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p.13-37)
― 다석 선생 탄생 101주기, 서거 10주기 기념 강연
김흥호金興浩 ◆ 이화여대 교육/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 역임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이를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선생은 댁에서 YMCA까지 20리 길을 언제나 걸어다니셨다. 선생은 우리에게 남녀 관계를 끊으라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며 희로애락을 넘어서야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초월하는 데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또 일식을 권면하셨다. 식욕은 모든 욕심의 근원이다. 욕심의 근원이 식욕이요 죄의 근원이 성욕이다. 일식의 일一은 끊는다는 뜻이다. 일식으로 식욕을 끊고, 일언으로 성욕을 끊고, 일인으로 명예욕을 끊는다. 도라는 것은 욕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무욕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를 무無라 한다. 무가 되어야 진리의 세계를 살 수 있다. 진리의 세계를 사는 것이 도덕이다. 선생은 현실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참사람이라 하였다. 참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다 할 수 있다. 믿을 신信 자는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선생은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였다.
십자가는 나무에 달리는 것이요, 하늘에 달리는 것이요, 천체가 되는 것이다. 하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자유친이다. 부자유친이 될 때 땅의 집착은 끊어지고 일식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사는 것이다. 땅을 떠나서 하늘에서 사는 것이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사는 것이 일식이다. 선생은 일식이 성만찬이요, 일식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제사요 산 예배라고 한다. 선생은 성만찬으로만 살았다는 성녀 젬마를 좋아하여『젬마 전기』를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일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소강절邵康節도 일식을 하였다. 소강절이 67세를 살았다 하여 유 선생도 67세를 살고 가겠다고 말할 만큼 선생은 소강절을 좋아하였다. 소강절은 서화담徐花潭이 사숙한 스승이다. 석가가 일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석가가 일식하기 전에 인도에는 일식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식은 불교 이전의 힌두교 전통이다. 간디도 일식을 하였다. 간디는 인도의 근본이『바가바드기타』에 있다고 보고『바가바드기타』의 핵심이 일식인 것을 알게 된다.『바가바드기타』는 신의 찬양이요, 핵심은 단식인전생심소斷食人前生心消라고 유 선생은 말씀하셨다.
유 선생은 자기가 난 날부터 매일 날수를 계산하면서 살아갔다.『다석 일지』에는 자기가 산 날을 계속 적어갔는데 82세에 3만 날을 살고도 10년을 더 살았다. 하루를 사는 그분에게는 한 달이니 1년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선생은 하루를 ‘오늘’이라 하였다. 오늘은 하루라는 뜻도 되지만 ‘오’는 감탄사요 ‘늘’은 영원이라는 뜻을 갖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하루 속에 영원을 살아가는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이가 유영모였다. 유 선생의 삶 속에는 언제나 빛이 솟아 나왔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이라 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시조형으로 된 노래를 적어와서 신이 나 설명해주었다. 그 노래를 읊조리면서 흥에 겨워 어깨를 들고 발을 떼면서 춤도 추었다. 천진난만 그대로였다.
그래서 유 선생은 67세 4월 26일을 한정하고 하루하루 유한한 시간을 살아갔다. 그분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제도 없다.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현재, 그것이 선생의 하루였다. 기독교는 하루를 사는 종교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것이 하루다. 선생은 그런 하루를 살았다. 그것이 영원한 하루다. 선생은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늘 말하였다. 죽음이야말로 십자가요, 그것은 하늘 궤도에 오르는 순간이요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참 사는 것이었다. 선생은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유교의 인의예지처럼 언제나 하나의 여러 모습이다. 마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교회가 언제나 하나인 것처럼 성부는 십자가요 성자는 부활이요 성령은 승천이요 교회는 재림이었다. 유영모는 노자를 좋아했다. 노자가 언제나 통채로 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노자는 통채를 박樸이라 한다. 통나무가 산 나무다. 쪼개면 나무는 말라죽는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통으로 사는 것이다. 통으로 사는 기독교, 그 속에 유영모는 한없는 기쁨을 느꼈다.
