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불교는 자비와 연기의 실행
신행활동을 하다보면 생활불교라는 용어를 자주 듣게 된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생활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방대하고, 세속을 떠나 있기에 세속의 잡사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추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리송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판치는 세상사에서 초연해서 산다는 것이 불교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찾기 어렵고, 또 오랜 기간 신행을 한 선배 불자라고 그 말과 행동을 본받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다. 그러다보니 생활불교란 용어는 있으되 불자들이 실행해야할 생활 불교의 방식은 찾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해야할 생활불교란 무엇인가?
생활불교라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생활은 물론 의, 식, 주라는 생활 범주와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물론 생태 환경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비와 연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지혜일 것이다.
먼저 자비는 우리의 마음의 근간이 되어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신구의 (身口意) 삼업(三業)을 말한다. 이 세 가지를 청정하게 하는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비로운 마음이다. 자비로운 마음으로부터 따뜻한 말과 밝은 생각과 배려하는 행동이 생겨난다. 즉, 모름지기 불자는 따스하게 말하고, 밝게 생각하며, 항상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모두 상대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말과 행동은 모두 다른 사람을 향해 있으며, 생각 역시 대상을 두고 있다. 즉, 자비로운 마음에서 우리의 이타행이 꽃피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연기적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그것이 생명체이건 무 생명체이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실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 되면 우리의 존재도 끝이 난다. 만약 우리가 사는 지구의 환경이 파괴된다면 인류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어느 생물 하나가 멸종한다면 다른 생물들도 연쇄적인 멸종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꿀벌이 모두 멸종한다면 식물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멸종을 불러온다는 분석이 있었다. 작은 꿀벌 하나도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연기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연기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하게 되면 줄여야 할 것과 늘려야 할 것, 그리고 그만두어야 할 것이 분명해진다.
줄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소유를 줄이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바로 연기적인 생활이다. 화석 연료를 많이 쓰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다. 자동차 배기가스는 기상이변을 일으키기도 하고 우리의 성보문화재를 부식시키기도 한다. 쇠고기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축산폐수로 강물을 오염시킨다.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 쓰레기는 이 땅을 황폐화시킨다. 골프와 스키를 즐기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대지는 몸살을 앓게 된다. 부의 상징인 모피코트를 위해서는 수십 마리의 여우와 밍크가 목숨을 잃어야 한다. 이렇게 나만을 위한 소유와 소비는 연기적인 삶이 아니고 생활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생활불교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소유를 줄이고, 소비를 줄여서 검박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늘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남을 위한 것이다. 다른 이를 위한 기부를 늘리고, 이웃을 위한 봉사를 늘려야 한다. 부처님은 분명히 가난하게 살지 말라고 하셨다. 너무 빈한하면 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생업에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로 얻어진 것들을 이웃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재물을 나누고, 내가 가진 재능과 시간을 나누는 것이 바로 연기적인 생활인 것이다.
그리고 그만두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죽이거나 사람을 시켜 죽이거나, 죽이는 것을 방관하지도 하지도 말라고 했다. 즉, 직접 죽이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내 행동과 생활이 살생과 연관이 있다면 그것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4대강 사업)
흔히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만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생활불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대만의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이다. 자제공덕회의 불자들은 언제나 밝은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위한 이타행을 실천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 일정 금액의 기부금을 모으는 한편 재난에 처한 이들을 위한 각종 구호활동과 봉사활동에 앞장선다. 2004년 말 동남아 각국이 지진해일 쓰나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구호품과 구호 인력을 태운 전세기를 띄운 곳이 바로 이 단체이고 이번 아이티 대지진에도 긴급구고 인력을 파견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전 세계 60여 개국에 500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확보하고 있는 세계적인 불교 구호단체, 기자들보다 먼저 재난 현장에 나타난다는 봉사자들이 모여 있는 대만 자제공덕회는 가난을 구제하는 자선사업(慈善), 6개의 대규모 종합병원에서 조건 없이 치료하는 의료사업(醫療), 전인교육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사업(敎育)과 사람의 심성을 정화하는 문화사업(人文)을 실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제공덕회의 활동과 실천은 우리가 실천해야할 생활불교의 길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생활불교는 우리가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길이다. 그것은 바로 지혜에 기반을 둔 자비와 연기의 실천이며 그것을 주저 없이 실행하는 불자들에 의해 구현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도영 스님 2011년 1월 (435)
자기 자신을 밝히기 위한 넓고 큰 수행
수호청정계(守護淸淨戒) 청정하게 계를 지키고 수호하여
수행광대인(修行廣大人) 수행을 넓고 크게 하는 사람이 되라
정진불퇴전(精進不退轉) 정진을 하되 결코 물러서지 않으면
광명조세간(光明照世間) 온 세상을 빛나게 하리라.
물들지 않는 청정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계행을 수행하는 것이요, 도를 다하는 삶입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또 부모는 자식에게 도리를 다하고, 한 점 부끄럼 없이 합장하고 부처님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불보살을 속이지 않는 삶, 일체중생은 물론 축생까지 속이지 않는 삶,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보살의 삶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밝히기 위한 넓고 큰 수행을 우리는 함께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중국 선종의 삼대 조사이신 승찬 스님께서는 신심명이라는 경에서 “큰 도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至道無難].”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옛 큰스님들은 도통하기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 즉 간택심 때문입니다[唯嫌揀擇].
도를 얻기 위해서는, 이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但莫憎愛]. 여기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적당한 관계 속에서 마음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결국에는 영원한 게 아니므로, 사랑을 하되 너무 집착하고 애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마음이 사방으로 통해 항상 밝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洞然明白].
생각을 바꾸면 행복이 보인다.
수행을 통해 나와 네가 함께 깨달음을 얻을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인 동체대비(同體大悲) 사상입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감정을 느끼는 관계 속에서, 저 허공의 티끌 하나조차 내가 아닌 바가 없다는 불이(不二) 사상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겠습니까.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라[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부처님의 말씀을 현대식으로 풀어보면, 능력을 가진 자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 경제력, 상식 등을 나눔으로써 갈등이 아닌 화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21세기 현대 사회에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 간의 갈등, 노사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등 서로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서로 인정하고 좋은 점을 받아들여줄 때 얼마든지 공생공존할 수 있는 삶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인과를 생각하면서 모두가 공업중생(共業衆生)이라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다면, 즐거움도 괴로움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복이 보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낙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늘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는, 남의 일에 너무 지나친 간섭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사사건건 남 일에 간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다른 사람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남이 그릇된 행동을 하면 ‘나는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만을 할 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모두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바람에 떠가는 흰 구름처럼 자유자재가 되어 더 밝은 날의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족함을 알았을 때 항상 즐겁게 살 수 있다.
‘인생고락종심기(人生苦樂從心起)’, 경봉 스님의 선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인생의 고통과 즐거움은 마음을 좇아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조건에 어떤 특정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갖춰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됐어’ 하는 생각을 가질 때야말로 진정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것을 채우려고 하고, 끝내 채워지지 않으면 그 원인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 누군가를 원망하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그래, 저 사람 정도면 괜찮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정작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닌 것입니다. 또 최악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저럴 바에는 차라리 몸을 바꾸는 게 좋지 않겠어’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역시나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불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조금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것들을 다 느낄 수가 있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것이 바로 물질이고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색상(色相)에 욕심을 부리면 늘 부족하다는 생각에 불평과 불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랄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됐어’ 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능히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지족상락(知足常樂) 능인자안(能忍自安)이라고 하여, 족함을 알았을 때 항상 즐겁게 살 수 있고 능히 참으면 저절로 편안해진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만족할 줄 알며 어지간한 것은 참고 삶을 살 수 있도록 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요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항상 저 높은 곳, 많이 가진 사람들만을 바라보며 살다보니 지치고 힘들어 그만 삶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큰 죄악으로 보아 계율로써 금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살생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걸 못 견디고 쉽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단지 목숨을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명부(冥府)에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목숨을 버렸기 때문에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바른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만사가 모두 평등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불교를 바로 배우고, 부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열심히 수행함은 물론 복 짓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가를 유심히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서’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공간적 개념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여기”라는 공간 역시 항상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매순간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삶을 아름답게 이끄는 지름길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깨닫고 탐·진·치 세 가지 마음을 보살의 원력과 자비심 그리고 지혜로 바꾸어 나간다면 하루하루가 날마다 좋은 날, 더 건강하고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는 자와 기도 안 하는 자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반응합니다. 그 마음을 오롯하게 정리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기도 하는 사람이며, 들떠 있는 허깨비 같은 마음의 그림자에 끌려가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기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의 조작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그 이유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은 기도 하고 노력하여 자기의 꿈을 이룬 것이고, 불행한 사람은 세상을 탓할 핑계를 찾았을 뿐이다.
삶을 행복하게 가꾸는 실천
보선 스님 2011년 02월 (436)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2011년은 신묘년, 즉 토끼의 해입니다. 토끼는 귀엽고 깜찍해서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좋아하지요. 흔히 토끼 하면 다산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교경전에서 토끼는 희생정신이 강한 동물로 묘사됩니다.
어느 날 숲에 사는 짐승들이 모여 수행자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을 공양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들 한 가지씩 공양을 올리고 마침내 토끼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평소 풀만 뜯어먹고 살다보니 맛있는 것을 가진 게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행자에게 영양가 있고 좋은 것을 공양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토끼는 수행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보시를 했다고 합니다. 토끼의 이런 희생정신을 생각하며 올 한 해는 좀 더 평화롭고 평안하게 살아보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의식주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입고 먹는 것은 물론 잠잘 곳도 부족해 힘들어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어 준다면 모두 같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우리’라는 울타리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해 ‘우리’의 범주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우리 가족, 동료, 무슨 성씨, 어디 사람…. 하지만 실제 우리는 굉장히 넓은 전체 가운데 ‘나’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가 곧 전체가 되는, 즉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살아간다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세상을 보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낼 줄 아는 지혜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초원에 태어났을 때는 마치 원숭이처럼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뛰며 다녔다고 합니다. 정신을 한 곳에만 두고 있으면, 자신을 노리는 맹수들에게 언제 잡아먹히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이리저리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고요하고 한결같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걸 모르고 살다 보니, 지금 삶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이나 염불, 혹은 성인들의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본래 마음을 스스로 깨달아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우리가 추위를 느껴야 옷을 입고 배가 고픔을 느껴야 음식을 찾듯, 인생에도 이 고통이란 것이 있어야 즐거움도 있기 마련이란 사실입니다. 인간의 신체 중 고통을 감지하는 곳은 이마 쪽에 있는 전두엽이라는 뇌 기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고로 이 부분을 다친 사람은 두려움이 없이 항상 행복에 젖어 산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행복하게 사니까 좋지 않냐 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다 보니 조심성이 부족해 요리를 하다가 손을 베는 일이 다반사고, 또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그런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고통이 있어야 즐거움도 있는 것이며,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즐거운 것만 좇아 동분서주하지 말고, 때로는 다가온 고통을 받아들일 줄도 알고 또한 그것을 잘 이겨낼 줄 아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고통은 ‘나’라는 것에 집착해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불교학자의 말에 따르면, 부분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곧 어리석음이며, 반대로 전체로 환원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나만이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나눔으로써 커지는 행복
간혹 불자들 중에 ‘부처님께서 알아서 복 되게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전지전능한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어 본래의 나를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겐 부처님의 밝은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부처님을 뵐 수 있는 눈, 법당에 들어와 초를 밝힐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는데 무엇인들 두렵겠습니까? 그러니 두려움 같은 것은 전부 내려놓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 나가는 데 보다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실천을 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반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도 생기지 않고, 용기도 사라져 버리죠. 언뜻 실천이란 힘들고 버거운 것이 아닐까 싶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절에 나와 108배를 하든 혹은 다리가 아파 8배를 하든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능력껏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실천인 것입니다. 또는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주자니 곧 죽을 것 같고, 당장이라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걱정에 선뜻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나눔으로써 우리는 더 큰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흘러가는 물을 그릇에 담아 떠보십시오. 그 빈자리로 더 깨끗한 물이, 더 빨리 차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올 한 해는 작은 것 하나부터 남들과 나눈다는 생각으로 지내보시기 바랍니다.
