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와 김흥호목사

다석의 예수이해

통융 2017. 7. 8. 19:57
제 8 강 : "예수 그리스도"
          - 예수를 따라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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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박사(p994@chollian.net)
 
 
1. 한국 . 아시아적 예수 이해
스리랑카의 뛰어난 신학자 알로이스 피어리스(1934-)에 따르면 아시아에서는 서구의 전통적인 선교방식이 성공할 수 없다. 비그리스도교 영성에 참여하는 수행모델이 아시아에서는 옳다. 유영모는 피어리스가 말하는 비그리스도교 영성에 참여하는 수행모델을 피어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추구하고 아시아적 영성의 기독교를 형성했다.

요한신학의 특성은 아시아의 영성과 서로 통한다. 요한복음은 사랑, 일치, 공동체에 초점을 두었다. 나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와 사귐을 강조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을 강조했고 앎과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말했다. 매우 영성적이고 실천적이므로 아시아의 영성과 통할 수 있다.
다석은 요한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빛을 얻어라."고 한 말씀이 "참 적극적이다...속죄는 너무도 소극적이다."(1,817-20)고 했다. 속죄는 십자가를 믿고 수동적으로 구원얻는 것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빛이니 빛을 얻어라."는 요한의 말씀은 믿는 사람이 적극적, 능동적으로 빛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유영모의 신앙체험과 예수이해
다석이 18000일 되는 날에 "내게 실천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고 했다. "내가 예수를 따르되 실행력이 예수께로부터 친수되지 않는 限, 예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다석이 "중생한 오늘에 증거할 말슴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입니다." 다석에게는 실천력을 주는 이가 구주다. 그런데 신앙체험을 한 후 예수가 실천력을 주는 구주임을 체험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다석은 의중의 인물, 스승으로 삼았다. 그 점에서 석가, 공자, 노자보다 예수를 더 존중했고 예수를 스승으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석은 서슴없이 예수가 제일 좋다고 말한다. 다석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父子有親(부자유친)하였다. 예수는 유교를 제치고 하나님 아버지께 유친(有親)하자 들이덤볐다. 불서(佛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다."(진다1, 395-6)


예수를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보면 "목수(木手)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서른 살에 하늘문을 세울 일을 맡었다면...(예수의 몸은) 묵은 꺼풀인망정 밀알같이 영근 몸이다. 사람이 거두어서 땅에 내려 묻었더니 묻은지 사흘만에 새 생명의 싹이 나서 다시 살아났다면...곧이 들을까? 이것이 한나신 아들로 33년간에 이룬 성역(聖役)! 새 천지의 개벽은 이로 좇아 시작이다. 그 뒤로 인간은 천문(天門)으로 통하게 되었다."(유일1, 664)
다석은 "우(하나님)에서 오는 성령이 믿음을 일으킨다"(진다1,399)고 했다. 성령이 믿음을 창조한다는 것은 복음주의 신학을 내세우는 칼빈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석은 서슴없이 예수를 '우리 님'이라 하고 '한나신 아들'(독생자)이라고도 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한우임'이라고도 한다. "오 예수여 내 줁에 한우임 그리스트."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볼 때 예수는 '한우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낸 분이며 '내 마음'에서는 '한우임', '한우를 인 분'이다. 다석에게서 '임'과 '님'이 통하고 아들과 아버지를 일치된다는 점에서 보면 예수는 '한우님'이다. 예수는 그리스트이고 '임'(主)이신 그리스트는 '늘 삶'이다.


3. 속죄론 이해
십자가 속죄신앙도 나의 삶과 유리된 것이라면 객관적, 주술적인 미신이 되고 만다. 나는 가만있고 예수의 피흘림을 믿으면 된다는 것은 미신이라는 것이다. 다석과 함석헌이 속죄교리를 부정했다고 해서 정통신앙인과 무교회교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십자가에서 예수가 의로운 피를 흘린 것이 지닌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개별적 자아로 본 서구자유주의신학자들처럼 오늘의 '나'와 2천년 전의 '예수' 사이에 만남이 없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석은 '나'가 개별적 자아를 넘어서 하나님, 이웃, 우주전체의 생명과 하나되고 상통한다고 보았다. 영원한 나, 신적인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된 나이고 우주전체의 생명과 하나된 나이다.


