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보기

생명의 실상-다니구찌 마사하루

통융 2013. 2. 2. 11:24

<생명의 실상(生命의 實相)>

 

다니구찌 마사하루(谷口雅春)

 

내용은 간단하다. 요약하면 "마음의 법칙"과 "인간의 실상"에 대한 것이다.

즉 각자 생명의 실상을 발휘하라는 글이다. 현실에서 일어나
는 수많은 마음의 갈등을 설명

하면서 어려운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이토록 인간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게 하

그런 책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생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1.  신(神을) 생활 속에 존재케 하자면

 


백만 촉광의 빛


우리들은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과거의 불쾌한 일이나 미움이나 슬픔, 치욕, 혐오 등 일체의 마음의

상처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그것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한다. ‘미움을 잊어버리자’고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

하지만 아무리해도 그것을 잊을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물건을 가득 채워 둔 창고 속에서 작은

촛불을 비추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간해서 마음의 창고가 전부 밝아지지는 않기 때문에 창고 속의

정리가 진척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작은 촛불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자력적인 소아(小我)의 노력이다. 소아의 노력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힘은 아니다. 神을 향하라. 신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계셔서 비유하면 백만 촉광의

빛과 같은 것이다. 신의 빛에 비추어지면 일체의 암흑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영적 파동에 파장을 맞추어라


신은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를 해도 부탁하지 않아도 부탁을 해도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사랑과 지혜의 빛으로 비추어주고 계신 것이다. 방송국의 텔레비전 방송과 수상기를 설치하고 있거나

설치하지 않거나 채널을 맞추거나 맞추지 않거나 항상 은혜를 영적 파동으로 보내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의 전파의 파장에 맞추지 않으면 그 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들이 완전한 신의

은혜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면 신의 영적 파동에 파장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은 영(靈)이고 물질이 아니니까 신의 은혜는 영적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서 거기에 우리들의

파장을 맞추었을 때 텔레비전의 전파가 형상으로 나타나오듯이 현상세계에 형상을 가진 은혜로 나타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은혜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오히려 은혜는 나타나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를 바라는 신심은

이기적 마음이고 신은 이기주의자가 아니니까 이기심이 신의 영적 파동에 동조 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은혜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졌을 때 진실로 훌륭한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깃들여 있는 것


자기에게 깃들인 신을 아는 것이 근본이다. 안다고 해도 신은 물체가 아니니까 육안으로 봐서 아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 의해 짐작한다거나 깨우침에 의해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의 내면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쓸 수 없다. 호주머니에 일억 원의 수표가 들어 있어도 그것이

있는 것을  알 때까지는 그 일억 원의 수표는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무리 자기 안에 있어도 그것을 알 때까지는 자기의 희망에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게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단순한 물질적 수표는 아니니까, 우리들이 발견하기 전부터 항상 인간을 지켜 주시고 갖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시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기를 지켜 주시는 신이 계신 것을 알 때까지는, 방송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기 이전에는 방송국에 파장을 맞출 생각이 없는 것처럼 신의 영적 방송에 파장을 맞추

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니까 그만큼 신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적은  것이다.

 

마음의 채널 

 

우리들은 기도할 때 또는 실상관을 할 때 마음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 마음을 동요시킨다고 하는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의 파장이 변한다고 하는 것이다. 당신의 라디오 수신기나 또는 텔레비전수상기이 파장

이나 채널을 시종 변화시키고 있으면 결코 완전한 방송을 시청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의 ‘현상의 마음(두뇌의식)’으로 자기의 사건을 지배하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신에게 전탁하고 신의 지혜에 의해 자신의 사건을 지배해 주시도록 마음의 채널을 전환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두뇌의 지혜로 움직일 수 없는 생리작용 등은 항상 내면에서 인도하고 지배해서 우리들의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게 해 주시지만, 인간의 두뇌의식으로 지배할 수 있는 부분 (인간관계나 사업의 경영,

발명이나 기술이나 창작등의 부분)은 인간자신의 자유의사를 존중해서 자유재단(裁斷)에 맡기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시원찮은 사업경영을 하거나 아무리 인간관계가 어렵게 되더라도 신은

거기에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완전자유를 베풀고 계시다. 오직 인간이 신의 방향을 향해서 신에게 그 문제의 조정을 부탁

드릴 때에만 신은 인간의 문제를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절대로 버리지 않는 것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먼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 자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해 보아도 거절당하거나 배척되거나 할 뿐으로, 이쪽이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상대편으로부터 거절되는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어서 사랑하려고해도 어지간히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그와 같은 때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분이 있다. 그분을 사랑하라.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는 대체

누구일까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신이다. 그것도 멀리 천상에 있으며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신벌을

내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신이 아니다. 당신의 안에 깃들여 있는 신이다. 그 신을 사랑하라. 그 신이 기뻐

하도록 생활하라. 당신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당신을 사랑하는 신이 계시고 그 신을 당신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신과의 일체감


진실로 당신이 신과의 일체감을 획득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하나도 성취되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풍족하게 베푸는 사랑으로 사랑하라. 새로운 인생이 당신 앞에 열려올

것은 틀림이 없다.

