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법문

종범스님의 법문

통융 2023. 6. 10. 16:19

道를 어떻게 구하느냐 그것을 허망 한데서
집착하는 고통 어리석은 고통, 거기서 벗어 나는 것이 道이다.
그러면 火宅 불타는 집이 무어냐 또 뒤에서
따라오는 코끼리는 우물 속에 매달려 있는 것 무엇인가
마지막에 독사에 물릴 지경에 이르는 게 무엇인가
이게 전부가 깨닫지 못한 고통이다.

이것을 사견(邪見)이라 한다.
火宅 도 邪見에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집착(執着)도 邪見에 위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코끼리도 邪見코끼리요 그 넓은 들판도 사견광야(邪見廣野)요
나무뿌리도 사견(邪見)뿌리요 죽음도 사견(邪見)
나무뿌리 사견(邪見)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것도 미혹했다 한다. 전부 허물이 미혹한데
있는 것 미혹 한데서 벗어나면 된다. 그것이 깨달음 이다.

종종 보면 수행을 어떤 형식에 두고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수행은 형식이 아니다. 깨달음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역별로 수행방법이 다르다.
왜냐하면 본질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식에 매달리는 수행을 비유 한 것이
“각주구검(刻舟求劍) 수주대토(守株待)라
본질은 어디에게 가고 형식에만 쫓아서 하는 어리석음 이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과학, 철학, 종교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부 아닌 게 아니다.
그게 수행이다. 과학은 인류생활에 과학문명이
많이 이바지 한다. 과학이란, 사물에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기에 이 원리를 응용해서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응용 과학 이다.
그래서 과학을 할여면 “왜” 얼음이 어느냐,
“왜” 바람이 부느냐 원리 이것이 과학이다.
그래서 과학은 “왜냐” 이다.

철학은 목적과 본질을 찾는다.
죽는게 뭐냐, 권력은 뭐냐, 명예는
무엇을 하기위해서 하는 거냐 “뭐냐”가 철학이다.
이 목적을 자꾸 묻는다, 본질을 묻는다
그게 철학이다.

종교란 일반적인 종교는
“주세요”[예] 성공하게, 합격하게,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이것이 기본적인 종교다. “주세요” 빼놓고 종교가 없다.
그러나 수행은 이게 아니다.
수행은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아니다.
종교이상의 종교, 철학이상의 철학이요
과학이상의 과학이 수행 이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이상의 종교 라는 것,
주세요가 있다. 불교도 축원 할 때도 참선 할 때 이게
불교가 종교가 아닌 게 아니다.
이런 종교부분에 있어 거기에 머물지 있지 않고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은 무엇인가, 수행 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찾는 것이다.
아주 쉬운 중에 쉬운 게 수행이다.
깨닫는 것, 무엇을 깨닫는 건가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거 자기가 자기를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
이렇게 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어렵다.
왜 자기가 자기를 자꾸 외면해서 그렇다.
그래서 수행을 道라 이른다.

마음을 찾는 마음 이라고 하고, 성불 즉 부처가
된다라고 이야기 하고, 본성을 본다, 견성한다
그러나 전부 같은 이야기이다.
도, 마음, 성품, 부처가 하나 이게 전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이다.

자기집에서 자기집을 잃어 버렸는데,
자기집에 자기집을 찾는 게 수행이다.
외양간에서 소를 잃어 버렸는데
외양간에서 소를 찾는 게 수행이다.
깜박 잠이 들어 꿈을 꾸니
소를 잃어 버리면 꿈에서 깨어나면 소는 그대로 있고
내가 나를 깜박 잃어 버리면 깨어나면. 이게 도를 닦는다고 한다.

어떤 도인스님에게 물었다.
“여하 시 도냐 어떤 것이 도 입니까”
그러니까 스님이 하늘을 쳐다보시고
땅을 쳐다보셨다 왜 하늘과 땅만 쳐다 보십니까, 하니
“운재청천(雲在靑天) 하고 수재병(水在甁)이다.
구름은 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것이 오도(悟道)다.
도는 자기인데 자기를 알았다 이게 깨달음이다.