유영모 선생은 사람을, 땅을 디디고 하늘을 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수출고고영현외首出高高領玄外 요긴심심이황중要緊深深理黃中이라 했다. 머리는 하늘 위에 두고 마음은 진리의 가운데를 붙잡는 것, 그것이 가장 편한 탓이다. 또 저녁 8시에 자서 밤 12시에 깼다. 4시간이면 수면은 충분했다. 그만큼 깊은 잠을 잤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나 잠 속에서 하나님 말씀도 듣고 인생의 근본 문제도 풀었다. 잠 속에서 지은 시를 읊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때다. 선생은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정좌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푸는 것이다. 풀어지는 대로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YMCA에 들고 나가 그것을 몇 시간이고 풀이했다. 너무도 엉뚱한 소리라 듣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20일 길을 걸어와서 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또 20리를 걸어서 집으로 갔다. YMCA 간사 가운데는 선생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동완이 간 뒤 유영모 선생은 YMCA에서 쫓겨났다. 그리고는 이집 저집을 헤매고 다녔다. 나중에는 집에서 사람 오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몇 시간이고 말씀을 퍼부었다.
유영모 선생은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하고 소리내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다.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선생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뒤에는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법열이요 참이었다.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뿐이 아니다. 그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선생은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선생은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선생의 실천이다. 선생은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의 부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다시 한번 선생의 주기도문을 적어본다. “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살림에서 벗어나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이 없이 다만 주를 따라 읗으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주시옵소서. 사람사람이 서로 널리 생각할 수 있게 하옵시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태양을 꺼라!" 존재 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p.38)
―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이기상李基相 ◆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철학은 본디 고향에 대한 향수, 곧 어디에서나 가정을 꾸미려는 충동이다.
― 노발리스
다석 유영모 선생의 신앙 (p.93-103)
정양모鄭良謨 ◆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 성공회대 신학부 교수 역임
이 사람에게도 뜻 가운에 인물이 있다. 내가 잘못할 때 나에게 잘하라고 책선責善하는 벗이 의중지인意中之人이다. 날더러는 책선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내게 책선을 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다. 내가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다. 훌륭한 스승, 곧 덕사 德師를 택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내게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나는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는다. 사제師弟 관계는 이러해야 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있다. 묵은 것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이다. 묵은 것에 익숙해야 새 힘이 나온다. 스승의 말을 녹음해놓은 것을 듣기만 한다는 것이 아니다. 듣고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사제 관계가 되고 여기에서 인도人道가 새로 서게 된다.
―『다석어록』, 138쪽(1957)
이 사람은 미정론未定論을 주장한다. 인생이란 끝날까지 미정일 것이다. 과학조차도 증명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하다. 더구나 구름을 잡는 것과 같은 형이상의 것에 완결을 보았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소리다. 무슨 논論, 무슨 철학하는 것은 생평生平을 얻자는 데서 나온 이론의 하나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끝을 본 것은 아니다. 세상에 완전한 이론이란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은 미정이다. 사상에는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수식어를 달 필요가 없다. 사상은 단 하나 영원한 것이다. 우리는 단 하나인 이 영원한 사상을 찾으려는 것이다. 사상은 미정이다. 아직도 완결된 신앙은 없다. 인류가 남긴 모든 사상은 이 영원한 사상에 도달하려는 과정에서 남긴 것들이다. 따라서 무슨 사상, 무슨 신조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이나 사상이란 다만 자기가 해본 생활 정도를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사상 어떤 종교를 내세워서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여 완전고完全稿처럼 떠들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생애와 사상』, 314~315쪽
선생님은 주기도문을 선생님에게 맞게 다시 편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 살림에서는 벗어나서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이 없이 다만 주를 따라 위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주시옵소서. 사람사람이 서로 널리 생각할 수 있게 하옵시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바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멘.’
다석 유영모의 동양적 기독교 이해와 얼 기독론 (p.137)
― 다원주의와 생명신학적 고찰
이정배 ◆ 감리교신학대 교수
아주 빈 것을 사모하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것이 참이다. 이것이 참 이름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다석어록』, 161쪽
다석 유영모의 그리스도 이해 (p.174-206)
― 그리스도 유일성과 다원성의 만남
최인식 ◆ 서울신학대 교수
톨스토이에게 비친 교회와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의 순수한 교훈을 왜곡할 뿐 아니라. 진리와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지적한다.
