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

위의에 대하여

통융 2016. 10. 11. 16:47

"세상에는 위의의 종류가 둘이 있읍니다. 즉 하나는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이고, 또 하나는 권세가 높아서 생기는 위의입니다.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는 자연스럽지만, 권세 때문에 생긴 위의는 인위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나온 위엄과 존경은 상대의 미음까지 복종시킬 수 있지만, 인위적으로생긴 위엄과 존경은 그저 외형만을 복종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까지 복종시키는 위엄과 존경은 자기의 눈앞에서만 위엄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만리 밖에서도 위엄과 존경을 받습니다. 뿐만아니라 현재는 물론 백세가 지나도록 그 명성은 알려져 존경과 위엄을 받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옛날에 도덕이 뛰어난 분들에 대해 요즈음 사람들은 그 유풍(遺風)에 머리 숙이며, 깊이 존경하지 않는 자가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분들의 모습을 직접 뵙고 말씀을 몸소 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야 어찌 경외하지 않았겠읍니까!

그분들의,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위엄은 한결같이 지성(至誠)에서 나왔읍니다. 모두가 자연스러워서 털끝만큼의 인 위적인 조작도 없었습니다. 도덕 때문에 생기는 위엄이 시람의 마음을 감복시키는 것은 실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현들께서 임시 미봉책으보 도덕을 문란하게 하면서 사람을 복종시키려 했다면, 사람들이 어찌 그분들에게 복종했겠습니까? 또 도덕이 갖고있는 훌륭한 가치는, 성현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문란하게 하여 사람들을 복종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도덕을 버리고 권세에 아부하면서도 그 위태로움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끄럽게 떠들며 종일토록 남돌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만을 원망합니다. 잘못 되어도 어찌 이토록 잘못될 수가 있읍니까. 그러니 권세의 위엄이란 사람을 겉으로는 복종시킬 수는 있다해도 잠시일 뿐입니다. 눈 앉에서 돌아서기만하면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가 죽은 이후까지 위엄스럽게 존경받을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죽은 뒤에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그 권세에 무릎 꿇었던 과거를 들추어서 보복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권세가 훗날에 재앙이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존경과 위엄이 후일에 가서는 재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들은 4무량심 (四無量心)의 큰 훈계를 저 멀리 서역(西域)의 부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위엄과 권세 같은 것은 한순간이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며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위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것이 모두 위엄이 악한자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실로 도덕이 자기 몸에 충만히지 않은데도 직위에서 물러나수양할 것은 생각히지 않고, 도리어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군림하쇠고만 애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설사 지금은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재앙을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객승이 이말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모든 약()은 반드시 훌륭한 의사의 문으로 모이게 마련이고, 돈은 큰 상인의 점포로 투자되기 마련입니다. 나무가무성 하게 자라면 산새들이 모여들고, 연못에 물이 가득하게 차편 달빛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옛날 설산(雪山)의 부처님께서는 만승(萬乘)의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시고 6년 동안 춥고 배고픈 고생을 감수했습니다. 대천세계(大千世界) 보기를 한 물거품 처럼 하잖게 여길 따름이었읍니다. 그러니 어찌 세간에 무슨 유위(有爲)가 있으셨겠습니까? 그러나 훌륭한 덕을 갖추시자 화려한 누각과 모든 장엄한 살림살이가 두루 쌓였습니다. 비록 열반하신 지 2,000여년이 지났지만 그 영향력은 온 천하에 가득했읍니다. 이야말로 '자기가 버린 것을 도로 자기가 거두어들 인다'라는 속담과도 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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