실천 중에서 가장 쉽고, 가장 행복한 방법 한 가지가 바로 웃음입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보면 좋아하고 반가워합니다. 그러니 곁에 있는 사람들 역시 절로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웃음과 관련해 어떤 심리학자가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한 번은 가로로 연필을 물어 웃는 표정으로 책을 읽게 하고, 또 한 번은 세로로 연필을 물어 뾰로통한 표정으로 책을 읽게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연필을 가로로 물었을 때는 즐거운 마음이 10퍼센트 높게 나타났고, 세로로 물었을 때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표정만으로도 기분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마음을 저 넓은 바다, 저 높은 하늘과 같이 높고 크게 써 모든 이웃을 나와 같이 친절하게 대하고 행복하게 가꾸어주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올 한 해를 떳떳하고 복 되고 보람차게 보내고, 큰마음으로 모든 것을 수용할 줄 아는 부처님 제자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품을 수 있을 때 부처님 세계로 다가간다
평상 스님 2011년 03월 (437)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개념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연간 살림살이가 1억 원 정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에게 1억 원이라는 돈을 맡기면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잘 활용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1년 예산인 300조라는 돈을 쥐어주고 살아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겁니다.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만큼의 수치를 이해하면서 살아가십니까? 억이라는 개념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이라고 하는 숫자도 해량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한한 개념을 이해하셨던 분입니다. 불교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아승지(阿僧祗), 무량수(無量數), 불가설불가설전(不可說不可說轉)이라는 표현을 통해 보면 부처님께서 얼마나 폭넓은 수준의 개념을 갖고 계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부처님처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이해의 범주를 넓혀보시기 바랍니다. 이 어마어마한 지구를 작은 축구공만 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춰진다면 한걸음 더 부처님 세계로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나’를 100퍼센트 채우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부처가 되려면 복을 많이 짓고, 네 자신을 전부 너만으로 채워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부모, 자식, 오만 가지 것들을 모두 덜어내고 100퍼센트 ‘나’로 채워졌을 때 비로소 3아승지 겁이 지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3아승지 겁이나 지나야 부처가 될 수 있다니….’ 하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십시오. 부처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나도 부처가 되어야겠다’라고 발심하는 순간, 벌써 여러분의 이름으로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인공인 또 하나의 정토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가 인연, 연기로 이어져있습니다. 불법을 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세상의 이치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중도(中道)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적합한 조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빨주초노파남보 일곱 가지 색이 완벽히 조화를 이뤄 눈부신 태양 빛을 발하듯이, 완벽한 조화에는 배타할 것도 흠잡을 데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조화가 일어나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동심을 가진 사람들은 행색부터가 남다릅니다. 부처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장자라는 분 역시 그런 가슴을 가지셨던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옥신각신 사는 모습이, 마치 달팽이의 두 뿔이 서로 내 것 네 것 하면서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蝸달팽이와牛角上之爭). 돌멩이를 탁 부딪쳐서 불이 반짝하는 순간보다 짧은 인생을 가지고 뭘 그렇게 따지고 싸우면서 사느냐는 겁니다. 적어도 이 정도 포부는 가져야 세상사를 초월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65억 명의 지구촌 인구 중 10억 명이 하루에 천원이 없어서 굶주린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조그만 재물이 아까워 모른 척 하고 혼자서 좋은 것만 먹고 발 뻗고 잘 수 있겠습니까? 남을 나처럼 여기고, 세상을 내 안에 품을 수 있는 그런 가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됐을 때 비로소 내 안에 ‘나’가 100퍼센트로 채워질 것입니다. 만약 너도 나도 모두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더 없이 아름다워지고, 그곳이 곧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
대승보살로 나아가는 법
과학에는 ‘질량보존의 법칙(화학반응의 전후에 있어서 반응물의 모든 질량과 생성물의 모든 질량은 같다는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부처님의 법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백 가지 천 가지로 잘라도, 그 한 조각이 바로 100퍼센트입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현보살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부르는 관세음보살이나 옆에서 다른 사람이 부르는 관세음보살이나 전부가 100퍼센트입니다.
그런 수많은 불보살들이 시방세계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합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불보살들이 보이십니까?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문수・보현보살이요, 관세음보살입니다. 내 주위에 이렇듯 대승보살이 꽉 차 있는데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물에 빠져도 건져줄 것이요, 빙판에 넘어지려 하면 옆에서 잡아줄 테니 아무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 이 말을 듣고 ‘나는 보살이 아닌데 어쩌나?’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부터 보살이 되어 보시면 됩니다. 자비심을 갖고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가슴에서 느껴지는 대로 솔직하고 바르게 행동하십시오. 남들이 꺼려하는 일을 먼저 나서 야무지게 할 수 있는 사람, 남의 자식도 내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대승보살입니다.
다만, 그런 공덕을 지을 때는 항상 무주상보시의 마음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진정한 보살심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일곱 가지 보물로 수미산만큼 많은 선행을 했다손 치더라도 마음속에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하는 공명심이 있으면, 그것은 스님의 한 구절 법문 끝에도 못 미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불국토의 주인으로 사는 길
하루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무 아래에 앉아 계시는데, 한 바라문이 와서 물었습니다. “부처님, 이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몇 개나 될까요?” 부처님께서는 몇 개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누가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대충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몰래 나뭇잎 몇 개를 따 주머니에 넣고, 다시 부처님께 나뭇잎 개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바라문이 몰래 따버린 이파리 숫자를 제외한 만큼의 나뭇잎 개수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곧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의 진상을 다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를 법으로 설하셨고, 나중에 제자들에 의해 결집이 되어 경전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흔히 사람 몸을 받아서 부처님 말씀을 접하기가, 눈 먼 거북이가태평양 바다를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 위로 머리를 내미는 것만큼 어렵다고 합니다(盲龜遇木). 그런 귀한 인연을 우리는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으로 이뤄진 세계인 법계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 이 중생들의 일모단(한 털끝)마다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무한한 불국정토의 수만큼 무한한 부처님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왔습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하루 빨리 부처가 되어 저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이후 더 발심을 해서 저마다의 불국토로 가 주인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영웅호걸이 무위진인은 아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여천무비(如天無比), 『임제록 강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 대한 ‘창조적’ 해석의 결말이다. 임제의현 선사의 유명한 법어는 으레 ‘어떠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말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라’는 권고로 풀이된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건, 스스로를 신뢰하며 당당하게 나아간다면 ‘거기’와 ‘그것’이 비할 바 없는 진실이란 격려다. 말은 좋다만 그게 가능할까, 오래도록 불편했던 화두다. 보람과 영광의 순간보다는 나를 믿지 못해 주눅이 드는 상황이 훨씬 잦고 길다. 더욱이 자존(自尊)은 권력이다. 누구나 삶의 주인이고 싶으니까, 이기고 싶고 누리고 싶으니까, 그 자신에도 그의 이웃에도 안팎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나에 대한 관심과 갈애는 얼마나 나를 지치게 하고 못쓰게 하는가. 대자적(對自的) 존재에 대한 치유로서의 즉자(卽自). 작주가 그대로 개진이다.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사건이다. 구태여 사람답지 않아도 그저 살아있음을 살아있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되라고 가르치는 학교는 없다.
* 자원봉사의 생활화, 초파일 연등 접수, 에너지 절약 신묘년 3월 초하루법문
행복을 기르는 선한 마음의 씨앗
진옥 스님 2011년 04월 (438)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요즘은 지식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만, 사람들에겐 항상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선한 마음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며, 이웃과 나누고 화를 안 내는 그 마음. 최근 들어 지식과 물질의 소유가 높아진 반면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는 되레 험악해진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일전에 달라이라마께서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쓰는 법을 잘 가르쳐야 앞으로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마음이 아닌, 좋은 심성으로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요?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부자가 되고 출세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효도하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남보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 남보다 빨리 승진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돈을 좀 번다손 치더라도,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행패를 부린다면 차라리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가정적인 사람이 되어주길 바랄 것입니다. 제아무리 돈과 명예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제1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돌아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잘못 쓰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리씨앗을 심고서 절대로 쌀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의 씨앗과도 같아서 모든 결과가 이 씨앗에서 비롯됩니다. 즉,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행복을 기르는 선한 마음의 씨앗을 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바른 분별력
마음을 악하게 먹거나 독하게 먹는 것도 불행을 초래하는 중요한 구실이 되지만, 마음에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음 또한 행복을 가로막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일전에 한 신문기사를 보고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두 분이 농약을 밀가루로 착각하고 부침개를 해 드셨다가 돌아가셨다는 기사였습니다. 설령 글을 읽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냄새만 맡아봐도 그것이 농약인지 밀가루인지 구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알고 모르는 배움의 깊이를 떠나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어리석음을 무지(無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사람은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악을 행하면서도 선을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훗날 자신에게 고통이 닥치면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오는 것일까?’ 하며 오히려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고, 스님들 법문도 항상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인들의 말씀은 옳고 그름을 전부 분별해 놓은 것이기에 한 치의 거짓됨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잘 새겨들으면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편의대로 선과 악을 구분 짓습니다. 즉, 내 마음에 들면 선한 것이고 아니면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하는 사람 자체를 싫어하고, 자기에게 잘해주고 아부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논어』나 『맹자』 등을 보면, 예부터 훌륭한 임금들은 절대로 곁에 아첨꾼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진나라 왕 역시 철저하게 비판적인 사람들을 신하로 삼았습니다. 몸과 마음의 귀를 열고 주변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 정책을 펼침으로써 온 나라와 백성이 모두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장의 욕심과 이기심에 빠져 눈앞에서 아첨하는 소리만을 듣고 따르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마음이 복을 짓게 한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나에게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돕는 것은 내가 여유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지, 죽자 살자 살아도 살아남기 힘든데 어떻게 남을 위할 시간이 있냐는 겁니다. 하지만 선행은 따로 돈 들이고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나눔이 삶을 살아가는 데 마치 큰 손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은연중에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그것도 같은 반에 장애인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엄청나게 싫어하고 반대부터 할 것입니다. 애가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반을 옮겨달라고 학교 측에 항의하거나, 아예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는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불편한 친구를 도움으로써 아이가 복을 짓고 올바른 심성을 기를 수 있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해 경쟁에서 뒤쳐질 거란 걱정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절에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자식이 잘되길 빌면서도, 실제로는 실천에 옮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한 예로, 부모들은 나중에 아이가 고통스러워질 걸 알면서도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는 것을 그대로 허용합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성인이 되면 말을 해도 안 듣는다.”라며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20년이 넘도록 부모가 롤모델이 되어 술 마시고 담배 피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지 말라고 하면 그렇게 되겠습니까. 말로는 술 마시지 말라고 가르쳤다지만, 행동으로는 술 마셔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평소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분명히 자각하고,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서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하고 선한 행동을 보이면, 자식은 저절로 선한 마음이 몸에 배어 복 짓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선행의 실천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남을 위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100퍼센트 그렇게 살 순 없더라도 내가 사는 일부, 내 시간의 일부, 내 돈의 일부, 내 노력의 일부, 내 생각의 일부라도 남의 행복을 위해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에 대해 항상 깊이 생각하고,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나쁜 일을 하면 악한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한 일을 많이 했는데 행복이 왔다?’ 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고통이 왔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냥 우연히 오고가는 것은 없으며, 전부 자기가 지은 업대로 받을 뿐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남을 좀 더 배려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자꾸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러지 않고 절에 와서 밤낮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선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절, 좋은 스님을 찾아다녀도 소용없습니다. 행복은 어디서 오느냐, 부처님의 가피는 어디서 입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행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하지 않고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짓 없는 삶이 깨달음 이르는 지름길
완주 송광사 주지 도영 스님
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마다 ‘주인’이 나투어 계십니다. 여러분들 역시 ‘주인’입니다. 주인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임제 선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처작주(隨處作主)요, 입처개진(立處皆眞)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 내가 주인이어야 합니다. 남의 정신에, 남의 행동에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닌 내가 주인으로서 거듭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참되지 않은 사람은 그 어떠한 깨달음도 증득할 수 없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성과 중심적 발상을 하는데 그리하면 안 됩니다. 거짓되지 않은 삶이 바로 깨달음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된 삶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보살의 3가지 진실된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로 불자는 불보살님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보살의 원력대로 살아야 하는데도 우리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생활 따로, 불교 따로 입니다. ‘지금 이곳 법당에서 부처님께 합장하고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서원하시겠지만 현실에서는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爾 內世得作佛)”이라고 했습니다. 풀어 쓰면 일체의 법은 유위도, 무위도 아니며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불자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 부처를 이룰 수 있다(內世得作佛)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살피고 있자니 수행정진을 잘하시고 보살도를 잘 실천하는 성품들이 엿보여 모두가 훌륭해 보입니다. 보살로 거듭나 보살행을 실천하고 보살도를 실천해야 비로소 우리들의 삶은 진실되게 변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 보면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이라고 했습니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진리의 보배가 허공가득 비처럼 내리고 중생들은 저마다 자신의 그릇에 따라 얻어가는구나’라는 뜻입니다. 실상이 그러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일체 중생에게 똑같이 내립니다. 그런데 ‘중생수기득이익’이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기도 하고 덜 가져가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그 마음자리를 자비롭게 증장시키기 위해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날마다 좋은날이 되세요’라고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나에게 좋은 날을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날마다 좋은 날로 만들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알면 평생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교를 알면 집착을 버리고 행복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를 알면 절대로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좋은날을 보내게 됩니다.