교회적인 기독교는 참된 기독교의 적이며, 오늘날에 참된 기독교에 대하여 그것은(교회적 기독교) 현장에서 붙잡힌 죄인과도 같은 것이다. 교회적인 기독교는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더욱 더 새로운 죄악을 거듭 갈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랑․공순․겸허․자기 희생․악의 보답을 선으로 갚음” 등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의 요체요, 이를 통해 자신은 참된 진리를 경험하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이 같은 가르침과 정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를 교회에 복종케 한 후, 그 즉시로 나는 나에게 긴요한 것으로 생각된 기독교의 기본과 제법칙의 확증과 해명을 교회의 교의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 그러나 더욱 더 교회에 대한 나의 신뢰를 분쇄해버린 것은 내가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교회는 냉담하며, 이것과 정반대로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어리석게도 지나치게 편애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아무리 어리석은 말을 할지라도 교파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누구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특수한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교파적 교리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폭력까지 동원하여 박해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교회의 지위와 권력을 세우려다 보니 더욱 “신의 가르침을 왜곡”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우리들에게 신은 맡기어졌다’고 선고한 때부터, 곧 인간의 내면적인 존재보다 높은 외면적인 권위를 만들어낸 때부터 허위는 시작되었다. 인간 자신 속에 존재하는 가장 신성한 단 하나밖에 없는 것, 곧 이성과 양심보다도, 교회의 슬퍼해야 할 결의를 신성하고 중요하다고 인정한 때부터―그때부터 사람들의 신체와 마음을 잠들게 해버린 허위가 시작된 것이다.
기적, 악마의 축출, 부활 등의 초자연적인 내용들은 그리스도의 설교 이전, 그 시대와 그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오히려 번잡하게 하는 것이기에 삭제해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독자는 복음서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떼버리고, 각 장의 구절을 비교 대조해서 그 뜻을 밝히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고 한 자 한 구절의 끝까지를 신성시하는 것이야말로 불합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톨스토이는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으나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 그래서 예수에게 기도하는 것은 철저히 거부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며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는 하느님의 뜻이 인간인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가장 명확하고도 포괄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믿으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이해하거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을 가장 큰 신성 모독이라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참으로 가장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성취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일 경우, 하느님이 시험당하고 고난당하고 결국 하느님이 죽는다는 상식을 벗어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 등은 일종의 조작으로 간주한다. 오히려 예수는 공자․부처․노자 같은 종교적 스승 중의 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여 톨스토이는 전통 교의와 신비주의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난 그리스도교를 추구한다.
정신과 육체―이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대 자신 그대의 본질이 정신 속에 있음을 생각하라. 이 일을 생각하고 정신을 인생의 모든 육체보다 상위로 생각하고 정신을 인생의 모든 외부적인 더러움에서 경계하고 육체가 정신을 압박하지 않도록 하여 자기의 생활이 육체와 일치함을 피할 것이며, 자기의 생활을 정신과 합류시켜라.
이러한 사상은 톨스토이의 그리스도 이해에도 나타난다. 톨스토이에게 육체의 예수는 하등의 가치가 없다. 예수의 정신, 영의 차원만이 중요하다.
마음의 구원을 위하여는 사지를 갖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의 아들을 …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고 훌륭하게 그리스도 속에 나타난 구원한 신의 예지를 인식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 자기의 신앙 속에서 모든 육체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을 떨어버리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가 그대 신앙의 정신적인 중심을 깨끗이 하면 할수록 확고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자신이 편역한『요약복음서』각장 머리말에 명확히 나타난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은 육체가 약하고, 영에 의해 자유”롭기 때문에, “사람은 육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인의 생명은 영에서” 나오므로, “아버지의 뜻은 만인의 생명이고 행복”이라 설명한다. “사사로운 뜻을 행하는 것은 죽음으로 인도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참 생명을” 주니, “참생명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 육의 거짓 생명을 거부하고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개개의 생명은 육의 속임수이고 악”이며, “참생명은 만인에게 공통된 생명”이므로, “자기의 생명에 의지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 안에 있는 보편적인 생명에 의해 사는 이에게는 죽음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죽음은 아버지와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사상들, 특히 그리스도의 육체적 차원보다는 영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 예수를 신격화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 교회 회의를 통해서 승인된 전통 교의를 절대화하여 무조건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태도들은 다석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다석은 톨스토이의 비판학적 성경 연구에는 직접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다. 톨스토이는 구약성경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다석은 신․구약 성경 모두를 “한아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체험을 근거로 한아님의 ‘얼’과 말씀에의 “귀일歸一”을 위하여 동양의 고전적 철학․종교 사상과 톨스토이 사상을 그리스도 이해에 폭넓게 적용시켜나간다.
