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선론(護禪論)
2016년 연초에 인터넷 불교언론(미디어붓다)에 게재된 미국 미네소타대학 홍창성 교수의 〈초(超)지성주의와 반(反)지성주의〉를 읽고, 송나라 때 장상영 거사가 〈호법론〉을 쓴 고사(故事)가 생각나서 학자이면서 동시에 재가수행자의 입장에서 펜을 들게 되었다.
먼저 홍 교수는 위의 제목을 붙인 이유를 본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간화선을 대표로 하는 선문(禪門)의 가르침은 분별지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초(超)지성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경우 선문의 초지성주의가 실제 수행 현장에서는 반(反)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필자는 이 대목을 읽고 홍 교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도 처음에 선서(禪書)들을 접했을 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그래서 선방을 기웃거려 봤지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잘 없어서 무슨 ‘반지성주의’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제법 많은 책을 읽었을 때는 조금 이해가 가면서 ‘아! 선은 초지성주의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을 초지성주의라고 여겼을 때쯤, 내 마음에 반성이 일어났다. 선을 초지성주의라고 보는 관점에 서서, 웬만한 어록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화두를 풀어보거나, 또 제법 선문답을 흉내 내보기도 했으나, 어느 날 큰 사고가 일어나자 그런 지식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그만 마음이 뒤집어져서 혼비백산하였다.
그런 뒤에 ‘선이란 이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생사(生死)에 대적하는 것이다’는 어느 선사의 말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필자는 참회심이 일어나며, 실제로 수행을 해보지 않고 선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큰 실례였다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아도 그 지식이 인간을 구제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필자는 한국에서 인격자로 존경받던 고(故) 서울대 류달영 명예교수와 시인 구상 선생이 사재를 출연하여 세운 성천문화재단에서 ‘동서인문고전 아카데미’의 실무를 맡아 20년간 운영했었다. 당시는 두 분의 이름으로 기라성 같은 석학들을 초정하여, 수도권의 지성인들에게 선구적으로 인문학 강의를 펼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고전교육의 프로그램을 짜고, 강사를 초청하며, 수강생을 모집하여 강의를 진행하고, 때로는 직접 강의를 하는 실무책임자로서 오랫동안 인문학 교육의 현장을 지켜보니, 아무리 좋은 고전이라도 강단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인문고전 지식을 “나는 이런 고상한 것도 알아!” 하며 가슴에 단 브로치처럼 여겼지, 그것을 통해 심성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통렬히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 교양이 쌓이고 성격이 다소 순화되는 효과는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이 애꿎게 에고만 강화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20년간 석학들의 고전강의를 누구보다 많이 청강하여 (그것이 내가 직장에 출근하여 매일 하던 일이었다) 거의 동서인문고전의 귀명창이 되었지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외부의 다른 강의에도 열심히 출석해보았지만, 어느 날 나를 돌아보니 심중의 갑갑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것이었다. 말귀는 알아듣는데, 실천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지행(知行) 불일치가 ‘내면갈등’의 핵심이었다.
사실 그래서 선문을 기웃거리면서 열심히 어록을 찾아 읽었지만, 결국에는 내가 직접 수행을 해보지 않고서는 인생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죽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문을 노크했지만, 홍 교수가 말한 대로, 선문은 초심자에게 매우 불친절했고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필요한 정보를 구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연에 따를 뿐인데, 그게 쉽지 않았다. 특히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인데, 그 방법을 실감나게 지도해주실 분과의 인연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몇 년의 방황 끝에 다행히 선지식을 만나니, 첫날 보자마자 바로 화두를 걸어주셔서 며칠간 숨이 막혀서 죽을 고생을 했다. 실참이 되려면, 내가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라, 길을 아는 선지식이 내게 화두를 걸어주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간화선 수행은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하고,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서 그 지도하에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몰두해야 한다.
