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귀(新話頭) ①
24시간 화두 드는 건
스님들을 위한 수행법
입산수도를 못하면
그대로 방편 있기 마련
일반 사람들은
화두 가지면 안돼
생업전선에 뛰어든
재가자들에게 맞는
새로운 수행법 필요
앞으로도 백년 후 천년 후 만년 후에도 출가라는 법은 있을 겁니다. 그럼 출가 안 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이 문제에요.
우리가 똑 같은 중생인데 어떤 분은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서 팔자 좋게 공부를 해. 그러나 중생들은 팔자가 좋지 못합니다. 공부할 팔자가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의 고집을 가지고 하게 되는데 다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포기를 해야 되느냐. 이거 아닙니다. 부처님도 포기한 것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개유 불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한 지가 약 이천 년 삼천 년이다 하는데, 그동안에 중생들은 발전해 나가. 이걸 생각해 본다면 이전과 같이 그리 안 하더라 해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합니다. 부처님이 만약 요새 세상에 오셨다면 방편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방편, 하나도 없앨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지금도 만약 객관적 여건이 된다면 이전대로 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성을 발견하기 위한 방편, 이것은 고칠 수 있으면 고쳐야 되지 않겠느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선 바탕부터 준비해야 됩니다. 바탕을 준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자, 우리가 여기 앉은 그대로 온 누리의 사실을 엄숙하게 우리가 알거든요. 안다는 것은 허공성이라는 이 사실을 알아. 그렇게 간단하게 하는 말이라서 여러분이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온 누리에 벌어진 일체만법이 다 허공성이라고” 이렇게 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허공성이라는 요 말마디만 알았어. 허공성이라는 걸 딱하게 알게 돼. 그래서 그 실감이 생겨. 다른 것이 실감이 납니다. 그럼 솔직한 말로 우리가 공부하나 안 하나, 지금 현재 미했다 할지라도, 온 누리가 허공성이라는 것, 태양도 허공성, 달도 허공성, 별도 허공성. 그 국토에 있는 만약 다른 세계에 초목이라든지 돌이라든지 있다면 그것마저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양은 태양계에 속해 천체 그 속도 알아. 태양의 속이 어떻게 됐다는 것도 알아. 다시 말해서 이 누리가 있다면 누리의 속도 알아. 꿰뚫어버려. 이거 허공성이라는 말은 그거 아닙니까?
이 말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말이 싱겁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거 싱거운 문제가 아닙니다. 이거 하나만 알아도 벌써 여러분은 부처의 씨가 있기 때문에 이걸 아는 겁니다. 만약 부처의 지견이 영 메말랐다면 이거 말은 그럴듯해도 곧이 듣겨지질 안 해. 그러나 여러분들이 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안다 말이지. 과학적으로 딱 맞는 얘기를 거부할 필요는 뭐 있냐 말이여. 거부 안 하면 우리는 믿어야 된다 말이지.
부처님 가신 삼천 년 후에 우리는 입산수도를 못해. 입산수도를 못하면 못한 그대로 방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것이 선지식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업이 중했든지 어쨌든지 입산수도를 못했어. 가정을 가지게 됐어. 자손을 길러야 돼. 사회사업을 해야 돼. 참말로 결단심이 있는 분들은 머리털 깎아 버려. 이 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여. 깎아버려. 그래서 가족도 인연을 끊고 홀연히 말이지 출가를 할 수 있지만 그거 안 되거든요. 그만큼 여러분들은 영웅적이 못돼. 그러면 영웅적이 못 된다고 하여서 말이지 아야 하고 죽는 거만 기다리느냐 말이여.
여러분도 똑같이 성불을 해야 된다. 불도를 이루어야 된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일진대 그러면 이 책임은 누가 져야 되겠노. 선지식들이 져야 된다. 과거에 숱한 선지식들이 있었지만 요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외치는 사람이 없어. 다른 거야 삼계를 흔든 선지식들이 있었어.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반드시 선지식이 나와야 돼. 나와서 이 시절 이 인연에 맞는 수단과 방편을 세워야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스님네들은 이십 사시간 전부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스님과 같이 되는 것 아닙니다.
