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응-수불스님 논쟁
현응스님의 ‘깨달음’이 건축가의 ‘각(覺)’이라면,수불스님의 ‘깨달음’은 ‘대목장(大木匠)’의 ‘오(悟)’이다.
페이스북이나 불자대중이 서로 소통하는 SNS에 가보라. 지금 동안거(冬安居) 기간인 선원(禪院)에서는 그토록 찾아보기 힘들다는 ‘깨달은 분’들이 저자거리에는 넘치고 흐를 정도로 많다. 다들 법거량의 요체를 줄줄 꿰고 있으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심오한 깨달음을 일상의 언어처럼 말씀하신다. ‘말법의 시대에는 도인이 저자거리에 숨어있다’더니 딱 그 모양새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가 제 각각의 중구난방이고 백가쟁명이다. 뿐만 아니라, 솔직히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말들이 다수이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극도의 신비주의와 환상에 똘똘 말려 있다. 깨달음은 고사하고, 불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논리적 이론이라는 세속적 분별지로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논리와 사유를 넘어선 곳에 깨달음이 있다”
부처님이 설(說)하신 깨달음의 내용을 조리 있게 말하였다가 선사의 방망이로 흠씬 두드려 맞는 일들이 저자거리에서는 비일비재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몰이해’가 부처님의 가르침인양 되는 작금의 상황은 무엇이 원인이고, 누구의 책임인가? 돈오(頓悟)적 ‘이루는 깨달음’에서 ‘이해하는 깨달음’으로의 전환을 제기한 현응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수불스님과 많은 불교 연구자 및 수행자들의 비판이 있다. 일각에서는 현응스님의 주장이 ‘1등을 하지 못하니 공부를 않겠다’는 식의 논리라는 비난 섞인 비판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나 왜곡이 아닌가 싶다. 현응스님의 시각은 이것이 아니라, 1등을 하지 못한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살피고 이에 따라 공부 방법을 바꾸어 보자는 취지의 의미가 더 강하다.
1. 현응스님이 ‘바담풍’ 했어도 수불스님은 ‘바람풍’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았나?
현응 스님의 주장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깨달음’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실제 현응스님은 “깨달음이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에 대한 정의는 마치 공대생이 자동차의 원리를 ‘잘 이해했다’거나 고등학생이 영어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도의, 매우 세속적인 분별지(分別智)의 인식작용이나 깨우침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오해 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불광연구원 서재영 박사는 현응스님의 이와 같은 ‘깨달음’에 대한 정의에 대하여 “심의식(心意識)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작용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반박한다. 따라서 설법을 열심히 듣고 ‘잘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인식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마음의 작용을 물리치는 것(却心)’이 선문(禪門)의 요체라고 말한다. 수불스님 또한 서재영 박사의 반론과 유사하게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라는 현응스님의 주장이 ‘책상물림의 말일 뿐’이고, 정작 진실된 수행자라면 ‘깨달음이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라고 일갈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서재영 박사와 수불스님의 반박은 현응스님의 글에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상당부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부처님은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충분히 깨달음이 가능하다.”