보통 근기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일단 한 고비를 넘기면, 그때부터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각찰(覺察)하며 ‘수행 않는 수행’으로 습기를 녹여가야 한다. 처음에 시설된 장치 속으로 걸려들었을 때, 그때부터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화두가 나를 끌고 다녔다. 일단 발동이 걸리니, 화두는 마치 용광로처럼 나를 녹였다. 나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활구(活句)’란 한 번 걸리면 놓아지지 않는 화두를 말한다.화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감옥이 되어 나를 짓이겼다. 나중에 중국 강서성의 ‘양기산’ 보통사를 방문했을 때, 사방으로 산맥에 둘러싸인 천옥(天獄) 같은 깊은 분지 속에 선방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화두에 들렸을 때 꼼짝달싹하지 못했던 그 형국이 대자연 속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런 곳에 선방을 세웠던 고인의 마음이 고스라니 전해져 와서 깊은 감회를 느꼈다. 바로 그곳에 살았던 양기방회 선사의 ‘임제종 양기파’ 법맥에서 송대에 오조법연, 원오극근, 대혜종고 세 분의 선사가 차례로 나와서 간화선 수행법을 완성시켰고, 한국의 조계종이 그 정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필자는 정진을 통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선문에서는 원래 수행을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불평불만과 자아중심의 투정은 아직 배가 부르다는 증거이며, 그런 신심 부족은 자기 공부만 방해할 뿐이다.
정말로 간절한 사람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명안종사를 찾아내고, 밤낮 없이 스스로 부닥쳐서 결판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절실한 중환자가 명의를 찾아 완치될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문밖에서 기웃거리면서 들락날락 하던 과거의 나에게 선문이 아마도 반지성주의로 비쳤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가.
직접 수행을 해보고 난 뒤 이제 필자에게는 선을 ‘반지성주의’로 보던 어리광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아가서 선을 ‘초지성주의’라고도 보지 않게 되었다. ‘연기중도의 불이법(不二法)’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엿보니까, 진리당처를 직접 드러내는 선은 양변에 떨어지는 언어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는 ‘전’과 ‘중’에 대립되는 개념이어서 양변에 떨어진 말이다. ‘지성’은 ‘감성’, ‘오성’, ‘이성’ 등과 구별되어 양변에 치우친 말이다. 더군다나 무슨 ‘주의’라는 말뚝으로 선을 묶어놓을 수는 없다. ‘연기중도의 불이법’을 바로 드러내는 ‘선’을 이렇게 양변에 치우친 용어들로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철학 용어로써 설명하자면) 영국 경험론에 의하면, ‘개’나 ‘뿔’처럼 사물에 대한 실제 경험에서 생겨나는 것은 단순관념인데 비해, 이것들이 합쳐서 만들어지는 ‘개뿔’은 복합관념이다. 그리고 복합관념은 이해(understanding, 오성)가 단순관념들을 결합하여 만든 것이어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이 경험론의 증명을 ‘초-지성-주의’에 대입하여 비유하면, 이 말은 ‘날개 달린 개뿔’처럼 이상한 말이 되고 만다. 실상을 바로 보는 선문에서는 ‘이해를 통한 사실의 왜곡’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고, 양변에 치우친 말들로 선을 정의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홍교수가 본문에 자주 쓴 ‘잘-이해하는-깨달음’이라는 말도 결국엔 ‘고양이 뿔에 난 털’처럼 사리에 어긋난 것이 된다. 필자도 과거에 책만 읽고 선을 강의할 때에는, 머리를 굴려서 짜낸 이런 ‘멋진’ 표현들을 맞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심결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화두 들고 수행해보니, 그런 표현들 이면에는 자꾸 선을 정의 내리려는 ‘분별식’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합관념이 바로 망상인데, 그것을 만들어내는 ‘이해’에 속지 않기란 실제로 자기 마음을 늘 들여다보는 실참 없이는 알아채기 힘 든다. ‘깨달음’이라는 말조차도 기저에는 그 말을 입 밖에 낸 ‘주관적 자아’인 ‘에고’가 도사리고 있으므로,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자라면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내지 않고 조심하게 된다. 말에 속으면, 바로 생각구름이 마음을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혹시라도 스스로 자기 꾀에 속고 있지 않는지 늘 깨어서 챙기는 삶을 살게 된다. 마음이 뭔가 불편하다면, 틀림없이 어딘가에 집착하여 마음에 먹구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달마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량 분별하여 자기 마음에 나타난 것은 모두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로 깨달을 때는 꿈이 없으며, 꿈꾸고 있을 때는 참된 깨달음이 없다. 그런 것은 의식적인 망상일 뿐, 꿈속의 지혜에 지나지 않으며, 깨달은 사람도 깨달아지는 것도 있는 것이 아니다. (…) 이해에 의한 분별심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모두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잘 이해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꿈속의 깨달음(夢證)’이며, 이것은 이중의 꿈이다. 또한 아무리 불교가 연기와 공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들에 ‘관점’이라는 말을 붙여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운운하면, 벌써 그 관점을 일으킨 주관적 자아가 연기와 공을 객관대상으로 설정하여 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양변에 떨어진 망상이 된다.
