세계라는 형상을 이루고 있을 뿐이어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일합상, 곧 우리가 부르는 이 우주는 단지 그것을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일 뿐인 것입니다.
오직 이름일 뿐입니다.
아주 간단하죠?
자, 다음 내용도 정말 대단합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십니다.
"수보리여!
우주는 그 어떠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니라.
어떠한 것이라도 언어로는 그것의 진정한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말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오직 범부들 민이 이러한 임시적으로 만들어놓은 모든 개념에
집착하고, 답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뜻을 아주 쉽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컵인가요?
이것을 컵이라고 말하면 이것의 이름과 모양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컵이 아니라고 말하면, 공에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죠. 컵이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고 미국 사람들은 이것을 컵이라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찻 잔 혹은 그릇이라고 하잖아요.
프랑스 사람들은 '라타스'라고 하고요.
그러니깐 컵이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 것이요,
이것이 컵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공에 집착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과연 어떠한 말로서 이것의 본성을 설명해야 할까요?
어떤 언어로요?
이것을 설명하는 오직 한가지의 언어가 있긴 있는데 말이죠.
모두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죠.
제발 여기 계신 분 중에서 이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언어를 사용해서 이것을 설명해 보시라고요.
이것을 과연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이것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말일까요? 네?
뭔가를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요?
[How to drink?]
그런데 한국사람이나 말레이시아 사람은 영어로 애기해서
그 뜻을 이해 못할 텐데요?
그건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죠. 죽은 언어입니다.
컵이라고 말하면, 죽은 표현입니다.
'How to drink?'라고 말해도 이미 죽은 표현이구요.
'물잔' 이라고 말해도 죽은 표현이구요.
다 죽은 언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에게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냐구요?
여기에 200개의 학사졸업장과 300개의 고등학교 졸업장,
60년의 수행과....
맞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자, 언어로는 이것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언어, 크리스챤 언어, 한국말, 영어, 폴란드 언어, 프랑스 언어,
내 말, 네 말, 부처님의 말, 숭산 큰스님의 말, 성철 큰스님의 말,
책에서 읽는 그 어떠한 언어로도,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도 이것을
완벽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와 신도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인 이미 설명되었습니다.
아주 심플하죠? 자, 다시 한 번 보시지요.
언어로는 이 컴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가 없다.
우주는 너무 크니깐 컵으로 바꿔서 말했습니다.
언어로는 이 컵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언어는 완전하지 않은 제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있죠.
아주 아주 쉽지요?
자, 그럼 31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챕터입니다.
법상을 내지 마라.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상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그 이름이 법상이다."
재미있습니다.
법상을 내지 말라.
어떠한 종교나 가르침이라도 '자아'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치면 그건 옳지 않은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주와 같이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큰 우주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이 우주와 구분할 수 있는 '존재' 또는 '자아'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이건 우주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 있는 법당에 앉아서 밖을 보시면
여기 법당과 밖의 공간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당 문을 모두 닫으면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문을 닫으면, 이 공간이 분리되어 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집이 하나 있는데 집안 가운데를 나눠서 벽을 세우면
공간이 두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하시면 여러분은 바보~ 입니다.
네, 우리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는 공간이 두 개로 나뉘어 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공간은 절대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누가 이 거대한 우주를 분리시킬 수 있는
힘이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블랙홀이라고 아시죠?
물리학에서 말하는 엄청나게 강력한 공간과 시간조차 빨아
드린다는 블랙홀이면 그 안에서만은 우주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지난 8~ 10개월 정도
전부터 뭐라고 말하는 지 아십니까?
당연히 부처님은 2500년 전에 이미 말씀하신 내용이지만요.
정말 놀랍게도 말이죠.
요즘 과학자들은 이 블랙홀 또한 그들도 실제로 블랙홀을
한 번도 눈으로 본적이 없거든요. 이 블랙홀이 오직 생각에
의해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블랙홀을 직접 본 적이 없거든요.
블랙홀은 우주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단지 수학적인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죠. 블랙홀이 일어나고 있는 사진조차도
하나 없으니 말이죠. 어쨌든 과학자들의 말로는 블랙홀이라는 것이
확실히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몇 몇 과학자들은 이 블랙홀이라는 것이 단지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것이죠.
