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4, 우리말 반야심경 - 선행학습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이해1

통융 2022. 3. 17. 11:32

4, 우리말 반야심경

 

1. 연기법에 대한 선행학습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 모든 존재는 닮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혜(智慧)이며

모든 존재의 모습은 다르지만,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연민과 자비(慈悲)의 실천이 있게 된다.

 

연기를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화(造化)와 균형(均衡)인 평화(平和)와 나눔으로 만든 세상이다.

 

그것을 스스로 그러함으로 자연(自然)이라 하며

순리에 따라 흐르는 것이기에 연기(緣起)라 한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바로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화평하고 모두가 스스로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웃에 잇대어 살아가듯

내 삶은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온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의 전염병도

우리 스스로가 연기의 질서를 알지 못한 무지(無智)에서 나타난 결과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우리인데

이기적 자아(自我)가 나와 너, 피부의 색깔, 이념, 국가, 나아가 인간과 동물 등으로 나누고

 

탐욕과 분노로 적대시하고 싸우고 무시하며 테러하는

작금의 세상이 병들어 만든 선물이다.

 

괴로움을 벗어나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자유롭게 잘 살자며 만든 종교와 신앙은 어떠한가.

사회의 이기(利己)와 배타(排他)를 꾸짖고 순화(順和)하며 생명존중을 실천해야 할 종교집단이 오히려 집단이기와 독선적 행동으로 지구촌을 병들게 하고 있지 않은가.

 

내 신앙 너 종교를 따지며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나와 다른 종교를 폄하(貶下)하고 시기(猜忌)하며

 

전쟁을 일으켜 살생과 테러로 원한과 복수심에 슬픔과 괴로움은 더하고

자유는커녕 억압과 세뇌로 더욱 구속되어 인격을 유린당하고 있지 않은가.

 

인류 역사 속에 일어난 수많은 종교 전쟁들이 이를 증언하고 있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반복되는 집단이기로 수 없는 이웃이 억압받고 고통으로 죽어간다.

 

또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성을 내세워 모든 자연을 파괴하고

힘없는 동물들을 먹잇감으로 도륙하여 포식하는 잔인함의 막행막식은 어떠한가.

 

이 모든 자업자득이 만든 원인()의 조건들로 인해 연기의 질서가 파괴되고

환경이 병들어() 오늘 내가 쓰고 있는 마스크 지옥 속에 괴로움을 겪는 결과()가 아닐까.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일은 누구의 문제로 탓할 것이 아닌 나의 문제다.

이것이 연기법의 법칙이고 이런 연기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한 안타까움이다.

 

자연환경을 살리는 것이 지구별을 살리는 것이듯

이웃을 살리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나 스스로 바른 지혜인 연기법을 알아차리고 있는지.

 

나는 자아(自我=我相)에 도취해 있지 않고 무아(無我)의 지혜로 살고 있는지.

늘 지금 깨어서 점검하고 살펴야 한다.

 

내 안에서 작으나마 깨달음(自覺)으로 시작해야 한다.

나 스스로 안다고 하는 지식과 알음알이를 내려놓을 줄 알고

 

고정화된 내 생활 습관과 관념들을 알아차려

내 삶에 질서가 바꿔야 한다.

 

한 생각에 생각을 알아차리고

한 말과 말을 알아차리고

 

한 행동과 행동을 알아차려야 한다.

먼 저 내가 변해야 내 이웃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나아가 세상이 우주 전체가 바뀌게 된다.

 

밤길에 등불을 들고 갈 때처럼 등불은 가장 먼저 나에게 어두운 길을 밝게 안내하고

그 옆사람에게 더 나아가 멀리 있는 모두에게 등불이 길을 안내하는 이치다.

 

천 년 동안 어둠에 싸여 있던 동굴도 등불을 켜는 한순간에

모든 어둠은 사라지고 동굴이 훤히 보이듯

 

나도 오랜 세월 천년 동굴의 어둠처럼 무명(無明) 업장(業障)인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했는데

연기법의 진리인 반야의 지혜 등불을 켜는 순간 모든 무명 업장이 사라지고 밝은 안목과 바른 견해와 자애심으로 즐거움이 가득하게 된다.

 

지금 내가 일어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반야의 지혜를 밝히는 것이고

연기법을 100%로 실행하는 것이다.

 

연기(인연=因緣生起)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조건()과 작용()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

그 결과의 인연(緣起作用)이 다 하면 없어진다(滅).  이것이 12연기법의 진리이.

 

연기작용은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나누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한다면 연기법을 공부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연기법인 진리의 실체(實體), 진리의 실상(實相), 진리의 실용(實用)으로

간략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해 본다.

