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법문法門은 ‘나’는 ‘불성’이다.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서산西山休靜스님께서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라고 하는 의식문을 하나 편집을 하셨는데요. 거기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면
아유일권경我有一券經 나에게 한 권의 경經이 있다.
불인지묵성不因紙墨成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펼쳐 보면 한 글자도 없는데.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항상 대광명을 비춘다. 놓는다.
놓는다는 의미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놓을 방放자거든요. 그래서 종이로 된 것도 아니고, 글자로 된 것도 아니고, 무얼 펼치는 것도 없는데, 항상 대광명을 얻는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이 서산스님이 하신 이 법문은, 법문을 할 때나 제사를 지낼 때나 항상 독송하는 그런 구절입니다.
그리고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이라고 하는 논論이 있는데, 구경일승보성론은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을 기술한 논으로 아주 유명한 논입니다. 그래서 여래장이다. 불성이다라고 하면 어디에 근거를 해서 말을 하느냐? 라고 할 때, 불성론도 있지만은 구경일승보성론이라고 불성에 대한 중요한 논이거든요. 거기 제3권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면,
화불소허공火不燒虛空이라. 불로는 허공을 태우지 못한다.
불은 모든 걸 다 태우죠? 물도 태웁니다. 바로는 못 태우지만 물을 그릇에 넣어가지고 밑에 때면 물도 타잖아요 지구상 불이 못 태울 게 없거든요. 쇠도 태우고 모든 걸 다 태워요. 그런데 하나 못태우는 게 있습니다. 뭘까요? 허공虛空은 지가 못태워요. 불이 다 태워도 허공은 못태웁니다.
그런데 파리란 놈은 말이에요. 온갖 데 왔다 갔다 하지만, 불한테는 갈수가 없어요. 한계가 있어요. 임금님 머리위에도 가는 게 파리에요. 음식을 아주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으면 제일먼저 오는 게 파리입니다. 이게 염치도 없고, 무서운 것도 모르고, 못가는 데가 없는 게 파리인데, 오직 불덩어리한테는 못가요. 이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불은 온갖 걸 다 태워도 허공은 못 태운다. 그래가지고
약소무시처若燒無是處라. 허공을 태우려 해도 태울 곳이 없다.
못태운다 이거에요. 억만년 불을 붙여도 허공은 못 태우거든요.
여시노병사如是老病死 이와 같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 해도
불능소불성不能燒佛性. 불성을 태우지 못한다. 이런 게송이 있어요.
이 생노병사生老病死가 불성佛性을 태울 수 없듯이, 불로 허공을 태우지 못한다. 이런 법문이거든요. 그래서 이 불성에 대한 아주 유명한 법문이 화엄경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무일중생 이불구유여래지혜 無一衆生 而不具有如來智慧
한 중생도 여래지혜를 갖추어 있지 않은 이가 없다.
지혜가 불성이고, 자비가 불성이고, 덕행이 불성이고, 부처의 성격, 부처의 본성이니까. 부처가 가지고 있은 건 다 해당되는 거죠. 한중생도 여래지혜를 갖추어 있지 않은 중생이 없다. 그런데 왜 모르느냐?
단이망상전도집착이증득 但以妄想顚倒執着而不證得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그 불성을 증득하지 못한다.
약이망상 일체자연지 무장애 즉득현전
若離妄想 一切自然智 無碍智 卽得現前
만약 망상만 여의면 일체지와 무애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느니라.
이 법문은 화엄경 여래출현품의 법문인데, 불성에 대한 법문을 할 때에 이 법문을 항상 합니다. 이게 대승불교의 불성佛性법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전에 의해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이 곧 부처다. 라는 게 다 이런 법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여래지혜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수수인신蠅受人身 비롯 사람의 몸을 받았으나,
심동여래心同如來 마음은 여래와 같이 똑같다.
이게 대승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불이에요. 몸을 바꾸는 게 아니에요. 성불成佛할 때.. 불전佛典에 보면 부처님 모양을 설명할 때 32상相으로 부처님을 설명했습니다. 이 32상이 남자상입니다 남자 몸이에요.