“욕지전생사 금생수자시 욕지내생사 금생작자시(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 의미는 ‘만약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받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다음 생을 알고자 하면 금생에 행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다음 생의 모습’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살다보면 ‘왜 그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하고 이해가 안 되고 용납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으로 비춰지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전생에 지은 인과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일화를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노스님께서 자신의 전생사를 살펴보니 남의 것을 훔친 과보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으러 올 것이라 생각하여 방석 밑에 돈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도둑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왔습니다. 도둑은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얼른 돈을 주면서 ‘아이고, 이제야 빚을 갚았구나’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일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고통이 커집니다. 그냥 일어난 일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살아가세요. 금생에는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베풀어서 행복한 마음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베풀 때 다음 생에 받을 수 있는 것이며 베풀지 않고 매번 받기만 하면 자비의 마음을 키울 수 없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불자라면 인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분들을 ‘좋은 인연’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또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이기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불자의 삶입니다.
상대를 오해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세 번만 생각하세요. 그러면 화(火)가 사라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이 금세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면 운명이 바뀝니다.
여러분들에게 화두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중국의 승찬 선사께서 설하신 신심명(信心銘)의 한 구절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어른 스님들께서는 ‘도통하기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이르셨습니다. 그럼 그렇게 쉬운데 왜 못하느냐, 그 이유는 ‘간택심’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증애심만 떨쳐버리면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땅히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면 모두가 깨달음을 증득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법구경’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면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고 미워하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미운 사람은 왜 밉습니까, 미운 짓을 하니까 밉겠지요. 미운 짓을 왜 하느냐, 그것은 인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미운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위없는 자비로 포용할 줄 알아야합니다. 미운 짓을 한다고 구박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인해 더욱 미운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인과를 모르고 인연의 소중함을 모르기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구나’하고 감싸고 용서할 때 우리는 여실히 불성(佛性)을 직관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탁 트여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멀리할 것이며 불법(佛法)을 좋아하고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합니다.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무상관(無常觀)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체는 무상합니다. 그 무엇 하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상관으로 직관하게 되면 영원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 자체도 내 것이 아닌데 그 무엇에 집착을 하는 것인지요.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항상 무상관을 관할 줄 알아야 하고 자비심을 간직하고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끊임없이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배워야 합니다. 계정혜 삼학을 왜 배워야 하느냐, 그것은 탐심과 어리석음, 성냄을 씻어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계를 실천함으로써 다스릴 수 있고 번뇌 망상으로부터 일어나는 성냄은 선정으로써 정화할 수 있고 어리석음은 반야(지혜)로서 물리칠 수 있습니다. 탐심은 원력으로 바꾸어야 하고 성냄은 자비심으로 바꿔야 하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바꿔야 합니다. 불퇴전의 원력과 자비와 지혜로서 우리는 ‘날마다 좋은 날’을 완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욕심을 원력으로 바꿀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현 스님 2011년 05월 (439)
비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취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어떤 바라는 바를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살면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면 사는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증이나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바를 성인(聖人)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즉,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서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에는 부처님께서 이루어 줄 수 있는 바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바람이라면 부처님께서 다 들어주실 테지만, 그것을 들어줌으로 인해서 더 고통스러운 결과가 초래된다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실 겁니다. 평소에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잘 채워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대부분 욕심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욕심과 욕망을 버리기 위해서 노력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욕심을 버리고 이루었던 궁전이 정토의 부처님도량입니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진정한 성취를 얻으셨던 것입니다.
욕심은 나만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것이지만, 원력은 욕심의 허망함을 알고 세상 전체가 행복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을 원력으로 바꿀 때 삶은 향상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안정된 삶을 볼 수 있고,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만족과 감사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아등바등하면, 항상 내 삶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생각에 불평불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불자라면 앞으로 기도를 할 때 ‘욕심을 버려서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또는 ‘욕심을 버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서원해야 할 것입니다.
자비심은 생명을 살리는 힘
호주에 사는 어떤 부부에게는 유치원에 다니는 사랑스런 딸이 한 명 있었습니다. 딸은 매일 아침 유치원에 가기 전 우유를 한 컵씩 마셨는데, 어느 날 우유를 접시에 부어 밖으로 가지고 나가더니 잠시 후 빈 접시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며칠 동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딸을 이상하게 여긴 어머니가 몰래 뒤를 쫓아가 보았습니다. 딸은 우유가 담긴 접시를 들고 담 밖 으슥한 풀숲으로 들어가, 그곳에 접시를 내려놓고 뭐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소곤거렸습니다. 그러자 곧 무서운 독사 한 마리가 나타나 접시에 담긴 우유를 먹고는 사라졌습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한번 물리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독사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서 사실을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다음날 남편은 총을 들고 몰래 딸의 뒤를 쫓아가 뱀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딸은 큰 충격에 빠져 도통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병원에 데려가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영양결핍으로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욕심에 따라 같은 대상을 분별 짓습니다. 딸은 순수한 마음으로 뱀의 굶주림을 가엷게 생각했고 우유로 허기를 채워주었습니다. 욕심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뱀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욕심은 어떤 생명이나 물건을 내 소유로 만들고 싶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해하려는마음을 들게 합니다. 욕심을 버림으로써 해물지심(害物之心)이 없어진다면, 세상 모든 것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짐승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쌓여 있는 많은 원혼들의 보이지 않는 독기가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비심을 일으키면 독기는 상생하는 작용, 생명을 살리는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두려워하는 짐승들과도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행복으로 향하는 문
부처님 당시 교단을 어지럽혔던 사람 중에 데바닷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었고, 출가 전부터 부처님과 경쟁자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처님을 시기해해치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최대 후원자인 빔비사라 왕의 아들 아사세 왕자를 유혹해 왕위를 찬탈하도록 하고, 자신을 따르던 500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부처님 교단을 뛰쳐나와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을 죽이기 위해서 아사세 왕과 협의하고 여러 가지 계략을 꾸몄습니다. 먼저 부처님께서 산 밑을 지나가시는 틈을 타 군사를 동원해 산꼭대기에서 바위를 굴렸습니다. 하지만 바위는 부처님의 자비심 속에서 작은 파편으로 나뉘어 단지 발톱 하나를 빠지게 하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데바닷타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아사세 왕을 시켜서 부처님이 지나가는 골목에 며칠 간 굶긴 코끼리 떼를 풀어놓으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골목을 지나가실 때, 맞은편에서 굶주림에 성난 코끼리 떼가 맹렬히 돌진해왔습니다. 그런데 미친 코끼리들은 부처님 가까이 다가서자 아주 순한 양이 되어서 제자리에 엎드려 부처님 법문을 들었습니다. 자비심이라는 게 이런 힘입니다. 그야말로 자비무적(慈悲無敵)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천진불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어린 아이를 보면 좋아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어른들로부터 미움을 받기 시작하는 건 요구사항이 많아질 때, 즉 욕심을 부리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욕심이 없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또 그 사람을 향해서 욕심을 부립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면서 고통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기심은 항상 고통으로 향하는 문을 엽니다. 반대로 원력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는 마음이기에 행복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먼저 욕심을 원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원력을 세우고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바꾸어나갈 때, 그 속에서 삶은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진리로 채우려는 노력
만약 부처님께서 욕심을 많이 부렸던 사람이라면, 우리는 부처님께 예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를 크게 지배했던 많은 영웅들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징기스칸을 보고 절하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이 있을까요? 혹은 알렉산더나 진시황 같은 사람을 향해 예배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역사상 그들만큼 넓은 땅을 소유하고 위세를 떨쳤던 인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쟁취한 업적은 단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은 남의 스승이 될 수 없고, 남의 뜻을 이뤄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한 평의 땅도 가지지 못했지만 만인들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이 바로 복(福)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진리의 몸[法身]을 유산으로 받아서 내 몸과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로 채워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를 하면서 발원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 올리고, 죄업을 끊임없이 참회하며 불보살님의 공덕을 수의찬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욕심의 덩어리인 이 육신에서 진리의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상황을맞이할 수 있습니다. 강물을 소락제호(酥酪醍醐, 소나 양의 젖을 가공해 만든 최상의 음료)로 만든다는 보살계 수계의식문에 나오는 말처럼 욕심을 전부 버렸을 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주 전체를 다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처럼 욕심을 버려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수행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바로 보시입니다. 보시는 욕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환희심이 나오게 됩니다. 욕심을 버려야만 내가 가진 행복을 깨닫고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고, 늘 보시하는 마음으로 원력을 세워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최고의 행복을 찾아서
암도 스님 2011년 06월 (440)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일체개고 오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一切皆苦 吾當安之)’라고 사자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입니다. 즉 부처가 되어서 고해(苦海)를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오신 뜻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설하신 세 가지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하는데, 요샛말로 하면 일종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염화미소(拈華微笑)’입니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 계실 때, 불현듯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대중들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는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지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는 일화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아마 ‘자유’를 말씀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내가 찻잔을 드는 것이나 부처님께서 꽃을 드는 것은 모두 자유입니다. 또한 가섭이 웃는 것도 자유입니다. 곧 세상 모든 존재, 특히 생명은 절대자유로서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준동함령 개유불성(蠢動含靈 皆有佛性)].
자유(自由)라는 말은 이 세상 모든 일이 되고 안 되고는 모두 자기한테 달렸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주적이고 자조적이고 자립적인 정신을 가졌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나다’라는 마음자세로, 남에게 의지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절대적인 힘을 길러야지만 우리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죽림정사 다자탑 앞에서 설법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가득 찬 대중들 때문에 멀리 전법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가섭 존자는 법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넌지시 손짓을 해서 가섭 존자를 당신 옆에 나란히 앉혔다는 일화입니다. 이를 ‘다자탑전 분반좌(多子塔前 分半座)’라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하늘과 땅 같은 것이어서, 부처님의 이런 행동은 굉장한 파격이었습니다. 이는 부처님께 항상 말씀하신 평등을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듯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를 가졌던 분이 바로 부처님이셨습니다.
세 번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의 일화로 ‘곽시쌍부(槨示雙趺)’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제자들은 부처님 육신을 곽에 모셨습니다. 그때 가섭 존자가 늦게 도착해 곽을 세 바퀴 돌고 세 번 절을 하니, 곽의 뚜껑이 열리며 부처님 두 발이 밖으로 쓰윽 나왔습니다. 이는 곧 생사일여(生死一如), 죽고 사는 게 똑같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살고 죽는 문제를 뛰어넘은 최고의 행복을 얻으신 것입니다. 하루하루 이 몸뚱이 하나 유지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해 나간다면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같이 열반적정에 든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말 그대로 평화롭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류의 3대 목표는 자유, 평등, 평화입니다. 삼처전심은 현대적 의미로 살펴볼 때, 부처님께서 인류의 목표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얼굴을 만든다
평화라고 하는 원리는 알고 보면, ‘평화=자유+평등’입니다. 등식으로 말할 때는 간단하게 표현되지만, 실제 평화는 화합을 통해 이뤄집니다.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합심(合心)을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손과 발을 묶어놓고 강요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는 말처럼, 함께하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합심을 하려면 심리상태가 좋아야 합니다. 남이 잘되면 같이 웃으며 기뻐하고, 힘들면 같이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또 전체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봄으로써 모든 것을 이해할 줄 아는 안목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해를 잘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해탈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빠져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해탈을 통해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는데,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또 탈속을 해야 합니다. 탈속이란 속물근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속물근성이란 다른 말로 물욕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되면 탐욕이 되고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에, 과욕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심상이 그대로 관상으로 묻어난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은 항상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기 때문에 인상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늘 웃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의 얼굴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우리 인상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어려서는 가난하고 빈약했지만, 출가를 해 중노릇을 50년 정도 하고 보니 얼굴이 많이 변했습니다.
남을 보살필 줄 아는, 보살의 삶
사람들은 업에 따라 산다고 하여 자신에게 꼭 맞는 업만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업이라고 하는 게 참 묘해서, 서로 상충돼 보이는 것이 잘 맞는 수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남자와 여자는 신체구조 상으로 정반대지만, 서로 잘 맞지 않습니까. 세상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양이 존재하는 것은 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과 악은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본래부터 있거나 어느 한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의 원리를 알고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길러야 하겠습니다.
