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수보리는 미래의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어보지만,
부처님께서는 '미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왜 미래에 대해서 질문을 하느냐'는 것이죠.
만약 바로 이 순간을 이해한다면,
확실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처음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요]
아! 뭔가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뿐 임을 알 수 있다면
미래에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이 순간,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여기 6장의 이 뒤에 구절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에 조금이라도 집착이 있다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진정한 보살은 '나'라는 상이 없습니다.
우리 본래의 모습, 진정한 모습,
생각 이전의 모습은 '나'라는 상이 없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등 차별된 상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입니다.
이것은 물로도 비유할 수가 있는데요.
이 컵에 들어있는 물과 저 컵에 들어있는
물의 H2O 본질이 다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이 물의 H2O 와 저 물의 H2O 본질은
모두 똑 같습니다. 모두 같은 H2O 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본성과
저의 본성 또한 똑같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누구든지 어떠한 상에 집착하면
진정한 보살이 아닌 것입니다.
자 6장의 가장 흥미로운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가 설하기를
나의 법문은 뗏목의 비유와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버려야 하며,
그 아닌 것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이와 같이 뗏목과 같습니다.
이 금강경이 바로 뗏목과 같은 것이죠.
여러분보다 더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강을 건너는 뗏목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거에 한 선사님과 제자들이 한 겨울
혹한 추위 속에 있었는데요, 금강경을 태워서...
우리는 금강경을 들 때 머리 위로 예를 표하라고
땅 바닥에 놓지 말라고,
엉덩이에 깔고 앉지 말라고 배웠습니다만,
이 선사님은 금강경을 찢어서 불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선사님! 도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그건 금강경이잖아요!
왜 금강경을 찢으시는 겁니까?
미치신 거 아닙니까? 라고 따지자,
'미친 짓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이제 더 이상
춥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대답하셨답니다.
그러니깐 금강경은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자동차 같은 것입니다.
본래 공한 본성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 뿐입니다. 아시겠죠?
부처님이 버리라고 하신 것은
단지 이 종이로 만든 책뿐이 아니라,
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나'도 버리고, 이 가르침도 버리라는 것이죠.' 그렇죠?
또한 '공'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공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또한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금강경은 단지 우리에게
이 가르침을 전달하는 뗏목과 같다는 것입니다.
제 7장 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는가?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는가?"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하길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라 이름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법하신 것은
모두 취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의 법을
삼으나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 전장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이 법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도, 그 어떠한 규칙이나
종교에 대한 모든 것을 말이죠.
그러하니 불법이 아닌 것은
더 지체 없이 내려놓아야겠죠.
뗏목처럼 즉시 버리고 가야합니다.
불법도 버리고,
금강경도 버리고,
나, 나의, 나를 도 버리고
모두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수보리가 '공'함에 아직 집착해 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에 말이죠.
이 아뇩다라삼약삼보리 말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뜻인데요.
사실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매일 깨닫는 경험을 합니다
눈과 코와 입과 귀와 마음이 열렸을 때
많은 종류의 깨달음을 경험하고 있지요.
어제 꾸었던 꿈 있잖아요.
'옛날 친한 친구도 만나고, 등산도 하고,
고등학생시절에 들었던 음악도 듣고,
죽었던 친구가 나타나기도 하는 이런 꿈에서
깨어나는 것도 일종의 깨달음입니다.
꿈에서 깨면, 그 꿈이 단지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이러한 현실을 꽤 뚫어 보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숭산 선사님께서도
꿈에 대해서 법문을 하셨는데요.
'내 머리통이 어디 갔지? 내 머리가 없어졌다!'
가끔 꿈에서 머리가 없어지기도 하잖아요.
어떤 때는 팔이나 다리도 잘리고요.
가족을 잃거나 차를 도둑맞기도 하고
짐이 날라 가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런 꿈에서 깨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경험도 일종의 작은 깨달음입니다.
매우 흥미롭죠?
여기서 말하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바로 그 많은 깨달음 중
가장 으뜸의 최상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질문 합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그 어떤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무엇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가?
요즘 서양의 선을 공부하는 학생들고
종종 스승의 깨달음을 평가하곤 하는데요,
영어로도 '아~ 저 분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야!
라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영문에서도 이런 말을 씁니다.
'저 사람이 뭔가 얻었다구요'
그리고 저 분이 진정 깨달음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평가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난 어떤 것도
무언가 얻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 뭔가
특별한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에 대해서 애기 합니다.
저건 구름이라고 말이죠.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구름이
호랑이 같다고 하기도 하고,
코끼리, 돼지, 새같이 생겼다고 말하잖아요.
땅에서 봤을 때는
저 구름이 실제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른이 되어서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지나가면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구름을 통과하는 비행기를 보고
굉장히 놀랐던 적이 있었어요.
'와~ 비행기가 구름 안에 있다-'
'어쩌면 비행기가 구름 속에서는
귀엽게 생겼을 지도 모르겠다.
구름 속에서 비행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저 구름이 어떤 큰 방 같은 것일까?'
그런데 나중에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지나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단지 증발한 물이 잠시
모여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기 전에는 구름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구름이 사실 본래
공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공한' 구름이 진짜 구름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깨달음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그 생각에
일타를 날리신 것입니다.
부처도 그 '어떤 것'이 아니고
깨달음도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제가 들었던 그 어떤 가르침보다도
제 스승님께서 이 점을 잘 표현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승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었습니다.
