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전에도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이 법문들은 학문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금강경을 뉴스와 같이 지식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받아드릴 수도 있겠지만 대신 이
가르침이 진정으로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곳으로 직접 가시길 바랍니다.
직접 가시길 바래요.
이 경전은 여러분보다 더욱 위대한 것도 아니고,
더욱 신성하거나 깊은 것도 아닌, 오직 여러분의 실체를
가리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본 모습 말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표시판과 같은 것이죠,
부산까지 가는 길은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부산 대신 목포로 정할까요? 목포를 가시려면 일단
고속도로 타야겠죠? 고속도로를 제대로 타시려면
경부 고속도로라는 싸인을 따라가야겠고요.
대전을 지나면 호남선으로 향하는 싸인을 만나실 거구요,
맞나요? 제가 직접 운전해서 목포로 간 적이 없어서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표시판을 보시면 이쪽으로 가라는 싸인이 나오죠?
그 싸인을 보시면 그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호남선을 따라 계속 가시다 보면 광주가 나옵니다.
광주를 지나면 순천과 목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또 표시판이 있습니다.
그 표시판을 보시고 그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 표시판은 표시판일 뿐이지 여러분보다
더 중요하거나 뛰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것 자체로는 별로 대단할 게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성분이라든지, 색깔이나 모양, 또는 글자의 모양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금강경도 이와 똑같습니다.
단지 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본체를 가리키는 싸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경전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이 경전의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이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건 금강경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본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 자체를 위해 설하신 것도 아니고,
경전을 공부하라고 설하신 것도 아닙니다.
대신 이 법문은 우리에게 단지 이것이 가리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경전 자체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는 말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 자체로는 흥미로운
것이나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이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어! 여기에 숭산큰스님의 사진이 어디에 있을까요?
큭! 많은 분이 고개를 돌리고 저기를 보셨네요.
제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니깐, 여러분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두르르르 저곳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이 손가락을 잘 활용해서 고개를 돌려 사진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 자체에 집착합니다.
이것도 단지 가리키는 물건일 뿐인데 말입니다.
숭산 큰스님의 사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것뿐 입니다. 그러니깐, 가리키는 물건에
매달리지 마세요. 이 물건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 언제 만들어 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부하고, 다른 경전과 비교해서 어떤지,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것과 비교해서 어떤지, 이 물건이 이렇고
저런 것이라는 분석적인 이해 대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사진을 찾는, 바로 그렇게 고개를 돌리듯이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죠? 이 가리키는 물건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것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몇 주 동안 금강경을 공부했지만, 아직도 몇 몇 분들이
금강경의 언어에 집착을 하실까봐 염려가 되어 다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이 언어들의 아이디어나 개념 등에 말입니다.
성경이나 반야심경 등 모든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오직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으면,
이 경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이미 여러분 모두 가지고 있는
이것을 말이지요. 이 경전도 필요하고, 저도 필요하며,
부처도 필요하고, 불교도 필요하고, 그러니깐 이 경전을 단지
가리키는 도구로 여기시고, 오직 행으로 실천하십시오!
진실 된 모든 가르침의 역할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점을 마음 속게 간직하시고 이 경전을 공부하셨으면
하는 바랩입니다. 금강경에 너무 반하지도 마세요.
학문적으로 연구하시려고 하지도 마시고요.
만약 그러시면 더 이상 목포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포가 아닌 상하이로 가는 것이죠.
네, 상하이도 문제는 없지만요, 결국은 시간낭비만 하시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훨씬 비용이 많이 들겠지요. 수영도 하실 줄 알아야겠죠.
자, 그럼 계속해서 금강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 함께 보겠습니다.
지난주에 23장과 24장까지 진도를 나갔는데요.
24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수미산만큼
칠보를 가득 쌓아서 보시를 하더라도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준다면, 이 자의 복덕은 앞의 복덕 보다 백배의 또는
백천만억배 내지는 산술적으로는 비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을 것이다."
금강경은 공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공, 공, 공, 공.....
모든 것이 공 하다고 말입니다.
자아도 공하고, 동기도 공하고, 계획도 공하고, 보시도 공하고,
깨달음도 공하고, 중생도 공하고, 부처도 공하고, 모든 것이
본래 순수하게 공 합니다. 본체가 순수하게 공 하단 말씀입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이미 아무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일체가 모두 아무 걸림이 없이 하나라는 말입니다.
다른 많은 종교에서는 저 위에 뭔가가 있고,
저 아래에 뭔가가 있다고 말하지요.
저 위로 올라가야지, 저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된다고요.
저건 신성한 것이고, 이건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요,
선과 악, 이런 생각에서 나오질 못합니다.
이런 종교는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레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덧에 말이죠.
대신 이 가르침은 모든 현상의 상호관계를 하나로 보는
모든 생명의 본성을 말이지요.
나와 나, 개와 파리, 이 소리와 물의 본성, 우주의 본성이나 신성,
불성 등이 이 모든 것의 본성은 본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깐, 그 어떤 것도 사실은 아무것도 장애가 될 것이
없다는 말씀이죠, 오직 생각이 땅! 하고 올라올 때 장애가 생깁니다.
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와 이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성내는 마음,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등 이렇게 둘을 만들면,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물의 사상', 둘이 아니라는 이 가르침은 모든 것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가게 합니다.
