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야화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은
마음을 이용하여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자리는 발들여 놓을 틈도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곳입니다.
단박에 깨쳐야 할 이 자리는
직접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한 걸음에 성큼
밑바닥까지 쑥 들어가야 합니다.
-본문 中에서-
선림고경(禪林古鏡)에 씀
설봉스님이 하루는 원숭이들을 보고 말하기를
원숭이가 각각 한 개의 옛거울(古鏡)을 짊어지고 있구나!
하니 삼성스님이
숱한세월 동안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거울(古鏡)이라고 합니까?
하고 물었다. 설봉스님이
흠이 생겼구나!
하자 삼성스님이 말하기를
천오백명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말귀도 못 알아들으십니까?
하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노승이 주지하기가 번거로와서"
알겠는가.
비가 연잎을 적시니
향기가 집에 떠돌고
바람은 갈대잎을 흔드는데
눈은 배에 가득하네.
雪峰一日見獼猴乃云, 者獼猴各各背一面古鏡.
三聖便問, 歷劫無名何以彰爲古鏡.
峰云,瑕生也.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話頭也不識.
峰云, 老僧住持事煩.
會마
雨蒸荷葉香浮屋
風攪蘆花雪滿船
佛紀 2532 年 端午節
伽倻山에서
退翁 性徹 씀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 간행사
귀의삼보(歸依三寶)하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이 이 땅에 전해져 겨레의 문화창달에 이바지 하고 나라의 동량을 배출하여 온 지도 천육백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고 연륜이 멀어짐에 따라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선종의 정법은 감추어지고,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의 바른 뜻은 매몰되어 잘못된 주장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이런 선문(禪門)의 병폐를 일찍부터 지적하시고, 그 시정을 위해 몇 해 전에는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禪)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가장요긴한 일인가를 심려해 오시던 차에, 우리들주변에는 선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요한 선서(禪書)들이 너무나 빈곤하다는 사실을 통감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불고조들의 말씀이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언어생활이 다른 요즘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옛 조사스님들의 말씀 가운데 참선(參禪)을 위해 가장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삼십여 종의 저 서들을 가려내어 번역토록 하시고, 그 전집(全集)의 이름을 「선림고경총서(禪林古鏡叢書)」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한문으로 된 말씀들을 한글로 변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때로는 큰스님의 구술(口述)을 옮기고, 때로는 선(禪)의 이치를 여쭈면서 글 밝은 이들에게 번역을 부탁하였습니다. 따라서 선림고경총서 간행불사(刊行佛事)가 겨레 공동의 문화 재산이 되고 후손들에게 부처님의 크고 밝은 가르침을 전하는 이 시대의 훌륭한 유산이 되도록 최선올 다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종사에서 처음 시도하는 번역인만큼 큰스님께서 연로하시어 일일이 감수하실 수 없어 번역에 허물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이 점 널리 이해하시고 잘못된 번역이 있으면 독자들께서 동참하시어 더 완벽한 글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이러한 선림고경총서의 원만한 간행이 조계(曹溪)의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선림(禪林)에 백화(百花)가 난만하고 모든 이들은 자성을 깨쳐 성불(成佛)하길 발원합니다.
佛紀 2532年 端午節
해인사 백련암(海印寺 白蓮庵)
백련선서간행회(白蓮禪書刊行會)
圓潭 和南
〔解題〕
천목 중봉(天目中峰: 1243~1323)스님은 항주(杭州) 전당(錢塘)사람으로 15세에 5계를 받고, 그로부터 「법화경」, 「원각경」, 「금강경」, 「전등록」 등을 두루 열람했다. 후에 천목산(天目山) 사자원(獅子院)에서 고봉원묘(高峰原妙:1238~1295)스님을 참례(參禮)하고 그 이듬해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으시니 달마스님의 29세요, 임제스님의 15세 법손(法孫)이시다. 이로부터 천목산(天目山), 환산(晥山), 금릉(金陵),변산(弁山), 경산(徑山), 육안산(六安山), 중가산(中佳山), 단양(丹陽), 평강(平江), 오강(吳江), 진강(鎭江) 등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 하였다. 스님의 도덕과 법력이 차츰알려져 마침내 인종(仁宗)임금까지도 감화되어 ‘불자국조광혜선사(佛慈國照廣慧禪師)’라 사(賜)하고 금란가사를 보내오기도 했다. 많은 납자들을 제접하다가 영종 3년(英宗:1323)에 시적(示寂)하시니 세수 61이요, 법랍 37하(夏)이시다. 그 후 북정 자적(北庭慈寂)스님에 의해 유저(遺著)로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30권이 편집되었고, 원통 2년(元統: 1334)에 입장(入藏)되었다.
이 「광록」의 내용은 시중(示衆), 소참(小參), 염고(拈古); 송고(頌古), 법어(法語), 서문(書問), 불사(佛寺), 불조찬(佛祖贊), 자찬(自贊), 제발(題跋), 산방야화(山房夜話), 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 능엄징심변견혹문(楞嚴徵心辯見或問), 별전각심(別傳覺心), 금강반야약의(金剛般若略義), 환주가훈(幻住家訓), 의한산시(擬寒山詩), 동어서화(東語西話), 부(賦), 기(記), 설(說), 문(文), 소(疏), 잡저「雜著), 게송(偈頌)등이 실렸다.
이 「광록」은 당토(唐土)에서도 몇번 간행되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77년 불국사선원에서 최초로 빈가장경(頻伽藏經)을 영인하여 보급한 바가 있다.
「광록」을 보아서 알수 있듯이, 중봉스님은 「원각경」, 「능엄경」 등을 비롯한 경론은 물론 「전등록」을 비롯한 선서에도해박했고,유.도(儒.道)를 비롯한 제자서(諸子書), 나아가 시 (時)와 부(賦)에도 뛰어나셨다. 그런데 이 모두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회통되며, 돈오무심(頓悟無心)을 종(宗)으로 삼아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드날리니 달마스님의 바로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 부합된다. 가히 강남(江南)의 고불
(古佛)이라 칭송되었을 만하다.
여기에 번역된「산방야화」는 「광록」제 11권에 해당한다. 저본으로는 빈가장경(頻伽藏經)을 사용했고, 광서 신사(光緖辛巳: 1881)년에 고소각경처(姑蘇刻經處)에서 간행된 판본을 참고로 하였다.
「산방야화」는 거의가 대화체로 이루어졌으며, 참선하는 납자들이 실제수행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입장에서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사찰의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불자(佛子)들이라면 의심해 볼 만한 것들을 밀도있고 설득력있게 풀어 놓았다. 특히 생사의 문제는 다른 사람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몸소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간절하게 일러주고 있다.
끝으로 스님의 임종게를 소개하여 해제를 마친다.
我有一句 分付大衆
更問如何 無本可據
일러두기
1. 문단 나누기는 빈가장경(頻伽藏經)의 과단(科段)을 그대로 따랐고, 그 문단에 대한 제목은 독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밸련선서간행회’에서 임의로 붙였다.
2. 한글 표기를 주로 했으나 전문용어는 한문을 괄호 속에 쓰기로 했다.
3. 인명의 생존연대는 「선학대사전」을 참고로 했다
4. 주(註)는 모두 번역과정에서 붙인 것이며, 그 항목 및 설명을 최소한으로 하려하였다.
5. 사라져가는 자료의 보존 및 필요한 독자들을 위해, 광서신사(光緖辛巳:1881)년 고소각경처(姑蘇刻經處)에서 출판된 판본을 부록으로 실었다.
山房夜話
山房夜話 차례
․선림고경(禪林古鏡)에 씀-退翁 性徹
․선림고경총서간행사(禪林古鏡叢書刊行辭)
山房夜話 上
태식법(胎息法)과 달마스님의 선(禪)은 동일합니까?/14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참뜻은 무엇입니까?/17
영가(永嘉)스님의 선과 달마스님의 선은 동일합니까?/19
교종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달마스님의 선은 다릅니까?/22
영명스님은 왜 여러 가지 수행을 말했습니까?/28
선종에서 깨달음의 단계가 있습니까?/31
언어나 문자로도 견성을 할 수 있습니까?/32
염불이 참선보다 더 효과적입니까?/38
왜 5가(五家)로 선풍이 분열됐습니까?/42
공안(公案)의 뜻과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45
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50
山房夜話 中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까?/58
방편이나 점수로도 깨달을 수 있습니까?/64
참선했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다른 방편을 써도 됩니까?/66
참선을 하는데 있어 마음 자세는 무엇입니까?/70
혼침과 산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75
참선을 어느 정도 했을 때 주의할 사항은 무엇입니까?/78
깨달은 뒤에도 점수(漸修)할 필요가 있습니까?/80
3학을 배워 3독을 끊어야 합니까?/82
선업을 쌓으면 도(道)를 얻을 수 있습니까?/85
선․악의 참된 뜻은 무엇입니까?/86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참선은 어떤 관계입니까?/87
「벽암록」으로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습니까?/89
선사들도 계율을 지켜야 됩니까?/93
수행과 신통력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97
요즈음 스님들에게는 왜 신통력이 없습니까?/100
山房夜話 下
도대체 앎「知」이란 무엇입니까?/104
세상사가 수행에 방해가 됩니까?/107
주지의 소임은 무엇입니까?/111
명예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114
후진 교화에 대한 처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119
공(公)과 사(私)는 어떻게 다릅니까?/120
제자들을 지도하는데 위엄이 필요합니까?/126
불법과 외호중(外護衆)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129
사찰의 살림살이하는 법은 무엇입니까?/130
설법하는 형식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132
깨달은 스님마다 그 행적이 왜 다릅니까?/135
임제스님의 법손들만이 번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36
깨달은 내용을 설법할 수 있습니까?/139
열반하는 모습으로 도의 깊이를 따질 수 있습니까?/141
이제껏 스님의 말씀도 사구(死句)가 아닙니까?/144
* 부록 山房夜話原文
山房夜話 上
태식법(胎息法)과 달마스님의 선(禪)은 동일합니까?
내가 깊은 산속에 살고 있을 때에 흘연히 어떤 객승이 문앞을 지나다가, 내 방에 들어와 서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날 따라 산월(山月)이 휘영청 밝고, 창문이 대낮처럼 훤했다. 이 때에 객승이 내게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읍니다. 의학(義學)들이 6바라밀의 하나인 선정(禪定)의 '선(禪)'과 달마스님께서 단독으로 후세에 전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을 동일한것이라 합니다. 즉 달마스님께서는 일찌기 태식론(胎息論)이라교 하는 수행빙씹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제8식이 포태(胞胎)에 머물 때에는 오직 한 호흡에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태식(胎息)이라고 한다'는 학설을 자세하게 인용하여, 불교에서 말하는선정(禪定)도 한 호흡에 의지하여 안주하니, 이런 점에서 태식벅(胎息法)과 서로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드디어는 그 학설을 아주복잡하게 하여, 달마스님의 선(禪)과는 다르게 2승의 선정〔二乘禪定〕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던데요. 스님 생각은어떠신지요?
나는 대답했다.
“이것은 비방하는 말입니다. 달미스님이 전한 선〔直指之禪〕을 모르는 것입니다.
4선8정〔四禪八定〕밖에는 달리 어떤 선(禪)도 있을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달마스님이 멀리 인도땅으로부터 27조(二十祖)를 계승하여 '부처님의 가장 핵심되는 가르침이 바로 선(禪)이다'고 한 말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달마스님이 전하신 선(禪)을 지칭하는 이름은 매우 많습니다. 어떤 때에는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고도 하고 혹은 제일의선(第一義禪)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2승외도(二乘外道)의 4선8정(四禪八定)과는 실로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합니다 달마스님의 선(禪)은 여러 경전에서 주장하는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점수(漸修)하여 깨달은 내용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경험으로 이해한 것에
도 의지하지 않으며, 그 밖의 어떠한 방편으로도 달마의 선 (禪)에 가까이 갈 수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근기가 뛰어난 중생만이 깨달음의 싹〔佛種〕읽을 문득 틔워서, 단계를 거치지 않고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근본자리〔總持〕를 체득합니다.
이런 다음부터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잠자기도하고, 때로는 세상일에 뛰어들어 종횡무진하게 인생살이〔常情〕를 말하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語黙卷舒〕에 고정된 형식을 두지 않는데, 어찌 이른바 선정(禪定)이니 태식법 (胎息法)이니 하는등 등의 고정된 형식을 주장했겠읍니까! 대체로 달마스님은 상징에 불과한 문자(文字)를 매개로 하지 않고 사람의 본심을 바로 가리켰던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 여섯 대를 거쳐 6조혜능(六祖慧能)스님께 전해졌읍니다. 혜능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바로 사람의 본성을 가리켰다〔直指人心〕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잘못이다'라고 했읍니다. 그러니 따로 싱징에 불과한 언어나 문자 로써 전해줄 그 무엇이 있겠옵니까 !
요즈음 항간에는 태식론(胎息論)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이
는 어느 망령된 무리들이 달마스님을 모함하려고 그턴 것입니다. 참으로 애석한 현상입니다. 더구나 태식론(胎息論)이 퍼진 뒤로부터 달마스님의 본 뜻을 속이려는 무려들은 그 학설을 좇아서 서로를 그릇되게 만들었읍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달마 스님을 속인 것이라키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속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팽생 동안 설법하신 내용은, 실로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스스로 속아 허망하게 자신을 속박하여 끌내는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꼴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법〔心法〕을보여,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것을막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그마음의 법〔心法〕때문에 스스로를 속인다면, 어떤 말을 듣더라도 속아넘어 가고 말 것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참뜻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선(i;)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부르는데, 정말 따로 전할 만한 이치가 있는지요? 의학(義學)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이론을 복잡하게 하여 결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나는 대답했다 .
"의학(義學)들이 개념과 구조를 분석하는 데에만 노력을 하지, 그렇게 분석을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읍니다. 그러나그렇게 분석하는 이유를 철저하게 알기만 하면 '달리 무엇을 전한다〔別傳〕'라는 얘기는 우스운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네 종파가 모두 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함께 전했으므로 어느 한 종파도 빠뜨려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같은 내용을 말씀하셨읍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씀하시기를'오직 1불승(一佛乘)일 뿐 2승(二乘)도 3승(三乘)도 없다'라고 하셨는데, 네 종파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 굳이 네 종파로 나눈 이유는각각의 전문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임의로 그렇게 한것입니다. 따료. 1불승(一乘佛)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4계절이 모여서 1년(一年)이 되므로, 개념적으로는 분명하게 춘.하.추.동으로 구별할 수 있읍니다. 그러면서도 구별지을수 없는 것은 만물을 기르는 공덕의 근원인 것과 같습니다. 밀종(密宗)은 봄에 해당하고, 천태 (天台).현수(賢首). 자은(慈恩) 등의 교종(敎宗)은 여름에 해당하고, 남산 율종(律宗)은 가을에 해당하고 달마스님외 선(禪)은 겨울에 해당합니다. 이치상으로 따져보면 선종(禪宗)이 다른 교종(敎宗)의 별전(別傳)인 줄만 알고 그 반대로 교종이 선종의 별전인 줄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있읍니다.
요약해서 말해보겠읍니다. 밀종은 부처님께서 큰 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하시는 마음을 선양했으며, 교종은 부처님께서 큰 지혜로써 중생들의 불성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며, 율종은 부처님께서 단아하고 엄숙한 몸기짐으로써 훌륭한 실천의 표본을 선양한 것입니다. 끝으로 선종은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뚜렷한 마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마치 4계절을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과 흡사합니다. 혼동해서는 안된다면 따로 전한 것〔別傳〕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객승은 또 이렇게 질문을 했다.
"선종을 제외한 세 종파에서는 별전〔別傳〕을 말하지 않는데, 오직 선종에서만 유난히 별전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털 수밖에 없읍니다. 모든 종파에서는 다 깨달음예 들어가는 출입문이 있으며, 배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러나선종만은 안으로는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고, 밖으로도 배움과 점진적인 수행을 필요로 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이 탕탕합니다.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요리조리 따지면 벌써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사 몸 전체로 깨닫는다 해도 도리어 어리석은 짓일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별전 속에서 또 다른 별전을 찾는 격입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고 좋은 말〔馬〕을 찾으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선의 근본을 알겠 읍니까! 그러니 선(禪)에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놀라더라도 전혀 이상촬 것이 없읍니다.”
영가(永嘉)스님의 선과 달마스님의 선은 동일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가(永嘉: 665~713)스님은 '마음을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하는 참선을 하도록 해야지, 잡다한 생각에 흔미하게 머무는것은참선하는이돌의 큰병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영가스님의 이 말씀은 달마스님이 전한 선(禪)과는 어떤 관계기 있는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영가집 (永嘉集)」에서 10편(十篇)의 대지 (大指)로써 점수(漸修)하여 깨닫는다는 말들은, 거의가 지관법문(止觀法門)의 방법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처음은 사념(思念)을 쉬어 6진(六塵)을 쉬는 것이며, 다음은 대상〔境〕과 인식작용〔智〕을 모두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로 모아놓은 관심십문(觀心十門)은 아주 현묘(玄妙)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깊이 통달할수 있도록 했읍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은 사람들에게 오직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취하게 했을 뿐입니다. 마음이 밝아지기만 하면, 마치 주인이 자기 집에 돌아와 마음대로 활동하듯이, 복잡히게 여러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은 것은 모두 적절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마스님이 제자 신광(神光)스님을 가르칠 때에,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라고 했을 뿐, 그 밖에 다른 말을 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읍니다. 정말로 진실하게 마음속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점수(漸修})하여 수행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소리는,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이런 과오를 어찌 영가스님만이 범했겠습니까! 천태스님의 3관(三觀)과 현수스님의 화엄 4법계관(華嚴四法界觀)도 이 마음의 이치률 언어적인 이론으로써 자세하게 풀어놓았습니다. 비록 과거의 부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시더라도, 이 두 스님들 보다 마음의 법을 이론적으로 자세히 밝혀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달마스님과 다른 점은 대체로 언어적인 이론을 사용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즉「원각경(圓覺經)」에서 3관(三觀)으로써 서로 분류하여 25륜(二十五輪)」을 심은 경우와 같고, 「능엄경(楞嚴經)」에서 18계(十八界)와 7대성증(七大性證)으로써 25원통(二十五圓通)을 삼은 경우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어찌 이 두 경전에만 나왔겠읍니까! 다른 경전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경전에서 늘어놓은, 닦아서 증득하는 방런〔修證法門〕을 다 섭렵했다 하더라도,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편 복잡 하게 언어적인 이론을 늘어놓으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달마스님의 선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가부처님과조시의 가르침에 대해서 같다는 생각도 할수 없거늘, 어찌 다르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읍니까! 당신은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총지(總持) 자체는 문자가 아니나,문자로써 총지를 밝혀낸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총지 자체는 문자가 아니라는 입장이, 비로 달마스님외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입니다. 반면에 문자를 이용하여 총지를 밝힌다는 입장이 여러 교종의 이론들인 것입니다. 또한 달마스님의 가르침이 교종과 다른 이유는, 특이한 것을 좋아하고 주관적인 자기집착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최후로 대가섭(大迦葉))에게만 유일하게 전해주신 심법(心法)을 달마스님이 그대로 계승하신것 입니다. 그러나 대가섭에게 유일하게 전해주신 가르침은 물론 대가섭만이 소유한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함께 소유한 신령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자비심을 내어 중생들을 제도하실 때 에,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알맞게 하신 것입니다. 이른바 대 소(大小), 편.원(偏圓),동.이(同異), 현.밀(顯密)의 방편을 쓰신 것입니다.”
