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행복한 자비행선-명상

함께 행복한 자비행선(慈悲行禪) -2부-

통융 2019. 3. 2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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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

1) 명상(瞑想)에 대한 이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모두가 행복할 권리와 자유를 갖는다.

특히 인간이라면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고 자유로운 삶의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들의 목표요, 삶의 목적일 수 있다.

근래에 웰빙(well-being)과 더불어 웰다잉(well-dying)이란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그것은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죽는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문제가 가장 큰 화두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을 수 있을까?

물질적인 풍요와 신체적인 건강, 나와 인연된 가족과 이웃들과의 평화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인 행복이면 최고의 인생이라고 생각들 한다.

이렇게 완벽한 삶은 없다. 설사 외부적인 만족이나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각자의 정신 혹은 마음들이 완전한 행복함으로 영원할 수 있을까하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나면 마음은 끝없는 탐욕과 욕망, 게으름이나 어리석음으로 절대 만족, 절대의 행복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알아야한다는 화두가 대두 된다.

그래서 이러한 각자의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무엇인지, 왜 생기는지, 어떻게 그 마음들을 다스리는지 등의 다양한 종교, 철학, 마음공부가 있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부각되고 있는 마음수행은 나를 찾아가는 최고의 수행으로 심리치료 정신치료 등 다양한 수행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고 특히 명상(瞑想 med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이 있는데 숭산스님의 제자인 매사추세츠 대학교 의과대학의 존 카밧 진 교수(en:Jon Kabat-Zinn)에 의해서 개발된 MBSR'마음챙김을 기반한 스트레스 감소(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MBSR)' 프로그램이 전 세계 700곳이 넘는 의료기관에서 우울증, 심혈관계 질환 등 만성질병치료에 활용된다.

틱낫한 스님의 프랑스 플럼빌리지(plumvillag)의 마음명상공동체, 미얀마의 마하시 명상센터(Mahasi Sasana Yeiktha), 찬매 명상센터 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er),영국의 FWBO센터, 독일의 붓다하우스 등 다양한 명상수행과 공동수행 힐링 센터들이 있다.

이러한 명상의 발달과 수행방법 특히 불교 수행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그리고 선불교 수행의 꽃이라 하는 간화선(화두) 첨선수행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함께 행복한 자비행선(慈悲行禪) <Happy Together Mercy Meditation>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실참하는 수행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구성했다.

 

명상(瞑想 meditation)이란?

 

명상은 인류이래로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다스리고 몰입시켜 내면의 자아를 확립하거나 종교적 수행을 위해 몸과 정신을 집중하는 수행 과정 등을 일컫는 말이다.

즉 자신의 내면을 살핀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며 나아가 내적 각성을 통해 존재의 근원에 다가서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여 '참된 나'를 깨달아 무명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참된 나를 바로 알아차림으로 자의식이 진화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주고 자발적인 사랑과 기쁨을 만들어준다.

또한 자신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를 돕고 자기통제를 통해 집중력과 자제력이 강화된다. 인지 능력도 향상되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 객관화되어 몸과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고 감정 조절과 긍정적 에너지가 생성되어 두려움, 공포, 압박감 등이 해소된다.

육체적인 효과도 나타나는데 기혈 순환 촉진과 맥박 수 조절, 뇌파안정과 불안 지수 감소,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향상되고 감정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정하는 능력까지 만들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래서 명상은 복잡한 사회구조와 과학문명이 발달되면 될수록 인종과 국가 신앙과 종교의 차원을 떠나서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유익하게 활용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 본다.

개인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도 명상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국민들의 정신건강과 행복지수를 끌어올리고 사회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 의무적으로 수행교육을 받도록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명상이 요가, 참선, 기공, 도가수행, 밀교수행(기도, 주력, 사경), 현대의 생활명상, 걷기명상, 아바타명상, 사마타, 위빠사나 등 다양한 방법과 형태의 명상 프로그램과 수련법들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명상수행의 종류

요가

심사(深思)묵상(默想)에 의해 마음의 통일을 구하는 방법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의 입장에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의 자유를 얻으려는 고행(苦行)사상과 결부되어 특이하게 발전하였다.

인도에서 발생한 요가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요즘은 명상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본래 요가는 신과일 합일, 심신의 합일, 마음의 집중, 마음 작용의 소멸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요즘은 건강과 다이어트, 정신 집중을 가져오는 효과가 부각되어 한국에서도 대중화되었다.

 

기독교의 메디테이션(meditation)

주로 '묵상'이라 번역되는데, 인도나 도() 계통에서 말하는 '명상'과는 다른 의미이다.

성서에 나오는 구절들을 속으로 '음미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도 원래는 '관상의 경지를 추구하는 기도'라는 뜻이지, 방법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흰두교의 만트라명상

성스러운 소리인 만트라(주문)을 끊임없이 외게 된다. 주문도 일종의 명상의 방법이다.

이슬람과 수피즘 명상

<꾸란>에 하느님이 우리의 핏줄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운분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하느님 안으로의 몰입체험을 강조한다.

 

 

묵상(黙想)과 관상(觀想)

카톨릭과 연관있는 명상이다.

묵상은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나 상상으로 주님과 친교를 나누며 자신을 알아가는 기도이며 관상은 하느님의 모든 것과 하느님의 본성을 거의 그대로 내제적인 친교로 바라보고 사랑하고 인식하는 체험이다.

 

밀교수행

밀교는 비밀불교(秘密佛敎)’의 줄인 말로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불·보살의 신체적 모습과 진언과 다라니, 또는 부처님의 삼매 등에 대해 밀교의 교리와 수행체계의 범주에 입각해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밀교의 수행은 불상이나 만다라를 관하면서, 수인(手印)을 결하고, 진언을 외움으로써 수행자의 의식을 부처님의 지혜로 상승시키는 것에 근본 목적이 있다. 염불,사경, 주문 등의 모든 수행이 이에 포함된다.

밀교에 대해 체계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이들은 밀교를 주술이나, 마술, 비밀한 의식을 행하는 종교로 생각하거나, 좌도밀교(左道密敎) 힌두 딴뜨리즘(Hindu-tantrism)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사마타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인데 이것을'samatha'라고하고, 한문으로 번역하여 마음을 그치는 것'()',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 samādhi)이다.

 

위빠사나

집중된 마음을 가지고 법(=무상,,무아)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것을 'vipassana' 라 하고 '()', 유위제법[]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 pannā)이다.

 

불교의 선정(禪定)은 이 둘을 함께 수행하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지관(止觀)'이라 한다.

'를 통해 안정된 것을''이라하고 ''을 통해서 지혜가 생기는 것을 ''라고 한다.

 

 

()

(,dhyana)은 원시불교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삼학의 하나로서 중요시되었다.

깨달음을 수행하는 것이다. 선문답과 화두 공안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좌선수행법도 함께 전래되었으며, 북방불교에서 발달한 선불교로 선종의 발흥과 더불어 깨달음에 달마(達磨)대사를 초조로 조사선, 묵조선, 간화선인 화두선 등으로 변해 왔다.

선불교' 혹은 '선종'으로 불리기도 하는 선()이란 한국·중국·일본에서 수행되는 불교 종파로, 불교의 엄격한 도덕적 신조와 계율보다는 참선(명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상의 간략하게 명상의 종류에 대해서 이해를 했다.

그러면 불교명상 수행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 불교 명상과 수행

 

1) 불교 명상과 수행

 

불교의 명상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했던 수행 방법인 초기불교 수행방법과 부처님 입멸 후 상좌부 불교의 론서인 청정도론에서 근거하고 있는 남방불교 수행방법 그리고 대승불교라고 하는 선불교의 수행방법 티벳과 일부 지역에 전승된 금강불교의 수행방법인 밀교수행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초기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사마타(samatha)’위빳사나(vipassanā)’이다. 상좌부 불교(초기불교)의 수행 체계의 술어로 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와 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

사마타를 마음(citta)과 마음의 해탈(심해탈, ceto-vimutti) 즉 삼매[, samādhi]와 연결 짓고, 위빳사나를 통찰지(pannā, 반야)와 통찰지를 통한 해탈(혜해탈, pannā-vimutti) 즉 통찰지[, pannā]와 연결 짓는다.

그리고 삼매는 욕망을 극복하는 수행이고, 통찰지는 무명을 극복하는 수행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삼매경 등 세 개의 경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답변을 명확하게 제공하고 있다. 이 세 개의 경들에 나타나는 "마음의 사마타""통찰지라 불리는 법들에 대한 위빳사나"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사마타는 마음의 개발을 뜻하는 삼매(三昧)와 동의어이고, 위빳사나는 통찰지,선정(禪定)과 동의어이다.

 

이처럼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 pann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마타(samatha)-()수행

수행의 대상은 관념(). 대상과 하나가 되는 깊은 집중.

그래서 얻는 것이 마음의 안정. 심청정(心淸淨). 수행의 과보는 색계(色界)천상이나 무색계(無色界) 천상으로 윤회(輪廻)한다.

 

수행은 멈춤(. 선정) 수행으로 무엇을 멈추는가하면, 감각적 쾌락, 악의,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이라는 다섯 장애에 휩쓸리는 것을 멈추고 마음에 번뇌가 없는 심청정을 얻는 수행이다.

일상생활이나 수행 중에 현재를 놓치게 하고 마음이 과거 미래로 달리면서 우리를 번뇌에 휩쓸리게 하는 것이 다섯 가지 장애다.

이들이 일어나면 우리는 번뇌에 휘둘리고 매 순간 여섯 감각기관이 촉하는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내 자신 속의 탐진치(貪嗔痴) 마음의 작용이다.

 

위빠사나(vipassanā)-()수행

수행의 대상은 현재의 오온(五蘊).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는 찰나 집중(集中). 그래서 얻는 것이 통찰(通察) 지혜(知慧).

수행의 과보는 윤회를 벗어나는 완전한 열반(涅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관(. 통찰. 지혜)수행이다. 무엇을 관하는가 하면 현재의 몸과 마음(오온=색수상행식)이다. 수행자가 현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하여 어떤 번뇌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여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얻는 해탈은 모든 번뇌(탐진치)를 지혜로 해탈한다 해서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두 수행을 간략하게 비교해 보면>

 

*대상 - 개념과 법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중요한 것은 대상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pannatti)이고, 위빠사나의 대상은 법(dhamma)이다. 이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잣대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집중과 통찰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대한 집중이고, 위빠사나는 대상()에 대한 통찰이다.

사마타(samatha)는 마음이 표상에 집중되어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그치고() 가라앉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지()로 옮겼다.

 

위빠사나(vipassan)분리해서 보는 것(passana)’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대상을 나타난 모양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무상(無常, 변하여 고정됨이 없슴)하고, (, 괴로움)이고, 무아(無我)인 특성을 여실지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관()으로 옮겼다.

이처럼 사마타는 대상(표상)에 집중하는 삼매()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대상()을 무상..무아(無常..無我)로 통찰하는 반야(통찰지. ) 수행이다.

 

*닮은 표상과 삼특상

사마타의 키워드는 닮은 표상이고,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무상..무아이다.

청정도론은 사마타의 대상을 불, , , 자비희사, 죽음에 대한 명상, 10가지 까씨나(원판), 몸의 부정(不淨)함 등등으로 40가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명상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이런 대상 가운데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만들고, 이것이 마침내 닮은 표상(相似影像. patibhaga-nimitta)으로 승화되어 흩어지지 않고 오롯하게 되어, 매순간의 마음들이 이 닮은 표상에 고도로 집중된 상태를 사마타라 한다.

위빠사나는 마음().마음부수(心所).물질()로 구분되는 71가지 구경법들 가운데 하나를 통찰하는 수행인데, 이처럼 법을 통찰해 들어가면 제법의 무상, , 무아를 철견(徹見)하게 된다.

