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깨달음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 깨달음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삶의 근본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에 대하여 학술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일상생활에서도 관심觀心이 굉장히 많습니다.
‘깨달음’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이것을 경전에서 찾으면 아누다라삼막삼보리阿耨多羅三膜三菩提 Anuttara-Samyak-Sambodhi가 그 말입니다. 그게 우리말로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하면 ‘깨친다’는 뜻인데, ‘한글을 깨친다’라든지 또 어릴 적 부모님, 선생님의 말씀을 ‘오늘에야 깨달았다’ 등 무얼 깨쳤다 할 때 그것은 ‘알았다’는 말인데 결국 깨달음이란 아는 것이죠 세조 때 경전을 번역을 할 때 깨달을 오悟자를 ‘알다’라고 번역을 했어요 아주 재미있는 번역이에요.
알다..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다른게 아니고.. 그럼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불교佛敎에서 깨달음은 ‘한 소식했다’라고도 하는데, 소식이라는 말은 움직이는 생활動靜의 실상實相을 소식이라 하는데 .. 한 소식했다는 이 말은 지금까지 모르던 세계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을 내가 해냈다는 말이에요.
이걸 피동적만 해석하는 게 아니고 모르던 세계에 대한 것을 내가 들었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깨달았다는 삭막한 용어고 조금 인격적으로 표현하면 ‘한 소식했다’. 재미있지요 지금까지 전혀 소식을 못 듣고 깜깜한 상태로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지금까지 모르던 세계에 대한 소식 듣는 일이 나에게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한 소식 한 거지요.
또 깨달음을 ‘지견이 났다’라고도 해요. 지견知見이라고 하면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 즉 지혜입니다.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으면 무엇이 되는가 큰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마하반야바라밀 Maha-prajna-paramita이 되면 알고 보는 문제가 달라져요. 보는 세계가 달라져요
부처님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고, 아라한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으며, 보살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고, 중생이 알고 보는 세계가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어떠한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판단하게 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지견知見이라고 그럽니다.
지금까지는 중생이 알고 보는 세계인 중생지견衆生知見에서 살다가 부처님이 알고 부처님이 보는 세계를 얻었다 보게 되면 이것을 ‘불지견佛知見이 났다’ 또는 ‘한 소식했다’ ‘깨쳤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지금까지 기억 속에 있는 거나 눈앞에 있는 거나 감각을 느끼는 거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느끼는가 전부가 형상形相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형상形相...우리 중생은 기억이나 감각, 보이는 것 등 형상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상相』이라고 말하는데<凡所有相>상..상相이란 모든 사물 즉 존재 양상을 이르는 거죠. 사물事物 속에 남자다 여자다 난다 生 죽는다滅 온다 간다 이게 전부가 상相이거든요 존재 양상이란 말이죠..
이런 존재하는 여려가지 양상들.. 움직이는 동작과 형상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해요 그런데 형상과 동작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고 흘러가는 거예요 이게.. 형상도 흘러가고 동작도 흘러가고 이걸 무상無常이라고 그래요. 덧없고 부질없다<諸行無常>
우리가 지금 까지 태어나서 본 것은 전부 항상恒常함이 없는.. 영원하지 않는 형상과 동작만을 느꼈는데.. 그러다가 실체實體의 본성本性을 보게 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상을 보다가 성품을 보았다 그럼 상相과 성性은 뭐냐, 지금까지는 얼음으로 조각된 상相만 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물性을 보게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얼음의 본성은 물이거든요.. 모든 고통苦痛은 상에 매이는 데서 생긴다 이런 거죠,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도 상相이고 무서워하는 대상도 상相이고 상相을 떠나서는 사랑도 공포도 있을 수가 없거든요.. 집착執着하는 것도 상相이고 혐오嫌惡하는 것도 상相이고..그런데 이거는 알고 보면 얼음조각 같은 것이지 본성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형상에만 매여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실상實相.. 형상에서 실상을 보았다 그래서 실상을 성性이다 이래요 견성을 했다. 그럼 나의 이 모습은 상相이고 나의 성性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물을 보되 본성本性을 보느냐.. 형상形相을 보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본성을 보게 되면 상에서 상을 여의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가지고 법화경 신해품에서는 취상범부取相凡夫라 상相에 집착하면 범부고, 금강경<離相寂滅分>에서는 이일체상離一切相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 하여 일체 상을 여의면 부처다 이랬어요.