'선사님의 깨달음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다릅니까? 라고 무었는데,
선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하늘이 파랗고 나무는 초록이었는데,
사실 깨닫고 보니 실제로 하늘이 파랗고
나무는 초록색 이더라' 라고요.
아주 쉽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이 내용을 이해하고 싶으시다면,
숭산 선사님의 가르침을 잘 새겨들어 보십시오.
깨달음이 뭐냐구요?
바로 이 선풍기 바람입니다.
이 피아노 소리입니다.
제 몸에 느껴지는 바람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여기 앉아서 여러분께 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차별된 특별한 무엇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것뿐입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럼 제 8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수행의 열매[깨달음]
전장인 7장에서는
어떻게 공덕을 짓는가' 에 대해서였는데요.
사람들은 모두 항상 상(복)을 받고,
또 상을 받고, 끊임없이 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인정받기를 원하고 보상 받기를 원하고
자기 의견에 동의해 주기를 바랍니다.
매일 우리는 이런 보상을 얻기를 바랍니다.
상, 보상, 복, 공로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마음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가르침을 주시고 있습니다.
바단 불교일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 어떤
좋은 일을 하시면 무엇인가 받기를 원하지요.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도 스님들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보시를 받을 때는
아 고맙습니다. 하면서 가볍게 받지 말고
네 몸에 칼을 꽂아 넣듯이 받아라' 라구요.
대부분의 보시는 얼마만큼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중생들은
무엇인가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기 8장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
왜냐하면 이 모두가 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기가 베푼 만큼
되돌려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숭산 선사님께서 미국 LA인가 하와이에 있는
한국 사찰에서 법문을 하실때 일인데요.
법상에 오르시면 예를 올리고
신도들이 옆으로 나와
보시함에 보시를 하시고 있던 중이었어요.
천원씩 말이죠.
그런데 법문 하는 도중에, 법문 중에 말이죠.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으이구 이 사람들아~ , 자기 자식들 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면서
고작 천원을 넣고 가느냐?
고작 천원 넣고 그렇게 큰 걸 바래?'
보시금을 넣고 계신 신도님들 바로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황한 신도님들이 지갑에서
더 많은 돈을 꺼내시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답니다.
금강경 8장의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는 바로 보시의 공함입니다.
사실 자식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작은 공덕이죠.
아주 작은 복입니다.
물론 사회에서는 대단하다고 하겠죠.
다음 생, 또 다음 생등 무수히 많은 무한히
긴 시간의 우주를 보시는 부처님의 안목으로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쯤은
별 것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세계에
가득 찬 일곱 가지 보물을 모두 보시한다면
그 사람이 지은 공덕이 과연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복덕이 곧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복덕의 공함을 뜻합니다.]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은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 보다 훨씬 클 것이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아뇩다라삼약삼보리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
그러니까 물질적인 보시는 공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합니다.
단, 공 하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시가 공 하다고 말할 때는,
또는 보시에 대한 공덕이 공 하다고 말할 때는
그것들이 헛 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움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간직할 수 없고,
그 양을 샐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는 냄새 맡거나 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원합니다.
좋아~ 잘했어. 정말 대단하다.
이제 넌 내 마음에 들었어' 이런 것들 말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요.
옛날 일본의 아주 유명한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큰 스님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큰 스님이 나타나실 때는,
여러분 일본 스타일 아시죠?
아주 좋은 실크 옷에 빤짝 빤짝 빛나고
바느질도 아주 촘촘하고
옷 위에 뭐가 또 하나 걸쳐있고,
그 위에 뭔가 또 있고 말이죠.
고급 신발뿐 아니라
실크 위에 도 실크를 걸치고
희귀한 염주 등 아주 복잡하잖아요.
그리고 신도들은 항상 많은 돈과
선물과 음식 등을 바치곤 했는데요.
큰스님은 그런 것들이 싫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 댁에
초청을 받아서 방문을 했는데요.
좋은 옷 대신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옷을 일부러 갈기갈기 찢고요.
씻지도 않아서 더럽고
냄새도 펄펄 나게 만들었습니다.
땅에 있는 진흙도 얼굴과 옷에
덕지덕지 부치고 말이죠.
그런 모습으로 교수님 댁을 방문 하셨답니다.
그 교수님은 큰 스님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분이었는데요.
큰스님은 원래 8시에
방문하기로 되어있었답니다.
변장한 큰 스님은 바리 그릇을 하나 들고
교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문이 열리자,
'누굴 찾으십니까?'
'저는 니까마또 교수 아니면 고구무끼,
두까바까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저는 매우 가난한 스님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먹을 것 좀 주겠습니까?'
'교수님은 지금 굉장히 바쁘시다니깐요!'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그럽니다. 부탁입니다.
5분 만이라도 잠시 몸 좀 녹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
'그래 그럼 들어오시오'
대신 저기 저쪽에 앉으시오'
아주 냄새가 고약하고 더러우니 알만하시겠죠?
큰 스님께서는 묵묵히 자리에 앉아계셨습니다.
그러자 구꼬 모꼬 교수가 나왔습니다.
왜 보자고 하셨습니까?
'아 저는 묵을 절이 없는 가난한 스님입니다.
너무 춥고 배가 고파서
좀 도와주실 수 있는가 해서'
'아니요. 죄송합니다.