좌우간 요새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요 시절에 맞는 이론과 방편, 시절인연에 맞는 방편을 내놔야 돼요. 천년이나 이천년 전, 백년이나 이백년 전에 쓰던 방편, 그 방편은 요새 안 맞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화두. 화두 좋습니다. 지금 화두 가져야 돼. 그런데 요새 화두를 가진다는 건 죽 계속해서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화두 갖는 거 나는 거부를 하지 않습니다. 가져야 됩니다. 가장 편한, 좋은 계기가 된다 말이죠.
그러나 이 시절 이 인연에 따라서 화두를 가진다는 건, 화두는 스님네들이 갖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화두를 가지면 안돼. 왜 그러느냐.
화두는 스님네들 처럼 이십사 시간 전부 가져야 되거든. 순일하게 가져야 되거든. 보통사람들은 회사 나가지 농사짓지 장사하지 자식 키우지 밥 지어야지 어떻게 합니까? 안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시간이 끊어져. 그런데 요새 스님네들은 스님네 자기 공부하듯이 시키고 있다 말이죠. 이것이 안 된다 말입니다. 조계사에서도 신도들에게 말한 일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와서 들었습니다. 그때 웃습디다. 그때 내 뭐라고 말했냐면, 스님네들 말 듣지 마소 이랬습니다. 스님네들은 스님네들을 위한 말이지 일반인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말이여. 일반인들을 위한 말이라 할 테면 뭣인가 달라야 돼.
각자 직업에 맞는 화두 들자
새말귀(新話頭) ②
운전수도 은행원도 백정도
각각의 환경에 맞는
새로운 화두가 필요하다
이것을 ‘새말귀’라 명명
만약 운전수가
자동차를 잘 운전하겠다는
생각만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새말귀’
일 할 때 열심히 일하고
참선할 때 다 놓아야
또 이전과도 달라야 돼. 예를 들어서 화두도 스님네들이 가지고 있지 보통 사람들이 가지면 안 된다 말이여. 그건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돼. 이거 맞지 않습니까?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돼. 운전수가 화두 가지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돼. 안 된다면 운전수는 말이지 중생 아닌가? 은행에 다니는 사람 화두 가지면 되겠습니까?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은 수판 놔야 되거든.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이지 중생 아닌가? 그 사람들은 인생문제 해결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러하기 때문에 화두는 불변의 이치인데, 가져야 되지만, 그 중생 근기에 따라서 중생들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이 방편이 새로 서야 됩니다. 나 이걸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말귀가 나온 겁니다. 새말귀라. 새 신(新)자. 신화두(新話頭)라 그 말입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말귀입니다. 처음에 내가 새말귀라고 하니까, 화두라고 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 한국에 인연을 받았습니다. 인연을 받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말을 갖다 써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말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말귀라고 하면 통합니다.
운전수도 은행에 다니는 사람도 소를 잡는 사람도 말을 잡는 사람도 장사를 하는 사람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선지식의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전 화두 좋습니다.
스님네들로서는 가장 적당합니다. 왜 그러느냐. 화두는 변소에 가서도 화두를 놓는 법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스님네들은 만족해. 그걸 거부할 필요가 없어. 좋아. 그러나 신도들은 가질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걸 갖다 구태의연하게 신도들을 스님네들 취급을 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거 됩니까? 택도 없습니다. 그건 어딘가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겁니다. 성불이라는 말마디는 하나이지만 우리가 성불하는 길은, 거기에 올라가는 길은 천 가닥 만 가닥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결국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운전수는 운전수로서의 화두가 있어야 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의 화두가 있어야 된다는 이건 명확한 일입니다.
그러면 새말귀란 뭣이냐? 이겁니다.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허공성이라 말이지.
나무도 허공성 산도 허공성 물도 허공성, 밉다 곱다 이것도 허공성, 심지어 내 몸뚱어리 이것도 허공성, 이러한 바탕을 알아야 됩니다. 이 바탕을 알기는 조금 시일이 걸리지만 알기가 수월합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성 자리를 알아야 돼. 절대성 자리.
그러니까 몸은 상대성이다. 몸은 상대성인데 이건 자체성이 없다. 내가 이걸 가져도 손은 이걸 가진 줄 모릅니다. 내가 알지. 내가 안다면 내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거 아닙니다. 손에 자체성이 없거든.