두려워할 필요도 불안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불안이나 공포가 일어나오는 것은 당신의 신과의 일체감이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과의 일체감이 완전치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가지고 좀 더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져라. 그러기 위해서 좀 더 기도에

깊이를 가져라. 좀 더 열심히 . 더 많이 실상관을 하라. 그때 당신은 신과의 일체감이 좀 더 깊어지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생기고 자신의 능력에 확신이 서서 모든 문제에 대해서 공포도 불안도 느끼지 않게 되고

희망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밝은 상념(想念)


우리들 인간은 ‘신의 자식’이며 자유의사가 베풀어져 있고, 자기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의 자유선택의

권리와 그 선택한 것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도 함께 베풀어져 있느니 것이다. 이 도구라는 것이 다름 아닌

자기의 상념과 말과 행동인 것이다.

우리들은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밝은 상념과 말과 행동에 의해 행복한 좋은 운명으로 만들어 내고, 소극적

이고 파괴적인 어두운 상념과 말과 행동에 의해 불행한 나쁜 운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들이 좋은 상념을 만들어 낼려고 생각한다면 현실의 불행이나 병 등에 마음이 향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먼저 신의 방향으로 마음을 향하고, 신이 가지신 모든 좋은 성품을 생각에 떠올리고, 그것을  찬탄

하고 그것을 감사하는 상념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 좋다.


내계(內界)와 교통하는 법


일상생활의 움직임에 우리들이 농락되고 있는 한은 갖가지의 일의 이것에서 저것으로 항상 마음이 난동

하여 외계에 끌려 다니는 생활이 되어 버려서, 자기의 내계와의 교통이 두절되기 때문에 내계의 예지로부터

인도를 받을 수 없게 되고, 예상 밖의 실패나 재난을 당하게도 된다.

우리들은 하루 중 30분간쯤은 반드시 묵좌해서 외계의 갖가지 사건이나 상태로부터 암시 혹은 유혹으로

부터 떨어져 있으며 내계와 직통하는 길을 항상 열어놔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상관을

매일 1회 또는 조석으로 행하는 것이 대단히 효과가 잇다.

후꾸오까시에서 신도대회가 있었던 1962년 8월26일의 신문에 ‘무념 무상!’ 이란 제목하에 西林寺에서 매일

아침 하고 있는 ‘어린이 하기 좌선회’의 사진이 계재 되고, 그 좌선의 공덕에 의해 “공부를 잘 하게 됐다”,

“부모의 말을 잘 듣게 됐다”, “집안일을 잘 돕게 됐다”고 부형들 사이에서 대호평이라고 하는 기사가

실려져 있었다.

모든 정좌적 묵좌의 수행은 외계의 떠들썩한 것에 끌려 다니고 있던 마음이 내계에 차분히 가라앉아서,

거기에서 실상의 예지의 인도를 받아오게 되는 것이니까 좌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은혜의 본원을 알자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우리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모든 것이 실은 그 본원이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진실로 알았을 때 진실로 신에게 감사의 염이 일어나오는 것이다.

신에게 모든 좋은 것이 현실로 화하게 되는 감사의 염이 진심으로 일어나올 때 우리들의 정신 파동이 ‘신의

나라’와 완전히 영교할 수 있으니 정신파동이 되어 와서 ‘신의 나라’에 이미 있는 건강, 재복, 희망실현,

기타 것이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다


당신의  유물론을 떨쳐 버려라. 그것이 신으로부터 ‘무한’을 당신에게 풍부하게 흘러나오게 하는 통로를

여는 것이 된다.

그러기 위해 항상 성전, 신지(神誌), 성경을 읽는 것이 좋다. 이윽고 때가 온다. 그것은 신속하게 오는

사람도 있고 약간 더디 오는 사람도 있지만, 당신은 마침내 잠재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유물론을 씻어

내고 ‘신의 자식’의 실상을 현현(顯現)하고 자기가 영적 실재인 것을 선명하게 깨우칠 때가 오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유자재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미 과거의 ‘자기 축소한 자기’는 아닌 것이다. 위대한 ‘신의 자식’이며 ‘신의 최고의 자기 현현’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진정 모든 방면에 자유자재한 자기를 발견하고 가는 곳마다 안 되는 일 없는 실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2. 자기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괴로움

 

윌리엄 제임스교수는 심리학, 철학, 종교를 하나의 실로 연결시키면서 그것을 실생활에 응용하는 이론을

창안한 제1인자라고해도 좋을 만한 사람인데, 그는 인간이 보통의 상태에 있어서는 ‘이미 자신의 힘은 모두

내놓았다’고 생각될만한 때에도 그것은 자기 안에 깃들여 있는 진짜의 힘의 25%밖에 내놓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한번 ‘자기 안에 깃들여 있는 신’을 자각한다면, “인생에 무슨 의의가 있느냐”든가, “사는 것에 무슨

보람이 있느냐”하는 등의 의문이나 괴로움은 스스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냐 하면 “인생에

무슨 의의가 있느냐”는 등의 괴로움은 ‘자기의 안에 깃들여 있는 신’을 육체의식에 인정케 하려고 해서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스러운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안에는 이미 ‘신’이 깃들여 있고 그것을 인정케 하려는 안으로부터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괴로워지는 것이다. 신이 깃들여있지 않다면,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가 인간이라면, 육체 그대로의 자각일