오늘 저녁 아주 귀한 손님이 오시니
그냥 이거나 좀 드시고 가십시요.
'네...네'
큰스님이 식사를 하시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 더러운 거지 스님이
빨리 먹고 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 거지 스님이 큰 스님인지 몰랐어요.
큰스님께서는 게걸스럽게 드셨습니다.
큰 스님은 다 드시고 집을 나가서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면도를 하고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큰 스님 모습으로
돌아와 대문을 다시 두르렸습니다.
'큰스님! 큰스님 오셨습니다.
[일본 스타일로 요모시모시... 가시모시]
'큰스님 이 쪽 좋은 자리로 앉으세요.'
자리에 앉으시자 온갖 귀한 음식을 내오고,
일본 음식 스타일 아시죠?
네 명이 큰 쟁반을 들고 와서는,
화려하게 장식한 모형 위에
달랑 체리 하나가 올려져 있고 말이죠.
체리를 먹으면 큰 상은 나가고
예쁘게 장식한 생선이 담긴 쟁반이 들어옵니다.
큰 스님은 음식을 드시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스님은 음식을
옷에다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 왜 그러세요?
그리고 아주 고급 사께를
몸에 뿌리기 시작했어요.
'이런 무슨 일이야~'
음 이제 알겠다. 너희들은 단지
나의 이 좋은 옷을 대접하고 있었구나.
나를 대접하려던 것이 아니지
오직 이 '특별한 사람'을 대접하려던 거였어.
내가 한 시간 전에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
이제 이렇게 다시 차려 입고 오니깐
잘 대접하려고 하네!
그러니까 나보다 이 옷을
대접하려고 했던 거구나.
큰스님을 대접해서 큰 복덕을 얻으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나도 이제 이 옷을 좀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음식을
옷에 계속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큰스님 죄송합니다. 하리까리
뭐 그런 스타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겠죠.
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복덕을 바라지만,
부처님은 그런 복덕이
사실 다 공 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복덕도 모두 텅 비었습니다.
왕을 모시나 부처님은 모시나
모든 공덕은 다 공 합니다.
그건 가질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으며
냄새 맡을 수도 없지만!
사실 묘~한 무언가가 있기는 하지요. 아시겠지요.
다시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그 보덕이 곧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만약 복덕의 공함을 여실히 깨닫게 되면,
이 깨달음은 위대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다만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 준다면 그 복덕은
저 칠보로 보시한 복덕 보다 훨씬 클 것이다.
수보리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나 아뇩다라삼약삼보리법이
모두 다 이 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도
곧 불법이 아니니라.
삼천대천세계만큼의 복이나,
서울대나 하버드대에 들어가는 복은
일종의 작은 복일뿐입니다.
이런 복은 변하지요.
그리고 결국은 다시 사라집니다.
하지만, 훨씬 위대한 복이 있습니다.
더 큰 복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금강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가장 위대한 복덕은 바로 이 마음공부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입니다.
사실 이것도 텅 비었지만요.
그렇지만 이런 공덕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9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9장은 빨리 넘어가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아라한의 수행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제9장은 소승불교의 단계별
깨달음에 관한 내용이기에 매우 간단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것을 무참히 깨뜨려버리십니다.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나는 수다원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하겠는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 축에 든다는 뜻으로
일컬을 뿐이지 실은 들어간 바 없기 때문입니다.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하지 않음을 일컬어
수다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네 생각은 어떠냐?
사다함이 <나는 사다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생각을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다시 온다는 뜻을 일컬음이나,
실은 가고 오는 바가 없으며
다만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일컫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또 어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나는 아나함의 과를 얻었노라>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수보리가 다시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오나
실은 오지 아니함이란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야, 어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고
능히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 없음을 깨달은
이를 아라한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세조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욕망을 떠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나는 아라한의 도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 라고는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수보리가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수보리야말로 아란나 행을 즐기는 자>라고
일컬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번 장의 내용은 어떤 개념을 깨뜨려주는 것입니다.
수행의 단계를 가르치는 이런 소승불교
스타일의 수행법을 말입니다.
요즘 한국에도 아주 인기 있는 이런 단체들이 많습니다.
ㅇㅇ수련회나, 무슨 산 무슨 수련회요.
아니면 ㅇㅇ 선원이요.
수행의 단계를 가르치는 곳이죠.
첫째 주에는 150불이나 200불을 내면
첫 번째 경지에 이룰 수 있다고 하죠.
그리고 다음 주에 참석하여
그 다음 단계에 이룰 수 있다고 하구요.
그런 식으로 계속 하다 보면 최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고,
그 다음은 슈퍼맨 마법사 단계랍니다.
이런 식의 전통으로 가르치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한다구요.
진정한 불교는 사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대승볼교나 선불교는 말이죠.
왜냐하면 정통불교는 바로
이 '순간의 문'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탕!
바로 이 경험 입니다. 이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바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직 이 한 단계뿐입니다.
여러분 삶의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래서 이 장의 요점은 바로 이런 전통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수보리와 같은 아라한은 이렇듯이
단계를 거치는 수행법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진정한 수행의 길은
단계라는 개념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10장까지 진도를 나가죠.
제 9장에서의 수보리의 질문은
소승불교의 아라한의 위치에서 질문이구요,
제 10장은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살의 관점으로 본 대답이 나옵니다.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깨달음의 단계를 얘기합니다.