탐욕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은 의지작용입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야 탐욕을 버리고, 본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탐진치 삼독을 버리면 욕심이 사라집니다. 욕심이 없어지니 물욕도 가라앉고, 물욕이 없으니 속물근성이 빠져서 탈속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곧 해탈하는 것입니다. 해탈을 하면 이해가 잘되고, 이해를 잘하니 합심이 잘 돼서 절로 화합이 이루어져 가정이나 사회가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중생심을 불심으로 바꿔 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지성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眞)요, 의지가 추구하는 것은 선(善)이며, 정이 추구하는 것은 미(美)라고 합니다. 진선미는 인간의 3대 목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실하고 선량하고 아름다워지길 희망하며, 이런 사람을 우리는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보살이란 말 그대로 ‘보살피는 사람’입니다. 보살은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큰 사랑으로 용서하고 베풉니다. 오늘 이후, 내 것만이 아닌 주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까지 보살필 줄 아는 진짜 보살의 삶을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바로 우상
부산 영주암 회주 정관 스님
오늘 법문의 주제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우상 숭배의 종교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것이 우상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어떤 물건을 보고 우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물건을 적재적소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건을 지혜롭게 쓸 줄 안다면 우상이 아니라 소중하고 귀한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우상입니다. 밖으로 따로 우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남의 말만 믿고 따르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의 판단에만 의지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눈치 없이 구는 것이 우상입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나의 말만 주장하는 것이 큰 우상입니다. 우상은 객관적인 물건이 아닙니다. 우상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무형의 우상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상 타파가 곧 불교의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사찰에 모신 불상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우상이 아닙니다. 형체가 없는 마음의 법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불상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형상이 있게 되고 또 형상이 있으면 마음이 따르게 됩니다. ‘형상 따로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면 부처님의 덕행이 마음 가득 들어옵니다. 불상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 마음에 내재돼 있는 불성이 깨어납니다.
불상 그 자체를 믿고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수천 년을 이어 오는 민족의 역사입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불국사 석굴암 부처님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불교적 가치를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신비로운 마음의 진리와 우상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등록한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같은 물이지만 보살이 마시면 자비가 되고 어머니가 마시면 젖이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됩니다. 같은 불상을 보면서 기독교인들은 우상으로 보지만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와 내 안의 불성을 봅니다.
그런 까닭에 우상은 밖으로의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기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온갖 생각들. 이런 생멸법이 우상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자유자재로 하는 큰 지혜를 우상타파라고 합니다. 우상은 반드시 타파해야 합니다. 꼭 타파해야 합니다. 우상 타파가 곧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상은 마음 법의 형상화
오물이 방에 있으면 그 냄새가 화근이지만 농사짓는 밭에 가면 퇴비로서 대환영입니다. 영어책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영어 학자에게만 좋은 책이지 영어를 못하는 저에게는 영어책이 아무 쓸모가 없는 우상중의 우상입니다. 이렇게 천지만물은 쓰는 사람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물건에 매어 살면 우상이지만 그 물건을 잘 활용하면 지혜입니다.
중생의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밝게 깨어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가 아니고 ‘본래부터, 하늘 땅 이전부터’입니다. 다른 말로 불성(佛性), 혹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합니다. 불성의 위신력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맑고 밝습니다. 자성불은 시방 법계 항상 가득합니다. 불변이고 불멸입니다. 자성불의 진공묘유의 법은 산하대지에 현진광(現眞光)입니다. 과거의 빛도 아니고, 미래의 빛도 아닌 현재의 빛입니다. 자성불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지, 다른 무엇이 유아독존이 아닙니다. 자성불은 본래부터 유아독존입니다.
자성불 공덕의 빛이 항상 비치고 시방법계에 가득하다 해도 자성불 공덕은 어떤 형체가 없습니다. 색깔이 없고 모양이 없습니다. 뚜렷한 모양이 없는 것이지요.
자성불 공덕이 중생계에 가득하다 해도 어떤 형체가 없고 모양이 없고 색깔이 없으니 중생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믿지를 못하니, 밝은 빛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발심이 되고 안식이 되고 이적이 되고, 기적이 되고, 공덕의 빛이 됩니다. 믿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마치 방에 전깃불이 있어도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밝아질 수 없음과 같습니다. 텔레비전 속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가득해도 켜지 않으면 좋은 화면을 보지 못함과 같습니다.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형상도 본래 없지만 자성불 마음의 위신력을 모양과 형상으로 만들고 화려하게 색을 칠해 법당에 모신 것이 등신불입니다. 자성불 마음을 지극히 모신 곳이 법당이지 우상을 모신 법당이 아닙니다. 신을 모신 법당이 아닙니다.
형상 속에는 우리들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마음을 모시고 마음을 섬기고 마음을 믿는 종교이지, 우상을 모시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상을 타파하는 종교입니다. 우상을 타파해야지 우상을 왜 모시겠습니까. 마음 앞에 예경하고 기도하지 우상 앞에 예경하고 기도 드림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찌 우상입니까. 마음이 어찌 미신입니까. 마음이 어찌 삿된 것입니까. 마음을 믿는 종교가 어찌 잘못된 것입니까. 마음을 섬기는 행위가 어찌 잘못된 행위입니까. 마음 실체를 증득하고자함이 어찌 어리석음입니까. 마음 실체 근원지를 달관하려는 수행이 어찌 잘못된 수행입니까. 마음 근원지를 깨닫고자 구도자가 가는 길이 어찌 잘못 가는 길이고 염세입니까. ‘마음 따로 신 따로’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이 우상입니다. ‘신이 마음이고 마음이 신’이라는 일원론은 우상이 아닙니다. 일체중생 모두에게는 마음이 먼저이지 신이 먼저가 아닙니다. 신이 먼저라고 보는 어리석은 견해가 우상입니다.
대자유자가 되고 대안식자가 되고 대해탈자가 되고 대평화자가 되고 대지혜자가 되고 대구도자가 되고자 할 때는 자기 마음 근원지를 증득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만약 나를 형상으로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구하고자하면 절대 부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양과 색깔, 형상, 듣기 좋은 음성에만 집착하고 치우치고 이끌려 다니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형상으로서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지 ‘참’이 아니라는 법문입니다. 우상 타파의 법문입니다.
옛날 중국의 단하 스님은 “목불(木佛)은 불을 제도하지 못하고 철불(鐵佛)은 용광로를 제도하지 못하고 토불(土佛)은 물을 제도하지 못하고 석불(石佛)은 비바람을 제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성불 만이 의지할 안식처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불에 넣으면 소각되어 없어지니 실망스럽고 허무합니다. 쇠로 만든 부처님은 용광로에 넣으면 녹아 없어지니 믿을 수 없어 허탈합니다. 흙으로 조성한 부처님은 물에 넣으면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니 별 것 아닙니다. 돌로 조각한 부처님은 비바람 앞에 견디지 못하고 마멸되니 세상에 영원한 것 없다는 무상의 진리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성불만이 영원하고 믿을 수 있는 부처님입니다. 우리의 의지할 바입니다. 영원한 안식처는 우리들 자성불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형상불은 일시 방편이며 ‘참’이 아니며 거짓 방편이라는 단하 스님의 지혜로운 법문을 잘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실 때 그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상근기 중생은 형상과 모양, 색깔 이전 자기의 자성불 공덕을 바로 믿는 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도량에 형상불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근기, 하근기 대중은 눈에 보이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형상불이 있어야 그들은 제도가 됩니다.
우리 법당은 마음을 모신 법당이지 우상의 어리석음을 모신 곳이 아닙니다. 신을 모신 단견(短見)도 아닙니다. ‘신 따로 마음 따로’라는 이원론의 우상이 아닙니다. 신이 마음이고 마음이 신이라는 큰 지혜 일원론법입니다. 불교는 우상타파의 지혜입니다. 불교의 참선 공부가 곧 우상타파라 하겠습니다. 큰 지혜와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불교는 우상이다’고 단정을 짓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
“베풀면서 웃으니 여기가 극락이라”
“사랑하는 부처님! 인간은 말한 마디에도 흔들리는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말로써 시비를 가리고자 할 것 같으면 더 큰 시비만을 불러들일 뿐 시비는 끝없이 이어진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마음으로 내가 더 괴롭게 되고 미움은 오직 용서와 사랑으로만 끝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 나를 욕하고 비방해도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오직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와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만을 담아 놓겠습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하늘을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새처럼, 내 가슴 가운데 미운 사람을 두지 않을 것이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깨끗하고 향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모든 이가 꽃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꽃을 볼 때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끄럽고 냄새나고 미운 사람을 보면 우리는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누구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잘 해줄 때 나는 행복을 느낍니다. 나에게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면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끌려서, 또는 내 눈에 드는 것이 있어서 끌려갑니다. 계속 따라만 갑니다. 끝도 없이 평생을 끌려 다닙니다.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이 임박해 있을 깨닫게 됩니다. 왜 살았는지 모른 채 다음 세계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눈물의 배웅을 받으면서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납니다. 남 때문에 행복한 순간도 많았고 억울한 일도 참 많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울고 웃었습니다. 모든 행복과 불행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있고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좋았던 사람도 때로는 미울 수가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지난 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한 여고생이 애완동물로 뱀을 키웁니다. 뱀을 목에 감고 쓰다듬는데 저는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1년 365일 국수만 삶아줘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은 국수든 라면이든 밀가루로 만든 것은 역겨워 할 정도 싫다고 합니다. 뱀과 국수는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분별심을 내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좋아서 침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그냥 보고 있기도 싫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좋고 나쁨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은 개인적인 판단이지 이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기준대로 좋아하고 싫어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향인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극락세계를 염원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 자체를 모르는데 유토피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천하태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마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고 조용하면 지겨워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극락세계에 데려다 줘도 지겨워서 못산다며 나올 것이라는 역설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것은 마음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두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든지 불행하든지 내가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창조하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상황은 다른 누군가가, 절대 신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감정일 뿐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내 행복과 불행을 내 앞 사람, 이 세상에 맡겨 놓고 꺼내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잘해주면 행복하고 잘해주지 않으면 불행하니까요. 그러한 이를 ‘거지’라고 합니다. 상대방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걸려들지 않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자유이고 해탈입니다. 오히려 저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하든지 내가 저 사람을 쥐락펴락 할 수 있으면 그것이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살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불자라면 스스로 행복해야 합니다. 내 행복을 내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끌려가면 안 됩니다. 남을 오히려 웃기고 울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끌려 다니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도 끌려 다니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겠다고 발원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해서 뭔가 이루겠다고 합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서 성불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법문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변화한다고 느끼고 있는지요? 들은 사람이나 듣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어느 큰스님께 한 수행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내 말을 안 믿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수행자는 “맹세코 믿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실랑이를 한 끝에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꼭 믿을 것인가? 그렇다면 말해 주겠다. 자네가 바로 부처다.”
여러분은 이러한 진리를 확신하는지요? 기실 부처님은 우리가 다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 다음에 부처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부처’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다음에 부처가 되겠다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밥 먹을 때도, 밥만 먹지 않고 생각을 합니다. 목마를 때 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늘 불안과 고통이 따라 다닙니다.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돈이 많으면, 출세를 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내가 원하는 소원이 이뤄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가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런데 삼성 이건희 회장의 딸이 왜 자살을 했습니까, 부산시장이 왜 자살을 했습니까, 대법원장 출신이 왜 한강에 뛰어내렸을까요? 행복이라는 건 돈과 권력,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행복한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잘 못해줘도, 남편이 잘 못해줘도, 자식이 효도를 안 해도, 부모가 잘 안 주셔도 바로 여기서 그냥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조건 없이 행복해야 합니다.
조건을 따지면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내 아내가 예뻐지기를 기다렸다가 행복해야 되겠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내 남편 버릇을 고쳐서 행복해야 되겠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그냥 이 자리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그냥 여기서 부처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상대방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무엇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남 탓만 할 사람입니다. 상대방과 상관없이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생각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염불을 자꾸 하면 자기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또 화두를 갖고 있으면 ‘나’라는 생각을 놓게 됩니다. ‘무엇이 자꾸 좋다, 싫다 하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 곧 화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부처로 살라고 말입니다. 부처로 사는 삶은 다음과 같습니다. 베풀고 용서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무조건 웃고 사십시오. 거기에 극락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반입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는 바로 극락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법문은 부산불교신도회 법계정사 주지인 원오 스님이 7월 4일 부산불교신도회관 법계정사에서 열린 ‘2011 포교전진대법회 회향법회’에서 설한 것입니다.