부처님은 여기서.... 저번 주에도 제가 예를 들었지만,
자기의 전 재산을 모두 기부하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처럼 말이죠.
이번 주에도 여기 계시는 분 들 중 한 분은 많은 보시를
해 주시겠지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누가 되실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굉장한 복을 짓는 일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이 복을
지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복과 더불어 더욱 높은 경지의
복지음은 금강경의 단지 사구게만을 수지 독송하여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도 아니고요,
이 사구게를 가리키는 진리를 통찰하라는 것이죠.
이 정수를 이해한다면, 금강경이 말하는 것을 어느 정도만이라도
깨닫는다면, 그건 정말 수승한 복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경전은 바로 당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달으시면, '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높은 복은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자 그럼 25장으로 넘어가 볼까요?
'자아에 대한 환상'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아에 대한 환상,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누구도 말하지 말게 하라.
그런 생각을 일페 말라.
수보리여!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게 아, 인, 중생, 수자가 있느니라.
범부는 자아가 있다고 믿지만, 여래는 자아는 무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자아는 무아와 다르지 않다. 수보리여! 여래는
범부를 범부가 아니라 말하니, 단지 그 이름을 범부라 한다."
자, 그럼 내용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모든 사람들은 자아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라는 것이 진짜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의 '나', 미국의 '나', 일본의 '나', 중국의 '나', 요즘
중국의 '나'가 조금 세지고 있지요?
이슬람의 '나', 불교인의 '나', 크리스챤으로의 '나',
여자로의 '나', 남자로의 '나', 보두적인 '나', 진보적인 '나'
모든 사람들은 자아를 자신의 생각의 정체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아~ 난 저 사람 싫어, 매 번 볼 때마다 나한테
못되게 구니깐 만나기 싫단 말이야~'
이런 '나'가 진짜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고통은 바로 이것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무지는 바로 이 나, 자아라는 것이
실제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환상이지요, 꿈과 똑같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이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지요.
꿈속에서의 대화와 반응, 또는 공포 등이 실제 같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진짜로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꿈꾸는 세상은, 머리 속에서만
경험 하는 그 세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환상입니다.
때로는 아주 무서운 꿈을 꾸기도 하지요?
누군가 나를 납치해서 총으로 위협을 하고 말이죠.
그런데 꿈속에서 '아~ 이거 꿈이구나!
진짜가 아니구나!'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알아차렸을 때,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경험 있으시죠?
이런 경험 안 하신 분 계세요?
보행스님 말구요, 또 계세요?
네! 아주 흥미롭습니다.
아주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중에,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깨는 순간 그 꿈의 힘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여러분을 조정하지 못합니다. 아셨죠?
'자아'라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나' 나만의 개성도
이와 똑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면, 당신에게는 이것이
실제가 됩니다. 어느 정도는요.
진짜 같이 느껴진다고 표현을 하는 게 더 좋겠네요.
그런데 바로 한 순간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통찰하는 순간, 더 이상 여러분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래가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그 누구도 말하지 말게 하라.
그런 생각을 일체 말라.
중생의 수는 무한하다. 그러니 우리는
그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
중생무변서원도!
그러나! '내'가 이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왜 일까요? 어떤 종류의 종교에서는 '내가 이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 내가 구원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이들은 종교에 대해서 가장 미친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싸이코, 사이비예요.
'내가 너를 구원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너'라는 것도 본래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한다.'는 생각은 꿈을 꾸고 있는
자기 자신의 꿈속에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자를 구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한 지붕 밑, 한 침대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과 같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꿈속에서, '아' 난
너를 구해줘야 해, 그래 난 널 구해줄거야,
그 꿈속에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해줬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현실에서도 하는 것입니다.
'난 너를 지옥에서 건져내야 해' 라고요,
모두 착각입니다.
몇 주일 전에도 이 예화를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짧게 말씀드릴게요.
하루는 경허스님이 당신의 제자인 영상스님과
함께 산보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 일화야 말로 이 가르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니 잘 들어보세요.
산보를 하던 중 개구리를 잡아서 파는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데요.
개구리들은 나무 탁자에 묶여 있었습니다.
너무나 무더운 한 여름이었는데요. 영성스님은
경허스님께 잠시 앉아서 쉬라고 하시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허스님은 나무 밑에 앉으시고,
영성스님은 일어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시며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이 개구리를 모두 합쳐서 얼마나?'
보통 여행자들은 개구리를 사 집에 가서 기름에 튀겨
맥주 한 잔의 안주거리로 삼았겠죠?
그런데 영성스님은 돈을 짝~ 꺼내셔서 얼마면 되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모르겠어요. 그 옛날에는 뭐 한 10원이면
살 수 있었을까요? '다 합쳐서 2달러에요.' 아 그래?
자 여기 5달러 있다. 나머지는 팁이다.
'개구리를 이리 다오'
영성스님은 개구리를 받자마자 한 마리씩
개울가로 다시 놓아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개구리들은 너무 행복해서 헤엄을 치며 자유를 찾았겠죠.
영성스님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그러자 영성스님은 매우 뿌듯해지셨겠죠.
그리고 스승님에게로 다시 다가갑니다.