예수를 따르고 쳐다보는 것은 예수의 색신色身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속에 있는 속알 곧 한아님의 씨가 참생명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 있는 속알에 따라야 한다. 그 속알이 참 예수의 생명이요, 나의 참 생명이다. 몸으로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수 없다. (다석어록)
괜히 서로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놓을 필요가 없다. 아는 목사들하고도 성경 이야기는 안 했다. 신앙은 서로 다른 데로 갔다. … 우치무라內村鑑라는 이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의 정신에 입각한 성서 본래의 정통 신앙을 세웠다. 나는 무교회의 선생이 될 수 없다. 우치무라나 무교회는 정통이지만, 나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이다. (다석어록)
유영모의 한국적 기독교 (p.223-251)
오정숙 ◆ 감리교신학대 박사 과정
실제로 현재의 지평은 끊임없이 형성되는 것이며 … 현재의 지평은 과거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현재의 소외된 지평이 있을 수 없듯이 역사적 지평 또한 그렇다. 이해란 우리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지평들의 융합이다. … 전통 안에서 이러한 융합의 과정은 항상 계속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옛것과 새것이 서로를 완전하게 구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떤 살아 있는 가치를 조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함께 자라는 것이다. (가다머)
언어는 우리가 소유하는 기호가 아니다.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서 일정한 의미를 부여한 그런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을 가시화하기 위하여 임의적으로 만든 창안물이 아니다. … 오히려 의미 원천은 ‘언어 그 자체 속에’ 놓여 있다. 언어는 항상 이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다머)
유영모의 사상적 배경
1) 불교사상―무無
유영모의 비서구적 기독교 이해의 바탕으로 먼저 불교를 들 수 있다.
불이不二면 즉무卽無다. 둘이 아니면 곧 없다는 말이다. 상대相對가 없으면 절대絶對다. 절대는 무無다. 상대적 유有 상대적 무無도 아닌 것이 불이不二다. … 우리가 참으로 불이즉무不二卽無하면 상대 세계의 종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
유영모에게 불교의 이 유일무이한 절대 존재는 절대공絶對空․빈탕․허공이란 말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다.
아주 빈 것(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것이 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
―『다석어록』, 161쪽
… 우리는 새삼스럽게 절대 존재를 절대 진리를 찾는 게 아니다. 본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본디 가진 원일元一이다. 원일이란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이즉무不二卽無한 것이다. 소유한다는 것이 도무지 없다. 있었던 소유조차 잊어야 하는 원일이다. … 원일불이元一不二, 이것이 한아님이요 니르바나다. 나는 원일불이를 믿는다. 원일불이의 ‘하나’에 돌아가야 한다.
―『다석어록』, 169쪽
이처럼 유영모는 불교적 무․불성․견성 등의 개념을 자신의 깨침을 통해 받아들여 서구 기독교를 한국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유영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 교토학파의 선불교와는 달리 실천력 있는 유교적 배경을 기독교 이해에 덧붙여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특별한 고백을 하게 된다.
2) 유교 사상―효孝․부자유친父子有親
유영모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는 유교 문화였다. 따라서 유교는 유영모의 생활 저변에서 유영모의 정신적 가치를 규정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유영모는 5세 때 벌써 천자문을 깨우치고 12살 때『맹자』를 배웠다.
생각은 우리의 바탈(性)이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른다. 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다. 생각이라는 바탈을 태우려면 마음을 놓아야 하고,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한다. 바탈은 생각이 밑천이 되어 자기의 정신을 불사르는 예술의 세계다. 몸성해 참되고, 마음놓여 착하고, 바탈태워 아름답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워가 되어야 한다.
―『다석어록』, 124쪽
하늘이라, 바탈(性)이라, 마음이란 게 이理다. 곧 진리다. 진리 그 자체로부터 말하면 하늘(天)이다. 품수稟受한 걸로 말하면 성품性品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 속에 실존實存하는 걸로 하면 심心이라고 한다. … 이것이 심성心性이라 성性이다. 성품은 지금도 하늘하고 통해 있다.