실제로 필자는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여’ 그 힘으로 세상을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지만, 그 ‘이해’가 오히려 번번이 마음에 구름을 일으켜 괜히 시비분별에 말려들곤 했었다. 나는 아는데 저 사람은 모르는 것 같아서 자꾸 가르치려들고, 아는 것을 지키려고 허공에다 말뚝을 박고 그 앞에 앉아있는 셰퍼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가슴은 더욱 답답해져갔다.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주관적 자아가 지식을 대상으로 취하는 알음알이의 병’에 떨어지지 않도록, 육조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혹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와서 법을 묻거든 말을 하되 모두 쌍으로 하여 다 대법(對法)을 취하고 오고 감에 서로 인(因)하고 마침내는 이법(二法)을 모두 없애서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 필자도 과거에 《육조단경》을 여러 번 읽고 또 성철스님께서 강조하셨던 ‘양변을 함께 부수고 함께 세운다(雙遮雙照)’는 가르침도 꽤 ‘이해’했었지만, 실참을 해보고서야 이런 지식적인 ‘앎’과 실제로 마음의 눈을 열고 보는 ‘안목’이 얼마나 다른지를 똑똑히 자각할 수 있었다. 수행 분상에서는 당장 그 자리에서 ‘마음이 괴로우냐, 아니냐’가 기준이었기 때문에, 아는 것과 맑은 마음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는 것으로는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었다. 필자도 실참 전에는 온통 관심이 깨달음에 가있었지만, 수행의 장에 들어선 이후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진짜며, 외부 경계에서 오는 거친 번뇌보다 스스로 일으킨 ‘깨달음’ 같은 말에 속는 법상(法相)의 미세번뇌가 더욱 고질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당신께서 철저하게 ‘고(苦)’의 문제에 집중하여 생사일대사를 마침내 말끔히 해결하신 연후에 중생의 마음병을 치료해주셨기 때문이며,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가 2조 혜가에게 ‘안심법문(安心法門)’을 통해 법을 물려주신 까닭도 그제야 납득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 후로 매 순간순간 ‘안심’에 수행의 ‘눈’이 가있게 되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이 한 생각과의 싸움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면으로는 목숨 걸어놓고 끈질기고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기왕 펜을 들은 김에 홍 교수의 철학적인 논술을 지렛대 삼아서 ‘호선(護禪)’의 말씀을 조금 더 올려보겠다. 홍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 판단으로는 현응스님이 최근 글들에서 간화선에서 이용되는 대화를 잘 살펴봄으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이유는 이것이 수행자들이 그 대화의 내용이 분별지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깨닫게 함으로써 그 대화를 뛰어넘어 (즉 분별지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아가도록 자극해 주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홍 교수가 말하는 ‘간화선에서 이용되는 대화’란 곧 ‘화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화두 속 ‘대화의 내용’을 잘 ‘살피는’ 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실 필자도 이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실제로 화두 참구를 해보지 않으면, 상식적으로는 홍 교수처럼 이해하는 것이 맞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아마도 일반 독자들께서도 이런 입장에 계시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필자가 실제로 화두에 걸려서 마치 밤송이가 목에 걸려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는 것처럼 숨이 막혀 죽을 고생을 해보니까, 화두는 수단(방법)이 아니라 그대로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역시 해봐야 하는 것이다. 화두는 ‘살아있는 의심덩어리’라서 살피려는 순간 벌써 실패하는 것이다.
전광석화가 튀는 화두 참구의 현장은 ‘언어도단 심행처멸’이며, 활구 앞에서는 도저히 ‘살피는 짓’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붉은 화로에 눈송이가 바로 녹는다’고 한다. 동북아의 대천재들이 제자들에게 ‘생사일대사 해결의 실질적인 장치’를 시설해주기 위하여 수대에 걸친 노력 끝에 찾아낸 ‘화두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고함, 몽둥이질 혹은 한 마디 말은 그 자체가 그대로 ‘법’이지, 홍교수가 보듯이 “그 대화를 뛰어넘어 (즉 분별지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아가도록 자극해 주는 최선의 방법” 운운하는 그런 느리고 둔해빠진 방편이 아니다.
제자가 진리에 대해 물었을 때, 조사들이 하신 대답은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진 최종적인 ‘해답’ 자체였다. 하지만 조사의 뜻과 계합하지 못하면 말귀를 알아먹을 길이 없어서 달리는 말이 채찍을 맞은 것처럼 더 답답해지고, 다행히 기연이 맞아 맷돌 댓돌 맞듯 정확하게 들어맞으면 내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홍 교수는 “보석은 선문에서 강조하는 홀로 체득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깨침)의 비유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말이나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다른 깨달은(깨친) 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고 보았다.