확실히 이 구절에 나타난 현응스님의 시각은 세속적인 분별지(分別智)의 인식작용과 ‘깨달음’을 같은 심급의 레벨로 등치시키고 있다는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와 같은 비판은 현응스님 본래의 의도와 상당히 벗어난,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논리’와 사유적 ‘이해’가 세속적인 범부의 인식작용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용수존자의 <중론>을 보라. 얼마나 치밀하게 일체존재의 무아(無我)를 논증하고 있는가? 얼마나 진지한 사유와 의식작용를 통하여 세계의 공성(空性)을 참구하는가? 그렇다면 수불스님은 용수존자의 깨달음까지도 “사유의 영역에 갇혀있다”고 비판하실 수 있는가? 서재영 박사는 이것까지도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선(禪)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돈오(頓悟)의 깨달음만 깨달음이고 용수존자와 같이 세계와 나에 대한 확철(廓撤)의 이해와 알아차림의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용수존자의 깨달음을 평가할 만큼의 또 다른 깨달음과 논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현응스님의 주장을 살펴보자. 스님은 ‘연기의 관점, 즉 원인, 조건, 생성, 소멸의 관점으로 공(空)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교의 요체는 ‘이루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깨달음’을 “잘 이해한다”로 해석한 현응스님의 주장이 용수존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잘 이해한다”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로서의 범부의 심의식(心意識)작용이 아니다. 확철의 인식과 이해를 통하여 범부적인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불스님의 주장처럼 선 수행의 경험이 부족한(?) 현응스님이라 할지라도, 깨달음에 대한 초월적 사유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분이실까? 아무렴 조계종 교육원장이자 실상사 화엄학림 교수를 역임한 현응스님이 분별지와 무분별지를 구분하는 개념조차 없었을까? 물론 현응스님은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다는 식으로 사족(蛇足)을 붙여 자신이 말하는 “잘 이해하다”의 의미를 수학공식을 이해하고 영어공부의 원리를 터득했다는 식의 사소한 분별지적 인식과 이해로 혼동시키는 원인을 자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응스님이나 수불스님도, 서재영 박사 모두는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전문가들 아닌가. 그렇다면 현응스님의 잘못된 사족에 대한 지적은 마땅하나, 그 문제를 가지고 현응스님의 본의를 왜곡한다면, 이는 한국불교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비록 현응스님이 ‘바담 풍’했어도, 충분히 ‘바람 풍’이라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의미와 내용이다.
사진=장명확
2. “잘 이해한다”라는 의미는 ‘반야바라밀’이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닌가?
사실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잘 이해한다”는 깨달음의 정의는 초기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핵심요체이다. 먼저 팔정도의 첫 머리는 ‘정견(正見)’이다. 연구자나 수행자 마다 이 팔정도에 대한 해석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 되도록 사전적 기본 개념을 중심으로 중립적으로 살펴보자.
정견(正見)은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귀착된다. 불교는 두 가지 이해를 가르친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데, 축적된 기억이나 주어진 자료를 이용해 어떤 주제를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아는' 분별지(分別智)이다. 이것은 깊지 못하다. 반면, 진실한 깊은 이해는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봄(無分別智)으로써 얻어진다. 곧 정견은 무분별지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자, 무분별지증득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지혜적 소산(所産)이다. 현응스님이 말하는 “잘 이해한다”는 의미는 이 정견을 통해 세계와 나의 ‘공성(空性)’을 잘 이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하는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즉 ‘잘 이해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올바른 이해는 무분별지의 증득으로 이어진다. 매우 교과서적이고 조계종 교육원장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물론 무분별지의 증득과 공(空)의 체득은 이와 같은 이해적 측면이 아니라, 돈오와 같은 체득의 방법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견’ 중심의 이해를 통한 무분별지의 증득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책상물림의 말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뿐만 아니다. ‘깨달음’을 “잘 이해하다”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초기불교의 교설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교설에도 명확하다. 한국의 대중 불자 모두에게 매우 친숙한 <반야바라밀다심경>의 경(經) 이름에 나타나는 ‘반야바라밀’이 무엇인가?육바라밀의 하나인 ‘반야바라밀’은 팔정도의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를 포괄하는 개념이자 수행방법이다.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는 것’은 “잘 이해하는” 방법이자 결과이다. 이것을 깨달음의 방법론이라고 현응스님이 이야기하였음에도 논란이 발생하였다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헤프닝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불스님이 이를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을 부정하는 그 무엇이라고 비판한다면, 도리어 이것은 한국불교 조계종이 참선 만능주의와 참선 유일주의라는 심각한 선병에 빠져있다는 현응스님의 질타가 사실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반증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조사선(祖師禪)이 걸림없이 호방하고 무애(無碍)하다 한들, 어찌 반야바라밀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선의 참구에 있어 지혜 없는 ‘무식(無識)’이 필수조건이란 말인가, 분별지를 넘어서는 방법이 무분별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일으키는 분별의 ‘유식함’을 버리고 무명(無明)상태의 ‘무식함’과 ‘무지함’으로 나아가자는 말인가? 깨달음이 아니라, 무명(無明)이 우리의 최종 도착점이라는 말인가? 혜능조사가 배우지 못하였다고 하나 반야의 지혜가 없었다면, 어찌 법계실상의 공(空)함 ‘잘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홍창성 교수(미네소타주립대 철학과 교수)는 이와 같은 우려에 대하여 선(禪)이 자칫 ‘반 지성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옳은 지적이다. 반야바라밀을 부정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초지성중의적 깨달음을 무명과 혼동하는 ‘대참사’를 유발시킬 우려가 너무 크다.