 

*일시적인 해탈과 해탈

사마타의 고요함만으로는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는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 탐..치가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마타에서 나올 때는(出定) 다시 탐..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경에서는 일시적인 해탈(samaya-vimutta, 앙굿따라 니까야 [일시적 해탈 경]1(A5:149) )이라 한다.

 

사마타 수행법에는 염불, 자애관, 호흡관찰, 몸관찰, 느낌관찰 등

불교 외에도 다양한 명상 수련 단체에서도 많은 수행법들이 대부분 사마타 수행을 가르친다.

우주와 내가 하나 되기, 자연과 내가 하나 되기, 너와 내가 하나 되기, 여러 가지 심상수련 등등....이 모든 것이 사마타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마타명상 수행으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마음은 어떻게 왜 일어납니까?

무엇이 일으키며 어떻게 소멸 됩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대답을 할 수 없다.

마음이 일으키는 주체, 마음을 일어나는 원리, 마음의 뿌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조건이 생기면 마음은 번뇌로 가득해진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을 일으키는 주체, 일어나는 원리, 소멸하는 원리인 즉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의 힘으로 이들의 뿌리를 멸절시켜야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며,

그래야 해탈.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무상..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한다.

 

*지관겸수, 지관쌍수(止觀兼修, 止觀雙修)

이처럼 위빠사나의 지혜(통찰지)가 없이는 해탈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요함과 고도의 집중이라는 사마타의 힘이 아니면 위빠사나의 지혜가 생기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술어는 거의 대부분 함께 나타나며 부처님께서는 이 둘을 부지런히 닦을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를 강조하였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병행 수행 방법

사마타를 먼저 닦을 것인가, 위빠사나를 먼저 닦을 것인가는 결국 인연 닿는 스승의 지도방법과 수행자 자신의 관심과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마타를 반드시 먼저 닦아야 한다거나 ,위빠사나만을 닦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고, 이런 견해를 고집하면 진정한 수행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처음에는 오온의 고유한 특성과 조건적 특성을 알고, 더욱 발전하여 오온의 무상, , 무아를 체험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얻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음을 참고해 본다.

 

먼저 사마타를 닦고 색계 선정상태에서 위빠사나로 넘어와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가 마지막에 깊은 집중으로 사마타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

먼저 사마타를 닦고, 위빠사나를 닦고, 다시 그 다음 단계의 사마타를 닦고, 그 다음 단계의 위빠사나를 닦는 방법으로, 두 수행법을 병행하여 열반에 이르는 방법.

처음부터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순수 위빠사나라고 한다.

의 경우는 사마타 수행으로 마음에 다섯 장애가 없는 사마디(집중. 선정) 상태에서는 현재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쉽고 그래서 오온의 무상, , 무아를 통찰할 수 있다.

이것은 사마타 수행을 먼저 닦고 위빠사나 수행으로 넘어와 수행대상과 집중방법을 달리하여 그 결과로 정()에서 혜()를 얻는 것이다. 이런 수행방법으로 해탈에 이르신 분은 심해탈과 혜해탈을 다 구족하신 분으로 양면 해탈이라고 한다.

 

의 수행법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사마타 수행단계가 없으므로 처음 수행을 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섯 장애들과 부딪친다. 그러면 이 다섯 장애를 다 알아차릴 대상인 법으로 받아들여 반응하지 않고 그들의 성품을 본다. 그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가 알아차림이라는 조건에 의해 소멸한다는 법의 성질을 본다.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이나 처음에는 모두 다섯 장애가 일어나므로 그들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단 극복을 하면 선정을 얻거나, 지혜를 얻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마하시(호두마을) 방법은 사마타 수행 없이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하는 순수 위빠사나 방법으로 지도한다.

이 방법이 현대 생활에 잘 접목할 수 있다. 일상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고, 법이며, 생활 속에서 번뇌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키우는 수행법이 번의 순수 위빠사나다.

 

사마타 수행은 일정 수준의 선정력을 얻으려면 오직 자신의 수행 주제에 집중만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출가 수행자들이 많이 할 수 있다.

 

또 사마타 수행으로 얻은 마음의 고요는 일상에서 잘 깨지지만 ,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은 지혜는 일상에서도 그 힘을 발휘하여 번뇌로부터 막아준다.

 

위빠사나의 지혜는 자기가 닦은 만큼의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수행자를 번뇌로부터 보호한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통찰 지혜만이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에까야노막가)이라는 부처님의 대념처경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

 

 

참선() 수행 

()의 발생과 전래

대승불교의 선사상은 불조28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중국사상으로서의 선사상이 형성되어, 현재 일반적으로 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완성되었다. 명상하는 수행방법으로서의 선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後漢時代:25220)로 보이지만, 북위시대(北魏時代:386534)의 달마(達磨)에 의해 전해진 선은 능가경에 의한 이타적·능동적 선이었다.  달마의 사상은 그의 저서인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나타난 바와 같이 벽관(壁觀)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객진(客塵:번뇌)과 작위적 망념(作爲的妄念)이 침입하지 않는 것을 벽에 비유한 것으로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직관(直觀)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계통은 불타의 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이래 28조가 상승되어 달마에 이르렀는데, 중국에 전래되어 달마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선은 중국인의 강한 현실중심주의 위에 지관·여래선 등의 영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른바 행(((()의 생활선(生活禪)으로 전개되었다.  중국선의 근본기치인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이러한 입장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선체험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 개별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중국 선종에서는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가 매우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조사(祖師)의 권위는 어떤 경우 여래(如來) 이상으로 중시되어 조사선(祖師禪)으로 불리기까지 하였으며, 조사의 언어·행동을 금과옥조로 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좌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이것이 정형화(定型化)되어 많은 공안(公案, 또는 話頭)을 낳았는데, 이를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선은 이와 같이 그 원류는 인도이고 인도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꽃은 중국에서 피웠다. 선사상은 중국사상과 접촉하여 송학(宋學)과 같은 철학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예술·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참선(參禪)은 나와 우주의 근원을 통찰하고 나의 참모습(眞面目)을 자각(自覺)하여 참된 주체(=주인공)인 삶을 사는 것이다.

언어로 풀어보면 참선은 참구할 참(), 터 닦을 선()자를 써서 참선(參禪)으로 선()을 참구, 참학, 수행한다는 의미이다.

()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참선(參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은 인도(印度) 말인 범어(梵語)로 하면 디야나(Dhyana)라고 고요함을 의미 한다.

한문으로 음역(音譯)하면 선나(禪那)라 하고, 일본사람들은 '젠나'''를 생략하여 그냥 '(zen)' 이라고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으로 깊이 사유함으로 참선으로 통용된다.

일반적으로 참선(參禪)은 화두를 일념으로 참구하는 것으로 불교의 대표하는 수행법이다.

즉 불교는 법의 진리인 이치를 바르게 알고 수행하여 스스로 깨달음인 자각(自覺)하는 종교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확철한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깨어 있음이다.

지금 여기서 스스로 그러한 생명작용(自然) 이며 삶이다.

 

숨 한 번에 모든 불국정토(佛國淨土)가 거기 있다.

숨이 천지창조이며 생명이며 삶이다.

오직 지금 그대가 살고 있음을 의식하라 !

그 의식의 챙김이 깨어 있으면 그대는 행복할 것이다.

불법은 “darista dharma sukka vihara“ 지금 행복하게 머무는 것이며 ‘Madithaion is art’ 명상은 예술이다라는 틴낫한 스님은 마음챙김의 에너지가 진여(眞如)이며 일심(一心)’이라 했다.

 

참선수행의 목적

법의 진리인 이치(연기법)를 바르게 알고 수행하여 스스로 깨달음으로 생사해탈에 여여(如如)하게 사는 삶이 목적이다.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는 열반(涅槃)의 삶이며 나아가 가족과 이웃 모든 것들과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불교의 핵심 정신인 이고득락(離苦得樂)이며 생사해탈(生死解脫)과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본질이다.

 

우리는 불법의 대의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 어렵게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하며 법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법의 참된 이치를 적확하게 안다면 불법은 너무나 쉽다.

혹자는 세수하다 코만지는 만큼 쉽다고 한다.

하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면 수 십 년을 앉아서 참선을 한다 해도 헛일이다.

또한 불법은 지식이나 뜻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진리가 아니라 불법의 대의를 수행을 통해 바로 깨달음으로 불법과 하나로 계합되는 진리인 것이다.

84천의 방대한 경전이나 삼세제불과 수많은 역대 선지식들도 글과 말을 통해서는 오직 교학(敎學)적인 방편으로 불법의 진리를 설명할 뿐이다.

 

그래서 불법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이며 교외별전(敎外別傳)이며,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고 스스로 수행(修行)을 통해 그 대의를 몰록 깨달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법의 교학(敎學)과 수행(修行)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고 있다.

꿈속에서 살면서도 꿈속임을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이다.

우리는 이러한 꿈에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 깬 것인가?

직접 꿈을 깨보지 않고는 절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즉 깨닫기 전에 깨달은 후의 일을 어떻게 알 것인가!

흔히들 경험 혹은 체험으로 말하는데 사과의 맛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맛을 느낄 수가 없듯이 불법의 대의도 그와 같다.

설령 맛을 직접 봤다고 해도 또한 그 맛을 100% 설명으로 전달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직 스스로들이 각자 체험을 통해 알아차릴 뿐이다.

 

깨달음을 아무리 구구절절이 설명해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불법의 대의를 알 수가 없다. 그렇듯 참선(參禪)수행이란 직접 몸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체험을 통할 때 진정한 깨달음이라 한다.

물론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공부를 하고 선()공부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일대사(一大事) 인연(因緣)에 귀의 하는 일이다.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꿈속에서 살다보니 꿈같이 모르고 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초발심을 내고 깨달음을 증득하여 대 자유인이 되길 바란다.

1840년 중국 복건성(福建省) 허운 스님은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汚染)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성(自性, 자기의 본래 성품)의 참 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이며, 자성이란 곧 여래(부처)의 지혜와 덕상(德相)이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같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無二無別].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 덕상을 증득(證得)하여 곧 부처가 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중생인 것이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내려오면서 어리석게 생사(生死)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汚染)된지 오래이므로, 능히 그 자리에서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실답게 본래 성품[本性]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참선의 선결조건은 바로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망상을 버릴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것으로 “(마음을) 쉬면 곧 깨닫는다”[歇卽菩提]고 하신 이 ’[] 만한 것이 없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한국의 선()한국에 불교의 큰 선맥을 보면 신라의 원효대사에서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에 이어 조선의 사명대사와 근세의 경허스님에서 오늘의 한국 선불교를 꽃 피우고 있다.

선불교는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기로 당시 당나라에서 유학한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대부분 혜능 선사의 제자들에게 선법을 받아왔고 이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들 중에는 가지산문의 개조인 도의(道義)가 혜능 선사의 4세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선사에게 선법을 받았고, 또 도윤(道允)이 남전보원(748~834)을 찾아가 예를 올리자 남전이 탄복하면서 선종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고 탄식했다.

이것은 중국선의 법맥이 우리나라에 선종의 중심지가 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자 이 구산선문을 통칭하여 조계종曹溪宗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도의(道義)선사가 조계종의 종조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중에서 참선수행은 그 핵심을 이룬다.

더구나 불교의 핵심 사상은 원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닌 수행법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선의 사상이나 역사에 대한 책은 많은데 정작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고, 선법문을 하는 분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있는 곳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불법의 교학적인 기본 지식을 습득하면서 참선의 이론과 실제적인 참선을 통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을 알아보자.

