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가경

연기 작용성을 설명한 능가경

통융 2022. 12. 19. 13:14

진리는 연기작용성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능가경>에서 설명하고 있다. 

연기법의 실체와 실상에 대해 알아보자. 

 

“대혜여, 모든 법을 보면 환이 아니요, 비슷한 것이 없으므로 일체법이 환과 같다고 말한다.”
대혜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환상에 집착함에 일체법이 마치 환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집착하는 전도된 상(相)에 집착되기 때문입니까? 만약 여러 가지 환상을 집착하는 것에 따라 일체법이 환과 같다고 말씀하신다면 세존이시여, 일체법은 모두 환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색상을 보면 원인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두 인이 없이 갖가지 색상이 나타나게 함이 환과 같기 때문에 세존이시여, 갖가지 환상에 집착하여 일체법이 환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갖가지 환상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법이 환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혜여, 일체법이 진실하지 않고 속히 멸하여 번개와 같으므로 환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혜여, 비유하면 번갯불은 보자마자 곧 사라지듯이 세간의 어리석은 범부는 모두 일체 법을 보는 것이 자기의 분별 때문이다. 자상ㆍ공상이 나타남도 또한 이와 같아 능히 있는 것을 관찰하지 못하는 까닭에 허망되게 여러 가지 색상을 헤아려 집착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환도 아니며, 비슷함도 없고
또한 모든 법이 있지도 않으며
참되지 아니하고 빠르기가 번개 같아
환과 같음을 반드시 알아라.

 

모든 법 먼저 있지 않았고
모든 연(緣)도 화합하지 않았으며
본래 생함이 아니되 생하나
자성은 있는 바 없느니라.

아직 생기지 않은 법은 불생(不生)이니
연(緣) 떠나 생하는 곳 없느니라.
현재 생한 법 또한 그러하여
연을 떠나 얻을 수 없느니라.

실제 연기의 요체를 관찰하면
있지도 않고 또한 없지도 않아서
비유(非有)와 비무(非無) 모두 아니니
지혜로운 이는 분별하지 않느니라.

외도의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허망하게 같고 다른 성품 말하여
모든 연기 깨닫지 못하느니라.
세간이 환과 꿈 같음을.

나의 위없는 대승
이름과 말을 초월하여
그 뜻 매우 명료하나
어리석은 범부 깨달아 알지 못하느니라.

연기작용은 찰나에 일어나는 공성이다. 

 

"자상ㆍ공상이 나타남도 또한 이와 같아 능히 있는 것을 관찰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것을 있다고 집착하는 순간 상이 생기고 분별심이 생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대혜여, 나는 말하기를, ‘모든 법은 유ㆍ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무생(無生)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관찰'에 깊은 사유를 해야한다. 

"일체법의 실다운 곳을 본다는 것은, 오직 마음에 나타난 것임을 깨달아 통달함이다."라고 설명한다. 

알아차림 깨달음이다. 

번개가 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오직 지금 일어나 있는 그대로'를 볼 뿐, 들을 뿐 알 뿐이다. 

 

이상의 대화는 연기작용의 실체다. 머물지 않는 순간이다. 

 

다음은 이러한 실체로 나타나는 실상에 대해

"지은 것 없으니 생김도 없고 법이 있어 생사를 섭수한다.
환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 통달하면 모양에서 분별 않으리." 설명을 하고 있다. 

 

“대혜여, 나는 마땅히 명신(名身)ㆍ구신(句身)ㆍ문신(文身)의 모양을 설하리니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모양을 잘 관찰하여 그 뜻을 깨달아 통달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다시 능히 일체 중생을 깨닫게 하라.대혜여, 명신이란 사물에 의지하여 이름을 세우는 것이니 이름이 곧 몸이니 이것을 명신이라고 한다. 구신이란 능히 뜻을 나타내어 구경을 결정하는 것을 구신이라 한다. 문신이란 이로 말미암아 능히 명구(名句)를 이루니 이것이 문신이다.