이걸 확실히 알아버려야 돼. 우리가 어디 걸어다녀. 어디 걸어가. 발에 자체성이 없는 거예요. 발은 모르는 거예요. 발 뿐 아니라 몸뚱이 자체는 모르는 거예요. 아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하니까 이러한 도리를 내가 알아. 이 도리를 알고 손을 움직거립니다. “손을 움직거려서 뭘 걷어잡는다, 눈으로 뭣을 본다, 귀로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 내 성품 자리, 내 법신 자리, 이 자리가 그리 하는 거다” 요걸 알아야 됩니다. 이걸 알면 이 화두가 곧 잡혀. 그러기 때문에 운전수도 돼.
왜 그러냐면 운전수는 핸들을 잡고 있지만 핸들 잡은 손은 이거 무정물이다 아무 자체성이 없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 자리가 이 내 손을 시켜서 핸들을 가지고 있다, 운전수가 이걸 알아야 되거든요.
그럼 “나는 주의해서 운전을 하겠다 하면, 요 손발을 가지고서 주의해서 운전을 하겠다 하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가 주의해서 운전을 하겠다.”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손이나 발로 기계를 밟고 손으로 핸들을 가졌다 말이죠. 그러나 손이나 발은 몰라. 다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내 성품이 이 손으로 하여금 기계를 돌려.
그러니까 나는 기계를 잘 돌리겠다. 어찌하겠다. 이 생각만 놓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화두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거 내가 만들어 놓은 화두에요. 요걸 새말귀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아침에 집을 나갈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 내가 자체성이 없는, 우리의 몸은 무정물이거든요, 자체성이 없는 몸뚱이를 끄집고 나가서 오늘 일 잘 하겠다 이런 생각으로 나가. 또 일 다 마치면 자체성이 없는 이 몸뚱이를 끌고 나는 집에 들어간다. 결국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요게 중심이 되는 거라. 그래서 앉아. 참선을 해. 그러면 나중에 이거 다 놔야 됩니다.
다 놓아야 되지만 우선 처음에는 나는 비명비암,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이 자리를 나는 보리라. 왜 그러느냐. 환해. 이것도 본래 밝은 것이 아니여. 또 어두우면 캄캄해.
이거도 본래 어두운 것이 아니여. 비명, 밝은 것도 아니고 비암,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보여.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보여. 그런데 이 말이 조금 이해하기가 곤란하지.
非暗非明의 자리가 ‘진짜’
새말귀(新話頭) ③
몸뚱어리도 하나의 환상
부처님의 출현도 환상
환상 아닌 진상 구해야
새말귀는 시간 따로 필요 없다
눈 뜨면 “몸뚱이가 깼다”
식사할 때도 화장실 갈 때도
‘자체성 없는 나’를 보면
하루 종일이 ‘화두’
본래 그 자리가 밝은 것인데 밝은 것이 어떻게 보이나요? 뵈. 봤던 예사로 봐. 밝다는 이런 인식조차도 없어. 원래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보여. 또 어두운 것이 보인다 말이지.
그러면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이 자리가 진짜라 말이여. 앉을 때는 그걸 봐야 돼. 그걸 한 번 보고 싶다. 이거 보입니다. 앉았어. 캄캄한 데.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것을 이것을 한 번 보리라 하면 나타나는 거여. 처음에는 이거 나타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있으면 흑백으로 나타나. 그 다음에는 빛깔이 나타나. 광명도 보이고 빛깔도 나타나. 예수교 열심히 믿는 사람들, 불교도 열심히 믿는 사람은 부처님 나타납니다. 그 부처님이 어쨌든지 역시 환상이거든요. 다 지가 만든 것이거든요. 예수가 나타나면 지가 만든 예수 아니에요? 꼭 한가지입니다.
그거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것이 환하게 나타나. 산하대지가 환하게 봬. 어떨 땐 달도 뵈고 해도 뵈고 별도 봬. 그러나 그건 과정으로서 좋은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도 아니라. 그것도 어려운 법이여. 그렇다고 해서 그걸 버릴 필요는 없어. 왜 그러느냐. 우선 여러분이 볼 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몸뚱어리도 하나 환상이거든. 그러면 부처님이 나타났다 말이여. 그것도 환상 아닌가. 우리가 환상을 구하는 것은 아니거든. 진상을 구하는 것이지.
그러하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지 않는 거여. 비암비명, 이것도 그대로 넘어가는 거라. 비암비명, 마지막 과정으로서 좋은 과정이에요. 거부할 필요 없어. 나중에는 그대로 넘어가. 그대로 넘어가도 비암비명을 내가 그대로 알아서 써. 그래서 밝은 것이 오면 밝은 것을 써. 어두운 것이 오면 어두운 것을 써.
