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식 보름달 그리기는 논리적으로만 해석해야
박용태 교수는 그의 최근 글 <한자경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서 한자경교수가 나의 <초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 내용 일부에 대해 반론한 논점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반박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내 글에 대한 한교수의 반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친절히 권했다.
아직 한국식 토론 및 논쟁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몇 가지 이유로 한교수의 논지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미루어 왔는데, 박 교수의 제안도 있으니 이제 간단히 몇 마디 해야 할 인연
이 모인 것 같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미국 대학들은 1월 중순에 봄 학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개강 3주째인 나는 미리 계획해서 시간을 배정해 놓은 글들 외에는 현실적으로 예정에
없이 새로 글을 시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원래 계획에 없던 이 글도 더 길고 섬세
하게 쓸 여력이 없음을 <미디어붓다>의 독자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린다. 중국 송대 성리학자들인 정씨 형제가 불교에 대해 쓴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비판문들을 몇 해
전 영어 번역으로 읽으며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심 반사적으로 불교를 그 비판
들로부터 방어해 보려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쉽사리 반박할 수 없어서 난감했었다.
그러면서 불교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을 통해 그 여러 체계를 더 진화시켜 나가려면 불교
에 대해 역사상 아마도 가장 가혹한 비판을 가했을 성리학자들의 요점을 새기고 새기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성리학 전공자이면서 불교를
애호하는 박용태 교수가 이번 깨달음 논쟁에 참가하여 스스로가 보는 바람직한 불교관을
개진해 주어서 반갑고 기쁘다.
아마도 그의 불교관은 성리학자들의 예리한 비판을 피할 수 있는 형태로 형성된 것일 테고,
한편 그가 이번 <한자경 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서 펼친 논의가 내 생각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나의 불교에 대한 견해가 성리학자들의 비판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안도하며 고무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한자경
교수가 내가 사용했던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이용해 개진한 반론에 대해 내가 왜 지금까지
반박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박용태교수의 견해 가운데 한 두 논점에 대해
코멘트를 더해 보겠다. 몇 년에 겨우 한 번 한국을 방문하는 나는 한자경 교수와는 3년 반 전에 학회에서 한 번 만난
적 밖에 없다. 그런데 당시 쓰고 계시던 원고의 몇 챕터를 친절히도 내게 이메일로 보내
주셔서 나는 2012년 가을에 원고지 39매 분량의 글을 써 나의 코멘트로 한 교수께 보내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지난 3년 이상 아무런 답변이 없으셔서 어찌 된 일이지 궁금했는데, 뜻밖
에도 이번 깨달음 논쟁과 관련하여 <미디어붓다>에 내신 글로 내게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셨다.
반갑기도 했지만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공개적으로 반박문을 써야 하나 망설
이다가 하나의 논쟁에서 같은 주제에 대해 한 개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공정하지도 또
적절치도 않은 것 같아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박용태 교수가 이번에 다른 주제를 선택해
새로 낸 글에서 나도 한 교수에 대해 내 의견을 제시하기를 권하고 있어서 이제는 때와
인연이 맞는다고 판단되어 그에 응하기로 했다. 한자경 교수는 3년 반 전에 있었던 학회 당시 종합토론시간에 내가 사용한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에서 그림의 바탕인 종이의 흰 색이 마음이나 불성의 밝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게 질문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더 이상 답변을 부연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사실 어떤 학자들이 내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그렇게 오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많은 청중 앞에서 그 오해를 바로잡아 준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던
소중한 옛) 한국적 정서로는 너무 민망할 것 같아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박용태교수가 내 의견의 제시를 권하고 계시니 이제 내가 학회에서 답변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두 이유를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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