교종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달마스님의 선은 다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이런 말들이 있읍니다. '교종의 여러가지 언설(言說)과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은 서로 같다'라고 합니다. 즉「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일체법이 그대로 마음 속에 있는 자성(自性)임을 알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 「법회경(法華經)」에서 말한, '이 법은 사량분별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경우와,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 '모습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와,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도 그 증거입니다. 또한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한 이것이 헛꽃〔空華〕인 줄 알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며, 또 몸과 마음도 생사의 윤회를 받지 않는다고한 경우와,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한'6근(六根)과 6진(六塵)이 같은근원이므로 속박과 해탈이 둘이 아니다'라고 한경우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밖에도 여러 경전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는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교(敎)와 선(禪)의 뜻이 같은 줄을 알게 되었읍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문자를 사용하여서 총지(總持)를 밝힌 것이라고 진실로 자기 마음 깊이 한번 이라도 깨달아보지 못하편, 부질없이 약(藥)만을 늘어놓을 뿐 병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한 번이라도 본성에 계합하여 증오한 자라면 어찌 대승경론의 귀절들만이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대승경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찮은 이론과 바람소리, 빗빙울소리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달마스님이 전한,바로 기리키는 선〔直指法門〕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만약 언어와 형상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하고,다만 대승경론의 서로 그럴듯한 말만을 기억해 둔다면 절대로깨달을 수 없읍니다. 옛사람들이 말씀한 '마음밖의 것에 의지하여 깨달으려 한다면 스스로가 깨닫는 길을 막는 꼴이 된다'라고 한 것과, 또 '금가루가 눈에 들어간 것처럼 그 자체로는 값 나가고 보배로울지 모르지만, 눈에는 이로울것이 없다'와같은 비유가 꼭들어 맞습니다. 참선하는 납자들은 이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서 스스로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찌 경전을 통한 가르침만이 유독히 달마스님외 바로가리키는 선〔直指之禪〕과 일치하지 않겠읍니까? 보통 선(禪)을 한다는 부류들 속에서도 그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즉 2조(二祖) 혜가(慧可) 스님의 안심(安心)과 3조(三祖)승찬(僧璨) 스님의 참죄(懺罪)와 남악(南嶽)스님의 기왓장 갈기〔磨전〕와, 청원(靑原)스님의 수족(垂足)으로부터 비마〔秘魔〕스님의 나무집게〔擎叉〕와 설봉(雪峰)스님의 공 굴리기〔곤迷〕와 덕산(德山)스님의 매질〔棒〕과 임제스님의 할(喝)에 이르기까지, 1,700공안은 물론 모든 기연(機緣)을 불립문자교외별전(不立文字敎外別傳)의 입장에서 모두 비판했읍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깨닫는데 어떤 것이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만일 육신의 굴레를 탁 벗어나지 못하고, 알음알이〔情意識〕를 가지고 깨달으려 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름이 국수그릇에 들어간 것과 같으며 온갖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 같다'는 비유와, 또 '제호(醍호)의 최고 가는 맛은 세상의 제일이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도리어 독약이 된다'는 비유와, 같흔은 경우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는선〔直指法門〕에는 마음을 이용하여 들어갈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생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 자리는 발들여 놓을 틈도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곳입니다. 이 자리는 친히 자신의 본성을 향하여 미끄러지듯 한걸음에 성큼 밑바닥까지 쑥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침 밸으며 팔 흔드는 등의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가 대상에 관계없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사자가 친구를 구하지 않는 것과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1,700공안이, 마치 여우가 흘린 침에 잡다한 독이 들어 있는것처럼, 쓸데없는 소리인줄을 알게 됩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바깔 경계에 휘둘리리요.
애석합니다! 때로 총명하다고 자처하는 무리들이 스스로깨
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밤낮으로 잡다한 독구덩이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힛된 짓을 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향상(向上)이니 향하(向下)이니, 전제 (全提)니 반제(半提)니, 최초(最初)니 말후(末後)니, 정안(正按)이니 방고(旁敲)니, 조용(照用), 주빈(主賓), 종탈(縱奪), 사활(死活) 등등으로 억지로쓸데없는 힛된 이론만 늘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자기 종파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받들어, 후인들을 현혹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선배들의 문장과 이론만을 비판 검토하여 평가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선배의 말씀은 '전제(全提)와 향상(向上)이기 때문에 결가지는 모두 잘라버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신기하고 교묘하여 고금을 통하여 제일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며, 어떤 선배의 말씀은 '올바른 방법이기는 하나 죽은 선〔死禪〕이기 때문에 거칠다'라는 등등으로, 수만 가지로 비교하고 판단을 나름대로 내립니다. 그러나 크게 통달한 선배들이라면 심장이 천 갈래 만같래 찢어지더라도 가슴 속에 한 물건도 남여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임제(?~867)스님은 외물(外物)을 대할때에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집어들었지, 애초부터 이리 저리 궁리하여 선택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대로 손을 놀리는 것이 우뢰와 번개 같았읍니다. 그러나 어찌 자취나 이유를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찾을 수 있었다면 금강왕보검 (金剛王寶劍)이 떠나버린 지가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어찌 사량분별에 읽매여 선사들의 빼어난 기연〔峻機〕을 회롱하고 교묘한 말을 꾸며서 후배들을 부채질하여 유혹할 수 있겠읍니까! 더구나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주장을 떠받들도록 유혹할수 있겠읍니까 !
또 선배들이 장대방을 근기에 알맞게 지도할 때에, 그 내용을 추.세(추 細), 현.밀(顯密), 광.략(廣略)등으로 다르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드 진실한 마음에서 그런것이지 애초부터 조작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커다란 범종과 북이 사람이 두들기는 대로 소리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소리의 대소와 맑거나 흐린 것은 범종이나 북의 성능에 따라 다릅니다. 그런데 범종이나 북의 성능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거기에다 눈꼽만큼이라도 다른 소리를 첨가시키면 그 고유의 음색을 잃고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즈음 선(禪)을 한다는 작자들은 그저 큰 책상머리에나 앉아서 이리저리 연구하여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읍니다. 그리하여 여러 스님들이 말한 요점을 모으고 간추려서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혹은 여러 스님들의 잡다한이야기들을 모아서 이것으로써 얘깃거리를 삼기도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선을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다른사람의 속박을 풀어주기는커념, 끌내는 자신의 진면목을 잃고 나아가자 신의 도안(道眼)마저도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잘못 수행하여 놓고도 자기들끼리 서로서로 추종하고 홍상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 밝흔 종사들의 큰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런데 어찌 총림(叢林)을 세워서 법도를 융성시킬 수 있겠읍니까!
세존이 세상에 출현하시고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오신 목적을 살펴보니, 모두가 사람의 속박을 풀어 주려고 그런 것이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애초부터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했읍니다. 그러고도 자기 나름대로 터득한 본래 청정한 경지를 바탕으로 더더욱 허망하게 수많은 이론들에 오염 되고 말았읍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발을 디딜곳 마저도 없게 되었읍니다. 부모를 다버리고 출가하여 스승에 의지하여 도를 배우면서도, 출가 이전의 번뇌를 씻어버리지 못했읍니다 게다가 쓸데없는 허다한 이론을 거기에다 첨가하여, 자신의 본심마저도 점점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었읍니다. 참으로 가엾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선배 스승들이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세상에 나왔읍니다. 그리하여 기연을 토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셨읍니다. 마치 취모검(吹毛劍)처럼 저네들의 병든 부분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생사의 윤희를 벗어나게 했읍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자비심으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한것입니다. 어찌 자신들의 사사로운 명예를 위하여 문호를 준엄하게 높여서 후학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한 일이겠읍니까!
대체로 크게 통달한 선배들도 모두가 처음에는 수행의 방법을 획실하게 알지 못했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이리저리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의심을 풀으려고 노력했읍니다. 흘연히 어려운화두(話頭)에 부딪쳐서 확실히 깨치지 못하편, 마치 따가운 밤송이률 삼킨 듯이 괴로워 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편 원수를 만난 것 처럼 용맹스럽게 정진하기도 했읍니다. 고민고민하느라 추위와 더위도 모두 견디고, 잠자고 먹는 일마저도 잊어버렸읍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한순간 회두률 놓지 않았으니, 화두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쉽게 풀어줄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읍니다. 물론 문자나 언어에서 찾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읍니다. 오로지 그 침현 기연〔眞機〕을 스스로 드러내서 의심덩어리를 모조리 풀어버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각 종문(宗門)이 생긴 뒤부터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치고 이렇게 하지 않은 사람은아무도없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걸음걸이가 걸으로 보면 느려보이나, 그 힘은 마치 사자가 여러 동물들을 놀라게 하여 도망치게 하는것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각 종문에서는 위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하여 수행의 방법을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영명스님은 왜 여러가지 수행을 말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명 (永明 : 904~975)스님은 「종경록(宗鏡錄)」100권을 저술하고, 대승경론을 광대하게 인용하여 우리 달마스님의 바로 가리키신 선〔直指之禪〕과 일치시켰읍니다. 비록그 뜻은 훌륭하다고 하겠지만, 어쩌면 언어에 의존하여 연구하고 의리(義理)를 해석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와서, 바로 가리키는 가르침〔直指之道〕이 여섯 번 전수되어 6조 혜능 스님에게 이르렀읍니다. 또 6조스님으로부터 아홉번 전수되어 법안(法眼: 885~958)스님에게 이르렀고, 법안스님으로부터 또 2대(代)가 흘러 영명스님에게 전수되었읍니다. 그 사이에 깨달은 조사들이 계속 배출되어 고금을 밝게 비추었읍니다. 그리하여 교학(敎學)을 연구하는 3장(三藏)학자들도 달마스님이 세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없읍니다. 영명스님께서 자세하게 경전을 연구하고 한데 묶어서 변론해 놓은것이 바로 「종경록」입니다. 「종경록」은 어느 모로 보더라도 그 전개가 자유자재하고,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도의 근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문자를 사용하여 도를 밝혀놓은 총지문(總持門)인 것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3장(三藏)을 연구하는 교종의 학자들이 달마스님과그 제자들을 불제자가 아니라고 비난하지 못하게 되었읍니다.
「종경록」과 명교(明敎: 1007~1072)스님이 저술한 「보교편(補敎編」의 두 책은 모두가 수백명의 사상을 정교하게 검토하고, 그 밖의 서적들을 널리 연구해서 만든것입니다. 때문에 이 두 책은 부처님의 진실한 자비를 선양하고 유학자(儒學者)들의 계속되는 질투를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두 책이야말로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을 호위하는 성벽에 해당합니다. 혹자들이 이 책을 보고 말귀절이나 따지고 의리따위나 해석했다는 꼬투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정말로 두 스님들의 진실된 정성과 깊고깊은 이해가 없었다면, 그렇게 비슷하게 흉내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영명스님께서는 또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이 「종경록」의 학설과는 서로 주장하는 바가다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저술한 책인데도 서로 모순되는 점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음은 모든 선(善)의 근본입니다. 「종경록」에서는 여러 선(善)을 모아서 한 마음으로 귀결시켰고, 「만선동귀집」에서는 한 마음을 풀어 여러 선(善)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상으토 보면 두 책의 이론이 동일한 것입니다. 영명스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온, 대체로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깨닫지도 못한 채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하지 않는 실태를 지도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3장(三藏)을 연구하는 교학자들이, 선가(禪家)에서는 여러 가지 수행을 두루 통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을 막으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책에서 자세하게 여러 가지의 수행방법을 밝힌 것은 그러고 싶어서 그런것은 아닙니다. 고금을 통하여 많은 스승들이 있지만 어찌 영명스님을 빼놓을 수가 있겠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선가(禪家)에서도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해야한다고 가르치
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달마스님의 문하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밝히는 것만을 으뜸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 마음이 밝혀지기만 하면, 갖가지의 수행을 한다느니, 아니면 안한다느니 하는 것조차따질것도 없읍니다. 혹 수행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수행하는 주체와 또 수행의 대상에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에 휘둘리어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는 등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의 정체를 확연히 알지 못하편 여러 가지의 수행을 한다 해도 허망하고, 설사 수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참선하는 이 납자들은 마음 밝히는 일을 무엇보다 으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만행을 해도 되는 것입니다.”
선종에도 깨달음의 단계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10지(十地)의 단계와 선(禪)은 어떤 관계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10지의 단계에 올라가야만 신통을 부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입장에서 10지의 등급을 나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말씀하시기를 '10지(十地)도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취와 같아서, 본래가 공(空)하다'라고 했습니다. 무릇 대승보살치고 10지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읍니다. 그렇다고 그것만을 굳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달마스님은 오직 견성(見性)이 성불(成佛)이라고 말했을 뿐 그 밖의 수행 단계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달마스님의 선(禪)은 모든 부처님들의 심종(心宗)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원돈상승(圓頓上乘)’의 중생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 점차로 깨달아진다고 말한다면 이미 바른 가르침이 될 수기" 없읍니다. 왜냐하면 정법안장(正法眼藏)으로써 수많은 중생들을 관찰하면 모두가 본래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어찌 견성(見性)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있겠습니까? 깨달을 것조차 없는데 무슨 10지 따위의 깨달음의 단계를 설정하겠읍니까?"
언어나 문자로도 견성을 할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명의 거친 풀을 헤쳐버리고, 조사의 가풍을 우러러보는〔撥草瞻風〕이유는 오직 견성을 하려고 그런것이다'라고 했읍니다. 또 부대사(傳大士: 497~569)도 말하기를 '다만 말소리를 막은것도 견성성불을 도모하려고 그런 것이다'라고 했읍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따로 견성하는 이치가있읍니까? 만약 없다면 납자(衲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령 단펀적으로 견성(見性)을 말한다면 옛시람들이 깨달
은 오묘한 이치를 두루 설명한다 해도 수행에 장애가 될 것은 없읍니다. 그러나 처음이 잘못되면, 뒤로 가편 갈수록 깨달음에서 더더욱 멀어지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대체로 견성의 이치는 말로써 표현할수 없으며, 생각으로 알수가 없으며, 분별할수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작용은 아주 위대하고 그것의 본체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대들이 한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를 가지고 있으면, 본체를 마주 하더라도 계합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은,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치고 어느 누구인들 견성을 말하지 않는자가 있겠읍니?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견성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있는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틀린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교학에서 말하는 '법(法)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말을 억지로 끌어들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읍니다.
여러분들에게 다시 말하겠습니다. 말로하면 말이 옳지만깨달음이란 깨달아야만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견성이란,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깨달음에서는 멀어져 가고 맙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명근(命根)이 끊어지고 주체와 객체가 없어진 자리에서 깨달은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5음(五陰).6식(六識) 따위에 의지하여 알음알이 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로 할 때에는 견성한 듯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보면 미혹한것이 아닐 수 없읍니다. 다시는 그대의 무명과 사망(邪妄)이 멋대로 발생하는대로 지껄이지 마십시요. 말할 때에는 엄연히 두개의 본성이 있는듯하니 어찌 일관성 있게 생각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견성을 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일관성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것조차 인정되지 않거늘, 하물며 일관성이 없는 것은 말 할 것도 없읍니다.
꼭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두 가지 허물과 착오가 있읍니다. 첫째는 자기가 발심하여 도를 배울 때에 언어나 문자로써 도를 통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애초부터 결단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확실히 밝히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스승이 잘못 되어 제자외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천부적으로 타고난 재주가 약간 있는 것만을 보고서 교묘한 방편만을 가르칠 뿐, 결코 마음을 바르게 갖도록 제자를 가르치지는 못한 것입니다. 다만 한결같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卽心是佛〕'와 '물질 그 자체에서 마음을 밝힌다〔卽色明心〕'는 등의 그럴 듯한 회두로서 스승과 제자가 서로서로 속고속이는 것입니다. 다만 스승은 자기가 체험한 경지로 이끌어 제자가 언어나 문자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선림(禪林)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서 한 가풍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원각경」이나 「능엄경」에서 이네들의 잘못된 견해를 꾸짖고 나무라셨습니다. 대체로 성인께서는 말세의 중생들이 이런 허망한 잘못이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처럼 문답을 자세하게 베풀어 그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치도록 한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언어나 문자로써 견성을 하려고 합니까? 그러다가 홀연히 바른 안목을 가진 수행자가 나타나 그것이 잘못됐다고 손을 저어 나무라기라도 하면, 마음 속에는갖가지 의심의 물결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나아가 문득 꾸짖고 배척하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당신이 정말로 견성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언어나 문자를 싹 쓸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털끝 만큼이라도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으면 이야말로 지독한 독이 심장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사 부처님이라도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참선하는 납자(衲子)가 이렇게 잘못된 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읍니다. 첫째는 스승의 잘못이고, 둘째는 자기 스스로가 언어나 문자로써 알음알이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설사 석가과 미륵부처님께서 선도(禪道)와 불법(佛法)을직접 당신의 허파와 간장에 부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에 끄달려서는 안됩니다. 언어가 끊어진 바로 근본 자리〔一句子〕를 반조해 보면 몸속에 깊숙이 배어버린 독소를 모두 토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인들 어찌 이 나쁜 독을 받이들이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바른 견해〔正見〕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도 잘못된 스승에게 고여 넘어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선(禪)을 알음알이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무심코 던지는 한 토막의 비유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당신에게 1,700공안을 일시에 뚫어버릴 수 있도록 해주더라도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뿐더러, 차라리 일생동안 선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만도 못합니다 이런 내용을 당신이 이해 한다면, 향엄(香嚴)스님께서 지난날 위산(위山)스님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말문이 막혀, 남양 땅에 있는 암자로초 피해가 고생했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아난이 능엄회증다(楞嚴會中)에서 슬피 우느라고 애쓰지 않아도 됐으리란 것을 알수 있읍니다. 그대는 상대의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줄을 알아야합니다. 가령 깨달은 내용을 정확하게 가져와서 주장하더라도, 이는 벌써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량분별〔心鏡識〕로써 그럴듯한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여, 허망하게도 눈앞에 나타난 소소령령(昭昭靈靈)한 허깨비를 주인공이라고 잘못 알고 보배처럼 아끼며 가슴에 새겨두고 있읍니다. 실로 미혹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미혹한사람이라 하겠읍니다. 이것을 오래도록 고치지 않으면, 훗날에는 반야(般若)를 잘못 말했다는 과보를 받을 것이며, 가까이는 죽는 마당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옛날 혜충국사(慧忠國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요즈음 남방
의 불법이 크게 변해버렸다. 그들은 4대신(四大身)속에 신령한 성품이 들어 있어 불생불멸한다고 한다. 또 이 4대(四大)가 파괴되더라도 이 성품은 파괴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견해는 인도의 외도(外道)들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읍니다. 또 장사(長沙)스님 같은 분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을 식별하지 못하고 그저 옛 사람들이 말해놓은 신령한 말만을 좇는다'라고 했읍니다 이것은 요즈음 수행자들이 6진(六塵)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그림자를 자기의 참마음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풍조를 지적한 것입니다. 즉 「능엄경」에서 말하는 '백천(百千)의 큰 바다는 알지도 못하고 한 방울의 물거품으로 전체의 바닷물을 알려고한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또 진여(眞如)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무리들이 말하기를, '시방세계(十方世界)가 그대로 바로 나〔我〕이다. 이 성품은 허공을 둘러싸고 온 법계를 두루했으며 고금과 범성(凡聖)을 가릴 것 없이 두루 있으며 삼라만상에 가득하다'라고 말들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옛사람이 말한, '한 줄기의 풀을 들고 이것이 장육금신(丈六金身)이다’라 한 것과, 또 '한 털끝마다 부처님 나라〔寶王刹〕가 나타난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자키 주장의 근거로 삼
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음식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역시 배는고픈 것이며, 의복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추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어찌 하겠습니까? 모름지기 깨달음이란 직접 스스보 겪어봐야만 됩니다. 또한 설사 그대가 직접 깨달아 봤다 하더라도 본색종장(本色宗匠)을 만나서, 그대가 깨달았다는 그 자취마저도 싹 쓸어버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알음알이가 도리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찌르고, 좋은 약을 고집하다가 도리어 병을 얻고 만다'는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언어나문자로 통할 수 있고 의식으로 도달하여 알 수 있는 것이겠읍니까?
한량없이 오랜 세월 이전부터 흘러온 생사의 굴레를 금일에 완전하게 끊어머리고, 또 그대가 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단박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 작은 근기, 천박한 재주로써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정말로 그대의 미혹을 더욱 부채질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들이 생사의 굴레에서 헤매이는 것이 너무나도. 애통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참선을 그저 말로 만하려는 자들이 얼굴을 돌려서 나에게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할 말이 있겠읍니까!"
염불이 참선보다 더 효과적입니까?
서귀자(西歸子)라는 스님이 문앞을 지나다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정토(淨土)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생사에서 획실하게 벗어나는 길은 참선하는 것보다 아미타불 염송이 쉬운 듯합니다. 이 까닭은 멀리 계시는 아미타부처님께서 그윽하게 가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이 하는 참선은 잡을것도 없고, 성스러운 힘의 가피를 받을 수 도 없읍니다. 실로 아주 근기가 빼어난 사람들이 한번 듣기만 하면 수천 가지를 깨닫는 정도의 재주가 아니고서는, 참선의 본면목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명 (永明)선사께서도 '참선하는 사람 열 명 중에 아흡 명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라고 걱정하기도 하지 않았읍니까?"
내가 하도 한심하여 대답했다.