'해주세요' 말고 '하겠습니다' 기도해야 이뤄진다
-보시공양으로 복덕을 쌓는 바른 수행을 실천해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참된 불자의 길을 걷자-
부처님 ‘가장 높은 절대적 깨달음’ 얻은 분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시며, 바르게 모두 아시는 분이시며, 지혜와 실천을 구족하는 분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잘 아는 분이시며, 가장 높은 분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이시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이시며, 가장 존귀한 분이시다.” <법구경> 삼보에 대한 명상
초기경전인 <법구경> 중 삼보에 대한 명상 가운데 부처님을 칭송하는 열 가지 이름에 관한 부분입니다. 여래십호란 부처님을 일컫는 10가지 이름으로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邊知), 명행족(明行足 ),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 이상 10가지입니다.
‘응공’은 응수공양(應受供養)에서 온 말로 깨달음을 얻었기에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응공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르하뜨(Arhat)’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아라한이나 나한이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합니다. ‘정변지’는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명행족’은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 ‘선서’는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가신 분을 뜻합니다. ‘세간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분이며, ‘무상사’는 그 어떤 것보다 위에 계시는 분입니다. ‘조어장부’는 대자대비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신 분, ‘천인사’는 하늘의 신과 중생의 스승을 의미하고, ‘불세존’은 불은 깨달은 사람, 세존은 중생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결국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반야심경> 중 ‘아뇩다라삼막삼보리’는 부처님의 두 가지 이름인 무상사와 정변지를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얻으신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부처님을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따타가타, 즉 무상정등각 여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최상의 절대적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이는 등 부처님에 대한 최상의 존경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입니다.
삼보란 무엇일까요. ‘불법승’은 진정한 보배입니다. 세속의 보물인 다이아몬드, 루비, 진주 등이 보배가 아니라, 붓다(Buddha, 부처님), 달마(Dharma, 가르침), 상가(Sangha, 스님)가 최상의 다이아몬드 귀걸이이며 루비 목걸이이고 진주 반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는 불자라면 부처님이라는 목걸이를 하고, 가르침의 귀걸이를 걸고,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손에 지니고 다니는 셈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한 번이라도 부처님이라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입니다. 지구상에는 65억의 인구가 사는데 그 중에는 평생을 살아도 부처님 이름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을 섬기는 종교이고, 또 하나는 신이 섬기는 종교입니다. 전자는 종을 만드는 종교이고, 후자는 주인을 만드는 종교겠지요. 세상에 신을 믿는 사람은 많지만 신들의 스승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는 단 하나 불교뿐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섬기지만, 불교는 신들이 섬기는 종교라는 설명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법당에서 불보살과 부처님의 제자 아라한은 상단에 모셔져 있고, 신은 중단, 영가는 하단에 모시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전에 마음공부를 잘해 번뇌에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신들보다 더 높은 상단에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영가단에서 신중단, 그리고 신중단에서 상단으로 오를 수 있을까요. 부처님 생전의 일화에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어느 마을에 지독하게 가난해 이름마저 극빈자라 불리는 사내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의 마을에 부처님께서 머물며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도반에게도 권선한다면 복덕이 생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고을의 관리들은 모두에게 공양을 올릴 스님의 명부를 작성하는 등 보시공양을 실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때 가난한 극빈자도 단 한명의 스님에게 내일 아침 공양을 올릴 것을 약속하고, 돈을 구하기 위해 하루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생계에 전전긍긍하며 일할 때와는 다르게, 덕 높으신 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공덕으로 복을 짓을 생각에 온통 환희심으로 가득했겠지요.
다음 날 관리를 찾아가 스님의 처소를 묻자, 모든 스님에게 백성들이 이미 공양을 올렸다고 말합니다. 실망하는 극빈자에게 단 한 분이 아직 공양을 받지 않았다며, 부처님에게 안내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기에 극빈자는 정성껏 지은 공양물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부처님은 공양을 받은 후 극빈자에게 축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히 이뤄지기를, 보름달이 가득 차듯이 그대의 바람이 가득 차기를, 그대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속이 이뤄지기를, 소원을 빌면 이뤄지는 마니보주처럼, 그대의 소원이 속히 이뤄지기를, 소원성취하소서.”
훗날 극빈자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보시의 공덕으로 나라의 고위급 관직은 물론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설화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복덕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공양을 올릴 뿐 도반에게 권하지 않으면 재복은 있지만 인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남에게는 시주하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시주하지 않는 사람은 인복은 있지만 재복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이도 저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복도 재복도 따를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작은 공양을 올리면서 너무 많은 소원을 바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봅시다. 선광사에서는 부처님 전에 작은 저금통을 놓고 ‘부처님 용돈 쓰세요’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많은 보시를 해야 다음 생에 부자로 살 수 있고, 그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라며 소원을 구걸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다음 생에 극빈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인’과 부처님의 가피 ‘연’이 만나면 소원 성취
우리는 인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인연은 원인을 의미하는 말로, 인(因)은 결과를 낳지 위한 내적인 직접 원인을 뜻하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 간접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연기의 이법을 깨달으셨다고 합니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이 미망(迷妄)과 고통의 존재임을 12인연으로써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어떠한 발원을 세웠을 때 인은 나의 노력, 연은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이 두 가지가 만나야 발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이 충실해도 연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하고, 연이 충실해도 인이 부실하면 과가 부실합니다. 인과 연이 모두 충실해야 과가 충실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연법입니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할 때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부처님께 기도만 한다면 이뤄지지 않듯,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로 건강하게 지켜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연이 조화를 이루면 뜻이 이뤄집니다. 그만큼 바른 신행생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를 할 때는 그 속에 발원을 담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앞서 말한 구걸형 기도이고, “~하겠습니다.”는 발원형 기도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기도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흔히 부처님은 ‘법신불’이라고 해서, 마음 깊이 참나 자리에 계셔서 색깔이나 모습, 음성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신불만 있다면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못해서, 법당 앞에 풀의 키가 한자나 자랄 만큼 발길이 뚝 끊기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나투신 부처님이 바로 ‘보신불’입니다. 바로 아미타불, 지장보살, 관세음보살님이 그러한데요.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보신불’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심안이 열렸거나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면 언제 어디서나, 꿈속에서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 텅빈 마음자리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신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이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어줄 수도, 잠을 잘 수도, 법문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모습도 나의 작품일 뿐이며,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과 미래는 내가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고정불변의 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여기 법당에 앉아 저와 마주하고 있는 행위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꾸면 여러분의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불교는 절대 숙명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 뿐 아니라 신들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과 우리는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도반이니, 굳이 신에게 종노릇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교훈적입니다.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이웃종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단적으로 비교해봅시다. 이웃종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신만이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은 인과설에 따른 당연한 이치입니다. 즉, 고정된 나는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나를 만들 것인가는 내가 만들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空)사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텅 비어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메시지입니다. 이때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내가 선택해 스스로 채워나가는, 내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아설의 핵심 이론입니다. 성불(成佛)은 행불(行佛)로부터 바로 여기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더 멋지고 아름답게 변하기에 우리의 삶은 판타지입니다.
관심 갖고 준비해야 미래에 존경 받는다
봉은사 초청 법회, 송광사 승가대학장 일귀 스님
서울 봉은사(주지 진화)에서 진행하는 강주스님 초청 세 번째 법회가 송광사 승가대학장 일귀 스님을 법사로 6월 12일 봉은사 법왕루에서 봉행됐다.
스님은 “한국의 미래를 부탁하기 위해 봉은사에 왔다”며 “봉은사 신도들은 미래의 한국이 지금처럼 위상을 잃지 않고, 한국 불교가 존경받는 세상이 되도록 지금부터 관심을 갖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다.
# 한국불자들 정신차려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강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 사는 분들은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축복받은 분들이다. 이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봉은사에 왔다.
강남이 한국의 1번지이듯이 봉은사는 불교의 일번지이다. 신라,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까지도 봉은사는 불교의 1번지였다.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분란을 극복하기위해 나타난 서산ㆍ사명 대사 등 많은 스님들이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봉은사에 모여 공부하고 수행하고 영혼을 맑히는 분들 덕택으로 한국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제가 굳이 말 안해도 되지만 이 말은 하고 싶다. “정신을 좀 차려주세요.” 여기 계신 분들은 한국 미래를 준비하는 브레인이기 때문에 이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을 차리려면 우선 ‘어떤 것이 부처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삼신(三身)이라고 해서 부처를 성질상 3가지 종류로 나누어 표현한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다.
<금강경>의 게송에서 부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찾으려 하거나 음성으로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불교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끝내 부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고 가르친다.
쉽게 말해 불성이라고 표현하는 법신은 만질 수는 없지만 우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오늘, 공간적으로는 가깝게 내 몸을 떠나지 않고 있다.
불성의 모습을 경전에서 세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굳고[堅], 예리하고[利], 밝고 순수한[明] 즉, 견리명(堅利明)이다. 이것은 어떠한 마구니가 와서 끼려고 해도 낄 수 없는 우리의 본 마음이다. 본래불성이다. 떼려야 뗄 수 없고 깨뜨려야 깨뜨릴 수 없고 없앨 수도 없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또 불성은 예리해서 어떤 번뇌가 일어나도 끊을 수 있다. 불성은 순수하고 밝아서 밤중에 해가 뜬 것처럼 앞길을 보여준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쯤 와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게 한다. 불성을 챙기기란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도 더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챙기느냐. ‘관세음보살’ ‘이 뭣꼬’ ‘절하기’ 등 여러 가지 수행으로 챙길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관계없다.
다음은 보신(報身)이다. 보신은 보살이 수행 정진한 과보에 의해 얻어지는 원만(圓滿)한 불신인데, 실제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보신불로는 아미타불, 약사여래 등이 있다. 보신은 닦아내서 깨끗해진 진리와도 같다. 흙덩어리에 있는 진주는 흙을 털어내면 빛나는 진주가 되듯이 우리도 법문을 듣고 108배하고 좋은 일을 하면 깨끗해질 수 있으며 끝내는 부처가 된다.
화신은 응신(應身) 또는 응화신이라고도 하는 데 교화할 대상에 따라 일시적으로 적절한 모습을 화작(化作)하는 불신이다.
수행을 하면 점점 나아지는 상승된 모습으로, 마지막에는 완벽한 부처가 된다. 석가모니도 그냥 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생을 통해 부처가 됐다. 우리도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된다. 우리가 점점 노력해서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은 부처를 만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화신이다. 내 입장에서는 수행을 해서 보신(報身)을 만들어가는데 내가 수행한만큼 다른 사람이 덕을 보게 돼 있다. 그 덕본 입장에서는 부처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화신이다. 따지고 보면 삼신은 하나인데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비춰진다.
우리가 현재 부처님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극락세계인지 한번 돌아보자. 우리 현실은 좋게 보면 좋을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정말 불안한 세상이다. 요즘 사람들이 집값이 하락한다고, 전세대란이라고 불안해한다. 요즘 지방 농촌 총각들이 결혼을 못해 외국인 신부를 데려와 결혼해서 다문화가정이 많이 생겼다. 외국인 엄마는 한국말을 못하고 아이는 혼혈이라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등의 문제가 많다. 15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됐을 때를 생각해보자. 보통일이 아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최근 중동사태를 비롯해 북한문제도 그렇고 외교, 안보문제도 심각하다. 환경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구 온난화를 우려해 곳곳에서 환경운동을 한다. 바닷물이 1℃만 올라가도 물고기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여수는 쥐포가 유명했다. 80%의 여수 사람들이 쥐포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지금은 쥐치 어종이 고갈했다. 경기가 많이 위축됐다. 이것이 물의 온도 1℃ 차이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일본지진, 쓰나미, 방사능 오염, 고엽제…. 부처로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세계가 지금 극락세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혜안을 갖고 준비해야
몇 십년전만 하더라도 불교가 강세였는데 지금은 기독교가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은 “불교가 망했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미래의 안목을 갖고 준비하면 불교가 세상을 리드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간곡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미래를 부탁하고 싶어서 왔다.
부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 난관을 헤쳐 나갔는지 생각해보자. 불교의 기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에 나와 있다.
부처님 당시에 제자가 “부처님 무엇이 고통입니까?”라고 질문하니, 부처님은 “생로병사가 고통이다”고 답했다. 이것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부처로서 살고 있지 못하고 중생으로서 살고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이것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무엇이 고통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근본불성을 알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쳤다.
이 고통은 어떻게 생겼을까. 무명과 집착 때문에 고(苦)가 생겼다. 다른 말로 12연기라 할 수 있다.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를 알면 고통을 헤쳐나갈 수 있다.