 

 

참선 수행 종류와 요건

조사선(祖師禪)-직지인심(直指人心)

조사선과 간화선은 비록 이름은 다르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구조이다. 그래서 조사선과 간화선은 시대적 의미가 부여되어구분된 한갓 이름에 불과하다고 볼수도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는 육조(六祖) 혜능(慧能) 하의 남종계의 선, 즉 남종선(南宗禪)을 말한다. 마조(馬祖)의 즉심시불(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는 조사선의 기본 사상이 되며, 임제(臨濟)에 이르러 조사선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조사선은 일반적으로 중국선(中國禪)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이고 있는데, 조사(祖師)란 선종에서 불()에 대신하는 이상적인 인격자이다.

 

간화선(看話禪),공안선(公案禪) 화두선(話頭禪) 참구적(參究的)

간화선(看話禪) 또는 공안선(公案禪)은 공안(公案)을 공부하고 이를 화두(話頭)로 하여 본성을 구명하려 하는 선()이다. ()이란 본다는 뜻이며, ()는 화두를 말한다. 화두란 '말 보다 앞서 있는 것' 또는 '언어 이전의 소식'이란 뜻이며, 공안이란 '누구든지 성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뜻이다.제행무행경에 이르기를, "부처는 보리도 보지 않고 또한 불법도 보지 않나니,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불도를 이룬다" 하였다.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摩) 이래 중국의 선종은 인도의 선정(禪定)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양식의 수행법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곧바로 자기의 마음으로 향하여 그 본성을 보아 불타를 이룬다"(直指人心見性成佛)는 것이다. 보리달마 이후 오조(五祖) 홍인(弘忍)에 이르기까지는 단일한 계보로 이어왔으나, 이후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과 돈오를 주장하는 혜능(慧能)의 남종선으로 분파되었다.

 

간화선은 남돈선에서 파생한 것이며 남송(南宋) 초기, 임제종(臨濟宗)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묵조선(默照禪화두를 갖지 않은 채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참선법)과 이전의 선행(禪行)에 대한 비판 위에서 간화선을 주창하였다.

 

대혜는 그러한 간화선을 조주(趙州)()’ 자 화두를 통해 가르쳤고, 우리나라는 고려의 지눌(知訥)이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였다.

 

지눌의 사상은 선()과 교()가 복합된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는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을 통하여 간화선사상을 천명하였다. 간화결의론에서 선과 교의 대비를 통해 간화선의 우수함을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라 선의 사상적 맥락이 되고 있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원류를 제시하였다. 지눌은 활구 화두로서, 특히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중요시하였고, 이 무자 화두는 불덩어리 같아 불법의 알음알이와 나쁜 지식을 파하는 연장이라고 하였다.

 

오직 활구를 참구할 때만 깨달음은 보장되어 있다고 본 것이며, 말 가운데 말이 없으면 활구이고, 말 가운데 말이 있으면 사구(死句)라고 규정지었다. , 지눌은 자를 들어 공부하되 간절한 의정(疑情의심)을 끌고 나갈 뿐, 어떤 정식(情識알음알이)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며 사구를 참구하지 말라. 활구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에 빠지면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간화선을 들어 공부하는 길에는 참의문(參意門)과 참구문(參句門)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참다운 공부를 하는 사람은 마땅히 참구문에 의지해야 할 것이나 근기가 하열한 관행자(觀行者)에게는 참의를 거쳐 참구에 들어가라고 가르쳤다. 참의는 화두를 참구함에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며, 참구는 생각을 초월하여 철저히 사무침을 말한다.

지눌의 간화선은 그의 제자 혜심(慧諶)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혜심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 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간화선을 더욱 깊이 있게 펴나갔다. 지눌이 삼문(三門)을 열어 선·교를 융섭하려 한 데 대해 혜심은 오로지 간화선법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간화선은 혜심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혜심은 간화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십종병(十種病)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여 공부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지엄(智儼)은 간화선을 확립시켰다.

 

그 뒤 휴정(休靜)선가귀감에서 간화선을 경절문사상(徑截門思想)과 일치시켰으며, 그러한 맥은 근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경허(鏡虛)와 만공(滿空), 그리고 현재의 선원(禪院)에서도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우리 나라의 선 수행자들은 간화선을 삶과 지혜의 으뜸가는 목표로 삼고 있으며, 간화선을 통한 활구참선이야말로 최상의 근기(根機깨달을 수 있는 능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위없는 대도(大道)로 보고 있다.

()수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깨달음은 수단이며 목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행복 추구이고 생사해탈이다.

묵조선(默照禪) 의지적(意志的)

''은 침묵한 채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좌선(坐禪)하는 것을 뜻하며, ''는 지혜로써 본래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비추어보는 것을 뜻한다. 실상(實相)은 무상의 상()이고, 진심(眞心)은 무심(無心)의 심()이며, 진득(眞得)은 무득(無得)의 득()이고, 진용(眞用)은 무용의 용()이라고 하여, 굳건하게 자리를 정하고 앉아 모든 잡생각을 비워버리는 태도로 침묵한 채 고요히 비추어볼 뿐이며,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을 기약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만 무소득·무소오(無所悟)의 태도로 좌선할 것을 주장했다.

이 선풍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임제종의 대혜 종고 선사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묵조사선(默照邪禪무사선(無事禪고목사회선이라고 폄칭되었다. 이것은 화두가 없이 그냥 앉아서 자기 마음을 비춰보는 것이다. 어떤 문제도 설정하지 않는다. 묵조선을 하는 분들은 대체로 단전주(丹田住), 아랫배에 힘을 두고서 공부를 한다.

 

염불선(念佛禪),,(,,)의 조화적(調和的) 간화선 수행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과의 구분을 해야 한다. 구분 잘못 하면 이것도 혼동되어 버린다. 지금, 어느 큰스님들 말씀도 '염불은 그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는 분도 있다. 따라서 그런 말씀을 들은 분들은 '염불이 무슨 선()이랴' 이렇게 또 말한다.

그런데서 그냥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자성(自性),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요. 우주가 바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이다.

참다운 염불이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한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이다.

따라서 방편적으로 하는 즉,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다'고 확실히 느끼고서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念佛禪)이다. 청화선산의 염불선 사상연구에서 고영섭 교수는 원효와 청화는 시대를 달리 살았지만 발보리심과 십념염불 및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하여 일심 즉 유심의 정토와 안심 즉 순선의 정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수행의 단계적 구분

외도선

대상, 관념, 감정 등 마음에 집착된 수행은 모두가 외도 수행이다.

명상, 요가, 유교, 도교, 뉴에이지, 단전호흡, 이스람수피, 교회명상 등의 목적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함을 추구한다. 어떤 감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마약과도 같다.

이분법적인 만들어진 마음은 언젠가는 변하게 된다.

행복 뒤에는 더 큰 슬픔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일 뿐 마음을 비워내는 수행이 아니다.

 

범부선

일상생활의 집중명상이다. 그림 ,다도, 서예, 음악 취미 등

자신의 마음을 감정이나 내면의 편안감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다.

뭔가를 원하는 수행은 항상 주체나 대상을 만들고 좋고 나쁨의 분별심을 만든다. , 나를 나이라는 이기심난 더욱 강하게 만든다.

 

소승선

무상무아를 증득하여 열반적정이다. 위빠사나 수행 계정혜의 수행을 통한 정적과 소멸인 열반이다.

 

대승선

연기를 통한 육바라밀의 수행이며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최상승선

마음으로 만든 세상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마음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최상승선에는 다음의 세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숭산 스님의 깨달음의 4()>

무여(無如)- 우리의 생노병사는 싣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다. 량구(良久) 하늘 나무나 바위 등 실제 세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무상의 세계> 돌고 돌는 세계로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은 이치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일여(一如)-(). <진리의 세계인 열반의 세계>. 생각을 끊어버리면 하나 되는 본래의 자리가 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이 멸한 자리를 말한다.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생각을 끊으면 마음이 공간처럼 맑고 고요해 진다. 거울처럼 그대로 비친다. 본체인 공의 세계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나와 나 아닌 것이 멸하면 거기에는 거대한 하나가 남는다. 사실 거대한 하나, 남는다는 것도 실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거대한 하나이기에 하나라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누군가는 한 물건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진아 라고도 한다.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본래무일물이다. 얻을 것도 없고 얻은 바도 없다-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다.

 

여여(如如)-(). <진리의 세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들 옷은 노랗고 빨갛고 회색이고 등 관찰 대상이 모두가 진리이다. 한 물건이라 불리는 또는 진아 라고 불리는 그 거대한 하나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말한다. 산의 모습으로, 물의 모습으로, 나무의 모습으로, 새의 모습으로 드러난 세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라만상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오직 일 뿐! . 실상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일체개고(一切皆苦)

 

아뇩다라삼략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무상정득정각)-부처는 무엇인가.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즉여(卽如)-(). 삼라만상은 거대한 기계처럼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삼라만상은 특정 상황 속에서 특정 관계를 맺으며 특정 기능을 다하고 있다. 진리의 올바른 수용이 올바른 삶, 오직 행 할뿐!인 자리, 순간순간 올바른 삶으로 살아가는 것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가자 가자 저 언덕을 넘어 열반의 세계로 가자ᆞ. 대승불교의 육바라밀행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보살의 경지---- 바로 이와 같다. 수용의 세계- 산은 높고 물은 흐른다.

즉여에는 주관적 즉여와 객관적 즉여가 있다.

주체는 함께 하는 것이라면 배고프다고 하면 나도 같이 배고프게 그냥 있는 것은 주체 즉여라면 배고픈 것을 고프지 않게 밥을 주는 행위는 객체즉여 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상대적세계, 마음이 꺼지면 절대적세계, 마음이 그대로 비추면 완전한세계 불교는 나 자신을 찾아서 옳은 길과 옳은 진리와 옳은 생활을 갖자는 것이다.

나 자신을 찾으려면 상대적세계, 절대적세계, 완전한세계를 깨달아서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3, 명상과 수행 방법

1) 간화선(看話禪) 수행

간화선은 선정수행에서 공안 혹은 화두를 간()한다 본다는 뜻이다. 각자가 의심나는 화두를 골똘히 참구하면 몰록 내 안에 본성이 여실히 들어난다는 수행방법이다. 수행방법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끽반(著衣喫飯)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대인접어(對人接語) 사람과 대화할 때도 늘 깨어서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하는 이것(화두)이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법이다.

 

화두(話頭)?

불교에서 참선수행자(參禪修行者)가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참구(參究참선하여 진리를 찾음)하는 문제이다.

공안(公案고칙(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의 ()’는 말이라는 뜻이고, ‘()’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참된 도를 밝힌 말 이전의 서두, 언어 이전의 소식이 화두이며, 언어 이전의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방법을 일러 화두법(話頭法)이라고 한다.

 

공안이라고 할 때의 ()’공중(公衆), 누구든지라는 뜻이고, ‘()’은 방안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대로만 하면 성불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불교 선종(禪宗)의 조사들이 만들어 낸 화두의 종류로는 전등록(傳燈錄)1,701여 종류가 있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즉 시심마(是心磨)로 불리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그러한 의심이 골똘하여 더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때에 스승의 점검이나 사물 대상등이 졸탁동기(卒琢同機)의 효과를 낸다.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동기(卒琢同機)라고 한다.

 

화두(話頭)의 원래 의미는 말머리라는 뜻 이지만, 말과 뜻 이전의 모습이며 온전히 그의 뜻에서 벗어난 자리이다. 즉 화두의 목적은 달에 있는 것이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수단에 있지 않다. 그런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화두이다 보니 그 손가락을 의심하는 것이 화두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화두는 지식이나 생각으로 문제의 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각없는 의심 하나가 의정이 되고 의단이 될 대 화두가 제대로 들렸다고 한다.

이렇듯 화두는 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는 질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받는 것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의문을 선지식에게 물어 그 해결책을 마음으로 받는 것이다.

화두는 참 진리를 깨닫는 도구이다. 깨달음의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다.

