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간화선) 집중수행

초(超)지성주의와 반(反)지성주의: ;;;홍창성교수

통융 2017. 1. 27. 11:47

초(超)지성주의와 반(反)지성주의:
현응스님의 발제문에 대한 수불스님의 반론문을 읽고
 
 
새해벽두 반가운 논의 새해 첫날 새벽 수불스님께서 발표하신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 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읽고>를 『미디어붓다』에서 반갑게 접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서울에서 현응스님의 저술 『깨달음과 역사』 25주년을 기념하는 연찬회에서 현응스님의 발제문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함께 토론할 수 있어서 뜻 깊었는데, 그 뒤에도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스님들과 학자들이 활발히 논쟁을 이어 와 주셔서 감사하다.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한 수불스님의 몇 가지 오해들 그런데 현응스님의 논지들에 대한 수불스님의 반론문이 현응스님의 최근 짧은 몇 편의 글들만 논의하고 있지 그보다 더 중요한 저술인 『깨달음과 역사』에서 개진하고 해명한 것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아서 다소 의아하다. 예를 들어 현응스님은 『깨달음과 역사』의 여러 곳에서 모든 사물을 변화와 관계의 양상으로 즉 연기(緣起)의 관점에서 파악해서 아무 것도 실체와 본질(또는 自性)이 없이 공(空)함을 이해함이 깨달음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인식)주관과 (인식)객관이 모두 실체와 본질이 없음-즉 공(空)함-을 알아 이 둘을 모두 여읜 불이(不二)의 경지로 들어가야 함을 여러 번 강조한다. 또 존재가 상주한다는 상주론(常住論-현대철학에서의 형이상학적 실재론 metaphysical realism)과 그 반대인 단멸론(斷滅論-허무주의 nihilism) 모두를 배격하는 중도(中道)를 취해야 함도 아울러 논의한다.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의 최근 짧은 글들이 불이(不二)와 중도(中道)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내 생각으로 이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에 대한 고려가 없이 현응스님의 최근 입장을 쉽게 분별론(分別論)으로만 이해해서 나온 오해이다. 이 오해를 푸는 것이 본고의 몇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간화선을 분별지로 접근한다고 보면서 이는 간화선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논하는데, 이 또한 뜻밖의 오해이다. 현응스님은 『깨달음과 역사』의 많은 곳에서 간화선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내 판단으로는 현응스님이 최근 글들에서 간화선에서 이용되는 대화를 잘 살펴봄으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이유는 이것이 수행자들이 그 대화의 내용이 분별지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깨닫게 함으로써 그 대화를 뛰어넘어 (즉 분별지의 한계를 초월하여) 나아가도록 자극해 주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해석으로 접근하기는 하지만 현응스님은 돈오(頓悟)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강조해 왔는데 수불스님의 반론문은 이 점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본고는 간화선(과 돈오)에 대한 현응스님의 견해를 다시 해명하는 것도 목적으로 한다.  간화선을 대표로 하는 선문의 가르침은 분별지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는 지성주의(intellectualism)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초(超)지성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경우 선문의 초지성주의가 실제 수행 현장에서는 반(反)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다고 느낄 때가 많다. 오히려 현응스님의 ‘지성주의’가 설법이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즉 말을 통해) 결국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보게 하고 따라서 그 한계를 넘어서 나아가게 하는 (즉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초(超)지성주의에 해당된다고 보인다. 그래서 나는 현응스님의 견해가 ‘말로써 말을 여읜다(以言遣言)’는 선문의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점이 본고 나머지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될 것이다. 
 

사진=장명확
 
불통(不通)과 반(反)지성주의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들 본고의 주제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생산적인 대화와 논의를 위해 피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을 지적하겠다. 나는 미국 대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를 들려 주며 반응을 살펴보곤 한다.
 
“(Tom) 나 최근에 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을 얻었어.” “(Jerry) 정말? 한번 구경 좀 하자.” “(Tom) 이 보석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Jerry) 그래? 그럼 어떻게 생긴 것인지 말로 설명해 봐.” “(Tom) 너무 진귀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ineffable).” “(Jerry) 알았어, 그러면 한번 그림으로 그려 봐.” “(Tom) 이 보석은 그릴 수도 없어. 그리고 그 외에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없어(inexpressible). 너무 굉장해(marvelous)!” “(Jerry) 그렇다고 치자. 그럼 네가 그 보석을 진짜로 갖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 “(Tom) 오직 같은 보석을 가진 사람만이 내가 그 보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어.” “(Jerry) 농담하는 거냐? 그만둬라! (Are you kidding me? Cut it out!)”