상에 집착하니까 범부 중생이고 형상을 보되 모양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실상을 보고 형상의 집착을 여의어요 그래 일체상을 여읜다고 하거든요 일체상一切相을 여의면 즉명제불卽名諸佛이라 바로 부처라고 말한다 이렇게 돼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상에 집착하는 것은 상에 매이는 거고, 상을 여의는 것은 상相 속에서 상에 매이지 않는 걸 말하는데요 상에 매이면 고통이 오고 상에 매이지 않으면 고통이 없다. 모든 고통은 상에 매이는 대서 온다는 거죠. 죽음도 하나의 바람이고 물결인데 바람이 오고 가고 하는데 맡겨 두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삶에 매이니까 죽음이 두려운 것이고 매이지 않으면 그게 해탈이고 그게 자유인데 문제는 매이는 데서 애착과 공포가 생기고 그것을 고해苦海라 그런다. 어떻게 하면 매이지 않을 수가 있는가 형상形相과 동작을 따라다니면 매일 수밖에 없고, 그 근본 실상實相을 보아야 형상에 매이지 않는다.
형상으로 보터 자유로우니까 그걸 해탈解脫이라 그래요 형상相에서 해탈했다는 말이지 뭐 다른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이런 거예요 깨쳤다 알았다 지견이 났다 한 소식을 했다 견성을 했다 본성을 보았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볼 수 있을까?. 견성하는 의미는 그렇고.. 견성하는 방법.. 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그러거든요 개념, 의미 그 다음에 방법 실재 어떤 효용이 있는가 효용.. 이런 거.. 대학에서 그런 식으로 해요 그러니까 의미를 이야기했으니 그다음에 어떡하면 깨치는가?.
깨치는 방법이 이제 중요하죠.. 그런데 방법은 없는 거예요..뭐. 염불을 해야 되느냐?.. 참선을 해야 되느냐? 기도를 해야 되느냐? 경전을 보아야 되느냐 무얼 어째야 되는냐?.. 그것을 방법이 없습니다. 왜 방법이 없는가...
형상으로 깨닫는 게 아니고 지혜로 깨닫기 때문에.. 지혜는 형상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의 세계를 형상의 세계로 자꾸 생각하는 데서 이 방법이 빠르냐? 저 방법이 빠르냐? 또 빠르고 느린 것도 동작이거든요,
그런데 이 깨달음의 세계는 형상과 동작에 매이지 않는 거예요<諸相非相卽見如來>.. 그래서 일체상을 여의었다 반야심경에 제법이 공상이라 하지않습니까..<是諸法空相 不生不滅..>
그래서 여기서부터 이제 헷갈리는 거예요.. 우리가 보고 듣은 것은 형상과 동작밖에 없으니까..깨침의 세계도 형상과 동작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깨침의 세계는 형상과 동작에 장애를 받는 세계가 아니다.. 물이 얼음에 장애障碍를 받지 않듯이요.. 얼음이 얼거나 말거나 물하고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렇잖습니까..
이렇듯이 깨침의 세계는 어느 형상이나 어느 동작에 매이는 세계가 아니라 는 말이죠.. 지혜를 열면 깨닫는 것이고 지혜를 못 열면 못 깨닫는 것이지 어느 형상으로 해야 깨닫고 어느 형상으로 하면 못 깨닫는다 이거는 아니에요.