 

a, 화두(話頭)참구의 세 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의 모든 법은 연기(緣起)의 이치로 독립된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어 보이더라도 본성은 본래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이 자신의 본성임을 자각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일체중생과 원래 자신과 더불어 하나임을 알기에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화두는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의 무지와 종말 짖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 ?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 덥는다. 말을 해도 틀리고 말 하지 않아도 틀린다. 오직 모를 뿐인데 무엇을 찾으란 말인가?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심이 되면 큰 의정[大疑情]이 생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의단이 되어 몰록 본분사를 타파한다.

 

<호흡과 융합한 화두참선법>

부처님의 수행법-안반수의경 (아나바나사티)- 숨이 들고남을 알아차림

숨 쉬는 호흡명상 법으로 마음을 찾는다.

숨 쉬고 있는가? 자각 하는것 회광반조

숨 쉬고 아는 놈은 뭐꼬? 현재를 안다. 그러면- 밖으로 나갔던 마음을 안으로 집중한다.- 아는 놈을 쫒아가다가 또 다른 아는 놈이 있다.

 

<아잔브람의 과학적 체계의 6단계(멈춤의 여행)>

1,마음관찰-현재이 순간을 알아차림(행주좌와 어묵동정)-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림(내가 성냄,걷는것, 웃을 때,등등 객과적인 관찰을 한다.)- 마음,생각이 일남을 알아차린다, .(음악을 통해 마음 집중을 한다.) 몸 관찰이 된다. 몸 사라짐을 경험한다.

2,호흡관찰이 된다. (사마타 위빠사나동시에) - 호흡하는 놈은 누구인가? (대상이 생기므로 화두가 되지는 않는다. 주인공? 그놈을 아는 놈은 또 뭐꼬? 호흡의 집중도가 있다. 몸이 없어지고 들고나는 숨을 바라본다.

3, 호흡의 전체보기,(스스로 수행의 길을 잡는다. 20~30분 되면 호흡전체가 보인다.),- 스승이 필요 없다. 스스로 수행길을 잡는다.

숨이 온 몸으로 들고남을 관찰한다. 여기에 화두를 싣는다.

4,호흡의 감미로움을 알게된다.

5,마음에 보름달을 보게 돤다, 심월인 리미타(nimitaa= ,감동)

6,선정(자나) 지혜(고집멸도,삼법인,팔정도)와 혜탈을 지향한다. ,5가지의 선정으로 이루어 졌다.

 

좌선(坐禪)이란?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 니라.

 

좌선을 할 때는 그 기초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가 깊을수록 나무가 잘 자라듯이 기본적인 좌선의를 갖추는 것은 꼭 필요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방선원에서는 남종(南宋) 휘종(徽宗)때 자각(慈覺)선사가 지은 좌선의를 규범으로 하여 좌선하고 있다.

아함경 말씀과 천태지관과 백장청규를 토대로 하여 좌선의 전통적인 격식을 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좌선에 들어갈 때의 방법

 

1, 좌복을 펴고 반좌(盤坐)로 편안히 앉은 후에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라. 어깨와 전신의 힘을 뺀다.

 

2, 가급적이면 단전에 모든 의념을 집중하며 숨을 쉬면서 배(단전)가 들고 남을 집중하라.

 

3, 입은 지긋이 다물며 혀끝이 천장에 닫게 한다. (이빨을 너무 세게 깨물면 이빨이 운동하는 상태가 되므로 주의하고, 혀를 입천장(은교혈)에 붙이는 것은 임맥과 독맥이 회통하게 하는 것이다.) 원활한 기혈 순환과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되면 맑고 윤활한 침(玉水)이 입에 가득 하다.

 

4, 숨은 편하게 들숨과 날숨을 쉬되 들이쉬면서 배가 부풀어짐을 의식하고 내 쉬면서도 배가 들어감을 의식하라.(처음에는 집중을 유도하기 위하여 숫자를 세면 좋다.) 숨이 고르게 되면 숨을 옴 몸으로 들이쉬고 내쉰다는 생각을 갖고 호흡을 하게 되면 내 몸이 살아짐을 챙기게 되고 그럴 때 화두를 들숨과 날숨에 실어 놓으면 저절로 화두가 들려지는데 온전히 화두만 남게 된다. 그렇다고 화두를 의식으로 상념하면 안 된다. 그냥 일뿐, 알려 해서도 안 되고 오직 모를 뿐이다.

 

5, 눈은 자연스럽게 뜨며 가급적이면 눈은 5분 이상 감지 말며 (눈은 항상 뜨는 것이 수마(睡魔)를 제거하는 데 필요하다.) 정신 기운이 상쾌하여 눈을 감아도 수마의 침노를 받을 염려가 없는 때에는 혹 감고도 하여 보라. 만일 혼침이 오면 화두를 가볍게 소리 내어 보고 그래도 잠을 참기 어려우면 가볍게 일어나 주위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행선을 한다.

 

6, 정신은 항상 적적(寂寂-고요)한 가운데 성성(惺惺-깨어있음)함을 가지고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는데 머리로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생각은 단전으로 모으고,

 

내 주위에 벽이 막혀 있어서 밖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내 몸이 없다는 생각과 얼굴과 머리도 목 아래로 내려와 없다는 생각으로 오직 들숨과 날숨을 관조하면 화두가 달아나지 않는다.

 

7,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흔히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어 놓는 것도 좋으나 가급적이면 아픔을 참아보라, 그러면 어느 한계를 지나면 몸의 살아짐을 경험하게 되며 집중이 빨라진다. 또한 망념이 생기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고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없어지니 의도적으로 없애려고 하지마라. (내 몸 알아차림)

 

8, 좌선을 하다보면 얼굴과 몸에 개미 기어 다니는 것과 같이 가려움이 생기고 몸 떨림 현상이 나타는데 이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증거이며 몸의 마구니에게 조복을 받는 것이니 긁고 만지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9, 의념이 집중되고 참선이 잘 된다고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구하지 말며, 혹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마음에 두지 말고 오직 화두에 집중하라.

 

이상과 같이, 바른 좌선으로 참구하게 되면 의심과 의정과 의단의 경계에서 오래오래 계속하면 몰록 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만 경험한 각자의 느낌이니 달리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그 때는 선험자나 선지식을 찾아서 정검을 받고 스스로 그러함에 행복하라.

 

 

좌선에 들어갈 때의 호흡 방법

부처님도 말씀하셨듯이 숨이 모든 수행의 기본 챙김을 알아야 한다.

법 자체를 직접 보고 자신의 원래의 참모습을 찾는 참선을 하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호흡을 잘 관찰하여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호흡을 하면서 끊임없는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맑고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참선수행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호흡방법은 깨달음의 성품을 보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좌선 입정 중의 호흡에 대해서는 풍(), (), (), ()의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비결에 전한다.

풍상(風相) 앉았을 때 콧속의 숨이 들고나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천상(喘相) 소리는 나지 않지만 들고나며 맺히고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

기상(氣相) 소리가 나지도 않고 맺히거나 막히지도 않았지만 들고 나는 것이 세밀하지 않은 것,

식상(息相) 몸을 안온하게 돌보며 기분에 기쁨과 즐거움이 품어지는 것이다. 식상의 호흡은 숨소리도 없고 거칠지도 않고 숨 쉰다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호흡이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정신을 아랫배에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한두 번 토해낸 다음에 이어 서서히 들이쉰다. 고르고 깊은 호흡이 되도록 힘쓰며 다 들이쉰 다음에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코로 토해내지만 실지 의념은 명문혈로 숨이 들고 남을 관찰하면 훨씬 편하다. 특히 호흡할 때는 무리해서는 안 되며 생각과 힘이 호흡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2) 호흡수행

들숨과 날숨의 챙김 -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Anapana sati) 16단계

첫 번째 호흡관찰...... ()관찰

 

길게 숨을 내쉴 때 길게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짧게 숨을 들이쉴 때 짧게 숨을 내쉰다 (들이쉰다).”라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체험하면서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자신을 다잡아 수행한다.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들이쉰다).”라고 자신을 다잡아 수행한다.

 

첫 번째 네 단계에서 명상 수행자는 두 번째 네 단계세 번째 네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네 번째 통찰수행(vipassanā-bhāvan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몸 관찰 에서 제일 중요한 어떻게 몸의 형성을 고요하게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설명 하겠다.

이것은 집중 수행(사마타Samatha)과 통찰 수행(위빠사나vipassana)의 방법 중 한 가지를 통해서 가능하다.

수행자가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호흡은 더욱더 미묘해진다.

또는 호흡이 올바른 방식으로 너무나 미세해져서 선명한 영상인 닮은 표상(patibhāga-nimitta,)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현상들은 모두 집중에 의해 호흡을 고요히 한데서 오는 결과이다.

통찰 수행(vipassanā)4대 요소로부터 파생된 물질(Upādāya-rūpa), 4대 요소보다 더 미세해진 다양한 성질들과 특성들을 정밀하게 관찰할 때, 호흡은 한층 더 고요해진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결정하는 조건들(paccaya)”의 발생 형태와 원인을 명확히 꿰뚫어 볼만큼 정밀히 관찰할 때, 호흡은 더더욱 미세해진다.

그리고 마음과 물질(nāma-rūpa)에 있어서의 무상, , 무아를 알아차릴 때, 호흡은 한층 더 미세해지고 고요해진다.

 

두 번째 느낌 감각관찰 네 단계 ..... ()관찰

 

5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희열(삐띠)을 체험한다.

6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행복(수카)을 체험한다.

7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의 형성(心行)을 알아차린다.

8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의 형성(心行)을 고요하게 한다.

 

두 번째 네 단계(5단계~8단계)에서는 느낌이 명상주제가 된다.

.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와 업(kamma, )과 감각접촉(phassa, ) 등이 일어남에 의해서 또는 그러한 것들에 조건 지어져(因緣)서 느낌(vedanā, )이 일어난다.

무명(avijjā, 無明)”이란 실상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아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생하는 느낌이 있는 것은 무명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느낌의 허망한 가치나 의미에 현혹되어, 환영(幻影)에 불과한 느낌이 영원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무명(無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명이 일어날 때, 그와 함께 느낌이 또한 일어 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류의 느낌을 경험하기를 갈망할 때, 우리는 찾거나 행동하여 바라는 갈애(taṇha, 渴愛)로부터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느낌이 업(, kamma)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은 업의 과보(果報, vipāka)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촉은 느낌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 가지의 접촉, 즉 감각기관(六根), 감각대상(六境) 그리고 의식(六識)의 접촉이 느낌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느낌의 네 가지 원인인 무명, 갈애, , 감각접촉의 상호관계를 고찰하면, 느낌이라는 것이 그것들의 결합기능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즉 무명은 느낌의 보편적 근원(根源)이고, 갈애는 느낌의 방향을 지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업은 중간에서 느낌을 지탱시키는 원인(原因)이며, 감각접촉은 느낌의 가장 가까운 원인(近因)이 된다.

수행자가 느낌이 분명히 일어나는 것을 명확히 볼 때,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일어나는 느낌을 또렷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 수행자는 느낌이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나 현전(現前 upaṭṭhāna)”하는 것을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된다. 즉 공()의 현전을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알 때까지 계속하여 이러한 관찰을 계발해야 한다.

 

세 번째 마음관찰 4단계.... ()관찰

 

9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체험하기

10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기쁘게 하기

11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집중하기

12단계: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12단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면서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인,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또는 마음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을 제거하기, 초보 수준에서부터 완전한 몰입 수준에 이르기까지 집중(선정)을 계발하면서 마음을 장애(nīvaraṇa)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의미, 무명(無明, avijjā)에서 유래하는 집착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란, 마음을 해탈하게 하는 것은 어떤 물질적(rūpa) 또는 비물질적(nāma) 현상들을 관찰대상으로 취하여 그것이 무상, , 무아라는 것을 내관하는 아나빠나삿띠 수행으로써 가능하다.

관찰대상에 대한 내관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마다, 삼법인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다.

