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글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살고 있는가!

통융 2017. 1. 5. 19:53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살고 있는가!

문열면 밝은 세상 - 통융스님

 

오랜만에 찾아온 법우와 차를 한 잔 했다.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벗이 “스님은 스스로 늘 자연처럼 그러한 마음을  느끼며 사십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마침 그분의 잔이 비어서 차를 한 잔 따라 드리며 "차 한 잔 드시지요!" 하니
그 분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듯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연 차 맛은 어떻습니까?” 질문을 던졌다.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 했다.
그분은 차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분이라 설명 또한 맛을 느낄 정도로 논리가 있었다.
지금 저에게 차 맛에 대한 설명을 잘 하셨습니다만 차 맛을 내가 느끼지 못합니다.
“어떻게 정확한 차의 맛을 저에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라고 다시 질문을 했다.
그때서야 그 분이 뭔가를 깨달았는지,
당신의 찻잔을 들어 나에게 권하며 "차 한 잔 하시지요"라며 차를 마시라고 했다.
 
차의 맛을 어떤 누구도 설명은 잘 할 수 있어도 맛을 직접 전달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설명을 잘 한다 해도 설명일 뿐 그 참 맛은 스스로 먹어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진리들이 이와 같다. 진리를 설명한 경전이나 성경도 방편의 도구임을 알아야한다.
그 속에는 진리를 설명한 것뿐이지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진리의 본질을 깨닫기 위한 방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방편물이 무슨 신기한 도술을 부리는 물건인양 우상처럼 다룬다.
아무리 지식을 동원해서 모든 경전을 다 암기하고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말이고 생각일  뿐이고  깨달음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그 내용을 통해 스스로 체험하고 온 몸으로 깨달음을 행하여 나타낼 때 그 가치를 하는 것이다.
 
즉 그러함(自然)이란 지식을 깨달아 실천하고 스스로 지행합일( 知行合一)이 되는 것이다.

당나라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시인인 백난천이 향주 자사로 부임하여 나무위에서 늘 참선 한다는 도림선사를 찾아갔다.
백낙천이 스님의 덕망을 시험해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스님, 나무 위의 거처가 너무 위험하지 않으십니까?"
스님이 백낙천을 보고 "자네가 더 위험 해 보이네."
"저는 이 지방의 자사에 올랐고 지금 안전한 땅을 밟고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지요."
그러자 스님이 대답하길 "티끌 같은 세상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만 늘어 번뇌가 끝이 없고 탐욕의 불길이 쉬지 않는 자네가 더 위험하네."
백낙천은 선사의 기개에 눌려 "스님 제게 평생 좌우명으로 삼을 법문을 들려 주십시요."
"자기의 마음을 맑게 하여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굉장한 가르침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실망하면서
"그거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 아닙니까?"
"알기야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지."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은 지식은 행하지( 知行合一)않으면 교만과 번뇌만 더할 뿐 진리의 길에는 아무 쓸모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조괴선사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참 진리란 지식을 바로 알고 깨달아 스스로 그러함으로 쓰는 것이지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말법과 온갖 말씀으로 지식을 깨달음으로 전도 몽상하여 거짓과 위선이 난무한 우리사회에서 한 번쯤 느껴 볼 이야기이다.
특히 많은 종교와 신앙인과 성직자들 그리고 위정자나 지식인들이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문제가 아닐까?

진리를 지식이나 이해로만 알고 설교하며 전도하는 혹세무민하는 자가 아닌지,
스스로 그러함(自然)으로 행동하는 것이 온전한 전도이고 법문임을
바로 깨닫고 있는지를…….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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