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

찰나의 이해

통융 2018. 5. 5. 19:37

2. 세친과 중현의 찰나관 비교 -----------불교학(9)설일체유부의 有爲四相을 둘러싼 논쟁 / 황정일

유위의 4상을 논함에 앞서 찰나(k a a)를 언급하는 것은, 4상의 논쟁이 찰나의 정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세친은 현재의 생멸만을 한 찰나로 보는 반면, 유부는 4상의 작용을 한 찰나로 보는데 있다.
이것에 대한 두 사람의 정의에 따른 차이점을 보면, 먼저 세친은 경량부설에 근거하여,{{ Abhidharmako abh yam by La Vall e Poussin, p. 540. No. 483}} 찰나를『구사론』「세간품」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간의 극소는 찰나이다. …… 또한 찰나의 길이(量=pram a)란 무엇인가? 모든 연(緣)이 화합할 때, 법이 저체(自體)를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 또는 법이 극미로부터 다른 극미로 움직이는 간격을 말한다.{{ AKBh. p. 536. l. 2∼5}}

세친의 이 정의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법이 자체를 얻음에 이르기까지'란 앞에 없던 법이 지금 생겨나 그 존재성( 性)을 얻고서 곧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소멸이란 단순히 무존재(無存在)로서 그 자체가 어떠한 사실로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세친은 현상의 배후에 실유하는 어떤 법도 가정하지 않는 철저한 찰나멸을 주장한 것이다. 둘째, '극미로부터 다른 극미로 움직이는 간격'이란 움직이는 법이 원자(atom) 정도로 이동하는 시간을 말한다.{{ "대덕 세우(Vasumitra)는 [설한다]. [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극(틈)없이 [생할] 때, [서로] 접촉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대덕은 [말한다]. 대덕의 생각은 인정할 만하다."(AKBh. p. 122. l. 3∼5) 라고 하여, 세친은 극미 간에는 간극이 없고 사실 제로(Zero)에 가깝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원자는 공간적 부분이 없으므로, 이 원자는 전 부분과 후 부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친은 사실상 순간적 지속을 제로(zero)까지 축소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성원, 앞의 글, p. 23.}}이런 찰나의 개념을 전제로 할 때, 사실 요소들은 거의 이동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간극없이 병열된 순간들의 연속된 하나의 사슬에 불과하다는 것이 세친의 주장이다. 이에 중현은 찰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찰나란 무엇인가. 극히 적은 시간을 말한다. - 중략 - 시간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때(分位)가 같지 아니함이다. 이 가운데 찰나는 다만 온갖 작용이 있는 때(位)를 취함이다. 말하자면 오직 현재이다. 곧 현재의 법이 머무는 분량(分量)이 있음을 찰나라고 한다. - 중략 - 오직 현재에 반드시 조금의 틈이 있어서 자신의 과(自果){{ 自果란 取果ㆍ與果을 말한다.

그리고 취과ㆍ여과란 6因이 삼세에 걸쳐 작용하여, 현재 및 과거에 그 果를 취함과 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취과란 직접적으로 결과를 초래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質料因에 상당하는 것이고, 여과란 제법의 생기에 간접적인 힘을 부여하여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것으로 動力因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취과는 현재에 因이 되어 後果를 취하는 것이며, 여과는 법이 장차 생기려고 할 때, 그것에 힘을 부여하여 현재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櫻部 建,『佛敎思想 3 '因果'』, pp. 139∼142 참조) }}를 취하기 때문에 찰나가 있다고 말한다. - 중략 - 또한 상속함에 의거해서 말한다고 하지 말라. 체가 없으면 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정장29, p. 533b7∼26.}}따라서 세친과 중현의 찰나에 대한 정의를 비교해 보면, 적어도 2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세친에 있어 시간은 오직 현재뿐이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적 지속을 사실상 제로까지 축소시켜 공간적 분량, 즉 현재의 요소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은 우선 시간을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삼세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현재에서만 찰나의 작용이 있으며, 그 현재에는 조금의 틈이 있어 자신의 과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세친이나 중현은 현재를 시간의 극소단위인 찰나로 보는 것은 같다. 그러나 세친에 있어서 찰나란 공간적 틈이 거의 없는 제로상태를 말하지만, 중현에 있어서 찰나란 어느 정도의 공간적 틈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면, 이 찰나에 대한 '공간적 틈'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이것은 아마도 세친이 찰나를 생멸만으로 보는 것에 대해, 중현은 생ㆍ주ㆍ이ㆍ멸이란 4상의 작용을 한 찰나로 보는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세친은 '모든 연이 화합할 때, 법이 자체를 얻음에 이르기까지의 간격'을 찰나라고 한다. 즉 세친은 과거와 미래에는 체가 없으며, 오직 현재의 한 찰나만 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현은 삼세가 실유하므로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도 체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체가 없으면 체를 얻을 수 없다.'고 하여, 무(無)에서 어떻게 체를 얻을 수 있는가를 반문하고 있다.

즉, 세친에 있어 찰나란 전에 없던 것이 지금 나타나 그 체성을 얻고, 곧바로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중현은 어떻게 전에 없던 것이 지금 생겨나 체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어떤 중간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멸할 수 있는가를 반문하는 것이다.
위에서 설했듯이 찰나의 정의에 대한 이견은 4상의 작용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본격적인 쟁론은 다음 항목에서 논하고자 한다.

세친의 사유는 유부의 가장 강력한 대론자였던 경량부에서 출발한다. 즉 그는 『구사론』에서 유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을 띰으로써 이미 중현에 의해 경주(經主, S trak ra)로 취급받고 있으며, 중국 비담종(毘曇宗)의 대표적인 주석가들 역시『구사론』을 경량부적 문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권오민,『유부아비달마와 경량부철학의 연구』, (경서원, 1994), p. 253. }}

그러나 세친의 이러한 태도는 유부 본래의 사상적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는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에 유부를 대변하는 중현(Sa ghabhadra)은 이른바 '구사박론(俱舍雹論)'이라고 불리는『순정리론(順正理論, Ny y nus ra)』을 지어, 세친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 반론하고, 그것을 통해 유부 본래의 사상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