필자도 이것 역시 이전 같으면 홍교수의 말이 맞다고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현장에서 정진하고 있는 입장에서 겨우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 것은, 깨달음이란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어서 새삼 새로 얻을 것이 없다는 ―예를 들면 〈반야심경〉의 ‘무소득(無所得)’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지당하며, 《전등록》에 기록된 역대 조사들의 말씀 그 어디에도 ‘홀로 체득하여 이루는 귀하고 오묘한 깨달음’ 같은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짜 깨달은 사람이라면 임제스님처럼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없구나!” 해야 맞는 것이다.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의 스승이다. 조사스님들은 이 세상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했다. 만물 중에는 불법 아닌 것이 없으므로, 불법은 보편적인 것이고 흔해빠진 것이다. 다만 스스로 이분법적 분별에 빠져서 평등한 눈앞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눈 밝은 분들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불법 속에서 이미 처음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같은 사람이 착각하면 중생이고, 깨면 부처라고 하였다. 그래서 불조께서는 이 일을 비유하여,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을 찾고 있다’거나 ‘머리가 머리를 찾는다’고 일러주신 것이다. 돌아보니 나도 이전에는 괜히 혼자 들떠서 지레짐작으로 깨달음이 무슨 복권당첨이나 되는 것 마냥 망상을 부리고 있었다. 아무도 착각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식심(識心)에 휘둘려 춤추고 장구치고 있었다. 미친놈마다 제 주제가 있다더니, 정말 참회할 일이며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서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부처님께서 법은 평등하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런 희한한 깨달음이 있다면 ‘각자(覺者)’인 부처님 말씀과 배치된다. 다만, 부처님께서 일러주셨듯이 중생 스스로가 미혹에 빠져 눈앞에 환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등지고 있다면, 발심하여 스스로 빠져있는 전도몽상에서 깨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비하신 조사들께서 꿈 깰 수 있는 지름길 수행법을 개발하셔서 대대로 전해주신 전통이 다행히 한국불교 조계종단을 통하여 이렇게 이어와서 필자도 말석에서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만일 깨달음을 쫓는다면, 설사 뭔가 반짝하는 식광(識光)을 얻었더라도 끝내 안심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공부의 목표를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데 두는 한, 그 마음은 쉬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고통에 정직하여 그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번뇌로부터의 자유’로 이끄는 감화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도 못하고 있는 것을 양심상 어찌 남에게 하라고 하겠으며, 또 그 말에 어떻게 인격의 힘이 실리겠는가. 필자는 실참을 하게 된 인연에 대해 진심으로 불보살님들께 감사드리며, 한국의 조계종단과 삼보에 귀의하고 있다.
홍 교수의 글을 보니 곳곳에서 한국의 ‘선문’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도 필자는 충분히 이해된다. 나도 한동안 그랬었고,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간화선 수행법에 실망하여 위빠사나나 티베트불교 혹은 서구식 명상이나 마음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심적 갈증을 해소하고 계시는 것이 현실이다. 각자 인연 따라 다양한 수행을 하고 계시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의 수행 열기는 정말 뜨거운 것 같다.
그런데 수행의 장에 깊숙이 들어와 보니, 원래 ‘도(道)판’이 또 그런 것이 이해가 된다. 옛 어른들도 아무리 수행처라도 사바세계인 이상에는 ‘용과 뱀이 뒤섞여 있다[龍蛇混雜]’거나 ‘닭이 천 마리에 봉황 한 마리다.’라고 하신 것처럼, 진짜 주위에는 언제나 가짜들도 뒤엉켜 서식하고 있는 법이다.
그런데 스스로 돌이켜보니까, 과거에는 안목이 모자라서 그런지 필자의 눈에도 가짜만 더 도드라져 보였던 것 같다. 가짜는 언제나 휘황찬란하게 보여서 그런가? 그래서 ‘비슷하지만 아니다[似而非]’고 하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는데….
지금은 많이 반성하고, 삼가며 조심하고 산다. 수행자에게는 당장 내 마음의 부침(浮沈)이 문제다. 눈이 ‘밖’이 아니라 ‘안’으로 가있는 것이다. 조사스님들이 강조한 말씀이지만, 언제나 법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단지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여 망상을 지어낼 뿐이다.