물론 선가(禪家)의 입장에서 ‘반야’는 ‘이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오를 통한 무분별지의 증득으로 체득되어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반야바라밀’이 무분별지 증득의 소산(所産)이지만, 다시 무분별지를 증득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간과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반야를 단지 ‘깨달음’의 결과로만 본다면, 오로지 반야는 돈오를 통해서 얻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야’는 싼스끄리뜨 쁘라즈냐(prajñā)의 음을 딴 말로서 ‘지혜’라 번역된다.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확실히 아는 최상의 지혜이자 모든 사물이나 도리를 명확하게 뚫어보는 깊은 통찰력이다. 범부의 지혜를 식(識)이라 하고, 부처의 지혜를 반야라 한다. 즉 범부의 식(識)은 분별지로 부처의 지혜를 무분별지로 구분할 수 있으나, 모든 사물이나 도리를 명확하게 뚫어보는 깊은 무분별지의 통찰력 또한 분별지와 상의상대(相依相對)를 이루며, 분명 인식론의 범주에서 ‘잘 이해하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또한 이 ‘잘 이해하는’ 통찰력을 통하여 ‘깨달음’얻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에 있어서 인식(認識)의 ‘확철(廓撤)’로서의 ‘잘 이해한다’는 의미는 ‘반야바라밀’ 이외에도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무상(無上)의 정등각(正等覺)을 의미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보리(菩提)는 산스크리트 보디(Bodhi)를 음역한 말로, 한역(漢譯)하여 각(覺)·지(智)·지(知)·도(道)라 한다. 여기에서 지(智)·지(知)는 분명 ‘이해’의 의미를 가진 인식론적 개념이다.
<대승기신론>은 이 ‘보리’, 각(覺)에 대하여 상세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즉 각을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시각은 ‘무명’상태인 불각에서 그 무명을 잘 관하여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본각은 시각의 목적이자 지향이기 때문에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다고 말한다. 불각에서 시각과 본각까지의 모든 과정은 인식론적 확철이라는 ‘이해’함의 범주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하면, <기신론>에서 ‘시각’이란 심체가 무명의 연(緣)을 따라 움직여 망념(不覺)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구경(究竟)에 이르러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한다. ‘시각’과 ‘본각’은 상의상대(相依相對)하면서 서로를 성립시킨다. 이미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면 둘 다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각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의존해서 성립함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각(覺)이 없는 것은 아니다[(bodhi, enlightenment, 覺.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라고 말한다.현응스님이 말하는 ‘잘 이해한다’의 의미는 생멸과 진여가 둘이 아니듯이, 시각이 곧 본각이듯이 대립적 의미의 통일의 관점에서 보아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만일 ‘잘 이해한다’의 의미에 분별지적 인식작용의 측면이 있다면, 이것은 ‘시각’의 측면이다. ‘무명’상태인 불각을 자각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시작의 단계에서 당연히 분별지적 ‘이해’를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다. 또한 이 단계에서는 ‘사유의 영역’을 완전하게 초월할 수 없다. 하지만 <기신론>은 이 분별지적 이해가 다시 ‘본각’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반야 지혜의 무분별지적 이해와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불각도 각의 일종으로 간주하지 않는가. 이렇게 ‘시각’과 ‘본각’이 상의상대(相依相對)의 관계를 형성한다면, 현응스님이 말하는 ‘이해’에 대해 ‘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사유의 영역’에 갇힌 분별지 정도로 규정한다면 새의 한 쪽 날개만 이야기하는 경우와 같아진다. 결국 현응스님의 잘 이해하는 깨달음은 세속적 분별지에 얽매인 의식작용도 아니며, 범부의 사유영역에 갇혀버린 일상의 자각이 아니다. 이와 같은 시각을 통하여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미도 동시에 담지하고 있는, ‘시각’의 의미이자 ‘본각’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이 하나이다’라는 의미는 선가(禪家)만의 고유한 전매특허가 아니다. 불이(不二)의 불교적 사유는, 현응스님이 말하는 ‘잘 이해하는’ 인식론적 깨달음에도 적용되고 통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3.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과 유교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에서 보는 관점