"쭛쭛! 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다편 극락정토밖에 따로 참선이 있단 말입니까? 설사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불佛)과 법(法)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야 어찌 불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는 원융한 이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상황의 적절한 방편을 잘 모르고 자신의 견해에만 국집하여, 선철(先哲)을 속이고 비방하는 격입니다.
실로 영명스님께서 참선과 정토를 짝지어 4구게(四句偈)를 만드신 까닭은, 듣는 이의 근기에 알맞게 특별히 방편을 써서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교학(敎學)에서 이른바, '원래는 1승도(一乘道)뿐이지만 방편으로 분별하여 3승도(三乘道)를 설한다‘라고 한뜻과도 같습니다. 장로(長蘆).북간(北磵). 진헐(眞歇).천목(天目)등 여러 스님들이 저술하신 정토에 관한 게송도 모두 말로써 풀어놓은 즉심자성(卽心自性)의 참선입니다. 애초부터 별다른 무엇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사람이 말하기를 ‘동도(東都)의 희법사(曦法師)가 선정(禪定) 속에서 연꽃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연꽃에 원조 본선사(圓照本禪師)의 이름이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달마스님 선법을 정통으로 이은 원조스님으로서 어떻게 연꽃에 이름이 박혀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읍니다'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가서 질문했더니, 원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읍니다. '내가 비록 선문(禪門)에 있었으나 정토신앙을 겸해서 수행했다.' 그 당시에 원조스님께서는 갖가지의 방편으로 찾아와 질문하는 사람들을 지도한 것이지, 어찌 정말로 그랬던 것이겠 읍니까? 미혹한 사람들이 방편으로 그런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참선 말고 따로 정토에 귀의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명스님의 「정토4구게(淨土四句偈」를 변명의 구실로 삼기도 하니, 이것 역시 잘못이 아니겠읍니까 !"
손님이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정토와 침선의 경지가 서로 어떤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요.."
내가 대답했다.
"정토도 마음이며 참선도 또한 마음으로서 본체는 하나이지만 이름을 서로 달리했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명칭에 집착하여 그 본체률 미혹하고, 반면에 깨달은 사람은 그 본체를 알아서 이름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어찌 정토만이 그렇겠 읍니까? 교학(敎學)에서 말하는, '일체의 모든법 (法)이 마음에 싱주한 자성〔卽心自性〕임을 알아야한다'라고 말한 부분과, '삼라만상이 한법〔一心〕에서 나왔다'라고 한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 속의 선(禪)을 깨닫기만 하면 삼계의 만법에 두루한 신령한 근원에 닿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고 진실되어서 전혀 간택할 것이 없읍니다. 그리하여 이미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찌 정토(淨土)니 혹은 예토(穢土)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십만억토를 한걸음에 다가가고 갖 가지의 보배로 온 우주를 그득히 채우기도 합니다. 나아가 한 찰나에 영원한 세월을 맛보아, 그 속에서 비취빛 대나무와 노란 국화가 동시에 피어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큰 바다와 같은 아미타불의 눈이 또록또록 빛나고, 다섯개의 수미산 같은 백호광명(白毫光明)이 곳곳에다 찬란한 빛을 분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늙은 달마는 흘연히 명월주(明月珠)를 잊고, 아미타불도 황금도장날 잃어버릴 것입니다. 선문(禪門)도 군더더기에 불과한 말이며, 정토도 또한 헛된 이름에 불과합니다. 이름이니 본체니 하는 견해도 없어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알음알이가 없어지면, 장육금신(丈六金身)과 한줄기 풀이 어떤 우열이 있겠으며, 삼천대천 세계와 한점의 티끌에 어찌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한결같이 평등한 법문입니다. 실로 참되고 온몸으로 깨달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해탈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참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의 문제를 투철하게 해결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생사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자는 데에 그목적이 있읍니다. 성인들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이지만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한 부분이라도 투철하게 깊숙이 들어가야지, 이것 저것 겸수(兼修)를 해서는 안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思念〕에 얽매인다면 3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윤희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찌 겸수(兼修)가 있을 수가 있겠읍니까? '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수행하지 않고, 참선이 이러니 정토가 저러니 말로만 하면 쓸데없이 생각만 복잡해지고 알음알이만 더더욱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생시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차마 내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5가(五家)로 선풍이 분열됐읍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달마스님이 처음 홀로 전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이 10대(代)를 계속 전승되다가, 후에 분파되어 다섯 종파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달마스님의 말씀 속에 이미 서로 다른 다섯 가지 내용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스승 밑에서 5가(五家)로 분리될 수가 있겠을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말한 5가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섯 부류이지 그 도
(道)가 다섯 종류인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종지를 전수하는 행위를 이름하여 '등불을 전한다〔傳燈〕'고 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정말토 전등의 의미를 알았다면 5가(五家)로 분리된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미로서의 등불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등불에는 새장처럼 생긴 등〔籠燈〕도 있고, 잔등(盞燈)도 있고, 유리등(유離燈)도 있읍니다. 등불이라는 의미에서는 모두 같지만 걸 모양은 모두 다릅니다. 비록 5가(五家)로 분립하여 걸모양이 서로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모두가 생사(生死)의 긴 밤을 밝혀주지 않는 가르침은 없읍니다. 어찌 지금의 5가(五家)만이 그렇겠읍니까?
옛날 달마스님의 한등볼이 네 번 전하여 대의(大醫)스님에 이르러 우두종(牛頭宗)이 설립되었고, 달마스님으로부터 다섯번 전하여 대만(大滿)스님에 이르자 북쪽의 신수(神秀)스님이 한 종파를 설립하였읍니다. 그리고 또 달마스님으로 부터 여섯번 전하여 조계(曹溪)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6조스님 아래로 청원(靑原). 남악(南嶽).하택(荷澤)등의 세 스님은 절대로 그 선풍을 구별짓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이것은 어절 수 없는 것입니다. 대체토 각 종파로 나뉘어서 이리저리 작은 유파(流派)가 만연해졌읍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물도 번창하였으니 이는 곧 나뉘어지지 않아야 할 것을 나눈 꼴이 된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는 5가(五家)는 남악(南嶽). 청원(靑原:?~740) 양 파의 아태에서 서토 파가 갈라져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마치 소용돌이의 물이 넘쳐 거대하게 온세상을 적시듯이 각각 서로의 가풍을 드날렸습니다. 그뒤로 끊임없이 후진들이 배출되어 자기네의 가풍을 하늘끝까지 치켜올리니 드넓기가 끝이 없었읍니다. 그러니 이를 어찌 한눈으르써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득이 5가로 나누지 않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분파된 5가외 차이점을 살펴보니 소속된 인원수뿐만 아니라 각파의 종지(宗旨)도 동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까닭 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같고 약간 다른 점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이 갈다는 것은 달마스님이 전한 한등불〔一燈〕과 동일하다는 것이고, 약간 다르다는 것은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우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위앙종(위仰宗)의 근엄함과, 조동종(曹洞宗)의 자상함과, 임제종(臨濟宗)의 통쾌함과, 운문종(雲門宗)의 고고함과, 법안증(法眼宗)의 간단 명료함이 그것입니다. 이런 차이점 등은 각각 그 종파의 인물들의 천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자지간에 걸음걸이가 서로 닮은것과도 비슷합니다. 쓰는 말과 표현하는 방법이 서토비슷하에 닮는 것은 의도적으토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저절토 서초 닮아지는 것입니다.
가령 당시의 종사(宗師)들이 괜히 서로 다른 것만을 숭상하여, 사사로이 한 가문의 전승(傳承)을 삼고자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잘못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고서야, 불조(佛祖)께서 세상을 비추는 혜명의 등불〔命燈〕을 후세에 전파하고자 했던 본래의 임무를 어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사이에 참선한다는 무리들이 종지(宗旨)에 얽매여 허공을 쯔개려는 듯한 허망한 견해를 일으켜 서로를 비방하고 있읍니다. 이런 꼴을 열반에 드신 5종(五家:오가)의 스님네들이 본다면 어떻게 되겠읍니까? 분명히 열반의 적정(寂定)속에 계시면서도 그 하는 꼴이 냄새나고 더러워서 코를 틀어막을 것이 분명합니.”
공안(公案)의 뜻과 그 기능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닫게 된 계기〔機緣〕를 사람들이 공안(公案)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공안(公案)이라고 한 것은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지를 알 수 있읍니다. 공(公)이란 훌륭한 도(道)를 깨달아 세상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案)이란 성현들께서 그 도(道)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
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것 입니다. 공안(公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機緣〕를 공안(公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읍니다. 그러니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妙旨)에 계합하여, 생사외 굴레를 타파화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시방삼제(十方三世)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지극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읍니다. 마치 독(毒)을 바른 북을 둥둥 울리게 되면 듣는 이는 모두그자리에서 죽는 것과도 갈으며, 큰불구덩이 속에 갓난아기가 들어가면 그대로 타죽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산(靈山)에서 말한 '별전(別傳)'이라는 것도 이를 전한 것이며, 달마스님이 말한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도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 분리되고 5가(五家)로 갈라진 뒤로부터, 모든선지식(善知識)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부처님의 별전(別傳)과 달마스님이 그대로 지적한도리〔直指之道〕를 전하려고 애를 썼으니, 마치 손님이 찾아오면 즉시에 주인이 나오는 것처럼 했읍니다. 우두법융선사에서 마조도일선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안종사들이 입에서 튀어나오는대로 한 말로 번개처럼 즉각에 본성을 드러내주시니, 귀를 기울여 따져볼 겨를조차도 용납하지 않았읍니다. 예를 들면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삼세근〔麻三斤〕', '똥 묻은 막대기〔乾屎궐〕'와 같은 공안(公案)은 사량분별로써는 조금도 말 수 없읍니다. 위와 같은 공안에 부딪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사량분별로는 뚫을 수가 없읍니다. 오직 눈 밝은 사람만이 언어나 문자가 끊어진 자리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읍니다. 한곡조 부르고 거기에 한 곡조 화답하는 것이 마치 공중을 날아가는 새처럼 자취가 없고, 맑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흔적이 전혀 없읍니다. 비록 천 갈래 만갈래 길로 이리저리 방자화게 사량분볕한다 해도 알 수가 없읍니다. 멀리는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인〔拈華示衆〕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또 그밖에 1,700공안(公案)만이 어찌 그러했겠읍니까!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읍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 야지만 알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장로(長老)라는 뜻은 즉 총림(叢林)이라는 관청의 최고 관리자이며, 「전등록」에 실려 있는말씀은 선풍을 드날릴 묘안들을 기록한 공문서입니다. 옛 사람들이 혹은 제자들을 지도 하거나 혹은 대문을 잠그고 수행에 정진하던 여가에, 틈틈이 평석하거나〔拈〕.판단하거나〔判〕.노래하거나〔頌〕. 다른 논지률 펴거나〔別傳〕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 바로 「전들록」입니다. 어찌 보고 들어 따지는 죽은 지혜만을 증장시키고, 끝내는 눈밝은 고승대덕 스님들에게 대들어 실력을 겨루려고 한 말씀이겠습니까? 이렇게 한 이유는 대법(大法)이 장차 피페해지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배들의 지헤의 안목을 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모두 본태의 진면목을 깨닫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공(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안(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에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안(公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情識〕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公)해지고, 생사의 굴레가공(公)해지면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읍니다. 위에서 말한 '불조(佛祖)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라는 뜻은, 중생들이 생사의 번뇌 속에서 제 스스로 꽁꽁 묶여 풀려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과 조시들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상황을 두고 한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자리이지만 할수 없이 중생들을 위하여 말로 표현한 것이며, 형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이치이지만,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형상으로 드러내어서 미혹의 오랏줄이 풀려지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깨달음외 자리에 어찌 언어나 형상을 들먹거릴 수가 있겠읍니까?
세상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불공평한 사건이 생기면, 반드시 관청에서 공정하제 재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이조(吏曹)에서는 공포된 법조문을 근거로 공평하게 재판해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선하는 자가 깨달은 부분이 있으나 제스스로 획신을 못하겠으면 스승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스승은 공안(公案)을 근거로 하여 의심을 풀어줍니다. 공안이란 바로 번뇌망싱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주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런가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밀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읍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아아 ! 슬프도다 ! 미망에 빠진 인간들은 근본자리를 돌볼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총명만을 밑천으로 삼아 요리조리 사량분별만 하여 언어나 문자로 깨달으려 하는구나! 그리하여 끝내는 마음자리를 깨달으려 들지 않습니다. 방(棒)이나 할(喝) 등의, 방편의 채찍으로 몰아대는 마차는 결국 번뇌와 망상이 우거진 숲속에 처박히고, 용(龍)이나 코끼리처럼 훌륭한 조사스님네들의 말씀은 결국 사량분별하는 잘못된 함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량분별하게 되면 그 결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정이 눈가에 넘치고, 취사선택하는 어리석음이 가슴에 가득하여집니다. 옛 스님들이 말한, '제호(醍호)가 도리어 독약이 된다'라는 비유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총림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슬프도다! 이것은 마치 법령을 집행하는 담당관이 법령을 미끼로 삼아 사람들의 뇌물을받아서 호의호식하는 꼴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에 빠지면 아무리 공명정대하게 하려 해도세상이 잘다스려질 까닭이 없습니다.
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조사의 공안(公案)은 본래 참선하는 사람이 외심이 생겨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깨달은 마음자리는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도 같고, 혹은 커다란 북이 두들기는대로 소리가 나듯이, 상대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공안이란 다른 사람의 의심덩어리를 풀어주는 것에 불과윈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중시하지 않으며 한 법도 남들에게 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안이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마지못해 주고받은 짧은 얘기입니다. 그러다 그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을붙인 것입니다. 원래의 공안은 분명한 도리에 근본하였는데, 요즈음 총림이 되어가는 모양을 보니 전혀 처음의 분명한 도리는 없어진 듯합니다. 그리하여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삼세근〔麻三斤〕이다, 혹은 똥 묻은 막대기〔乾屎궐〕이다, 혹은 수미산(須彌山)이다, 혹은 망상 피우지 말라〔莫妄想〕는 등등으로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도(道)가 낮은 사람을 인도하려는 하나의 발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감파(勘婆).화타(話墮).탁발(托鉢).상수(上樹)등등으로 대답하는 것을 도가 높다고 평합니다.
그런가 하면 후학을 제접하는 방편으로 3현(三玄)을 나열
하여 귀결시키기도 하며, 혹은 모든 언어를 과판(科判)하여 4구(四句)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구구절절한 말들을 1,700공안(公案)으로 정리하고,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서 서열을 매기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난 잘 모르겠읍니다. 위와 같이 한 것이 본래 눈밝은. 종사들외 본 뜻인지?"
나는 대답했다.
"조사외 말씀은 아주 공적(空寂)하여서 인위적으로 꾸민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 가는대로 쓴 것이지, 애초부터 사량 분별하여 선택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무릇 모든 것이 달마스님이 흘로 전한 뜻〔單傳之旨〕에 근본을 둡니다. 그러므로 말을하기 시작하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주니, 결코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읍니다.
비유하자면 다름과 같습니다. 달이 하늘에 떠 있지만 동쪽으로 가는 사람이 바라보면 달이 동쪽으로 가는 듯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달을 바라보면 달이 서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그런가하면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자는 '달이 나외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빠져 있는 소견으로 서로 동쪽, 서쪽, 혹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달리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름달이 허공에 뜨면 실로 '동쪽이다','서쪽이다'하는 것도 결국은 움직이지 않는 원래의 자리를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공안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이 생긴 이유는 법〔法〕의 근원을 획실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상대방에 따라 허공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는 비유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선배 종사(宗師)들이 공안을 설명할 때에 혹은 생략하기도 하고, 혹은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언어로 설명하는 본뜻이 혀끝에 있지 않다는 말로써 증거를 삼아 종사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이해한 뜻으초서 종.탈.역.순(縱奪逆順)으로 종횡무진하게 설명하는 정안종사의 말씀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치롤 극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안이 그에 알맞는 도리를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각각 공안마다의 깊이는,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바다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깨달은 정도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계속 들어가면 가장깊은 밑바닥까지 도달할수 있읍니다. 이렇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서 흘연히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바로 이것이 바다였구나라는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 깊은 곳에 몸소 도달해서 한번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가슴 속의 의심덩어리를 집어내어 제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부처인가요? '라고 하자 마조스님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이 공안은 비록 전에 참선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두가 알았다고 지나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그 지극한뜻은 오래 참선한선승(禪僧)이라도 거의가 잘못 알고 있읍니다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이것은 벌써 옆길로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지시하는 당처(當處)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쓱싹 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안의 참뜻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치 교통이 자유로운 십자로(十字路)위에서 그리운 어버이를 만나 달려가듯이, 이리저리 따질 겨를 없이 단박에 깨쳐야 합니다.
혹 어떤 무리들은 전혀 참선도하지 않고, 또 마음자리를 분명히 밝히지도 않고, 생사의 큰 의심덩어리인 번뇌를 절단하지도 않고, 오직 총명한 재주만을 믿고 고금의 문자만을 이리저리 따지고 연구하여, 그저 그럴듯한 언어로 비교하고헤아려서는 고금의 공안을 모두 알았노라고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생사의 근본을 몰랐다는 시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무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하는 솔직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지금까지는 공안의 깊은뜻을 몰랐으나, 어느날엔가 홀연히 신심(信心)을 일으켜 똑 바로 공안을 참구(參究)하기만 하면 명확하게 깨닫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총명하고 영리하기만 하여 머리 속에서만 미리 알아버린 사람은 절대로 다시는 올바른 믿음을 내어서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겁니다. 요즈음 총림에서는 남의 말 듣는 데에 급급하며, 또한 참선하는 이들을 대접하지도 않고 있읍니다.언어나 문자로만 따지는 무리들은, 근본자리에 부딪치게 되면 회두 한 귀절 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듯이 쩔쩔맵니다. 이 무리들이 알음알이로 공안의 뜻을 풀어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물 속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진정한 선객〔本色道流〕은 이와 같은 나쁜 독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우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버립니다. 마치 눈앞에 수만길이나 되는 장벽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공안을 참구하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를 타파합니다. 그러면 백천만 가지 공안의 심천(深淺).난이(難易).동별(同別)이 한꺼번에 뚫려서 자연히 남에게 묻지 않게됩니다.
가령 마음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자키자신에게 되물어 참구하려 하지 않고 끌내 남들이 열어 보여주기를 바란다면, 비록 석가모니부처님과 달마스님이 간과 쓸개를 꺼내어 보여준다 해도, 오히려 그 마음의 눈만을 멀게 할 뿐입니다.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
山房夜話 上 끝
山房夜話 中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인도땅에서 오신 달마스님의 가풍은 매우 엄격해서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버렸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옆길로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수행에(修行)을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마른 고목처럼 방석에 앉아 참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선을 앉아서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선대(先代)의 종지(宗旨)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말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료. 용담(龍潭)스님이 스승인 천황(天皇: 748~807)스님에게 묻기를,'제기 오랫동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제게 심요(心要)를 보여주시지 않았읍니다'라고 하자, 천황스님은,'그대가차를 갖고 오면 나는 차를 받아 마셨고, 그대가 문안을 드리면 나는. 머리릅 끄덕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심요를 열어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자, 용담스님이 드디어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공안은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쉬운것인 듯 하지만 우리 종문(宗門)의 입장에서 보면 옆길로 샌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위산(위山)스님이 향엄(香嚴)스님에게,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자 향엄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위산스님이 설명해주기를 바랬는데, 위산스님이 허락히지 않았읍니다, 그러자 향엄스님은 평소에 공부했던 것을모두 버리고 남양(南陽)땅으로 들어가 한 암자에 머물게 되었읍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갑자기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까지는 수행한다는 티를 내지않고 묵묵히 암자에 기거하면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문제 속에서 살았다고할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깨닫지는 못하고, 많은 세월을 지내고서야 깨달았지만 그가 깨달은 깊은 경지가 달마스님이 전한 경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읍니다. 첫째는 고인들처럼 진실하지 못하고, 둘째는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 그것을 일생의 대사(大事)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랜 세월 동안잘못 익힌 수행 방법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화두를 들기는 하지만, 방석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이것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심신(心身)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때문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겠읍니다. 설사 미륵(彌勒)부처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다 없앨 수 있겠옵니까?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탓 하지 않고 도리어 불법(佛法)이 쇠퇴하고 총림(叢林)의 운이 다했다고 핑계를 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처지는, 훈련을 시켜주는 스승도 없고 일깨워 주는 친구도 없으며, 주거도 불편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으며, 법도도 없고 주위도 시끄럽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수행이 안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나오고부터는 도(道)를 배운다는 사람치고 이것을 구실로 삼지 않는 자자 없었읍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갈고 김매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제 때에 비가오지 않는 것만 탓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가을에 결실이 풍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도를 배우는 사람이 환경의 좋고 나쁨만을 따지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생각이 어지러워지면 환경 탓만 할 뿐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사람이 만겁의 생사 굴레에 얽히고 결박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탓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습니까? 설산(雪山)의 늙은 사문〔석가모니 부처님〕이 만승(萬乘)이나 되는 존귀한 영화를 모두 버리고 6년간이나 얼음위에 누워 고행을 하며 황벽(黃蘗) 나무를 씹으면서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수행하다가 드디어는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또한 부처님 이후 서천(西天)땅의 28조사(二十八祖師) 모두가 바위나 동굴 등에 거처하였옵니다. 혹 세상사에 섞여 있어도 진심(眞心)을 잃지 않고 참다운 수행을 어김없이 해서 모두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했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오고 백장(百丈)스님이 탄생하기 이전에 우두(牛頭)스님이 옆으로 한 가지 나와 남북종(南北宗) 양파로 나뉘어졌읍니다. 그 영향으로 수행자들은, 허리에는낫을 차고 어깨에는 삽을 걸치고는 화전(火田)으로 나가 농사를 지어 직접 밥을 짓고 절구질을 했으며, 너절한 누더기를 걸치고 구걸을 하였읍니다. 철석같은 신심(身心))과 빙상(氷霜)같은 신념으토 불조(佛祖)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한 어깨에 걸머졌읍니다. 그래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야할 곳을 스스로 갔기 때문에 도달한 곳이 언제나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곳에 5산10찰(五山十刹) 같이 으리으리한 거처와, 3현(三玄)이니 5위(五位)니 하는 괴이 하고 복잡한 이론과, 방(放).수(收).살(殺).활(活)의 구별 및 염(염).송(頌).판(判).별(別) 같은 복잡한 이론이 있었겠읍니까?