이런 오해는 선지식의 지도하에 단련을 받으며 수행해보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정법을 만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지식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했다.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이제 ‘호선(護禪)’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목을 말해야 할 때가 왔다. 홍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불이법 차원이란 어떤 개념이나 범주가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연기에 의해서 생멸하며 아무 것도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도 또 자성을 가질 수도 없는 불이법 차원에 어떻게 아무런 대상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이법의 차원일 수가 없다.”
홍 교수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다. 책을 통해 공부하게 되면, 거의 마지막에 이런 결론에 다다르는 것은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만세에 적용될 불교의 표준은 ‘연기중도의 불이법’이며, 필자의 경우 불이법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안목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필자도 오랫동안 홍 교수처럼 불이법을 해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역시나 불교공부를 좀 하신 분들은 홍교수의 의견에 많이 동의하실 것 같다. 그러나 해석을 넘어 실참에 공을 들이다보니 이제는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우선 홍 교수의 말대로 ‘모든 사물이 연기에 의해서 생멸하며 아무 것도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도 또 자성을 가질 수도 없’어서 부처님께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셨다.그런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무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데에는 안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홍 교수처럼 연기에 의해서 성립된 만법은 자성이 없어서 ‘있다[有]’고 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동시에 만법은 우리 눈앞에 이처럼 버젓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없다(無)’고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이것을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非有非無] 유무중도(有無中道)’라고 한다.
이 유무중도가 곧 불이법이다. 여기에 유무중도를 ‘일법(一法)’이라 하지 않고 굳이 ‘불이(不二)법’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불이법은 양변을 여의지만 동시에 포괄하기도 하는 것이다.[雙遮雙照] 따라서 부처님께서 연기를 통해 말씀하신 ‘무아’는 ‘유아’를 부정하는 ‘무아’가 아니라 ‘유무중도의 무아’ 즉 불이법이다.
만일 안목이 없으면 십중팔구 ‘유아의 상대로서의 무아’와 ‘유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닌 유무중도의 무아’를 혼동할 것이다. 이 둘은 겉 이름은 같지만 내용은 사실상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다. 전자의 무아는 이법(二法) 차원의 무아이고, 후자의 무아는 불이법 차원의 무아이다. 이것은 예리한 안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자칫 무아라는 말에 떨어지면 무아를 부처님께서 외도(外道)라고 부르신 ‘단멸론(斷滅論)’으로 착각하게 된다. 또한 대승불교에서 중시하는 ‘공’도 이것을 ‘색’의 상대되는 것으로 보면, 그것은 외도의 단멸론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이란 ‘색과 공’의 ‘이법’을 넘어서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중도의 불이법’을 말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이 ‘공도리’를 설한 것이고, 이 공도리를 소화하면 ‘법을 보는 안목[法眼]’이 열린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아함경》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불이법에 의하면 외도의 단멸론도 틀렸고 상주론(常住論)도 틀렸다. 없다 해도 틀리고 있다 해도 틀린다. 이렇게 불이법은 이성적 이해로는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실참해서 실증(實證)해보아야 한다.
‘무아’를 이법의 무아로 보느냐 불이법의 무아로 보느냐, 혹은 ‘공’을 이법의 공으로 보느냐 불이법의 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안목을 검증할 수 있다. 이런 기준으로 위에서 인용한 홍 교수의 글을 보자. 홍 교수는 “불이법 차원에 어떻게 아무런 대상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홍 교수는 불이법 차원을 ‘아무런 대상이 존재할 수 없는’ 단멸론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만법이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셨지, 만법(대상) 자체가 없다고 하시지는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간단하게 증명된다. 연기에 의해 무 없는 유는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유 없는 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홍 교수가 주장하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는 불이법’은 바로 연기에 어긋나서 모순이다. ‘홍 교수가 말하는 불이법’은 ‘변견(邊見) 단멸론’을 ‘중도 불이법’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지어낸 ‘환(幻)’이다. 불이법은 치우치지 않는 중도다. 진짜 불이법 차원은 ‘대상이 존재할 수도 없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으며’ 또한 ‘대상이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중도다.
홍 교수는 이어서 “만약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이법의 차원일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런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면 이것들을 포괄하는 그룹으로서의 범주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의 뜻에는 의식의 대상까지 포함된다.(《불교사전》, 민족사)”는 불교상식을 홍 교수도 잘 알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나 범주도 ‘의식의 대상’이므로 법에 속하며, 따라서 개념이나 범주도 인연 따라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는 유무중도이지 아예 세울 수 없는 단멸공이 아니다. 그래서 같은 물(‘불이법’의 용어)을 소가 마시면 우유(중도)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단멸론의 변견)이 된다는 것이다.