 

이 때 마음은 탐욕(rāga, ), 증오 또는 분노(dosa, ), 어리석음(moha, ), 자만(māna,自慢), 그릇된 견해(diṭṭhi, 邪見), 의심(vicikicchā, ), 나태와 무기력(thīna-middha, 無氣力), 불안(uddhacca, 不安), 양심 없음(ahirika, 無慘), 수치심 없음(anottappa, 無愧) 등으로부터 해방된다.

이것은 또한 10가지 결박의 번뇌인 족쇄(saṁyojana)들에 속해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혜의 하나인 명지(vijjā, 明知)의 힘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네 번째 법()의 관찰 4단계 .... ()관찰

 

13단계 :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무상(無常)을 관찰하기 - 무상, , 무아를 관찰하는 것인데 이 무상, , 무아는 공()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공()의 본질은 집착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약 집착을 고집하면 고통의 결과를 가져온다.

 

14단계 :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탐욕이 사라져 감(離貪)을 관찰하기 - 집착을 놓아버리는 이탐(離貪)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집착으로부터 오는 두카()인 재난과 위험을 보기 때문이다.

 

15단계 :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소멸()을 관찰하기 - 모든 것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는 소멸()을 보는 것이다. 집착은 단 한 순간의 차갑고 뜨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집착은 어떠한 참 자아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집착은 어떠한 종류의 자아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의 자아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방법으로 관찰해야 한다.

 

16단계 :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쉴 때마다 보내버림(出離)을 관찰하기 - 일체 모든 것을 보내버려 참으로 비어있음(眞空)으로서, 회향하는 방식으로 주시하고 관찰한다.

 

그때의 마음은 닙바나(Nibbāna, 涅槃)를 실현했다고 말해진다. 마음은 공()안에서 더 이상 라고 집착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 네 번째 부류를 수행하는 것은 담마의 네 측면(無常觀, 離貪觀, 寂滅觀, 出離觀)을 단도직입적으로 즉각 관찰하기 때문에 (Dhamma)의 관찰이라 한다.

 

아나빠나삿띠 수행에서 무상을 관찰할 때, 수행자는 고와 무아의 철견을 포함하는 깊고 분명하며 완전한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무상하다.” 5(五蘊, pañca-khandhā), 12(六根六境, ajjhattikāni-bāhira āyatanāni), 12연기(十二緣起) 등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5(五蘊) 관찰 ; 선정을 수행할 때 일어나는 희열(기쁨)과 행복감, 또는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기타 종류의 느낌을 관찰함에 의해 느낌()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

인식(, saññā)이 느낌(, vedanā) 다음에 일어남을 볼 수 있고, 느낌에 대한 인식, 지각, 평가 등이 어떻게 생멸변화 하는지 알아차림 할 수 있다.

마음의 형성(, saṅkhāra)들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인식의 경우와 동일한 방식이다.

식온(識薀, viññāṇa-kkhandha)을 꿰뚫어 보려면, 감각기관(六根)과 접촉한 감각대상(六境)을 분명하게 의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서, 왜 그리고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의식이 현전하다가 사라지는지 등을 알아차림해야 한다.

외적 감각 대상, 6(六境)은 모두 5(五蘊)에 포함되며, 접촉 대상으로서 실제적인 역할을 할 때, 이 또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림해야 한다.

 

 

6(六根) 관찰 ; 각각의 감각 기관은 그에 상응하는 외적 대상을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이 시각적 대상()을 보고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가 그 대상을 보기 이전에는 마치 눈이 존재하지 않는, 즉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시각적 대상이 눈과 접촉할 때, 눈은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이 눈이 존재하게 됨이 의미하는 것이다. 눈이 대상을 보는 기능을 완수하고 나면, 보아야 할 또 다른 대상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눈이라는 관념 또는 눈의 일어남, 일시적 지속, 그리고 사라짐을 관찰한다. , , , , 마음()도 그 원리가 동일하다.

그 감각 기관의 무상함을 볼 수 있다. 무상하다는 것을 보아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연관된 수()도 무상하다.

 

12연기(十二緣起)의 관찰; 12연기의 각 양상들이 그 기능을 실행하는 매순간 정확하고 면밀히 알아차림 할 때, 그것의 무상함을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수행자는 눈()이 형상()과 접촉할 때, 무명(無明)이 업의 형성(), 의식(),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 기능을 할 준비가 된 감각기관(六入), 각각의 총체적인 감각접촉(), 느낌(), 느낌에 대한 욕망 또는 갈애(), 강하고 격렬한 집착(), 생성 작용(), 생겨나는 과정(), 그리고 슬픔과 비탄 등의 고통과, 그 모든 것들이 부서지고 사라짐(老死) 등이 어떻게 상호의존적인 방식에 의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지 알아차림 해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상호의존적인 12연기의 완전한 작용이라고 부른다. 무명에서 시작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연속적으로 계속 그 다음 요소들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수행자는 연기의 각 양상들이 실제로 그 기능을 이행하며 동시에 연속적인 조건화를 실행할 때, 그것의 무상함을 밀밀성성하게 관찰해야 한다.

즉 우리는 미혹으로 인해 정신적 형성()을 일으키는 무명(無明)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정신적 형성()이 의식()을 조건지을 때, 그것의 활성화 능력이 항상 창조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의식()이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조건 짓는 기능을 실행할 때만, 그 의식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볼 수 있다.

 

의식은 그 성질에 따라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불러일으킨다.

의식 요소(viññāṇa-dhātu)의 힘에 의해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이 일어난다. 단지 의식 요소만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창조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이 정신(, , , , 作意)과 몸의 과정(名色)과 접촉할 때, 의식의 힘은 현전한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몸의 과정도 의식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이 없다면 정신 또는 몸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신과 몸(名色)이 감각기관들, 즉 눈, , , , , 마음 등을 통하여 느낌으로 현전할 때만이 진정으로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알 수 있다.

정신과 몸의 과정(名色)을 연()해서 이러한 감각기관들은 느낌이 일어나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촉(), (), (), (), 생성작용 혹은 존재(), 노사(老死)와 같은 고()에 있어서도 그 의미와 설명은 위와 동일하다.

 

수행자는 인연생기(因緣生起)를 관찰할 때 그 12가지의 모든 양상들이 무상함을 본 것처럼, 인연소멸(因緣消滅)을 관찰할 때도 그 12가지의 모든 양상들이 무상함을 상상이나 관념이 아닌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분명하게 관찰함으로써 완전한 각성에 도달한다.

이 들숨 날숨의 네 번째 부류의 수행들은 법의 관찰로 분류된다.

이상과 같이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거듭함으로써 4염처가 성취되고, 4염처를 거듭 수행함으로써 성취되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7각지이다. 7각분(覺分) · 7각의(覺意)라고도 한다.

 

염각지(念覺支) : 알아차리기라는 깨달음의 요소.

택법각지(擇法覺支) : 안팎의 현상들을 선별하는 깨달음의 요소.

정진각지(精進覺支) :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희각지(喜覺支) : 기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경안각지(輕安覺支) : 편안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정각지(定覺支) : 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사각지(捨覺支) : 평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호흡하는데 주의할 몇 가지

호흡하는 속도는 호흡속도를 처음부터 느리게 하려고 힘쓸 것 없다. 처음에는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의식적 호흡을 하면서 평상시 보다 약간 깊고 느리고 미세하게 하면 된다. 호흡이 익어감에 따라 더욱 미세하여지고 깊어짐에 따라서 속도도 느려지게 마련이다. 들이쉴 때는 가볍게 내쉴 때는 비교적 느리게 한다. 참선 이외의 호흡에서는 느리고 미세한 호흡을 강조하나 참선에서는 그보다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서서히 의식적 호흡으로 향하도록 하고 성급하게 느린 호흡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도는 사람따라 다르게 된다.

 

호흡을 들이쉬고 머무는 정도는 호흡을 가볍게 들이쉬고 잠시 머무는데 이 머무는 시간을 오래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흔히 있다. 또한 그런 호흡법도 있는 것이다. 이것도 무리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에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서서히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긴 시간 머무르면 호흡이 도리어 거칠어지기 쉽다. 오래 머무는 것을 주장하는 호흡법은 좌선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배에 힘주지 마라. 호흡을 하복부 단전으로 하려고 하면 저절로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랫배에 힘이 들어 가게 마련이다. 생각이 호흡을 추적하면서 단전으로 진행함을 따라 배에 힘도 서서히 더해 간다. 호흡이 단전에 이르러서 호흡을 잠시동안 멈추게 되면 배에 힘이 가중된다. 이와같이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배에 모아지는 힘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무리하게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배에 힘을 주거나 또는 단전의 힘을 기른다 하여 의식적으로 과하게 힘을 주면 여러가지 위험이 따르다. 참선에서는 무리하게 배에 힘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호흡은 앉아서만 하는가? 호흡은 앉아서 시작된다. 앉아서 하여야 힘을 얻기 쉽다. 그러나 차차 익어감에 따라 서서 하기 도 하고 좀 더 익숙해지면 걸어 다니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할 수있게 된다. 호흡은 앉아서 시작하여 걷고 눕고 하는 어느 동작에 서도 한결 같이 되도록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매가 현전하기를 기다리지 마라. 좌선에 있어 호흡법은 이것이 선을 하는데 조도로서 하는 것 뿐 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호흡으로 어떤 삼매의 힘이나 신기한 현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삼매에 들고 망념이 끊어져 의식차원이 높아지는 것은 공부에 따른 자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호흡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다린다는 것은 도리어 공부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 되고 망념을 일으키거나 속효심을 내고 치구심을 내어 참선하는 기본자세와 어긋나게 된다. 주의할 일이다. 참선에 있어 호흡은 언제까지나 조도 방편이다. 호흡을 목적으로 삼고 다시 구하는 것이 있다면 외도의 소견이다.

 

호흡하는 마음 상태는 앞서 말하여 온 바에 따라 여법하게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바로하여 나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고루어 진다. 번뇌가 쉬고, 마음이 밝고, 경쾌하게 된다. 수식관을 하는 중 호흡하는 수효를 세는 것을 멈추고 오직 생각으로 호흡을 함께 하여가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은 사뭇 맑고 담담해 간다. 이런 때 담담하다는 생각이나, 맑다 하는 생각이나, 고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바로 망념이다. 오직 호흡을 정밀히 관하여 망념이 쉬게 하여야 한다. 고요하고 말끔한 정신이 있는 마음 상태 이것이 좌선하는 마음상태다. 좌선규식이 자리가 잡히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화두를 들어 마음을 잡두리해 나아가면 자성을 깨치게 될 것이며, 설사 화두가 아니더라도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아 말끔한 정신 성성(惺惺)와 고요 적적(寂寂)를 함께 닦아가면(등지=等持) 대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는 자각선사의 좌선의에 이르기를 [만약 좌선하다가 일어나고자 하면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평온하게 일어나라. 결코 갑작스레 움직이지 마라.] 정에서 나온 뒤에는 항상 방편을 지어서 정력을 호지하기를 어린 아기를 다루듯이 하라 . 그러면 정력을 쉽게 이룰 것이다.]하였는데 이것을 올바로 행하자면 무엇보다 호흡을 정밀히 하는 기본적 좌법이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는 먼저 수인(手印)을 풀어 무릅 위에 놓고 호흡을 크게 3,4회 토한 다음 몸을 좌우로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가부좌한 다리를 일으켜 세워 몸 자세를 편하게 하고 조용히 일어선다.