이런 화두를 솔직한 말로 한 반 년만 더 가져 보세요. 처음에 알아. 이치상으로 알아. “내 손이 핸들을 가졌다. 내 손가락이 주판을 놓는다. 잘 놓아야 되겠다. 잘 놓아야 되겠다는 요 생각 하나 뿐이여. 잘 놓아야 되겠다 하는 이건 성품이 없는 거다. 잘 놓아야 되겠다고 이런 생각하는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이다” 이러한 생각을 미리 가져 놓고 잘 놓아야 되겠다는 것은 간단한 거여.
나중에 생각만 “잘 해야 되겠다” 하면 벌써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자리가 이걸 끌고 다닌다는 이걸 자꾸 재인식하는 거라. 그러하지 않아요? 그리 되는 거여.
처음에는 잘 안돼. 싱거워. 또 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 하는데, 글을 쓰든지 뭘 하든지 간에 자꾸 “내가 자체성이 없는 손을 가지고서 글씨를 잘 써야 되겠다 주판을 잘 놓아야 되겠다. 밭을 잘 갈아야 되겠다 운전을 잘 해야 되겠다.” 그러하면 “옳지 요것은 무정물이다 이 몸뚱이는 무정물이다 허공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잘 놓아야 하겠다는 이 자리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짜 내다” 이것이 굳혀질 것 아니에요? 한 반 년만 가져 보세요. 딱 굳혀질 겁니다. 딱 굳혀지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허공 그 자체가 내 몸이라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난 그런 생각도 합니다. 이 수밖에는 도리가 없어. 도리가 없어.
이래 되면 집에서라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밥을 하면서 쌀을 씻으면서. 이건 자체성이 없다. 내가 쌀을 씻는다 쌀을 잘 씻어야 되겠다. 불 잘 때야 되겠다, 밥해야 되겠다. 전부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진아가, 진짜 내가, 참 내가, 지혜가 없는, 아는 것이 없는 이 손발을 움직여서 밥도 짓고 밭일도 하고 장사도 하고 회사도 나가고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건 사실을 사실대로 알자는 거예요. 다른 것 아무 것도 아니에요. 여기 사실 아닌 것이 어디 있나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을 하기를 요걸(몸) 나라고 봤단 말이에요. 물론 이거 내지. 내 관리물이니까 나라고 할 것 아니에요? 나지만 자체성이 없는 거라. 이걸 내라고 해서 엉뚱한 모습에 딱 들어앉았단 말이지. 들어앉았지만 이 모습은 자꾸 변하는 것 아니에요? 자꾸 변하는 거라. 그런 걸 믿어?
그러하기 때문에 이전 어른들도 화두를 내 놓은 거라. 화두를 딱 줘서 다른 생각을 안 하도록,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해서 화두를 전념으로 하도록 만들어 놓는 거라 말이여.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이것이 안돼. 시간이 없어. 하지만, 새말귀를 할려면 시간이 필요 없어. 눈 딱 뜨면 내, 깼다. 내 자체성이 없는 이 몸뚱이가 깼다. 벌써 내다 하면 고런 뜻이 다 들어가. 내다 하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를 뜻하는 것이거든. 변소 가더라도 아, 내가 변소 간다. 내가 세수한다. 세수 잘 해야 되겠다. 밥 잘 먹어야 되겠다. 하루 종일 화두에요. 새말귀는.
물론 스님네들이 하는 화두는... 하루 종일 하는 거라. 잠잘 때만 놓았다 뿐이지. 어떤 사람은 잠잘 때도 생각을 해. 잠잘 때도 생각을 한다면 하루 종일 화두거든요. 중생도 내다. 내 일 잘해야 되겠다. 하루 종일 화두에요. 그럼 어쩌다 꿈에도 내다 이래져. 꿈에도 이래져. 하루 종일 화두를 가지는 것은 스님네와 일반 중생과의 그 입처가 다를지언정 하루 종일 화두를 가지는 것은 매일반이라 말이죠.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출가할 수 있는 팔자를 못 타고 났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방편만 조금 고치면 우리도 화두를 가질 수 있다 말이여. 도리어 이 화두가 어떠한 면으로 봐서는 더 빠르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있어요. 물론 화두를 가지는 것이 이전 화두나 지금 화두나 빠르고 늦는 것이 있겠습니까만, 실에 있어서는 같은 도리이겠지만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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