홍 교수의 이런 착각이 일회성의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오류라는 사실은 뒤에 나오는 여러 예문에서 발견된다. 가령 홍 교수는 ‘공’을 “모든 사물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無自性, empty of self-nature)는 사물의 존재 양상(mode)을 표현하는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공(空 emptiness)’”이라면서 단지 하나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또 “‘비어있음’이라는 뜻의 ‘공(空 emptiness)’이라는 말이 ‘공’이라는 실재하는 대상을 창조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곧 ‘색(色)의 상대로서의 단멸공’에 떨어진 말로서, 대승보살이 말하는 불이법의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공’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이 단순히 허무의 공이라면, 공을 두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불이법이라는 동전의 양면은 ‘색’과 ‘공’으로 되어있어서, 공이면서도 무한한 색이 그 속에서 나오고, 동시에 아무리 많은 색이 나오더라도 하나도 나온 적이 없는 공인 것이다. 이런 말을 학자들은 헷갈려 할 것이다. 그래서 불이법은 실질적인 안목이 열려야 소화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알음알이로 공을 해석하여 언어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경책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팔만장교의 방편을 설하셨지만, 동시에 한 말씀도 설한 바가 없다’고 친절하게 방편언어를 지워주는 것이다. 조사스님들도 새가 하늘을 날아도 흔적이 없다고 하셨다. 진짜 불이법을 통달한 사람은 범주나 개념 등의 온갖 방편을 인연 따라 자유자재로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 그러고도 그것에 걸리지 않아서 흔적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교화를 위하여 아무리 ‘세간/출세간’ ‘이법/불이법’ 등 온갖 범주를 세워도 실은 한 범주도 세운 바가 없고, 한 범주도 세우신 바가 없지만 동시에 자유롭게 온갖 범주를 세우시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인 불이법에 통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묘용이다. 따라서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부처님의 방편을 따라잡기 버거울 것이고,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이 꼭 자기 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같은 맥락에서 이법이 불이법이요 불이법이 이법이다. 이런 말들이 마음대로 소화되어 하나도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이법에는 범주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눈 먼 외도나 할 이야기지 눈 밝은 불교집안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부처님께서 이렇게 세웠다 부쉈다 맘대로 하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눈앞에 활짝 펼쳐진 역력한 현실이 바로 한 점 모자람이 없는 불이법계의 실상(實相)임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이다.그래서 역대의 눈 밝은 대승보살들도 불이법의 교설을 아무리 세워도 범주오류를 범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천태지의 대사는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을 세우셨고, 선에서는 ‘닦되, 닦는 바가 없이 닦는다’는 수행방편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불교 방편설은 ‘중도 불이법의 구조’를 띠고 있다. 부처님의 일대장교가 모두 ‘유/무의 이법’과 ‘유무중도의 불이법’의 범주들로 짜인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천태 대사는 ‘공(空)-가(假)-중(中)’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원리로 불이법을 설명했다. 천태의 일심삼관은 하나의 마음을 세 개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공과 가’가 함께 이법의 범주를 만들고, ‘중’은 불이법의 범주를 만든다. 이 천태 삼제(三諦)는 불교에서는 설법할 때, 방편으로 먼저 이법으로 나누어 설명한 뒤에 최종적으로 불이법으로 통합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중생은 색에 집착하고 있기에 먼저 공으로 선입견을 깨어주고, 최종적으로 색과 공을 중도로 통합하는 것이다.
모든 불교교설은 이런 체제로 되어 있다. 세 가지 범주의 첫 번째가 ‘범주’라면, 두 번째는 ‘무범주’라고 할 수 있고, 세 번째는 ‘무범주의 범주’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가/공/중’이 여기에 해당하고, ‘산은 산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역시 산은 산이다’도 여기에 해당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불이법은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고, 아무리 세웠다 부수었다 해도 세우고 부순 바가 없는 것이다. 불이법은 아예 분별하지 말라가 아니라, 분별과 무분별의 대립을 넘어서 ‘지혜로운 분별’을 하라는 중도다.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중도적 방편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사나운 군견(軍犬)에게 ‘짖지 마!’를 훈련시킬 때, 먼저 ‘짖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짖어야 할 때 짖을 줄 알게 되면, 다음에는 ‘짖지 마!’를 훈련시킨다. 그리하여 개가 짖어야 할 때와 짖지 말아야 할 때를 알게 되면, 저절로 짖을 때 짖고 짖지 말아야 할 때는 짖지 않는 중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이법은 무조건 짖지(분별) 않는 공견(空見)이 아니라, ‘지혜로운 짖음(분별)’을 말한다.