블랙홀 이론을 믿는 자들의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가상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요점은 '우주는 둘로 갈라질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의 본성도 둘로 나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힘으로도 우리의 본성은 분리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죽으면, '그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고 말을 합니다.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사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아상, 인상, 중생상 등과 같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하늘을 쳐다보세요.
제가 태어나서 살았던 뉴저지의 우주와 여기의 우주가 두 개의
다른 우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의 우주 속에 있자나요.
그러나 벽, 분리, 또는 여기에서 저 멀리 만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이런 종류의 개념 등은 모두 환상인 것입니다.
이런 환상들이 우리가 세상이 분리되어져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 법당안과, 법당 밖이 두 개의 우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인슈타인도 시간과 공간이 모두
상대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미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8000마일 떨어진 장소나, 여기 2인치 떨어진 장소가 사실은
모두 똑같이 한 우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이 모든 것을 이제야 하나씩 증명해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가 아상 혹은 영혼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
그러니깐 어떤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다른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는 것은 정말로 무지한 상상인 것입니다.
영혼의 아주 부분적인 면만 보는 것이지요.
또한 조건적인 것이고요.
영혼 또는 우주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이 없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가까운 곳과 먼 곳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생각이 그런 개념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여기 제 앞에 시계가 있죠. 저는 이게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게 어디에 있는 거죠? '저기요!'
저한테는 '여기'에 있는데요?
여러분은 어디에 있다고 말한다구요? '저기요!'
아니에요! 여기라니깐요! '아니에요 저기에요!
여기에요! 여기! 온 세상이 바로 이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말입니다.
여기와 저기라는 상대적인 개념 속에서 말이죠.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리를 정말로 모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여기'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기'지요?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바로 이렇게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정말 단순하게 들리시겠지만, 모든 것은 다 생각[망상]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고 어떤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가지만, 어떤 영혼은 지옥으로 내려간다고
선언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영혼에 대해서 진정으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선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우주 또는 다른 그 어떤 것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나'가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은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도의 전통 종교에서는 어떤 영혼은 귀족으로
태어나고 다시 귀족으로 윤회하며, 어떤 영혼은 천민으로 태어나
다시 죽어도 그 영혼은 천민으로 환생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혼은 지옥에서 태어나고 어떤 영혼은 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그들은 선택 받은 자로서
여기에 이렇게 살지만, 천민들은 이러한 잘못된 종교적 발상
때문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영혼]을 만들어 여기와 저기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생각일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도 오직 생각일 뿐이고요!
아주 아주 분명하고 심플한 가르침입니다.
"아닙니다. 세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낸 이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너, 진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분들은 오직
임시로 지어져서 사용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여기요!
대화하기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오직 생각인 만들어 낸 이름일
뿐입니다. 스님과 리허설도 안했는데, 죽이 짝짝 맞네요.
그리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자는 일체의 법에
대해 마땅히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며, 이렇게 믿고 이해해
법상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여! 법상이라는 것은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하니, 그 이름이 법상이다."
그러니깐 그 어떠한 것이라도 이름 붙여진 것은 그것이 오직
임시로 붙여진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이름 자체도 녹여버리지만, 이것을 녹이려고
만들어낸 법까지 모두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지문이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존재성'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혁명이지만 완벽히 정확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자, 그럼 무엇이 정견[바른 견해]이냐?
진정한 통찰은 무견입니다.
이름을 무치거나 묘사를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견해도 진정한
정견이 아닌 것입니다. 입을 열어 묘사하거나,
이름 부치거나 하는 그 순간, '여기!'라고 지금 부쳤지요?
바로 이런 것은 정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라고 이름 부쳤으니깐요.
무견이 바로 정견입니다.
'여기'라는 개념[견해]을 제가 한번 녹여버릴까요?
지금 4시 19분이네요.
이해가 가세요?
정견[바른 견해]는 아무 견해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견해, 저기 견해, 불교적인 또는 기독교적 견해, 한국적
혹은 미국적인 견해, 남성 또는 여성의 견해, 과거 또는 미래의 견해,
종교적인 견해, 역사적인 견해, 이런 모든 견해를 다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오. 그리고 볼 때는 오직 볼 뿐!