청정함의 단계를 얘기하고, 깊이의 차이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기 10장에서의 대답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걸어오셨던 진정한 '보살의 길'을 보여줍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과거 연등불 회상에 있을 때,
법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회상에서
법에 대해 실로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보살에게 장엄한 불교의 땅이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장엄한
불교의 땅은 장엄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름하여 장엄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청정심이 생기며,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생긴다.
수보리여! 비유컨데 어떤 사람이 신체가 수미산 같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몸이 크지 않은가?
수보리가 말합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몸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자, 아주 쉬운 대화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깨달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전장의 소승의 관점에서는 성자가 되고,
그것을 다시 뛰어넘고, 다시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것을 얘기합니다만,
부처님은 10장에서 그런 것이 없다고 설하시는 것입니다.
연등불과 함께 계시던 곳에서도 밥에 대해
실로 얻은 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천국으로 가고 싶다면 아이처럼 되라' 구요.
오늘 아침 제 방에 아주 어린 유발상좌가 놀러 오셨는데요,
청주에서 온 아주 귀여운 남자 최윤상 이라고 한답니다.
키가 요만해요.
아래위로 모두 하얀 모시옷을 입고 왔는데,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에너지가 넘쳐 흐른답니다.
제 유발상좌인데요.
불가에서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법명은 법성이라고 하는데요.
방방 뛰어 다니다가 먹을 것을 주면 신나게 머구요.
초콜렛은 입에 잔뜩 묻히고 얼마나 신나해 하는지,
다시 일어나서 또 춤을 춘답니다.
순간순간 그냥 할 뿐입니다.
어떤 특별한 수행을 거쳐서
그렇게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도무문'
법성이 제 유발상좌가 된 지 1~2년 밖에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는데요.
얘기한테 벌써 뭘 가르치겠습니까.
초콜렛이나 주면 좋아하지요.
그래서 이제 뭔가 가르칠 때가 되어
위해한 길은 문이 따로 없다'는 것을 새겨주었습니다.
중국말로 '대도무문' 이라고 하지요?
그는 바로 크게 따라 말합니다. '대도무문'
제가 '대도무문'하면 그도 '대도무문'
대도무문 하고 소리지르고 다시 문을 박차고 나가서
'대도무문'하고 또 외칩니다.
그는 이미 대도무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 10장의 내용은 이렇게 쉽고 간단합니다.
보살의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가 보살이 되면
뭔가 특별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불교의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거나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랬던 그런 기적들 처럼요. 그렇죠?
단지 인도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식으로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보살은 기적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다.'
사람들은 기적 같은 것을 바라지만,
부처님은 기적을 바라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숭산스님의 법문 중에 질문 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스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깨달은 자는 기적을 부릴 수 있다면서요?
숭산스님은 '그래요?'
'네, 스님이 기적을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그래 보여주지,
내가 방금 전에 밥을 먹었거든.
그래서 힘이 나서 지금 법문을 한다.
'그게 어떻게 기적입니까?'
숭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매일 이렇게 사는데
이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 줄은 모르고 있군.
음식을 먹고 힘이 나서 많은 일을 하잖아. 이게 기적이야.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넌 누구냐?'
숭산스님이 큰 소리로 질문 하셨어요.
'헉, 잘 모르겠습니다.'
'기적같이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하는 구나' 흥미롭습니다.
부처님의 기적은 뭔가 특별한 것을 따로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청정심이 생기며,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마땅히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생긴다.
이 전장에서는 '다시 태어남이 없다'는 것을 말했는데요.
목적이 다시 환생하지 않은 것이었죠.
소승불교의 목적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것이죠.
태어나서 깨닫고 열반에 들어 다시 환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계속 다시 태어나서
모든 부처를 섬기는 그런 진정한 보살의 길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되신 겁니다.
비유컨데 어떤 사람의 신체가 수미산 같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몸이 크지 않은가?'
수보리가 말합니다. '아주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몸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몸짱이 큰 유행이죠? 몸짱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예요.
더 이상 몸짱이 아니죠.
부처님께선 이런 것은 대단한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떤 멋진 몸매나, 그런 복은 별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진정한 깨달음, 진정한 복은 공합니다.
이생, 후생, 무한한 삶 속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그 마음이 몸짱입니다. 마음 짱이죠.
이 전장에서의 목적은 불환생[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불교의 목적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 모두 없애 버리는 것
열정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화도 없애고
없애고, 없애고, 없애고, 없애고, 없애고!
그런데 이 10장은 훨씬 위대합니다.
이생, 후생, 그 다음 생, 무한히 계속되는 삶 속에서
모든 중생을 위해 살겠다는 이 다짐을 간직하는 것
큰 산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큰 산과 같은 몸입니다.
질문있으십니까? 없으세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이 전까지의 요점은 '진정한 공덕은
모든 중생게게 아무 기대하는 마음 없이 보시하라.
오직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었죠.
소승불교의 다 끊어 버리는 명상의 단계에서.
절대로 가질 수 없은 보상이나 공덕을 바라지 않는,
무한으로 연속인 이 삶 속에서
큰 서원을 잃지 않은 삶으로 승화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서원을 간직하시고요.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음에 만나기 전까지 예습하시고요. 감사합니다.
제5편
금강경의 가르침이 위대한 이유가
여거 가지가 있겠지만요.
그 중 하나는 바로 파격적이라는데에 있습니다.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들은
이와 같이 모두 파격적이였습니다.