 

실체(實體)는 연기 작용성으로 공성(空性)으로 설명하며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실상(實相)은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으로 제법가상(諸法假相)이며

실용(實用)은 실체와 실상이 나타나 쓰이는 실제(實際)인 중도(中道)를 말한다.

 

()는 진리의 본 성품인 공()의 상태로 무처시(無處時)인 무주(無住)의 시간성이고

()은 진리의 나타나 보이는 가상(假相)은 상의성(相依性)으로 무상(無常)의 공간성이다.

()은 중도(中道)는 여래의 화현을 있는 그대로 쓰는 보리(菩提)의 평상심(平常心)으로 설명한다.

 

이 셋의 체상용을 쉽게 설명하면

모든 존재는 연기법으로 조건에 의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작용하여 나타나지만

()인 무주(無住)는 한순간도 머묾이 없다는 것이며

()인 무상(無常)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늘 변한다는 말이다.

()인 보리(菩提)는 이러한 머물지 않는 시공간을 바로 알아차리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 동체대비의 나눔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셋을 설명한 용수보살이나 천태지의 <중론>, <삼제>, 대승기신론의<3> 등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자.

실체(實體)는 체대(體大)로 연기 작용성으로 공성(空性)이며 공()이다.

실상(實相)은 상대(相大)로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은 모두가 거짓인 가() 이다.

실용(實用)은 용대(用大)로 실체와 실상이 나타나 쓰이는 실제(實際)인 중(中道)이다.

 

이 셋은 각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체상용은 동시에 작용하는 실제이다.

 

현수법장스님의 금사자상을 통해 살펴보자.

금으로 만든 사자상에서 금은 체(體)이고 진짜가 아닌 사자상은 상(相)이고  장식용으로 쓰는 것은 용(用)이다.

 

옷은 실로 짠 것인데

실은 체이고 내복, 코트, 드레스 등은 이름으로 상이고 그것을 입고 사용하는 것은 용이다.

 

연기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을 반야의 지혜로 알아차리고 쓰는 삶이

부처의 삶이라고 하고 깨달은 삶이고 열반, 대자유의 삶이라 한다.

 

즉 불교의 대의가 이 연기작용의 진리(般若)를 바르게 깨닫고 쓰는 삶이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離苦得樂)

 

함께 이웃과 나눔 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게 된다(慈悲喜捨).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고 쓰는 삶이 반야(般若)의 지혜인데 반야심경의 핵심 키이다.

 

다음은 반야에 대하여 알아본다.

 

 

연기작용은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나누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한다면 연기법을 공부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연기법인 진리의 실체(實體), 진리의 실상(實相), 진리의 실용(實用)으로

간략하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해 본다.

 

실체(實體)는 연기 작용성으로 공성(空性)으로 설명하며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실상(實相)은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으로 제법가상(諸法假相)이며

실용(實用)은 실체와 실상이 나타나 쓰이는 실제(實際)인 중도(中道)를 말한다.

 

()는 진리의 본 성품인 공()의 상태로 무처시(無處時)인 무주(無住)의 시간성이고

()은 진리의 나타나 보이는 가상(假相)은 상의성(相依性)으로 무상(無常)의 공간성이다.

()은 중도(中道)는 여래의 화현을 있는 그대로 쓰는 보리(菩提)의 평상심(平常心)으로 설명한다.

 

이 셋의 체상용을 쉽게 설명하면

모든 존재는 연기법으로 조건에 의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작용하여 나타나지만

()인 무주(無住)는 한순간도 머묾이 없다는 것이며

()인 무상(無常)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늘 변한다는 말이다.

()인 보리(菩提)는 이러한 머물지 않는 시공간을 바로 알아차리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로 동체대비의 나눔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셋을 설명한 용수보살이나 천태지의 <중론>, <삼제>, 대승기신론의<3> 등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자.

실체(實體)는 체대(體大)로 연기 작용성으로 공성(空性)이며 공()이다.

실상(實相)은 상대(相大)로 연기작용으로 나타난 현상(現象)은 모두가 거짓인 가() 이다.

실용(實用)은 용대(用大)로 실체와 실상이 나타나 쓰이는 실제(實際)인 중(中道)이다.

 

연기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을 반야의 지혜로 알아차리고 쓰는 삶이

부처의 삶이라고 하고 깨달은 삶이고 열반, 대자유의 삶이라 한다.

 

즉 불교의 대의가 이 연기작용의 진리(般若)를 바르게 깨닫고 쓰는 삶이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고(離苦得樂)

 

함께 이웃과 나눔 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게 된다(慈悲喜捨).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고 쓰는 삶이 반야(般若)의 지혜인데 반야심경의 핵심 키이다.

 

다음은 반야에 대하여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