들을 때는 오직 듣고! 냄새 맡을 때는 오직 냄새 맡을 뿐!
맛 볼 때는 맛 볼 뿐입니다.
느낄 때는 아~ 땀이 나네요.
이것뿐입니다.
이 견해는 '견해'가 아닙니다.
재밌습니다.
금강경의 6장에 보면, 부처님은 뗏목을 버리라고 하시지요?
당신이 가르친 법까지 뗏목처럼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이 가르침을 잘 사용해서 유심히 통찰하라고요.
단, 이렇게 해서 얻은 견해에도 집착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우리 금강경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볼까요?
마지막 장 또한 전의 31장과 같이 매우 심플합니다.
심플하다는 말이 쉽다는 뜻이 아니라요.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요.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은 절대로 애매한 또는 복잡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하지요.
요점 요점마다 굉장히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32장도 마찬가지로 이 전의 31장 모두와 심플합니다.
겉모습은 모두 환상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일으켜 이 경전을 수지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클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유위법은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다 말씀하시고 나자, 수보리 및 모든 비구와
비구니, 재가의 남녀 수행인, 세간의 선, 인, 아수라가 모두 부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자기 갈 길을 걸어 나갔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습니다.
이 위대한 가르침의 설법이 끝나자 모두 기뻐하고, 마음에 깊이
가르침을 새기며 머릿속으로 말고요-
각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떠납니다.
우리가 조금 있다가 그렇게 하겠죠?
자, 부처님은 다시 한 번 이 테마를 언급하십니다.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 보시 보시 보시!!!
제가 처음부처 말씀드렸듯이, 보시의 종류는 참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말을 하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열어 도와주고
사랑하며, 이렇게 참 많은 종류의 보시가 있답니다.
이런 종류의 모든 보시는 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장 위대한 보시는 말입니다.
이 경전의 사구게만이라도 깨달아서, 종이위에 있는 이 글자들 말고요.
이 네구절만이라도 확실히 깨달으면, 이미 이 사람은 훨씬 큰 복을
얻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다녔던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그 어떤 교수들 보다 더 많이 말이죠.
어렵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수행입니다.
머릿속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구전으로 옮겨져 외우고 그 뜻을 실천으로
옮겼지만요. 어쨌든, 이 금강경의 어떤 네 구절이라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커다란 금 덩어리처럼 말이죠.
금강경의 4조각만이라도 깨달아서 실제 생활에 실천하게 되면,
인생 최대의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니까요.
어떤 고통이요?
모든 망상에서부터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금강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망상의 고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신경전문의나 책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실제로 깨닫고, 일상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말이죠.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우주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하고,
또한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리심을 일으켜 이 경전을 수지,
(확실히 실행으로 보여준다는 뜻이죠.)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기억하시죠?
이 컵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은, 입으로 벙긋벙긋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컵을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금강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주 심플합니다.
말로서 설명하는 것은 완전히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몇 장 전에 이미 말씀하셨지요?
진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고요.
"이 경전을 수지 또는 사구게를 독송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보다 클 것이다."
아, 여기 국제선원에 보시하는 것 빼구요~
자, 그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
어떤 식으로 설명해 주어야 할까요?
잘 들어 보십시오.
바로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모든 가르침은 사실 여기서 끝납니다.
상에 집착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말이죠.
이게 전부입니다.
무엇을 볼 때는 눈으로 확실히 보고요.
들을 때는 있는 그대로 듣고요.
냄새 맡을 때는 있는 그대로 냄새 맡고요.
혀로 맛을 볼 때는 그대로 맛을 보고요.
몸으로 느낄 때는, 아~ 땀이 촉촉이 나네요.
아~ 정말 시원한 손수건이네요,
이것도 진리이고요.
이렇게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부동하게 금강경을 설명하는 것이
제대로 금강경을 설하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제대로 가르쳐 주자나요.
어떻게 금강경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야 하냐구요?
순간 순간 오직 하면 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게 바로 금강경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 어떠한 다른 말도 필요 없습니다.
자, 그럼 금강경의 마지막 가르침을 여러분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온 세상은 ....
이 세상이 과연 무엇일까라고 의문이 생기면 말이죠.
아침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별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침에는 밝아서 별이 보이지 않자나요.
분명히 있기는 한데 하늘이 밝아져서 보이지 않지요?