기분을 좋게 해 주거나, 항상 잘 하고
있다고만 하는 그런 영적 가르침은
사실 큰 효과가 없습니다만 진정으로
대단한 영적 가르침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다소 겁을 주기도 하며, 위험한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당시에도
총총 위험 천만한 일이 종종 있었고요.
위대한 성인들 중 한 분이신 예수님도
결국은 일찍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위대한 가르침은 굉장히
파격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고 보시는 것이 매우
중요하리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금강경은 결코 부드러운 어조로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불교의 대단함을 말하는
그런 경전이 아닙니다.
금강경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생각,
또는 종교에 대한 관념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위대하고 파격적인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모든 환상[망상]등을 꿰뚫어 보게 해줍니다.
범부로서의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듣고
생각하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모두 진짜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바로 이 순간에 진정으로 보고, 진정으로 듣고,
진정으로 냄새 맡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아무튼 평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실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굉장히 파격적인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는 저번 주까지 모든 종교적인 관습이나[불교도 마찬가지고요]
형상들이 진정한 진리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금강경을 통해 선명하게 공부했는데요.
오늘은 계속해서 11장부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11장의 내용은 아주 대단합니다.
왜냐하면 더욱 대단한 무위의 복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렷을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가기도 하구요,
어른이 되어 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는데요.
선행을 하거나, 보시를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는 것이 올바른 종교 생활이라고 배웁니다.
이런 신행들은 이슬람이나 기독교, 그리고 당연히
불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가치를 두는 ....
불교의 육바라밀[6가지의 수행요소]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수행입니다.
물건 등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스스로를
나누어 주는 것이 진짜 수행[보시]이지요.
'내가 했다'는 그런 생각, '나의 지위나 위치'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 아니고, 나누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짜 보시입니다.
금강경 자체가 파격적이지만 11장은 더욱 파격적 입니다.
보시[선행]은 모두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가장 위대한 보시는 재물등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11장을 함께 보실까요?
"수보리여! 만약 갠지스 강의 모든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갠지스 강이 있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갠지스 강만 해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모래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지금 진실하게 말하지만,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칠보로써 보시 한다면, 그 얻는 복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니깐 누군가 어마어마한 양의 보시[기부금]을 낸다면,
만약 빌 게이츠가 그의 모든 재산을 보시한다면,
아니면 이건희 삼성회장이 모든 것을 보시한다면,
그 얻는 복이 많겠습니까? 네 부처님"
이게 앞 구절의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보시를 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나]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 중 사구게라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씬 클 것이라.'단지
이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 책을
가르치거나 종교를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한 사람을 모든 허상의 관념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이 행으로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행복한 자나,
화내는 자, 옳은 사람, 그른 사람, 어제 일이나
내일 일등이 모두 본질은 공 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공덕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보시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가르침이죠,
하지만 모든 종교를 통틀어 굉장히 놀랄 만큼
혁명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자 그렇게 제 12장으로 넘어가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나 잘 들어보세요.
저의 집안은 카톨릭 이였죠.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도 기독교도 이시겠지만요.
아~ 물론 불자들도 많지만요, 역사상 가장 큰 싸움들은
항상 성자들이 머물렀던 성스러운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살해 당하셨던 곳이나요, 모하메드가 천국으로
간 메카란 곳이나요. [아 죄송합니다. 메카는 그 분이
가르침을 편 곳이지요.]예수님이 고통 받으셨던,
또는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펼피셨던,
항상 이런 성스러운 곳에서 큰 싸움들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런 성스러운 장소를 지키는 것이
그들이 믿는 종교나 스승이나 또는 신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장에서는 매우 흥미롭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경과 믿음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런 성스러운 곳이나 성스러운 물건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렷을적 카톨릭으로 자랄 때도 어떤 작은 십자가나,
성스러운 잔이나, 성스러운 특별한 장소에서 기도하고
절하라고 배웠는데요,
물론 불교에서도 이런 것이 있지만요.
봉정암이나 통도사 같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 같은
성스럽게 여겨지는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들은 이런 성스러운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 장소를 지켜라! 이 물건을 숭배하라!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갈 때에도, 10분 뒤면 부처님이 처음
설법을 하신 곳에 도착한다는 멘트가 나오면
가슴이 떨리지 않겠습니까?
이번 여름에도 한국의 6000 기독 청년들이
예수살렘에 간다고 했는데, 정부에서
위험하다고 말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발자국을 남기셨던 곳에
꼭 가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요.
자 들어 보십시요,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이런 마음에 일타를 날리십니다.
'죽은 부처들을 존중하지 마라. 죽은 성인들을
존중하지 말고, 죽은 종교를 존중하지 말라.
그 장소, 그 물건, 그 성자들이 결코
특별히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의 늪에 빠지지 말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착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른 가르침을 존중하다.'
다음으로 수보리여! 이 경전 내지는 사구게를
아무렇게나 말하더라도,
일체 세간의 천, 인, 아수라가 모두 그것을
부처의 탑묘처럼 공양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어떤 사람이 전부를 수지 독송 할 수 있는 경우
이겠는가?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최상의 제일 드문
법을 성취한 사람이다.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면 부처가 있고
또 존경 받는 제자들이 있다.'
재미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특별한 장소나 물건, 책, 그리고
상징 등을 아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숭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종교인들끼리 죽이고 까지 합니다.