뿐으로 아무런 모순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니까 ‘인생의 의의’를 생각하는 괴로움 같은 것이 일어나올 수

없는 것이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인식

 

 

우리들은 과연 일면에 있어서는 물질적 육체이고 물리화학적으로는 물질 우주에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안이비설촉의 오관을 통해서 물질 우주를 느끼고 그것에 의해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

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영혼은 과연 육체의 사후에도 존속하는 것인가, 신은

있는가, 없는가 등등을 생각한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가 그 일면은 ‘보이는 물질세계’에 관계를 가지면서 그 반면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계를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는 것을 인식하는 데는 안이비설촉의 오관의 감각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서 우리들은 정신통일에 의하든가, 영적수행에 의하든가, 좌선에 의한 심신탈락, 탈락심신의경지에

들든가, 실상관을 하든가 하는 등의 방법에 의해 육체적 감각 이상의 것을 내부로부터 불러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연계의 법칙과 마음의 법칙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의 지혜로부터 발현한 생명현현의 질서이다. 따라서 법칙에 순종해서 따를 때

생명이 싱싱하게 발현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법칙을 위배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순조롭게 나가지

않고 고통이나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께서 신벌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현현의 질서에 반(反)했기 때문에,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 수류를 따라 내려가는 사람보다도 보다 많은 고통을 받고 때로는 물에 빠지는 일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은 사람의 말을 하시지 않으므로 법칙을 인간 스스로가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칙에도 물질계의 법칙과 마음의 법칙이 있지만 이것은 어느 쪽이나 생명이 현현할 경우의 질서로서 어느

쪽이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물질계의 법칙이라도, 고대인은 그것을 발견하는 정도가 낮은 것

이니까 부지불식간에 자연의 위협에 노출되어 생활에 안정성이 부족했었다.  한층 많은 자연계의 법칙을

알고 그 법칙에 따라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문화가 발달하고 인류생활에 안정성이 증가해 온 것이지만,

그러나 아직 인류의 대다수는 마음의  면의 법칙에 무지하기 때문에 이 면으로부터 생활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원폭수폭의 위기도 바로 그것이다.

 

 

마음의 법칙의 순용 (順用)

 

그 나라의 위대함은 그 나라 국민의 위대함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다.

그 나라 국민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자연 과학의 법칙을 가장 많이 알고 그것을 가장 많이 이용함과

동시에 ‘마음의 법칙’을 알아서 그것을 순용 하는데 뛰어나 있어서 ‘자연과학의 법칙’의 활용과 ‘마음의

법칙의 순용’이 풍부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인 것이다.

자연과학의 법칙의 활용에만 중점이 놓이고 ‘마음의 법칙의 순용’이 망각되고 있을 때에는 현재와 같은

인류의 위기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더 ‘마음의 법칙’의 과학을 일반적으로 보급해서 ‘물질계의

법칙’의 지식과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일이야 말로 세계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

 

그렇다면 우리들이 그 ‘생명의 본원’또는 ‘제일 원인자’와 연결되자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미 연결 되어

있어도 파장이 맞지 않으면 그것이 실현하지 않는 것이다.

신은 사랑이므로 ‘사랑’에 파장을 맞추기 위해서 우리들은 애타(愛他)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양무제는 불교 연구가이고 스스로 반야경의 강좌를 열어서 그 경문의 강의를 했을 때에는 천인(天人)이

이를 찬탄해서 천화(天花)의 꽃비가 내렸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또 신앙심도 두터워서 많은 당탑가람을

건립했다. 달마 대사가 남천축(南天竺)으로부터 법을 전하려고 왔을 때에 무제는 자기의 여러 가지 보시나

공양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것들의 공덕은 어느 정도이오니까” 하고 달마 대사에게 물은즉 대사는 “무공덕!”이라고 일갈(一喝)하고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제가 ‘공덕’ 즉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시나 공양이나 경전의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바라지 않는 보시에 진정한  ‘영혼의 보답’이 있는 것이다.

 

 

내면에 깃들인 신비한 힘

 

사람의 내면에는 신비한 불가사의한 능력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소라도 개발해 낸 사람과 거의

전연 개발하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개발한 사람의 능력을 관찰하면, 그것은 뇌수나 감각

기관에 의한 지식등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은 작용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상관을 충분히 실수(實修)할 때 누구나 그 신비한 능력을 개발해낼 수 있는데 그 신비한 능력에는 갖가지

종류가 있다.

최고의 것은 실상의 직관적 파악이고 (이것을 불교에서는 반야지라고 한다), 그 밖에 소리와 같은 것으로

영적인 인도를 받게 되거나 영시(靈視)의 형태로 인도를 받게 되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와 같은 심령

현상적인 신비적 능력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자연히 떠오르는 상식적인 판단 속에 신비한 지혜가 나타

나와서,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모두 급소에 적중해서 효과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 중의 지혜

로운 인도로 나타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생명의 본질 - 지혜의 힘

 

생명의 본질은 ‘활력’인 동시에 ‘지혜’이다.  지혜에 의해 혼돈을 지배하고 그것을 어떤 목적을 향해 질서

있게 해나가고 있는 곳에 생체가 생기는 것이다.

