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

번뇌와 미망

통융 2016. 10. 12. 20:09

."번뇌라는 두 글자는 세속에서 쓰는 말입니다만, 그것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인지 모르겠읍니다.

나는 말했다.

"미망(迷妄)이 바로 번뇌의 근원이고, 물들여 더럽힌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미망이란 자기의 마음이 미혹되어서 일체의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뜻은 성품(性品)이란 본래 공적(空寂)하여 지견(知見)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사람들은 망정(妄情)을 일으키고, 일체의 법을 잘못 인식하여 실제로 있다實有고 믿는 것입니다. 한번 있다는 견해에 떨어지면, ...(取捨順逆)의 생각이 나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에 맞으면 사랑하고, 어긋나면 미워합니다. 또한 사랑하면 취하여 받아들이고, 증오하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심해지면, 자기에게 좋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마음은 의식에 속속들이 잠복해서 마음대로 날뛰고 아무 때나 막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5(五欲)7(七情)에 얽매이고, 생각은 이리저리 날뛰게 됩니다. 여기에 오염되면 6()이 되고, 다행히 여기에 물들지 않으면 4(四聖)이 됩니다. ()와 오()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번뇌에 얽매인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한 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본래 청정하고진실된 인간의 성품에는 예토부터 지금까지 따로 법을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청정함과 진실됨을 얻거나 잃는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 천지에 가득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했고, 분명하여 결코 안주하는모양住相이 없읍니다. 중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걸핏하면 바깥 경계를 좇습니다. 그 무엇에라도 의지하면 모두가 번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인이니 범부니 가릴 것도 없이 모두 번뇌에 오염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번뇌는 계율로 다듬어진 몸을 심하게 하고,

()의 근원을 혼탁하게 하며, 지혜의 거울을 흐리게 합니다. 그 결과 탐욕의 뿌리는 더욱 견고해지고, 분노의 불꽃은 더욱 치솟으며, 어리석은 구름을 더욱 퍼지게 하며, 악도(惡道)를 열고 선문(善門)을 폐쇄하며, 업연(業緣)을 돕고 도력(道力)을 소멸시킵니다. 번뇌의 허물은 이 외에도 끌이 없습니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은 모든 행위가 모두 번뇌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몸은 어느 것도 침범하지 않는 곳에서 펀안히 살고자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자신의 감정을 언잖게 하고 번거롭게 하면 '도력을 소멸시킨다'고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립니다. 그 기상이야 갸륵하다고도 하겠지만, 이것은 오히려 미혹한 가운데도 더더욱 미혹된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런 시람과 함께 도를 의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미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세상일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번뇌가 세상일에서 나왔다면 배가 고파도 먹지 말아야 하고, 추워도 옷을 입지 말아야 하며,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하고, 길을 가도 남이 닦아놓은 길로는 가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므토 이렇게 하다가는 머지 않아 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로 이와같이 한다면 곡식은 농사를 지어서 나왔고, 옷은 베틀에서 만돌어졌으며, 집은 건축하고 보수하는데서 나왔고, 도로는 길을 개척해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이 제각기 세상일을 분담해서 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기지 물품을 어찌 얻겠읍니까?

또 이것은 바로 지금 도를 수행하는 이 몸이 본래는 없었는데, 부모가 양육해주신 노력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는것입니다. 더우기 부모가 어루만지고 안아준 수고로움으로 자랐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옛부터 도가 광대하고 덕이 구비된 불조(佛祖)께서도 모두 밥먹고, 옷입고, 가옥에서 거주하며, 땅을 밟고 걸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조들은 확연히 깨달은 원만청정한 자심(自心)이 법계에 가득차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한 찰나 사이에 팔만 번뇌를 8만 불사(佛事)로 바꾸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영가(永嘉)스님께서는, '한 법도 보지 않으면 바로 여래(如來)이다. 굳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다'고 하였읍니다. 어떻게 자심(自心)을 깨닫는 것외에 다른 법이 있어 번뇌가 되겠읍니까? 이 때문에 화엄회상(華嚴會上)의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은 모두 번뇌에 의지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했고, 보살행(菩薩行)을 닦았읍니다. 이것은 장엄한 부처님의 정토(淨土)에 들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번뇌를 떠나서는 6바라밀도 없고, 번뇌를 버리면 4무량심(四無量心)도 없으며, 번뇌를 떠나서는 성현도 없고, 번뇌가 다하면 해탈도 없다는 것을........... 번뇌라는 것은 3(三世)의 불조와, 시방(十方)의 보살들과, 가없는 선지식들의 모은 계..(戒定慧), 수많은 선공덕(善功德)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번뇌가 없다면 성현의 중생구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선하는 자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을냅니다. 번뇌를 가지고 번뇌를 제거하려 하면 더더욱 미혹만 증가할 뿐입니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에는 '나는 손가락을 누르기만 해도 해인(海印)의 광채가 발현하지만, 너희들은 마음을 조금반 움직여도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어찌 사람들을 속인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람마다 이 자리에서 그윽히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여, 번뇌를 그대로 오묘하게 사용하여 보리를 구할 수 있겠읍니까?

가령 백만이나 되는 공덕행(功德行)으로 번뇌를 씻어 내려고 할지라도 성인께서는 오히려 쓸데없는 짓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번뇌를 씻어버리려는 것도 꾸짖으시는데, 더구나마음이 옹색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것만으로 구실을 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키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읍니까?"



다음 세 가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주지의 소임을 말은 사람은도력(道力)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연력(緣力)이 있어야 하고, 세째는 지력(智力)이 있어야 합니다.

도력은 근본이고, 연력과 지력은 활용럭입니다. 근본이 있기만 하면 설사 활용력이 없을지라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겠읍니다. 이런 경우는 교화하는 방편이 엉성하고, 관리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도의 근본이 이지러진 상태라면 백천 가지의 신이(神異)한 방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서로 맞아떨어지질 않습니다. 비록 연력과 지력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근본과 활용력이 모두 없는데도 외람되게 주지의 소임을 맡는다고 합시다. 인과외 법칙이 없다면 얘기할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지 자격이 없으면서도 속편하게 그 소임을 말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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