 
이것이 내가 지난 10년 가까이 불교철학개론을 가르친 천 여 명이 넘는 미국대학생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상호주관적으로(intersubjectively) 그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어떤 진귀한 것을 가졌다며 똑같이 진귀한 것을 가진 자들만이 그것을 알아본다는 주장은 21세기 서구인들에게는 그냥 농담에 불과하다.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이 대화가 수불스님 글의 어떤 부분을 비유적으로 논의하고 있는가를 알 것이다. 보석은 선문에서 강조하는 홀로 체득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는 깨달음(깨침)의 비유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말이나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고 오직 다른 깨달은(깨친) 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선문에서는 -그리고 서양종교들의 신비주의 종파들에서는- 이렇게 주장해 왔다. 선(禪)을 애호하시는 분들께는 실망스럽게 들릴 말씀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서구인들에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불자들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이라고 해도 반응이 별로 다를 것 같지 않다. 현응스님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선(禪) 특히 간화선을 불교의 정수 중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또 비록 해석을 달리하지만 돈오(頓悟)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믿는데, 이렇게 소중한 선(禪)을 위에서처럼 설득력 없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가르치려는 선문의 시도가 안타깝다. 이런 방식은 21세기 서구인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고 또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불통(不通)의 교수법’이다. 그리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함께 진리의 문제에 접근하고 또 그 해결을 시도하려는 것을 처음부터 거부하는 교수법은, 비록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초(超)지성주의를 표방하더라도, 실은 반(反)지성주의로 보이게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선(禪)이 반지성주의로 보여서는 결코 안 되겠다.   다른 비유를 들며 불통과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경계해 보겠다. 나는 내 철학개론강의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도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이에 대해 논하라는 과제를 내면, 사고력 훈련을 덜 받은 학생들은 종종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영혼이 불멸임을 믿는다”라면서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설을 지지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논지는 앞뒤가 바뀌어 있다. 영혼이 불멸임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지, 맹목적으로 기독교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의무감에서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는 것은 지성주의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신앙은 지성을 초월하므로 이런 태도를 초지성주의라고 미화하겠지만, 내가 볼 때 이는 반지성주의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다.  또 어떤 학생들은 “위대한 칸트가 하늘이 보랏빛이라고 했으니 하늘이 보라색임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른 학생들은 “아니다, 위대한 플라톤이 하늘이 초록색이라고 했으니 하늘은 초록색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이 보라색임이 독립적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칸트의 위대성이 확립되는데 기여하는 것이지 남들이 칸트가 위대하다고 해서 그가 말한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지적 게으름일 뿐이다. 그래서 각각의 주장들을 따로 판단하려 하지 않고 그냥 “칸트가 더 위대하다”거나 “아니다, 플라톤이 더 위대하다”고 언성을 높여서는 도무지 소통이 불가능하다. 곧 서로 불통이 되고, 따라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결국 곧 서로 반지성주의로 향하게 될 것이다.   최근 내가 한국에서 그리고 한국 매체를 통해 경험한 바에 의하면 “초기 경전에서는 ‘A가 B다’라고 말했으니 A는 B다,” “아니다, 더 위대한 조사들의 어록에 의하면 ‘A는 C다’라고 했으니 A는 B가 아니라 C다”라는 식의 논쟁이 많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보인 것처럼, 칸트나 플라톤 중 누가 더 위대한가를 먼저 선택한 후 그들의 주장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하겠다는 식이다. 앞뒤가 바뀐 논의방식이다. ‘A가 B’인지 아니면 ‘A가 C’인지를 먼저 독립적인 방식으로 검토하고 판단한 후에야 초기경전이나 조사어록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를 결정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중시하는 경전에 어떤 구절이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식의 주장으로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통이 불가피하고, 불통은 반지성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수불스님은 반론문의 여러 곳 특히 “9. 조사스님들의 경책”이라는 제목의 부분에서 옛 조사어록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며 현응스님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학자들이라면 즉각 “그래, 옛 조사들이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야? (OK, so what?)”라고 반응할 것이다. 조사들의 말이 옳음을 먼저 독립적인 논의의 토대 위에서 이해시킨 후에 그 요점을 이용할 수는 있어도, 조사어록의 권위를 먼저 받아들인 후 현응스님의 주장이 이에 어긋나니까 현응스님이 옳지 않다는 식의 논지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설명을 위해 예를 하나 더 들겠다. 어느 과학자가 한국의 가을 하늘이 짙푸른 원인을 가을에 빛이 대기에 들어올 때의 각도와 물 분자와의 반사 정도 등을 계산해서 밝혀냈다고 해 보자. 이때 어떤 철학자가 “이봐 과학자 양반, 그까짓 과학으로 어떻게 하늘빛의 본성을 밝힐 수 있겠어. 