원래 흠집이 없는옥(玉)은 갈고 닦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연장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목이 처음부터 올바랐던 것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이 총림(叢林)을 건립한 이래로 광대한 전답과 큰 집은 많아졌지만, 수행하는 자세는 퇴보하여 잘못과 허망이 도리어 늘어났읍니다. 그 결과 쓸데없는 기강만 날로 번거로와졌고, 실제로 예의는 나날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미 수백년 전에 선풍(禪風)의 진면목을 제창하신 임제(臨濟).덕산(德山).운문(雲門).진정(眞淨:1025~1102)같은 스님은 분하고도 분한 기상으로 노하여 마치 음란한 여인을 보듯이 꾸짖었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의 근본은 체득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입으로만 깨달으려 애써 결국은 서로률 속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읍니다. 그 사이에 또 삿된 스승이있어 제방(諸方)을 깨우치고 선(禪)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섭공(葉公)이 용(龍)을 좋아하듯 하고, 조창(趙昌)이 화조(花鳥)를 그리듯 사이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섭공과 조창 자신이 잘못되었는데, 더우기 그들의 흉내 따위나 내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진실인 양하는 잘못이 오늘날엔들 없다 하겠읍니까?
이렇게 보건대, 참답게 구하고 실제로 깨달은 인재를 만나는 것이 오늘날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생사의 정망(情妄)과 무명(無明)의 결습(結習)이 끊임없이 일어나 조금도 쉴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열심히 생사를 끊는 듯한 정념(正念)으로, 원수와 적을 만난 듯이 화두(話頭)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生) 두 생(生)을끊임없이 눈을 부릅뜨고 화두를 들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섭공과 조창같은 부류에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증오와 사
랑만 없다면 깨달음이 뚜렷이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한 것과,영가대사(永嘉大師)가,'망상도 제거하지 말고 진실도 구하지말라'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대면서 '이것이 바로 깨닫는 이치인데, 무엇 때문에 한 생(生) 두 생(生)씩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괴롭혀가면서 도를 얻으려 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유행하면서 섭공, 조창같은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고, 끌내는 이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읍니다. 때문에 영가스님이, '범재(法財)를 손상시키고 공턱을 소멸하는 것은 바로 사량분별〔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읍니다. 시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헛되게 사량분별도 따져 이해한 그럴듯한 말들을 영가스님이 통렬하게 비판한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전한것을 만 사람이 진실인 양 전하였으나, 사이비는 어디까지나 사이비지 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그 때문에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선은 성실하게 해야하고 깨달음은 진실하게 깨달아야하니, 염라대왕은 말 많은 것을 개의치 않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진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결코 경솔하게 섭공과조창의 전철을 밟지는 않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東語西話〕참선에 대해 비평한 것은 내 스스로 깨달은 법문(法門)일 뿐이지, 아는 것을 가장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들이 혹 믿어준다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또 믿어주지 않는다교 해서 어찌 노하겠습니까? 또한 믿고 안 믿고는 모두 그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어찌 제가 기뻐하거나 노하겠습니까? 오직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아줄뿐입니다. 혹 허망히 속인다고 나무란다 해도 어찌 싫어하겠옵니까?"
방련이나 점수로도 깨달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으로도 깨닫지 못한다면 다른 방편을 사용해서 깨달을 수 있는지요? 예를들면 점수(漸修)하여 깨닫지 못하면, 향후 세계에서라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다시 깨칠 수 있겠읍니까 !"
나는 말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당사자가 직접 체험해야 하는일입니다. 남물에게 의지해서 될 수도 없는 일이고, 낚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 때문에 미혹에 빠지는 것도 제 스스로 그렇게 단드는 것이고, 깨우침도 반드시 자신에 의해 달성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과 달마대사라 할지라도 그대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요즈은 스승들도 참선하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많이들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근기(根機)에 알맞는 방법을 쓰고, 방편을 자세하게 베풀어 후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들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해야 할 큰 문제로는 삼지 않고, 선(禪)을 신속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고작 방편 속에 쭈그리고 앉아서, 알음알이로 고금의 공안을 통하고서 관문을 뚫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사(生死)라는 기장 크고 견고한 관문은 뚫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통과한 것은 고작 언설(言說)의 관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수행에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자키의 본분을 스스로 해치는 짓입니다. 만약 진실하게 생사대사를 끊으려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비록 달마대사가 세간에 출현해서 모든 불조의 핵심되는 도리를 가져다 8식(八識) 가운데 놓아준다해도, 뿌리까지라도 모두 토해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반드시 본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반푼어치도 다른 사람이 해결해 줄 수 없읍니다. 비록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오직 정념(正念)만을 견고하게 지니고, 살아도 깨달음과 함께 살고, 죽어도같이 죽겠다는 태도로 절대로 알음알이를 갖고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같이 뜻을 지킬 수 있다면 한 생 두 생이 흘렀다 해도 깨닫지 못할까 절대로 근심할 필요가 없읍니다. 개중에는 고요하고 묵묵히 죄선하다가 번뇌 망상이 쉴 때, 문득 그럴듯한 도리를 깨닫게 되면 획철대오 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 경전 속에서 증거를 대고, 마음속에는 그 사이비 도를 간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에 의한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읍니다. 생사문제를 견성(見性)하지 못했으면서도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집착해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깨달았다고 인가(印可)해주길 바라지만, 이것이 결국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또 어떤 무리는 6식(六識)을 자기의 주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리고는 옛 사람이 잘모르고 한말을 끌어다 증거로 삼습니다. 참선을 하더라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자는 생사의 언덕에서 꼼짝도 못할뿐 아니타, 밝은 대낮에도 눈을 부릅뜨고 혹 좋지 못한말이라도 들으면 그냥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 다른 사람이 그를 비방이라도하면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일어나 상대방과 다투면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데, 이런 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평생 도를 배웠으나 깨닫지 못하면, 더 이상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정념(正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미 정념을 잃어버렸다면, 훗날에도 깨달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티끌이나 모래처럼 많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수행을 해도 깨달을 수가 없읍니다, 이것은 좋은 전답을 갖고도 김을 매지 않으며, 오곡이 저절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므로, 이런 사람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읍니다.”
참선했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다른 방편을 써도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평생동안 참선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과보가 있어서 입니까?"
나는 말했다.
"콩을 심은곳에서 삼이나 보리가 나는 법이 없고, 풀뿌리에서는 소나무나 대춘(大春)나무가 돋아나지 않습니다. 참선은 효과가 걸으로 나타나지 않는 공부라고는 하지만, 참구하기만하면 됩니다. 오히려 참구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영명스님이 '참선해도 깨닫지 못하고 배워서도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해도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된다. 그러면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생생토톡 사람몸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 깨달음이 터지기만 하면, 한 가지를 들어서 천 가지를 깨달을 것이다'고 한 것은 모두 진실한 말씀이라 하겠읍니다. 속담에는 '한 조각의 착한 일을 잠시만 닦아도 많은 이익을 얻는다'했고, 부처님 말씀에는 '다섯번만 부처님 명호를 불러도 무수한 보물로 보시한 복보다 훌륭하도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헛된 말들이겠옵니까?
최초에 발심한 동기는 생사대사의 해결 때문이었는데, 2,30년씩 참선을 해서 설사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따로 방편을 구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하지말고, 모든 망한 생각을 끊고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그리고는 참구하는 화두(話頭)만을 향하여 꿋꿋하게 정진하여 살아도 화두와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도록 해야 합니다. 깨닫는데 걸리는 시간이 3생(三生)이니 5생(五生)이니 10생(十生)이니 100세(百世)니 하는 말 따위에는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읍니다. 만일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면 절대로 쉬지 마십시오. 이런 각오만 있다면 일대사(一大事)를 해결치 못할까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세의 중생이 한 순간만이라도 불퇴전할 생각을 하면, 그것이 바로 정각(正覺)이다'고하셨으니, 이 말씀은 참으로 극진하다 하겠읍니다.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처음 발심을해도, 그발심이 온당하질 못합니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 처해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날까만 두려워합니다. 그러다가는 참된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가 버립니다. 이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생각하여 생사대사를 신속히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구 치닫는 생각이 오히려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생사대사를 깨닫겠다는 바른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허망한 생각이 스스로를 가리워버리고 맙니다. 그런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생사대사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생각을 바꾸게 되는데 거기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읍니다.
첫째 부류는 잘난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총명함을 여전히 자랑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러니 스승과 벗이 그의 잘못된 깨달음을 꾸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오직 입으로만 깨달으려 하므로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알음알이〔知解〕에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사이비 반야(般若)로써 6식(六識) 속에서만 허우적거리면서 스스로 획실히 깨달았다고 말하며,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저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듣는 것만 복잡하게 많아질 뿐입니다. 교화의 방편이 쇠퇴하자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둘째 부류는 총명하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매양 스승에게만 의지하는데, 잘 안되면 참선은 효과가 겉으로 드러나는 공부가 아니어서 전혀 영험이 없다고 합니다. 오직 10년 20년을 계속해도 확실한 효과가 없는 것만 한탄스러워 하며, 갑자기 여태껏 해오던 수행법을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염불(念佛)을 가장 빠른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염주만 세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혹은 '일대시교(一代時敎)는 부처님 입으로 선양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참선을했어도 깨닫질 못했으니, 비록 참선하는 것만은 못하다 해도경전을 연구하는 것이 그래도 선인(善因)을 심는 것이다'하며, 경전을 읽는 것이 힛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만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숨어서 더러운 얼굴로 초의(草衣)를 입고 직접 일을 하며 밥을 지으며 육신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혹은 비밀스런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죄와 허물들을 침회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바른 믿음〔正信〕을 어기고, 이단(異端)에 깊이 빠진 것입니다.
세째 부류는 원래 믿음은 없었는데, 어쩌다 인연(因緣)이 닿아 발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잠시도 좌선은 하지 않고 8식(八識)을 기반으로 해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화두도 깨닫지 못하고 수없는 생각을 때도 없이 일으킵니다. 이들은 채 3~4년도 참선을 계속하지 못하면서도, 경솔하게 참선으로는 깨닫지 못한다고 하며 내동댕이쳐 버립니다. 이들은 할 일 없이 생각마다 6진(六塵)에 헤매고, 마음은 몹시 산란합니다. 죽음의 문을 향해 가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롭니다.
총림(叢林)의 기풍이 시들어가고 조사의 도가 희미해진 때에 침선하는 수행자가 끝내 물러서지 않겠다는 철석같은 몸과 마음〔身心〕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위에서 지적한 3가지 오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마음의 큰 뜻을 잃었으니, 부처님과 조사들이 더욱 불쌍히 여길 것이고, 총림이 망하는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일 것입니다. 침선을 하여 신심을 내는 것은 천생에 한번 만나기 어려운 것이고, 백세에 한번 나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한 순 간에 진실한 해탈을 얻으려 하지 않으면, 한 생각 굴리는 사이에 번뇌의 구름이 수만 리나 덮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반야의 씨앗이 다시 마음에 들어가길 바라지만, 이것은 마치 썩은 곡식에서 싹이 움트길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선을 하는데 있어 요구되는 마음자세는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옛 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참선을 할때 마음 씀씀이가 다릅니까, 같습니까?"
나는 말했다.
"옛 사람이 도를 배울 때는 도를 얻을 것인가, 얻지 못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읍니다. 다리가 문턱을 념기 전에 도적질하는 마음을 단번에 잘라서 다시는그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했읍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듣은 순전히 훔치려는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이것이 옛과 지금의 도닦는 사람의 뚜렷하게 다른 점이라 하겠읍니다. 생사란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바로 생사입니다. 그러면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훔치려는 이 마음이 완전히 없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그대를 위해 비유를 들어보겠읍니다. 생사는 큰 병이며, 불조(佛祖)가 말씀하신 가르침은 훌륭한 약입니다. 훔치려는 마음은 약에 의해서 치료되고, 생사의 큰병은 불조의 언교(言敎)로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고금이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생시의 큰병은 치료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옛 사람들은 순수하게 약을 복용했기 때문에 신통한 효험을 보았고,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다 복용하지 않았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까지 유발시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빼어난 의사라도 손을 댈 수 없읍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훔치려는 마음이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바로 알음알이〔識情〕가 훔치려는 마음입니다. 본래부터 갖고 있는 법재(法財)를 없애고, 공덕을 소멸시키는 것은 모두 이 압음알이〔心意識〕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가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재 (法財)를 손상 시키고 공덕을 까먹는 까닭은 모두 이 알음알이〔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읍니다.
또 요즘에 귀감이 될 만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들어 보겠읍니다.
6조(六祖)스님의 경우 황매산(黃梅山)의 5조 홍인(弘忍)스
님에게 오자, 그저 방앗간에서 일하게 했을 뿐입니다. 또한위산(위山)스님은 백장(百丈)스님의 문하에서 단지 전좌(典座)의 소임을 보았을 뿐이고, 양기(楊岐: 966~1046)스님은십여년 동안 오직 후원 일을 총괄했을 뿐입니다. 연조(演朝)스님은 총림에서 방아찧는 일을 했고, 운봉(雲峰: 998~1062)스님이 화주(化主) 노릇을 한 인연과, 설두(雪竇: 990~1052)스님이 변소 청소를 했던 일, 자명(慈明: 987~1040)스님이 선소(善昭: 947~1024)스님께 참례하자 선소스님이 희롱하고 웃으며 꾸짖기만 했던 일, 황룡(黃龍):1002~1069)스님이 자명스님 에게 묻다가 욕만 들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차별적인 인연이 뒤섞여 나오고, 위.순(違.順)의 경계가 발생하였읍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막힌 곳을 분명하게 뚫어주어 훔치는 마음을 다 없애주고, 각각의 상황에 알맞게 잘못된 점을고쳐 지극한 이치로 귀결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보나 도가 아닌 것이 없었읍니다.
요즘 사람들이 훔치는 마음을 곧 없애려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키의 문제를 절실하케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공적 (空寂)한 도량에 있지만, 마음은 취사(取捨)의 세계에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절집을 지키고 있으니, 옛사람과.우열을 비교한다면 하늘에서 쓰는 것과 땅에서 신는 신처럼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은타고난 약간의 자질만을 자부하면서 명성을 멀리까지 내려고주제넘게 고인의 훌륭한 말씀을 머리로만 따르고, 힘들고 소소한 일은 가까이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방아나 찧고 전좌나 하는 소임을 어찌 맡으려 하겠으며, 비록 잠자리가 편안하고 배불리 먹는다 해도 어찌 욕구가 다채워지겠으며, 어찌 방앗간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려 하겠습니까? 손으로는 주미불자(주尾拂子)를 종횡으로 흔들고 높은사자법상에 앉게 되면, 깨달을 수 있는 인연은 더욱 멀어지고 훔치려는 마음은 들끊기만 합니다. 후배들을 걱정하여 보살펴주고,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 나무가 되고자 하지만, 어찌 가능하겠읍니까?
이렇듯 교화하는 방편의 성쇠와, 고금의 차이를 따져보면,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모두 훔치려는 마음의 유무(有無)에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꼭 하지 않을 수가 없읍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훔치는 마음에는 성인과 범부의 차이가 있읍니까?"
나는 말했다.
"훔치는 마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여래묘명원심(如來妙明元心)"입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뜻이 진실되고 간절하질 못하여, 허망에 가리운 것이 계속되어 훔치는 마음이 된 것뿐입니다. 이것은 벼에서 태어난 멸구가 벼를 해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무에서 발생한 불이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자는 일은 하루도 안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다 안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도를 구하겠다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하루라도 중지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천한 일을 대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몸이 피곤하고 괴롭다 하더라도, 마음은 조금도 꺼려하거나 싫어하지 않습니다. 눈꼽만치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주인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어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느라고 받는 수치는 어찌 그리도 쉽게 잊는지.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먹고 살려는 마음이 진실하교 간절하키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독한 수치와 추악함조차도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성스러운 도를 구하려 하면서도 훔치는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는 것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범부라 해서 어찌 성인과 다르겠으며, 성인이라고 범부와 다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오직 훔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서로 달라질 뿐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특히 이 점에 조심해야 하겠읍니
다.”
혼침과 산란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공부를 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져서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 힘을 다해 물리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근기와 능력이 미치지 못해 그리된 것이 아닌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정신이 흔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그대로가 본래의 면목〔本地風光〕이라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본래의 면목과 혼침산란(昏沈散亂)은 본래 둘이 아닙니다. 그대가 정신이 혼미하고 사란한 것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은 본래 자성(自性)도 없고 실체도 없는 것이어서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선하는 사람의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생기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한 생각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곧 그런 생각을 따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그다름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그 즉시 그 생각을 따라 또 다른 혼침과 산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백천의 생각 〔念〕이 모두 간절하고 진실하다편, 결국 혼침과 산란은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혹 최후의 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간절하고 진실되지 못한점이 있으면, 그 즉시 그 일념을 따라 혼침과 산란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최초의 일념부터 간절하구. 진실해서 심화(心花)가 피어날 때까지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흔침이니 산란이니 하는 것들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도를 구하는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한 것은 탓하지 않고, 흔침과 산란이 참선에 장애가 된다고 탓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있으면서 물건의 모습을 확실하게 보지 못한다고 자기 눈을 탓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또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 혼침과 산란을느낀다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이 혼침과 산란을 물리치려 애쓰는 것도 잘못입니다. 또 설사 혼침과 산란을물리쳐 눈앞이 깨끗해졌다 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가운데 더 잘못을 저지르는 짓입니다. 더구나 혼침과 산란이 본지풍광이라는 것을 옳다고 생각해서 하루종일 망상과 한덩이가되어 딩굴며 지낸다면 그 잘못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읍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혼침과 산란에 빠지지 않을까요?"
나는 말했다.
"만약 마음을 써야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더더욱 잘못입니다. 혼침과 산란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때는 마음을 써도, 쓰지 않아도 모두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말했다.
"언어나 알음알이로 도달할 수 없는 최상의 경지에 관한말
씀〔向上語〕을 저같이 근기가 낮은 사람으로는 이해하질 못하겠읍니다.”
나는 밀했다.