 

 

3) 수행 중에 나타나는 현상과 체험

 

삼매(三昧)

삼매(三昧)는 고대경전의 언어인 빠알리어로 사마디(samadhi, समाधि)라고 한다. 삼매의 뜻은 선정(禪定)과는 달리 심일경(心一境)’이라 하여 그냥 한 대상에 마음이 고요히 몰입하여 초집중된 초일념상태의 현상를 말하는데, 초집중력은 하나의 대상에 고르고 바르게 산란함도 없는 지극히 평온한 상태로서 심리상태가 매우 세밀해지는 단계를 말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고 정신만 한곳에 오롯이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듯이 그러한 집중이 바로 삼매의 힘이다. 삼매만 얻는다면 그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그 삼매는 준비삼매, 근접삼매, 본삼매라는 세 종류의 삼매가 있는데, 그 세 가지 삼매 중 본삼매만이 선정을 증득할 수 있는 수행단계의 경지이다.

 

본삼매에서 선정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본 책에서도 기술하고 있는 불교의 정통수행인 안반선(호흡관찰법, 아나빠나 사띠)’ 수행을 닦지 않으면 안 된다.(위빠사나의 통찰 삼매를 경전이 아닌, 주석서에서는 찰나삼매(khan̝ika-samadhi)라 한다.)

 

모든 삼매(집중력)에는 기쁨의 물질인 엔돌핀과 행복의 물질인 세로토닌이 생성되어, 그 엔돌핀과 도파민, 그리고 세로토닌으로 인하여 기쁨과 행복함을 생기게 한다.

엔돌핀은 선정의 5요소 중 하나인 기쁨(환희희열/삐띠piti)과 같고, 세로토닌은 선정의 5요소 중 하나인 행복(/수카sukha)의 물질과 같다고 본다.

 

선정은 주로 집중에 기초로 한다. 선정은 한 대상에 대한 고정된 한마음의 일념이 필요하지만, 간화선이나 위빠사나(관찰명상)를 계발하는 사람은 지혜(통찰력)가 강한 쪽이 좋다. 지혜가 강할 때, 불교의 삼법인인 무상 무아를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정(禪定)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불교 원어로는 빠알리어로 ~(jhana, )’라고 한다. 선정은 본 삼매에 들었을 때를 말하는데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선정이 있다. 그 네 가지의 선정을 살펴보면,

초선정은 대상에 대한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기쁨(), 행복(), 초일념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볼 때,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란 심(), ()는 거의 미세하기 때문에 초선에 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알지 못한다. 이선정에 들어 갔을 때만이 알 수 있다.

이선정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완전히 사라진 후,기쁨(), 행복(), 초일념(心一境)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삼선정은 기쁨이 사라지고, 평온(), 행복, 초일념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평온[upekkhaa]은 미워함에도 좋아함에도 치우치지 않는 요지부동한 균형을 이룬 평등심을 말한다.

사선정은 평온(), 초일념의 두 가지 구성요소만 가지는 고요함의 극치라고 한다.

, 선정은 기쁨, 즐거움의 행복, 절대고요함의 평온이라는 대상만이 있고, 그 대상만을 아는 마음 외에는 모든 통제력은 상실된다.

 

우리의 의지는 전혀 하나도 개입될 수 없다. 선정은 장시간 지속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몇 분이 아닌, 최소한 몇 시간 씩, 또는 몇 날 며칠을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확히 알아차리고 있다라는 점이다.

 

()에서는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 하느니라.“ ()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육조혜능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 끝과 같이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참선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한다.

 

()과 혜()는 수행의 증득의 측면을, ()와 관()은 닦는 방법의 측면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어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도 한다.

정혜쌍수(定慧雙修)는 선정과 지혜는 서로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는 본디 계··혜의 3학으로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 후세에 선을 닦는 자가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는 지식문과 이론문이고, 선은 실천문이다. 지식과 이론을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한 안내라고 보면, 선은 그것을 실천, 체험하는 방편이다.

 

지관쌍수(止觀雙修)사마타(samatha)’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초기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와 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 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 pann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청정도론에서는 순수 위빠싸나의 대상이 되는 10가지 번뇌[十觀隨染]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한다.[光明. ochaasa]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된다.[]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긴다.[. piiti]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진다.[輕安. passaddhi]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sukha]

.강한 신심이 생긴다.[勝解. adhimokkha]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한다.[努力. paggaho]

.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 잡고 있다.[現起]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된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선정의 특성은

(니미따)을 경험하고 난 뒤에 선정이 일어난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온 몸이 사라지고, 어떠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선정의 요소만을 인식하는 아는 마음만 남아있다.

선정의 문에 들어서는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정의 이익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는 열반의 토대를 마련한다.

오신통의 초능력을 얻는다.

최고 천신인 범천의 하늘세계에 환생(재생)한다.

멸진정을 증득한다. <염신경>(MN.119)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거듭함으로써 4염처가 성취되고, 4염처를 거듭 수행함으로써 성취되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7각지이다. 7각분(覺分) · 7각의(覺意)라고도 한다.

 

염각지(念覺支) : 알아차리기라는 깨달음의 요소.

택법각지(擇法覺支) : 안팎의 현상들을 선별하는 깨달음의 요소.

정진각지(精進覺支) :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희각지(喜覺支) : 기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경안각지(輕安覺支) : 편안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정각지(定覺支) : 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사각지(捨覺支) : 평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

 

*10가지 번뇌[十觀隨染]-청정도론에서는 순수 위빠싸나의 대상이 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한다.[光明. ochaasa]

2.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된다.[]

3.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긴다.[. piiti]

4.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진다.[輕安. passaddhi]

5.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sukha]

6.강한 신심이 생긴다.[勝解. adhimokkha]

7.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한다.[努力. paggaho]

8.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 잡고 있다.[現起]

9.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된다.[]

10.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마음챙김()(사띠, sati=알아차림)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변화에 마음을 집중하여 변화를 알아차림 이다. 고정된 것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무엇이든지 사띠(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알아차림(sati-sampajanna)이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집중(삼매,sammadhi)이 있습니다.

집중과 관찰이 있는 명상자에게는 객관성이 유지되어 있고 그런 상태에서 지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들을 주시(sati)하면서 지혜로 알아차리(sampajanna)것이 위빠싸나수행이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들뜸으로 치우치는 믿음, 정진, 통찰지()로 인해 들뜸에 빠지는 것을 보호 하고, 게으름에 치우치는 삼매()로 인해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보호 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챙김은 모든 요리에 맛을 내는 향신료처럼, 모든 정치적인 업무에서 일을 하는 대신처럼 모든 것에서 필요하다.

 

알아차림(sati-sampajnna)과 집중(sammadhi)이 밀밀하게 지속되면 수행자는 부처의 가르침 무상과 고통과 무아삼법인을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고통(dukka)으로 부터 벗어나 있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사념처(思念處)

마음챙김과 위빠사나를 닦는 완벽한 수행체계라 볼 수 있다.

사념처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이라는 대상을 알아차려 관찰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본질은 마음챙겨 관찰하는 것이다.

몸을 대상으로 14가지, 느낌을 대상으로 9가지, 마음을 대상으로 16가지, 심리현상을 대상으로 5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체계는 내 몸과 마음속에 속속 스며들게 하여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그 것이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라는 것을 철견하도록 다그치는 체계라는 것이다.

 

열반(涅槃=멸진정) 혹은 해탈, 깨달음

열반은 시간·공간의 제약적인 조건에서 벗어난다. 열반은 모든 부정적 ·긍정적· 상대적· 분별적 개념을 벗어나므로 부정도 긍정도 아닌 중도(中道)이다. 열반은 어떠한 논리나 표현도 넘어선 법부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절대의 세계이다.

"비구여! (), (), (), ()이 없으며 갓이 없는 공간[空無邊處]도 아니며, 갓이 없는 의식 [識無邊處]도 아니며, 무소유처(無所有處)도 아니며, 이 세계도 아니며, 저 세계[非想非非想]도 아니다. 비구여!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며, 서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도 아니며 태어남도 아니다. 거기엔 세움도 없고, 소유도 없고 근거지도 없다. ()의 멸() 이것이 열반이다. 비구여, 태어나지도 않고, 시작도 없고, 형상(조건)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도 없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태어나지 않고 시작하지 않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태어나고 시작하고 조건 지워지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느니라.

 

청정도론에서는 멸진정에 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것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행자는 사마타의 정()과 위빠싸나의 지혜[]로써 1선정에서 7선정까치 차례로 올라간다. 매번 단계의 선정에 들어서 묘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삼법인을 관찰한다. 이렇게 하여 7선정까지 들어간다. 7선정에서 나온 후, 얼마동안 멸진정에 머물 것인가를 미리 마음으로 시간을 결정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8선정에 든 후 바로 멸진정으로 나아간다. 이 상태에서 7일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의식과 신체의 기능이 정지되어 마치 죽은 사람같이 보인다.”

 

중부경전에서 사리풋타와 다른 비구와의 대화에서 멸진정과 죽은 상태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죽은 사람의 경우는 목숨이 끝나고 몸(호흡(생각·의식) 정신적 기능이 모두 파괴되고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다, 그러나 멸진정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는 몸(호흡(의식정신적 기능()이 정지되었지만 목숨이 다한 것은 아니다. 몸에 꼭 필요한 열도 다 소진된 깃이 아니고 기능들도 파괴되어 버린 것이 아니다."

4) 점검과 보임

참선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법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고, 깨달은 후에도 보임(補任)혹은 오후(悟後)수행을 개을리 해서는 안 된다. 바른 견해를 가지지 못하면 손가락을 달로 보는 착각에 빠지고 아무리 오래 수행을 한다 해도 깨달음이 멀다.

 

정법을 가르치는 선지식을 만나야 하고 반드시 점검을 하여 옳은 길로 수행을 하는지 점검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완전히 깨친 도인들은 어떤 화두나 선문답은 하나의 비밀열쇠가 있기에 그 열쇠로서 모두 열 수가 있고 풀 수가 있다. 그 열쇠를 찾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견성(見性)했다고 공부를 다 해 마쳤다고 볼 수는 없다.

개개인의 가지고 있는 과거생의 업()과 금생의 업()이 있고 개개인의 개성이 모두 다르므로 늘 깨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점검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병에 대하여 너무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올라 절벽 밑을 바라볼 때의 그 마음이 어떤지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에 처했을 때의 마음의 자세나 화가 치밀어 있을 때의 그 마음은 어떤지 점검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특히 부인이나 남편에게서 욕하는 소리, 큰소리치는 소리, 신경질적인 소리, 등을 들었을 때의 그 마음도 보아야 한다.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수행을 돕는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수행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의 깨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 수행정진에 돌입하여야 한다.

 

공부를 마치신 도인들은 모든 세상일에 만족하며 감사히 여기면서 걸림 없는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보시하며 자기 자신이 공부한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목적이기도 하다.

 

 

 

 

 

4, 명상과 참선의 공덕(功德)

1) 수행과정에서 나타난 효용(效用) 선의 효용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표를 향하여 닦아가는 과정에도 많은 공덕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미혹중생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무명(無明)과 번뇌가 점차 소멸되므로써 번뇌로 인하여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진리의 공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단번에 흘연히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러한 현상은 수행자의 성실성과 수행자의 기질과 수행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오늘날 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선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효용에 목적을 두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활주변에 나타나는 선의 효용이라 할 현상들은 선수행에서 부차적으로 나타나는 지엽적 현상이므로 그것이 선의 긍극적 목표일 수가 없다. 수행과정상의 효용을 목표로 삼아서는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고 선이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 여기서 수행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효용을 몇 가지 측면으로 분류하여 열거해 보기로 한다. 생활상의 효능마음이 안정되고 두뇌가 맑아진다. 두뇌가 맑아지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마음이 맑아지고 안정되며 정신집중이 잘된다. 오래 독서해도 피로하지 않다. 추리력 기억력 이해력이 증진된다. 피로회복이 빠르다. 성격개조 능력개발 인간관계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된다. 수면 시간이 단축되고 심신이 경쾌하다.