계율을 지켜 실천하는 계(戒), 마음을 집중·통일시켜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定), 미혹을 끊고 진리를 반조하는 혜(慧)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세 가지 수행방법이다. 부처님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길을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로서 제시한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 팔정도를 요소별로 다시 분류해 보면 계율과 선정 그리고 지혜(戒·定·慧)의 세 가지 배움(三學)이 되는 것이다. 이 팔정도 중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은 계율을 통한 배움 즉 계학(戒學)이며,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은 선정(禪定)을 통한 배움인 정학(定學)이다. 그리고 정견(正見) · 정사(正思)는 지혜를 통한 배움인 혜학(慧學)이 된다. 따라서 삼학은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인 것이다. 계정혜 삼학은 보통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을 추구하는 자가 배우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계정혜(戒定慧) (『밀린다팡하』 (해제),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은 계(戒) 정(定) 혜(慧) 중 ‘혜’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방법론이기도 하다. 정견(正見) · 정사(正思)를 중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추구하는 혜학(慧學)을 수행론의 중심으로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를 율장인 <마하박가>에서 구하려 한다는 측면에서 ‘계’와 ‘혜’의 통합을 추구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이에 비해 수불스님이 말하는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는” 깨달음이란 주로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을 중심으로 선정(禪定)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정학(定學) 중심의 깨달음 방법론이다.
물론 계・정・혜 삼학은 모두 매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상호 통일적인 관계를 설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정(禪定)’ 중심의 정학(定學)적 수행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계’와 ‘혜’의 통합 또는 ‘혜’ 중심의 반야바라밀을 수행의 요체로 삼아야 한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은 다른 한편, ‘혜(慧)’ 중심으로 ‘정(定)’을 배제할 수 있는 또 다른 편향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수불스님의 논지와 같이 선(禪) 수행 만능주의와 제일주의가 과도하게 팽배된 현 조계종의 수행 형태를 감안하여 본다면, ‘혜’ 중심의 새로운 수행방법론 제기는 어떤 형태로든 참선만능주의를 보완하고 보다 일신된 수행 방법론을 궁구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그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렇게 인식론 범주에서 정견(正見) · 정사(正思)에 중점을 둔 ‘이해하는 깨달음’과 정념(正念) · 정정(正定) 중심의 체득적 ‘이루는 깨달음’ 사이에 나타나는 사상적 긴장은 비단 불교만의 것이 아니다. 유교에 있어서도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와 양명학의 개조인 왕양명 사이에 나타나는 격물치지의 논쟁은 이번 ‘현응-수불’스님 간의 논의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유교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를 구명(究明)하여 자기(自己)의 지식(知識)을 확고(確固)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지식이란 단순한 의미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격물치지는 학문과 수양에서의 기초적인 문제로 매우 중요시 되었으며, 유교 인식론을 이루는 기본 체계를 제공하고 도덕적 인식의 근거를 밝혀 주는 것이기도 하다. 유교의 경전인 <대학>의 경전 원문에서는 격물치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나의 지식을 극진하게 이루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는 데 달려 있다(致知在格物) 사물의 이치가 궁극에까지 이른 다음에 내 마음의 지식이 극진한 데 이른다 (物格而後知至) “이것을 일러 나의 지식이 극진한 데 이르렀다고 한다 (此謂知之至也)
곧 ‘격물치지’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유사한 층위를 가지는 본질적 ‘지혜’이다. 주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격(格)은 이르는 것이다(格至也)”라 하여, 인식의 주체가 대상인 사물을 올바로 관찰(正見)함으로써 사물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주자는 깨달은 이치를 기초로 점점 지식을 축적시켜 가고 노력을 오래 계속해 간다면 “하루아침에 활연관통(豁然貫通:환하게 통하여 도를 깨달음)하여 모든 사물의 겉과 속이나 정밀한 세부와 거친 대강이 모두 이르고, 내 마음의 큰 본체와 작용이 모두 밝혀질 것이다”라 하여 격물치지의 방법 내지 과정과 그 궁극의 경지를 말한다. 궁극의 앎에 대한 이와 같은 주희의 인식론적 방법은 ‘연기의 관점, 즉 원인, 조건, 생성, 소멸의 관점으로 공(空)을 통찰하고 이해하는 내용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현응스님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격물치지’를 불교적 관점에서 재구성한다면, 무아와 연기의 세계(物)를 바르게 관찰하여 깨달음(知)에 이른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양명은 주자와 달리 “격을 바로잡다는 의미로 해석한다(格正也, 正其不正, 以歸於正也). 곧 양명은 앎의 주체인 마음의 작용이 바르지 못하므로, 이를 바로잡아 분별지를 넘어서는 앎(知)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본심(本心)에 갖추어진 양지(良知)에서 찾아낸다.