"도를 배우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진실한 마음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자리를 이미 깨달았다면, 부처와 중생이 서로 똑같은 것입니다. 경계가 높으니 낮으니 하는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대가 혼침과 산란을 알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그것의 미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굳이 말로 지적하여 진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일이 이쯤 되었으니, 혼침과 산란의 근본을 찾아보겠읍니다. 그대는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번뇌에 오염.훈습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침과 번뇌의 근본입니다. 또한 그대가 지금 물질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바깔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애증취사(愛憎取捨)의 감정이 들쑥날쑥 일어나는 것도 역시 혼침과 산란의 근본 입니다. 또한 그대가 최초의 일념에서 생사를 초월하려 한것이 흔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침선하여 도를 배우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려는 것이 혼침과 산란의 근본이며 위없는 대보리를 구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흔침과 산란의 근본입니다 나아가서는 세간혹 출세간의 갖가지 가르침 중에 간직한 털끝만한 알음알이도 흔침과 산란이 아닌 것이 없읍니다. 가령 이러한 흔침 과 산란의 근본이 소멸되어 버렸다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어느 곳에서도 혼침과 산란은 털끝만치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흔침과 산란이 없을 뿐 아니라, 진여(眞如)인 실제 (實際)도 없읍니다. 성인은 깨닫고 범부는 미혹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가하제 알음알이로 따져서 조사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선을 어느 정도 했을 때 주의할 사항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참선하는 사람 중에는 초발심(初發心)을 위배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뭔가 부족하다고 여기게 마련이고, 반면에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마음이 편안한 법입니다. 이것은 사람 사는데 흔히 있는 일로써, 천하고금이 동일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납자라면 마음으로는 늘 뭔가 부족하다 싶어야 하고, 마음을 편히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무언가 부족하게 여길 때, 가없는 성인의 도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무궁한 결실 또한 이때 보게 됩니다. 마음이란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인연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한 순간에도 별별 것을 다 생각할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업(業)이 되고,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미혹에 빠지니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까지 객승과의 대화가 미치자 어떤 늙은 비구가 일어나 말했다.
"지난날 세속에 있을 때는 「법회경」7권 중에 네 권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 뒤 생각하기를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후에는 출가 전 외우지 못했던 나머지 세 권을 반드시 외우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출가한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나머지 세 권을 마저 외우기는커녕, 출가 전 외워두었던 네 권마저도 잊어버릴 줄을 누가 알았겠읍니까?"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세속을 벗어나야겠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매양 뭔가 부족힘을 느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그 생각에 4권이라도 외울수 있었읍니다. 이윽고출가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마음이 방일해져 외워두었던 것까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근본을 살펴보면, 요즘 참선하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읍니다. 또한 세상 어디에도 자기 집이 없이 한 몸으로 만 리를 떠돌아다닐 때는 깨달아 보겠다는 마음으로 오직 참선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눈밝은 스승이 교묘한 질문거리를 만들어 애매한곳을 물으면, 총명한 재주를 동원해 언어와 문자로 이리저리 따집니다. 어쩌다 그렇게 해서 한 번 인가(印可)를 받으면, 거기에 안주해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마음이 펀해져 허망한 견해가 생겨, 말할때는 깨달은 듯하나 새토운 경계가 또 나타나면 다시 미흑된다는 것을전혀 생각지 못한 처사입니다. 옛 사람이 해탈했던 경지에도 물론 도달하지 못한 것이고, 지난날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깨달음을 구하던 마음마저도 몽땅 잃고 만 것입니다. 아! 성현의 학문이 어찌 여기서 머물겠습니까?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고,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만족하는 생각을 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괴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깨달은 뒤에도 점수(漸修) 필요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마음을 깨달은 뒤에도 실천 수행할 필요가 있읍니까?"
나는 밀켰다.
“이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대는 마음을 깨닫는다고 했는데, 본래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데 어찌 마음을 깨닫는다 할 수 있습니까? '깨달음'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니 '마음'이라할 때에도 정작 마음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라 할 그 무엇이 없으므로, 유정(有情).무정(無情)을 모두 관찰한다 해도 관찰하는 주체가 그것들과 혼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털끌만큼이라도 자타와 피차의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속박도 해탈도 없으며, 취할것도 버릴 것도 없게 됩니다. 허망과 진실에서도 떠나고, 미혹과 깨달음 어느 것도 아닙니다. 일념이 평등하여 만가지 법이 여여(如如)한데, 또 무슨 실천 수행할 일이 있겠읍니까?"
객승이 또 말했다.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에 쌓인 무명(無明)의 미세한 염습(染習)이 아직 남아 있는데,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갑자기 모두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실천 수행이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나는 말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읍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정습(情習)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깨달음이 뚜렷하지 못하면, 반드시 뚜렷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평생을 바쳐서라도 확절대오하도록 해야 합니다. 혹 누가 다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실천 수행을 더 하여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마치 불쏘시개로 불을 끄려다 불길을 더 일어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지견(知見)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부처의 지견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부처님의 지견으로 다스릴 수 있는 문제라면, 다스린다는 말부터 벌써 잘못입니다.”
그러자 객승이 물었다.
"그렇다면 실천 수행할 것이 없다는 말씀인지요?"
나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미리부터 실천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하편서 스스로 미혹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니, 정신차려 들으십시오.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여 깨달음이 밑바닥까지 도달하고, 그렇게 해서 번뇌를 훌쩍 벗어나야만 실천 수행할 것이 있는지 없는지 저절로 알 수 있읍니다.”
3학을 배워 3독을 끊어야 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참선을 하는 사람은 악을 끊지도 않고 선을 닦지도 않으며, 탐(貪). 진(瞋). 치(痴) 3독(三毒)도 버리지 않고, 계 (戒).정(定) .혜(慧) 3학(三學)도 익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일성평등(一性平等)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
나는 말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자세히 말하고 싶어도 겨를이 없었던문제였습니다. 마침 지금 질문을 하셨으니 간단하게 대답해드리겠읍니다.
달마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깨달은 분이니, 외도(外道) .2승(二乘)과는 비교할수 없읍니다. 일심법계 (一心法界) 속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생사와 열반도 군더더기 말에 불과한데, 무슨 악을 끊고 무슨 선을 행하며, 무슨 탐.진.치를 버리고 무슨 계.정.혜를 익히겠읍니까?
요즘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일심(一心)의 요지는 조금도 못깨닫고, 입으로만 3학을 배우지도 말고 3독을 끊으려 하지도 아야 한다고 떠들어댑니다. 다만 이것은 미친 짓에 불과합니다. 범부만도 못한 행동을 하여 율의(律儀)를 파괴해서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행동일 뿐입니다. 이야말로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되어 개를 그린 격입니다. 악을 끊고 선을 닦는 뜻을 알려면 굳이 문자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참구하면 그뿐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참구하여 더이상 참구할 것이 없으면, 악을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을 닦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꿈속에서는 분명히 대상을 보지만, 말로는 표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문에 확철대오한 사람은 악과.탐욕이 모두 본인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을 끊어버려야 할 이유도 없고, 끊어버려야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마음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다면, 갖가지 실천 수행을 해도됩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가 한 이 말은 사실이지 불조께서 매우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선악이 모두 마음에서 나온다 하면서도 마음을 끊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실천 수행하는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겠읍니까?"
객승이 물었다.
"악.탐등이 자기의 마음이므로 끊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
과, 실천 수행하려 해서도 안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미 존재한 악.탐 등은 도대체 어디토 가는 것입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는 매우 미혹되어 있으므로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악업(惡業))과 탐.진.치와 무명번뇌(無明煩惱) 및 갖가지 망상들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미혹된 본심 때문에 히깨비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온도가 내려가면 물이 얼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이 마음을 확연히 깨닫기만 하면 모든 허망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날씨가 따뜻해져 녹은 얼음을 어디로 갔느냐 묻는 것으로써, 이야말로 몹시 미혹된 사람이 하는 짓이라 하겠읍니다.”
객승이 또 물었다.
"아무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악과 탐심이 일어나도 전혀 혼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입니까?"
나는 말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도 확철대오하지 못하여 번뇌 망상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만약 더 수행하지 않으면, 끝내는 번뇌망상의 구덩이로 되돌아가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뚜렷이 깨달아 어젯밤 꿈처럼 확실히 꿰뚫어 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동사섭법(同事攝法)을 실천할 경우는 걸으포 보기에는 흡사 악과 탐심이 있는 듯 해도, 그의 진실한 마음은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할 것은 이러한 행동을 확절대오하지 못한 사람이 흉내를 내면, 그사람은 아주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입니다.”
선업을 쌓으면 도(道)를 얻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물었다.
“사람이 매일 수만 가지 착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그 결과 도를 깨달을 수 있겠읍니까?"
나는 말했다.
"도는 무위(無爲)가 근본이므로, 선.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읍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미혹과 허망 때문입니다. 성인은 그런 미혹과 허망을 타파하는 도구로써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런 선업(善業)이 두드러지면 미망(迷妄)이 소멸되고, 미망이 소멸되면 악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따라서 모든 악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선 또한 없어집니다. 옛 사람이 '선.악을 모두 생각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를 자연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한말이 있읍니다. 여기서 마음의 본체란 지극한 도(道)를 말합니다. 만약 악을 버리고 선만 있는 상태에서는 지극한 도(道)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변소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향기로운 냄새를 뿌려둡니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부터 악취도 향기도 없는 것만 못합니다. 변소는 악에 비유된 것이고, 향기는 선에 비유한 것이며,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는 것은 바로 지극한 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어두운 지하실을 밝히려고 횃불을 켜지만, 그곳이 원래부터 밝은 망만은 못합니다. 여기서 어두운 방은 악을 비유한 것이고, 횃불은선을, 밝은 방은 지극한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엄동설한 추위가싫어 모닥불을 피웁니다. 그러나 이것은 따사로운 방은 있는 것만 못합니다. 여기서 추위는 악을 비유한 것이고, 모닥불은 선을, 따뜻한 방은 지극한 도(道)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향은 사룰 적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며, 횃불도 켤 때와 끌 때가 있으며, 모닥불 역시 피울 때가 있고 꺼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극한 도(道)만은 영원토록 변치 않고, 세월이 홀러가도 항상 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어찌 지극한 도(道)를 끊겼다간 계속되고, 생겼다간 소멸하며, 있었다 없어지는 것들과 비교하겠옵니까? 그렇다면 도(道)를 깨닫는데에 선(善)을 행하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있는지 이제는 알수 있을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한데, 제가어떻게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
선.악의 참된 뜻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선.악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읍니다. 선.악에 대한 것 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때리고 욕하는 것을 악이라 하고, 이런 악행을 참고 보복하지 않으면 선이라 함니다. 또 칼로 살인을 하면 악이라 하고, 그것을 모두 받아들여 조금도 개의치 않는것을 선이라 합니다, 또 음탕하게많은 것을 탐내면 악이라 하고, 조용히 심신을 가다듬어 경전이나 읽고으면 선이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읍니까? "
나는 말했다.
"이 말은 다 선.악의 겉껍데기만 말한 것입니다. 선.악의속뜻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선.악의 참된 뜻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이익을 주려 하는 것이면 모두 선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짓이면 악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면 일하는 과정에서 설사 욕을 먹고 배척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선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말 안해도 자신에게만 이로운 일이면, 그것은 악입니다. 이 때문에 성현이 중생들을 교화하여 세상을 구제 하느라고 쉴 겨를이 없었던 것은 모두 지극히 선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걸으로 성현처럼 언행을 아름답게 꾸며도 남에게 이익올 주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이것은 악 입니다. 그런데 더우기 겉모습마저도 포악하고 성낸 모습으로 쉬지 않고 날뛰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읍니다.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도 칭찬을 바라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참선은 어떤 관계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공자(孔子).맹자(孟子) 등의 서적은 왕도(王道)를 말하여
인의(仁義) 사상을 주장했읍니다. 또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책에는 횡도(皇道)를 말하여 무위(無爲)사상을 주장했읍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은 패도(覇道)를 잡다하게 설명하며 공리(功利)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처님 경전에서는 단지 성품자리만을 밝혀 이르기를, '모든 법은 오직 마음에서 빌현된 것이다'고만 하며, 일념 (一念)도 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읍니다. 이들의 주장은 각각 달라서 서로 공통된 부분이 없는 듯 합니다. 과연 공통되는 부분이 전혀 없읍니까 ?"
나는 말했다.
"공통된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펀협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경솔한 것이 됩니다. 깨닫는 공부는 특정한 부분을 유난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가 깨닫는 것을중요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깨닫고 나면 서로의 차이가 없어져 3교(三敎)의 성인이 하신 말씀이 서로 동일한 줄 알게 되고, 세간 출세간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비록 「4고서(四庫書」를 달달외워도, 그것은 다문(多聞)과 아견(我見)일 뿐입니다. 이른바 인도(印度)의 총명외도(聰明外道)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확철대오 하려 하지 않고 문자만을이해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총명하지 못한자들은 마음의 망정(妄情)을 죽여 바르
게 깨달으려 하지는 않고, 매양 문자와 말만 따지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은 고사하고 알음알이〔識情〕의 사량분별만 늘어나 걸핏하편 성인의 도를 어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화의 방편은 쇠퇴하고, 총림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벽암록」으토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종문 중에는 「벽암집(碧岩集)」이라는 책이 있읍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스님이 협산(夾山)에 머물 때, 설두(雪竇)스님의 송고(頌古)를 취하여 강요(綱要)를 나누어 배열하고, 말씀을 해설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 책의 설명은 세밀하고도 분명합니다. 풍부하고 유려한 것으로 말한다면 명주(明珠)와 패옥(貝玉)을 수북이 쌓아 놓은 것 같고, 그 충만해 넘치는 것으로 말한다면 황하의 싱류인 우문(禹門)을 가로막아 역류가 소용돌이치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말이지 매우 위대한 책입니다. 법을 깨달았어도 자유롭지 못한 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내용입니다.그런데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그 책을 사다리 삼아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이 사실을 원오스님의 제자인 묘희 (妙喜:1088~1163) 스님이 알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책에 얽매여 배우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염려해서 민(閔) 땅에 있던 판각(板刻)을 불질러버렸습니다. 지금 전국 선원에서 다시 「벽암록」을 간행하는데, 이것은 말세에 배우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중생들에게는 각각 자기에게 현성공안(現成公案)이 하나씩 있읍니다. 부처님께서도 영산(靈山)에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면서도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하지 못하셨고, 달마대사도 서쪽으로부터 만 리 길을 왔지만 이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덕산스님과.임제스님 역시 이것을 다 찾아내지는 못했읍니다. 그러니 설두스님이 어찌 이것을 다 송(頌)할 수 있으며, 원오스님이 이것을 다 해설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벽암록」이 백천만 권이 있다 해도 현성공안의 하나인들 더하거나 덜 수 있겠습니까? 묘희스님이 이런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벽암록」판각을.불지른 것은, 마치 석녀 (石女)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벽암록」을 간행한 사람들의 행동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객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각자의 현성공안은 끌내 불조의 언교(言敎)와는
관계가 없는지요? 또 우리들은 무엇을 참고로 하여 깨달음의 증거를 삼겠읍니까?"
나는 밀했다,
"참고로 할 것도 없고, 증거를 삼율 것도 없읍니다. 오직 각자마다 한 순간에 회광퇴보(回光退步)하여 눈앞의 견문 각지(見聞覺知)를 그대로 한꺼번에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결에 들려오는 폭포수 소리와 비온 뒤 시냇물 소리가 모두 송고(頌古)인 것을 알게 되고, 공산(空山)에 진동하는 우뢰와 대낮에 울리는 자연의 청아한 음향이 모두 해설〔判〕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으며, 밤은 어둡고 낮은 밝은데 만상삼라(萬象森羅)가 정연하게 설법을 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현성공안인 「벽암집」인 것입니다. 비록 백 천의 설두스님과 원오스님이라 해도 현성공안의 그림자에는 쩔쩔멜텐데, 어찌 언어나 문자를 사용해 이러쿵저러쿵 논란할수 있겠습니까? 선배들의 가르침이 어떤 때는 왕성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부숴버리며, 어떤 때는 금지하고 어떤 때는 장려하는 것은, 다만 세속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지, 이치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벽암집」이 참석하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들게 하여 스스로 깨닫는데 장애가 된다고 말하나, 두 스님의 마음을 소급해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존께서 법계 중생 모두가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망상 집착(妄想執着)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는 현상을 올바른 법안(法眼)으토 환히 관찰하시고, 당신 스스로성도(聖道)를 가르쳐 중생을 모든 집착에서 떠나게 해야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왜 모르셨겠읍니까? 성도(聖道) 또한 중생을 구속하여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무려 300여 회나 설법하신 대(大).소(小).편(偏).원(圓).돈(頓).점(漸).반(半).만(滿) 등의 가르침은 하루도 입에서 떠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이나 옛날의 참선하는 자들은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방편인 줄을 모르고 참된 법이라고 여겨 집착합니다. 그들이 각기 이해한 데에 집착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분분히 내세워 시비가 복잡하게 일어났읍니다. 끌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능(能)과 소(所)로 쪼개어 「벽암집」의 원태 취지와는 아주 멀어졌습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그러한데 더구나 범인들의 가르침은 어떻겠읍니까?
그렇기는 해도 언교(言敎)의 장단점을 잘 응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당사자가 자기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일에 진지하고 절실하다면 하잘 것 없는 이야기도 생사를 초월하는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경전 중에 '거위왕이 우유만 가려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스승과 제자가 진지하게 자기의 일을 밝힐 수 있고 자기 종문(宗門)의 사활(死活)을 걸머지겠다는 뜻이 있다면, 절대로 문자에 의지해 의미를 깨달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스스로게 물어 참구한다면 「벽암집」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사들도 계율을 지켜야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고봉(高峰: 1238~1295)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수계 (受戒) 할 때에 손가락을 태우게 했다는데, 제방(諸方)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정말 고봉스님이 그랬읍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또한 그런 소문을 직접 듣고, 스님께 여쭈어보았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상할 것이 없다. 저들이 방편임을 알지 못해서 그럼 것인데, 난들어찌 모르겠느냐' 달마대사께서 흘로 전하신 성품을 바로 가리키는 선은 문자(文字)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계(戒)를 주고 받겠습니까? 그러나 달마스님이 계율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근본 종지(宗旨)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했다는 뜻은 달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으로써 종을 삼았읍니다. 오직 바로 가리키는 것에만 힘을 기울여 단 한번에 훌쩍 깨달음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게 했을지언정, 대.소 2승(二乘)의 단계를 차례차례 거치도록 하지는 않았읍니다. 그종지가 이와 같으므로 계율을 말한다면 벌써 잘못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믿었다는 뜻은, 일반적으로 달마스님의
문하에는 모두가 상근기의 인재들만이 모였었읍니다. 숙세에 반야의 종지를 익히고 최상승(最上乘)의 근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을 닦았기 때문에 또다시 계율의 수지(受持)를 말할 필요가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달마스님 당시에는 계율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굳이 계율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았지만, 어느제자도 고의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가 없었읍니다.
달마스님 이후로 대승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선사들이 천지 사방에서 구름처럼 일어나고 바닷물이 용솟음치듯 하였읍니다. 달마스님 때부터 계속하여 계율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종지로 볼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읍니다 .
옛날에 자수화상(慈受和尙: 1077~1132)은 종문(宗門)의
빼어난 지도자이십니다. 항상 제자들이 계업(戒業))을 잘지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하였습니다. 또 진헐화상(眞歇和尙)은 '권발보리심대회(勸發菩提心大會)'롤 개최하여 사부대중과 함께 계율을 권장 선양하였습니다. 이 두 스님은 모두 점진적인 방현을 사용하신 분들이십니다.
옛날에 담당무준(湛堂無準: 1061~1115)스님께서 양산 승
(梁山乘)스님을 찾아뵙고 인사하자, 승스님은 이렇게 말했읍
니다. 즉 '어찌 계율을 받지 않고도 감히 불법을 배울수 있겠는가?' 그러자 담당 준스님은 합장예배하고 말하기를, '계 받는 장소가 계일까요? 아니면 삼감마(三갈磨)와 청정한아사리(阿사梨)가 계인가요?' 라고 했습니다. 승스님이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자, 담당 준스님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계를 받지 않아서야 되겠읍니까? '라고, 하고는, 곧 바로 강안율사(康安律師)에게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읍니다.
옛부터 선가(禪家)에는 계율에 대한 말이 아주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방편이란 상황에 알맞게 운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이 수계한 것을 조금도 이상스레 여기지 마십시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대중 생활을 할 때 는 개경(開慶).경정(景定) 연간이었읍니다. 그때도 정자사(淨慈寺).쌍경사(雙徑寺)같은 절은 대중의 수효가 400~500을 넘었읍니다. 그 절의 주지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항 상술을 마신 것이 아닌데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꾸짖었읍니다.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드물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방탕하여 피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5계(五戒)를 말씀하셨고, 비구들에게는4분(四分).승지(僧祗)등의 계율과,3취정계(三聚淨戒).구족대계(具足大戒)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요즘 승려들은 일반신자가 지키는 계(戒)도 못지키는데, 율의(律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산스님도 ‘지지작범(止持作犯)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들의 수행지침이다. 그러나 처음의 발심은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는 천리 길의 첫걸음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 천 리길을 갈 수 없다. 또 옛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고 도를 배우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라 생각했다'고 하셨읍니다.