건강상의 효능 관념적인 병의 뿌리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마음을 바꿈으로써 병을 고치는 원리다. 병을 고착시키고 양성시키는 관념적인 요인과 병의 뿌리인 정신상의 응결상태가 소멸되기 때문이다. 참선하면 신체내의 적·백혈구가 증가되고 혈색소가 증가하였다는 연구결과 보고가 있다. 따라서 생활의 활력이 현저히 증대된다. 참선수행이 다음의 병에 크게 유효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경쇠약· 부인과병· 심장병· 위장병· 신장병· 폐결핵· 천식· 히스테리· 공포증· 축농증· 특히 만성적 질환에 유효하다. 이것은 생활자체가 갖는 생명력과 자연 치유력을 활발하게 하고 강화시킨 데서 오는 결과라고 본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거나 치우쳐 있는 상태를 선수행으로 인하여 제거되고 바르게 조절되기 때문이다. 산소 탄산가스 산도(酸度) 포도당 등 혈액의 함유물은 호흡에 많이 좌우된다. 따라서 좌선을 하여 호흡이 깊어지면 뇌수활동을 정상화하는데 도움을 준다.좌선은 정신상태를 전반적으로 급속히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뇌파(腦波)측정 결과 나타났다. 종래 동양에서는 기()를 중요시하여 호연(浩然)의 기를 기르라 하였다. 그것은 천지에 가득 찬 지극히 크고 강한 정신적 생명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길러야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원만하다고 보았다. 이 기의 순환이 잘못되면 또한 병이 난다. 이런데서 병은 기의 부조화라고 보았다. 병에는 좌정을 하여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기를 기르기를 권하였다. 이것이 양생법의 하나이다. 좌선은 이러한 무심정좌보다 사뭇 뛰어난 양생적 효과를 나타낸다.성격상의 효능 자기중심에서 폭넓은 협동적 인간으로 확대된다. 이웃과 사회 그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성이 생겨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 개선된다. 들뜨고 조급한 현대인의 심리에 무심(無心)의 공간을 열어준다. 거기서 가슴이 열리고 참자기와 만나므로써 본심에 돌아와 깊은 안정을 얻게 된다. 자칫 화를 내어 생생한 자신을 잃기 쉽다. 선은 탐, , 치 삼독심을 깨고 생생하고 진실한 자신에 돌아가게 한다. 혼란이나 충격에 동요됨이 없는 부동심이 함양된다.

정신상의 효능

뇌파와 뇌구조 신경전달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온다.

직관적 깨달음의 세타파와 사랑과 공감에 일어나는 감마파가 발생된다.

긍적인 정서와 관련된 좌측뇌의 전전두피질이 강화되고 뇌 속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노르에프네프린 코티솔은 감소하고, 평화의 호르몬인 도파민 엔도르핀 행복의 전달 물질인 세라토닌 등의 신경전달물질이 생성된다. 종교를 향하는 마음상태를 살펴보면 스스로가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거기서 불안을 보고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한다. 선은 불안을 해소하고 공허를 메우며 궁극의 의지처를 얻게 하고 근본적 안심을 얻게 한다. 선은 생사에서 살되 생사에서 초월한 자기를 발견케 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다. 믿음이나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도 치료 효과를 거두는플라시보(Placebo )효과가 있다.선은 인간에게 최고의 권위를 실현시켜 준다. 인간이 갖는 지혜와 지극히 높은 덕성과 능력을 인정한다. 인간의 신성 존엄 내지 중생의 절대적 주권을 열어준다.

 

 

2) 참선(參禪)하면 좋아지는 16가지 a, 위의(威儀)가 정숙해지고 몸이 고요해지며 밝은 마음이 현저 하게 나타난다.

b, 마음이 경계를 대하면 자비심이 생기고 남을 해롭게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c,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는 동시에 욕심과 성내는 마음과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d, 몸과 마음이 모든 경계에 부딪쳐도 동하지 않고 물들지도 않는다.

e, 참선에 힘을 얻으면 그 도덕의 힘으로 음식에 애착이 떨어진다.

f, 마음이 일념으로 나아가 적묵해지면 모든 산란심이 쉬어지고 일체 애욕의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g, 참선의 공덕을 얻고 진공의 진리를 얻어서 영원히 없다는 공에 떨어지지 않는다.

h, 일체 마구니들의 생사 그물을 여의고 모든 번뇌 망상의 얽매인 것에서 해탈(解脫)이 된다.

i, 무량한 지혜를 계발하고 깊은 법의(法義)를 통달하여 자연히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밝게 알고 마음과 마음이 적멸하여 부처님 경계에 머물게 된다.j, 해탈이 성숙하여져서 일체 악업이 요란할 수 없게 되고 걸림 없는 해탈을 원만히 얻게 된다.

k, 인생의 처세를 하는데 모든 기억이 좋아지고 경거망동하는 일이 점점 없어진다.

l, 무리한 애착이 없어지고 사람의 몸에 병고가 차차 감소된다.

m, 삿된 마음이 바른 마음으로 변하고 모든 일에 인내력이 생긴다.

n, 사대육신의 동작이 순서를 얻고 얼굴이 윤활하여진다.o, 잡된 생각이 없어지고 마음이 항상 안락하여진다.

p, 마음에 생멸심(生滅心)과 몸이 나고 죽는 데에 자유를 얻는다. <경봉스님의 참선하는데 좋아지는 16가지 공덕>

 

<참선시 병이 생기면> 참선을 할 때에는 좌선작법의 요령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한다. 좌선작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올바른 스승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 하다. 상기병은 흔히 올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서 책을 참구하거나,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도를 받았을 때나, 지도는 받았으나 실행이 안된 경우 호흡이 고르지 못해 심신의 안정을 잃어 생기는 병은 말한다. 호흡을 통해 안정을 취하면서 의정을 내어 문제의 핵심으로 도달하는 수행이 참선수행인 만큼 호흡을 무리하게 한다거나 자세를 잘 못 취했을 때는 공부하는 화두를 놓치게 된다. 참선은 호홉의 리듬과 신체의 리듬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정신통일에서 나오는 무한한 힘과 안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좌선할 때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정신통일에서 나오는 무한한 힘과 안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좌선할 때 자세와 호홉과 화두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올바르게 밟게 되면 상기병은 생기지 않는다. 상기병이 일단 생기면 머리가 아프거나 몸이 무겁고 끊임없는 망상이 화두를 괴롭히게 된다. 이때는 화두를 잠시 놓고 고요히 호흡하면서 바른 자세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좌선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몸을 가볍게 움직이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상기 되었 을 때는 상기되었다는 집착으로 오히려 더 큰 장애를 자져오는 경우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상기병은 한번 생기면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병은 아니다. 처음에 좋은 선지식을 만나 지도를 받고 의정을 내는데도 바른 이치로 내어 화두를 한결같이 하면 결코 상기병은 일어나지 않는다.

 

 

 

 

 

 

5, 진리로 가는 문답

 

1) 깨달음이란?

*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그것이 깨달음이다.(만약 깨달음이 있다. 없다고 생각하면 자꾸 뭔가를 찾으려 한다.

그 찾고자 하는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 그러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깨달은 사람입니까?

아니,

그대는 이미 깨달음을 생각 하고 있지 않으냐.

* 그러면 말 없는 벙어리나 바보가 깨달은 사람입니까?

벙어리는 벙어리이고 바보는 바보일 뿐이지 깨달음과는 상관치 않는다.

왜 그대가 마음을 내느냐.

 

* 그러면 왜 선사들은 깨달았다고 합니까?

 

그대가 지금 깨달음을 이야기 하지 선사들은 스스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진리를 쓸 뿐이다.

만약 깨달았다고 하는 자는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 그러면 어떻게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스스로 깨닫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깨닫지 않고는 깨달은 후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각자의 식견만큼 이해 할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떡이 있는데 그대가 직접 먹어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참 맛을 안다고 하겠는가.

또한 그 떡을 직접 먹어본 사람이 그대에게 떡 맛을 아무리 상세히 설명을 해 줘도 그대는 그대의 식견으로 이해 할 뿐이지 100%떡 맛을 알지 못한다.

진리란 이와 같다.

스스로 체험하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 할 뿐이지 진리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진리의 깨달음은 불교만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모든 종교나 신앙들의 목적은 진리의 깨달음에 있다. 그런데 구원과 기복을 하는 것으로 전도된 것이 문제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주와 하나 되는 참 나가 되는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깨달음을 질문을 해봐라.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천천히 손바닥을 펴서 보인다.

봤느냐?

* .

무엇을 봤느냐?

* 손바닥을 봤습니다.

하나만 봤다.(손이라는 상에 집착하는 분별마음이다.)

나는 손바닥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그대에게 온 몸으로 보였다.

그 속에는 내 마음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대는 보이는 손만 봤지 그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 했다.

즉 그대 마음과 내 마음이 같지 않다.

그대는 결과만 본 것이지 행동 이전인 (깨달음)의 본 마음을 보지 못 했다.

* 그러면 어떻게 봐야 진실(깨달음)을 바로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실지실견悉知悉見이라고 했다.

바로보고 바로안다. 고 했다.

즉 정견正見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마음을 먼저 내지 마라. 오온은 색 과 수상행식이다.

색이 공함을 보면 마음은 절로 공하다.

그런데 원리를 전도몽상하여 마음을 앞세우기 때문에 본질의 실체를 노친다.

깨닫지 않는 마음(5)으로는 답을 찾지 못한다.

그대의 생각 분별하는 모든 알음아리(18경계)를 내려 놓으면 그대 마음이 텅 빌 때 그 마음이 내 마음과 하나가 된다.

마음 챙김이라 한다.

만약 마음을 텅 비운 자는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보인다.'

혹은 다른 행동을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이해로는 그대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대는 지금 그대 생각으로 보는 것이지 나와 하나가 되지 못 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 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즉 모든 대상과 하나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치 않다.

떡의 맛을 100% 앎은 직접 먹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대가 직접 먹어본 떡의 맛을 나에게 100% 전달 해 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대가 맛을 설명해도 내가 이해 할 뿐이지 직접 느끼지 못한다.

내가 직접 먹어보면 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설명이 아니다.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그대로 체험하고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그냥 볼 뿐, 일 뿐, 행할 뿐이다.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일어나는 작용성'이다.

* 깨닫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있습니까?

위에서 말 했듯이 깨달음은 분별하는 마음(간택심)만 내려 놓으면 된다.

신심명(信心銘)에도 至道無難有嫌揀擇(지도무난 유험간택) 但莫憎愛 通然明白(단막증애 통연명백)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며 오직 가리고 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환하게 명백해지리라."

이러한 분명한 길이 있는데도 스스로가 자신을 100%로 믿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의 인습()에 마음이 늘 끄달려 다닌다.

*그러면 깨닫는 것은 사랑도 기쁨도 슬픔도 없는 무감각으로 사는 것 입니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감각에 충실하고 모두를 사랑하고 자비롭게 마음이 바뀐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간택을 하지 않아야 된다면서요.

 

불법을 바로 깨닫는 것은 중도의 근본인 연기성으로 무상 무아() 열반의 3법인을 바로 앎이기 때문에 자비의 근본인 육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간택을 하는냐?

내가 간택이 되느냐는 다르다.

내가 앞서 손을 들어 보일 때

그대는 '손을 봤다'고 말한다.

하지만 깨달은 자는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인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손을 봤다'고 말한 것은 주관적인 내가 분별(간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손을 들어 보이는' 행동은 행위 자체만 있다.

?라는 간택심이 없다.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없다.

그러면 다시 그대 질문으로 돌아가면

간택은 이분법으로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이 있다.

간택을 하지 않는 것은 오직 행위자체가 된다. 분별하는 주체인 ''라는 것이 없어진 상태만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더 적극적이고 걸림 없이 사랑과 자비를 나눔하게 된다.

그러면 또 의문이 생긴다.

어째서 내가 없고 생각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 할 수 있다.

