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기본입문

3종외도와 불교의 자유의지설

통융 2018. 6. 29. 16:54


 

* 자아 의지를 갖는 불교의 장점

 

신앙하고 두려워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하고 무력해지고 말지 않겠는가.

오직 정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케 해 깨달은 자가 되게 했으니 내 마땅히 그것을 신앙대상으로 삼으리라."는 말이 따르고 있다.

- <잡아함> 44”

 

석가모니께서는 끝내 그런 나약한 의타적이며 숙명론적인 권위주의적 길을 택하지 않았다.

 

*5종외도설

존우화작인설 - 창조설,

숙작인연설- 전생업설, 숙명론

무인무연설- 우연히

유물론-인식이 있다 없다.

결정론.......................................5종외도.

업인과보설- 자유의지 ................불교의 자유의지설

거기에는 의타적이고 무의도적이며 자유의지가 없다.

비록 업이 많더라도지금 바로 참회하고 새롭게 정진하면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연기의 인과 법의 이치다.

 

* 三種外道說(삼종외도설)

 

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3종외도와 인과법칙)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고 보는 세상 사람들의 견해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 신 중심 사상이라고도 함)

숙작인설(宿作因說. 운명론 사상이라고도 함)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우연론 사상이라고도 함)

 

업인과보설- 자유의지 ................불교의 자유의지설

거기에는 의타적이고 무의도적이며 자유의지가 없다.

비록 업이 많더라도 지금 바로 참회하고 새롭게 정진하면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연기의 인과법의 이치다.

 

첫째는 신의설(神意說)로서 조물주가 있어 만물을 만들어 내고 그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일은 절대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절대자의 뜻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둘째로는 숙명론(宿命論)자이다. 이들은 인간의 모든 행복과 불행이 과거의 어떤 지어짐(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행이든지 불행이든지 오는 것을 눈감고 수용하는 길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맹신론자이다.

 

셋째는 우연론(偶然論)이다. 어떤 원인 없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이다. 즉 어떤 법칙없이 어쩌다가 보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다는 생각과 주장이다. 보통 재수(財數)대통을 바라는 이들이 이에 해당한다.

 

 부처님은 이들을 3종외도의 그릇된 이론이라 하시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신다.

 

첫째 이들 세 가지 주장은 인간의 잘 살아보려는 의지와 노력이 전혀 없는 주장들로서 인간은 닥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즉 가만히 있어도 잘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절대자가 벌을 주면 벌을 받아야 되고 숙명이면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간은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다만 선()도 악()도 행(), 불행(不幸)도 절대자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악의 책임은 모두 신과 숙명과 우연이 짊어져야 하고 인간은 다만 그것을 실행하는 로보트로서 전혀 책임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자신의 의지(, 마음)로써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죄를 짓더라도 책임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모든 일은 자기가 지은 행위[]에 따라 결과(結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하게 계속 노력해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모든 것[六道輪廻]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고 하신다. 즉 세상의 모든 일은 의지를 가진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른 과보이므로 스스로가 창조주이고 책임자로서 자기 인생과 우주의 주인으로서 철저하게 살라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인과론, 인과업보설이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어려운 과보를 받는 것은 선한 일의 과보가 아직 익지 않았음이오, 악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사는 듯이 보이는 것은 아직 악의 열매가 익지 않았음이다.

   




* 종교의 진리성 <고익진 교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

   이에 대해서 사문(沙門)들은 어떤 사상적 도전을 하고 있었던가.  사문들의 사상 계보는 복잡하고 자료가 빈곤하여 확실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문의 우주전변설이 자기네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 유지하기 위한 독단론(獨斷論)이라고 단정하고, 종교적 교설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을 펴거나 또는 확실한 논거 위에서 궁극적 문제를 해명코자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우주의 근원을 몇 개의 요소로 보고 그런 요소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세계와 인간의 생성ㆍ소멸이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 


   예를 들면 <아지타>는 우리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우주의 근원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가지 요소라고 하였다.


   <파쿠다>는 <아지타>의 이러한 사대설(四大說)에 목숨[生命]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의 셋을 추가한 칠신설(七身說. 七要素說)을 주장하였는가 하면, <코살라>는 여기에 다시 허공(虛空)ㆍ얻음[得]ㆍ잃음[失]ㆍ생(生)ㆍ사(死)의 다섯을 추가하여 12요소설(十二要素說)을 내놓았다. 



   생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사문들은 바라문의 해탈 사상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아지타>의 4대설에 의하면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다.  따라서 그는 현세의 쾌락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가치라고 주장하였다(順世派).  한편 <파쿠다>의 7신설과 <코살라>의 십이요소설에는 목숨과 고ㆍ락ㆍ생ㆍ사 등이 불변의 요소로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삶은 싫든 좋든 간에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그것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뚜렷하다.  그들이 생활파(生活派)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라문의 종교적 이념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려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것이다. 


   한편 자이나교의 개조 <니간타>는 사문 계통에 속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해탈 사상을 편 곳에 그의 독특한 입장이 있다.  <니간타>는 우주의 근원적 구성 요소는 목숨(命)과 목숨 아닌 것(非命)의 둘이라고 하고 전자에게는 의지(意志)와 상승성(上昇性)이 있다고 하였다.  후자는 법(운동의 조건)ㆍ법 아닌 것(정지의 조건)ㆍ허공ㆍ물질의 넷으로 세분되는데 물질은 업(業)을 일으켜 괴로운 생사의 원인을 지으며 하강성(下降性)을 띠고 있다고 한다.


   <니간타>의 이러한 오실체설(五實體說)에 의하면 인간의 실존은 영혼(목숨)이 육체(물질)에 계박되어 생사에 윤회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따라서 그는 육체의 계박을 멸할 극렬한 고행을 통한 영혼의 순화를 해탈의 요체라고 설하고 있었다. 


   인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우주론이 당시에 출현했던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우주론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셨을까.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이미 종교적 진리에 대한 회의론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그래서 우선 당시의 우주론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된다고 보고 계신다. 


   ①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 신 중심 사상이라고도 함)
   ② 숙작인설(宿作因說. 운명론 사상이라고도 함)
   ③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우연론 사상이라고도 함) 


   첫째의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은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神. 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의 숙작인설(宿作因說)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로서, <니간타>를 여기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면 <니간타>의 5실체설에서 목숨은 의지적 생명성이 있고 물질은 업을 일으키는 활동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불변의 요소로 보고 있는 한 그러한 작용들은 기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의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偶然論으로서, <니간타> 이외의 사문들은 이곳에 포섭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요소들의 이합집산에 대한 이유나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부처님은 이 세 가지 우주론에 대한 진리성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계신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 권3〉 


   다시 말하면 위의 세 가지 우주론은 인간의 죄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니, 죄악이란 범한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을 때에 한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그에 입각한 노력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적 사실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우주론은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 그러냐면 종교의 우주론이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배후에서 그것을 지배ㆍ조종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리ㆍ본질 또는 원인에 대한 해명이므로, 만일 그것으로써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라고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시 종교의 우주론을 이렇게 비판하고 계시는 것이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