또한 근성(根性)이 둔해서 평생 수행을 했는데도 도안(道眼)이 밝아지지 않으면,계의 힘으로라도 도념(道念)을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세에는 도를 이루기가 쉽습니다. 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경전으로는「능엄경(楞嚴經)」.「원각경(圓覺經)」을 들 수있는데, 모두 대승원돈(大乘圓頓)의 중요한 밀씀입니다. 의심스런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서는 수행의 근본을 계라하지 않은곳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계는 기초이고, 도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한 몸을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근기에 맞게 방편을 말한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계율지키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편 예컨대 백장(百丈)스님은 허다한 위의(爲儀)와 예법(禮法)을 세우셨읍니다. 스님은 사소한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도 빈틈없이 계율을 만드셨읍니다, 이것을 달마대사의 사람의 본성을 바로 가리키는 종지에 비교할 때,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부터 총림에는 예법이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고 예법의 세세함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이 총림예법의 근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근본없이 지엽(枝葉)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선배 스님들도 '아아 ! 도체(道體)를 잃으면 계의 힘이 소멸하고, 계의 힘이 소멸하면 총림의 예법도 잃게 된다. 그리고서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다시 도(道)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금일 제자들에게 계율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 했는데, 모두 진실한 말씀입니다. 그대가 공연한 질문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수행과 신통력은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불. 보살은 모두 신통(神通)하신데, 이것은 수행하여 증득〔修證〕한 것인지요?"
나는 말했다.
"신통력(神通力)은 수행해서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신통은 불.보살들이 구원겁(久遠劫) 동안 4무량심(四無量心). 6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갖기지 선행(善行)을 순수하케 닦아 생긴 능력입니다, '신통은 수행윤 통해서 얻어진다'고 말한 뜻은 위와같은 갖가지 수행을 하지 않으면 신통을 얻지 못한다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 뜻은 불.보살이 수행한 바라밀과 공덕은 신통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행해진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통은 대자대비한 마음이 자기의 원행 (願行)에 뿌리박혀 저절로 얻어진 것입니다. 가령 불.보살이 구차하게 신통을 구하고자 한 순간이라도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이 한 생각이 장애가 되어 모든 선행을 다 수행해도 결국은 유루(有漏)의 인(因)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어떻게 자재(自在)한 해탈변화(解脫變化)의 신통을 얻겠읍니까?”
혹 부처님의 심종(心宗)과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원행(願行)에 계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밖의 2승(二乘)의 소과(小果)로부터 외도(外道)에게도 신통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통이 아니라 요술로서 단순한 변화일 뿐입니다. 요술은 모두 작위적(作爲的) 사유(思惟)에 의해 얻어진 것이므로, 괴이한 것을 나타내 중생을 현혹하는 생멸(生滅)의 인(因)일 뿐입니다. 하지만 불.보살이 대자대비한 마음을 내어 인위적 조작없는 원력으로 발현한 신통은 법성(法性)과 같습니다. 불보살은 털구멍 하나에서도 백 천의 광영과 백천의 장엄구(莊嚴具)를 드러내어 법계를 채우고,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얻게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불 .보살의 해탈한 마음 속에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생각이 없고, 또한 신통을 나타내겠다는 생각도 없으며, 그 신통력으로 중생들에게 복을 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성은 평등하여 일이(一異).자타(自他).능소(能所)의 차별이 없으므로, 신통 또한 그러한 차별이 없음을 알 수 있읍니다."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불.보살의 신통력이 결코 닦아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닦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수행을 하지 않는 범부에게는 왜 신동력이 없는지요?"
나는 말했다.
"범부라고 해서 그외 법성에 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범부와 축생들은 모두 몽매하여 그것을 스스토 알지 못할 뿐입니다. 범부는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원행(願行)으로 바라밀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장엄한 신통력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반면 불.보살은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원행을 했기 때문에 신통을 얻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의 10대악업(十大惡業))을 짓고도 참회를 하지 않는 중생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생명이 끝나면, 그 업력(業力) 때문에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져 갖가지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악업을 지은 것은 단지 미망(迷妄)한 마음이 생겨서이지,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리라는 사실을알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옥이란 자성(自性)도 없고 실다운 법도 없는 것입니다. 지옥은 바로 자신의 허망한 업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겠습니다. 이와같이 불.보살의 신통도 자성이 없으며 실다운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계.정.혜와 바라밀을 잘 닦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니, 다시 무엇을 더 의심하겠옵니까?"
요즈음 스님들에게는 왜 신통력이 없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서천(西天)의 27조사(二十七祖師)는 모두 신통력이 있었으며, 달마대사 역시 신통력이 있었다고합니다. 그런데 달마대사 이후에는 왜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없었을까요? 한두 분 있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자주 듣지는 못했옵니다.
나는 말했다.
"인도(印度)의 외도(外道)도 다 인위적인 사유(思惟)에 의
한 신통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 할 때는 신통력을 부리지 않고서는 그 외도들을 제압할수 없었읍니다. 인도 땅에서는 응화(應化)하신 불.보살들이 조사(祖師)의 몸으로 화현하시어 불법을 전수하셨읍니다. 달마대사같은 분은 관음보살의 응신이라고 합니다. 달마대사 이후 한두 분 신통력을 갖춘 스님이 출현한 것은 바른 가르침을 드날리도록 도운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통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깨달으려고만 노력했습니다. 부처님의 심종은 백천삼매(百千三昧)와 갖가지 신통의 씨앗으로서, 그 씨앗이 뿌려지기만 하면 반드시 신통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실하게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어쩌다 자신에게서 신이(神異)함이 발생하여도 그자리에서 제거해버립니다. 그는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지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구차스럽게도 이것을 기이하게 여기다가는 본심을 잃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도 신이함을
자랑하지 않는데, 깨닫지 못한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겠읍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신통삼매(神通三昧)만 얻으려 한다면, 이것은 불자가 아니고 외도의 권속입니다. 이렇게 하면 깨달음의 씨앗(正因)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온 '옛 스님들은 신통도 전수를 하셨는데, 중국에 와서 기이한 것을 말한다고 꾸중을 들을까봐 전수가 끊어졌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을 미혹시킬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미혹시키는 말이니, 굳이 그렇게 할 까닭이 있겠읍니까?"
山房夜話 中 끝
도대체 앎〔知〕이란 무엇입니까?
객승이 물었다.
"저는 반평생 동안 학문을 닦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불조(佛祖)의 언교(言敎)를 섭렵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마주하면 언제나 늘 아는 것 갈았읍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자극에 초연하지 못하고 애증(愛憎)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나는 말했다.
"그대의 말은 앎〔知〕을 개괄적으로는 설명하긴 했지만, 핵심을 찌르지는 못했습니다. 앎에는 영지(靈知)도 있고, 진지(眞知)도 있으며, 망지(妄知)도 있읍니다. 영지는 바로 도(道)이고, 진지는 곧 오(悟)이고, 망지는 즉 문자로 아는것입니다. 앎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두 같지만 나눈다면 하루와 영겁(永劫)처럼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이치는 헤아려보지 않고, 대충 알고서 히망한 집착을 내고 시비를 일으켜 도의 근원을 흐려 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매몰시켜 버립니다.
배휴(裴休: 797~870)가 말한 것처럼 '혈기(血氣)가 있는생명체에게는 반드시 앎〔知〕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다 똑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영지(靈知)를 말한 것입니다. 영지는 범부와 성인, 미혹과 깨달음에 관계없이 조금도 차이가 없는 앎입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마음 바탕에 넉넉히 갖추어진 것으로서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일체의 법이 마음에 상즉(相卽)한 자성(自性)임을 알았다면, 지혜의 몸〔慧身〕을 성취하는 것이 다른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고 한 것과 같으며,「원각경」에서 '헛꽃〔空華〕인줄 알았다면 바로 윤회가 없으리라'한것과, '허깨비인 줄알고 그대로 떠나면 빙편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 것과 다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진지(眞知)는 바로 오입(悟入)해서 된다는 것입니
다. 미혹의 구름이 활짝 걷혀서 사량분별을 뚝 끊고 알음알이 내지 않기를 마치 무슨 일을 오랫동안 잊었다가 문득 기억해 내듯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해탈(解脫)하여 모든 것이 다 진실해집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나어지는 결코 옳을 리가 없읍니다.
또 「원각경」에서 '중생은 아는 것〔解〕이 장애가 되지만, 보살은 깨달음〔覺〕을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세 중생이 성도(成道)하기를 바라거든 깨달음〔悟〕을 구하지 말라, 그것은 다문(多聞)만을 더하고, 아견(我見)만을 키울 뿐이다?고 하였읍니다. 이것은 모두 망지(妄知)를통해 깨달으려는 것을 통렬히 지적해 말한 것입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교 성품을 밝히는데, 종일토록 수없는 변론으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 바로 망지입니다. 이것은 따져볼 것 없이 이미 그 이전에 잘못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께서는, 설산(雪山)에서는 깨달은 그림자 만을 보이셨고, 최후로 백만 대중 앞에서 꽃 한가지를 들어 깨달은 이치를 나타내셨습니다. 조사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서로 동일하지 않았으나, 가까이하면 마치 불무더기와 같았고, 태아(太阿)의 검처럼 날카로왔으며, 우뢰와 같이 우렁차고, 독약같이 무서웠읍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어묵동정(語黙動靜)하는 사이에 끝내 바느질한 흔적도 지름길도 용납하지 않은데는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종문(宗門)에서는 깨달음의 자취를 찾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법진(法塵)이라고 비난했고, 견해의 가시라고 배척하였습니다. 종문에서 이렇게 한 것은미(迷)와 오(悟)를 둘 다 잊어버리고 신령한 근원에 젖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읍니다. 혹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것으로 걸핏하면 허망을 드러내는것은 마치 봉사가 횃불을 들고 대낮에 길에 나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길을 밝히는 효과도 없을뿐 아니라, 계속 횃불을 들고 있다가는 손마저 태우게 될 것입니다.
나 또한 진지(眞知)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으로서 망지(妄知)를 쓰는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내 자신을 경책했을 뿐입니다.?
세상사가 수행에 방해가 됩니까?
객승이 질문했다.
"번뇌라는 두 글자는 세속에서 쓰는 말입니다만, 그것의 근원〔因〕은 무엇이며 그 뜻은 무엇인지 모르겠읍니다.〃
나는 말했다.
"미망(迷妄)이 바로 번뇌의 근원이고, 물들여 더럽힌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미망이란 자기의 마음이 미혹되어서 일체의 법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뜻은 성품(性品)이란 본래 공적(空寂)하여 지견(知見)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해서 사람들은 망정(妄情)을 일으키고, 일체의 법을 잘못 인식하여 실제로 있다〔實有〕고 믿는 것입니다. 한번 있다〔有〕는 견해에 떨어지면, 취.사.순.역(取捨順逆)의 생각이 나〔我〕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자기 생각에 맞으면 사랑하고, 어긋나면 미워합니다. 또한 사랑하면 취하여 받아들이고, 증오하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심해지면, 자기에게 좋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노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마음은 의식에 속속들이 잠복해서 마음대로 날뛰고 아무 때나 막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5욕(五欲)과 7정(七情)에 얽매이고, 생각은 이리저리 날뛰게 됩니다. 여기에 오염되면 6범(육凡)이 되고, 다행히 여기에 물들지 않으면 4성(四聖)이 됩니다. 미(迷)와 오(悟)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번뇌에 얽매인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한 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본래 청정하고진실된 인간의 성품에는 예토부터 지금까지 따로 법을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청정함과 진실됨을 얻거나 잃는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 천지에 가득했고, 모든 것을 다 포함했고, 분명하여 결코 안주하는모양〔住相〕이 없읍니다. 중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걸핏하면 바깥 경계를 좇습니다. 그 무엇에라도 의지하면 모두가 번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인이니 범부니 가릴 것도 없이 모두 번뇌에 오염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번뇌는 계율로 다듬어진 몸을 심하게 하고, 정
(定)의 근원을 혼탁하게 하며, 지혜〔慧〕의 거울을 흐리게 합니다. 그 결과 탐욕의 뿌리는 더욱 견고해지고, 분노의 불꽃은 더욱 치솟으며, 어리석은 구름을 더욱 퍼지게 하며, 악도(惡道)를 열고 선문(善門)을 폐쇄하며, 업연(業緣)을 돕고 도력(道力)을 소멸시킵니다. 번뇌의 허물은 이 외에도 끌이 없습니다. 요즈음 참선하는 이들은 모든 행위가 모두 번뇌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몸은 어느 것도 침범하지 않는 곳에서 펀안히 살고자 합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자신의 감정을 언잖게 하고 번거롭게 하면 '도력을 소멸시킨다'고 말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립니다. 그 기상이야 갸륵하다고도 하겠지만, 이것은 오히려 미혹한 가운데도 더더욱 미혹된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런 시람과 함께 도를 의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미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결코 세상일에서 나온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번뇌가 세상일에서 나왔다면 배가 고파도 먹지 말아야 하고, 추워도 옷을 입지 말아야 하며,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지 말아야 하고, 길을 가도 남이 닦아놓은 길로는 가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므토 이렇게 하다가는 머지 않아 죽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정말로 이와같이 한다면 곡식은 농사를 지어서 나왔고, 옷은 베틀에서 만돌어졌으며, 집은 건축하고 보수하는데서 나왔고, 도로는 길을 개척해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들이 제각기 세상일을 분담해서 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기지 물품을 어찌 얻겠읍니까?
또 이것은 바로 지금 도를 수행하는 이 몸이 본래는 없었는데, 부모가 양육해주신 노력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모르는것입니다. 더우기 부모가 어루만지고 안아준 수고로움으로 자랐다는 것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옛부터 도가 광대하고 덕이 구비된 불조(佛祖)께서도 모두 밥먹고, 옷입고, 가옥에서 거주하며, 땅을 밟고 걸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조들은 확연히 깨달은 원만청정한 자심(自心)이 법계에 가득차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한 찰나 사이에 팔만 번뇌를 8만 불사(佛事)로 바꾸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영가(永嘉)스님께서는, '한 법도 보지 않으면 바로 여래(如來)이다. 굳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다'고 하였읍니다. 어떻게 자심(自心)을 깨닫는 것외에 다른 법이 있어 번뇌가 되겠읍니까? 이 때문에 화엄회상(華嚴會上)의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은 모두 번뇌에 의지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했고, 보살행(菩薩行)을 닦았읍니다. 이것은 장엄한 부처님의 정토(淨土)에 들어가는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번뇌를 떠나서는 6바라밀도 없고, 번뇌를 버리면 4무량심(四無量心)도 없으며, 번뇌를 떠나서는 성현도 없고, 번뇌가 다하면 해탈도 없다는 것을........... 번뇌라는 것은 3세(三世)의 불조와, 시방(十方)의 보살들과, 가없는 선지식들의 모은 계.정.혜(戒定慧)와, 수많은 선공덕(善功德)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번뇌가 없다면 성현의 중생구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선하는 자가 이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을냅니다. 번뇌를 가지고 번뇌를 제거하려 하면 더더욱 미혹만 증가할 뿐입니다.
성인(聖人)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능엄경」에는 '나는 손가락을 누르기만 해도 해인(海印)의 광채가 발현하지만, 너희들은 마음을 조금반 움직여도 번뇌가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어찌 사람들을 속인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사람마다 이 자리에서 그윽히 성인의 마음에 계합하여, 번뇌를 그대로 오묘하게 사용하여 보리를 구할 수 있겠읍니까?
가령 백만이나 되는 공덕행(功德行)으로 번뇌를 씻어 내려고 할지라도 성인께서는 오히려 쓸데없는 짓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번뇌를 씻어버리려는 것도 꾸짖으시는데, 더구나마음이 옹색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것만으로 구실을 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키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읍니까?"
주지의 소임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스님의 도는 온 세상에 널리 알려졌읍니다. 그련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시절 인연에 따라, 한절의 주지 소임을 맡아 교화를 펴서 불조예(佛祖)께서 세우신 심법(心法)을 널리 펴려 하시지 않으십니까? 펀안히 변변찮은 절개만을 지키며 고집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불법 안에서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말했다.
"생각지도 않은 명성을 얻어서 매일같이 이런 질문을 받고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까닭은 그런 요청에 설명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정말로 사람을 위하는 도가 있다고 합시다. 고상한 절개를 흉내내어 굳게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불법 가운데 죄인이 된다는 질책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는 법은 실제로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세를 타고 명예를 얻으려고 억지로 이치를 어그러뜨린다면, 죄인이라는 낙인을 면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면하지 못할 경우의 죄는 굳게 절개만을 지키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몇배나 무거울 것입니다. 나는 이 이치를 약간은 알았고, 그 때문에 구태여 외람된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가 말한 주지(住持)의 직책에 필요한 덕목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읍니다.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의 능력이 있어야만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주지의 소임을 말은 사람은도력(道力)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연력(緣力)이 있어야 하고, 세째는 지력(智力)이 있어야 합니다.
도력은 근본〔體〕이고, 연력과 지력은 활용럭〔用〕입니다. 근본이 있기만 하면 설사 활용력이 없을지라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겠읍니다. 이런 경우는 교화하는 방편이 엉성하고, 관리기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도의 근본이 이지러진 상태라면 백천 가지의 신이(神異)한 방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서로 맞아떨어지질 않습니다. 비록 연력과 지력이 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구나 근본과 활용력이 모두 없는데도 외람되게 주지의 소임을 맡는다고 합시다. 인과외 법칙이 없다면 얘기할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지 자격이 없으면서도 속편하게 그 소임을 말겠습니까? 나는 불조의 도를 깨달아 증득하지는 못했습니다. 평소에 내가 했던 말과 글은 단지 믿어서 아는〔信解〕것뿐입니다. 옛 사람은 일단 종지를 얻은 후에는 다시는 자신의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2,30년 동안 부목이나공양주로 있으면서 깨달은 자취를 물리치고,증오한 이치도 씻어버리려 하였읍니다. 그런 뒤에는 진에(眞).속9俗)어느 알음알이에도 읽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의 온 몸은 날카로운 칼이나 오랫동안 닦아온 거울과 같아서 기연(機緣)에 머무는 것이 없었고, 군더더기 말도 없었습니다. 위엄있게 수만 대중 위에 군림하편서도 자신이 존귀한 줄도, 영화로운 줄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갖추고 있더라도 혹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을 만날 경우는 뒤로 물러나야만 욕됨이 없습니다. 이 경지를 어찌 미혹한 생각〔情見〕을 벗어나지 못한 자가 흉내낼 수 있겠읍니까?
깨달아 증득〔悟證〕한 자취를 살펴볼 때, 혹시라도 번뇌를 모두 씻어버리지 못했다면 주관.객관의 견해〔能所之見〕가 걸핏하면 어지럽게 일어납니다. 주관〔能〕이니 객관〔所〕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미혹한 생각〔情見〕입니다. 또한 깨달아 증득한 자취도 마음에 간직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순전히 믿어서 이해한〔信解〕미혹한 생각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극한 도의 근본은 가까이하면 할수록 멀어집니다. 또 자신도 아직 도에 회합하질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에 하나카 되게하겠습니까? 나는 도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감히 망령되게 큰 평상에 앉아 도를 널리 펴는 스승이라고 자칭하지는 않을것입니다.?
객승이 말하였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고금에 즐비하게 들어선 사찰의 주병(주柄)을 잡은 큰스님들이 지금껏 끊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정말이지 근본〔體〕과 활용력〔用〕을 잃은 분들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그대의 질문은 매우 자세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각자의 삼매(三昧)는 남이 알지 못한다'고한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옳고 그름을 논한다면 내 허물만 커지지 않겠읍니까?"
이렇게 주고 받으면서 객과 마주보며 한바탕 웃었다.
명예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저는 반평생이나 공적(空寂)한 도량에서 수행을 했는데도, 명성과 영리의 세계로 감정이 쏠리고 있읍니다. 그래서 나틀 돕지 않는다고 조물주(造物主)만 원망하던 차에 주지의 소임을 맡게 되어 기쁘게 이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주지라는 직책을 걸머진 이래로는 도리어 그 이전보다도 편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잘잘못과 여러 대중들의 기쁨과 노여움이 모두 제 마음에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금 이라도 생각에 빈틈이 생기면 재앙과 욕이 몰려들었습니다. 어찌 옛날의 불조들께서도 이러셨겠읍니까?"