지혜란 ‘어떤 질서를 생각하는 힘’인 것이다. 지혜의 본질은 상념(想念)이다. 혼돈의 이름을 물리학에서는

에테르라고 하고 에테르 그대로로는 혼돈으로써 아무것도 태어나오지 않는 것이다. 혼돈이 부서져서 음양의 질서가 생기고, 질서에 따라서 그것이 결합할 때 만물이 태어나오는 것이다.

질서 없이는 물질의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물질은 지혜의 표현으로써, 마음이 없는 무기물로서의

물질은 오직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런 것은 실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진실한 의미에서의 물질은 ‘마음이 없는 무기물로서의 물질’이 아니고 ‘지혜의 표현으로서의 질서’인 것이다.

‘지혜의 표현으로서의 질서’를 우리들 인간은 최고도로 발휘해서 인류문화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라고 하면서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인류문화의 진보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거꾸로 인류를 야만 상태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된다.

 

 

운명은 마음의 전개

 

어떤 사람이라도 행복을 구하고 유복하기를 구하고 건강을 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구해지지 않는 것은 반대

방향을 향해서 그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은 어느 특정한 물질이라든가 어떤 특정한 위치

라던가 어느 특정한 장소라던가 하는 것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

에서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의 전개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 첫째이고 마음으로

실상의 완전함을 항상 관하도록 하고 있으면 자연히 안에서 자타의 움직임이 실상의 완전함을 현상화

하도록 전개돼 와서 행복, 번영, 건강 등이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동류끼리 모인다

 

‘어두운 생각’이 당신의 마음에 숨어 들어왔을 때는, 그것은 많은 동료를 데리고 온 도적의 최초의 한

사람이 숨어들어온 것과 같은 것이니까, 그 최초의 어두운 생각을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자기의 마음에서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으로 다음으로 그 도적의 동료가 모두 당신의 마음속에

침입해 와서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인 ‘밝은 마음’을 빼앗아 갈 염려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은 ‘밝은 마음’을 빼앗아 갈 염려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재산은 ‘밝은 마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동류끼리

모인다’고 하는 법칙이 있어서, 당신이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밝은 사물이 모여와서 행복이나 건강,

번영이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해서 당신의 마음에 ‘어두운 생각’이 숨어 들어와서 그것이

주동세력이 돼 버린다고 하면 ‘동류끼리 모인다’고 하는 마음의 법칙에 의해 어두운 사물, 병, 불행, 재난,

가난 등이 모여오게 되기 때문이다.

 

 

 

3. 운명을 활짝 열자면

 

 

곤란을 행복으로 바꾼다.

 

 

곤란은 당신을 불행하게 할 수는 없다. 곤란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등산

이나 스키나 스케이트는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꺼이 등산을

즐기고 스키나 스케이트에 열의를 내는 것은 그 곤란을 즐거운 마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오히려 ‘곤란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곤란을 극복하는 쾌감’에서 오는 것이다. 즉 ‘곤란’ 그 자체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곤란에 대해서 그 사람이 어떠한 마음의 태도로 그 곤란에 맞서느냐에

의해 곤란이 쾌감으로도 불행으로도 고통으로도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곤란에 직면해서 오히려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밀려오는 곤란’에게 주동성을 가지게 하고 자기가 그것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 같은 소극적인 수동적 태도로는 자신이 불행해질 뿐이므로, 곤란에 의해 깔아뭉개질 뿐이다. 무엇이든 주동자가 되는 자가 승리자다. 곤란이 자신에게 밀려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곤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동자가 돼서 밀어붙이는 것이 좋다.

 

마음의 무거운 짐

 

외계의 곤란은 반드시 당신의 무거운 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당신을 손상케 하는 것도 아니다.

내계(內界)의 ‘마음의 무거운 짐’만이 당신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이 돼서 참으로 당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무거운 짐’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악(惡)이란 것이 존재해서 그것이

반드시 나를 해치게 된다’고 하는 신념인 것이다. 이 신념에 의해 사람들을 용기를 잃게 되고 적극적으로

좋은 일에 매진할 수 없게 돼서, 생명력이 위축해 버리고 그 때문에 좋은 지혜가 샘솟아 나오지 않게 되고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을 잃어서 마침내 병에 걸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해 최면술에 걸려서, 본래 존재하는 ‘신의 자식 무한력’을 자승자박한 결과이다.

 

 

신의 속삭임

 

 

당신의 내부 이상의 속삭임은 실은 당신의 안에 깃들여 있는 신의 속삭임인 것이다. 그리고 신이 속삭

이시는 것은 반드시 신의 힘에 인도돼서 성취될 일이기 때문이다. 실상관을 하고 ‘지금마음을 비우고 신의

뜻에 따르고자 합니다. 원컨대 뜻대로 되게 하소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소서’ 하고 염하고

신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을 조용히 하고 받아들일 기분이 돼 있으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에 의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각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일 또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갑의 사명은 을에게 있어서는

사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뿐 아니라 사람의 사명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또 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그 사람이

후지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사명이라고 가정한다면, 후지산의 정상이외의 지역에 있는 것은 사명이

아니냐고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 사람이 후지산 산록의 산길에 있는 것도 어떤 시기에는 사명이고

도중의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것도 그 사람의 사명이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가장 충실하게

사랑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 긴요하다.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 것