‘양지’는 <맹자>에서 ‘사려하지 않고 아는 것’이라 한다. 이 양지 개념은 깨달음이 사유영역을 초춸한 것이라고 말하는 수불스님의 의견과 상당 일치한다. 왕양명은 “양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성인과 어리석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으며, 천하와 고금에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개체적인 경험적 지각을 넘어선 본심의 보편적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양명은 치양지(致良知)에서는 양지가 환히 트여 지극히 공변된 확연대공(廓然大公)한 본체이므로, 이를 흐리게 하거나 은폐시키는 물욕을 제거하면 그 본체가 드러날 수 있다고 말하여 본체적이고 소거적(消去的)인 성격을 설명한다.이것은 수불스님의 주장과 같이 정념(正念) · 정정(正定)을 중심으로 선정(禪定)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법론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양명의 ‘양지’론은 학자에 따라 곧 돈오라고 규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르는 깨달음’ 사이의 팽팽한 구도적 긴장감은 비단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사상사에 나타나는 접점이다. 따라서 현응스님의 문제제기를 단순한 “책상물림의 말 뿐‘인 희론으로 규정하는 것보다, 다시 한 번 현대 한국불교의 지표와 구도(求道) 방법론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옳다고 제안한다.
4. 중국의 인식론 부재와 종파 불교적 관점
인도불교의 경전에서는 가장 완벽한 ‘깨달음’을 뜻하는 말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ṃbodhi)이다. 이 ‘보리’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覺)’으로 번역된다. 또한 이 ‘각’은 반야바라밀과 연관되어 정견 정사 중심의 ‘이해하는 깨달음’의 성격이 강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선(禪)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전이나 문헌에 나타나는 ‘각’의 출현빈도수는 급격히 낮아지고, 점차 깨달음을 상징하는 용어는 ‘오(悟)’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이것만으로는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중국불교에서 선종이 형성된 이후부터는 깨달음의 성격이 조금씩 인도불교와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일례이다. 인도불교에 대한 중국불교인 선종의 차별성 선언은 ‘교외별전’이라는 말로 경전에 수록된 인도불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에서도 나타나며, 여래선과 조사선을 구분하는 층위에서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차별화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중국과 인도의 사유체계에 나타나는 성격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중국철학 전공자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철학의 장점은 존재론이 극도로 발달했다는 것이고, 중국철학의 치명적 맹점은 인식론이 거의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유교 철학의 경우에도 위에서 언급한 격물치지 이외에 인식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또한 이 격물치지 또한 11세기 주자에 와서 인식론적 의미가 재 발굴되다 시피 한 것이니 만큼 7~8세기를 전후한 선종의 시대에서 중국 고유의 인식론 체계는 매우 빈약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또한 이것은 불교의 전래 당시 인도경전의 한역(漢譯)과정에서 비량 (比量, anumāna 추론), 현량(現量, pratyakṣa, 지각·직접적 인식), 성언량(聖言量, śabda, 권위 있는 증언) 등 불교 인식론의 용어들에 상응하는 한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구마라집이나 현장법사 같은 번역자들이 이에 상응하는 인식론 한자(漢字) 개념어를 아예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고역(苦役)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로 인하여 불교 전래 이전 중국에서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론으로 ‘지적(知的)작용’을 통한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덕과 인격, 마음의 수양과 도야를 통한 ‘체득’의 완성 방법을 추구하였다. 인식론의 부재로 인하여 중국인에게 ‘잘 이해하는 깨달음’은 그 자체가 매우 낯선 것이자, 어찌 보면 매우 곤혹스럽기조차 했던 방법론이었을 것이다. 인도의 인명학이나 용수존자의 팔부중도 및 파사현정의 논증과 설명은 당시 중국인으로 하여금 무명의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명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식론의 부재로 인하여 중국인은, 인도인처럼 세계의 진리 인식 방법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고 지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중국인은 인식론적 깨달음의 방법을 존재론적 ‘수도(修道)방법’으로 전환하여 깨달음에 접근하여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현응스님이 ‘이해하는 깨달음’과 대비되는 ‘이루는 깨달음’이다.