멸(滅)은 열반의 번역어이다. 열반의 세계, 불성을 제대로 알고 깨어있는 세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세계를 말한다. 탐진치의 욕망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다. 색은 보통 사람들이 잘못 보는 세계를 말한다. 공(空)의 세계에는 색(色)이 없다. 색이라는 것은 이 세계를 또다시 이미지를 씌워서 우리가 집착하는 세계로 만든 것이다. 예를들어 30년 전 동창을 지금 만났을 때 동창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동창의 이미지[色]를 씌워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만들어 낸 것일 뿐 허상이다. 공으로 본다는 것은 이 세계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색의 세계 따로, 공의 세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차이이다.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은 세계를 연기적 공으로 본다. 그 안목을 갖추려면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한다. 바로 도(道), 즉 중도(中道)이다.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자(者)는 반드시 세 가지 근본 수행을 해야 한다. 계학(戒學)ㆍ정학(定學)ㆍ혜학(慧學)이다. 계는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닦는 계율(戒律), 정은 심신을 고요히 하고 정신통일을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 혜는 번뇌를 파하고 진리를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우리는 지혜를 통해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문화, 독도, 북한 등 다양한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강남사람들은 미래의 한국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자만 잘산다고 잘살 수 없다.
경주 최부자는 흉년에 절대 논을 사지 않았다. 자기 마을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 이것이 최부자의 철학이었다. 그렇게 해서 최부자는 대대손손 부를 유지했다. 강남도 최부자 처럼 복을 계속 누리려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도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부탁하겠다. 중도를 위해서 계정의 삼학으로 닦아야 하겠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와 감사’다
기도로는 다라니를 외워야 한다. 다라니에는 힘이 있다. 다라니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의 원천은 본래불성의 작용이다. 본래불성은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에 의해서 나온다.
앞서 얘기했듯이 강남사람들은 ‘한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한 믿음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 힘은 삼업(三業)에 의해 나온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 욕을 들으면 힘이 빠지고 칭찬하면 기운이 난다. ‘할 수 있다’를 세 번만 하면 힘이 생기고 만 번만 하면 다라니가 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자들이 강남을 중심으로 미래를 준비하면 50년 후에는 반드시 불자들이 존경받으면서 살 수 있다.
감사함의 반대 개념은 ‘심심’이다. 심심할 때 우리는 어떤가. 심심하면 문제가 생긴다. 가난한 사람은 심심하지 않다. 부자가 심심하다. 그래서 부자들이 망할 짓들을 많이 하는 것이다. 심심할 때 절대 감사하지 않고 감사할 때 절대 심심하지 않다. 이 두 개는 절대 같이 있을 수가 없다. 심심할 때는 자기 뺨을 때려야 한다. ‘재앙이 올 징조구나’하고 내 뺨을 때린다. 감사하다고 느낄 때는 복이 오고 있다는 징조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어느 추운 겨울 굶주린 늙은 호랑이가 어슬렁 돌아다니다 새끼토끼를 만났다. 새끼도끼는 엄마젖을 배불리 먹고 나와 호랑이를 만난 것이다. 토끼는 속으로 ‘부처님 살려주세요’라고 했다. 호랑이는 뭐라고 했을까. ‘부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부처님은 달라고 하면 준다. 하지만 부처님은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 더 많이 준다.
이왕 부처님께 ‘~~을 해주세요’라고 할 바에는 ‘나도 남을 제대로 돕고 살게 해주세요’라고 해보자.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기다. 강남에는 감사하기가 남들보다 쉬울 것 같다.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새에게 열등감을 갖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는데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보통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다. 먹는 것은 로마시대 황제를 능가할 정도로 누리고 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는 서이다. 북한, 독도, 다문화 가정 등 미래세대까지 지속할 수 있도록 우리는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한국은 1970~80년대에 급속 성장을 했다. 현재의 70~80세 노령층의 희생과 노력덕분에 한국이 좋은 나라가 됐다. 성(成)을 빼앗기 보다 수성(守成)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개발, 투자 등에 헛욕심 내지말고 정신차려야 한다.
경제 후진국들이 우리처럼 누리고 살게 되면 환경오염이 악화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 보다는 누리고 살고 있다. 하지만 후손들의 것을 당겨쓰고 다른 지역의 복을 빼앗아 쓰고 있다. 지구촌 전체로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어디다 신경을 써야할까. 미래 불교에 힘을 써야 한다.
우리 앞에 있는 부처님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보자. 앞으로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오는지 의도를 제대로 알아야만 우리도 정신을 차릴 수 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살기 편해져서 부처님이 오시기를 정말 바라기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처님은 항상 우리곁에 있다. 너무 방심하면 부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유로운 날갯짓
해월 스님 2011년 07월 (441)
우리 삶의 제일 큰 문제는 자신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사실을 본 적 없이 자기 생각대로, 느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맹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존을 두고 서로 자신만의 견해와 주장으로 차이와 대립, 갈등과 폭력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는 매번 괴로움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도(道)란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도를 얻는다는 것은 맹인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자기 생각, 견해, 주장 등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즉 왜곡됨 없이 사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내면관조는 수행의 근간이자,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면관조가 없는 수행은 죽은 수행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인 『아함경』에서는 “수행하는 이들이여! 흘러간 과거를 뒤쫓지 마라. 오지도 않은 미래를 갈구하지도 마라. 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린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러므로 현재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깨어있으라! 또 흔들림 없이 동요됨 없이 정확히 보고 알고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여 바른 수행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게 정말 진짜일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느낌이 살아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느낌보다 중요한 게 본질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든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순수한 눈[如實知見]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 우리가 ‘본다’라고 할 때,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주와 객으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갈라진 틈 사이에는 언제나 어떤 생각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문화나 민족, 환경, 혼미, 착각, 전도, 관념, 소신, 신념, 지식, 사고, 경험, 종교, 교육 등 고정관념으로부터 나온 선입견들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는, 대체로 이러한 선입견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안다’라고 말할 때, 여기에도 아는 것과 알려지는 것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 것은, 우선 대상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집니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방법의 차이에 의해서 알게 된 결과는 마땅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장미는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색채라는 관점에서 본 장미의 실체이며, ‘장미과’에 속한다고 할 때는 분류학상으로 본 장미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장미가 갖고 있는 한 단면을 나타낼 뿐, 장미 자체를 다 말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주객이 분리된 상태에서 ‘알려진’ 것은 부분적 진실일 뿐입니다. 지성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고 언어로 표현한들, 그것은 개념에 불과할 뿐 살아있는 구체적 사실로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푸른 하늘의 표현)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주객으로 분리한 채 물으시다가, 마침내 주객이 일치한 상태[中道]에 이르러 자기의 참모습과 진리를 보게 되었다고 경전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며, 있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무엇이든 멈추어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 어떤 실체도 없다. 이 사실을 체득하는 일이 곧 선(禪)”이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선은 구체적인 ‘그것’과 마주 하는 일이요,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성과 지식을 부정하고, 인위적인 어떠한 이물질도 거부함으로써 세계를 불이(不二)로 인식하고 체득하는 게 선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의 작용이 멈추어진 무심(無心-어떠한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에서 시작하여 무심에 머물고, 무심으로 모든 본질을 체득하는 것. 이러한 체득을 일컬어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처럼 따가운 여름날, 무심에서 자신을 마주해 볼 일입니다. 자연의 마음인 자연심(自然心), 있는 그대로의 마음인 평상심(平常心),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인 청정심(淸淨心)으로 돌아가 산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서천 노을빛을 봐도 넉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행한다는 건 조금씩 새로워진다는 것
삶 속에서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말하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 사람입니다. 히스크리프의 품에 안겨 죽어간 캐시(폭풍의 언덕 여주인공)의 마지막 말은 “나는 행복합니다(I’m happy).”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행복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으면서도 주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마음 하나를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한 신도님께서 갈대를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산속에서는 너무나 흔한 갈대였지만, 여태껏 저는 산속에 살면서 그 흔한 마음 하나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 신도님의 소박한 행동 하나가, 마음 한 번 일으키면 모든 것이 부처님께 올릴 수 있는 공양이 된다는 사실을 제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끊는 것은 참 쉽습니다. 술잔을 들지 않고, 성냥을 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습성에 빠진 우리에게 잔 하나 들지 않는 일이, 성냥 하나 켜지 않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마음을 쓰기도 어렵지만, 몸으로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항상 작은 것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조금씩 자신을 바꿔가는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어느 순간 달라진 스스로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은 또 다른 삶을 향해 간다
제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가난한 유학승 신분에 햇빛 드는 비싼 집을 구할 수 없어서 빛 없는 집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그때 생각하길, 다음에는 절대로 햇빛 들지 않는 집에서는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해인사 근처에 혼자 공부하는 처소 하나를 장만하고 사방을 유리로 만들어 햇살 넘치는 집을 지었습니다. 그 후 대구 동화사 승가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어 가끔 오고가는 형편이 되었는데, 작은 결벽증이 있는 탓에 갈 때마다 유리를 깨끗하게 닦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소에 도착해 보니, 많은 참새들이 집 앞에 떨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유리가 허공인 줄 알고 날아가다가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가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모습을 본 뒤로, 이전만큼 유리를 깨끗하게 닦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청결한 것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은 새들에게 미안해하며 해당화 나무 밑에 고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이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그간 꽃을 피우지 못했던 해당화 나무가, 이듬해 너무나 예쁜 꽃을 피워 올린 것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궁금하여 꽃을 자세히 드려다 보았는데, 그 순간 꽃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 참새들아. 너희들이 해당화 뿌리로 들어가 봄날에 꽃으로 되살아났구나. 눈앞에 죽음은 죽음이 아니구나. 너희들은 죽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재는 해체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새롭게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잡초일지라도 새로운 세계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타서 맑은 쪽빛을 만들고, 호랑이가 푸른 하늘 새가 되어 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도님 집에서 죽은 백구는 개의 몸을 버리고 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그만 나비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될 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죽음과 탄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해체와 탄생 속에서 잠시 서 있을 뿐입니다. 집착과 아집과 교만, 착각과 전도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정이기에 또한 이 삶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고해 같은 삶이라 하여도, 고해 속에도 희망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는 새로운 세계를 열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전히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내일의 탄생도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꽃은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언제나 새로운 세계는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마음을 살펴라”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
오늘은 생사(生死), 즉 태어남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또 이렇게 한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불교를 믿고 일생동안 불교 신행 생활을 한 불자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90% 이상입니다.
불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나를 바로 알고 바로 살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인생은 전생에 내가 스스로 일으켰던 생각의 그림자이고 그 생각을 마음속으로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겨 실천한 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일으킨 생각은 이번 생의 씨앗이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실천한 옛 업연이 오늘의 내 인생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의 창조주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생명 있는 중생들을 유정(有情)이라고 합니다. 유정중생, 정으로 만들어져 정이 있기 때문에 유정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를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가 운명과 인생까지 낳아줄 수는 없습니다.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 농사’라고 하지요. 그건 어째서 그런가요? 자식의 육체는 내가 낳았어도 인생은 자기가 지어놓은 업에 따라 부귀영화와 희노애락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온 것처럼, 자식의 인생 창조주도 바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근본은 한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이 생사의 근본이요, 윤회의 원인입니다. 또 시비의 시작입니다. 어째서 그러할까요? 선(善)도, 악(惡)도, 지혜도, 법도 누가 만들어 놓거나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선악의 원인은 우리들이 일으키는 한 생각입니다. 착한 생각은 선의 원인이요, 악한 한 생각은 죄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어 놓은 업을 어떻게 돌려받을까요? 선업, 즉 좋은 일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닙니다. 나쁜 결과를 불러 올 수는 없습니다. 또 악업, 악보 등 나쁜 일은 나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있지만은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일이 한량이 없겠지만 뭉쳐놓고 요약해보면 세 가지 뿐입니다. 선업, 악업, 무기업이 그것입니다. 선업은 선보(善報), 악업은 악보(惡報)를 받는데 무기업은 선악간의 과보가 뚜렷하지 않고 힘없는 업이기에 이것을 무기업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지은 업은 삼 단계를 거쳐 가면서 받습니다. 금생에 지어 금생에 업을 받기도 하고, 전생이나 그 앞 생에 지어놓은 업의 과보가 내생에 나타나 내생 운명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금생에 지은 업이 저 후생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생에 태어난 우리는 과보를 받으면서 또 업을 짓습니다. 업을 지었기 때문에 과보를 받기 위해 내생이 필요하고 또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 다음 생에 가서 금생에 지은 업을 받으면서 또 짓기 때문에 내생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을 시작 없는 그 옛날 옛적부터 계속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 불연을 맺었습니다. 불법을 만났으니 오늘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임을, 그 이치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구제하고 제도해야지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나 대신 내 인생을 구제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을 구제하고 제도할 수 있을까요? 법문을 들어 배우고, 배운 것을 믿고 믿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실천하는 것이 생사의 근본이 되고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윤회 고(苦)를 벗어나려면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이 마음을 닦아 나의 본래 자성을 직관해 증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물질적인 육체만을 알지 이 육체를 끌고 다니는 참 나, 나의 주인공은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못 보느냐, 한 생각 일어나면 번뇌고 한 생각 일어나면 망상인데 이것이 내 생각인 줄 알고 번뇌의 앞잡이가 되어 생활하다 보니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래면목, 이 마음자리는 눈으로는 안 보입니다. 왜냐, 우리가 내 눈이라고 믿고 있는 눈도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유형색신에 속해 있는 물질적인 육안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허공과 같아 모양이 없고,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바로 보려면 마음의 눈을 떠 마음으로서 마음을 직관해야 합니다.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스님들께서 공부하다가 도를 깨달은 것을 견성했다고 합니다. 견성을 하고 나니 나의 성품을 볼 수 있고 그런 연후에 나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까 바로 깨달아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5분이라도 나의 마음 변화를,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명상을 하면서 말이지요.