이런 깨달음을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궁자가 도가 해서 궁자가 경학’
궁자가 자기집에 이르러서 집을 보고 놀래다.
어떤 사람이 나이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가, 다른 지방에 살기를 50년만에
자기집에 이르렀으나 거지생활과 너무 환경이 다르니
겁이 나서 도망간다.

집주인은 금방 자기아들인줄 다시 데려와서 머물게
하는데 억지로 머무는 궁자는 자기집으로 생각을 않아
3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 자기집 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게 수행 입니다.
금방 아들인줄 안 주인은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보니까 금방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안다
중생은 무상한데 집착 해 가지고 윤회 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서 본래 자기를 깨닫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한다.

그래서 염불하고 경을 읽는 것
이것이 업장을 녹이는 것이지
실지로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궁자는 얻어먹는 습관을 버리고
점점 일하는 재미로 정을 붙친다.
그리고 집안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주인은 마지막으로
너는 나의 아들이 다라고 하고 아들은 깨닫는다.

깨닫고 나선 어떻게 하느냐, 과거에는 머슴살이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자기주인 노릇 한다. 그 차이다
그러니 금방 죽을 목숨인데 그 죽기 전에
기쁨을 찾고 하는 이런 것은 부질 없는 것
자기를 깨닫는 것이 정말 할 일 이게 구도(求道)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중생이다.
그런데 중생이 다 도를 닦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람으로 만 태어났을 때 도를 닦을 수 있다.
사람 눈 가졌을 때 도를 닦는데 눈을 쓰고,
사람 귀 가졌을 때 자기를 깨닫는데 귀를 쓰고,
말을 할 수 있는 입을 가졌을 때
자기를 깨닫는데 쓰면 그게 좋은 일이다.

자기를 깨달으려면 어떻게 깨달아야 하나
그냥 언어 대화 하면 되는 것
법문을 듣자마자 바로 깨달으면 되는데
자기를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러니까 참회도 하고 참선도 하는 것
이것은 하근기들이 하는 것
상근기는 언어대화로 바로 깨닫는다.
그래도 전생에부터 닦아서 도를 이야기하는
불교를 만난 것이다.

이게 궁자가 자기집에 왔으니까
또 다시 딴 곳으로 가가서 빌어먹는 생활을
하지말고 많이 들 경을 읽으시고 열심히
기도와 참회 하시면 반드시 금생에 깨닫는다.
그럼 깨달음 다음 어떻게 되느냐
주인노릇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인노릇 잘 할 수 있도록 점점 도를 닦는 것이다.

도인하고 깨닫지 못한 중생하고 같으냐,
다르냐 법문이 많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다르다 하면 도인이 아니다,
같다 해도 도인이 아닌 그러나 도인분상
에서 는 같다 해도, 아니다고 해도 도인이다 이것이 도다.

신불부인(신불負人)이면 면무참색(面無慙色)
마음으로 다른사람에게 죄 지은 것이 없으면 [명심보감에도 나옴]
면무참색(面無慙色)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없다
이것이 도인이다.
그런나 호리유차(毫釐有差) 하면 천양현격(天壤懸隔)
털끝만큼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이것은 도인의 가풍을 그대로 이야기 한거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찾는 다는 것이
절대로 어려운 게 아니며 결코 쉬운게 아니다.
그러니 그것을 믿고 깨닫고 사는 것하고
같이 비교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과학과 철학을 잘하고,
종교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못 깨닫고서는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닌 마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밤에 사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하라,
사람으로 태어 났을 때 “道”를 구하기 위해서
참회도 하고, 복도 짓고, 공부하고,
열심히 좋은 인연을 닦는 것
그게 정말로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 인생이 가야 할
수행 입니다.

- 종범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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