여자 몸은 32상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 32상으로 성불한다라고 하면 여자는 성불 못해요. 32상중에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고 남근이 숨어있어요. 그래서 32상을 갖추어야 성불 한다 그러면.. 자연히 여인은 성불 못한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고 부터는 32상相 성불이 아니라, 누가 성불하느냐?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보는 사람이 성불해요.<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몸이 32상이냐 아니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제상이 비상임을 봤느냐? 못 봤느냐? 이게 중요한 거예요.
제상이 비상임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다 그랬거든요. 이게 대승불교에요.
그래서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임을 본 그런 분들을 선지식이라 그러는데, 그 선지식의 형상을 보면 동남동녀童男童女도 있고, 비구 비구니도 온갖 사람들이 다 있는데, 이런 것을 총칭해서 53선지식善知識이라 이럽니다. 그 53선지식이 전부 성불하신 분들이에요.
그래 성불해가지고 보현행普賢行을 닦는데, 그 보현행을 닦는 경지를 묘각妙覺이라 그럽니다. 성불을 최고로 한 거.. 제상이 비상임을 보고, 부처의 덕성을 갖춘 걸 등각等覺이라 그래요. 석가모니하고도 같고, 비로자나불하고도 같고. 아미타불하고도 같고 일체중생과 같고, 세계 우주만상과 같고, 같지 않은 게 하나도 없는 경지에 올라간 것을 같을 등等자, 등각이라 그래요.
그래서 등각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보현행원普賢行願으로 돌아가는데, 그 보현행원으로 돌아가는 걸 묘각이라 그래요. 묘각. 그래서 묘각의 세계에서 법을 펴는 분들이 선지식인데, 그런분들은 뭐 여자다 남자다 형상이 어떻다. 모습에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게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불성에 대한 법문이 화엄경에서 아주 극치를 이루죠. 그래가지고 그 화엄경에 대한 말씀을 더 발전시켜서 불성이야기를 합니다. 신라시대에 의상義湘스님이 계시고, 원효元曉 스님이 계신데,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스님이 원효라는 분을 기록할 때, 성인 성聖, 스승 사師자, 성사라고 그랬어요 성사聖師!.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원효성사元曉聖師에요. 그래서 제가 볼 때도 원효성사라고 그러는 게 가장 맞다고 봅니다. 그 분은 젊을 때는 스님으로 계시다가 나이 많아서는 속인俗人복장으로 사셨거던.. 그래서 스님이라고 해도 되고, 거사居士라고 해도 되는데 스님 거사 이거 보다 성사다.
일연<普覺國師>스님이 그렇게 딱 붙여놨어요. 원효성사. 거 참 좋은 거 같애요. 스님이다 그러면 스님 아니다, 이럴 거고. 거사다 그러면 거사 아니다, 이게 논쟁이 될 수가 있는데, 원효성사 이러면 딱 들어맞는 얘기 아니오. 옛날 분들이 기록하나를 놓는데도 굉장히 세심하게 놨어요.
원효성사께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내면서 동선이라고 하는 책, 제83권에 서문이 수록 돼 있는데, 거기 보면 무장무애법계법문無障無碍法界法門이라. 이렇게 시작을 해요. 화엄경이 무장무애법계법문이다. 이 불성佛性이 무장무애법계인거에요. 불성은 ‘나’인데, 이 ‘나’라는 것은 무장무애법계, 그겁니다.
그런데 무장무애법계無障無碍法界를 잊어버리고, 이 ‘몸’과 ‘생각’에 지금 빠져있는데, 그걸 망상이라 그럽니다. 망상이 뭐냐? 아무 시간으로도 장애가 없고, 공간으로도 장애가 없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이게 무장무애법계입니다. 일미진중이 함시방이오.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다가지고 있고, 또 무량원겁이 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란 말이죠. 무량원겁無量遠劫이 곧 일찰나다. 이게 무량무애법계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법계法界가 곧 불성佛性이에요. 그게 ‘납’니다. 그게 난데...
그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몸’과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요. 자기 생각을 ‘마음’이라 그러고 이 몸을 ‘자기’라 그래요. 그걸 망상妄相이라 그러는 겁니다. 사대四大에 집착해서 자기를 삼고, 반연 攀緣하여 생각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 이게 망상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망상집착으로 깨닫지 못한다. ‘망상만 여의면’ 여기 온갖 지혜를 다 얻는다. 이게 화엄경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원효성사는 서문序文을 지으면서 뭐라고 그랬냐?