요즘도 매일 종교 사건을 듣고 있습니다.
성지를 지키거나, 자기들만의 그것을
지켜려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다니요.
부처님은 그래서 이런 종교는 올바른
종교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의 사라진 영성을 우상 숭배하니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공의 가르침, 진정한 '보시' 의 이 가르침은
어떠한 형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진정한 가르침은 진짜 깨달음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처님만 '가지고 계셨던' 그러나 여러분은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요.
진심으로 이런 마음을 얻으려면 말이죠.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구나, 이게 바로 내 마음이구나'
라고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기필코 우리가 무언가를 숭배 하려면
이런 진정한 가르침을 숭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특별한 형상이나 구절이나, 물건을
숭배하지 말라는, 죽은 부처님들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부처님을 숭배 말라'
굉장히 흥미로운 가르침 입니다.
위대한 도가 철학자 장자가 한 말씀입니다.
'말이나 글을 공부하는 것은, 많은 성인들이
한 말이나 글을 수집해서 공부하는 것은,
'똥을 수집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한 시간 반 동안 어떤 스님을
기다리다가 우연찮게 티비를 켜서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한 종교 채널에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옵스]. 어떤 책을 들고 다니면서,
당신은 반드시 *구절*구절을 외우고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티비 자막에도 따로 하이라이트에서 나오고
말이죠, 이런 것은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런 글을 사용해서 우리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런 가르침이 진정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 글들만을 수집하거나 모아서 전달만
하는 것은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잘하는 것은 진정한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가르키는 뜻, 그 뜻을 찾는 것이
진정한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이나 글이나, 책 같은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이런 것 등을 잘 활용해서
우리의 본성을 찾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이 내용이 매우 흥미롭기에 다시 한 번 ?어 보도록 하죠.
'다음으로 수보리여! 이 경전 내지는
사구게를 아무렇게나 말하더라도
일체 세간으 천, 인, 아수라가 모두 그것을
부처의 탑묘처럼 공양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어제 있었던 일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것을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 입니다. 그렇게 존경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 마음이 깨어나는 바로 이곳,
따로 특별한 깨달음이라 부르지 않는 우리
모두가 이미 갖추고 있는
이 '마음'을 숭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마음을 봉정암이나, 통도사나, 예루살렘이나
메카처럼 여겨야 합니다.
모든 망상에서 깨어나는
바로 이 마음이 바로 성지입니다.
이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성지인 것입니다.
이미 종교를 초월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종교의 허상을 허물어
뜨리기에 금강경이 파격적입니다.
벽과 분리를 만드는 이런 모든것을 말이죠.
불교,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진정한 종교가 아닙니다.
깨어있는 바로 이 마음, 이것이 진짜 종교입니다.
아주 파격적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 가르침을 전하실 때,
'이 경전 내지는 사구계를 수지 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든지 간에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해서 일상의 삶으로 승화시키면,
그 어떠한 성지 보다 더 존경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속 설하십니다.
'일체 세간의 천[신], 인[인간], 아수라등의
복 받은 모든 이가 모두 그것을
부처의 탑묘처럼 공양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 뜻은 어떠한 높은 의식을 가진 존재라도
이 가르침에 절을 올려야 함을 말합니다.
부처님들과 보살님들 조차 본질을 꿰뚫는
이 '마음'에 고개 숙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종교로부터도 완전히 초월한 가르침입니다.
대신 살아있는 법을 행하는 바로 이 마음의 성스러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불상보다도 더 성스럽고, 사찰보다도
더 성스럽고, 팔만 대장경보다 더 성스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매우 흥미로운 한 말씀을 더 하십니다.
금강경을 설하시기 이 전인 소승법을 가르치실 때에는,
불법승 중, 승인 스님들이 가장 존경 받았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불상도 없었고요, 이렇게 인쇄된
경전도 2~300년 동안 존재 하지 않았잖아요.
그러나 그 중 하나의 매우 중요한 보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승가 스님들이었습니다.
오직 스님들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삼보 중 유일하게 존경 받은 것은
스님들 뿐이었습니다. 몇 몇 종파들은
이것은 아직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지만요.
여기서 나오는 대승법의 가르침은 이젠 불법승 중
바로 이 '법'을 더 높게 받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스님들 뿐이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가르침은 당시 매우 혁신적인 것이였습니다.
이 가르침을 설하시기 전에는 삼보 중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승가였는데,
이젠 승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법'입니다.
이 법이 있는 곳이라면 부처가 있고 또 존경
받는 제자들이 있다는 바로 이 법입니다.
이 법은 부처와도 동등합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이 법을 깨달으시면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굉징히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을 설하시기 전까지는 무수히 많은 생을 수행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바로 이 순간, 이것을
깨닫는 다면 이미 부처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전까지는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굉장히 혁명적인 가르침이 시작된 것이죠.
제 13품 '법대로 받아 지녀야 한다.'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우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그 이름으로써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그 까닭은 내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놀랍습니다.]
단지 이름일 뿐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 하신 바가 없으십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티끌의 수가 많다고 생각하느냐?'
'엄청나게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여래는 모든 티끌이 티끌이 아니라,
그 이름이 티끌이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을 세계라고
말하였느니라,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
외모로서 여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32상만 보고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32상은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에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몸과 목숨을 바쳐
보시했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이것을 남을 위해 설명해 준 복덕 만큼은 못하니라.'