경허스님은 부채질을 하시며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영성스님은 경허스님께 말했습니다.
'큰스님 이제 갑시다.'
그러자 경허스님께서는 '어 그래?
넌 뭐했니? 라고 물었습니다.
'아 저는 고통 받을 개구리들을 모두 사서 그들의
목숨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경허스님은 '아 그래,
잘했다. 그런데 넌 죽으면 지옥에 가겠구나!
놀란 영성스님은 '스승님! 왜요? 지금 제가 개구리 10마리를
살려주었는데요.'
'그래, 네가 열 마리를 구원했지, 그러니
너는 이제 지옥에 가겠구나.'
그러자 영성스님은 당황스러워 하셨습니다.
넌 '나'라고 했지? 넌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했구나,
'내'가 그 개구리를 구제했다고 했지 않느냐.
그러니깐 넌 지옥에 떨어질 거야.'
아주 흥미로운 가르침이죠?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따로 정해진 지옥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작은 자아가 일어나면,
작은 지옥을 경험하게 되고요,
중간 사이즈의 '자아'가 일어나면, 중간 사이즈의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큰 자아를 일으키면 엄청난
지옥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은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방금 들려드린 일화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영성스님은 이 가르침을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내가 당신을 구원한다'는 말은 황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것이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온 우주가 다 부처라는 것입니다.
이 보든 것이 다 부처이지요.
부처님이 깊은 선정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말이죠.
깨달음을 얻었을 때 무릎을 탁! 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아~ 이 모든 중생이 이미 이것을 가지고 있구나!
모든 중생은 이미 이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모두가 아직 모를 뿐이지요.
그러니까 이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라면 어떻게
부처가 부처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너를 구원한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수행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냥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이 날 구원해주실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겠지요. 수행도 하지 않고요.
불교는 '내가 스스로 깨닫는다'라고 가르칩니다.
본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면 이미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알고 계신 다른 종교에서는
'오직 절대자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어떤 자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이 맹목적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믿기만 하면 구원될 것이라고요.
받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고요.
이런 믿음은 모두 착각입니다.
'절대자가 나를 구원한다' 는 말은 실수 입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자아라는 것이 본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미 구원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으셨을 때,
'아~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구나,
단지 이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시겠죠?
종종 우리는 이렇게도 애기합니다.
자, 여기 백만불짜리 수표가 있습니다.
백만불이 있으면 아주 부자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등에다 이 수표를
테이프로 살짝 붙었어요. 아니면, 당신이 바지를 입기 전에
주머니에다가 수표를 몰래 집어넣었어요. 이 사실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 바지를 입었습니다. 물론 당신은 주머니 속에
백만불짜리 수표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하고 있겠죠?
그런데 당신은 '아 다음 달 집세 낼 때가 다가오는군...
다음 달 자동차 보험금이 얼마더라... 아~ 세금도 많이 내야하고
돈을 더 벌어야 할 텐데... 이 정도의 수입 가지고는 너무
힘들겠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머니 안에 백만불이 있는 줄도 모르고요!
가지고 있는데 모를 뿐이죠~
그러니까 바로 이 생각! '아~ 난 백만불이 필요해.'
백만불이 아니라 단 몇 천원이라도요.
그런데 누군가 와서 똑똑똑, 이 멍청아, 네 주머니에
손을 좀 넣어봐라 합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어보면,
당신이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직 망상이 그걸 가리고 있을 뿐이죠.
부처님께서는 우리는 이미 완전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성은 이미 완전히 순수하고 걸림이 없다고요.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가난에 걱정하고, 자동차 보험금에 걱정하고,
집세를 걱정하고, 내 돈, 내 돈, 내 투자금, 주식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 내내 백만불을 이미 가지고 있는
줄을 모르고 말이죠. 그러니깐 이런 생각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이 점을 애기해 주었을 때, 그가 당신을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당신이 그 돈을 가지고 있다고 귀띔해준 것뿐이죠.
정말 분명하고 시원시원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백만불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미 백만장자입니다. 어느 날 숭산 큰 스님과 함께
선문답을 할 때가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제가 부 번째인가
세 번째 맞는 긴 동안기간 이었는데요.
굉장히 열심히 수행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절도 정말 많이 하고 대 발심으로 열심히 정진했었습니다.
그러자 날이 지날수록 명상은 점점 깊어져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선원사에서 있었는데요, 큰 스님이 선원사 선방에
모두에게 선문답을 해주시러 찾아오셨답니다.
딱 하루 동안만 오셨는데요, 한 사람씩 들어갔다 나오고,
제 차례가 되었답니다. 당시 저는 굉장히 환희심으로
행복했었답니다. 처음 안거가 시작되었을 때는 고통도 많고,
혼란과 함께 여러 가지 마음이 일어났었어요.
화내는 마음,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돌고 돌고 돌고,
계속 돌았지요 그래도 절하고 또 절하고 좌선하고
절하고 좌선하고 염불하고 절하고 염불하고 좌선하고
그러던 중 한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 졌습니다.
좌선 중에 말이죠. 모든 것이 열렸습니다.
정말 놀라웠지요.
그 순간부터는 엄청난 환희심이 돌려왔습니다.
아무런 망상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 뒤로 약 2주가 지나고 숭산스님이 오셨던 겁니다.