그러므로 안목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분별’을 위하여 인연 따라 범주를 세우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는 방편을 펼치지만, 그것은 전혀 오류가 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 눈앞의 이 세계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불이법계가 만법을 생기(生起)시키지만 그것이 오류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 적절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중도 불이법적인 입장의 사사무애(事事無碍)다. 그래서 선사들은 ‘하루 종일 말을 해도 한 마디도 한 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승보살들이 본래 아무 일이 없다고 팔짱 끼고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정녕하게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실천적인 길로 나서신 것이 바로 불이법의 진정한 뜻이다.
‘불이법의 안목’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자. 홍 교수는 “나는 깨달음이란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는 현응스님의 견해를 두둔하기 위해, “현응스님이 그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논리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들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변증법이란 아마도 헤겔의 ‘정-반-합’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도 변증법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이분법(양변)에 의해 인식되는 세간의 변화를 설명하는 일리 있는 해석이다. 그리고 현응스님이 말씀하는 ‘깨달음’이란 ‘연기중도의 불이법’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러므로 홍 교수의 ‘역사와 깨달음을 변증법적으로 잘 통합하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변증법과 불이법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다.
필자도 옛날에 불이법을 책으로만 배워 학생들에게 강의하다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같은 용어가 앞에서는 ‘이런 뜻’ 같은데, 뒤에 가면 그만 ‘저런 뜻’이어서, 설명하다 보면 모순에 빠져 당황했던 적이 많았다. 방편설의 언어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불교를 머리로만 푸는 서양학자들은 십중팔구 이런 혼란 속에 빠져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홍 교수의 뒤죽박죽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홍 교수도 이 글을 읽고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홍 교수는 ‘무아론’을 가지고 선문에서 말하는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데, 그 오류를 바로 잡아드리고 싶다. 홍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현응스님도 비판했지만, 이 ‘마음(心, mind)’이라는 말이 맥락에 따라 너무나도 많이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에 대해 서양학자들이 좌절감을 토로하는 글을 읽은 기억도 있다.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푸념이다.”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좌절감을 토로하고 종잡을 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서양학자’에게 분명히 일러주고 싶다. 실제 수행을 하여 스스로 돈오(頓悟)하기 전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는 사실을. 지난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일생을 걸고 도전한 것이 ‘마음’인데, 그것을 책 몇 권을 읽고 날로 먹으려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어리광이 통할 데가 있고 통하지 않는 데가 있다.
그런 서양학자에게 진심을 다해 정중하게 말씀드린다. “마음이란 곧 ‘삼 서 근’이다.” 못 알아들으신다면, 다시 말씀 드리겠다. “뜰 앞의 잣나무다.” 만약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진심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을 믿어주신다면, 여기서 의심이 일어나고 실참이 시작된다. 그런데 아마도 홍 교수는 필자의 이 말에 대해서 반론문에서 쓴 대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문답에서 흔한 ‘물에 비친 달이 물이냐 달이냐?’와 같은 선사의 넌센스(nonsense) 질문에는 ‘어젯밤 남녘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았습니다’와 같은 넌센스 답변이 적절한데, 그 이유는 넌센스 질문으로 대변되는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정확히 보고서 그것이 넌센스임을 넌센스 답변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이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대화를 잘 살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렇게 말이 가진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홍 교수는 화두를 넌센스라고 보고 있다. 넌센스를 통해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묻고 싶다.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넌센스를 통해 ‘깨달으려면’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TV의 개그콘서트나 보지, 그 많은 출재가 수행자들은 뭐 하러 안거에 들어가 피눈물 나게 정진하고 있는가? 나아가 넌센스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면 생사문제의 해결이 목적인 스님들이 꼭 출가까지 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수행자들더러 홍 교수처럼 학자가 되라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개그맨이 되라는 말인가?