옛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칸트가 하늘이 보랏빛이라고 했어. 하늘은 보라색이야.”라고 주장한다고 하자. 전혀 통하지 않을 논박이다. 하늘이 보라색임을 칸트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서 독립적으로 밝힐 수 있어야만 이런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미국 상아탑 안에서 철학하며 살아오다 보니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내게는 선문(禪門)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이 무척 곤혹스럽다. 나는 선민의식이 일부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 그리고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불교의 일부에도 이런 의식이 있다는데 놀라워해 왔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성도직후 전법을 망설인 것이 이 사바세계에는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소승의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세존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고 인쇄도 불가능했으며 또 교통 통신 등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럴 때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세존의 초기 제자들처럼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뿐이었다. 그들이 전 인구의 극소수였다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을 수 있을 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시에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전 인구의 1%도 안 되었겠지만, 오늘날 서구와 동아시아 인구의 99%가 교육을 받고 있고 이들 나라의 문맹률은 1%~2% 이하다. 그래서 지금은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불교를 이해할 수 있어서 행복해 한다. 그런데 선문에서는 이러한 이해를 통한 깨달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선정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또는 체험적으로 지극히 높은 경지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깨달음(깨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럴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국 선문에서는 1%는커녕 그보다도 훨씬 더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상근기여서 99%를 넘는 하근기 사람들은 깨칠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다면 선문이 대중의 보편적인 성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대승불교의 정신을 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수불스님의 글에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 세계의 그 많은 불교학자들마다 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조께서 대자대비심으로 전등해 주신 깨달음이 그렇게 싸구려란 말인가”라는 부분이 있다. 서양철학이 전공인 나는 불교학자축에도 끼지 못하겠지만, 내가 존경하는 여러 불교학자들의 필생의 연구 작업과 그를 통한 불교의 이해가 싸구려라는 수불스님의 글에 놀랐다. 온 생을 던져 수행하시는 스님들을 경외(敬畏)로 대하지만, 학자들 가운데는 나름대로 ‘목숨 걸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불교학자들을 다 합쳐도 수 천 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깨달음이 너무도 어려운 것이어서 선문에서 수행하시는 분들 가운데 이 정도 숫자의 사람들도 도달할 가능성이 없을 만큼 깨달음이 ‘명품’이라면 이 명품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70억 인구의 0.000001%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는 대승의 가르침이 상위 극소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대승에 속하는 한국 선문의 입장이 그럴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수불스님의 범주오류(category mistake) 위에서 잠시 철학과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나 했으니 이제는 철학적으로 진지한 논의를 할까 한다.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주관과 객관,’ ‘있다(有)와 없다(無)’와 같은 것을 상정하는 ‘이법(二法) 차원의 이해’를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불이법(不二法) 차원의 깨달음’으로 간주했으므로 다른 두 범주를 하나로 보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비판은 현응스님의 견해를 지나치게 쉽고 단순하게 해석해서 생긴 오해이다. 그 이유는 첫째 현응스님이 “이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그것이 분별지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파악함은 현응스님의 손가락만 쳐다보지 그것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밑에서 더 부연 설명하겠다. 둘째, 수불스님은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범주”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범주”라는 말을 쓸 수 없는 ‘불이법의 차원’을 하나의 범주로 간주하는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응스님이 아니라 수불스님이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유부터 먼저 논의하겠다. “범주(範疇)”라는 말은 19세기말 독일철학을 숭상한 일본학자들이 서양철학 특히 칸트의 철학서들을 일본어로 번역할 때 그들이 좋아하는 한자어를 이용해 도입한 단어가 한국어에 들어온 사례다. 그래서 한국어 안에서는 좀 어색하게 들린다. 이 말은 원래 ‘카테고리(category)’의 독일어 단어(Kategorie)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 ‘카테고리’를 ‘개념(Begriff, concept)’으로 이해하며 이 둘을 상호교환적(interchangeably)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개념”이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범주오류의 속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밑에서 간단히 증명하겠지만, ‘개념’의 논리적 분석 작업으로 불가에서 특히 선문에서 말을 꺼리는 전통이 생긴 이유도 밝혀 줄 수 있다.  