공안 중에 질문을 주고받으며 선문답을 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큰 스님께 '스님,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스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고 있었답니다. 너무나 감사해서 말이죠.
큰 스님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큰 스님께 갑자기 로카펠라 같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스님께서는 큰 소리로
하하하!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너는 이미 그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었던거야.
네가 몰랐던거지 자, 그러니깐 이제부터의 네 수행은
무한한 돈을 잘 사용 하는 것이다.'
굉장히 감사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수행을 통해 이런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큰 스님은 '아니 아니, 너는 이미 그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었던거야! 몰랐을 뿐이란다.
이제부터 네 직업은 이 돈을 잘 사용하는 것이지.
이게 앞으로 너의 평생 직업이다.
아주 흥미로운 가르침이죠?
부처님께서 이미 바로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중생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다'고요.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모든 중생을 제도 해야한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라."
나는 너를 신에게 인도하겠다.
이런 말은 큰 실수입니다.
올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일체 내지 말아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중생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래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에겐 상이 있는 것이다."
만약 구원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분명 구원 시키는
자도 있어야겠죠? '나'요!
구원 받아야 할 '당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구원 시키는 것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건 벌써 둘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여래로부터 구원 받아야 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에겐 아, 인, 중생, 수자가 있다.
수보리여! 범부는 자아가 내가 있다고 믿지만...."
평범한 사람은 말이죠.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 말이죠.
세상에 이런 범부들은 자아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단
말입니다. 고칠 수 있는 '자기'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더 낳은 더 훌륭한 '자기'라는 것이 있다고요.
사람들은 변화 시킬 수 있는 '자아, 자신,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건 실수입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고칠 수 없단 말입니다.
이 공간을 변화 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 공간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나쁜 냄새가 지금 공간에 퍼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공간은 단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요. 매일 아침
큰스님께서 여기 4층 선방에 올라오셔서
짧은 법문을 들려주시곤 했는데요.
제가 하루는 이런 질문을 했었답니다.
'스님' 미국에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고치러 심리학자를 만나는데요.
왜 한국 사람들은 이런 일이 거의 없나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이때는 8년 전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해, 한국에서는 애들이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면 부모님들이 '그런 생각하지마! 그런 생각하지마!
라고 소리지르거든 그냥 그런 생각 하지 말라니깐!
그러니깐 그런 사람이 잘 안 생기는 거야.
요즘은 좀 시대가 바뀌었지만요.
그러나, 이런 옛날 한국 스타일의 교육 가르침은 참 좋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애들이 이상한 생각을 하면,
부모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마!
그런 생각하면 못써! 하니깐요.
네, 물론 어떤 일들은 그렇게 생각을 쉽게 멈출 수가 없겠죠.
아동학대나 혹은 누군가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상황에는 말이죠. 물론, 이 이야기가 완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죠?
그러니깐 이런 생각은 다 허상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어떻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구글닷컴에 들어가시면 찾을 수 있는
미국 책이 한 권 있는데요. 한 번 찾아보세요.
제목이 '우리는 100년 동안 심리학을 연구했지만
여전히 대책이 없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누군가 저에게 정신요법의사 모임에
요청한 적이 있는데요, 저는 거절했었답니다.
'스님, 선불교의 가르침이 저희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꼭 한 번 법문해 주세요.
스님도 마음을 고치는 것에 대해 가르치시잖아요.
우리도 똑같은 걸요. 아닙니다.
선에서는 마음을 고친다고 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결코 마음을 본질적으로 고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면요, 고칠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하면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치료할 필요가 있겠죠.
그런데 마음은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깐 '자아'라는 상은 환상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불교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음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과연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라고 물어보지요.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무지 찾을 수가 없거든요.
마음도 없고, 자아도 없습니다. 벌써 고쳤습니다.
말하기는 참 쉽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실 실행으로 옮길
수 있기에는 좀 어렵지요. 이것이 바로 이 장의
뜻입니다. 아셨죠?
"수보리여! 범부는 자아, [내가 있다]고 믿지만
여래는 자아는 무아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말하는 '자아'에 대한 관념은 사실 틀린 것입니다.
독립된 자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이란 말씀입니다.
자아는 곧 자아가 아니고 허상일 뿐입니다.
그러니깐, 자신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만들지 마십시오, 나를 고치려고 하지도 마시고요,
대신, '이 자아를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물으세요. 이 자아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가?
나는 무엇인가? 라고 진지하게 묻는 순간'자아'는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 손바닥의 그림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자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이 페이지 위에
제 손바닥의 그림자가 생겼는데요.
'어~ 여기 두 손가락의 그림자를 부치고 싶다'
라고 생각하면 미친 생각이겠지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이런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지요?
'자아'를 고치려는 것은 '그림자'를 고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 그림자를 만들었습니까?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 하는 순간,
모든 생각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쭉!
생각 이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 이미 자아를 치료했습니다.
'자아 이전의'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죠?
이장의 핵심이 이 점입니다.
'무'無에 관해서 참 길고 많은 설명이었습니다.
제 10편
자, 다음 26장입니다.
"법신은 상이 없다."
"법신은 상이 없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보리여!
만약 32상으로써 여래를 본다면,
그럼 역사의 어떠한 황제도 모두
여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보리가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 세존이시요!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32상으로써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형체로 나를 보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자로서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고 훌륭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개념이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에게는 오직 예수의 상이 진리이죠.