 

누구도 유쾌하게 즐겁게 생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걱정이나 지나친 염려를 해서 생활로부터

즐거움을 몰아내고 제멋대로 생활을 어둡고 즐거움이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건강에 대해서 염려하고 어떤 사람은 경제문제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그리고 가장 염려하고

걱정하던 것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걱정이나 염려를 한다고 해서 건강이 좋아지는 것도 경제가 넉넉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걱정이나 우울로

마음을 어둡게 했을 때에 생각나는 일들을 마음이 흐려져 있으니까 좋은 지혜가 수신돼 오도록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진실은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자기의 마음을 지배해서 ‘걱정하지 말라, 걱정한다고 무엇이 되겠는가, 신이 너를 지켜 주고 계시지 않는가. 하고, 자기의 마음에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명령해서 당신의 마음의 걱정을 몰아내야 한다.

 

 

지금 신생한다

 

신은 항상 우리들에게 새로운 날을 베풀어 주고 계시다. 매일 아침이 항상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신생’인

것이다. 신은 ‘지금’ 신생할 때에, 과거를 가지고 책망하시지 않는다. 신이 ‘지금’을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을 신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겠는가? 과거에 무엇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다.

‘지금’은 일체의 과거를 변모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자기의 생명에 신이 계신 것을

자각할 때 그것은 자기의 영혼에 불을 켜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과거의 일체의 악도, 업도, 죄도, 어둠과

같은 가상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어둠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빛의 비존재’의 가상(假像)

으로서, 빛만 들어오게 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 자기의 안에 신이 존재하신 것을 진실로

자각할 때 과거에 어떠한 죄나 인연이나 업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상식을 넘는 힘

 

 

모든 생활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는 생활이 되게 하라. 기도는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과의

파장을 맞추는 최량의 길이다. ‘신의 세계’에는 일체의 좋은 것이 ‘아이디어의 형태’ 또는 ‘이념’으로 존재

하는 것이고, ‘신의세계’에 파장을 맞추는 것에 의해 그 원하는 것을 수상해서 현상계에 구체화하려는 것이

가능하게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현상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보여 지는 문제에 부딪히면 상식적

판단만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결정을 해 버리고 기도하는 것조차도 포기해버리는 일이 있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요구인 한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보여 지는 일일지라도 신에게

있어서는 불가능 한 것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실패라도 신은 그것을 보충하고 남음이 있는 구제책을 베풀어 주신다. 어떠한 복잡한 문제라도 신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까다로운 인간관계라도 신의 사랑이 거기에 나타날 때,

어떤 사람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해결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악습관일지라도 가령 마약의 중독이라도 신의 힘이 발현(발현)된다면 교정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은

없는 것이다. 마약중독자가 주사를 중단하면 무서운 금단증상으로 괴로워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생장의 집’

연성 도장에서 실상관을 하고 신과의 일체감을 깊게 하며 ‘인간 신의 자식, 마약의 중독 본래 없다’는 자각에 들면 금시 중독 증상은 사라지고 주사를 하지 않아도 조금도 괴로워하는 일 없이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실례는 종종 있는 것이다.

 

 

 

4 행복은 어찌해서 오는가

 

인간 지혜를 버리자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 자신의 지혜 궁리에 의해 행복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로 인간지혜를 움직여서 궁리하는 것을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됐다’고 하는 상징적 신화에 의해 묘사하고 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생명(지혜 사랑 등을 포함)이 드러나온 것을 말한다.

‘에덴의 낙원’에 인간이 생활하고 있을 때에는 ‘아담과 이브는 알몸이었다’ 고 성서에 기록되고 있는 것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것’, 인간의 지혜로 쓸데없는 궁리를 가하지 않았다는 뜻인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지혜를 가하지 않고 그대로 신의 계획에 수순할 때 그 사람은 진실의 행복의 세계(에덴의 낙원)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상념의 총결산

 

이 세계에는 ‘원인 결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물질의 세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원인을

만들면 결과는 이와 같이 나타나온다고 하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만, 우리들의 운명을 지배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질의 세계에 잇는 물질의 이동이(원인) 다른 물체에 이와 같은 결과를 미친다고 하는

물리적인 인과관계보다도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원인)이 ‘물질계’에 이와 같은 결과로 돼서 나타나온

다고 하는 인과 관계의 편에 있는 것이다.

‘마음의 세계’에 있는 것이란 ‘상념’ 즉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형상의

세계’에 결과로써 나타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든가,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항상 무엇을 상념하고 있는가, 그리고

하루 중의 대부분의 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우리들이

무엇을 보다 많이 생각하고 있는가의 총결산인 것이다.

 

 

 

내면을 보는 힘

 

인간은 자기의 안에 ‘무한’을 소장하고, 발굴할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으로서 그것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관의 감각은 밖을 보기 위해서 발달한 기관이기 때문에 안을 보는 힘이 결여돼서, 자기의 실상의 무한력을 보지 못하고 공포심이나 의심하고 주저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자기를 내관하는 것에 의해서만 실상의 ‘무한’을 자각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내관하지 않는 자에게는 실상을 보는 길은 완전히 막히고 부숴 버릴 수 없는 철벽으로 ‘물질의 세계’가 가로막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

들은 이 ‘물질의 철벽’의 안에 갇혀 버려 자유를 잃고 마치 죄수와 같은 자유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일해도 일을 해도 내 생활 펴지는 날 없구나.”하고 탄식하는 사람은 이 ‘물질의 철벽’을 넘지 못해서 개탄

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철벽은 밖에서 그것을 부숴 버리려고 해도 부숴버릴 수 없는 벽이다. 오직 내관에

의해서만 그것을 넘을 수 있다. 그 내관이 바로 실상관이다.