염불念佛을 해야 깨닫느냐? 참선參禪을 해야 좋으냐? 무슨 다른 공부를 해야 깨닫느냐.. 이거는 형상의 세계거든요. 그런 것은 없는 건데 하다 보면 빠른 거를 굉장히 좋아해요 빠른 건 동작인데 깨달음의 세계는 느리고 빠른 게 없거든요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을 게 아니냐? 있죠 물론~
뭐냐?. 형상에 매이는 습관을 덜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못 깨닫는 것은 형상에 매여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형상에 매이는 습관을 자꾸 덜어가는 것이 그것이 깨달음을 얻는 방법입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형상의 본성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본성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깨닫기 위해서는 형상에 매이는 습관을 점점 줄여가는 거.. 이것을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업業이란 형상에 매어서 사는 습관이 업業 Karma이에요. 그것이 장애障碍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업장소멸業障消滅이라는 것은 자나 깨나 형상과 동작에만 매여 있으니까 그 형상과 동작에 매여서 자유가 없고 두려움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니까 그게 고해苦海거든요 고통의 원인은 형상으로부터 왔다 이거예요.
그래서 형상에서 형상의 근본, 참다운 본성을 알고, 그 실상實相과 합쳐질 때 형상에 매어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형상에 매여끌려다니던 습관을 줄여가는 방법이 그게 깨닫는 방법입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복福을 닦는다 선善을 닦는다는게 바로 그런 거예요.
악惡이란 뭐냐.. 형상에 매여서 행동하는 것이 악이거든요, 선이라는 것은 형상으로부터 조금식 조금식 자유로워지는 것이 그것이 것이 선善이에요 요건 좋은 거니까 내가 갖고 요건 나쁜 거니까 네가 하고 .. 나는 나니까 오래 살고 너는 너니까 오래 안 살아도 되고..
이게 순전히 형상에 매이는 일이거든요 손해나는 거는 나쁘고 이익 나는 거는 좋고 이게 중생이 형상에 매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이거든요, 그런데 상이란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의 좋은 형상이 내일 나빠질 수가 있는 건데 그걸 모르지요..
오늘 이익이 내일 손해가 되는 게 있는데 그걸 모른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선善이란 손해와 이익에 상관없이 두 사람이 다 좋게 하는 행위가 선이거든요 두 사람이 다 좋게..<自利利他>혼자만 좋게 하는 건 악이고 둘이 다 좋게 하는 것이 선이예요 그런 길로 자꾸 가면 그게 깨닫는 길입니다.
그래서 형상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운 길로 가도록 하는 거다 아버지만 좋게 하는 건 악이고요 온 식구가 다 좋게 하면 그게 선이예요 요즘에 아버지만 좋게 하는 아버지가 많아서 문제가 많다 그러거든요.. 요즘에 여성 단체에서 고발하기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는데요 30% 여성이 남편 폭력으로 시달린다고 그래요
그런데 보고 안 된 것까지 합하면 50%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폭력이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거 같아요 그럼 왜 폭력을 쓰는가? 자기 말로는 온 집안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폭력 쓴다고 그래요 아버지 말로는..
온 집안에 너 잘 되라고 때리지 나 잘 되라고 때리는 게 아니다..그게 사실인가요?.. 왜 폭력을 쓰느냐.. 때리는 아버지 감정이 상相에 너무 많이 매여 있는 거예요 상에.. 그리고 자기중심이에요 온 집안의 행복이 아니라 자기 행복이다 이 말이지..
이러니까 고통을 주는 것이 전부 형상과 동작으로부터 생긴다.. 형상과 동작이라고 하는 것은 구하면 구할수록<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허망함을 느끼게 돼요..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형상과 동작이다..형상과 동작은 결국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사라진다.<諸行無常>
그래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래서 이걸 미리 아시고 아버지 노릇을 형상의 아버지가 된 게 아니라 그 진리의 아버지가 된 분이 석가모니釋迦牟尼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들이 있었는데요 왕위를 물려준 게 아니고 권력을 물려준 게 아니고.. 이게 전부 형상과 동작 아닙니까?
이걸 안 물려주고 깨달음을 물려준 거예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권력의 아버지가 아니고 재력의 아버지 아니고요 깨달음의 아버지다 이거죠.. 그럼 왜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식子息한테 다른 건 다 안 물려주고 깨달음을 물려주었을까?..