말은 단어를 써야 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존재세계의 사물을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세상 만물을 분별(differentiation)하고 차별(discrimination)하게 된다. 그 이유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사람”이라는 말과 개념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라.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논리적으로 이 개념이 적용되는 {철수, 영희, 동건, 용준, 지현, ...}이라는 집합을 자동적으로 만들게 된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세계를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는 이 그룹과 그 외에 사람이 아닌 모든 다른 사물을 포함하는 두 그룹으로 나누게 되고 만다. 말하자면 어떤 한 개념도 이 세상을 그 개념에 해당하는 사물들과 그렇지 않은 사물들로 나누는 분별과 차별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물이 조건에 의해서만 생멸하여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물이 이렇게 두 그룹으로 분리되어 마치 서로 상관없다는 듯이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말과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 세존의 연기법을 거스르며 존재세계를 인위적으로 나누어 바라보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불가에서 특히 선문에서 말을 경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한편 이렇게 말을 사용하며 개념을 이용해 그룹을 나누게 되면 우리는 {철수, 영희, 동건, 용준, 지현, ...}의 모든 이들을 ‘사람’이라는 개념(범주)에 속하도록 만드는 어떤 필연적인 본성(svabhava, 본질, essence, intrinsic nature)이 있다고 믿게 된다. 사람을 사람이게끔 만드는 본성이 있고, 이 본성이 사람들을 사람 아닌 것들로부터 분별시켜 준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만물이 조건에 의해서만 생멸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물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으니 독자성인 본성(자성 自性)을 가질 수도 없다는 대승의 공(空)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된다. 결국 말과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연기의 그물로 촘촘히 얽혀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세계를 개념으로 억지로 분별하고, 또 본성이 없어 공(空)한 사물들이 본성(자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말은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방해해 우리의 깨달음을 어렵게 만든다. 말과 개념은 사용하기에 편리한 도구이지만 그것들을 도구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는 순간 존재세계의 실상을 왜곡시켜 깨달음을 방해하여 우리를 해치는 위험한 무기가 되어 버린다. 선문에서 말과 개념화를 극도로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펴는 이유가 충분히 납득된다.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분별지가 작동하는 이법(二法) 차원의 이해(理解)를 불이법(不二法) 차원의 깨달음으로 본 것이 범주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불이법 차원이란 어떤 개념이나 범주가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연기에 의해서 생멸하며 아무 것도 실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도 또 자성을 가질 수도 없는 불이법 차원에 어떻게 아무런 대상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이법의 차원일 수가 없다. 그리고 아무런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면 이것들을 포괄하는 그룹으로서의 범주나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불이법 차원이란 말이나 개념으로 파악되고 잡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리고 개념이나 범주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현응스님이 어떻게 존재하지도 않는 범주에 다른 범주에서나 가능한 분별지와 이해를 적용하는 범주오류를 범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재할 수 없는 범주를 존재하는 범주로 본 수불스님이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수불스님의 더 중대한 오류는 현응스님의 손가락만 보았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밑에서 논의하겠다. 현응스님이 말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사물을 변화와 관계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른다. 그리고 연기법은 위에서도 논의했듯이 자연스럽게 공(空)의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은 결국 연기와 공(空)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말과 개념에 집착하여 분별망상에 빠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해”라는 말이 선문에서 경시(輕視)하는 “지해(知解)”라는 말과 결부되어 불필요하게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은데,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고 함은 결국 연기와 공의 관점을 흐리고 왜곡시킬 우려가 있는 말과 개념의 사용을 조심하라는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연기법과 공사상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과 개념을 쓰게 된다. 이때 쓰는 말과 개념은 어디까지나 잠시 편리하게 쓰는 도구에 불과하다. 현응스님이 이런 말이나 개념에 집착하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연기와 공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말과 개념이 유발하는 분별지가 자칫하면 연기와 공의 관점을 통한 우리의 깨달음을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무기가 됨도 깨닫게 되며 따라서 스스로 항상 이에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은 일단 연기와 공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이것이 현응스님이 말하는 돈오(頓悟)이다), 이에 더 나아가 모든 개념적 이해를 초월하는 불이법의 차원까지 보라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현응스님이 불이(不二)를 강조했음은 본고의 서두에서 이미 밝혔다.) 