자, 아주 간단합니다. 수보리는 이 가르침에 이름을 부치고 싶어합니다.
공의 가르침에 무슨 이름을 부쳐야 하느냐 말입니다.
모양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알아볼 수 있냐고 말이죠.
어떤 종교냐, 네 가르침인가 내 가르침인가, 불교인가?
이런 이름으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간단한 내용이죠.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진리]는 이름이 없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가 묻자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지으셨지만,
단지 이름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불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신자라는 것도 없고, 나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여래의 가르침이란 것도 따로 없습니다.
번레 공한 마음을 여실히 보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모양[상]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복이 공 하다는것, 공하지만, 그래도 가장 수승한 복은 한 사람을
망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임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을 여실히 알면 되지,
그것에 따로 이름을 부치거나 포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보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우리들은 어떻게 받들고 지녀야 하옵니까?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니... 반야바라밀...
불교에는 육바라밀이라는 법이 있는데요.
그 중 여서 번째가 지혜입니다.
보시, 정진, 인욕, 그리고 마지막이 지혜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라밀다[완성]은
바로 지혜라고 하셨습니다. 지혜...지혜입니다.
지혜가 가장 중유합니다.
육바라밀 중 가장 높은 것이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6가지 파라미타 모두 중요합니다.
다만, 상호 작용하는 면이 다른 것이지요.
다섯 손가락이 얼굴을 씻는 것과 비슷 합니다.
각 손가가락 모두 일을 하듯 말이죠.
어떤 손가락도 다른 손가락 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선 '지혜'는 통찰력이 있어
다른 다섯 가지 바라밀을 모두 자유자제로 활용할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가 모든 것을 관장합니다. 지혜가 종교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보시도 대단하고, 정진도 좋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보시[빨간 십자가등을 뿌리고 다니는 일]는
올바른 보시가 아니지요.
정진[노력]도,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잖아요.
지혜 없는 정진[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지혜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장 높은 지혜라는 것도 사실은
'가장 높은'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가장 높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이름도 부치지 말고 포장도 하지말고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주 쉽죠?
'불교의 것' 이라고도 하지말고, 다 버리고 '오직 하라!'입니다.
오직 할 뿐이 그 어떤 이름을 갖다 부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행입니다.
이름을 부치고 이해하려고 하고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이 가르침과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대신, 어떻게 우리가 '할 것!' 인가. 순간 순간
우리의 망상이 모두 공함을 알고 오직 할 뿐인, 순간 순간 인과법칙에 따라
[인과 또한 자성이 없지만요]불교에서는 성불[깨달음]이 있지만,
그건 '어떤 것'이 아니듯,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닌,
'우리 모든 중생이 이미 완벽하게 가지고 있는 것' 이라고 이름을 지으려면
지어야겠습니다. 깨닫고 실천함으로 말입니다.
이 금강경은 지적이 아닌, 바로 이 깨달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지적으로 불교를 이해 하려는 이런 마음을 부처님께서 깨우쳐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름을 지어달라 해서 이름을 마지 못해 지으시지만,
그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가르침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으셨어요.
부처님도 당신의 가르침을 '불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여기까지가 13장의 첫 내용이었습니다.
자 다음 구절을 읽겠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부처가, 내가]법이란 것을 말한 바가 있는가?
굉장히 특이한 가르침이지요?
'내가 뭐 가르칠 것을 가지고 있냐?
공포하거나 따로 선언할 만한 것이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아니요, 여래께서는 아무것도 따로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정말 굉장합니다. 정말 대단히 파격적입니다.
당신의 제자 조차도 아무것도 가르칠 만한 것도 없다고 말을 하네요.
그리고 부처님은 '옳다!'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바로 전에요.
몸이 많이 쇠약해 지셔셨는데, 제자 중 한 분인 마하가섭은
'아직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제발 영원히 계속 가르침을 펼쳐 주세요.
가시지 마시고 계속 법륜을 굴러 주세요.
스승님, 더 가르쳐 주세요. 더요~
부처님께선 이미 제자들이 당신에게 집착해 있는 것을 보셨어요.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더 가르쳐 주세요~. 45년이나 가르치시고 이젠 쇠약해 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당시 인도는 무지하게 더웠답니다. 여기도 물론 여름에 매우 덥지만요.
인도에 비하면 겨울이죠. 하하
여러분 굉장히 더우시다고요? 당시 인도에는 선풍기 조차 없었답니다.
더워요~ ~
부처님은 '난 45년이나 가르쳤는데, 25년 동안은 궁전에 있었고,
10년은 수행했고, '너무 오래 있었어 이젠 가야지~ 열반해야지'라고 하자.
제자들은 '이렇게 무더운 곳에서 영원히 가르쳐 주세요~!
'지금 웃고 계시지만 여러분 중 몇몇 분도 똑같아요.
제가 일주일만 법문 중단해도, 왜 현각스님이 법문을 안하시나요.
왜요~ 불교가 잘 이해가 안가요~ 바로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더 이상 불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부처님께선 아주 유명한 명언을 남기십니다.
제자들이 영원히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자, 난 45년 동안 설법했지만,
단 한마디 한 적이 없다. 난 너희들에게 단 한 가지도 준 적이 없다.
난 너희들에게 45년 동안 정말 많이 많이 많이 많은 말을 했지만,
한 마디도 법을 설한 바가 없느니라.
너희들이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라 내가 새로이 만든 법이 없느니라.