형상과 동작은 무상無常해서 마지막에는 고통이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권력도 고통이다 그러니까 자식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고통을 주는 거라.. 안주는 거예요 이 점이 특이한 한 점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아버지 노릇을 아주 특이하게 했다 경상도 말로 희한하게 했다 희한한 아버지예요.
그러니까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얼음조각을 자식에게 주면 녹아 버리니까 결국 고통을 주는 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다 금방 녹아 버리는 얼음조각과 같다 그게 형상의 종말인데 중생들은 끊임없이 얼음조각과 같은 형상만 따라다니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는 길은 형상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운 습관을 익혀가는 것이 깨닫는 길입니다. 거기서 참선을 하느냐, 염불을 하느냐, 불사佛事를 하느냐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떻게 하면은 형상으로부터 매이지 않은 그런 습관을 자꾸 들이느냐 이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이제 어떤 길로 가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상相에 집착하는 습관을 자꾸 줄여야 돼요 상에.. 상相에 집착執着하므로 말미암아 고통이 생기니까.. 그러려면 자꾸 복福을 지어야 돼요. 복이라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좋도록 하면 절대 복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좋고 남도 좋고 같이 좋도록 하는 이런 거, 내외가 같이 좋으면 그게 복福이고 온 집안이 같이 좋으면 복福이고 한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함께 좋으면 그게 복福이에요..또 마음에 평화를 갖도록 하면 그게 선정禪定이거든요,
또 지혜智慧.. 어떻게 하면은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인 훈련을 하느냐..이런 지혜를 닦도록 하고 그것이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布施를 한다..선정을 닦는다 지혜를 닦는다 바라밀행을 닦는다 이런 게 형상形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덕행功德行입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끊임없이 하는 거예요 구구久久하면 필유입처必有入處라 형상으로부터 매이는 행위가 점점 조복이 돼요 조복調伏.. 첫 번째 행동을 하고 두 번째는 조복을 하고 되고 마지막에는 보게 되는 거예요
조복調伏이 뭐냐 하면.. 몸에 대한 조복은 우선 음식飮食에 대한 조복이 일어나 돼요.. 음식.. 그 다음에 수면睡眠.. 잠자는 조복을 해야 돼요 이거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보통 도道닦는다라고 하는데 도닦는 기본이 먹는 거 자는 거예요 먹고 자는 게 엄청나게 중요한 겁니다 산다는 건 먹고 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를 형상에 매여서 먹느냐 알맞게 먹느냐.. 수행으로 먹느냐 세속적으로 먹느냐, 이 차이가 있거든요 음식은 형상에 매여서 먹으면 좋은 거라고 하며 막 먹는단 말이지요 그러곤 누가 뺏어 먹을까 봐 막 급하게 먹는단 말이지요 빨리 먹고 많이 먹고..
이게 형상에 매여서 먹는 식사방법이에요.. 빨리 먹고 많이 먹고.. 왜 빨리 먹겠습니까.. 누가 뺏을까 봐 그러잖아요 어릴 적에 보면 누가 뺏을까 봐 막 먹었거든요. 동물動物들을 보면요 평상시에는 사이좋게 지냈어도 먹을 때 건드리면 싫어해요 먹을 때 잘못 건드리면 물려요.
사람도 그런 성격이 있다고요.. 먹는데 건드리면 싫어하고 먹는데 자꾸 말 시키면 싫어하고 지금 안 먹고 다음에 먹어도 지장이 없는 데도 그런 거예요.. 빨리 먹는 거 많이 먹는 거 이거는 형상에 매여서 식사하는 방법이거든요.. 천천히 알맞게 먹는 거..이게 음식에 대한 조복調伏이지요.
빨리 먹을 필요가 없어요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으면 되지 천천히 알맞게 먹어야 되는데 많이 먹는다 이거지요..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유익한 게 아니라 소화消化를 어떻게 시키느냐가 중요한데 소화시키는 건 생각도 않고 많이 먹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문제인 거죠.. 소화가 되어야 몸에 이익利益하지 소화 안 되면 이익하지 않거든요.. 소화가 되려면 적게 먹고 천천히 먹으면 되거든요 급急하게 먹고 많이 먹으면 소화 못 시켜요.. 또 잠도 알맞게 자야 되는데요.. 알맞게..
