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37. 우리말 반야심경<본문>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1

통융 2022. 12. 5. 12:00

 

37. 우리말 반야심경<본문>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1

 

범어 : न दुःखसमुदयनिरोधमार्गा न ज्ञानं न प्राप्ततस्मादप्राप्तिनः

na duḥkha-samudaya-nirodha-mārgā na jñānaṃ na prāptiḥ tasmād aprāptitvād

너 두흐카사무다야-나로디마-르가 너 자나-남 너 프라띠-히 타스마드 아프라프티트바드

 

영어 : there is no suffering, no gathering, no annihilation and no path,

no cognition, no attainment as nothing is attained,

 

한문 :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한글 :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우리말 :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으며

 

순우리말 : 괴로움이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법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느니라.

 

 

() 고집멸도(苦集滅道)4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가 없으며

 

이러한 진리의 앎인 지혜도 역시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 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모든 작용이

()하여 내가 무아(無我)임을 확실히 안다면

 

내가 없으니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으니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원리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알고 수행을 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그 방법이 초기불교에서는 10선법과 팔정도(八正道),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과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등이 있고

 

대승불교에서는 보리도의 깨달음으로

4섭법, 6바라밀, 반야의 지혜를 닦는 선()법 등이 있다

 

물론 이러한 수행 방법 모두가 시대와 환경

혹은 수행자 각자의 근기에 따른 시절 인연법이 다를 뿐,

 

근본 목적은 연기작용인 불성을 깨달아 

스스로 무주 무상 보리의 도에 이르는 중도의 삶에 있다.

 

즉 고정된 실상이 본래 없고, 머물되 머물지 않으며

모두 함께 서로서로 잇대어 조건 없이 나눔하는 진리가 반야이다.

 

이러한 반야의 진리가 무고집멸도이며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는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이다.

 

선불교는 문답을 통한 한 소식으로

무고집멸도를 깨닫는 방법을 경험한다.

 

선종 종조인 달마대사와 양무재 그리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신광이라는 수행자와의 일화를 들어보자.

 

남인도 향지국 왕자 출신인 달마대사는

양나라 무재의 초대를 받고 만나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가 있습니까?'라고 무재가 물으니

달마대사가 '있는 그대로인데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한다.

 

이에 무재가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니

'나도 모르요'(不識). 라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의 대화를 남기고

 

숭산 소림굴에서 9년 면벽을 하던 중

신광이라는 수행자가 찾아와 제자가 되길 원했다.

 

달마대사는 벽관 바라밀을 하고 앉아 허락하지 않자,

신광이 자신의 팔 하나를 잘라 뜻을 보인다.

 

그때 서야 달마대사가 신광에게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지 질문을 하라고 한다.

 

신광이 "제 마음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이에 대사가 "그대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하게 해 주겠다."

 

신광이 "그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그러면 이미 나는 그대를 안심시켜 주었느니라.”

 

신광은 그렇게 마음에 분별 집착으로 괴롭던 마음들이

한순간에 본래 공한 것임을 깨달아 혜가라는 제자가 된다.

 

선불교가 시작되는 대표적인 안심법문이다.

반야 지혜의 진리를 그대로 보여 주는 한 소식들이다.

 

모든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연기 작용성이기에

있다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무아

 

이것을 조견(照見)이라 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했다.

 

우리가 늘 외우고 있는 천수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忘)

 

(무명)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을 따라 일어나고

마음이 만약 멸하면 죄 역시 다하네.

 

죄망심멸양구공(罪忘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謂眞懺悔)

 

죄가 다하고 마음이 멸하여 양쪽이 다 공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진정한 참회(무아)라 하네.

 

즉 죄를 없앤다고 해서 무엇이 있는 것을 비워 낸다든지

지워버려서 없애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일어난 행동과 말의 작용성은

시위를 떠났기에 지울 수도 버릴 수도 없다.

 

다만 그 행동과 말에 다시는 집착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것이 멸()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화살경>에서

'성스러운 사람은 하나의 화살로 인한 괴로움만 겪을 뿐,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

괴롭거나 즐겁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도 매이지 않고 그것을 느낀다.'고 했다.

 

조견 오온 개공도하면 일체가 고액인

아뇩다라삼약삼보리가 된다는 말이다.

 

<금강경>오온에도 머물지 말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한다.’라는 실지실견(悉知悉見)과 같은 설명이다.

 

이 사실만 바르게 깨달으면 모두가 공함을 안다고 했다.

그대로 보면 볼 뿐, 들으면 들을 뿐, 하면 할 뿐으로

 

설탕이 달면 달다고 알고, 소금은 짜면 짜다고

있는 그대로 알면 된다.

 

이것이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