나는 말했다.
"그대는 생각지 못했습니까? 소임을 맡은 그때부터 책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름은 까닭없이 생긴 것이 없습니다. 모두 실상이 있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명칭과 그에 따르는 실상의 관계는 마치 물체와 그림자외 사이와같고,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같고, 식량으로 밥을짓는것과 같습니다. 책망하는 것은 실상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를 말할 때는 형체의 상제를 찾는 것과 같으며, 의식(衣食)의 명칭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곡식과 비단의 실제를 찾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처음 주지라는 소임을 걸머질 때에는 반드시 우선적으로 깨달음의 바른 씨앗〔正因〕을 지녀, 법을 오랫동안머물게 하는 자세가 있는가 없는가를 스스로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이것은 본체를 떠나서 그림자를 좇는 것이고, 곡식과 비단을 버리고 의복과 음식을 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서 껍데기에 대한 말이 많으면 그 본질과는 더더욱 멀어지며, 심기(心機)가 촘촘할수록 대용(大用)은 더욱 어긋나고, 반연(攀緣)이 많아질수록 깨달음의 바른 씨앗〔正因〕은 더욱 없어집니다. 이 껍데기에 대한 말을 빨리 버린다면 그래도 막을 방법이 있겠지만, 그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 시람은 받드시 지옥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도대체 명예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숭상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예 그 자체보다도 자기 자신〔我〕에게 집착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애견(愛見)이 발생하게 되고, 이 애견 중에 가장 심한 것이 바로 명예욕입니다. 그러므로 명예욕은 5욕(五欲)중에서도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읍니다.
욕망〔欲〕이 마음에 깊숙이 들어있을 때는 아직 미미해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외견(外緣)을 만나 욕심이 움직이면 그때는 그 힘이 강해져 수만 명의 장정도 대적할 수 없고,수천 명의 성인이 있어도 그것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또한 도끼와 톱으로 위협하고, 뜨거운 가마솥의 형벌이 기다린다 해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당장에 볼수 없는 인과를 두려워하겠읍니까?
그런데 명예 중에서도 가장 제일가는 명예는 성현(聖賢)과
도덕(道德)이란 명예입니다. 그 다음은 공리(功利)라는 명예이며, 그 다음은 기능(技能)이란 명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현을 속여서 명예롤 얻으려 하고 도덕을 빙자해서 명예를 얻으려 하고, 기능을 멋대로 부려 명예를 얻으려 하고, 공리를 훔쳐 명예를 얻으려 합니다. 진정한 명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념(思念)에서 생겨난 망식(妄識)에 매달려서 행동거지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명예만 얻으려고 힘씁니다. 그러면서도 명예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으며 되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종일토톡 바쁘게 애를 쓰지만, 크게 패가망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반면 그러는 사람 중에 더러는 보연(報緣)이 맞아 구하던 것이 우연히 적중하여 훌륭한 명성을 죽은 뒤에까지 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보연이 다하면 지난 날의 명예는 도리어 오늘의 치욕이 되고 맙니다. 지난날의 명예가 높았을수록 치욕 또한 더욱 심합니다. 그러므토 실속 없는 명예〔名〕는 패배와 치욕을 가져올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옛 성인들의 거취를 살펴보면, 그분들은 이치의 근원을 통철히 꿰뚫어보시고, 가슴 속에 참다운 본질을 간직하여 잠시라도 그것을 잊어버릴까 두려워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지극한 도만을 구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생사(生死)의 마구니를 타파하여 본래의 신령한 자리로 돌아가려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6바라밀을 세밀하게 실천하고 4무량심(四無量心)을 널리 베푼 이유는 대자(大慈)한 마음을 내어 대비심(四大悲心)을 여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3백여 회동안 반(半).만(滿),편(偏).원(圓)의 가르침을 설했던 것은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병에 따라서 치료하고 지도하는 참된 본질이었습니다. 후에 손수 한 송이 꽃을 들어보이시고 의발(衣鉢)을 가섭존자에게 부촉하셨읍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印可)하고, 그릇으로써 그릇을 전하는 참된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백천의 훌륭한 수행과 항하깅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공덕도 참된 깨우침의 자리 속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이를 말하여 순일진실(純一眞實)이라고 합니다. 안으로는 억지로 하는 인위적인 행위가 없었고, 밖으로는 명예를 사모하는 욕망이 없었으며, 자기 자신을 봄내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읍니다, 용맹건장한 모습도 보이지 않고, 다만 실제와 진실을 실천하는 올바른 생각만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성실한 행동이 구족원만(具足圓滿)했기 때문에 조어사(調御師).천인존(天人尊)이라든가 우담화(優曇華).광명장(光明藏)등과 같은 갖가지 아름다운 호칭과 갖가지 훌륭한 명예들을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얻게 되었읍니다. 만일 성인이 외적으로 명예를 홈모하는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다편 온갖 선행을 열심으로 수행했어도 훌륭한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리어 허망을 좇는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참다운 본질이 없을까봐 근심했을 뿐, 결코 명예를 얻지 못할까 근심하진 않았읍니다. 그것은 참다운 실상이 명예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고금에 참다운 실싱도 없으면서 명예를 얻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른바 주지(住持)라는 소임의 참다운 본질은 무엇일까요? 멀리는 선불〔先佛〕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가까이는 조사들의 교화방편을 지녔으며, 안으로는 자기의 진성(眞誠)을 간직했고, 밖으로는 인간과 천상(天上)이 의지할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총명하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다그. 해서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순종한다고 해서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뜻을 거역한다고 해서 미워하지도 않으며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자비로써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드날리고, 높은 자리에서 스승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참된 실상입니다.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직위에서 물러나 수행을 할지언정 구차하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혹 조금이라도 수단을 써서 참된 실상을 흉내내려 한다편, 밝은, 대낮에 빈딪블처럼 전혀 도움이 안될 것입니다. 성인께서는 참된 실상만을 실천해야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참 된 실싱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시 무슨 명예를 생각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곡식과 비단을 많이 쌓아두면 의복과 음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총림이 생긴 이래로 주지라는 소임에 대한 아름다운 명예는 마치 허공에 걸린 과녁과도 같았읍니다. 총명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필설(筆舌)과 변론의 날카로운 회살을 그 과녁에 쏘아 댈 적에도 모두 참된 실싱은 돌아보지 않았읍니다. 그러고서는 과녁을 적중시켰다고 했으나, 어찌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교화가 잘되고 못되고, 법도가 제대로 서고못서고 하는 원인은 주지 자리를 탐내는 명예 때문이냐 아니면 주지의 본래 임무겠습니까? 모두가 주지의 본래 임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에 달려 있읍니다.”
후진 교화에 대한 처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그러면 후진 교화를 맡아야 합니까 말지 말아야합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4대(四大) 육신 껍데기를 3계(三界)의 바다 가운데 띄웠으니, 이것은 마치 드넓은 바다에 떠도는 한 알의 좁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재빨리 나아가고 용맹하게 물러나는 일을 매일 천만회씩 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일정하지 않아서, 공직에 나아가도 시비거리가 되고 물러나도 시비거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긴 안목으로 지극한 이치를 살펴보지 못하고, 걸핏하면 시비에 미혹되어 생각나는대로 일진일퇴(一進一退)할뿐, 전혀 줏대가 없읍니다.
그러나 성현은 그렇지를 않으셨읍니다. 나아가면 받드시 바른 도(道)를 펴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생각했으며, 물러나도 여전히 바른 도(道)를 펴서 자신의 잘못을 보완할 것을생각히 였습니다. 이렇게 진퇴를 하는 동안 수백 번 죄절해도 호연한 기상으로 근심이라곤 전혀 없으셨습니다. 어찌 도의 근본자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혹 영화를 누리고 총애를 얻으려고 자기 한 몸을 위해 일을 꾸미는 자들은 나아갔다 하면 갖가지 업(業)을 짓고, 물러났다 하면 속이 상해서 걸핏하면 시비가 분분하니, 인과가 뚜렷하여 그 과보를 피할 수가 없읍니다. 도인(道人)이라면 어찌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을 조심하지 않겠옵니까?"
공(公)과 사(私)는 어떻게 다릅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
"공(公)과 사(私)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私)는 알겠읍니다만, 공(公)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요?"
나는 말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기에 감히 그것을 논하겠읍니까? 다만 옛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공(公)이란 말은 바로 불조성현(佛祖聖賢)의 본심입니다. 지극히 위대하고 지극히 맑아 늠름하게 흘로 서서 천지로도 그것을 가릴 수 없고, 귀신도 엿볼 수 없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에는 지공(至公)이 있고, 대공(大公)이 있으며, 소공(小公)이 있습니다. 지공은 도(道)이고, 대공은 교(敎)이고, 소공은 행정을 잘하는 것때〔物務〕입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녘에 샛별을 보고 말씀하시기를,'기이하구나. 모든 중생들이 다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구비하였구나" 하셨읍니다.
여기에서 성인과 범부가 신령함을 동일하게 받았다는 점을 밝히시고, 무궁토록 전하게 하였읍니다. 바로 지공의 도는 여기에 근원한 것입니다. 이윽고 300여회 동안 상대의 근기와 그릇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가르쳤던 문자와 말씀은산과 바다와 같이 넓었는데, 바로 대공의 가르침이 여기에 근본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화가 5천축국(五天竺國)을 덮고, 부처님의 광명이 증국 땅에 들어가고 나서는 절의 살림살이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공으로써 살림살이를 잘하는 것〔物務〕입니다. 도가 아니면 교(敎)를 드러낼 수 없고, 교가 아니면 살림살이를 잘할 수 없고, 또 살림살이를 잘못하고서는도를 널리 전할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모두 불조성현의 본심에서 나온 공(公)인 것입니다. 하늘이 온 세상을 두루 덮어주고, 땅이 온 세상을 받쳐주며, 바닷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봄이 모든 생물을 길러주는 것은 대단히 지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조외 공(公)이 지극함과 두루한 것에는 비교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불조의 도(道)로 말하자면, 원만함은 3계(三界)를 싸고도 남고, 훤출함은 10허 (十虛)를 관철합니다. 그리하여 한 생명체라도 그것을 증오(證悟)하지 못할 까닭이 없읍니다. 또 불조의 교(敎)로 말해보면, 3승(三承) 10지(十地) 및 6도 만행(六度萬行) 등의 수행 단계를 자세하고도 널리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한 중생도 문호에 들어가는데서 빠지지 않았읍니다. 살림살이 잘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높고 큰 전각을 만들어 강당과 실내를 꾸며놓고 한 그릇의 밥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종과 북을 울려 저숭과. 이승의 중생들을 경책하여 은택을 고르게 베 풀고 덮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불조성현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
속에 공(公)을 간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공(公)을간직하지 못하면 흔자 있을 때는 근심만 생기고, 하는 행동마다 재앙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궁색해지면 더욱 어리석어지고 혹 영달하치라도 하면 죄악만을 짓게 됩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3악도(三惡道)와 6도에 윤회하여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끌내 스스로 풀려날 길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마음에 공(公)을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루(離婁)처럼 눈밝은 사람이라도 잘못된 길에 빠지기만 하면, 천리 밖을 아는 빼어난 지혜가 있어도 한 치 앞을 못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현들께서는 차마 교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바라면서도 참된 안락이 공(公)에서 나오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복과 지혜는 사람마다 숭상하는 것이지만 복과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이 곧공(公)인 줄은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또 성현은 사람들마다 우러러보는 바이면서도 스스로가 성현이 되려면 공(公)이 바로 지름길인 줄은 모르며, 모든 사람들이 불조는 공경할 줄 알면서도 불조가 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 공(公)인 줄은 모르고 있읍니다. 공(公)은 바로 그대로 본심입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지공(至公)의 도를 그대로 가리켜 중생의 마음을 밝히고, 대공(大公)의 교(敎)를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을 비췄으며, 소공(小公)에 해당하는 살림살이〔物務〕를 베풀어 증생의 마음을 바로잡으셨던 것입니다. 마음과 공(公)은 비록 그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 그 본체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공(公)의 이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써 실현되는것도 아니며,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인위적인 조작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한결같이 그대로 바로 가리켜야만〔直指〕얻을 수 있는 도입니다. 아주 진실한 마음만이 이 도에 계합될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사량분별하면 공(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현은 도를 수행할 때에 조금도 위의 사실을 어기지 않았읍니다. 수행할 때에 조금도 사량분별하지 않고, 오로지 분명하고드 공명(公明)해서 억지로 조장하여 깨달음이 나타나키를 바라지 않아도, 그것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곤 합니다.
세속에서 그 공(公)을 속이는 자들은, 그 공(公)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마음은 속여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면,공(公)은 저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교(敎)와 도(道)를 통달하고, 나아가 살림살이를 하는 것까지도 모두 공(公)에 어긋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도, 혹 공(公)을 잘 모르고 미혹 되는 것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그 공을 알면서도 고의로 위배하며, 도리어 지공(至公)외 도를 기만하여 명예를 얻으려고도 하며, 또 소공(小公)에 해당하는 살림살이를 횡령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너무 깊이 악의 구덩이에 빠져들어가, 남들이 자기를 본받는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행위는 자기 자신을 속일 뿐만아니라 남까지도 속이는 일입니다.
옛날에 조정에서 어느 사찰을 개조하여 창고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이것을 반대하여 따르지 않자, 이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왕은 해당 관리에게 칼을 내주면서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또 항거하면 목을 쳐라. 그러나 만일 죽기를 무릅쓰고 항거하면 절을 그대로 두거라'라고 했읍니다, 드디어 그 관리가 임금께서 이 절을 창고로 고쳐쓰라고한 명령을 전하자, 스님은 웃으면서 목을 쑥내밀고 말하기를, '불법을 지키다 죽는다면 실로 시퍼런 칼날을 혀로 핥으라고 해도 달게 받겠다'라고 했답니다. 스님은 목을 내믿고서도 끌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구차하게 억지로 그렇게 할수 가있겠습니까. 모두가 진성(眞誠)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을 추측해 보건대 어찌 절간의 살림살이에 해당하는 소공(小公)만이겠읍니까. 교(敎)와 도(道)에도 깊은 깨달음이 있는 스님이 분명합니다.
수(隋)나라의 태수(太守)였던 요군소(堯君素)가 명령하기
를, '모든 승려들은 성곽에 올하가서 부역을 하라. 감히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라고 했읍니다. 이 때에 도손(道遜)이라는 스님이 태수한테 가서 항어하자, 요군소가 도손스님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르기를, '스님께서는 담력과 기상이 대단히 씩씩하십니다'라고 말하며, 마침내 부역을 그만두게 했읍니다. 이것은 대공(大公)에 해당하는 교(敎)를 지키기 위하여 창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구차하게 억지로 그랬겠읍니까.
동산 연조(東山演祖)스님의 편지를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같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모든 들판에 가뭄이 들어 손해를 많이 보았읍니다만, 나는 그것을 조금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대중 스님들이<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들고 있는데, 하나도 깨치는 사람이 없을까봐 오히려 그것이 근심일 뿐입니다'라고 했읍니다. 연조스님께서는 지공(至公)의 도에 항상 뜻을 두어, 늘 그것을 걱정하며 잠시라도 그것을 잊지 않았었읍니다. 그러니, '모든 돌판에서 가뭄으로 손해본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소소한 살림살이야 지극한 도에 비교한다면, 그 근심이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절〔僧園〕의 살림살이는 교(敎)를 일으키고 도(道)를 전하는 데에 그 필요성이 있읍니다. 교가 널리 퍼지지 못하고도가 후대에 전수되지 않는다면, 나를듯한 누각이며 용솟음치는 듯한 전각이며 남아도는 황금과 곡식이 대천세계에 가득하다 해도 공(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와 도의 허물만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 공(公)이 제대로 드러나느냐 못드러나느냐는 오직 불법이 융성하느냐 아니면 침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조심하지 않겠으며, 어찌 삼가하지 않겠읍니까! "
제자들을 지도하는데 위엄이 필요합니까?
객승이 물었다.
후진 교화에 위엄이 필요합니까?
나는 말했다.
"세상에는 위의의 종류가 둘이 있읍니다. 즉 하나는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이고, 또 하나는 권세가 높아서 생기는 위의입니다.
도덕이 높아서 생기는 위의는 자연스럽지만, 권세 때문에 생긴 위의는 인위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나온 위엄과 존경은 상대의 미음까지 복종시킬 수 있지만, 인위적으로생긴 위엄과 존경은 그저 외형만을 복종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까지 복종시키는 위엄과 존경은 자기의 눈앞에서만 위엄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만리 밖에서도 위엄과 존경을 받습니다. 뿐만아니라 현재는 물론 백세가 지나도록 그 명성은 알려져 존경과 위엄을 받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옛날에 도덕이 뛰어난 분들에 대해 요즈음 사람들은 그 유풍(遺風)에 머리 숙이며, 깊이 존경하지 않는 자가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분들의 모습을 직접 뵙고 말씀을 몸소 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야 어찌 경외하지 않았겠읍니까!
그분들의,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위엄은 한결같이 지성(至誠)에서 나왔읍니다. 모두가 자연스러워서 털끝만큼의 인 위적인 조작도 없었습니다. 도덕 때문에 생기는 위엄이 시람의 마음을 감복시키는 것은 실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현들께서 임시 미봉책으보 도덕을 문란하게 하면서 사람을 복종시키려 했다면, 사람들이 어찌 그분들에게 복종했겠습니까? 또 도덕이 갖고있는 훌륭한 가치는, 성현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문란하게 하여 사람들을 복종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도덕을 버리고 권세에 아부하면서도 그 위태로움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끄럽게 떠들며 종일토록 남돌이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만을 원망합니다. 잘못 되어도 어찌 이토록 잘못될 수가 있읍니까. 그러니 권세의 위엄이란 사람을 겉으로는 복종시킬 수는 있다해도 잠시일 뿐입니다. 눈 앉에서 돌아서기만하면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가 죽은 이후까지 위엄스럽게 존경받을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죽은 뒤에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그 권세에 무릎 꿇었던 과거를 들추어서 보복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권세가 훗날에 재앙이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존경과 위엄이 후일에 가서는 재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다행히도 우리들은 4무량심 (四無量心)의 큰 훈계를 저 멀리 서역(西域)의 부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위엄과 권세 같은 것은 한순간이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객승이 또 질문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데는 상벌보다 더 효과가좋은 것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상을 내릴 수없고, 위엄이 없으면 벌을 줄 수가 없읍니다. 스님의 말씀은보통 세상의 물정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사찰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스님이 혹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위엄을 부려 꾸짖지 않으면 어찌 되겠읍니까?"
나는 대답했다,
"분명하고도 엄연한 인과의 법칙이 실로 그대의 몸에 있읍니다. 성현께서 후세에 보여주신 모범을 누구라서 감히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위엄을 부려도 뉘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내 스스로가 도덕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 스스로 도덕을 실천하여 지성(至誠)이 안팎으로 충만한데도,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고추종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듣질 못했읍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위엄을 부리고 그러겠읍니까?
또 세상에는 임금님이 위엄을 부리지 않은 날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며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위엄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는 것이 모두 위엄이 악한자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실로 도덕이 자기 몸에 충만히지 않은데도 직위에서 물러나수양할 것은 생각히지 않고, 도리어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군림하쇠고만 애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설사 지금은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재앙을 죽은 뒤에라도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객승이 이말을 듣고 두려워하였다.
불법과 외호중(外護衆)은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객승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불법은 국가로부터 외호(外護)가 있어야만 시행될
수 있다고 하여, 불법을 국왕과 대신에게 부촉했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읍니다.”
나는 이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事)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그말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이(理)의 측면에서도 그말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수후(隨侯)라는 사람이 가졌던 구슬(珠)은 아주 존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구하려 했으며,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소유했던 구슬〔璧〕은 전혀 티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성곽도 아끼지 않고 그것과 바꾸려고했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러나 가령 그의 옷 속에 구슬이 없고 품 속에 옥이 없다면, 아부하고 굽신거려 그들과 가까이하려 해도 사람들은 멀리할 것입니다. 또 무엇 때문에 수많은 성곽도 가볍게 여기고 그 구슬과 바꾸려 하겠으며,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구하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불조(佛祖)께서는 도덕을 수양하느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몸과 부귀영화를 모두 잊으신 것입니다. 그러한데 무슨외호(外護)를 받으려고 억지로 애를 썼겠읍니까!