또한 물거품과 같이 생각하세요. 물거품이요.
물거품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겉모양은 있긴 한데, 단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의 삶도 여기 계시는 이동수씨의 삶도, 성시은의 삶,
관해스님의 삶, 또한 제 현각의 삶도 모두 물거품과 같이 임시적인
삶인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아는 분 계신가요?
이 세상에 나오지 전 그 시간들을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없죠~ ?
이렇게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한 모양의 물거품은 바로 그 전의 물거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을 못하지요. 삶은 이렇게 물가에 있는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벽의 별과 같고, 물 위의 물거품과
같으며, 여름 하늘에 내리치는 벼락과 같은 것...
몇 주 전 홍콩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그날 밤에 4,500개의 벼락이 내리쳤답니다.
약 5주 전의 일이었습니다.
신문 1면에 났던 기사였어요.
저는 그날 밤 선원 발코니에서 와우 와우~ 하면서 신나게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와~ 저것 봐~ 하면서 말이죠.
다음 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제 4500개의 벼락이 내리쳤다는데 혹시 보셨어요?'
'그래요? 전 한 두개 밖에 못 봤는데요. 설마요~'
그러자 저는 신문을 보여드렸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삶이 이렇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벼락이 순간 내리치고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또한 하나의 불빛과도 같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 천장에 있는 전등을 생각하시지요?
아니요. 2500년 전에는 양초밖에 없었을 겁니다.
옛날 계룡산 신원사 파고다 석탑 앞, 단상이 하나 있었는데요.
단상 위에 두개의 양초가 항상 있었답니다.
벽암 큰 스님께서는 양초에 항상 불이 켜져있기를 원하셨는데요.
그래서 젊은 스님들이 항상 저녁 예불 전에 불을 붙이곤 했답니다.
그런데 촛불은 항상 금새 꺼져버려서 스님들이 다시 쪼르르 달려가
불을 붙여야만 했죠. 우리는 선방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곤 했는데요.
그 스님이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촛불을 켰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벽암 큰 스님이 그 스님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시켰던 것 같습니다.
큰 스님은 그 젊은 스님에게 '무상'[항상 변함]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을 말이죠.
그래서 그 젊은 스님은 머리를 좀 써서 콜라병을 거꾸로 세워서
바람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불이 꺼졌답니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이처럼 매우 위태한 촛불의 심지와
같은 것입니다. 한 순간 죽을 수 있는 우리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내일까지 살 수 있을 지 아무도 모르자나요.
3개월 뒤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떠나도 어쩌면
이 중에 한 분은 세상을 잠시 떠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삶은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분은 말이죠.
앗! 저를 포함해서요.
'그리고 허깨비와 같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허깨비를 봤다고 하셨는데요.
삶은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허깨비는 이와 같이 한 순간의 환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삶은 이렇게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 이 삶이 모두 이와 같이 꿈과 같습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 꿈이 실제와 같이 느껴지지요.
신나는 일이나, 화, 공포, 의심, 걱정, 혼란함 등의 이런 모든 감정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실제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꿈에서 깨는 순간, 하~ 정말 바보 같다.
꿈이었을 뿐인데~ 라고 하지요.
그런데 혹시 아세요?
바로 지금도 어제 꾼 꿈처럼 똑같이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요.
만약 지금 망상에 빠져있다면 말이죠.
그러나 모든 생각은 끊어 버리면, 여러분은 이미 부처입니다.
"부처께서 이 경전을 다 말씀하시고 나자 수보리 및 비구와 비구니
재가의 남녀 수행인, 일체 세간의 천, 인, 아수라가 모두 부처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자기 갈 길을 걸어 나갔다."
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이 있네요.
경전의 처음에는 비구니가 없었거든요.
경전의 마지막에는 비구니를 포함, 모두가 다 부처님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부처님의 높은 가르침에 기뻐하고 있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는 조금 슬픈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삶이 풍전등화와 같다고 해서 말이죠.
하지만 사실 아주 좋은 뉴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진정으로 이 점을 깨달으시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시와 공을 초월하고, 오고 감도 없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금강경의 강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나중에 또 헷갈리시면,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늘이 진리를 가르쳐 드릴 것입니다.
................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_()_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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