그래서 실제로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 ‘말로써 말을 여읜다(以言遣言)’는 선문의 가르침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현응스님이 “이해”라는 말을 썼다고 해서 분별지를 추구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함은 달은 못 보고 현응스님의 손가락만 보는 셈이다. 수불스님은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하며 현응스님을 비판했는데, 깨달음이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주장은 실제로 현응스님 입장에서도 지극히 옳은 말씀일 것이다. 사유란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세계를 본다고 함은 연기와 공의 관점을 흐릴 개념화를 여의고 세계를 파악하려는 것이고, 따라서 이는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현응스님이 간화선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권장했다고 소개했는데,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간화선에서 사용되는 대화 자체에 즉 그곳에서 쓰이는 말과 개념을 통한 분별에 집착하라고 했다는 방식으로 해석한 듯하다. 그러나 대화를 잘 살피라는 현응스님의 장려가 이렇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응스님의 주장은, (1) 분별지로 볼 때는 간화선에서 주고받는 문답이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서, (2) 말로 하는 아무 가능한 대답도 불가능함을 스스로 깨우치면서, (3)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야만 진정한 깨달음(깨침)이 가능함을 보아야 한다고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선문답에서 흔한 “물에 비친 달이 물이냐 달이냐?”와 같은 선사의 넌센스(nonsense) 질문에는 “어젯밤 남녘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았습니다”와 같은 넌센스 답변이 적절한데, 그 이유는 넌센스 질문으로 대변되는 말과 개념이 가진 한계를 정확히 보고서 그것이 넌센스임을 넌센스 답변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이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대화를 잘 살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렇게 말이 가진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오래 전 대학원생 시절부터 이런 생각을 해 왔는데, 이번 3월 『불교평론』에 게재될 졸고 <말로 깨우치는 선(禪)>에서 이런 논의를 더 상세히 펴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부연하지 않겠다.  한편 수불스님은 이해하는 깨달음과 역사 속에서의 실천을 통합하는 정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현응스님의 격려와 권장이 또 두 개의 합쳐질 수 없는 범주들을 한 곳에다 섞어 놓은 범주오류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응스님이 그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논리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들임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멋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서 나온 빗나간 비판이다. 깨달음이 존재세계의 사실에 대한 판단을 포함하고 역사 속에서의 실천은 행위의 당위(當爲)에 대한 문제여서 이 둘은 사실과 당위라는 논리적으로는 다른 두 차원에 속하는 주제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우리의 현실 삶에서 조화롭게 어울려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합쳐질 수 없는 둘을 섞어서 하나로 만들려는 범주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논리적 차이점을 알면서도 둘을 조화롭게 함께 이용한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합쳐져서 하나로 될 수 없다고 해서 음식을 요리하는데 물과 기름을 조화롭게 섞어서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예를 들어 이점을 더 설명해 보겠다. 다빈치의 명화 모나리자를 한번 순수이 과학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며 분석해 보자. 우선 그림에 좌표를 설정해 어느 좌표부터 어느 좌표까지는 어떤 화학적 성분을 가진 물감이 얼마나 사용되었는가를 기록해야 하겠고, … 미시차원에서 볼 때 이 그림에서는 모든 분자들의 어떠어떠한 좌표에 배치되어 있다는 등에 대한 기술이 가능하겠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이런 분석이 올바른 접근법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다빈치의 터치와 그림의 색감 등 주로 미학적 차원에서만 모나리자를 감상한다. 그리고 아름답다거나 신비롭다고 말한다. 그림의 분자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과학적 분석의 차원과 미학적 접근은 전혀 다른 두 차원의 문제들이지만, 이 둘이 같은 박물관에서 과학자와 미술비평가 두 사람에 의해 동시에 진행된다고 해서 아무도 이 박물관이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수불스님은 공(空)을 불생불멸하며 “생멸하는 색(色)을 포용하지만 물들지 않는다”고 하고, 또 출세간은 “여여부동(如如不動)”이라고 하면서 공(空)을 마치 상주(常住)하는 어떤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실재(實在)처럼 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물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無自性, empty of self-nature)는 사물의 존재 양상(mode)을 표현하는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공(空 emptiness)’을 마치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substance)로 이해하는 실체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아니(no)”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아니’라는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없음”이라는 말이 ‘없음’이라는 대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비어있음’이라는 뜻의 “공(空 emptiness)”이라는 말이 ‘공’이라는 실재하는 대상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문제는 따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주제여서 아쉽지만 더 이상의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실은 현대분석형이상학에서는 흔한 주제이다. 