몸이 피로할 때 자야 되는데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거예요.. 몸에 좋은 잠은 저녁에 자야 되는데요 요즘 전부 저녁에 일을 하고 낮에 자는 사람도 많고.. 이것도 문제입니다.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질서는 낮에 일하고 저녁에 자는 게 가장 몸에 좋은 건데..
야간작업을 많이 한다든지 밤새도록 뭐하고 낮에 잔다든지 이거는 좋은 방법이 아니거든요 저녁에 자고 낮에 일하고 알맞게 먹고 천천히 먹고 이러면 되는데 이게 안 되는 게 문제요 그래서 되도록 이면 저녁에 자고 낮에 일하고 먹는 것도 저녁에 먹지 말고 낮에 먹고..
그래서 12시간 먹고 12시간 쉬고.. 이게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절에서 보면 6시에 아침 먹지요 6시에 저녁 먹으면 이게 딱 12시간이에요 낮에는 물도 마셔도 되고 점심도 먹어도 되고요 시장하면 사이도 먹어도 되고요.. 저녁 6시 지나면 안 먹게 좋은 거예요,
그렇게 하면 비만 그런 거 없습니다 저녁에 먹는 데서 소화를 잘못시키고 비만이 오는 거예요. 사찰에서 하는 식사법이 별거 아니에요 큰절에서는 보통 아침 6에 아침 먹지요 11시 반쯤 점심 먹고 5시 반 6시에 저녁 먹고 그러고 안 먹으면 12시간 먹고 12시간 안 먹는 겁니다.
그러면 위장胃腸도 12시간 동안 푹 쉬고 아침 일어나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낮에는 활동을 하니까 많이 먹어도 모든 장腸의 기능이 활발해지고 더워져서 소화 잘 시키거든요 저녁에 먹는 게 이게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명심보감<正己篇>에도
피색여피수 피풍여피전 막끽공심다 소식중야반
避色如避讐 避風如避箭 莫喫空心茶 少食中夜飯
여색 피하기를 원수 피하듯이 하고, 바람 피하기를 화살 피하듯이 하고
빈 속에 차를 마시지 말고, 한 밤중에는 밥을 적게 먹어라. 그랬어요
중국 사람들도 이걸 알아요 인도에서도 다 안 거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야간작업한다고 저녁에 주로 먹고 저녁에 활동하니까 몸이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파랗게 젊은 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가 많다니까 이거 심각한 거예요 불임부부.. 생활이 잘못되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음식을 알맞게 먹고 잠을 알맞게 자고 이런 거죠 그다음에 말을 알맞게 하고 이게 구업口業아닙니까.. 언어에 대한 조복이 또 굉장히 힘든 거예요 보통 안 할 말을 해가지고 화를 못 면하는 거 많아요 언어를 조복하는 게 아주 중요해요.
언어에 대한 조복.. 조복調伏이란 언어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언어를 조절調節하는 거죠.. 할 말은 딱하고 안 할 말은 안 하고 행동을 조복하고 해야 할 행동은 하고 안 해야 할 행동은 안 하고.. 그다음에 생각에 대한 조복이 있어요 생각을 조복시켜라 의업아닙니까 의업意業..
그래서 구업口業 신업身業 의업意業 ..말을 조복하고<口業> 행동을 조복하고<身業> 생각을 조복한다<意業>그래가지고 쓸데없이 미워하는 생각이나 쓸데없이 괴로워하는 생각.. 쓸데없이 무서워하는 생각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번뇌라고도 하고 망상이라고도 하고 잡념이라고도 하지요.
번뇌 망상 근심 걱정 미움 원망 이런 거 다 부질없는 건데 이거를 조복 시키지 못한다 이 말이죠..그래서 끊임없이 선업을 닦고 조복을 자꾸 해나가고 해나가면 계속해서 해나가면 ..어느 날 보게 돼요 그게 견성見性이에요 보게 된다 이거예요.
