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空의 도리를 모르고는 반야심경을 이해 못한다.

통융 2017. 12. 18. 20:38

 

반야심경에서 공을 자각하지 못하고는 천백번을 외우고 써도 한낱 글짜에 그친다.

신찬스님의 백년을 낡은 종이 뚫어보아야(百年鑽故紙) 언제나 깨칠 날을 기약하리오(何日出頭時)

공을 지식으로 이해한다고 그대 오온이 공할 수 없고
오온이 공함을 자각 못하면

 

아뇩다랴삼략 삼보리는 공염불이요.
바라밀행은 억지 춘양에 불행이다.

그것도 다행이라면야. ..

목마른자에게 묻기를 어떻게 갈증을 해소합니까?  하고 물으니
 '물을 마시면 됩니다.'

어떻게요?

'떠서 먹으면 됩니다.'

갈증이 해소됐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갈증이 해소 됩니까?

'직접가서 물을 떠 먹으면 됩니다.'

 

물을 마시면 된다는 말을 수 천 번을 한다고
몸에 갈증이 해소 되겠는가.

 

모든 진리는 글이나 말을 통해서 설명하고 이해 시키는데

있는 것이 진리가 그 자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공의 진리를 많이 알고 설명을 잘 해도 공의 실체는 거기에 있지 않다.


아무리 공도리 설명을 잘 해도
공이 뭐요?
질문하면 앵무새처럼 설명은 잘 해도 공함에 머물지 못하는데
어찌 전도 몽상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나마 공과 무를 혼돈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공과 무를 혼돈 하는 논객들이 무슨 공을 논할 손가.

중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임어당도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하는 식견들이 대표적으로 공을 무로 착각하는 수준들이지.

덕산이 금강경 해석에는 천하 제일 이라 주금강이라는 별칭을 얻어도 금강경의 공도리를 설명은 잘 해도
공함에 머물지 못해 배고파 점심먹으러 갔다가 노파한테
점심은 커녕 배고픈 몸을 이끌고 쫒겨나지 않던가.

다행히 눈밝은 선지식을 만나 금강의 이치를 깨달아

평생을 바쳐 애지중지 가지고 다닌 금강경해석 죽편을 불살라 버리지 않던가.

그대는 지금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인데 그대 공한 마음을 어디에 점을 찍을 것인가.

덕산이여
어찌 배가 고픈 마음이 공도리 인지를 모르는가.
만약 배고픔의 전부가 된다면
노파에게 점심을 찍을 것이네.

 

혹자는  즉심시불이라고 불법은 작용성에 있으니

노파의 질문에 답은 '그냥 떡을 집어 먹으면 되지요.'라고 말한다.

 

덕산이 주린 배는 채울 수는 있어도 도둑놈이 된다.

불법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막행막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러는 조금 깨달았다고 하면서 요상한 행동을 하고

걸림이 없다고하는데 천만에 만부당하다.

 

그대 행동은 댓가를 보상해야하는 업을 짓고 있는 중생인데

무슨 이무소득의 부처의 행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불법은 진실하고 자유롭다. 무심무가에라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그러면서 결과는 자비로워야 한다. 즉 대상에게 업의 요소를 재공하면 되면 결국 그 업장이 ..........


'떡'이

공도리요.

 

 '배가 고파요' 가

무무무가애요, 자비심인데 .....

 

그것도 아직 귀모토각이라..

 

그대는 저 매미소리를 잡아 올 수 있것소?

.................

그 때서야  노파가 진수성찬 점심을 차리고 융숭히 대접을 할 것이네.

우보익생 만허공에 중생수기득이익 인데
개구리만 입을 벌려 물을 먹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