부동부정不動不靜이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다. 불성은. 그래서 뭐냐?
생사위열반 열반위생사生死爲涅槃涅 槃爲生死.
생사가 열반이고, 열반이 생사다. 또
불일부다不一不多라.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일법시일체법 일체법시일법一法是一切法 一切法是一法
일 법이 일체법인 거에요 또일체법이 일 법인 거에요.
이렇게 법문을 했어요. 이게 깨달음이고 이것이 불성입니다. 일미진중이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인거에요. 그거 참.., 기가 막히네.. 이런 얘기하면 다 이렇게 졸더라고요.<ㅎㅎ..대중 웃음>왜 조나? 했더니 이 얘기하면 졸아요. 이게 왜 그러냐하면 파리가 온갖 곳에 다 앉지만 불덩어리에 못앉는 거하고 똑같애요.
그러니까 이 생각 저 생각 다 할 수 있어요.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나쁘니, 다 할 수 있지만, 이 불성佛性에 딱 들어가면 깜깜해요. 이게 바로 이런 거에요. 그러니까 온갖 얘기 다하지만, 일 법이 일체법一法是一切法인데, 터억!..일 법아니오. 이게 뭐냐?
파리가..<쟁반을 들어 보이면서>이건 그릇이다. 이건 파리요. 이름 딱 떼어 버리고, 생각 딱 떼어 버리고 뭐냐 이거요.? 깜깜하다고.. 파리가 못 앉는 데가 없지만 불에는 앉지 못하듯이, 딱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졸아요..ㅎㅎ
그게 못 깨달은 중생의 미혹함입니다.
이렇게 법문을 하셔요. 일 법이 일체법이고, 일체법이 일 법이다. 이와 같이 무장무애법無障無碍法이 법계법문法界法門의 법칙이 된다. 이렇게 법문을 잘 해주시고요, 옛날에 강원講院에서 공부를 시키는데, 그때에 공부하는 교육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신심信心교육인데요.
교육기관을 개설해서 사업을 시행을 할 때, 무엇을 위한 교육이냐? 교육이념이 뭐냐? 교육방법은 그 다음이에요. 문제는 이념理念이에요. 교육방법이 뭐 아무리 좋은 기구를 동원을 하고, 온갖 걸 시설을 해도 문제는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교육이념이 그렇게 중요한 거요.
절에서 그 동안에 강당을 차려놓고 가르친 것은 신심信心을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신심信心.. 이 신심하나가 이루어져야 성불도 하고 복도 짓고, 수행하는 거지. 신심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음식이 많아도 먹어야 되는 거지, 안 먹으면 소용 없구요.
아무리 법문法門이 많아도 내가 믿어야 이익이 있지 안 믿으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여기 앉아서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안 믿는데는 해 볼 도리가 없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법문 중에는 따악~ 쳐다보고 있다 나가버리면 그만 인거거든요. <대중 웃음>
그런데 뭘 믿느냐? 불성佛性에 대한 믿음인거에요. ‘나는 불성이다’. 이 사대<地·水·火·風:만물의 원소>라고 하는 것은 구름과 같이 흘러가는 건데. 이 사대四大에 집착해서 불성을 모르니 그것이 중생이다 이거여. 불성에 대한 믿음이거든요.
그럼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가 업을 지어서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이거를 믿게 하는 거예요 불성은 평등平等한데 인생은 차별差別되거든요. 그래서 인생차별.. 불성평등이란 말이오. 그럼 어째서 불성은 평등한데 인생은 차별하냐?
그걸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그러고 그걸 자작자수自作自受라 그럽니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다. 이것만 딱 믿으면 그냥 발심發心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서원誓願을 세운단 말이에요 서원. 그렇게 서원을 세우면 어떻게 수행을 안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복福을 안 지을 수가 있습니까?
이게 신심교육이에요. 그런데 그런 심신교육 중에 수많은 경전經典이 있지만 그 경전을 다 잘 알게 할 수는 없으니까, 경전마다 앞에 서문序文이 있는데 화엄경에는 왕복무제 동정일원往復無際 動靜一源이라고 하는 서문이 있는데 그걸 왕복서往復序라 그래요.
