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

열반경 강의

통융 2018. 10. 25. 10:48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석존의 만년(晩年) 왕사성에서 출발하여 열반의 장소인 쿠사나가라에 이르는 도정(道程)과 그 사적(事跡), 설법의 모양과 내용, 그리고 입멸 후의 화장(火葬), 사리(舍利)의 분배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경으로, 이 경은 석존의 입멸 전후의 사적을 정확하게 기록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 석존이 입멸 3개월 전 왕사성을 출발하여 설교를 하면서 나아란다를 거쳐 갠지스강의 도선장인 파아타리촌에 이르러 이 고의 미래의 번영을 예언한다.

 

갠지스강을 건너 베살리에 이르러 그 부근에서 마지막 안거(安居)를 하였는데 석존은 이때 발병(發病)하였다. 통증이 좀 가시자 시자인 아난에게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하도록 하라고 설한다. 석존은 베살리를 바라보면서 아난이어, 이는 여래가 최후로 베살리를 바라보는 것이니라고 하면서 여행을 계속했다. ‘파아베아의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가 바친 버섯의 식중독으로 설사를 계속하면서 입멸의 땅 쿠시나가라로 향한다.

 

아난의 비탄에 대해 석존은 아난이어,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자 좋아하는 자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평소에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설하고 가르친 법과 율은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니라고 설한다. “모든 것은 멸하는 것, 게으름을 피지말고 정진(精進)하라고 하는 최후의 유계(遺誡)였다. 입멸 후 유체(遺體)는 화장되었다. 사리는 8개 국왕에게 분배되어 그들은 각각 탑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고 공양하였다. 요약하면 이상과 같은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十二因緣) 같은 근본교리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이본(異本)으로는 팔리어로 적힌 남방상좌부의 오아함(五阿含) 장부(長部)의 제16경의 역명(譯名)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다. 한역으로는 장아함(長阿含)의 제2경인 유행경(遊行經)과 독립된 경전인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2, 백법조 역), 반니원경(般泥洹經)(2, 실역)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3, 법현 역)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것은 원시경전 또는 초기경전에 속하는 열반경들이지만 한편, 대승경전에 속하는 열반경도 있어 혼돈하기 쉽다.

 





1. 열반경(涅槃經)..성철스님


수많은 대승경전 중에서도 열반경(涅槃經)에는 중도에 대한 설법이 상세히 그리고 자주 설명되고 있습니다. 열반경의 사상 중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성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해보면 그 내용이 몇 가지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선 중생들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있는 것[有]도 아니고 없는 것[無]도 아니며, 단절된 것[斷]도 아니고 항상한 것[常]도 아니기에 중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도의 내용을 보다 깊이 파헤치면 그것은 곧 부처님이 정등각(正等覺)한 12연기(十二緣起)의 진리임을 알 것이며, 이것이 곧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난 중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하는 경문은 원래 열반경의 서로 다른 세 곳에서 설해진 것이지만, 이들은 모두 중도인 불성(佛性)에 대한 설법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시켜 이렇게 한 곳에서 해설하는 바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하여 감로문을 여니 곧 바라나국에서 정법의 바퀴를 굴리어 중도를 설하느니라.


爲一切衆生하여 開甘露門하니 卽於波羅奈國에서 轉正法輪하여 宣說中道하니라.
[大正藏 2, p.773 중]


그러므로 여래는 이 양변을 막아서 설하되,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또한 안이고 또한 밖이므로 이것을 중도라 하느니라.
중생의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非有] 없는 것도 아니며[非無], 또한 있고[亦有] 또한 없는 것[亦無]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한 까닭[有無合故]에 곧 중도이니라.


是故로 如來遮此二邊하여 說言호대 佛性은 非內非外며 亦內亦外일세 是名中道니라...... 衆生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나..... 有無合故로 卽是中道니라. [大正藏 12, p. 819 중]


불성이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함에서 먼저 불성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는 여러 가지 이유중의 하나를 들어보면, 불성이란 그릇에 물건이 담기듯이 중생의 육신 중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는 마치 허공처럼 육신을 여윈 것이라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란 뜻은 일체가 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있는 것이지만, 현재 일체가 진실한 불성의 본성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불성이란 안과 밖, 있음과 없음의 어느 한 쪽에 머무름이 없으므로 중도라 이름한 것입니다.


중생이 견해를 일으킴에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상견(常見)이요 다른 하나는 단견 (斷見)이니라. 이와 같은 두 견해는 중도라 하지 않으며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음을 중도라 한다. 상견과 단견 없음이 곧 십이인연(十二因緣)을 보는 지혜이며 이와같이 보는 지혜가 불성이니라.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인연을 보나 아직 불성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불성은 비록 항상 있으나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 있으므로 능히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또 능히 십이인연 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불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衆生이 起見에 凡有二種하니 一者는 常見이요 二者는 斷見이니라. 如是二見은 不名中道요 無常無斷을 乃名中道니라 無常無斷이 卽是觀十二因緣智며 如是觀智가 是名佛性이니라. 二乘之人이 (복)觀因緣이나 猶不得名爲佛性이니라. 佛性은 (복)常이나 以諸衆生이 無明覆故로 不能得見이요 又未能渡十二因緣河猶如兎馬니 何以故오 不見佛性故라 [大正藏 12, p. 768 중]