오직, 오직, 오직, 오직.... 예수님이죠.
뭐 그 중 몇몇은 예수님 옆에 약간의 가르침을
더 무쳐서 예수님을 표현하지만요.
이 분의 형체[겉모습]을 말입니다.
'저 모습을 숭배하지 않으면, [평화롭게 머리가 옆으로
흘러내리고]' 사람들은 이런 형상의 예수님을 찾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예수님 말이죠.
그리고 항상 백인이죠.
영화배우 같이 잘 생긴....
수염도 아주 손질이 잘 되어 있고요.
이렇게 덥수룩한 수염 말고요.
아주 예쁘게 파마 된 머리결과 함께요.
그게 바로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예수의 이미지입니다.
어떤 불자님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뒤에 있는 불상만이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게 부처야! 만약 여러분이, 너 진짜 부처님 만나볼래?
하면서 주장자로 탕! 치시면, 많은 사람들은,
로그겠는데~' 할 겁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엔 이미 저 뒤의
모습이 기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엔 이미
저 뒤의 모습이 기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미국에 알려진 불교는 중국 불교인데요.
그리고 일본 불교가 들어갔고요.
1800년대 말이죠.
중국 사람들은 중국불상이 있고요.
일본 사람들은 일본 불상이 따로 있겠죠.
그리고 1970년도에 숭산 큰스님께서 미국으로
들어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스님은 한국 스타일의 금 불상을 가지고 들어가셨답니다.
반짝 반짝 빛나는 금으로 만든 불상요.
미국 사람들은 '아~ 너무 빛나요.
별로 맘에 안 들어요. 라고 했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나무와 같이 자연적이고, 오래된 골동품
스타일을 좋아하거든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 말이죠.
어느 날, 독일의 베를린에 새로운 선원이 개원을 하게 되어
숭산스님께서 방문을 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법당 안에 들어갔을 때, 불상이 아직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불상이 없다고 하자, 스님께선 '어~ 그래
그럼 내가 한국에 가서 불상을 보내줄께. 걱정하지 마라.
하셨답니다. 그러자 그 독일인들은, '아, 스님 우리는
금불상이 맘에 안 들어요.' 라고 하면서, 자기네들이
지접 고목을 깎아서 '자연스러운' 모양의 불상을 만들고
있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 독일인들은
'역시 자연스러운 불상이 최고야~'
하면서 행복해 했었는데요,
이 금불상은 너무 반짝여서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고 말이죠.
자, 이렇게 모두는 부처에 대한 각자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절에 들어갔을 때는 불상에 절을 하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그건 단지 부처의 상일뿐인데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처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가 길게 늘어져 있고요. 곱슬머리여야 하고요.
어떤 모양의 손, 다리 등 말입니다.
아참 거기에다 성기까지 어떤 모양으로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요. 이것도 여래의 32상 중 하나거든요.
이런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옛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죠.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부처가 아니라고 말이죠.
어떤 한국 분들도 제게 '와~ 성불하시려고 스님이 되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부처가 될 수가 없는데 어쩌죠?
팔에 털이 너무 많자나요~ 하시더군요. 허허~~
부처님은 털도 별로 없고 깨끗했다고 말이죠.
그러자 저는 '대신 저는 파란 눈을 가졌는데요.'
당신은 파란 눈 없자나요.
저는 팔에 있는 털을 면도하면 되지만,
청년은 어떻게 하실래요? 하고 농담을 건냇 답니다.
그러니깐, 이런 생각은 모두 실수입니다.
다 실수예요. 부처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 처음 인도에서의 초기불교때는
불상이 없었지 않습니까?
아무런 모양이 없었지요.
불상도 없고 탱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막히기 때문에,
믿음이 항상 흔들리기 때문에, 그래서 기대고 의지할 만한
불상 등의 영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중의 하나가 '사리'이지요.
제 스승님의 스승이신 고봉스님의 이야기인데요.
고봉스님께서 열반하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은 큰 스님께,
'스님! 스님이 열반하시고 사리가 나오면 어떻게 할까요?'
라고 질문을 했었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답니다.]
흥미롭습니다.
위대한 큰 스님들의 영결식[장례식] 후에는 사리라는
것이 종종 나오곤 하는데요. 많은 불자들은 이 사리를
수행의 결과물이나 수행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 스님이 돌아가셨는데, 사리가 몇 과나 나올까?
저 스님은 얼마나 나올까? 라고 말이죠.
사리라는 것은 화장을 하고 나면 나오는 크리스탈
같은 결정체인데요.
이러한 모양에 집착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 이 큰 스님은 사리가 많이 나오긴 했는데,
저 스님은 더 많이 나왔으니깐, 훨씬 수행도 많이
하시고 위대하신 분인가 보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때로는 아주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에이~ 이 스님은 사리가 거의 안 나왔으니깐, 별로 대단할 게 없네.
그런데 저 스님은 사리가 무지하게 많이 나왔으니깐,
반짝 반짝 빛나고, 파랗고, 순수하고, 완벽한 사리 말이야~'
라고 말이죠. 그래서 큰 스팀들은 사리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한국의 많은 사찰 중에 이 전통을 깊이 간직하는 곳이 있는데요.