불교는 남의 신(神)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바르게 관(觀)하고 내 성품을 관하는 것입니다. 나의 성품 자리를 항상 지켜봅시다.
소통이 곧 반야바라밀…경청과 배려로 가능
인경 스님
오늘의 법회 주제는 ‘명상과 가족 간의 소통’입니다. 가족 간에 화합을 하려면 소통이 돼야 합니다. 물론 소통은 가족뿐만 아니라 계층, 지역 간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족의 화합은 사회의 소통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소통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 행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소통이 있는 곳에는 안락과 마음의 평안이 함께 합니다. 소통이 없으면 막혀 있고 행복하지 못합니다.
소통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
그렇다면 소통은 어떤 것일까요. 소통은 ‘잘 통한다’, ‘너와 내가 잘 통하는 사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옆 사람과 손뼉을 마주 쳐 보십시오. 기분이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이것이 막히지 않고 통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선가에서는 이를 ‘도통(道通)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도(道)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도란 통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옆 사람을 보며 다시 한 번 손뼉을 마주 쳐 보십시오. 통하십니까? 이것을 또 선가에서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막히지 않고 잘 통하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 소통이 막히는 경우는 자기주장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재단하고 내 방식대로 뜯어 고치려고 합니다. 간섭하고 통제하려하면 상대방은 숨이 막히게 됩니다. 당연히 도망가려고 하고 겉돌게 됩니다.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의 일부, 소속의 멤버로서 소외당하는 것 같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함께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결국 소통이 안 되면 단절과 좌절을 부르고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잘 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소통이 잘 이뤄집니다. 또 한 가지는 조금 전처럼 마주 보며 손뼉을 치는 것,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서로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좋은 기분을 느끼게 되면 당연히 소통은 수월해 집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몸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가의 용어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습니다. 머리로 하지 않고 몸으로 소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통의 또 한 가지 방법은 상대방이 말을 할 때 잘 경청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서운 꿈을 꾼 소녀가 있습니다.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울면서 엄마를 찾는데 엄마는 시끄럽다며 호통을 쳤다고 합시다. 이러면 소통이 되겠습니까. 먼저 안아 주어야 합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안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해주어야 될까요. “괜찮아.”, “무서웠구나.” 이것이 소통이고 도통하는 것입니다. 왜 도통일까요. 그 순간에 길이 트이기 때문입니다. 바깥에 있는 길이 아니라 너와 나의 마음과 마음의 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 또한 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는 안정감을 느끼고 ‘엄마라는 사람은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 신뢰하고 ‘엄마 품안은 따듯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서 ‘나는 가치 있고 엄마로부터 보호받고 있으며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끄럽다”라고 단정해버린 경우는 그 아이가 엄마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겠습니까. ‘넌 가치 없어. 넌 내 가족이 아니야. 넌 왜 그렇게 울기만 해. 넌 나쁜 아이야.’ 엄마가 직접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런 메시지를 아이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 경우는 좌절감과 단절을 가져옵니다. 대화는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익혀야 됩니다.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에서 익혀야 됩니다. 암사자들은 서로 머리를 비벼대며 소통하는 법을 엄마 사자에게서 배워 오듯이 사람도 소통의 방법을 몸으로 익히고 배워야 합니다.
도통·이심전심도 소통 의미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읽어 주는 것을 ‘적극적 경청’이라고 합니다. ‘적극적 경청’에 대해 소개한 글을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공감해주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주는 것입니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설득하여 내 뜻대로 조정하려는 의도를 가질 때가 참 많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 대화를 할 때 권력에 의한 의지가 자주 표출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없고 나의 이기심만 존재합니다. 결과는 소통의 단절이며 갈등의 증폭과 깊은 불신입니다. 적극적 경청은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 속으로의 따듯한 동행이며 함께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관심으로 어려움에 처한 특별한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자애 명상’의 실천입니다.”
사자들이 얼굴을 비비는 것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면 소통이 됩니다. 가족끼리 여행을 하고 같이 사진을 찍고 같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면 가족이 함께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소통은 몸으로 하고, 몸으로 한 것은 함께 경험한 것이기에 이것이 소통에 큰 도움을 줍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행할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관자재(觀自在)라는 말은 관세음(觀世音)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자재한다는 말은 바람이 이곳저곳에서 불어온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소통이 잘 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무섭다고 우는 아이와 같습니다. 세상은 항상 웁니다. ‘이것 사라’, ‘저것 마셔라’ 라며 끊임없이 울어댑니다. 관세음보살은 그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적극적으로 경청해주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고 거기에 막히지 않는 자재한 보살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데 바라밀이라는 것은 저쪽 언덕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저쪽 언덕은 관자재한 곳이고 관세음한 곳입니다. 가슴이 막히지 않는 피안(彼岸)입니다. 상대적으로 차안(此岸)인 이쪽 언덕은 막힌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통이 막혀 있는 언덕은 차안이며 대화가 통하고 막힌 것이 뚫린 것은 피안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피안에서 사십니까, 차안에서 사십니까.
뻥 뚫린 곳을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다’는 건너다라는 말입니다. 반야는 지혜이고 뻥 뚫려서 너와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소통하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을 실천할 때를 말합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일체 고통과 액난을 건너는 자리가 피안이라고 했습니다. 오온은 꽉 막힌 것이 오온(五蘊)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꽉 막히게 합니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입니다.
자주 웃는 게 소통의 첫 걸음
‘색(色)’은 몸입니다. 엄마가 아픕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내가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몸이 따로 있는 것은 벌써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소통을 하려면 몸을 비벼봐야 합니다. 손뼉을 쳐서 몸이 통하는 것을 느껴 봐야 합니다. 몸과 몸을 비비고 마주할 때 소통이 됩니다. 소통이 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소통이 되는 것은 텅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텅 비지 않고 막혀 있으면 소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수(受)’는 느낌과 감정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통을 방해합니다. 아이가 우니까 엄마가 화가 나서 시끄럽다며 소리를 지르면 엄마는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려면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상(想)’은 생각이나 신념입니다. 먼저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너의 생각이 맞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며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해 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시원해지고 고요해지는 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모두 공하다’는 말은 너와 나의 앙금이 없어졌고 장애가 없어져서 내 마음이 시원해졌다, 나는 너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공이라는 말을 경험적으로 이해할 때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마음이 평화롭다, 개운하다, 가볍다 등으로 이해합니다. 왜 가볍습니까. 상대방을 인정하니까 개운해 지는 것입니다. 꽉 찬 것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읽어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의 길이 열리고 반야바라밀의 삶을 잘 이어갈 수 있습니다.
진리의 변주, 혹은 이 시대의 깨달음
법진 스님 2011년 08월 (442)
불교적 인간이란 누구인가?
제가 출가한 이래로 지금까지 ‘불교적 인간이란 과연 어떤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일까’라는 물음을 줄곧 가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주제에 대해 천착해온 시간이 사뭇 오래되었습니다. 많은 전제와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답을 내놓기가 힘든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인간됨으로 사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이며, 그런 가치가 다양한 불교의 역사적 전통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폭넓게 고려되어야 하는 주제입니다. 그 가운데하나의 단편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이 시간을 대신할까 합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름의 실천에 자신을 온전히 몰입하겠다’고 하는 정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바름의 실천)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이름(방편)으로 줄곧 강조되어 오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문제는 ‘고(苦)’를 수긍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는 몸이 아프고 마음이 쓰리는 따위의 고통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주 내용은 ‘인생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을 사는 동안 경험하게 되는 일은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본래 계획했던 바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 일은 처음 계획했던 바대로 추진되고 진행되고 결론 맺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무슨 이유로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개인 각자가 다른 이의 방식과는 달리 온전히 자기 방식으로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일은 그 개인이 본래 생각했던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 존재의 문제는 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는 최상의 방법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바름의 실천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내용을 대단히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전시켜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담론들의 근저에는 항상 ‘바름의 실천에 대한 온전한 몰입’이라고 하는 지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법논쟁(아비달마)의 풍부한 논의, 반야사상, 중관사상,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밀교, 천태, 화엄, 선, 정토 등 일체 모든 것이 여기(바름의 실천에 대한 온전한 몰입)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기본적인 내용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한다는 불가피성 때문에 적용이론은 다양한 방편으로 제기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어디서든지, 예외 없이 이것(바름의 실천에 대한 온전한 몰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해야 합니다.
현 시대의 불교적 실천
불교의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불교 사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대안이론이었다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금강경』은 반야경 계통의 경전으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어떤 것에도 머무름이 없고 집착됨이 없이(無住) 보시바라밀행을 실천한다(妙行)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잖습니까. 대승경전 가운데 『유마경』, 『능엄경』등 여래장사상 계통의 경전들도 근본망념으로 인해 생겨난 분별심을 삼매 등 바라밀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듯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그것을 적용하는 후대의 여러 사상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우리 시대에 가장 적극적인 바라밀이 어떤 것일까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불교 응용이론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출가한 스님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세간에 있는 여러분도 똑같은 무게감으로 가져야 할 공동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를 여러 가지로 진단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현대는 자본으로 모든 것을 충당하고 평가하는 자본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하면 불교 이론을 통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분배를 통한 바름의 실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지 고민하기보다, 가지고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어떻게 적절하게 분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연기적 실천의 적극적인 대안이 되리라 봅니다.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동체대비라고 합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인격체로 보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분배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에게 베풀어 주는 소멸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주는 또 다른 방식의 시여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깨달음
2,600년의 불교 역사 속에 등장한 많은 실천 대안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게 대안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성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무책임한 처사입니다. 지금은 불과 10년 전 상황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다릅니다. 일례로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휴대전화 같은 게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세상은 너무 많이 변했고, 지금도 변화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옛것 가운데 하나를 취한다는 자세는 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역사’라는 말의 유사점은 항상 변화를 생각하고, 변화에 대한 가르침을 찾고자 한다는 데 있습니다. 가끔 스님들 간의 대화에서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의 근본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곤 합니다. 물론 근본 이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 이치를 자기 삶 속에서 구현하면서 이상성을 찾아가는 전제는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점이 우리가 현 시대를 살아가면서 새로운 불교적 인간상을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에게 선(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착한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또 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쁜 것이다’라고 답하겠지요. 그럼 이 시대에 선과악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답을 할까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은 저 먼 원시시대나 현재나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서 선한 것과 나쁜 것을 찾는다면, 원시시대와 현재는 연기하고 있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저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이상적인 불교적 실천들을 찾는 일은, 불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하나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400~500년이 지나 화엄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던 일단의 조사(祖師)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관계성에 주목했습니다.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들 사이에서 온전한 화합과 소통을 이루는 것이 연기적 실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선(禪)에 대한 것 역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유별난 관심(삼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선 아닙니까. 정진과 삼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인 깨달음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바름의 실천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불교적 인격을 가꿔가는 자양분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기보다 열반의 종교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온전한 자각을 바탕으로,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고’의 문제를 해소한 상태 혹은 그 가치(‘고’가 소멸된 열반)를 추구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역사에 드러난 이상적 인간상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 말씀을 자각한 사람을 일러 ‘아라한’이라고 했으며, 후에 대승운동가들은 ‘보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거창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살면서 실천할 수 있는 불교적 이상성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것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례로 제가 경험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 때부터 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본 적도, 길러본 적도, 키우는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적도 없습니다. 아이에게 어떻게 해줘야 좋아하는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 아이 옆에 가는 걸 조금은 두려워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한 아이를 맡아 봐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돌본 경험도 없고 누구한테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니 그 아이에게 어떤 걸 해줘야 하는지 전혀 몰라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황에 부닥치고 보니 특별한 어떤 걸 해줄 수는 없었고, 그저 눈을 맞추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어떻게든 애를 쓰니까 아이도 대단히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아이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호의적인 마음으로 애를 쓰는 내 정성이 아이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이렇듯 바름의 실천에 온전히 몰입하는 건 거창한 게 아닌 것입니다.