자기 자신이 도덕을 함양하지 못했는데도 국왕이나 대신이
정성껏 대접하는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어리석은 스님들은 자기 자신의 도덕이 어떠한지는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영화와 총애만을 얻으려고 권세있는 집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외호 세력을 찾습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잘 안되기라도 하면 원망하고 탄식하며 우울하고 성난 얼굴을 하다가 끝내는 재앙과 치욕을 당하고 맙니다. 어찌 도를 수행하는 자가 이럴 수가 있겠읍니까! "
사찰의 살림살이하는 법은 무엇입니까?
또 객승이 물었다.
"혹시 사찰〔僧園〕의 경제적인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면, 몸을 돌보지 않고 노력하여 보완해도 되는지요?"
나는 대답했다.
"모든 약(藥)은 반드시 훌륭한 의사의 문으로 모이게 마련이고, 돈은 큰 상인의 점포로 투자되기 마련입니다. 나무가무성 하게 자라면 산새들이 모여들고, 연못에 물이 가득하게 차편 달빛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옛날 설산(雪山)의 부처님께서는 만승(萬乘)의 부귀영화도 모두 버리시고 6년 동안 춥고 배고픈 고생을 감수했습니다. 대천세계(大千世界) 보기를 한 물거품 처럼 하잖게 여길 따름이었읍니다. 그러니 어찌 세간에 무슨 유위(有爲)가 있으셨겠습니까? 그러나 훌륭한 덕을 갖추시자 화려한 누각과 모든 장엄한 살림살이가 두루 쌓였습니다. 비록 열반하신 지 2,000여년이 지났지만 그 영향력은 온 천하에 가득했읍니다. 이야말로 '자기가 버린 것을 도로 자기가 거두어들 인다'라는 속담과도 통합니다.
보살이 세상을 교화할 때에 혹 구족(具足))하지 못할 경우라도 싱대방이 나를 돕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고, 오직 6바라밀을 철저하게 수행하고 나아가 4무량심〔四無量心〕을 널리 베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화의 기연〔化機〕이 원만 해져서 시주하는 사람들이 재물을 봉헌하면 담담하게 그것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시주한 사람들이 뛸듯이 기뻐하곤 했습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고르게 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이 바로 절간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복전(福田)인 것입니다.
요즈음 스님들은 무슨 일을 할 때면 참된 이치를 위배하고무엇인가를 얻으려고만 하는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가령 한 조각의 땅덩어리라도 마련하지 않으면 도리어 많은 재물을 모으며, 혹은 엄청난 권세로 군림하키도 하고, 혹은 죄를 읽어매어 남을 두렵게 하기도 하며, 혹은 잔재주를 부려 남을 해치기도 합니다. 한 때에 잠시 권세를 성취했다고는 하나 모두가 번뇌의 근본이 될 뿐입니다. 복전(福田)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 놓고도 둘러대기를, '사찰은천 년의 시방상주물(十方常住物)이며, 스님은 하루 아침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 갈 뿐이다'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천 년 상주물이 정.혜(定慧)를 바탕으로 하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동시에 행하지 않았다면, 어찌 존재할 수가 있겠읍니까! 혹시라도 그 근본〔定.慧〕을 잊는다면 이것은 마치 연못을 버리고 밝은 달을 부르는 격이며, 나무를 버리고 뭇새들을 모으려는 격입니다. 어찌 그럴리가 있겠읍니까! 도대체 어찌 그럴리가 있겠읍니까 ! "
설법하는 형식에는 어떤 것이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했다.
"설법의식(說法儀式)에는 반드시 우화당(雨花堂)과 수미좌(須彌座) 를 갖추는데 꼭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나는 대답했다.
"의식(儀式)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법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어찌 그렇게 꼭 해야만 하겠습니까. 무릇 법(法)은 일정한 모양이 없으며, 설법 또한 일정한 형식이 있을 수 없읍니다. 백주(白주)의 불자(拂子)를 휘두르고 입술을 나불거리는 것은 사상(事相: 걸모습)의 설법입니다. 부처님의 경우는 보리좌(菩提座)에서 일어나시지도 않으며, 나가정(那伽定: 부처님의 선정)에서 나오시지 않고,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법의 모양도 보이시지 않으셨지만, 불이 치솟듯이 항싱 설법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찌 굳이 49년 동안 삼백여회를 국한하여 말씀하셨겠읍니까.
모든 보살들의 경우는 보통사람이 버리기 어려운 것을 능히 버리는 보시(布施)로써 설법을 삼으셨으며, 또 남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을 능히 지키는 인욕(忍辱)으로써 설법을 했읍니다.
나아가 6바라밀과 4무량심을 닦는 것도 모두 설법이었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32종류의 모습으로 응신(應身)할 적에, 천(天). 용(龍). 귀신(鬼神). 사람. 사람처럼 생겼으나사람은 아닌 존재〔人非人〕등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나투는 것이 모두 설법인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 뭐 설법할 것이 있겠읍니까!
위로부터 여러 조사스님들이 나무집게를 들어보이고〔擎叉〕공을 굴리던 것 〔곤迷〕과, 기름을 팔던 것〔提油〕과, 흘을 흔들었던 것〔舞笏〕과, 강을 사이에 두고 손을 잡으려 했던 것〔隔江招手〕과, 눈 속에서도 마음을 편한히 했던 것〔立雪安心〕과, 초가집에서 빈주먹을 세웠던 것〔竪空拳於草盧〕과, 두 다리를 꼬고 비위굴 속에 앉았던 것〔疊雙趺於巖穴〕과, 어지러운 세상에서 목탁을 울렸던 것〔감木석鐸於紫陌江塵之隙〕과, 누런 갈대 덮힌 물가에서 낚싯줄을 드리우던 것〔於絲綸於白覡黃葦之濱〕과, 땅을 치고 뱃전드렸던 것〔打地叩舷〕과, 화살을 눈앞에 꽂아놓고 참선을 했던 것〔張弓面壁〕과, 외로운 봉우리에서 홀로 잠자던 것〔孤峰獨宿〕과. 외길에서 서로 만났던 것〔狹路相逢〕과, 소를 받아놓고도 말을 돌려주며 평상(平常)이라고 말했던 것〔得牛還馬而道出平常〕과, 옹기를 종(鐘)이라 부르는〔喚甕作鐘〕 등 말밖의 말들이 수만가지가 있었다. 이것이 모두 옥진 금성(玉振金聲)이 어찌 반드시 우화당괴.수미좌에서 한 것이겠읍니까!
도만 깨우친다면 비록 바위굴 속에서 명아주풀을 먹고 살더라도 분명히 여러 대중들에게 바른 가르침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면 호사스럽게 좋은 옷을 입고 매우 존엄하게 큰 법상에 올라가, 질문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그에 대한 대답이 병 속의 물을 쏟듯이 막힘없이 줄줄 나온다 해도 말만 많아지고 뽑내는 마음만 더욱 늘어날 뿐입니다. 세정 (世情)에 아첨하여 세속의 풍속을 좇으면서도 스스로 말하기를, '불법을 설하여 만 중생을 이롭게 하며,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 한다'라고 하니, 그 잘못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읍니다.”
깨달은 스님마다 그 행적이 왜 다릅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옛 사람들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는, 혹 외로운 봉우리에서
흘로 머물기도 하였고, 혹은 시장바닥으로 들어가 포교하기도했으며, 혹은 제 마음대로 교회의 방편을 펄치기도 했고,혹은 오로지 불조(佛祖)의 정령(正令)만을 다루기도 했으며,혹은 문전 가득히 제자들을 제접하기도 했으며, 혹은 아무도만나지 않기도 했으며, 혹은 자취를 끊고 은거하기도 했으며, 혹은 명성이 온천하에 떠들썩하게 하지도 했으며, 혹은직접 세싱의 환란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혹은 고질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달마스님의 제자들이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달마스님이 곧바로 가리킨〔直指〕뒤 참된 자심(自心)을 깨달은 점은 모두 동일합니다. 그러나 3세(三世)의 허환(虛幻)으로 맺어진 업(業)을 받는 점에서는 서로 다릅니다. 업보의 인연〔報緣〕에 따라 살아간 측면에서 본다면, 그저 고요함을 즐기기 위해서 외로운 봉우리에 흘로 머물렀던 것도 아닙니다. 또 그저 시끄러운 것을 좋아해서 시장터에 들어가교화를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교회의 방편을 베풀었다고 해서 이단에 빠지는 것도 이니며, 한편 불조의 정령만을 다룬다 해서 정통인 것도 아닙니다. 또 제자가 문전에 가득했다하여 구차하게 세속에 영합한 것도 아니며, 친구라고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뿐일 정도로 흘로 살았다 해서 외물(外物)을 끊은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아무도모르게 은거했다해서 고상하게 여길 것도 없으며, 명성이 온 우주를 떠들썩하게 했다해서 자랑할 것도 못됩니다. 영고화복(榮枯禍福)은 모두가 각자의 인연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금강정안(金剛正眼)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세상 일이란 작은 티끌이 눈앞을 스치는 정도도 못되는데, 어찌 어지럽게 애증취사(愛憎取捨)의 쓸데없는 생각을 내겠습니까! 그래서 용문사(龍門寺)의 청원(淸遠 : 1067~1120) 스님께서는, 각자가 겪는 업보의 인연들은 모두가 헛된 그림자에 불과한데 억지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또 연조(演祖)스님께서는, '모든 것에 도(道)가 들어있는데도 그저 과거의 인연만을 믿고 그것만 따른다'라고 지적했읍니다. 실로 지극한 이치로 비춰보지 않으면 세싱의 갖가지 일에 휘말려서 미혹되고 말 것입니다.”
임제스님의 법손들만이 번성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스승의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교화를드 날리는 목적은 제자들을 길러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전승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5종(五宗)의 문중에서 오직 임제스님의 계열만이 북쪽에서 내려와 혈맥을 계승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가 법사(法嗣)가 끊겨버렸읍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법을 전수하고 받을 즈음에 부촉을 안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인연이 그렇게 되도록 된 것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성인의 도는 시절 인연에 따라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 인물의 성쇠와 교화하는 방편의 방편침체는, 한 털끝만큼이라도 인위적으로 더 보태거나 덜 수가 없습니다. 옛날 우리 달마조사께서는 인도땅을 떠나지 않고서도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께서 미리 하신 예언을 받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청원(靑原)스님과 남악(南嶽)스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때에도 5가(五家)는 이미 정해진 이치가 있었읍니다. 5가(五家)가 한창 성대할 당시에 길고 짧은 운수에 어찌 일정한 이치가 없었겠습니까. 다만 서로가 어리석어서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제스님은 자상하여서 자세하고도 간절하게 제자들을 지도하고 또 기연(機緣)도 뚜렷하였고말씀은 활구(活句)였다. 스님이 제자들을 단련하는 것은 마치 손을 뒤집는 것처럼 신속하였다. 그래서 임제가풍의 명성이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은 이와는 달랐기 때문에 그 법이 세상에 오래 가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선철(先哲)을 속이고 비방하며 잘못된 견해로 시비거리만을 삼을뿐만 아니라, 나아가 바른 이치까지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스승의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평등한마음으로 교화를 베풀어 불법이 이 땅에 오래 가도록 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합니다. 대부분이 제자〔法嗣〕구하는 일에만 급급하여 세속의 못된 풍습만을 본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력과 이익으로써 결탁하고, 명예와 지위로써 서로를 유혹하며, 물욕(物欲)에 끄달리고, 나쁜 생각으로 싱대를 속입니다. 이렇게 하면 제딴에는 수천백년 동안이나 그 법사(法嗣)가 끊기지 않고 전승되리라고 믿지만, 진리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어찌 이익만 없겠습니까? 실로 엄청난 피해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월당(月堂 : 1089~1171)스님은, '한 낮에 오이밭에 물을 주어서 도리어 오이덩굴을 죽이는 격이다'라고 비유하시기도했고, 석실(fil : 1293N1389)스님의, '겨드랑이를 부비고 신선이 되려고 깃털을 꽂는 격이다'라는 나무람이 승가(僧伽)의 속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되려고 스스로 뉘우치지 않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옛날 운문(雲門)스님은 목주(睦州)땅의 도명(道明)스님으로부터 법(法)을 얻었읍니다. 그런데 도명스님은 운문스님을 끝내 설봉(雪峰)스님의 법을 계승하게 했읍니다. 그래서 총림에서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읍니다. 또 자수(慈受)스님은 장산(莊山) 땅에서 불감(佛鑑 : 1059~1117)스님을 친견했는데 집안에서 기이한 만남이라 하여 그 법사(法嗣)를 바꾸려 하자, 불감스님은 끝내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총림에서는 이것을 매우아름다운 일로 돌리고 있읍니다.
나의 도가 다른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지 못할까를 염려할뿐, 법사(法嗣)가 바뀐다고 해서 무슨 흔들림이 있었겠습니까? 비유하면 동쪽에 있는 집의 등불을 붙여다가 서쪽에 있는 등불에 점화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직 어둠을 타파하여 밝게 하는 것만이 최고의 미덕일 뿐입니다. 어찌 나의 등불이 홀러 들어온 유래에 대해서 상대방이 잘 모른다고 속좁게 그것을 따지겠읍니까! "
깨달은 내용을 설법할수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능엄경」에서 말하기를, '내가 멸도한 후 보살이나 아라한이 말법 세상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들과 동사섭(同事攝)을 하면서도, 내가 진실한 보살이며 참된 아라한이다‘라고 스스로 말하고,'부처님의 밀인(密因)을 누설하고말세의 학자들에게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오직 생명이 끝날때에 은밀하게 부촉하는 것만은 제외된다'라고 했읍니다.
요즈음 스승의 위치에 앉아있는 스님들을 살펴보니 여러 무리 앞에서 깨달은 연유를 말하고, 혹 배우는 시람들이 믿지 않으면 정말이라고 거듭 맹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옛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어기고 후세 사람의 허망한 습속을 조장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요?"
나는 대답했다.
이 말에는 그 유래가 있읍니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 모든 조사스님들의 본전(本傳)을 뽑아 편찬할 때 반드시 그가 깨달은 연유를 우선적으로 실었습니다. 그가 깨닫던 때에는 마치 오랫동안 잊었던 것을 갑자기 기억한 것 같기도 했으며, 벙어리가 꿈을 꾸는 듯도 했으며, 오직 자신만이 알뿐 그 밖의 사람들은 알 수 조차 없었읍니다. 이야말로 스스로 몸소 증득한 삼매(三昧)이기 때문에 입을 막고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어찌 들오리〔野鴨〕에게 묻고, 포모(布毛)를 불며, 도화(桃花)를 보고, 뿔로 만든 피리〔畵角〕를 듣는다는 따위의 허깨비 같은 말이 있을 수조차 있겠읍니까! "
대체로 이런 말이 있게된 데에도 그 까닭이 있읍니다. 그것은 스승이 따져 물어서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한 경우도 있고,혹은 어떤 경계를 굳이 설명하자니 그렇게 한것이며, 혹은 증오한 깨달음이 전혀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오랜 뒤에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으며, 혹은 그 당시에 나쁜 소문이 나돌지 못하도록 하려고 그런 말을 하기도 했으니, 모두가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깨달은 것을 걸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그런 것도 있읍니다만, 이미 깨달은 대열에 들어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도 있읍니다. 다만 아주 비밀스럽게 감추어 걸으로 드러나게 하지 않으려고 했었을 뿐입니다.
정말 도를 체득한 분들은 일찌기 깨달았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산속에 훌륭한 옥(玉)이 묻혀있는데도 겉에는 그저 초목만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과도 같고, 또 연못에 보배 구슬이 들어 있는데도 걸으로는 그저 파도와 물결만 출렁이는 것처럼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진짜 깨달은 스님〔本色宗匠〕은 자신이 체득했다는 사실을 구차하게 끌어들여 남들이 믿어주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한마음을 내고 사념을 요동하면서까지 기연(機緣)을 교묘하게 만듣어서, 그 당대의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나아가 후배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의 능력에 알맞게 자세히 지도하다가 혹 제자들이 믿지 않더라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실로 생멸심을 망령되이 내어서는 절대로 삼매(三昧)를 바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깨닫는 이치를 어찌 비밀스럽다고만 하겠으며, 또 어찌 누설했다고만 할 수 있겠읍니까!”
열반하는 모습으로 도의 깊이를 따질 수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했다.
"참선하는 스님은 임종할 때에 앉은 채로 입적하기도 하며, 혹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읍니다. 임종할 때에 앉은 채로 입적하는 분은 무엇을 지켜서 그렇게 되는지요?"
나는 대답했다.
"지킬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업연(業緣)에 관계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굳이 그것에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보통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알음알이가 소멸하여 바깔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견해〔見〕가 물러나고, 집착이 없어져서 앉은 채로 열반하는 것〔座脫〕같은 것은 애초부터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혹 임종할 때에 질병의 고통이나 다른 근심 걱정에 걸리지 않으면 요요분명(了了分明)하여 초연히 흘로 육신의 껍질을 벗어납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벗어버리고 활개치고 가버려는데 무슨 앉은 채로 열반에 든다는 것 따위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세상에는 더러 도를 배우거나 수행하지 않았던 사람도 가끔은 앉은 채로 열반하는 자도 있읍니다. 나아가서는 죽으려 할즈음에 광채를 드날리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보연(報緣)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
일반적으로 도를 익히는 사람들이 심요(心要)를 힘써 궁구하지 않고, 죽을 때에 초연히 해탈하지 못하면 남들이 흉볼까만을 염려하여 앉은 채로 열반하려고 애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외도 마구니가 그대가 죄탈(座脫)을 지중하게 여기는 틈을타고 들어와, 그대에게 죽는 시기를 미리 알게하여 갖가지 기이하고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할 것입니다. 이는 자못 마구니에게 붙들려 3악도(三惡道)를 돌게 된다는 사실을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바른 이치에 보램이 되겠읍니까.
더러 진실하게 마음을 깨달은 사람 중에도 임종할 때에, 혹독한 독에 중독되기도하고, 혹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혹은 오랫동안 이상한 질병에 걸려 온몸을 지탱하지도 못하여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소에 도력(道力)을 잃지 않은 사람은 정념(正念)을 굳게 지키며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뿐, 일찌기 지극한 이치에서 조금도 떠나질 않습니다. 임종할 때에 혹 죽지 않으려고 하거나, 혹은 산 사람에게 비위를 거슬리는 말을 하거나, 혹은 억지로 한 생각을 내어 어떻게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 해로움이란 대단히 큽니다.
어떤 큰스님 중에는 죄탈할 것을 미리 알리기도 하며, 몸에서 향기를 내기도 하며, 혹은 짐승들이 슬피 울기도 하며, 혹은 초목이 시들기도 하며, 화장할 때에 불빛은 휘영청하고 사리(舍利)에서는 광채가 나며, 갖가지 생각지도 못할 신이(神異)한 일이 4부대증(四部大衆)을 깜짝놀라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세세생생에 선지식이 되어 정.혜(定慧)를 닦아온 승인(勝因)이 좋아서, 이와 같이 특이한 과보를 낸 것일 뿐입니다. 결코 스님께서 억지로 집착하여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면 혹 수행이 높은 보살이 세상에 나와 교화의 방편을 펴고, 그와 같은 훌륭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은 한 생(生)을 참학(參學)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보연(報緣)에 관계된다는 말이 오히려 적절할 것입니다.”
이제껏 스님의 말씀도 사구(死句)가 아닙니까?
객승이 질문했다.
"제방에서 하는 설법은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알 수조차없도톡 하니,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설법〔活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용이 있는 법〔實法〕으로써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으니 이야말로 죽은 설법〔死句〕이 아닐는지요?"
나는 대답혔다.
"그대는 제방의 살아있는 설법 중에서도 살아있는 말만을본받으려 하고, 죽은 설법〔死句〕중에서 죽은 말은 조금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대같은 분이야말로 설혹 죽은 말〔死句〕을 본받아 죽게 되더라도, 오랜 뒤에는 반드시 그 죽음에서 흘연히 살아나 그 활구(活句)만을 또렷하게 볼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한밤 내내 했던 대화가 이쯤되자, 숲속에서 새벽 닭은 울고 동방이 점점 밝아왔다. 나는 그만 잠이 들고 그 객승 또한 말을 잊었다. 잠깐 있다카 깨어 나서 밤채 담론했던 내용을 생각해 보았더니, 끝내 한 글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연히도 동자가 붓으로 종이에 내용을 수록하여 나에게 보여주길래, 나는 화를 내면서 물리치고 꾸짖었다.
"나는 이런 말을 한적이 없다. 이야말로 총림에서 죽과 밥 먹는 그 기운이 뻗쳐서 한 헛소리이니 마땅히 물리쳐야 하느니라”
山房夜話 下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