 
참나와 참마음은 똥막대가 아니었던가? 수불스님은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라면서 반론문의 한 부분을 할애해 논의를 폈다. 그런데 현응스님도 비판했지만, 이 “마음(心, mind)”이라는 말이 맥락에 따라 너무나도 많이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에 대해 서양학자들이 좌절감을 토로하는 글을 읽은 기억도 있다.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푸념이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뜻이 변하는 단어는 다루기가 번거로울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나는 최소한 선문에서 이 “마음”이라는 말을 참된 자아(참나)로 해석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된 자아라는 것은 석가세존께서 그 존재를 분명히 부정하신 바라문교의 아뜨만(我, Atman)인데, 세존의 무아(無我, Anatman, Non-Self)론을 부정하는 가르침을 불교 안에서 어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선문에서 말하는 참나 또는 청정한 마음에 대한 기술은 실은 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아뜨만에 대한 기술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불스님이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는 바라문교에서 아뜨만을 깨달아야 (realize) 해탈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선문에서 깨달은(깨친) 마음은 자성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아뜨만 또한 말로 기술할 수 있는 어떤 본성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라문교에서는 아뜨만이 어떤 본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뜨만은 연기의 그물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석가세존은 그런 아뜨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無我, Anatman, Non-Self)를 설파하고 논증했고, 이것이 불교와 바라문교를 나뉘게 한 결정적인 차이다.  한편 나는 불교 전통의 일부에서 부정적(否定的) 개념(concepts of negation)에 불과한 공(空)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범하고서는 이 공을 마치 ‘우주의 근원이자 절대적인 객관적 실재’라는 바라문교의 브라흐만(Brahman)처럼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국의 일부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이 마음을 닦거나 깨닫는 것을 강조하다가 간혹 범아일여(梵我一如 Brahman is Atman)라고 주장하는 것까지도 보았다. 그런데 이 범아일여는 바라문교에서 그들의 철학적 사유의 최고 결과로 자부하는 명제인데, 이것을 얼토당토않게 불교 일부에서 받아들여 그들의 주장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근원이자 절대적이고 객관적 실재인 브라흐만과 나(자아, Self)의 근원이자 절대적 주관적 실재인 아뜨만이 동일하다(하나다)라는 것인데, 석가세존께서 단정적으로 부정하고 반대하신 이 바라문교의 교리를 일부 선문과 유식학자들이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척 곤혹스럽다. 수불스님은 ‘마음이 우주의 근원’이라고까지 하는데, 마음이 아뜨만이고 아뜨만이 바라문교에서 주장해 온 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면, ‘마음이 우주의 근원’이라는 수불스님의 견해는 바라문교 사람들이 참 좋아할 주장이다.  백보를 양보해서 참나, 참마음, 그리고 실체화되어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공(空)이라는 모든 것들이 단지 어리석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방편일 뿐이고, 실은 원래 이들 가운데 아무 것도 실체와 본질(자성)이 없어서 모두 공(空)하다는 문구를 살짝 덧붙인다고 해 보자. 그러나 그렇다면 이렇게 방편을 사용하는 이유들을 저술들의 이곳저곳에 분명히 설명해 놓아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오해할 여지가 없도록 해 놓아야 할 것이다. 어느 선사께서 참나와 참마음이란 것은 모두 똥막대라고 하신 것처럼. 지금까지 깨달음(깨침)을 참선 수행을 통해 얻는 어떤 신비한 경험과 체득과 관련짓는 선문의 전통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내가 2012년 『불교학보』에 발표한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언어논증>에서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선문에서 강조하는 깨침의 경험이 그 객관적 검증의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면 신심으로라면 모를까 최소한 ‘철학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본고의 앞부분에서 소개한 진귀한 보석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Tom의 예를 통해 보여주려 했듯이 나는 ‘신비한’ 체험을 통한 깨달음(깨침)만을 인정하는 선문의 방법으로는 21세기 넓은 세상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수불스님뿐 아니라 여러 분들의 다양한 비판이 가해져 왔는데, 나는 이런 비판들이 기본적으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고유한 