‘이루는 깨달음’은 인식론적 이해를 통한 ‘깨달음’이기보다, 존재자의 경지(境地)에서 나오는 성찰의 결과이다. 가령 자녀가 무던히도 부모의 속을 썩일 때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도 애 낳고 부모가 되 봐라. 그러면 부모 마음을 알 수 있다”
즉 부모라는 존재적 경지에 오르면, 어린 자녀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그 무엇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존재의 지위(경지)를 통한 ‘확철’이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존재론적 깨달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건축가의 깨달음과 대목장(大木匠)의 깨달음의 차이이다. 건축가는 학교에서 건축설계와 건축공학 등을 배우고 역사적인 아름다운 여러 건축물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며 끊임없이 깨달음의 길을 간다. 그리고 결국 자기만의 아름다운 최상의 건축물을 설계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건축물을 설계와 도면으로 표현해 내지만, 실제 벽돌을 쌓아본 적도 기둥을 세워 본적도 없다. 하지만 그 건축물은 분명 그 건축가의 이해와 그것의 구현으로 만들어 진다. 이에 비해 건축현장의 대목장(大木匠)은 학교에서 건축에 대해 배운 적도 없다. 견습 목수 시절부터 오로지 현장에서 끊임없는 작업과 시행을 통하여 몸으로 건축을 익혀 간다. 하지만 오랜 경험과 시간이 흐른 후 ‘몰록’ 건축이 무엇인지 활연관통하게 된다면 이제 도면과 무관하게, 도면보다도 더 정밀하고 엄밀하게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설계 당시 놓친 수많은 문제점들을 작업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설계도면이 경전이라면, 대목장의 깨달음은 경전 밖의 교외별전이다. 건축가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문자의 지식이라면, 대목장의 깨달음은 문자가 아닌 체험을 통한 것이기 때문에 불립문자이다.
결국 중국적 사유의 인식론 부재와 결핍이 중국특유의 존재론적 수행과 체득의 깨달음을 창조해낸 것이다. 인도불교의 ‘이해하는 깨달음’을 존재론적 경지(境地)의 체득을 통한 ‘이루는 깨달음’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종파불교에 기반한 선종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만 존재하는 매우 독특한 불교 종파라는 사실에서도 나타나며, 다시 전혀 인식론과 상관없는 언어도단의 공안과 선문답 참구를 통하여 체득의 깨달음을 얻어낸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존재론적 경지인 ‘체득’의 깨달음은 이런 의미에서 수불스님의 주장처럼 ‘사유영역을 초월’한다. 하지만 다시 수불스님의 글에서 나타나는 ‘사교입선’의 근원적 이유는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선종은 중국 고유의 종교인 도교의 수행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현재 스님들이 입는 가사는 인도 수행자의 복식이지만, 장삼은 당시 도교 도사의 복식에서 유래되었다. ‘조실(祖室)’이라는 용어 또한 도관의 수련 책임자를 이르는 말에서 온 것이다. 도시를 떠나 산 속에 수행의 거처를 마련하여 총림이라 부르는 것 또한 도교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종의 참선수행법은 당시 도교의 ‘심재좌망’의 수련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심재좌망(心齋坐忘)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수양법으로 심재는 마음의 모든 추악한 면을 버리고 허(虛)의 상태에서 도(道)와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좌망은 마음이 육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세속적인 지(知)에서 벗어나 대도(大道)와 합일하는 것을 말한다. 사려(思慮)를 떠나 무(無)의 세계로 들어가는 수양법이다. 이죽내교수는 정신분석학적 범주에서 “노자와 장자가 밝힌 수도법을 통해 인식 주체도 없고 인식 객체도 없는, 오직 ‘앎 그 자체’나 ‘함(爲) 그 자체’만이 존재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주관이 객관의 대상에 갖는 주객이분 분별이 없어진 ‘무분별지’상태다. 이와 같은 심재좌망의 수련법은 계·정·혜 삼학(三學)의 유기적 통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도불교의 선정(禪定)개념과 차이가 있는 중국 고유의 좌선법이다. 이 좌선법은 불교의 ‘삼학’과 달리 내면으로의 침잠이 독보적으로 강조되는 이를테면, 참선 만능주의의 원조격이다. 이 또한 인식론적 ‘이해하는 깨달음’이 아닌 존재론적 경지(境地)의 체득을 통한 ‘이루는 깨달음’의 방법론인 것이다. 이렇게 선(禪)은 당시 중국의 인도불교에 대한 종합적 이해이자 수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대가 변한 한국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중국적 이해와 수용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구축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의무가 발생한다.