그리고 원각경에 원형이정 천도지상元亨利貞天道之常 仁義禮知人性之綱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걸 원형서元亨序라 그러고. 또 원각경에 대해 배휴裵休라고 하는 분이 서序를 지었는데, 부혈기지속필유지夫血氣之屬必有知 凡有知者必同體이 이래 나가서 혈기서血氣序라 그러고요.
금강경오가해가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絶名相 貫古今 處一塵 圍六合하니 이래 나간다 해서 일물서一物序라 이래 말해요. 이 네 가지 서문만 따르르 외워도, 그거 뭐 신심이 안날래야 안날수가 없는 거에요. 일물서一物序 원형서元亨序 혈기서血氣序 왕복서往復序.. 왕복이 무제無際나, 이렇게 화엄경 청량국사淸凉國師 서문이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외우는 법성게<法性圓融無二相..> 지금 얘기한 원효성사의 이 화엄경 서문이 법계로 나가니까 부처님 법계서. 이 여섯 가지만 봐도요, 경經 다 안 봐도, 신심이 안 날래야 안날수가 없어요. 거기에 인과因果가 있고 불성이 다 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알고 보면 불성佛性은 평등平等하고 청정淸淨한데 인과因果는 차별差別하고 역연亦然해요. 그래서 인과因果가 바로 불성이지 불성 따로 있고, 인과 따로 있고 그런게 아니거든요. 그런 거에요. 그래서 이 이름도 어떤 때는 법계法界라 그러고 어떤 때는 불성佛性이라 그러고,
어떤 때는 원각圓覺이라 그러는데, 혈기서血氣序에 보면 중국에 배휴라고 하는 분이 참 대단한 분인데, 법계라고 할 때는 교철융섭 고왈법계 交徹融攝 故曰法界 교철융섭이라. 철자는 사무 철徹 자인데 통한다는 소리요. 교자는 사귈 교交자인데 서로 통해요.
내가 저쪽으로 통하고 저쪽에서 나로 통하고, 하나가 많은 것으로 통하고 많은 것이 하나로 통하고. 인因에서 과果로 통하고 과에서 인으로 통하고. 이게 교철交徹입니다. 융섭融攝이에요. 전체 다 융합해서 포섭하는 게 있어서 교철융섭으로 표현할 때는 법계라고 하고,
이과절비고왈불성離過絕非 故曰佛性 모든 상이 다 끊어졌다고 할 때는
불성이라 하고 물들고 새지도 않는 것을 청정不濁不漏 故曰清淨이라고 하고, 또 삭군혼이독조 고왈원각爍群昏而獨照 故曰圓覺 여러 어둠을 밝혀서 홀로 비추는 걸 표현할 때는 원각圓覺이라고 한다.<爍빛날 삭>
이래서 표현하는 내용 따라서 명칭이 다른 거지.. 다 우리의 본성, 불성이거든요. 그래서 똑같은데, 불성은 똑같은데 그 인과업보에 따라서 자작자수自作自受로
종일원각 이미상원각자 범부야終日圓覺 而未嘗圓覺者凡夫也요
우리가 온종일 원각 속에 있는데 일찍이 원각을 잃어버리고 사는 게 범부다.
기가막힌 말씀이에요. 종일원각終日圓覺 이미상원각자而未嘗圓覺者는 범부야凡夫也라,이렇게 시작을 해요. <嘗맛볼 상>
그래서 중생이.. ‘참 자기’가 왕인데, 왕이 왕인 줄 모르고 헛고생 하는 거와 똑같은 겁니다. 왕이면 뭐해요? 왕인줄 모르는데. 모르면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지.. 제일 고생스러운 게 모르는 고생이에요. 모르면 어떻게 할 거에요? 왕이면 뭐해요? 왕인줄 모르니 어떻게 하냐 이말이여.
그 다음에는
욕증원각 이미극원각자 보살야 欲證圓覺 而未極圓覺者 菩薩也.
원각이 증득하고자 하되 원각증득이 다 이루어지지 아니한 분은 보살이다.
구족원각 이주지원각자 여래야 具足圓覺 而住持圓覺者 如來也
원각을 다 갖추어가지고 원각에 머무르는 분은 여래다.