또한 홍 교수는 “나는 최소한 선문에서 이 ‘마음’이라는 말을 참된 자아(참나)로 해석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된 자아라는 것은 석가세존께서 그 존재를 분명히 부정하신 바라문교의 아뜨만(我, Atman)인데, 세존의 무아(無我, Anatman, Non-Self)론을 부정하는 가르침을 불교 안에서 어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선문에서 말하는 참나 또는 청정한 마음에 대한 기술은 실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에 대한 기술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지금 홍 교수는 세존의 이름을 들먹임으로써, 세존의 깊은 뜻은 모르고 오히려 욕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연기중도의 불이법’을 설명한 같은 맥락에서, 홍 교수가 선문을 비판하기 위해 가져온 ‘세존의 무아론’은 진짜 부처님의 무아론이 아니라 홍 교수의 머리에서 나온 ‘단멸무아론’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홍 교수는 외도의 단멸론으로 세존의 중도불이법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연기중도의 불이법은 방편을 세우고 부수는데 걸리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했다. 따라서 중도에 입각하여 부처님께서는 자아에 집착하는 당시 대부분 중생들의 변견을 깨기 위하여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다. 대승에서는 또한 ‘무아’에 집착하는 당시 많은 중생들의 변견을 깨기 위하여 방편으로 ‘불성’이나 ‘진여’를 세웠다. 시절인연이 그랬던 것이다.
즉 ‘유’에 국집한 사람에게는 ‘무’로 치고, ‘무’에 떨어진 사람에게는 ‘유’로 치되, 그런 말들에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불이법의 진정한 안목이다. 선문에는 “흙덩이를 던지면 강아지는 흙덩이를 쫓아가고, 사자는 던진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다. 홍 교수는 지금 부처님이 던진 ‘무아’라는 흙덩이를 쫓아가서 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멸무아’로 착각하고, 그 ‘허무의 논리’로 멀쩡한 선문을 걱정해주고 있다. 홍 교수는 지금 대승보살들이 방편으로 자유롭게 세웠다가 부수곤 하는 ‘참나’ 또는 ‘청정한 마음’이라는 말에 속아서 그 말이 ‘유’이기 때문에 단멸무아의 ‘무’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무는 사자라면, ‘흙덩이’는 바로 온갖 언어로 시설된 방편개념들이고, ‘사람’이란 바로 ‘연기중도의 불이법’인 것을 안다. 무명칠통을 부수고 전도몽상에서 깨어난 선사들은 ‘불이법’을 곧 ‘마음’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선종을 창시한 달마대사께서 《능가경》에서 설하고 있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으로 종을 삼는다.[佛語心爲宗]’와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제일이다[諸佛心第一]’를 종지로 세우신 뜻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불조께서 연기중도의 불이법을 깨달으시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사용하신 ‘불이법의 다양한 방편이름들’ 중의 하나가 곧 ‘무아’요, ‘마음’이요, ‘공’이요, ‘진여’요, ‘불성’이요, ‘원각’이요, ‘해탈’이요, ‘반야’요, ‘삼 서 근’이요, ‘뜰 앞의 잣나무’요, ‘똥막대기’다. 그 수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강아지는 이런 방편이름을 쫓아가서 물고 시비(是非)하며, 사자는 방편이름에 구애받지 않고 그 낙처인 불이법에 계합한다.
불이법과 통하면 이것을 이름 하여 뭐라고 불러도 고개를 끄덕이고 시비분별하지 않을 것이고, 말에 떨어지면 머릿속이 온갖 시비분별의 망상으로 죽 끓듯 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냐 ‘무’냐를 가지고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는데, 원래 강아지가 들끓는 곳은 시끄럽기 마련이다. 그만큼 눈 밝은 사자가 귀한 법이다.
불이법에 통하면 마음이 고요해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날까지 시비분별에 시달리다가 죽는 날 크게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러므로 홍 교수에게 분명히 말씀드리면, 무아가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무아이기 때문에 그만 시비분별을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불이법(무아)으로 불이법(마음)을 부정하는 모순을 더 이상 범하지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선문에 대한 노여움도 그만 푸시기 바란다. 본인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선’도 불이법의 여러 이름들 중의 하나다. 불이법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법계실상이며 우리가 현명하게 살아가는 반야지혜이다. ‘공’도 그 낙처는 ‘지혜로운 공’에 있고, ‘무아’도 그 낙처는 ‘지혜로운 무아’에 있으며, ‘마음’도 그 낙처는 ‘지혜로운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불이법은 결국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가르침인 것이다.
간디는 자신의 인생이 ‘진리 실험’이었다고 했다. 필자도 인생을 돌아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 한 몸을 가지고 ‘간화선 실험’을 해온 것 같다. 그 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으며, 양심을 걸고 말씀드린다. “간화선, 된다!”
*필자 김홍근 박사는?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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