5. 나오며: ‘사교입선’이 아닌 여경입선(與經入禪) 이어야 하지 않는가?
결국 선(禪)에 나타나는 ‘사유 영역의 초월’이란 이와 같이 중국 수당시대의 시대적 상황과 여건에서 발생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불교가 가지는 생명력이며, 다시 사상적 유연함이자, 종교적 도그마를 스스로 극복하는 매우 긍정적인 요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대는 당시로부터 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며, 이제 이곳은 중국이 아닌, 한국이다. 수불스님은 사교입선의 당시 간화선의 전통과 종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무엇이 전통과 종지의 계승인가? 박물관적 유물의 재현과 복제가 계승인가? 아니면 법고창신과 온고지신의 새로운 해석과 지평의 확대가 계승인가? 중국의 선사들이 외래로부터 유입된 불교를 스스로 자신들에게 맞게 고치고 보완하여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면, 현대 한국의 우리 또한 그래야 하지 않는가. 인식론적 ‘이해하는 깨달음’이 당시 중국인에게 어려웠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반대로 우리에게는 ‘이르는 깨달음’이 더 어렵지 않은가? 다시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르는 깨달음’을 상호 통일 시킬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불교 수행자에게 부여된 의무가 아닐까? ‘사교입선’으로 인도불교의 경전을 버리는 것은 인식론이 부재한 수당시대의 중국인에게는 유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전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선(禪) 속에 아우르고 참구의 성과를 점검하는 검증서로, 그리고 두 가지의 깨달음이 상의상대(相依相對)하는 여경입선(與經入禪)이 더 옳지 않을까? 이것이 선의 낡은 반복과 보존이 아닌, 계승과 현대적 재해석이 아닐까? 물론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의 글에 대한 반박 글에서 “한국불교가 선불교를 중심으로 회통불교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여 조계종도라면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과 ‘사교입선’은 명백한 모순이다. 교종은 불교가 아니며, 경전은 외도(外道)의 문헌이란 말인가? 반야바리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覺)’을 마치 수학공식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정도의 분별지로 폄하하면서 회통불교를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모순은 우리 조계종의 선종 중심적 한계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수불스님은 ‘종파불교에서 벗어나 현대불교적 회통불교로 정립해야 한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작금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되고 있는 ‘간화선 무용론’과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및 서구에서 유입된 다양한 명상의 유행’을 염두에 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수불스님은 다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끌어가는 종지는 조계선풍이 가장 적합하다는 게 나의 개인적 소신과 판단이라는 점을 밝힌다. 왜냐하면 선(禪)이야말로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면서 모든 불교를 통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천명한다. 수불스님이 말하는 선이 정말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라면, 먼저 사교입선을 조계종의 선풍에서 털어내야 한다. 사교가 아니라 방하(放下)임을 강조해야 한다. 인도불교의 반야와 보리의 인식론적 ‘이해’ 자체를 분별망상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 회통불교란 그저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의 깨달음조차도 회통하지 못하는 선풍으로 어떤 통불교를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종파성의 극단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임제 선사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말하셨다. 운문선사는 자신보다 천오백 년 전 인도에서 법을 펴신 “부처를 다시 만나면 한 방에 쳐 죽여 개밥을 만들어 천하태평을 도모하겠다”고 호언을 하셨다. 다시 천 년이 더 지난 현재, 이제 누가 있어 임제와 운문의 목을 쳐 개밥으로 던져 줄 것인가.
*필자 박용태 박사는?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성리학을 전공했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청운대학교 교양학부 외래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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