―『다석어록』, 369쪽
이러한 유교적 이해, 특별히 효와 부자유친의 빛에서 유영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둘이 아닌 관계를 실천한 말하자면 부자유친을 이룬 참된 효자로 볼 수 있었다.
유영모는 이처럼 불교․유교 등 동양 사상을 배경으로 성서를 새롭게 읽고 믿음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나름대로 비서구적 방식으로 해석해내었다. 이제 유영모의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 이해를 중심으로 기독교 이해를 살펴보자.
유영모의 기독교 이해
1) 하나님 이해―없이 계신 하나님
유영모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모든 인간에게 절대를 그리는 본능 욕구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찾았다. 또한 이런 하나님은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이 괴로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에게 걸어오신 다고 하였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은 신이 있어 이루어진다. 신이 내게 건네주는 것 거룩한 생각이다. 신이 건네주지 않으면 참 생각을 얻을 수 없다. 거룩한 참 생각은 신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못된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곳에 신이 있다고 염재신재念在神在라 한다. 그러면 생각이 신인가 나로서는 모른다.(『다석어록』, 22쪽)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우주 만물을 하나의 죽은 물질로만 취급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우주가 단순히 죽은 물질이라고 푸대접할 수는 없다. 내 몸의 살알(세포) 하나하나가 살은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 의식, 절대 인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아님을 섬기라는 것은 만물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석어록』, 47쪽
이러한 하나님을 유영모는 ‘없이 계신 이’라고 불렀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고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유교․불교 사상이 기독교 사상과 만나면서 지평 융합되어 나온 표현이다. 유영모가 말하는 절대공․빈탕․허공이 바로 이 없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런 없이 계신 하나님은 이름이 있을 리 없고 어느 특정한 곳에 계실 리 없다.
그리고 이 없이 계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인간이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다고 유영모는 말한다. 불교의 불성佛性이나 유교의 성性 모두가 인간 속에 거하는 존재다. 서구의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찾아가기 위해선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유영모의 하나님은 불교, 유교의 공空․무無․진공묘유眞空妙有․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불성佛性․성性 사상 등 기독교의 하나님 사상과 만나면서 없이 계신 하나님, 내 속에 계신 하나님, 참나 되신 하나님 등으로 표현되어나왔다. 이물관물以物觀物, 곧 불교․유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보았다. 다시 말해 유영모의 하나님 이해는 불교․유교 등의 동양 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지평 융합되어 나온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불성이나 성性 개념 등이 꼭 동양만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서구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씨앗’이나 칼 라너가 말하는 ‘거룩한 신비’ 등이 이를 말해주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어거스틴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했다. 그러나 유영모는 불교․유교 등 동양 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보고 나름대로 해석했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계속 유영모의 그리스도 이해를 살펴보자.
2) 그리스도 이해―하나님 아버지와 부자유친한 그리스도
그런데 유영모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정통 신앙과는 달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유영모에게 스승이란 모범되는 분으로 실천력을 주는 분이다. 예수와 자신의 관계는 실천력을 주시는 곧 모범을 보이는 이와 이를 따라가는 관계로 일반 교리에서처럼 구속자와 죄인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스승을 통해 참나가 곧 길․진리․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석가와 가섭, 유교의 공자와 안회 같은 스승 제자 사이다.