견성見性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견성을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젭니다. 여러 곳에서 설명을 했어요 아주 실제적으로는 강원講院에서 교과서로 선정된 서장書狀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게 편지거든요 수행에 대해서 묻고 대답한 그런 편지인데,
그 편지를 글서書자 편지장狀자 서장이라고 그래요 거기 보면 어떤 분이 큰스님을 뵙고 깨달았어요. 깨닫고 나서 자기감정 변화를 글로 적어 큰스님에게 보낸 게 있습니다. 거기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깨닫고 내가 집에 돌아와서 좌도성중自到城中으로 자기가 머물러 있던 집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착의끽반着衣喫飯하고 옷 입고 밥 먹고 포자농손抱子弄孫하고 아이를 안고 손자를 희롱하고 색색 잉구色色仍舊하되 하나 나가 옛날 생활과 똑같았다.
이게 아주 핵심이에요 깨달으면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그러냐..색색色色이 잉구仍舊라 하나하나가 옛날과 같다.. 생활은 변화가 없는 거예요 내내.. 깨달은 사람도 자고, 먹고, 행동하고 색색잉구라 옛날하고 같다. 하거든요 색색은 하나하나다 이거예요
그런데 기망구체지정旣亡拘滯之情하고 옛날하고 똑같은 생활하는데. 기망구체라 얽힐 구拘자 매일 체滯자 얽히고 매이는 감정은 없어졌다 얼마나 적나라赤裸裸하게 표현한 건데요 얽히고 매이는 감정이 뭐냐 그러면..
지금 우리 모든 생활이 누가 밉고 원망스럽고 야속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허탈하고 우울증 오고 이런 게 전부 얽히고 매이는 감정이거든요 그 얽히고 매이는 감정이 다 없어졌어 편안해졌어요.. 왜냐하면 상相의 세계에서 본성本性의 세계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얼음조각의 세계에서 물의 세계로 돌아왔기 때문에 얼음조각이 어떤 건 왜 크냐 짧으냐 기냐 이게 구체지정拘滯之情 이게 매이는 감정인데.. 매이는 감정이 다 없어졌다. 편안해질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역부작기특지상亦不作奇特之想이라. 그렇다 그래서 아주 신비롭다든지 이상하다든지 뭐 별천지와 같은 생각도 또 없다. 이렇게 깨달은 감정을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이거 아주 진실한 겁니다. 그러니까 생활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닌데 얽히고 매이고 억울하고 분하고 이렇게 꼬이고 틀리는 감정이 없어져서 아주 편안한 자유를 얻었다 이거죠
이게 깨달음의 행복이예요..그러니까 상相으로부터 자유롭고 지난날로부터 자유롭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이게 기망구체지정旣亡拘滯之情이라 얽히고 매인 감정이 이미 없어졌다 이거예요 그렇다고 신비를 좇아서 무한히 어디로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유 평화 기쁨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이
상相에 매이는 감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게 생기는 것이거든요
자도성중 착의끽반 포자농손 색색잉구 기망구체지정 역부작기특지상
自到城中 着衣喫飯 抱子弄孫 色色仍舊 旣亡拘滯之情 亦不作奇特之想
뭐 그렇게 설명을 하고요 법화경法華經 신해품信解品에서 참 멋지게 설명을 했습니다. 신해품이 궁자窮子에 대한 비유인데요.. 부자父子간의 문젠데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사부도서捨父逃逝라고 아버지 버리고 도망을 갔지요 <譬如窮子捨父逃逝>
그래 아버지 버리고 도망을 가서 얻어먹고 빌어먹고 나무 밑에서 자고 거리에서 자고 그야말로 풍찬노숙 생활을 50년을 한 거요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 집에 걸식을 하러 온 거예요 본래 부자父子인데 50년 만에 부자가 새로 만나니까 전혀 딴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인 걸 알았지요 아들은 아버지 인걸 몰랐어요 여기서 아버지는 반가워서 아들을 붙잡으니까 아들은 생각하기를.. 보아 하니 이 집은 내가 머물 집이 아니다 이 집은 엄청난 세력이 있고 재산도 많고 지위도 어마어마한 집인데 내가 이 집에 집에 잘못 어른거리다가는 뼈도 못 추스른다. 해서 냅다 도망가요
그러니까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려고 붙잡으니까 그만 기절해 버렸어요. 그렇잖습니까.. 이게 바로 문화거든요 부자父子사이라도 문화가 다르면 소용이 없어요 잘못 만나면 기절해버려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냥 둬라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싶어 깨어나면 마음대로 가도록 했죠..