 

 

진공 즉 묘유


이 우주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영적인 존재’이고 ‘영’은 보편적인 지혜이고, 그 ‘영’의 파동이 가시적인 물질로써 나타나 있는 부분과 불가시적이고 초감각적인 ‘공간’과 같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개개의 가시적 존재가 개개별별로 아무 관계도 없는  산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는 보이는 것처럼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다.

진공과 같이 단순한 ‘공간’으로 보여 지는 곳에도 보편적인 지혜나 사랑(상호 견인력, 만유인력)이 작용하고

있어서, 태양과 유성과의 사이나 원자핵과 전자와의 사이에는 공간이 벌어져 있는데도 서로 더 이상 떨어

지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 즉 묘유(眞空 卽 妙有)인 것이다. 단순한 ‘진공’처럼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것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만유를 하나로 연결하는 ‘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영’의 속에서 우리들은 생활하고 행동하고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라

 

물질발생 이전의 우주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물론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영(靈)’이 아직 물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파동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진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텅 빈 것은 아니고, 불생의 대생명이 확고히 엄연하게 존재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생의 대생명이 움직여 나온 것이 소위 ‘말씀’이다. 이것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고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 씌여져 있는 진리이다. 다만 이 ‘말씀’

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물질 발생 이전의 ‘태초의 말씀’이니까 물질적 발성기관을 통해서 나타나온 말씀은

아닌 것이다. 발성기관이 나타나오기 이전의 말씀 즉 상념이었던 것이다. 즉 ‘진공’으로 보여 지는‘불생’의

생명이 상념에 의해 동적(動的)으로 움직여 나와서 파동을 일으킨 것으로서, 이것이 “신의 마음이 움직여

나와서 말씀이 되면 일체의 현상이 전개해서 만물을 이루도다”고 하는 것이다.

 

창조의 충동


우주 대생명은 ‘진공’으로 보이면서 텅 빈 것은 아니고,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 자신이 상념을 일으

키는 것에 의해 만상(萬象)이 전개돼서 나타나오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을 말한다.

‘진공’안에 이와 같은 창조력이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가 즉  ‘창조의 영’인 것이다. 이미 ‘진공’의 안에 복재(伏在)한  ‘묘유’가 내부로부터 밖으로 밀려나오는 작용이 ‘창조의 충동’으로 나타나오는 것이다. ‘우주의 영’

속에 이 충동이 있고, 그것이 진공으로 보이는 실질을 스스로 ‘내부의 지혜’에 의해서 형상 있는 모습으로

설계하고, 그 ‘내부의 힘’에 의해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부의 지혜’를 혼란으로 이끌어 가지 않고, 그 ‘내부의 힘’을 유동하기 쉽도록 유지할 때 그 형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즉 육체에 있어서는 건강을 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의 창조에 협력하자


인간에게 있어서는 ‘창조의 영(靈 = 神)’이 ‘진공묘유의 세계’로부터 항상 ‘새로운 창조의 원형’을 형상의

세계에 밀고 나와서, 항상 우리들은 뭔가 새로운 설계나 계획이나 창작적 일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인체

에서는 그것이 신진대사로써 나타나와 있는 것이다. 신은 그 영의 ‘창조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육체를

만들고, 그 육체 속에 자기의 ‘영’을 깃들이게 해서 거기에 자기가 원하는 사물을 만들어 내는 ‘중신’을

창조한 것이다.

우리들은 신의 ‘새로운 창조의 거점’인 동시에 항상 새로운 신의 자기표현의 ‘중심자’로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새로운 신의 자기표현의 ‘중심자’로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외계에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내고 있고, 인체는 신진 대사로 낡은 것을 쫓아내고 새로운 창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는 춘하추동의 변화 속에 꽃 피고 영글고 무성하고 낙엽지고 또다시 새로운 봄의 치장을 하면서 항상

새로운 형상으로 생장을 계속하고 있다. 즉 이 세계는 신창조 신생장이 실현하는 세계이고, 그것을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이신 ‘창조의 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항상 새로운 창조를  이 세계에

해내야 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만 신의 창조에 협력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혹시 우리들이 ‘새로운 창조’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의 ‘창조력’의 출구인 사명을 다하지 않는

것이니까 생명은 내부로부터 은퇴해서 죽음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좋은 상념, 나쁜 상념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상념의 구상화다. ‘당신의 상념’이라고 말하지만 사람은 자기 독특의 정신 위에 주위의 인물로부터 가지가지의 상념을 감수해서 ‘자기의 상념’을 혼성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에는 양친이나 그의 가족으로부터 가장 많은 상념을 감수해서 그것을 종합해서 ‘자기의 상념’을

혼성한다. 13세 이상이 되면 개성이 독립해 와서 반드시 주위의 상념에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양친, 가족, 인류로부터 그 상념의 영향을 감수해서, 전연 ‘무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를

거듭함에 따라서 개성적인 표현 요구는 강해지는데,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가족이나 인류로부터

감수한 상념도 그 사람의 잠재의식에 고정화해서 빼버릴 수 없는 경향을 형성해 가게도 되는 것이다.