유영모는 불교의 공空과 무無, 유교의 효孝, 부자유친父子有親 등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반 기독교 교리와는 다른, 없이 계신 하나님, 하나님과 부자유친한 그리스도, 우리의 모범이 되는 그리스도에 대해 나름대로 말한다. 한마디로 유영모의 기독교 이해는 없이 계신 하나님,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 참나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삼아 내몸을 갈고 닦아 바탈을 키워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유친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결국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한글과 기독교 : 한글로 신학하기 (p.266-280)
― 유영모와 김흥호 선생의 한글 풀이를 중심으로
이정배 ◆ 감리교신학대 교수
한글 구성 원리와 세계관 -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
필자는 다석 유영모 선생에 대한 한 논문에서 다석 사상을 동양적 종교 이해를 바탕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의 비서구적 모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정리한 바 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의 다석 이해와도 같은 일치하는 부분이다.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 사상이 다석의 세계 내 경험, 곧 다석의 이해의 선구조가 되어 기독교(성경)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시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구제적으로 표현하면 다석의 기독교 이해는 노장적 사유(道)와 불교적 토대(空)위에 유교적 내용(孝)으로 살을 붙여서 그리스도가 지닌 생명신학적 특성, 유영모의 ‘얼(성령)기독론’을 정초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석은 성경이 증언하는 영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얼’이란 동양적 언어로 즐겨 명명하였다. 예수의 얼이 그분에게는 곧 성령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성령의 임재가 그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 역시 어느 특정 개인이 아니라 우주적․역사적․전인류적 얼로서 그의 생명(얼)이 결코 둘로 끊어져본 적이 없었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이 점에서 다석은 언어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글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아 나설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언어란 다석에게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유영모 선생은 겨레의 얼이 담긴 한글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보았고 한글로서 하느님 말씀을 풀어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김흥호 선생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겨레의 언어인 한글로 이해하여 자기 말로 바꾸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불렀다. 한글을 복음의 그릇(용기)이라 부르며 현재 사용하는 한글 24자만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시 28자 모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다석 유영모의 ‘한글로 신학하기’는 이 점에서 독창적인 한국적 신학의 면모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겨레의 언어인 한글의 구성원리를 탐구하고 그 원리들이 한국 고유의 세계관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 이런 한글 속에서 기독교 복음이 어떻게 풀어졌는지, 끊임없이 질문과 탐구를 여기서 서술해본다. 한글이 중국 언어를 기초로 하였으되, 음양오행론과 천지인 삼재 사상을 통합하여 과학적․실용적으로 독특하게 만들어진 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해보자.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 다석과 현재의 한글로 신학하기
현재 김흥호 선생은 스승 유영모의 ‘생명 사상’에 관한 글에서 한글이야말로 그림(像)처럼 진리를 계시하여줄 수 있는 글이며, 한국 사람이 한글을 사랑하기만 하면 무궁무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글을 하느님이 세종대왕의 손을 빌려 계시한 글이라 하였다. 이것은 다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배웠던 현재 선생 자신의 확신에 찬 언명이다.
두 선생은 한글이 한국 문화의 핵심이며 한국 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믿는다. 김홍호 선생은 이 땅에 사는 백성 모두가 하느님의 높은 보좌로부터 왔으나 한문으로 인해 갈 곳을 모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은 한글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세종의 염려가 이제 자신이 가야할 곳,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유영모․김흥호 선생께서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내고 없는 한글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노자』『중용』『주역』등 동양고전을 풀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모국어인 한글을 통해 심리 저층에 깔린 민족 의식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언어심리학적 판단과 한글속에 담겨진 종교신학적 의미에 대한 확신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는 두 분의 기독교 이해가 유불선을 꿰뚫는 삼재 중심의 음양오행론을 통해 해석학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영모, 종교 사상의 계보와 종교 사상사적 의의 (p.342-377)
강돈구姜敦求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톨스토이의 종교사상은 당대의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인류는 승려 계급에 의해서 결박되어 있는 최면술의 세계와 학자 제현들에 의해서 인도되는 최면술(과학만능주의, 과학이 종교를 대체한다는 생각)의 세계로부터 탈피함으로써만 모든 재액과 불행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당대 종교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인 인식 아래 톨스토이는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종교 일치 사상과 함께 종교의 요점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만물의 본원으로서의 신의 존재는 절대적이고 유일하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 본원으로서의 신의 소부분이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의 생활 방법 여하에 따라 자기 내부에 사는 신적 본원의 일부분을 증대시킬 수도 있고 감소시킬 수도 있다. 이 본원을 증대하려고 원한다면 각자가 자기의 욕정을 억압하고 자기 내부에 사랑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 실제적 방법은 자기가 남에게서 도움받기를 원하듯이 남에게 먼저 그것을 행하라는 한 가지에 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종교의 주의 강령의 요점이다.
이러한 주의 강령은 바라문교에도, 유대교에도, 유교에도, 기독교에도, 이슬람교에도 모두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비록 불교가 신의 정의定義를 부여하지 않는다 해도 인간이 그것에 융합해서 하나로 되는 본원, 열반에 이르면서 자기의 소아小我를 잊어버리는 본원, 그러한 본원을 인정하는 데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열반에 달함으로써 하나로 결합되는 곳의 본원은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신으로 인정되는 본원과 결국 같다.