이 원각圓覺인 것만은 똑같은 거에요. 종일동안 원각 속에 있으면서 원각을 모르는 건 범부凡夫고, 원각을 증득하려고 하지만 다 증득하지 못한 건 보살菩薩이고, 원각을 다 갖추어서 원각 속에 턱~ 머무는 건 여래如來라고 한다.
그러면 구족具足하고, 또 미극未極하고 다 하지 못했고, 또 모르고未嘗 이거는 인과에 대한 문제지. 불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불교교육은 다른 게 필요 없는 거에요. 신심. 불성과 인과因果를 믿기만 하면, 이건 뭐 불성을 깨달으려고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고. 닦으려고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거 빠지면 헛일이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아는 건 많은데.. 신심이 부족하면 그게 참 이게 문제인거에요. 내가 옛날 충청도에서 자랄 때 ‘약빠른 고양이가 밤눈이 어둡다’ 그랬거든요 밤눈 어두운 고양이 못쓰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모든 게 밤에 움직이는데 밤에 꼼짝 못하면 고양이가 뭐하겠어요? 온갖 거를 다 알아도 신심信心이 하나도 없으면 소용없어요.
그래서 인과를 이야기하는 것 중에 제일 많이 말하는 게 그겁니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내가 받는 것이 전생이니라.
욕지래생사 금생작자시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내생사를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내가 짓는 것이 바로 그거다.
가사백천겁 소작업불망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백천겁이 지나가더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해서
인연회우시 과보환자수 因緣會遇時 果報還自愛
인연이 만나는 때에 과보를 스스로 받는다.
이런 게 전부 인과법문인데요 천수경에 보면 또 뭔말이 있냐 하면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제 百劫積集罪一念頓蕩除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如火焚枯草滅盡無有餘 이랬거든요
백겁동안 지은 죄를 일찰나에 한꺼번에 없앤다. 그것이 뭐와 같으냐 하면, 불로 마른 풀을 태울 때 남김없이 다 태우는 거와 같다. 마른 풀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거 불만 대면 다 타지 남는 게 없거든요. 금방 다 타버리잖아요. 그와 같다 그랬어요.
그러면 백천겁百千劫이라도 인과因果는 그냥 있다 그랬는데, 여기서는 백겁적집죄를 일찰나에 다 없애서, 마른 풀을 불로 한꺼번에 남김없이 다 태우는 것과 같다. 이랬단 말이예요 이 이치가 무슨 이치인가 이 말이지.. 이것이 인과와 불성에 대한 이치입니다.
인과를 잘못 짓는 건 어두움이요. 불성은 밝은 거예요. 어두움이라는 건 형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밝은 것만 나타나면 어떤 어두움도 남는 게 없다. 이 소리에요. 그래서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는 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亡 마음이 없어지면 죄도 또한 없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죄도 없어지고 마음도 없어지는 것을 일러 진참회라 한다.
이 참회라는 게 불성참회. 불성을 잃어버리고 돌아다니다가 이제 불성으로 돌아온다 이거에요. 이것이 진정한 참회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죄는 어두운거에요. 그러나 불성은 밝은 거에요. 그래서 어두운 것은 밝은 것만 나타나면 없어져요.
그러면 물질을 불성佛性으로 보지 못하고 물질로 보는 게 어두움이고, 저 하늘을 불성으로 보지 못하고 하늘로 보는 게 어두움이고, 죽음을 불성으로 보지 못하고 죽는 걸로 보는 게 어두움이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느끼는 건 전부가 다 이게 어두움이에요.
그런데 불성佛性하나를 떠억!.. 깨닫고 보면 불성뿐이에요. 밝은 것뿐이지 어두운건 없다. 이 이치입니다. 밝은 게 나타나면 어두운건 없는 거예요. 밝은 것 뿐이예요. 그래서 불성하나를 밝히면 佛性뿐이지 다른 게 없어요.
중불용타中不容他라. 그 가운데 다른 걸 용납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공空Sunyata이 반야바라밀 불성인데,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 · 受想行識 수상행식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無 · 眼耳鼻舌身意,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무색성향미촉법 無 ·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도 없다. 그런 거에요. 반야바라밀Prajna Paramita 뿐인 거에요.