작은 행동이나 습관 하나하나가 내 삶과 인격을 만들고 나아가 또 다른 삶을 만들어내는 힘이 됩니다. 늘 바름의 실천을 염두에 두고 매사에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이 곧 연기적 실천이 되고 불교적 인격을 가꿔가는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불교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을 끊고 선업 쌓으며 중생을 위하는 것이 계
법장사 회주 퇴휴 스님
오늘은 삼취정계(三聚淨戒)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취정계의 삼취정은 석 삼(三) 모을 취(取), 깨끗할 정(姃), 즉 세 가지의 깨끗한 계를 모은다는 뜻입니다. 삼취정계에서는 지켜야 할 계를 셋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 계가 섭율의계(攝律儀戒), 둘째 계가 섭선법계(攝善法戒), 셋째 계가 섭중생계(攝衆生戒)입니다. 흔히들 계에 대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뜻으로 아는 불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삼취정계의 뜻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삼취정계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섭율의계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모든 계율을 잘 지켜서 모든 악을 끊는 것입니다. 둘째 섭선법계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잘 다스려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는 섭중생계입니다. 섭유정계(攝有情戒)라고도 하는데 유정은 중생과 같은 말이니 중생을 이익 되고 복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섭중생계는 섭요익중생(攝饒益衆生)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요익(饒益), 풍요로울 요를 사용해서 모든 중생들이 풍요롭고 이익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계입니다. 일체의 계를 잘 지켜 악을 막고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선업을 지으며, 궁극에는 중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삼취정계의 바른 뜻입니다.
이런 삼취정계는 소승과 대승불교의 사상이 하나로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자리이타(自利利他) 사상입니다. 뜻 그대로 나도 이롭고 또한 남도 이로운 것입니다. 또 이를 좀 더 확장하면 자각각타(自覺覺他)가 됩니다. 나도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도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부처가 되고 남도 부처가 된다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남도 부처가 된다는 의미는 남도 부처가 될 수 있도록 내가 돕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자리이타, 혹은 자각각타의 가르침은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큰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열심히 수행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도 또한 깨달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나도 행복해야 하지만 남도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자각각타의 마음입니다. 윤리적 측면에서 보면 단순히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등의 가르침이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입니다. 이 역시 자리이타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인데 나와 남이 함께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자리이타, 자각각타와 맥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이런 차별 없는 마음이 대승불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승의 수행자를 흔히들 성문수행자라고 합니다. 계율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행을 완성해 나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계를 철저히 지킴으로서 자신의 수행을 완성해나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반면 대승의 수행자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하는 자비심으로 계율을 지킵니다. 같은 계율이라도 이를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중생의 완성을 돕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을 위한 활동이 곧 내 수행의 완성에 도움이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입니다. 남을 돕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곧 내 수행을 돕고 궁극에는 내 깨달음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선행이지만 결국 내 수행을 돕고 완성시키는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 헌신할 때 나도 또한 사람답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 대승 계율의 특징입니다. 삼취정계는 이 같은 대승의 특징을 잘 담고 있는 대표적인 계율입니다.
섭율의계는 부처님이 정하신 계율을 잘 지켜 악행을 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불자오계의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불자오계는 우바새오계 또는 우바이오계라고도 합니다. 이 불자오계를 잘 지킨다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몸과 말과 마음에 허물이 있는지를 돌아보고 허물이 없도록 유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허물을 짓지 않도록 스스로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늘 선행해 청정한 상태를 유지시켜나가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계입니다.
그런데 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교단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사부대중이 필요합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면 칠중(七衆)이 됩니다. 비구, 비구니, 식차마나, 사미, 사미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이들 각각의 대중들은 지켜야 할 계율이 조금씩 다릅니다.
출가 수행자인 비구는 250개의 계를 지켜야 합니다. 비구니는 348개, 식차마나 6개, 사미 10개, 사미니 10개, 그리고 일반재가불자들, 우바이 우바새는 5개의 계를 받습니다. 또 팔재계(八齋戒)라는 것이 있는데 재가불자들이 평상시에 수행자처럼 살순 없다는 점을 감안,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그 동안에만 출가자처럼 수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지켜야 할 8가지 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팔관재계(八關齋戒)라 합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계율을 잘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섭율의계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허물은 살피되 남의 허물을 살피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또 계를 범하는 이가 있더라도 성내는 마음, 나쁜 마음을 갖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오직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섭율의계의 특징입니다.
자신의 지켜야 할 계는 철저하게 지키되 다른 사람들이 계를 범했다하더라도 분노를 일으키지 말고 자비로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섭선법계는 일상생활에서 선한 법을 실천해 나가라는 의미입니다. 번뇌와 망상의 원인이 되는 신구의 삼업을 잘 살피고 다스려, 선을 쌓아가라는 당부입니다. 섭중생계는 중생의 삶에 이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끊임없는 자원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계율을 잘 지키고 나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는 것. 이것이 삼취정계의 바른 뜻입니다. 결국 삼취정계는 소승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대승적 이타행을 부과시킨 것입니다.
“해와 달이 적절하게 조화가 잘 이뤄졌을 때 모든 생명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지만, 이 조화가 깨어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 받게 된다는 비유를 들어 삼취정계를 조화롭게 실천해야 한다”
1500년 전 원효 스님께서는 ‘범망경’ 보살계본사기에서 계율에 대해 해와 달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뜨겁고 따뜻한 것이 좋다 해도 계속 태양만 비춘다면 이 세상은 생명이 살 수 없을 뜨거운 사막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태양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암흑천지에 남극과 같은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섭율의계와 섭선법계만 지키고 섭중생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소승의 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타행이라는 보살행이 없으면 성불이라는 깨달음의 열매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섭중생계만 있고 섭율의계와 섭선법계가 없다면, 즉 남을 돕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는 하나 자신을 성찰하고 닦지 않은 까닭에 공허하고 허망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내 마음살림을 잘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살림도 도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사람 역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없기에 깨달음이라는 열매를 취할 수 없습니다. 자리와 이타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므로 수행에 있어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완성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고 안주해 버린다면 진정한 완성은 이룰 수 없습니다. 그저 공허할 뿐이고 한편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남을 챙긴다는 것은 그 자체로 허망한 것이며 또한 어불성설입니다.
자리와 이타가 조화를 이뤄 적절하게 구현됐을 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향한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리이타, 자각각타, 상구보리하화중생은 선후가 없이 항상 함께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과 행동을 잘 살피고 단속하면서 또한 이를 기반으로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길이며 지향점입니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법타 스님 2011년 09월 (443)
인생의 아름다운 화원을 가꾸기 위해
“모두들 세상에 나와 혼자 먼 길을 갑니다. 가장 힘들 때에도 혼자 스스로를 다독이고 혼자 결정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외로운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나만 외로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외롭습니다.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사람도 그대만큼 외롭습니다. 그대가 거기 있어 외로운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외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대가 거기 있는 것처럼 소박한 모습으로 서서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이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꽃밭으로 가꾸는 것처럼 그대도 그렇게 꽃으로 있습니다. 그대 힘겨워 마세요. 그대의 모습이 다른 이에게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도종환 시인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중에서 일부를 따온 것입니다. 여기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는 세상에 나올 때부터 홀로 나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제아무리 쌍둥이라 한들 동시에 나오는 경우는 없고,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떠날 때는 혼자 가기 마련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은 외로운 존재들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함께 나눌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씨족이니 부족이니 하여 집단을 이루어 생활해 왔고, 최근에는 민족이니 글로벌국가니 하는 이름으로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갖는다거나 철학, 문학, 예술 활동 등을 하는 이유 역시 외롭지 않은 인연을 짓기 위함입니다.
한 송이의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함께 모여 있으면 더 빛이 납니다. 우리네 삶도 이와 같아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생의 아름다운 화원을 가꿔나가야 합니다. 혼자 힘겨워하기보다 서로 조화를 이뤄 함께 살아갈 때,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부처님을 ‘색무애자재 구세대비자(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풀이하면 ‘어디[色]에도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되,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구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테마가 바로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풀며 살라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 그리고 공자가 말한 인(仁)을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크게 봐서는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내용이 다릅니다. ‘자비(하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크게 사랑하고 크게 가엾게 여김’,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에게 복을 주어 괴로움을 없애도록 함[拔苦與樂]’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비의 극치를 불교에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말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불교가 기독교나 회교와 같은 유신론적 종교와 차이를 갖는 지점입니다. 신을 인정하는 종교의 경우 창조주를 따를 때에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신했을 때는 가차 없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지요. 하지만 부처님의 자비는 이러한 조건부의 사랑이 아닙니다. 때때로 부모의 사랑을 부처님의 자비에 비유하곤 하는데, 자식이 아파하면 그보다 더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이 부처님의 자비와 닮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서울대에 합격하면 사랑해주고, 떨어지면 사랑하지 않는다? 나한테 용돈을 천만원씩 갖다 바치면 예뻐해 주고 아니면 미워한다?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자비 역시 일체중생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무한하고 지극한 마음인 것입니다.
불교 경전에 보면 자비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유마경』에는 대승보살의 자비심과 관련된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을 보내 유마힐 거사 집으로 병문안을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평상에 누워있는 유마힐 거사를 본 문수보살이 병이 생긴 이유와 물리칠 방도를 묻자, 유마힐 거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일체중생이 병들어 있음으로 나에게도 병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진다면, 내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중략) 보살의 병은 대비심(大悲心)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불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비심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인 동시에 자비의 본질을 드러낸 함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지도론』에서는 이런 자비를 다시 단계별로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로,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일상사에서 주고받는 베풂이나 위로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법연자비(法緣慈悲)로 제법무아의 진리를 깨닫고 베푸는 자비입니다. 세 번째는 무연자비(無緣慈悲)로 온갖 차별적 견해를 떠난 절대평등의 경지에서 행하는 자비,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말합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실천하는 자비
『화엄경』에서 말하길 “대비란(大悲) 중생의 귀의할 곳 없음을 관찰하고, 중생이 사악한 길에 떨어짐을 관찰하고, 중생이 선근 없음을 관찰하고, 중생이 긴 생사에 잠자는 것을 관찰하고, 중생이 욕(欲)에 묶여 있음을 관찰하고, 중생이 선법을 바라지 않음을 관찰하고, 중생이 제불의 법을 잃음을 관찰하여 그때마다 대비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언뜻 거창해 보이지만 자비를 행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실제로 자비의 실천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속가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결혼을 하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가 미국에 갈 일이 있어서 잠시 틈을 내어 동생 집을 찾았는데, 웬일인지 제수씨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울면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초등학생 큰아들이 멕시코 출신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학교도 잘 안 나가고, 심지어 담배까지 피우며 말썽을 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불 같은 성격을 잘 아는지라 말도 못하고 혼자서 속병을 앓아왔다는 제수씨를 보니 저 또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고민 끝에 동생을 불러놓고 사정을 이야기한 뒤에, 큰조카를 1년 동안 지리산 청학동에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서당 선생님께 잘 살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청학동에 큰조카를 맡겼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도심가에서 살던 녀석이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산골짜기에서 지내자니 오죽 답답했을까요. 한 번은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아버지는 내 원수다.”라고 편지를 써 보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년이 지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돼서 조금 더 있다가 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그동안 익힌 한자실력을 선보이며 또래들 사이에서 소위 ‘스타’가 되어 학교생활도 잘 했다고 합니다.
자비의 실천이란, 이렇게 그저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제 조카가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 환경의 변화도 한몫 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이 내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존재들로 넓어진다면, 그것이 곧 자비를 실천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희심으로 쌓는 자비의 공덕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비행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보시입니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을 지닌 말로서, 흔히 우리가 불공을 드리거나 절에서 불사를 할 때 금전이나 물품을 내놓는 경우가 다 보시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가난하여 보시할 재물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사람은 보시를 할 수 없으니 평생 자비의 공덕을 쌓을 수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께 돈이나 재물이 없이도 자비의 공덕을 쌓을 수 있는 팁을 하나 알려드릴 테니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남이 보시를 행할 때 수희심(隨喜心, 남의 선행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곧 자비의 공덕을 쌓는 일이 됩니다. 『인과경』에 보면 “수희찬탄하는 공덕은 보시와 매 한가지여서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복을 내가 진심으로 기뻐함으로써 그 복이 똑같은 크기로 내게도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일이니 누군들 자비의 공덕을 쌓는 게 불가능하겠습니까? 앞으로는 누군가 보시하는 모습을 볼 때, 괜히 입을 삐쭉 내밀고 시기하거나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저 분은 평소에 얼마나 많은 복을 지었으면 저렇게 보시를 하실까. 저만큼은 못 되더라도 성의껏 나도 보시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내시기 바랍니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작은 실천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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