중생이 일으키는 견해에는 무릇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상견이고 다른 하나는 단견입니다. 이 상견과 단견을 여읜 것이 중도입니다. 그리고 중도 이것이 십이인연(十二因緣), 곧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바로 보는 지혜입니다.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지혜란 곧 십이인연의 근본 내용인 불성을 말함이고, 불성이 곧 중도입니다. 불성은 원래 일체중생이 다 갖추고 있지만 모든 중생이 근본무명인 제8아뢰야에 덮여 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부터 연기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뢰야 때문에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중생이 무명에 덮여서 십이인연의 깊은 강을 건너지 못함은 마치 토끼나 말이 강을 건너지 못함과 같으며, 십이인연의 깊은 이치를 모르는 까닭은 불성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문·연각의 이승(二乘)들조차도 비록 인연을 보긴 보지마는 아직 불성을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이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고, 불성을 바로 보는 사람이 십이인연을 바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곧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십이인연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니라.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것을 불성이라 하니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므로 항상 무변하니라.

이런 뜻으로 내가 경(經)가운데에 설하되 십이인연은 그 뜻이 깊고 깊어서 알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가히 사유할 수 없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요 성문과 연각의 미칠 바가 아니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보 는 것이며, 부처는 곧 불성이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니라.

 

十二因緣은 不出不滅하며 不常不斷하며 非一非二不來不去非因非果니라...... 非因非果名爲佛性이니 非因非果故로 常恒無邊하니라. 以是義故로 我經中에 說호대 十二因緣은 其義甚深하여 無知無見이며 不可思惟하니 乃是諸佛境界요 非聲聞緣覺所及이니라..... 若有人이 見十二因緣者는 卽是見法이요 見法者는 卽是佛性이요 佛者는 卽是佛性이라. 何以故오 一切諸佛이 以此爲性이니라.


십이인연은 나지[生]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으며, 항상하지[常]도 않고 단절되지(斷)도 않습니다. 하나(一)도 아니고 둘(二)도 아니며 오는 것(來)도 아니고 가는 것(去)도 아니며 원인(因)도 아니고 결과(果)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십이인연은 일체의 양변(兩邊)을 모두 떠난 중도이지 시간적으로 생기하는 법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 양변을 여읜 것을 중도라 하며 이 중도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닌 이것은 이미 양변을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항상 상대적인 대대(對對)가 끊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상주법계(常住法界)하며 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변하지 않으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바르게 깨달았다고[正等覺]하셨지 그외에 달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십이인연을 바르게 깨치려면 성문과 연각의 경지로도 부족하며, 오직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 즉, 확철대오 해야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바로 보고 바로 안 사람은 실로 법을 본 것이요. 법을 본 자는 곧 부처를 바로 본 것입니다. 부처는 곧 부처님 성품이니 삼세 일체제불이 모두 이것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십이인연을 보는 지혜에 무릇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지(下智)요,
둘째는 중지(中智)요,
셋째는 상지(上智)요,
넷째는 상상지(上上智)이니라.
하지(下智)로 보는 자는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까닭에 성문도(聲楣)를 얻으며, 중지(中智)로 보는 자는 불성을 보지 못하니 보지 못하는 까닭에 연각도(緣覺道)를 얻으며, 상지(上智)로 보는 자는 밝게 보지 못하니 밝게 보지 못하는 까닭에 십주지(十住地)에 머물고,
상상지(上上智)로 보는 자는 밝게 보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를 얻느니라.
이런 까닭으로 십이인연을 불성이라 하니 불성은 곧 제일의공(第一義空)이요, 제일의공은 중도라 하고 중도는 부처라 하며 부처는 열반이라 하느니라.


觀十二緣智에 凡有四種하니 一者는 下요 二者는 中이요 三者는 上이요 四者는 上上이니라. 下智觀者는 不見佛性이니 以不見故로 得聲楣하며 中智觀者는 不見佛性이니 不見故로 得緣覺道하며 上智觀者는 見不了了하니 不了了故로 住十住地하고 上上智觀者는 見了了故로 得阿 多羅三 三菩提道하니라. 以是義故로 十二因緣을 名爲佛性이니 佛性者는 卽第一義空이요 第一義空은 名爲中道요 中道者는 卽名爲佛이요 佛者는 名爲涅槃이니라.

[大正藏 12. p. 768 하]


십이인연을 보는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성문이 보는 하지와 연각이 보는 중지와 십주(十住) 즉 십지(十地)에 머무르는 상지와 그리고 무상정등각을 얻는 상상지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상상지는 부처님의 자리이므로 진실한 십이연기를 알 수 있고, 십이인연은 오직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고 성문이나 연각 혹은 보살지에 있어서는 이 십이인연을 결코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십이인연을 불성(佛性)이라 하며, 또는 제일의공, 또는 중도, 또는 부처, 또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즉, 제일의 공·중도·부처·열반·십이인연 등은 완전히 동체이명(同體異名)으로 이름만 다르다 뿐이지 뜻은 다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날 동안 내가 똑같은 뜻으로 이런 설명을 해왔는데 이것은 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모두 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깨쳐서 불지(佛地)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뢰야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아야 알 수 있지, 이 근본무명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십이인연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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