이게.. 터억!~ 나의 불성인데. 깜깜하니 모르는 거예요. 이 몸뚱이가 내 불성佛性인데 깜깜하니 모르는 거예요. 그게 미혹한 거고 그게 망상입니다.
그래서 좋은 업業은 짓지 않고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것 참..<대중웃음>
내세來歲에 받는 건 금생今生에 내가 짓는 건데, 금생에 내가 짓는 대로 받는데, 왜 걱정하냐 이 말이오. 가령 내가 어디를 가면..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가는건데.. 내가 어디로 갈 거냐고 전부 다른데 가서 묻습니다. 언제 부자 되겠냐고?
부자富者 될 짓을 하면 부자는 저절로 되는 데.., 어디가 묻냐? 이 말이오. 그것 참 기가 막힌 거 아니에요. 그래서 조주趙州스님한테 어떤 사람이 찾아갔어요. 대 선지식도 지옥에 갑니까? 선지식 지옥 가는 게 좋은 모양이오.<ㅎㅎ> 그러니까 그랬겠죠. 대 선지식도 지옥에 갑니까?
그러니까 조주스님이 ‘내가 제일 먼저 간다’ 그랬거든, 대선지식께서 왜 지옥에 갑니까? ‘내가 지옥에 가지 아니하면 어찌 자네를 만날 수가 있겠는가’?.<ㅎㅎ> 그렇게 대답을 했거든, 그것 참 기가 막힌 법문 아니에요?
내가 제일 먼저가지. 대선지식이 어떻게 지옥地獄가? 내가 지옥안가면 어떻게 자네를 만날 수가 있느냐 이 말이어, 선지식이라는 건 묘각妙覺인데, 높은 자리에 가만히 구름처럼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지옥도 가고, 짐승도 되고, 풀도 되고, 나무도 되고, 돌도 되는 이게 묘각이라 이 말이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도가 높으면 아주 대단하게 떵떵 거리는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오. 그거는 아니에요. 그거는 등각等覺밖에 안 되는 거예요. 진짜 도는 묘각인데, 묘각은 온갖 거 안 하는 것이 없는 게 그게 묘각이에요. 그게 도道에요.
그러니까 전부 중생이 미혹迷惑해서 잘 몰라 그래요. 도인道人되면 뭐 대단히 좋은 거 하려고 어디 시험보고 합격하고 벼슬하는 게 도인道人인 줄 알아요. 그게 아니에요. 묘각도妙覺道도가 가장 높은 도인데, 묘각도는 일체 것이 안되는 게 없어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중생이 빛과 다 하나가 되고, 티끌과 하나가 되는 거예요. 화광동진 도道가 그게 묘각입니다. 화광동진和光同塵은 도덕경56장에 있는 말입니다. ☞和光同塵 ①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 있다는 뜻으로, 자기의 지덕智德을 나타내지 않고 세속을 따름 ②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속인과 섞여 행동함.
그래서 인과라고 하는 것도 육도인과가 있는데, 육도인과는 선과인과에요. 선을 지어서 좋은데 가고, 나쁜거 지어서 나쁜데 가고<善因善果, 惡因惡果> 또 이승인과가 있는데,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들어가는 게 이승인과죠. 삼승인과는 선인후과善因後果, 먼저 인을 닦아서 뒤에 결과를 받는 게 이게 삼승인과인데.
일승一乘을 법계승이라 그러는데요, 이 법계일승에는 선인후과가 아니고 인과교철因果交徹입니다. 인과因果가 교철交徹해요. 인因속에서 바로 과果를 이루고 과속에서 바로 인을 이루는 게 이게 인과교철이라 그래요. 이걸 원융圓融이라고 그럽니다.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교철을 말한다.
서로 사무치는게 될 때, 이게 원융圓融이 되요. 원융인과圓融因果와 교철인과交徹因果가 이게 일승一乘인데, 일승도라 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법문 잘~~ 들으면 그대로 성불하는 거에요. 이 자리 떠나지 않고.. 그게 인과교철이에요.
그래서 몇 백 만년 뒤에 성불해서 딱~ 보더라도, 지금 그 법문들은 게 그대로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이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일찰나가 바로 무량겁이다. 이것이 원융인과 교철인과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화엄경에서는 그런 법문인데
심심작불心心作佛이라. 마음마음이 부처가 된다.