간 다음에 그 사람하고 비슷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하다가 품삯을 많이 받는 곳으로 인도한다고 하고 이리 데려와라 그래 데려와서는 다른데 보다 품삯을 배로 줄 테니 다른데 가지 마라. 이렇게 자꾸 유인하는 거죠 이게 말하자면 수행이예요.
이 깨달음의 세계로 점점 가까이 가까이 오게 하는 거..월급을 두 배로 주고 아들을 만날 때는 좋은 옷 다 벗고 아들이 일하는 옷과 똑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호미 괭이 이런 거 들고 노동자로 가서 만나고 어쨌든 여기 오래 있으라 그럼 앞으로 더 많이 올려 준다 그래가지고 점점 낯이 익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게 말하자면 반야바라밀의 세계가 어떻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런 거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럼 점점 알게 되잖아요 해탈이 뭐다 성불이 뭐다 보살행이 뭐다 가르쳐 주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점점 낯이 익은 사람을 데리고 구석구석 다니면서 가르쳐줘요.
그러다가 세월이 오래 흐른 다음에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선언宣言을 해요 ‘이 아이는 본래 나의 아들이다’ 언제 헤어졌다. 오늘부터는 이 아이가 내 가업家業을 다 이어갈 거다 그래서 가업을 전체를 물려주는 거거든요,
이건 부처님의 자비慈悲도 설명이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설명이 되는데요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안거에요.. 그게 깨달음이에요..지금까지는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부사고용父舍雇傭이라고 그래요 아버지 집에서 고용 생활을 했다.
그게 못 깨달은 중생의 생활이라는 거죠 부사父舍고용.. 아버지 집에서 품팔이하는 거예요 못 깨달은 사람의 생활이.. 그런데 깨닫는 순간에 관계가 전혀 달라져 버린 거예요.. 고용주와 고용인이 아니라 부자父子였다는 말이지요.. 그 근본을 알게 되는 거지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근본을 아는 겁니다. 이 형상相이라는 것은 형상이거든요 근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근본이라고 하는 것이 본성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父子의 근본을 알고 나니까 이제는 일하고 품팔이하는 대상이 그 집의 재산이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맡아서 관리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내가 일을 해서 품삯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계가 달라진 거예요 세계가.. 그래서 깨닫고 나면 이 세계가 내가 이익을 보는 장소가 아니라 이 세계는 내가 잘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화엄경華嚴經 제일 첫 번에 보면 부처님이 시성정각始成正覺 하시니 이런 말이 있거든요 부처님이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시니 그러고 펼쳐지는 세계가 있어요 깨달음의 세계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다 통하는 세계가 깨달음의 세계예요,
그래서 예불문에 시방삼세에 항상 계시는 부처님 이러잖아요..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佛陀耶衆 이러거든요. 이렇게 넓은 거예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시방이에요 그리고 현재만 국한된 게 아니고 삼세..
우리가 늘 외는 예불문에 다 있는 거예요.. 이걸 그냥 보지 말고 이거 왜 시방삼세十方三世냐? 이렇게 살펴보는 습관이 아주 필요합니다 그래.. 깨닫고 보면 한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가 현재 미래에 다 머무는 것이고 한 곳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다 머무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다 이런 예기죠.