그러므로 다석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의인의 피가 속죄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의인의 피는 다 꽃의 피요, 그리스도의 피다. 아무리 악한 세상도 이 피로 씻으면 정결케 된다."(1, 827)
다석의 십자가 신앙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속죄교리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속죄교리를 가지고 있다. 개방적이라는 것은 2천년 전에 흘린 예수의 피만이 아니라 모든 의인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속죄와 속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참여적이라는 것은 제삼자로서 객관적으로 바깥에 있는 예수를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피흘림에 예수의 존재와 삶에 참여함으로써 속죄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실존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의 피는 믿는 사람에게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4. 우리 님 예수 : 예수와 함께 예수를 찬미하며 예수의 길을 감
다석도 예수를 믿는다. 다석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나와는 다른 존재로 신격화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온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씨요 나도 씨다. 예수가 처음 익은 열매요 나도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야 한다. 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다석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결국 나의 문제가 된다. 다석에게 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석은 주체의 문제로 돌아간다. "나는 생각의 주체고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다. 나, 예수, 하나님은...보이지 않는 주체다...주체이기 때문에 절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다...내가 있으면 신도 있고 예수도 있다."(1, 825-8)


다석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결코 인간적인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역사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과 일치된다. 다석이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길러주시기 때문에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된 작품이다..."(맙. 1,857-60)라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시켜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다석이 예수를 역사적으로 신체적으로 제약된 존재로 볼 때 한 말과 예수를 하나님과 일치되는 자리에서 보고 말한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님: 예수'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가깝게 느끼고 '나', 예수,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다석의 말이 충격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독교신앙의 기본틀을 거부하거나 배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국적인 정신문화의 바탕에서 창조적으로 확대하고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예수를 인성과 신성을 아울러 지닌 존재로 말하는데 다석도 예수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기도 하고 신적인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 다만 다석은 '오늘 여기의 나'에게 초점을 두고 예수를 해석했고 나와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이 일치되고 화해되는 자리에서 예수를 보았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예수가 오늘 내 가슴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 하는 것은 오늘 내 가슴 속에 예수가 나셨다고 할 수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바로 된 목숨이요 본래의 면목입니다. 그리스도란 얼의 나로 몸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하는 생명입니다. 성탄이란 내가 얼의 나로 거듭나는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가슴 속에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탄생해야 합니다."(진다1. 418)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 본연의 모습은 섬김에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은 섬기신 가장 으뜸가는 목숨은 그리스도 아닐까요? 온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그렇게 살도록 보이기 위해서 섬김에 섬기신 목숨, 봉사의 봉사이신 생명,...섬김 자체인 어머니처럼 하나님과 인류를 섬김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으신 섬김에 섬기신 목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름, 진정으로 찬미함 긺 찬미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찬미함. 그것이 인간의 자연 아닐까? 궁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그리스도를 찬미함이 인간의 자연이리라."(1,741-4)


예수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줄을 이어간다. "(영원한 생명의) 이 한줄기가 이어닿은 여기가 '예'다. '예'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가는 글자이다. 영원에서 상대적으로 벌어져서 몸부림치는 여기가 '예'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보다 더 낫을 수가 없을까 하고 능력을 찾는다. 이것이 '수'다. '수'에다 'ㅁ'을 더하면 '예수ㅁ', 곧 '예'에서 '숨'을 찾는 것이 된다. '이어이 예 숨'하고 불러보면 몇 천 년 전에서 몇 천 년 후까지 툭 터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 소리가 아니겠는가?"(주기도. 1,837-40)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잘못 되었으니 바로 잡자는 것"이며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 구원인데 구원은 "외적 제도가 아니라 내적 일을 바로 잡는 것이다."(밀알1. 1. 8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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