일심이비불심無一心而非佛心. 한 마음도 부처님 마음 아닌 게 없다.
처처성도處處成道라. 곳곳에서 도를 이룬다.
무일진이비불국無一塵而非佛國. 한 티끌도 부처님 나라 아닌 것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신심信心을 갖는 것이 대승불교의 아주 최고가는 가치입니다. 잠 오십니까?<ㅎㅎ >잠 오는 것도 당연한 거에요. 그게 다 우리 자작자수에요. 왜 그러냐하면 도의 인연을 많이 못지었기 때문에, 도道 얘기를 들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까 잠이 올 수밖에 더 있어요.
그게 그런데 여기 법문 듣겠다고 찾아온걸 보면<ㅎㅎ.. > 또 그게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 법문 들은 이 인연으로 다 성불하는 것이 그것이 부처님 법이에요. 제가 60년대 말쯤 어느 노강주老講主스님을 만났는데요. 그때 새파란 사람을 보고 사불견四不見을 얘기하는데
어불견수魚不見水. 고기는 물을 못 본다.
인불견풍人不見風. 사람은 바람을 못 본다.
미불견성迷不見性. 미한 사람은 성품을 못 본다.
오불견공悟不見空.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이 법문을 해주셔요.
나중에 원각경圓覺經보니까 서序에 있는데 다른 건 다 넘어가겠는데 오불견공悟不見空이라.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본다. 아~ 이게 도대체가 뭔소리인지 모르겠더란 말이에요.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본다. 그래서 이상하다. 그런데 이게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그랬잖아요. 저 허공虛空이 내 마음인 거에요.
그러니까 마음· 불성佛性을 딱 깨달으면 불성뿐 인거에요. 그런데 미迷해 가지고는 저게 무슨 물건인고? 전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 아이가 부모를 떠나서 있으면 어머니아버지 얼굴 까맣게 모르듯이, 우리가 자기불성을 오랫동안 떠나 있기 때문에, 쳐다봐도 모르는 거예요.
능엄경楞嚴經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 청정함이 지극한 경지에 들어가면 빛이 확 통해버려요. 이걸 통달通達이라 그래요. 광통달光通達. 그래서 불교의 수행이라 하는 것은 뭘 만들어내고 알아내는 게 아니라, 마음을 청정淨靜~~하게 만드는 게 이게 수행입니다
이게 청정함이 지극하면 정극淨極하면, 광통달이라. 빛이 통해져 버려요. 그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맑아지면 통하는 거예요. 이게 정극광통淨極光通이에요. 정淨이 극極하면 광光이 통通한다. 빛이 통한다. 맑아지면 통해요.
그럼 나는 왜 못 깨닫는고?.. 딴 사람한테 물어요.. 나는 왜 못 깨닫느냐고..<ㅎㅎ> 마음이 맑아지면 정淨이 극極하면 빛은 저절로 통하는데, 온갖 생각으로 어둡게 만들어 놓고 나는 왜 못 깨닫느냐고. 그것 참, 세상에,.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적조함허공寂照含虛空.. 고요히 비치는 ‘마음’이 허공을 다 먹어버려요.
그러니까 허공을 ‘불성佛性’이 다 먹어버렸는데, 어찌 ‘마음’ 떠나서 허공이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오불견공悟不見空이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허공이 없는 거예요. 허공이 없어요. 적조함허공寂照含虛空. 능엄경 제6권에 있는 법문이에요. 적조寂照가 허공을 다 먹어버렸다 이 말이오.
그러니 허공이 어디 ‘자기’ 떠나서 허공이 따로 있어요?.
불교라는 게 이런 겁니다..<대중박수> 그래가지고 그런 상태에서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하니 그래서 세간을 떡~~ 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라.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같다.
이게 깨친 경지에요.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 도인의 분상에서는 중생의 세간사가 다 몽중夢中과 같다 이 말씀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로지 신심信心인데. 이 신심은 뭐냐?.. ‘나’는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청정淸淨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더되고 덜된 사람이 있느냐? 그거는 자작자수自作自受다. 이거죠.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거다. 인과因果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불자佛子들이 많은 법문 듣는데, 이 불성을 믿고 인과<因果應報>를 딱~ 믿는 것이 그것이 불자의 아주 생명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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