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35. 우리말 반야심경 <본문>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통융 2022. 11. 6. 10:55

35. 우리말 반야심경 <본문>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범어 : न चक्षुःश्रोत्रघ्राणजिह्वाकायमनांसी । न रूपशब्दगंधरसस्प्रष्टव्यधर्माः । न चक्षुर्धातुर्यावन्न मनोविज्ञानधातुः ।

na cakṣuḥ śrotr-aghrāṇa jihvā kāya manāṃsī na rūpa śabda gaṃdha rasa spraṣṭavya dharmāḥ Na caksur-dhatu, yavat na manovijnanam-dhatu

너 착슛-슈로트라-그라나-지흐와-카야-마낭시 너 루파-샵다-감다하 라사-스프라쉬타뱌-다르맛 너 착슈르-다투르 야완-너 마노-위즌냐나-다툿

영어 : no eye, ear, nose, tongue, body, mind, no form, sound, smell, taste, touch, knowledge, no realm of sightuntil we arrive to: no realm of thought,

한문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  無意識界

한글 :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우리말 :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끼자지도 없고

순우리말 :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느끼는 생각들이

없고, 있다거나 안다거나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몸과 마음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도()

무아(無我)임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내용이다.

 

즉 우리 몸과 마음은 6()6()이 합쳐서 12처(處)라 하고

6()을 더한 18계(界)를 통해 몸과 마음이 행동한다고 믿는다.

 

그중에서 6()은 몸의 근본 뿌리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 , , , 뜻이고

 

6()계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과 생각하는 것이다.

 

6()6가지 감각의 인식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으로 이것이 마음의 근본 6식이 된다.

 

즉 몸의 감각기관인 6(六根)이 밖의 경계인 6(六境)을 통해

6식(六識)으로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12처와 18계가 없다고 할까?

 

우리는 몸과 마음인 눈, , , , , 뜻인

6(六根)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할까?

 

그리고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빛으로 나투는 색깔이 있고, 소리, ,

, 감촉의 대상인 6경(六境)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6식(六識)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할까?

 

오온개공도인 몸과 마음이 모두가 공하기 때문이라고,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라고 수 없이 설명한다.

 

모든 제법(諸法)의 현상은 나타나 있는 것이

연기작용으로 찰나 생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서로서로 연결(實相)되어 작용하기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다시말해 모든 존재는 조건에 따라 나타나고 멸하여 공하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어 무(無)라는 말이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6근과 6경이 공성(空性)이며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모두가 가상()의 실체인 허상(虛像)이라는 것이다.

 

즉 공의 세계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의 대상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감각적 경계 대상 의식도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지식으로 이해하고 알 뿐,

실제의 앎인 공(空)한 깨달음의 체험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결국 공()한 이치를 체험하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반야심경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이해해도 마음 깊이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이치를 스스로 체험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보고 듣고 냄새 맛 감촉과 그러한 것들을

보면 볼 뿐, 들으면 들을 뿐, 냄새 맡을 뿐, 맛볼 뿐, 몸의 감촉을 느낄 뿐

 

이러한 모든 것을 알아차릴 뿐으로  그치면

다시는 분별 업식(業識)인 망상이 생기지 않는 공함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눈()의 경계()를 가지고 실제를 체험해 보자.

 

내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인다.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본 손가락은 찰나에 나타났는가 하면 사라지는 공한 이치라

그때 본 손가락은 이미 지나가 버려서 무안(無眼)이고 무색(無色)이 됩니.

 

이 답은 논리나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공한 실제 즉 깨어 있는 공함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공()의 실체는 문자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나 설명은 단지 참 진리를 알아차리게 하고

이해를 시키는 방편과 수단일 뿐이다.

 

부처님이 강을 건너는 배를 비유로 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설명하듯이....

 

진리는 늘 지금 여기서 연기작용하는 찰나일 뿐이다.

오직 지금은 늘 지금 매 순간순간(念念相續)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행하되 행함이 없이 6근과 6경이 늘 작용하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무상심심 미묘법이 된다.

 

그래서 내가 손가락을 들어 보인 것은

나 스스로 공함을 체험하여 보인 것이다.

 

그대도 이 공함을 직접 알아차려 보라고 질문을 한 것이다.

지식이나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이렇듯 만약 그대가 공함을 직접 체험하여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인다면

 

무안이 무색의  실제를 깨달은 것이니

더 이상 덧말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무이비설신의 무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도 그와 같다.

 

부처님이 <바히야경>에서 18계에 대한 설법을 살펴보자.

나무 옷을 입은 다루찌아 바히야가 부처님에게 간청했다.

 

붓다시여, 저는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제발 저에게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탁발을 하고 있던 붓다가 선 채로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라고 하시면서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공부지어야 한다.

 

네가 어떤 것을 볼 때 보고 있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어떤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는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분명히 보고, 듣고, 네가 어떤 냄새를 맡을 때에,

혹은 어떤 음식을 맛볼 때, 무엇을 만질 때

 

또 네가 어떠한 것을 생각할 때에도 너는 항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엔 그대가 같이하지 않는다.

거기엔 그대가 없다.

 

그것들이 다 마음의 대상일 뿐임을 알고, 거기에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말며

집착이나 싫어함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아라한과를 얻는 것은 법문을 듣는 횟수와 관계가 없느니라.

아주 짧은 단 한 차례의 법문일지라도 듣는 이에게 참으로 유익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라.

 

고타마 붓다가 더 이해하기 쉽게 비구들에게 게송을 읊었다.

 

열반을 이루는 것과 관련 없는

일천 편의 의미 없는 게송을 듣기보다는

 

단 한 편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는 게송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