그곳은 덕숭산 수덕사라고 한답니다.
그 곳에는 그 어떤 큰 스님의 사리라도 보존하지 않는답니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물체[사리]로 위대하신 부처님과 선사님들의
공덕을 평가하거나 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덕숭산 수덕사 문중에서는 이러한 사리에
집착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사리이니깐요.
여러분의 눈이나 머리카락 같은 것보다 더 값진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진리는 어떤 특정한 형상[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어떤 품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요.
특정한 품질, 카테고리, 스타일, 종교, 개념이나
표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자기들의 표현만이 옳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다른 표현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두개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두 마음이요.
그러면 대립[마찰]이 생깁니다.
불교는 불이[두개가 아닌]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장의 타이틀이 '법신은 상이 없다'입니다.
여러분! '법신은 상이 없다'의 진짜 의미를 알고 싶으십니까?
사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내용들은 모두 완벽한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입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의 가르침에 '현각스님'의 스타일로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불교 적인 표현, 미국식의 표현, 혹은 스님의 입장으로서,
진리에 대해서 설명했기 때문에 실수일 수 있습니다.
만약 법신[진리의 몸]이 어떤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않는다면,
모양이나 색, 향기, 카테고리 또는 특정한 종교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이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럼 진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경험해 보고 싶으신 분은 손들어 보세요.
하나, 둘~ 오! 다행히 두 명이나 진정한 진리를
경험하고 싶어 하시네요.
관행스님과 오늘 처음 찾아주신 이 신도님 말고도
여러분 모두 진리를 경험해 보고 싶으시죠?
쑥스러워서 손을 들지 않고 머뭇거리신 거죠?
진리의 진정한 몸뚱이를 모두 경험해 보고 싶으시죠?
저 뒤에 있는 불상이나 제 입에서 나오는 이 소리만이
진정한 법신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나 여기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진짜 법신일까요?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법신인지 아시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신 바로 그것이 진리입니다.
오케이~?
금강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오묘합니다.
그러나 금강경 책 안에 쓰여 있는 이 글자들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글자들이 가리키고 있는 바로 그것!
진리는 특정한 상이 없고 형체나 카테고리도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바로 이 경험이 진짜 진리이고,
지금 제 목소리를 듣는 그것이 진정한 진리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Good!
27장입니다.
"끝남도 멸함도 없다."
'모든 사물들의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라는 가르침입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이란, 소승을 넘어선 다음 단계의 가르침이란
말씀입니다. 소승에서는, 우리 중생들이 욕망과 화와 무지,
습관과 업, 번뇌와 망상 등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안 좋은 업들은 모두 다 소멸 시켜야 한다고 말이죠.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시죠.
여기에 많은 크리스챤 분들이 오셔서 아시겠지만요.
모든 안 좋은 것들은 잘라내야 하고, 없애야 하고,
제거해야하며, 부셔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선 이제 여기 금강경에서 사실 이런 가르침은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멸시켜야 하거나 잘라 내버려야 하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묘한 요점입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완벽한 상을 갖춤으로써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래는 그러한 상을 갖춤으로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 아니니라.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법이 끊어졌는지
멸했느니 하는 마음도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법이 끊어졌느니 멸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 가르침의 내용은 모든 법을 멸해야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깨뜨려 버립니다. 욕망의 법이나 화나는 법,
네! 이 법이란 것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모든 원리와 현상, 소리도 달마[법]이고,
규칙도 달마이며, 생각도 달마입니다.
이 모든 달마[법], 화와 욕망 등의 이 모든 법을 잘라내어야
한다고 가르치면 사실 이건 올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멸해야할 그 어떠한 법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을 소멸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 다른 법을
낳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도 실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완벽한 상을 갖춤으로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최상의 깨달음]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마라."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부처님께서 완벽한 신체로써 불성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시면요.
옛날 사람들도 겉모습에 많이 집착했었는데요.
부처가 되려면 이렇게 생겨야 하고,
이런 특성이 있어야 하고 등등등....
부처님은 여기서 이런 마음을 없애려고 하시는 겁니다.
소승에서는 스님이 되어야하고, 규율을 꼭 지켜야하며,
이렇게 걷고 이렇게 말하고[작게요~],
눈을 아래로 향하고 요렇게 걸어야하죠~.
제가 처음 한국에 왔었을 때 참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아직도 가끔씩 생기는 일이지만요.
많은 스님들께서 저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성불 못해요!'
'뭘 잘못했는데요?'
'저기 봐 스님은 말씀하실 때 손을 너무 많이 사용하자나요.'
아시다시피, 저는 어렸을 적부터 이런 문화에서 자랐자나요.
죄송합니다만 이런 습관이 결코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노노노 말씀하실 때 손을 너무 많이 사용해요. 스님은!'
어떤 절에 계신 스님 한 분께서 이런 조언을
해주셨답니다. '왜 그렇게 손을 많이 사용하는 거예요?
이렇게 행동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전 이렇게 마시는데요.
이것도 불성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서 당시 소승불교 시절에는 이런 겉모습을
중시했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정한 몸가짐이나 모양 등 말이죠.
재밌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혜능 육조대사 아시지요?