그 답은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깨닫지 못한 마음으로 깨달은 후의 마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자유로운 영혼을 원하고

삶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 공부를 하면 된다.

*마음공부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다양한 방법과 수행이 있겠지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연장인 참선과 화두 수행을 권하고 싶다.

화두는 공안이라 해서 말과 뜻을 도구나 수단으로 삼아서 공부하는 것이다.

화두(話頭)는 말과 뜻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보라는 것이다.

모든 화두공안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는 것 즉 체험하기, 깨닫기 위한 작업이다.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은 말과 뜻을 의심 하는 것이 아니라 말 이전에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누가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다는 비유다.

의도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라는 것인데 대부분 손가락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속마음을 봐야하고 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과 하나 되는 마음이 되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게 된다.

왜냐면 그 사람은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수단인 도구로 썼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이 화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화두를 통해 그 화두 넘어, 말 이전에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이 법회에서 말씀을 하지 않고 가만히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는 법문을 했다.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가섭은 미소를 지었다.

가섭은 왜 미소를 지었는가?

내가 깨달아야 겠다는 마음, 알아야 겠다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오직 100% 모를 뿐으로 마음을 텅 비우면 가섭의 마음이 그대로 비추고 이심전심이 된 부처의 마음이 된다.

부처나 가섭의 마음은 깨달음을 주고받는 마음이기 때문에 내가 그 뜻을 알아차리면 그대도 깨달은 마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가섭처럼 미소가 나온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행위가 초견성의 깨달음이다.

다음은 스스로 앎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설명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

2) 연기(緣起)와 공(중도(中道)

중도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부처님이 내란다야 강가에서 악사들이 하는 말을 듣고 깨달은 진리다.

거문고 줄을 너무 세게도 느리게도 하지 않게...두 극단을 피하고

중도(中道, majjhimā patipadā, Middlw Way)를 언급 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한 중도는 양극단을 떠난 취우침이 없는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는 생각이나 집착으로 만들어진 마음이 아닌 순순한 마음을 말한다.

그 순순한 마음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면서 있는 것, 말장난 같지만 그러한 마음을 경험 한 자는 안다.

그러함을 통찰의 지혜라고도 한다.

진실한 참 마음 혹은 진여 본성이라고도 하며 불성 도는 법이라고 한다.

그러한 마음은 모든 것과 하나 된 상태이기 때문에 일체가 통알하게 된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양 날개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한 평형과 균형이 중도이다. 그렇다고 양 극단의 중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100%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 분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중도는 연기라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우리 삶의 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초전 법륜경>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생(((끊어짐(항상함(같음(다름(()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한다.

특히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공()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공사상(空思想)에서는, ()을 관조하는 것이 곧 연기(緣起)의 법칙을 보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세계인 중도(中道)의 진리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또한 대승불교 실천의 기초가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대승경전 중 반야경(般若經)과 이에 입각하여 용수(龍樹)가 저술한 논서인 중론(中論)에서 명백하게 밝혀 두고 있다.

중론24관사제품(觀四諦品)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 존재 또는 현상은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난다)의 게송이 있다.

각각의 법이 고정된 성품(定性)을 지니고 있다면 곧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설명한다.

여러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법(: 존재)이다.

나는 이것을 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가명(假名)이라고도 말하며,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말한다. 단 하나의 법(: 존재)도 인과 연을 따라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러 인()과 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 법(: 존재)을 공하다()고 나는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러 인과 연이 다 갖추어져서 화합하면 비로소 사물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물은 여러 인과 연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사물 자체에는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정된 성품(自性 ·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다. 그런데 이 공함도 또한 다시 공한데, (이렇게 공함도 다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공하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과 공함도 공하다고 말하는 방편에 의해) "있음()""없음()"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도(中道)라 이름 한다.

 

(: 존재)은 고정된 성품(·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 존재)"있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법(: 존재)은 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법(: 존재)"없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법(: 존재)이 고정된 성품(性相 · 성상 · 自性 ·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연기의 법칙에 어긋난다). 여러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연기의 법칙에 어긋나므로 생겨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법(: 존재)은 없는 것(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러한 모순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다음을 대전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 연기하지 않는 존재 또는 고정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란 존재할 수 없다.

 

현대 물리학에서 중도는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인 E=MC자승(E=에너지,M=질량,C=광속도)에서 증명되면서 등가의 원리에 모든 에너지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양만 바뀔 뿐이다. 물과 얼음의 예를 들 수 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 직접적 원인)과 연(: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 인과 연의 통칭으로서의 원인)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과 조건[]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출현하지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보편 법칙, 즉 우주적인 법칙이며, 자신은 단지 이 우주적인 법칙을 완전히 깨달은[等正覺] 후에 그것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12연기설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의 법칙은 전형적으로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그것도 멸한다"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다.

 

 

<연기설(緣起說)>

고타마 붓다가 12인연(十二因緣) 또는 12연기(十二緣起)의 연기설을 가르친 이래 불교 역사에는 여러 가지의 연기설이 출현하였다.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 중관파의 공사상(空思想), 유식유가행파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화엄종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언종의 6대연기(六大緣起) 등이 있다.

연기의 법칙은 삼법인(三法印)이나 사법인(四法印)의 교의와 관련이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있으며,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타()와의 관계없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로서 현실의 방황하는 인생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지혜에 의한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 욕망을 없앰으로써 이상(理想)으로서의 열반적정(涅槃寂靜)경지가 실현될 수 있다.

 

연기관계(緣起關係)- 유전연기(流轉緣起)과 환멸연기(還滅緣起) 두 가지

유전연기(流轉緣起)- 연기관계를 인과관계(因果關係)라고도 하는데, 예를 들어, 불교의 근본 교의인 4성제에서 고() · ()2(二諦)의 관계는 괴로움이라는 결과와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갈애 또는 망집의 관계로서, 미혹되게 하고 괴로움을 겪게 만드는 인과관계 환멸연기(還滅緣起)- () · ()2(二諦)의 관계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이상의 경지인 열반의 증득이라는 결과와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불교의 수행의 관계로서, 미혹을 벗어나게 하고 괴로움을 벗어나게 하는 인과관계이다.

 

 

 

 

 

 

 

 

 

 

 

*12연기(緣起)와 유식(唯識)=의 실상(연기의 실체) *

 

5().5()

6()

7()

8()

9()

()<요별경식(了別境識),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무생(無生)

()<사량(思量)>,의타기성(依他起性)=무성(無性)

*사량과 상속을 함께 한다.

()이숙(異熟)<일체종식>원성실성(圓成實性)=공성(空性)

*사량은 없다, 상속은 있다.

 

사량(思量),상속(常俗) 않는다.

*사량(思量)한다.

상속(常俗)않는다.

감각

으로 나타남

()

의식(意識)으로 분별,추리,(생각)

()

 

자의식(自意識)으로 생각함

()

무명(無明)

한 생각(나의생각)일어남

()

진여(眞如),일심(一心)

 

시각

소리

청각

냄새

후각

미각

느낌

촉각

(지수화풍=물질)수상행식(심소(心所)=정신)

 

 

의식(意識)

6(주관:안이비설신의),

6(객관:색성향미촉법),

6= 18

탐진치,교만,의심,

삿된 견해)<5관의식>

말라식(末耶識)

아치,아만,아해,아견=아공(我空),법공(法空)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예지능력과 잠재능력>

 

아뢰야식(阿賴耶識)

미망, 미혹

함장식(含藏識)

 

 

 

아타나야식

각심초심무초상(覺心初起心無初相)-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으니 처음마음이 없다.

범부각(凡夫覺)-반성한다.무상천.무상각

상사각(相似覺)-부처와비슷성문,연각>수다함,사다함,아나함

수분각(隨分覺)-분수에 따라 깨달음, <아라한>

구경각(究竟覺)

 

불각(佛覺)

 

<화엄경52계위> 10()-믿음에서출발

(信解行淨),몸사라짐

10()10()10회향(回向),초지(初地)

10()=(2-7)

몽중일여(夢中一如)

8()-10()

멸진정(滅盡定),등각(等覺)

오매일여

묘각(妙覺)

불각(佛覺)

 

<능가경의4 ()> 성소작지(成小作智)

어묵동정 자성을 청정하게 드러내는 지혜

 

묘관찰지(妙觀察智)

보되 봄이 없다. 대비심

 

 

평등각지(平等覺智)

마음에 병없다, 본성이 본래평등

 

 

대원경지(大鏡智)

여여(如如),진여(眞如)

심안心眼)

깨어있을 때

혜안(慧眼)

상승(반야바라밀) 잠잘 때

법안(法眼)

8부터,최상승(마하반야바라밀)

불안(佛眼)

 

3-살생,음행,도둑

4-거짓말,이간질,음 해,악담

3-,,

진여(眞如)-1()

a)번뇌장(煩惱障)8종식-아공(我空),집착(執着 b)소지장(所持障)-보살(菩薩)-법공(法空) 2,불공(不空)수연(隨緣),지애(智碍)-근본무명,후덕지 세산자연업지(世間自然業知),자비의 마음

아공(我空), 법공(法空)의 경계가 나타남(7에서)

 

업상(業相)-,객관(,客觀) 일어 나기전

전상(轉相-능견(能見),주관)

현상(現相)-객관의 현상이 나타남

소소영영(疏疏盈盈)

근본식(根本()

 

<12연기(緣起)와 유식(唯識)의 실상(불법 수행의 골격이며 연기의 실체)>

 

<12연기(緣起)>

무명(무지)-(성향)-(의식)-명색(신체)-육입(감각)-(자극)-(느낌)-(욕망)-(전유)-()-(재생)-노사(늙음과 죽음)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이 있으므로 식()이 있으며 식()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육근(六根)이 있고

육근(六根)이 있으므로 촉()이 있으며

()이 있으므로 느낌()가 있고 느낌()가 있으므로 갈애(渴愛)가 있고

갈애(渴愛)가 있으므로 취()함이 있고 취()함이 있으므로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으므로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이 있으므로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으며 그리하여 근심 슬픔 고통 번뇌의 무더기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는 것은 무명(無明)이 없으면 행()이 없고

()이 없으면 식()이 없고 식()이 없으면 명색(名色)이 없고

명색(名色)이 없으면 육근(六根)이 없고 육근(六根)이 없으면 촉()이 없며

()이 없으면 느낌()이 없고 느낌()이 없으면 갈애(渴愛)가 없고

갈애(渴愛)가 없으면 취()함이 없고 취()함이 없으면 존재()가 없고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老死)이 없으니 그리하여 근심 슬픔 고통 번뇌의 무더기가 소멸합니다.

12인연법은 말은 간단한 듯 하지만 연기법을 깊이 이해하고 체득하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참고자료>

아비담마 길라잡이 2 - 대림스님, 각묵스님

대념처경(大念處經),출입식념경(出入息念經),아나바나사티 -각묵스님

아함경 -도일스님

청정도론 1,2,3-대림스님

청정도론 각묵스님 강해

안반수의경, 안반선의 이해 -각산스님

호흡과 알아차림아잔찬 스님

위빠사나 명상 오두막-아잔차스님

윗빠사나 수행지침- 마하시 ,호두마을

마하시 初轉法輪經,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우소다나 사야도

마하시 위빠사나 백문백답- 일창스님, 담마간다

고마워요자비명상- 마가스님

불교명상을 통한 참선치유와 뇌과학적 이해 - 안지영, 김종욱

숭산스님의 선의 나침판1,2 -현각스님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아짠 마하 부와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마명(馬鳴) 지음-실차난타(實叉難陀) 한역 김월운 번역

선불교 경전 및 선어록 론서 -선문염송, 벽암록, 종용록, 전등록, 무문관, 선요, 육조단경, 수심결, 유식30, 신심명,, 달마혈맥론 등

대승불교경전- 금강,반야경, 화엄경, 능가경, 원각경, 법화경, 열반경 등

인터넷의 백과사전, 자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