그 고정화의 경향이 좋은 상념, 밝은 상념일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애에 좋은 영향을 지속하게 되지만,

그것이 나쁜 어두운 상념일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애에 항상 나쁜 영향을 주면서 그 사람의 운명을 어두운

방향으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물· 심(物· 心)은 본래 하나


우리들이 견문(見聞)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의 ‘마음’의 활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것을 감수(感受)하고 그것에 대해 쾌, 불쾌를 느낀다. 마음이 또 그것을 움직여서 그것을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배열(配列)한다. 그것이 창조이고 창작이며 착상(着想)이고 발명이고, 그것에 의해 우리들은

기쁨을 느낀다.

모든 것은 마음을 위해 있는 것으로서 물질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물질’은 전연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인 것이 파동의 상이(相異)로 , 한편은 ‘마음’으로 나타나오고 다른 한편은 ‘물질’로

나타나와 있는 것이지만, 본래는 하나의 것으로서 같은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상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물심 일여(物心一如)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진화


우리들의 생명은 항상 한층 높은 진화를 향해서 행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낮은 것’이 어떻게

해서 ‘한층 높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한층 높은 것’이 그것보다 ‘저차(低次의 것’을 생각

하는 것은 매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낮은 것이 한층 높은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재 ‘낮은 것’이면서 ‘한층 높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한층 높은 것’에 접촉하는 것에

의해 자기의 안에 있는 ‘한층 높은 것’이 밖으로 드러 나오게 되는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층 높은 것’으로 생명이 진화해 가는 것은 이미‘한층 높은 것’이 생명의 내부에 깃들여 있고

그것이 갖가지의 환경이나 조건이나 경험에 의해 촉발(觸發)되서 빛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지금 베풀어져 있는 환경이나 조건, 경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서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경험을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 의해 우리들은 내재하는

무한의 신성을 한층 많이 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사람은 무한한 진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절실한 소원인 것이다. 우리들은 ‘존재의 근원’을 알려고 하고, ‘현상의 안’에 있는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고, 선(善)을 구하고, 미를 추구하고,

갈증을 느끼는 것과 같이 진보와 향상을 원해온 것이다.

그 소원의 주체자인 개 생명의 ‘자기’가 죽음과 함께 종언(終焉)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불합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는 죽을 것이다. 뇌세포는 움직이지 않게 되고 뇌를 통해 발현

하고 있던 의식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주체로 하는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니다. 오직 육안에 보이는 인간의 의복(肉體)이 낡아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육체의 의복을 통해서 육체의 안경을 통해서 경험해 온 갖가지 지식, 지혜, 능력, 깨우침 등은 육체의

의복을 벗고 육체의 안경을 벗어 던지고 나서도 우리들의 영혼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어서 다음의 진보의 경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영원한 존재이고 안에 ‘무한’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원히 그

무한을 개현하면서 무한히 진보해 가는 생명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


우리들은 ‘무한’을 구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자유’를 구하는 존재다. 어째서냐 하면 인간은 신의

자기 현현(自己顯現)이고 본래 ‘무한한 자유’를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뭔가 자기를 속박하는 것을 부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진정한 자유는 그와 같은 대립적 관념

상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절대자’가 되는 것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자기가 신의 현현이고 ‘절대자’의

자기실현이라고 깨우치는 것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어째서냐 하면 우리들은 실상관에 의해 자신이 신과 일체이고, 절대자와 일체이고, 환경이라든가 밖의 것으로 보이는 것도‘타물(他物)’이 아니고

자기 마음의 현현인 것을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상관은 최고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행사인 동시에 누구도 ‘진정한 자유’를 구하는 한 행하지

않으면 안 될 수행으로서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 탄생의 찬란한 사명


생명의 진화라고 개(個) 생명의 발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주 대생명이 제아무리 장엄하게

우주에 충만해 있을지라도 만일 개 생명이 발현하지 않았다면 어디에도 진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묘하게도 신에게는 개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신에게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의식을 가진 개 생명이 필요했고, 그것에 의해서만 ‘진실한 자유’를 체험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우주에 탄생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일월성신이 공간을 장엄하게 운행할지라도, 초목조수

(草木鳥獸)가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운행하고 있든가,

본능에 의해서만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에 인간이 탄생한 것에 의해서만 신은 신 스스로가 인간으로 나타 나와서 의식적으로 자유를 체험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사명이 위대함은 이것에 의해서도 명백하다. 신은 인간 없이는 생장도 진보도

자유도 체험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상대가 흥분하고 있을 때


이쪽은 아무 악의도 없이 한 말이나 한 행위에 대해서  상대가 대단히 흥분하고 고함지르거나 매도하거나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상대의 ‘완전한 실상’을 보고 심하게 흥분하고 있는  ‘나쁜 모습’에 이쪽의 마음이

걸리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괴로움이 있어서 신경이 과민하게 돼 있는 것일 터이니까 ‘상대를 좀 더 동정

해 드리는 마음’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가 흥분해서 욕을 하고 있어도, ‘성신이시여, 이분은 틀림없이

뭔가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쪼록 그 괴로움을 제거해서 실상의 완전한

모습이 나타나오게 하소서’하고 기도해 드리는 것이 좋다. 이것이 상대의 ‘완전한 실상’을 끌어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상대의 흥분은 때로는 자기가 ‘상대를 미워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그 염(念)의) 반영일 경우도 있는

것이니까, 이쪽이 상대를 축복하고 상대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이 되는 것에 의해 상대의 흥분이 진정되고

적으로 보이던 자가 내 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5.  기쁨은 어찌해서 오는가

 

 

문제를 신에게  맡겨라.