혜능스님이 5조 대사께 가서 법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자,
5조 대사님은 '넌 남쪽 야만 지방에서 와서 안 돼
야만인이라서 성불할 수가 없다네.'했었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그런 일 있자나요.
'전라도 사람은 안 돼, 경상도 사람은 안 돼'
그렇죠? 미국에서도 그런 마음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우리가 깨달음이 어떠한 상에 의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처는 귀가 길고,
양반 출신이라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인도에서는 많은 천민 출신들이 불교인이 된다고 합니다.
불교는 깨달음이 출신에 상관없이 평등하다고
가르치니깐 말입니다.
인도에서는 브라만 종교만이 신에게 가까워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버려진 '이방인'들이 평등한 불교의 가르침에
많은 관심을 갖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완벽한 상을 갖춤으로서
아뇩다라삼약삼보리[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래는 그러한 상을 갖춤으로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 아니니라.'
그런 모양 같은 것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수보리여!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법이[화나 욕망 같은 달마등 모든 법]끊어졌느니
말했느니 하는 마음도 내서는 안 된다."
멸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화나 욕망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법[화나 욕망등]들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늘어나지도 좋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합니다.
나타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모든 현상의 실체는 이와같습니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의 마음을 낸 사람은
법이 끊어졌는지 멸했느니 하는 마음도 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법이 끊어졌느니 멸했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렇듯, 우리 불교 수행은 이런 모든
달마[자아, 화, 욕망, 불순함, 무지 등]를
소멸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이런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화'가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란 말씀입니다.
소멸시킨다고 하면 '있다'고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없어요' 아주 오묘한 가르침입니다.
여기 27장의 가르침 중에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어떠한 달마[법]에도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가르침은 되고, 저 가르침은 안 된다.'라는
이런 가르침에도 말이죠.
한국 영화중에 정말 대단한 영화가 하나 있는데요.
'만다라'라는 영화 아시나요?
누가 그 영화를 만들었죠?
어쨌든 .... 굉장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아주 성스러운 스님 한 분이 나오는데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조용하고 아주 순수한 스님입니다.
그에 반해서 그 스님의 도반 중에 굉장히 거칠고
항상 술을 드시는, 수염도 덥수룩하고 말이죠.
담배도 피우는...
한 마디로 아무 거침없는 막가는 스님 스타일이죠.
그런데 영화 속 한 장면에, '거친'스님이 절 안에서 술을
잡수시고 있는데, 그 '순수한'스님은 '거친'스님의
그런 행동에 굉장히 불쾌해 하지요.
밖에서는 '벙~ 벙~'하는 범종 소리가 들리고 있고요.
벙~ 벙~ 예불 시간을 알리는 범종 소리 말이죠.
그래서 이 '순수'스님은 '땡초'스님에게, 스님~ 예불할 시간입니다.
이제 가셔야죠, 라고 재촉합니다.
'땡초'스님은 그래도 계속 술을 부으시지만,
그 눈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지요.
'염불 하러 가셔야죠. 스님~
염불이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수행이란 뜻이지요?
부처님을 찾는 수행 말이죠.
'우리는 가서 부처님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땡초 스님의 마음은 전혀 취하지 않고
오히려 더 말짱했던 것입니다.
'너는 법당에 가서 부처를 실컷 찾아라.
난 여기 술 잔 바닥에서 부처를 찾을 테니. 캭~ '
아주 흥미로운 가르침이죠.
그 어떤 것도 나은 것이나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모든 달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순수'스님은 순수한 법이 있고요.
'땡초'스님은 땡초 스님대로의 법이 있는 것이지요.
단, 이 땡초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런 술 먹는 것으로도 수행을 삼은 것이지,
술이 좋아서 중독되거나 깨달은 척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멸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이 뜻은 어떠한 특정한 법이 성불하게 하고,
또는 성불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오직 '한 가지'의 법이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또는 그 어떠한 법도 그 자체로 성불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 다는 뜻이지요. 중요한 내용입니다.
한 가지 법, 한 가지 가르침, 한 가지 종교만이
유일한 성불의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대신 이 세상에는 사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성불하는 길이 있답니다.
관세음보살은 오직 '들음'으로서 성불하셨듯이요.
제가 언젠가 말레이시아에 가서 법문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요.
전에도 한 번 이 얘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공유하고 싶습니다.
말레이시아에 있는 중국 절에서 기거를 했는데요.
그 절은 큰 이슬람 시장 속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답니다.
아주 시끄러운 곳이었지요.
더군다나 그 절은 완전히 닭튀김 냄새로 가득 차 있었지요.
왜냐면 그 지역이 시장이라서 닭 등의 고기류를 엄청나게
절 안에서 향냄새 대신 닭튀김 냄새만 나니 알 만 하시겠죠?
꿈속에서도 냄새가 났으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아름다운 절이었답니다.
매일 다섯 번 씩 기도를 하고요. 정말 대단하죠.
어느 날 한 중국 부인이 제게 와서
'스님' 제게 한 이슬람 친구가 있는데요.
와서 불교 스님을 한 번 뵙고 싶다는데 어쩌죠?
라고 물었습니다. '네~ 당연하죠.'
저기~ 108배 염주 가지고 계신 분 계세요?
제게 잠시만 좀 빌려 주실 수 있겠어요?
