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

명예에 대하여

통융 2016. 10. 11. 16:41

나는 말했다.

"그대는 생각지 못했습니까? 소임을 맡은 그때부터 책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름은 까닭없이 생긴 것이 없습니다. 모두 실상이 있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명칭과 그에 따르는 실상의 관계는 마치 물체와 그림자외 사이와같고,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같고, 식량으로 밥을짓는것과 같습니다. 책망하는 것은 실상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를 말할 때는 형체의 상제를 찾는 것과 같으며, 의식(衣食)의 명칭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곡식과 비단의 실제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처음 주지라는 소임을 걸머질 때에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깨달음의 바른 씨앗正因을 지녀, 법을 오랫동안머물게 하는 자세가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이것은 본체를 떠나서 그림자를 좇는 것이고, 곡식과 비단을 버리고 의복과 음식을 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껍데기에 대한 말이 많으면 그 본질과는 더더욱 멀어지며, 심기(心機)가 촘촘할수록 대용(大用)은 더욱 어긋나고, 반연(攀緣)이 많아질수록 깨달음의 바른 씨앗正因은 더욱 없어집니다. 이 껍데기에 대한 말을 빨리 버린다면 그래도 막을 방법이 있겠지만, 그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 시람은 받드시 지옥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도대체 명예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숭상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 그 자체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집착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애견(愛見)이 발생하게 되고, 이 애견 중에 가장 심한 것이 바로 명예욕입니다. 그러므로 명예욕은 5(五欲)중에서도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읍니다.

욕망이 마음에 깊숙이 들어있을 때는 아직 미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외견(外緣)을 만나 욕심이 움직이면 그때는 그 힘이 강해져 수만 명의 장정도 대적할 수 없고,수천 명의 성인이 있어도 그것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또한 도끼와 톱으로 위협하고, 뜨거운 가마솥의 형벌이 기다린다 해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장에 볼수 없는 인과를 두려워하겠읍니까?

그런데 명예 중에서도 가장 제일가는 명예는 성현(聖賢)

도덕(道德)이란 명예입니다. 그 다음은 공리(功利)라는 명예이며, 그 다음은 기능(技能)이란 명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현을 속여서 명예롤 얻으려 하고 도덕을 빙자해서 명예를 얻으려 하고, 기능을 멋대로 부려 명예를 얻으려 하고, 공리를 훔쳐 명예를 얻으려 합니다. 진정한 명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념(思念)에서 생겨난 망식(妄識)에 매달려서 행동거지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명예만 얻으려고 힘씁니다. 그러면서도 명예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으며 되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종일토톡 바쁘게 애를 쓰지만, 크게 패가망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그러는 사람 중에 더러는 보연(報緣)이 맞아 구하던 것이 우연히 적중하여 훌륭한 명성을 죽은 뒤에까지 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보연이 다하면 지난 날의 명예는 도리어 오늘의 치욕이 되고 맙니다. 지난날의 명예가 높았을수록 치욕 또한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토 실속 없는 명예는 패배와 치욕을 가져올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 성인들의 거취를 살펴보면, 그분들은 이치의 근원을 통철히 꿰뚫어보시고, 가슴 속에 참다운 본질을 간직하여 잠시라도 그것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지극한 도만을 구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생사(生死)의 마구니를 타파하여 본래의 신령한 자리로 돌아가려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6바라밀을 세밀하게 실천하고 4무량심(四無量心)을 널리 베푼 이유는 대자(大慈)한 마음을 내어 대비심(四大悲心)을 여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3백여 회동안 반().(滿),().()의 가르침을 설했던 것은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병에 따라서 치료하고 지도하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후에 손수 한 송이 꽃을 들어보이시고 의발(衣鉢)을 가섭존자에게 부촉하셨읍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印可)하고, 그릇으로써 그릇을 전하는 참된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백천의 훌륭한 수행과 항하깅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공덕도 참된 깨우침의 자리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이를 말하여 순일진실(純一眞實)이라고 합니다. 안으로는 억지로 하는 인위적인 행위가 없었고, 밖으로는 명예를 사모하는 욕망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봄내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읍니다, 용맹건장한 모습도 보이지 않고, 다만 실제와 진실을 실천하는 올바른 생각만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성실한 행동이 구족원만(具足圓滿)했기 때문에 조어사(調御師).천인존(天人尊)이라든가 우담화(優曇華).광명장(光明藏)등과 같은 갖가지 아름다운 호칭과 갖가지 훌륭한 명예들을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되었읍니다. 만일 성인이 외적으로 명예를 홈모하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다편 온갖 선행을 열심으로 수행했어도 훌륭한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리어 허망을 좇는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참다운 본질이 없을까봐 근심했을 뿐, 결코 명예를 얻지 못할까 근심하진 않았읍니다. 그것은 참다운 실상이 명예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고금에 참다운 실싱도 없으면서 명예를 얻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른바 주지(住持)라는 소임의 참다운 본질은 무엇일까요? 멀리는 선불先佛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가까이는 조사들의 교화방편을 지녔으며, 안으로는 자기의 진성(眞誠)을 간직했고, 밖으로는 인간과 천상(天上)이 의지할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총명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다그. 해서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순종한다고 해서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뜻을 거역한다고 해서 미워하지도 않으며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자비로써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드날리고, 높은 자리에서 스승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실상입니다.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직위에서 물러나 수행을 할지언정 구차하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혹 조금이라도 수단을 써서 참된 실상을 흉내내려 한다편, 밝은, 대낮에 빈딪블처럼 전혀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참된 실상만을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참 된 실싱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시 무슨 명예를 생각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곡식과 비단을 많이 쌓아두면 의복과 음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총림이 생긴 이래로 주지라는 소임에 대한 아름다운 명예는 마치 허공에 걸린 과녁과도 같았읍니다. 총명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필설(筆舌)과 변론의 날카로운 회살을 그 과녁에 쏘아 댈 적에도 모두 참된 실싱은 돌아보지 않았읍니다. 그러고서는 과녁을 적중시켰다고 했으나, 어찌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교화가 잘되고 못되고, 법도가 제대로 서고못서고 하는 원인은 주지 자리를 탐내는 명예 때문이냐 아니면 주지의 본래 임무겠습니까? 모두가 주지의 본래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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