그러면 그런 것을 갖고 뭐라 하느냐..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는 자기 생명이 부모가 물려준 이 몸밖에 모른 거예요 몸을 자기 생명으로 안거에요 그래서 이거는 사람의 몸 사람의 육체예요. 인체라고 하는 것은 흘러가는 모습이거든요 흘러가는 모습~~
그래서 어떤데 가면요 이상한 소리 많이 듣는데 하.. 그전에는 스님이 굉장히 고왔는데 요즘 많이 늙었습니다 이런 소리 해요. 아 그걸 말이라고 해요 육신은 흘러가는 건데 곱다가 늙지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말도 아닌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한 이십 년 전에는 굉장히 고왔대요. 고운 모습도 흘러가는 내 모습이고 늙는 모습도 흘러가는 내 모습인데 아 그럼 어쩌란 말이냐..이게 형상의 세계에요 이게..머리가 세면 센 것도 내 모습이고 검으면 검은 것도 내 모습이고 늙으면 늙는 거 죽으면 죽는 거 태어냐면 태어나는 거 이게 다 인신 인체의 형상의 세계입니다.
얼음은 얼기도 하고 녹기도 하고 그런데 깨달음의 세계는 법신 법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예요 법신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법신法身..법의 몸 법체 法體법의 신체로 돌아가는 거예요 인체 사람의 몸 사람의 육체에만 매여서 살다가 그 법의 몸 법의 육체로 딱 가보니까 이건 인신 인체에 전혀 구속을 받을 일이 아니거든요 그걸 해탈解脫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석가모니가 깨닫기 전에는 사람의 몸에 의지해서 살았고 깨달은 뒤에는 법의 몸에 의지해서 살았다 이거에요. 그럼 법의 몸은 어디서부터 생기느냐.. 딱 알고 보는 데서 생기지 누가 물려주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걸 깬 몸이라고 해요 깬 몸.. 깨달은 몸이다.
법의 몸法体은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어요 본래 있었는데 자기에게 느껴진다 이거에요 그런데 사람의 몸人体은 부모가 물려줌으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이 몸은 부모가 물려준 건데 흘러가는 거예요 그냥 흘러가~~ 이 몸은 물려준 거거든요 그러니까 잘 보존을 하되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어난 몸만 가지고 살면 아, 이 몸이 늙으면 이제 허망하고 또 죽으면 두렵고 죽어보지도 않고 두려워하거든요..죽음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세요 왜 죽기도 전에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느냐 말이죠.. 죽음이 오면 나뭇잎이 조용히 떨어지듯이 조용히 죽어보면 세계를 알 수 있거든요..
근데 죽음이 무슨 만병통치약萬病通治藥이 되는 듯이 미리 죽는 사람도 있어요<대중 웃음> 죽음이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나뭇잎에 단풍이 들면 저절로 떨어지는 거죠 단풍이 들기도 전에 생 나뭇잎을 뗄 필요도 없는 거 아니에요 그렇잖아요.
죽음이라 하는 건 두려움도 아니고 미리 당겨 죽어야 할 일도 아니다 흘러가도록 부모가 물려준 거니까 잘 우리가 받아서 쓰는데 문제는 깨달을 받는 것은 내 일이거든요.. 부모가 깨쳐 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난 생명이 있고 깬 생명이 있는데요,
부모로 부터 얻은 생명을 인신人身.. 깨달음으로부터 얻은 생명도 있는데 그걸 법신法身 dharma-kāya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룸비니에서는 난 생명을 얻은 거예요 태어난 생명이지 않습니까.. 보리수나무 아래서는 깨달은 생명을 얻은 겁니다 그건 깬 생명이에요,
그래서 깬 생명을 얻으니까 난 생명이 오고 가는 데에 구애를 안 받아요 그게 해탈解脫 moksha이에요 .. 큰 세계를 얻어서 거기서 이제 깨달음의 자유가 있고 깨달음의 평화가 있고 깨달음의 기쁨이 있으니까 고심무가애故心無罣碍 무가애고無罣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얼마나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깨달음의 희망을 가지고 이 마음을 나 혼자만 좋도록 집착 하지 말고 나도 좋고 너도 좋고<自利利他>함께 좋은 방향으로 생활에 습관을 점점 바꿔 가는 것이 공덕功德을 짓는 것이고 보시布施를 하는 것이고 복福을 짓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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