그 중국 여자 분은 자기의 한 이슬람 남자 친구가 진리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남자 분은 고등 교육을 받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변호사인데, 불교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 중 특히 선불교의 가르침에서 동감 가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다른 말레이시아 친구들에게
할 수 없으니 답답했다고요. 이슬람들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
찬성하면 안 되니 말이죠. 그래서 불교 스님과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법문에는 다른 친구들이 볼까봐 올 수 없었답니다.
친구들이 이슬람을 배신하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제게 당연히 찾아 오셔서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답니다. 그 다음날 아침 10시쯤에 그 분이
오셨는데요. 멋진 정장 차림에 아주 인텔리하게 생기셨었어요.
그런데 그 분 손목에 이렇게 생긴 염주가 걸려있더라고요.
물론 저도 하나 차고 있었지만요.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중에 그 분은 이렇게 계속 염주를
돌리더군요. 혹시 영화에서나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라크나 중동에서의 까페 같은 곳에는 중년의 남자들이
파이프를 물고 앉아서 염주를 돌리는 광경이 종종 불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 문화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이슬람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이런 염주를 가지고 다닌답니다.
차에다 걸어놓기도 하고요.
우리 선원에도 이스라엘에서 오신 분들이 종종 계신데요,
108배 할 때 이 염주를 사용하자나요?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문제가 생긴 다고 하더라고요.
이슬람 신도들도 이런 염주를 사용하니깐요.
다른 이스라엘 친구들이 그 염주를 보면,
'헤이~ 왜 이슬람 염주를 차고 다니는 거야?' 라고 말이죠.
불교에서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고 그런 거죠.
아무튼, 그 남자도 이런 염주를 갖고 와서 대화중에
계속 돌리고 있었답니다. 이런 저런 얘기 중에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 스님도 이런 것을 가지고 있네요.
뭐 하는데 사용하시는 건가요?'
'아 염불할 때 사용하는 염주랍니다.
옴 마니 반메훔, 옴 마니 반메훔....
아니면 관세음보살, 아니면 신묘장구대다라니,
하면서 말이죠.'
'와 정말로, 우리 이슬람에서 그렇게 하는데!'
'그래요? 이슬람에서는 어떻게 하는데요?'
'이슬람에는 알라신에 약 100가지의 다른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며 염주를 돌리지요.
암마나나... 하악~~ 알라라~~~' 잘 모르겠네요.
이슬람을 놀리는 게 절대 아닙니다.
장난치는 것이 아니고요.
정말 이런 소리를 '알라'하면서 했다니깐요.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것이에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지요.
어떤 사람은 두 개의 염주를 한다고 하더군요.
한 번에 두 개로 말이죠.
그래서 저는, '와~ 대단하네요~'라고 하자,
그 분은, 네~ 그렇게 집중해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완전히 알라가 된답니다.
알라를 만나는 것이지요.'
우리 불교 수행과 똑같이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 그렇군요~ 우리도 그와 같은 똑같은 수행을 한답니다.'
'네 스님~ 그런데 스님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에게 도전하려는 그런 마음이 아닌,
순수하게 모르는 말투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불교에서는 진리를 어떤 말로 표현을 합니까?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부처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그런 진리의 경험을 어떻게 표현 하냐고요?
그것을 '부처'라고 말하면 이미 실수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누구나에게 그 경험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탕!
그러자 그는...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의 울음은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태껏 기다리던 가르침이었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자기의 수행 경험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의 수행과 우리의 이 수행이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붐!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깐, 오직 한 가지의 법만이 이것! 탕! 을
깨닫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사실, 여러분 모두가 이 순간 이것을 경험하고,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남자 여자, 한국인 미국인, 캐나다인,
프랑스인, 크리스챤과 불교인, 그리고 카톨릭 신자 여러분
모두가 바로 이 순간! 탕! 하는 순간 모두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핫! 아니면, [손가락] 아니면, [침묵],
이 선풍기 소리와 새 소리가 들리는 바로 이 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은 하나가 됩니다.
모두 같은 경험을 합니다.
아시겠죠?
어떤 특정한 법만이 [다른 법은 안 되구요]
이것을 경험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27장의 가르침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장의 의미를 알고 싶으세요?
탕! 이것이 전부입니다.
'공덕을 바라는 집착 28장 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느 보살이 갠지스 강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하고, 또 한 보살이 있어 일체의 법이 무아라는
것을 알아 인내를 얻어 도를 성취했다면, 이 보살의 공덕은
잎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클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보살은 공덕에 연연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룁니다.
세존이시여! 왜 보살이 공덕에 연연하지 않는 다니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 뜻은 공덕이라는 것은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저번에 어떤 사람을 위해 무슨 일을 하자 그 사람은,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요? 콜록!
그러나 저 소리는 흥미롭네요~
진정한 공덕은 바로 지금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전번 감사하다고 해도, 아니면 한 번도
감사하다고 하지 않아도, 그거 아세요?
당신은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계산을 합니다. 얼마큼 베풀고 얼마나
받았는지,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요.
보이시죠? 그러나! 받는 복덕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면 바로 그것이 가장
높은 복덕인 것입니다.
지금 말고 또 어디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말고 당신의 존재를 어디서 느낄 수 있겠나구요?
지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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