‘사람의 마음은 신의 불을 켜는 촛대다’라고 헤브라이 속담은 말한다. 그렇다. 마음속에 신의 불이 타지 않는 한 인간은 불행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이 불이 타기 시작하는 그날에는(이 불은 종교에 의해서 개안開眼을 얻은 마음속에서만 불타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왜나하면 이럴 경우에 인간의 내부에서 행동하는 것은 본인의 힘이 아니고 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종교이고, 또 진수이다.
―『다석어록』, 220쪽
옛날에 이상의 시대가 있었다는 사상도 미래에 이상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사상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한 범위 내에서는 옛날에 좋은 때도 없었고 차차 내려오면서 언짢아졌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천국이 온다고 하여도 거기서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키가 커지겠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보겠는가. 뭣이 이상적으로 될 것인지를 몸뚱이를 가진 이상 그대로 바로 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석어록』, 222쪽
무슨 철학, 무슨 주의, 무슨 종교 따위가 완결을 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완결을 못 보았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 톨스토이의 사상도 도중에 미결된 것이지 완결한 것은 아니다. 이같이 모든 것이 미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고 맘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맘에 따라서 미정고未定稿를 이어받아 완결을 짓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다석어록』, 137쪽
성신聖神을 받고 돈오를 하면 한꺼번에 다 될 줄 알아도 그렇지 않다. 석가도 한번에 모든 것을 다 알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돈悟 뒤에도 점수漸修를 해야 한다. 돈오도 한번만 하고 마는 게 아니다. 인생의 길이란 꽉 막혔던 것 같다가도 탁 트이는 수가 있고, 탁 트였다 싶다가도 또 꽉 막히고 그런 것이다.
―『다석어록』, 288~289쪽
내가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불교의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는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여러분이 내 말을 감당할는지는 모르나 참고 삼아 말하는데 그리스도교의 성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느님이 하여주실 것이다.
―『다석어록』, 129쪽
박영호는 1967년에『새시대의 신앙 ― 입체적인 새로운 신관』(기문사)을, 1970년에『새시대의 신앙(속) ― 입체적인 새로운 신관』(기문사)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박영호의 사상을 추이하는데 자료로서 가치 있다.
그렇다고 박영호가 유영모의 사상을 전달만 한 것은 아니다. 박영호는 유영모가 알지 못했던 동․서양의 또 다른 사상가들을 섭렵하면서 유영모의 사상을 검증하는 작업을 하였다. 예수․석가․노자․공자․장자․맹자 등 유영모가 자주 인용하였던 인물들뿐 아니라 플로티노스․에크하르트․스피노자․베르자에프․헤르만 헤세․슈바이처․토인비․브루노․샤르댕․주자朱子․육상산陸象山․왕양명․최지원․율곡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들을 통해 유영모의 사상을 검증하고 드러내는 작업을 하였다. 동시에 유영모의 난해한 사상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풀이해나갔고, 유영모의 사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덧붙이는 일까지 하였다.
유영모 정통 기독교 기준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친기독교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유영모의 친기독교적인 면모가 그대로 함석헌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나 박영호에게서는 친기독교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박영호가 주장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도표로 그리면 이렇다.
종교별 신인神人 관계
종교별
구분
유교(중용中庸)
불교
도교
기독교
기타
신
천天
니르바나
천도天道
아버지
인간
성性
불성
도道
하느님 아들
스승
공자․맹자
석가
노자․장자
예수
톨스토이․간디
끝으로 박영호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인용하여 유영모의 종교 사상의 특징을 다시 이해해보자.
몸이 전구요, 밤이 필라멘트라면 얼은 전력이다. … 하느님 아버지는 수억만 kw의 대전원이라면 그리스도라 부처라 진인이라 하는 전등불의 전기는 지극히 낮은 전압의 전기다. 전기로서는 아버지와 같으나 전압으로서는 아버지는 크시고 아들은 낮다. 예수나 석가도 몸의 사람으로는 톨스토이나 간디와 같은 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명도明度가 높은 좋은 전구였을 뿐이다. 예수나 석가도 얼사람으로는 톨스토이나 간디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전기다.
유영모의 신과 인간, 그리고 종교에 관한 견해가 박영호의 이 비유적인 설명으로 확연히 이해할 수 있다.