멍청이들아.'
굉장하죠? 파격 그 자체입니다. 부처님 당신의 위치까지도 깍아
내려 버리셨습니다.
난 가르쳤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이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수보리여,
그러자 수보리는, '네 여래께선 따로 가르치실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45년 동안이나 교화하셨지만 단 한가지도 특별한 것을
전한 적이 없다는 말씀이죠.
단지 내 마음이 본래 공 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 말은 중요하지 않다.'
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선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티끌이 많지 않은가? '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모든 티끌은 여래가 티끌이 아니라 말하니,
그것의 이름이 단지 티끌이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 말하나...'
부처니께선 지금 가장 작은 분자부터 온 우주의 삼천대천세계까지의 범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바로 이 가장 작은 분자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가장 작은 입자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큰 우주를 말이죠.
다 공 합니다. 완전히 텅 비었어요. 우리와 이 모든 것들의 관계 또한
모두 공 합니다. 모든 인식 작용은 본래 공한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소립자와 우주를 인식하는 것, 여기 바로 앞에 있는 요 작은 입자와
저기 멀리 있는 은하계를 인식하는 것이 공 하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여러분 모두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잠이 들면 한 시간이 한 순간 같잖아요.
오~ 뭐가 현실이죠? 깨어 있을 땐가요. 잠이 들었을 땐가요?
깨어있을 때 생각을 하면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집니다.
전 어제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데요. 3사간 반이 걸렸어요.
의자에 앉아 있기에는 꽤 긴 시간이죠. 긴 시간이에요.
밤 12시 출발, 3시간 반이 걸려 한국에 도착했어요.
오늘 아침 화계사에 도착해서 잠시 쉬었는데요, 비행기 안에 있던 시간과
똑같이 잤는데, 아주 짧았습니다.
눈을 감자 마자 떠 지더라구요. 이런 모든 인식 작용이
사실은 공 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만약 한 발로 서서 3시간 반 동안 서 계셔 보세요.
그럼 아마 굉장히 길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만약 이틀 동안 자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3시간 반 동안 잠을 자 보세요. 한 순간입니다.
자 그러니깐 가장 작은 원자와 가장 큰 은하계,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과
가장 먼 곳 이라는 이런 모든 인식은 본래 공한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해서 홍콩에 전화를 걸어, '잘 도착했습니다.' 했지만
그렇게 먼 거리지만 전화에선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생각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서 그렇습니다. 모두 이름 뿐입니다.
가까운 것도 이름이고, 멀다는 것도 이름 뿐입니다.
큰 것, 작은 것도 이름입니다.
분자도 우주도 모두 이름입니다.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서울 도심이 아주 가깝다고 생각하시죠?
미국에 계신 저의 부모님들은 아주 멀~다고 생각하십니다.
연기의 법칙, 생각이 모든 것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시간과 공간, 가까운, 그리고 먼 이런 모든 것은 생각에 의존해서 나타납니다.
보관스님 옆에 있는 책을 보관스님은 여기라고 하시겠지만,
저도 저기라고 하겠죠.
보관스님의 마음에는 여기지만, 저 한테는 저~기 잖아요.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들은 모두 본래 공합니다.
이걸 이해하시면, 자유를 얻으신 겁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는가?
저번 주에도 얘기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생겼고,
아 재미있는 얘기 해 드릴께요. 제 눈을 보고 노스님들께서
'와~ 눈이 파랗다.'고 하시면서 부처의 32상 중에 하나가 파란 눈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오셔서 '아~~'
멈춰서 계속 바로보시기도 합니다. 이 모습[상]이 뭔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한 스님께서는 '서양사람들은 눈이 파래서 부처와 더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DNA가 더 비스한 거겠죠.
금강경은 여기서 이런 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또는 깨달은 성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생겼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렇죠?
여기 계시는 여러분의 크리스탄 신도님도 무슨 뜻인 줄 아실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데요. 예수님이 아주 허름한 모습 차림으로
나타나시자, 사람들이 당신은 예수가 아니라면서 믿지 않자나요.
예수님도 이런 방편으로 중생들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아닙니다. 세존! 32상으로써 여래를 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은 상이 아린라 그것의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니깐 모든 상은 공한 것입니다.
이제 아주 흥미롭운 마지막 구절입니다.
굉장히 흥미로눈 가르침입니다.
당시의 초기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금욕이였습니다.
삭발을 하고 비구 스님이 되거나 비구니 스님이 되는 것이였습니다.
여기 이 마지막 구절에서는 이런 것이 그렇게 중용하지 않다고 합니다.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더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의
사구게라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준다면, 이 복이 훨씬 더 많다.
수 없이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덜도, 갠지스 강의 모래 수 만큼 많은 삶에서
계속 스님이 되는 것이 물론 대단한 공덕 일지라도
더 대단한 공덕은 당신으 소승불교 시절에서의
가장 큰 공덕은 스님이 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지금부처 대승의 가르침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모두 큰 공덕이지만! 온 우주의 본성을 보는 통찰력,
이러한 지혜를 얻으면 머리 털이 있거나 없어도 더 큰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설법입니다. 혁명적입니다.
파격적입니다. 아시겠죠. 이런 뜻입니다.
전의 보시는 보석 같은 것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지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보시입니다.
머리털이 있거나 없는 것 상관없이, 지혜를 위해 사는 삶,
이것이 가장 큰 공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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