 

어떠한 문제가 일어 나와도 항상 밝은 마음으로 그것에 향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문제라도 신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문제라도 신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자아’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생각하니까 해결의 방법을 잃고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문제를 신에게로 향해서, 신에게 대신 짊어지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어떤 문제라도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이 문제를 신이시여 당신께 맡깁니다’하고 반복해서

마음에 염하고 기도하고 그 문제를 신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

철저히 신에게 해결을 맡기면 신은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라오는 일도 있지만, 누군가 생가지도 않은 곳에서 원조의 손을 내미는 사람이 나오는 일도 있는 것이다. 충분히 기도한 뒤에 누군가 그 문제 해결에 대해서 좋은 안을 제시해 준다면 순진하게 그것에

따르는 것이 좋다.

 

 

6. 지혜는 어찌해서 오는가

 

 

신진대사와 노쇠

 

항상 신진대사가 행해지고 있는 인체는, 어떤 생리학자의 설에 의하면, 인체의 부드러운 부분의 조직은

3개월쯤 경과하면 거의 과거의 세포는 사멸해서 밖으로 밀려나고 새로운 세포에 의해 재조직된다고 하는

것이다. (뇌세포만은 별도) 그런데도 그 인체의 구조나 형체가 수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 의하는 것일까.

그것은 전자계산기처럼 자동적으로 그것이 계산 되서 새로운 세포가 자동적으로 본래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인가. 자동적으로 그처럼 신진대사가 행해지는 것이라면, 똑같이 변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체가 노쇠 하고 피부는 주름지고 정력은 쇠진해 가는 것은 어째서일까. 인체의 전자계산기가 불완전하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인체는 물질이니까, 전자계산기라도 그것이 물질로 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는 장기간 사용하고 있는 중에 전체가 마모해서 낡아버리기 때문일까.

그러나 신진대사가 행해지지 않는 물질의 기계라면 낡아서 장기간 사용해서 낡아 버려서 쓸 수 없게 된

경우에는 그 부분은 새로운 세포가 그 조직을 다시 만들어 주는 것이니까 그것만으로는 노쇠의 원인의

설명은 되지 않는다.

 

 

인류 전체의 종합된 상념


기계적인 마멸이나 낡아 버린 것 이외에 노쇠의 원인이 마음에 있다고 하면 그 마음은 ‘개인의 마음’ 인가,

‘인류의 마음’인가 하는 것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은 ‘개인의 마음’이기도 하고 ‘인류의 마음’이기도

하다. 인류 전체의 종합된 상념을 인류의식이라고 한다. 인류의식 속에 ‘인류는 몇 살이 되면 이만큼 노쇠

한다’고 하는 공통의 상념이 있다. 개인의 의식은 해류 속을 헤엄치고 있는 한 마리의 고기와 같은 것으로,

자유의사도 있고 원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는 자유도 있는 것이지만, 역시 인류 의지전체의 조류(潮流)의

방향으로 움직여지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해류를 타고 일정의 방향으로 같은 고기들이 무리를 짓고 헤엄쳐 가듯이, 인류 전체의 ‘인간은 반드시 노쇠

한다’고 하는 조류에 떠밀려 흐르면서 인간도 무리를 짓고 노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직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인간은 신의 자식으로 늙지 않는다’고 하는  상념에 의해 조류의 흐름을 거꾸로 헤엄쳐 갈 수

있는가에 의해 그 사람의 젊음의 지속이 달라지는 것이다.

 

 

장수와 영혼의 고하(高下)

 

장수하는 자 반드시 영혼의 진보가 높다고 하는 것으로는 정해져 있지 않는 것이다. 지상의 수행이 끝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같은 학급에 머물러 있게 돼서, 지상생활이 연장되고 있는 것과 같은 장수도 있는

것이다. 즉 4년으로 졸업할 대학을 7년이나 걸려서 졸업하는 태평스러운 학생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수가 반드시 태평한 것만은 아니다. 십수 년간이나 혹은 이십수 년간을 병고와 싸우면서,

그 괴로움(그것은 학과이지만)의 진실한 의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명이 다하지 않고, 괴로움을 겪으면서 이 세상의 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영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영혼이 스스로 나아가 고통의 과목을 열심히 하는 것에 의해 급속히 영혼의 진보를 얻으려고

지체 불완전의 모습으로 태어나오거나,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지체 부자유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고급인

영혼도 있다. 일률적으로 장수라든가 건강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영혼의 고하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고, 병고로 허덕이고 있다고 해서 영혼이 낫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