라마크리쉬나(1836~1886), 비베카난다(1863~1902), 타고르(1861~1941), 간디도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길, 곧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여러 길이며, 단일한 신성神性의 다양한 현현顯現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종교는 끊임없는 낡은 형식을 버리고 성장해야 할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존재에서 성스러움으로! (p.424-432)
― 21세기를 위한 대안적 사상 모색․하이데거의 철학과 유영모 사상 비교 연구
이기상 ◆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통해 제시하는 성스러움의 특징들을 우리는 이상과 같이 온전함(전체성), 열려있음(개방성), 자신을 숨김(은닉성) 그리고 신비스러운 힘(작용성) 등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특징들을 한결같이 성스러움이 인간의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 있음을 지시한다.
존재자에 방향이 잡혀 있는 시각으로는 이 성스러움을 예감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온통 전체로서, 전체성 그 자체로서 경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고 경험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열려 있음 그 자체로서 경험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숨기는 비밀스런 힘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도대체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없는 것(무)이다.
존재 중심의 시각으로도 그 성스러움을 사람들은 예감할 수 없다. 열린 장의 열려 있음과 시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 지평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재 지평을 가능케 하는 끝이 없는 열려 있음이고 바닥 없는 심연, 가이없는 텅 비어 있음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공간 안에서의 체재와 시간 안에서의 체류를 전제한 것임을 고려할 때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가이없는 공간과 끝이 없는 시간 전체를 통턴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있음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하느님과 있음
유영모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는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한, 텅 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와 끝없는 때-사이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며 주관하는 하나님, 그 변화 속에서도 온통 전체를 유지․보존시키며 끝이 없는 힘돌이․열돌이․숨돌이․피돌이로써 되어감의 맴돌이와 되삭임, 되먹임을 통해 변화의 펼쳐짐을 전개시키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하나님이다. 곧 텅 빈 온통, 무시무종의 텅 빔 속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유시유종의 생성 소멸 변화의 사건 전체, 이 모든 것을 절대 하나인 온통 전체 속에서 유지시키는 신비스러운 힘 그 자체 등 세 가지 국면을 다 포함한 하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둘째, 이중 무극만을 떼어내 고찰한 절대공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모든 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텅 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셋째, 태극, 곧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되어감의 전개 과정, 생성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하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넷째, 흔히 하느님의 마음이라 표현되는 우주의 얼로서의 한얼님이다. 이 한얼에 의해 텅 빔 속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교통할 수 있다.
유영모에 의하면 무는 단일허공單一虛空으로 전체다. 그런데 단일허공 안에서 전체를 비롯해 우주 먼지까지 여러 개체가 생겼다. 이것은 허공이 변해서 생긴 것이다. 허공밖에 없는 허공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개체는 무인 허공에서 잠깐 있다가 없어진다. 무인 단일허공은 영원 무한한 데 비해 개체들은 공간적으로도 작고 시간적으로도 짧다. 그러나 별의 수요가 많듯이 무수하게 많다. 이 개체들은 반드시 본 모습인 무로 돌아간다. 사람도 그 개체 가운데 하나다. 이 개체는 한 번 왔다가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뜨내기다. 유영모는 말한다. “우리는 지나가는 한순간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면 섭섭하다고 한다. 한 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 일왕불복一往不復이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전체인 하느님한테 받은 직분(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는다. 우리는 나 자신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어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이다.
그런데 유영모에 의하면 개체인 인간이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전체로 돌아가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생명은 전체기 때문이다.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무극인 무에서 유가 나와 태극이 되었다. 유가 나오지 않았다면 무극일뿐이다. 그러나 유만이 태극은 아니다. 유를 내포한 무극이 태극이다. 무극은 무라 불변의 절대다. 그러나 태극의 유는 바뀌는 역易이다. 시시각각 바뀐다. 바뀜을 멈추는 일은 없다. 바뀌는 유도 줄곧 바뀐다는 것만은 불변이다. 여기서 우리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상대 세계에 와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여기에서 할 일은 우리가 잘 변함으로써 불변의 자리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는 전체라는 뜻과 절대라는 뜻이다. 전체와 절대는 유일 존재로 하느님밖에 다른 존재는 없다. 이 존재는 없이 있는 허공이다. 절대 허공이 전체고 절대 허공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멸의 물체를 개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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