또한 대혜여, 구신이란 구사(句事)의 구경을 말하고, 명신이란 모든 글자의 이름이 각각 차별이 있음을 말하니, 아자(阿字)에서 가자(呵字)에 이르는 것과 같다. 문신이란 길고 짧고 높고 낮음을 말한다.
또한 구신이란 발자취와 같고 거리 가운데 사람ㆍ가축 등의 자취와 같다. 이름[名]은 색이 아닌 사온[非色四蘊]을 말하는데 이름으로 설하는 까닭이다. 글[文]이란 이름의 자기 모양[自相]을 말하는데 글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신ㆍ구신ㆍ문신이라 이름한다. 이 명신ㆍ구신ㆍ문신 상을 너는 반드시 닦고 배워야 한다.”

 

모든 이름과 글자에 의존하는 것들은 가명이며 실상이 아님을 설명하고 있다.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형상들은 모두가 가상이며 지나가 버린 허상임을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네 가지 기론(四種記論:질문에 대한 네 가지 대답의 형식)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신다.
"대혜여, 기론을 그쳐라[止] 하는 것은 내가 때때로 이렇게 설하나니,

근기가 미숙한 중생을 위해서 그치라고 설한 까닭이다.
또한 대혜여, 어떤 까닭으로 일체법이 생기지 아니함인가? 능작과 소작을 떠나면 작자(作者)가 없는 까닭이다.
어떻게 일체법은 자성이 없는가? 깨달은 지혜로 자상ㆍ공상을 얻을 수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일체법은 오고 감이 없는가? 자생 공상은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이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까닭으로 일체법은 멸하지 아니하는가? 일체법은 성품과 모양이 없는 까닭이요 얻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무슨 까닭으로 일체법은 무상(無常)한가? 모든 상(相)이 생기는 무상의 성품 때문이다.
무슨 까닭으로 일체법은 항상한가? 모든 상이 일어남은 곧 일어남이 아니요,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 무상의 성품은 항상하므로 나는 일체법이 항상하다"고 설한다.

 

 

참선하는 이는 선(禪)에 인연하여 미혹을 끊고 진제(眞諦)를 본다고 하나
이것이 모두 망상임을 깨달아 알면 곧 해탈이니라."

 

“또한 대혜여, 두 가지 깨달은 지혜[覺智]가 있나니 관찰지(觀察智)와 모양을 가지고 분별하여 집착하여 일으키는 지혜이다. 관찰지란 일체법이 4구(句)를 떠나 있어 얻을 수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4구란 같고 다르고 함께하고 함께하지 못하고 있음과 있지 아니함과 항상함과 무상함 등이니, 나는 모든 법이 이 4구를 떠났기 때문에 일체법을 떠났다고 말한다. 대혜여, 이와 같이 법을 보고 너는 반드시 알고 배워야 한다.
무엇을 모양을 가지고 분별하고 집착하여 일으킨 지혜라 하는가? 이른바 견고하고[堅:地]ㆍ젖고[濕:水]ㆍ따뜻하고[煖:火]ㆍ움직이는[動:風] 모든 대종(大種:四大)의 성품에서 모양을 가지고 집착하여 허망하게 분별하여 종(宗:주장ㆍ제안)ㆍ인(因:논증의 근거)ㆍ유(喩:예증)를 허망하게 세우니, 이것을 모양을 가지고 분별하고 집착하여 일으킨 지혜라 한다. 이것을 두 종류의 각지의 모양[覺智相]이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지혜의 모양을 알면 곧 인(人)ㆍ법(法)의 무아(無我)를 통달하여 모양이 없는 지혜[無相智]로써 해행지(解行地:十住ㆍ十行ㆍ十廻向)에서 잘 교묘히 관찰하여 초지(初地)에 들어가 백(百) 삼매를 얻고 수승한 삼매의 힘으로 백 부처님과 백 보살을 뵙고, 전제(前際:과거)와 후제(後際:미래) 각각 백겁의 일을 알며, 광명이 백 부처님 세계를 밝게 비추어 최상의 지에 잘 오르는 모양[上上地相]을 깨달아 안다. " 고 했다. 

 

연기작용에 대한 실체와 살상에 대한 기초적인 논리를 세워 원만한 이해 즉 <원각>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제법실상을 바로 알 때 바른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혜를 더욱 선명하게 설법한 것이 <금강경>의 무주상보리의 법을 설하고, 법계 연기작용성을 화엄의 52단계의 깨달음의 과정과 화엄법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화엄경>에서 설법하고 있다. 보살 마하살은 아라한의 과정에서 머물지 말고 보살의 실천으로 일승부처로 살아가는 것을 섧버하는 것이 <법화경>의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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