본성(자성)을 가진 고정된 실체에 대한 깨달음(如如不動한 브라흐만 같은 空을 깨달음) 또는 그런 실체에 대한 체험(아뜨만의 체험)이라고 오해하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깨달음이 변할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브라흐만이나 아뜨만처럼 영구불변하고 고정된 실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현응스님의 말처럼 사물을 변화와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즉 연기와 공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연기와 공의 관점은 시대와 장소 그리고 접하는 삶의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깨달음이란 우리가 이러한 ‘환경들(environments)’에 연기와 공의 관점으로 적절히 ‘적응(adaptation)’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학적 종이 생존 번식해 나가는 것을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현응스님의 말이 옳다. 그리고 깨달음이 어떤 완성되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불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본 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선문(禪門)의 가르침은 초(超)지성주의여야 도교(道敎) 기원설이 있기는 하지만 선문의 정신을 보여주는 ‘말로써 말을 여읜다’라는 이언견언(以言遣言)의 통찰은 말과 개념으로밖에 작동할 수 없는 지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라는 초(超)지성주의를 지향한다. 그런데 수불스님을 비롯한 선문의 여러 전통은 ‘이언견언(以言遣言)’에서 첫 부분 ‘이언(以言)’의 필요성조차 전적으로 부정하고 ‘견언(遣言)’만을 가르치는 것 같은데, 선(禪)에 대한 이러한 근본주의적 접근 방식은 자칫하면 가르침의 현장에서 필요한 대화와 토론을 통한 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생길 수도 있는 불통(不通)의 문화는 권위주의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또 권위주의는 다시금 반지성주의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선문에서 지향하는 것은 초(超)지성주의이지 반(反)지성주의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선문에서 ‘견언(遣言)’뿐만 아니라 ‘이언(以言)’의 부분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문이 이해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부정하기만 한다면 선의 전통이 초지성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라는 오해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선문의 수행자들도 부지런히 지적 정신적 훈련을 통해 높은 지성의 수준에 도달한 것을 증명한 다음에야 비로소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초지성주의를 논하고 추구해야 함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게 증명하지도 않은 채 처음부터 선문 수행자들의 최상근기를 믿고 선(禪)을 통한 초지성주의와 최상승만을 주장한다면 이는 다른 이들에게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우선 지적으로 사물에 접근해서 그것들을 연기와 공의 관점해서 파악해야 한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이 초지성주의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깨달음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연기와 공의 관점을 적용하기 어렵게 하는 말과 개념이 초래하는 분별망상을 넘어서려 할 것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분별로만 가능한 지성과 사유의 영역을 초월해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현응스님의 ‘이해하는 깨달음’이 반지성이 아니라 초지성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올바른 견해라고 결론짓는다. 더 나아가 뭇삶(衆生)의 역사의 현장에서 깨달음을(즉 연기와 공의 관점을) 적용하고 실천하며 그 옳음을 확인하고 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깨달음의 깊이를 더해가야 한다는 현응스님의 주장은 나와 같은 재가자에게는 합리적인 수행의 길일 뿐더러 순간순간의 삶이 깨달음의 순간들이라는 확신도 가질 수 있어서 무척 고무적이기도 하다. 나는 선문 일부가 제시하는 전 인구의 0.000001% 이하만 가질 수 있다는 최고 명품은 가질 근기도 못되지만 솔직히 관심도 없다.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 분과위원회장 역임.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계통의 영어로 된 논문들을 발표해 왔고, 불교철학과 관련된 한글 저술로는 “서양철학으로 논증하는 불교의 무아론,” “불교 – 역사 사회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의 에세이와 논문 “깨달음의 패러독스와 사적언어논증”이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본 불교철학 소개서 Buddhism for Th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 등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