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간화선) 집중수행

3, 간화선(看話禪)의 수행

통융 2016. 10. 11. 07:17

3, 간화선(看話禪)의 수행

1) 좌선(坐禪)

어떤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는가?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 니라.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다. 설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정()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쳐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을 떠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밖으로 모양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하므로 선정(禪定)이라고 이름하느니라.“ ()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육조혜능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 끝과 같이 나누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참선은 정과 혜를 함께 닦는 수행법이다. 이를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 한다.

()과 혜()는 수행의 증득의 측면을, ()와 관()은 닦는 방법의 측면을 이르는 말로 이해되어 지관쌍수(止觀雙修)라고도 한다.

*정혜쌍수(定慧雙修)-선정과 지혜는 서로 따로 닦을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 닦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혜는 본디 계··혜의 3학으로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인데, 후세에 선을 닦는 자가 선정에만 치우치고, 교를 공부하는 자는 혜학(慧學)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낳았다.

원래 교는 지식문과 이론문이고, 선은 실천문이다. 지식과 이론을 마음 닦는 방법에 대한 안내라고 보면, 선은 그것을 실천, 체험하는 방편이다.

고려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선교상자(禪敎相資)의 정혜쌍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하여 그릇된 폐단을 없애 올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하였으며, 이것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 표현하였다. 이 정혜쌍수는 보조국사 이후 우리나라 선종의 중요한 수행법이 되었다.
*지관쌍수(止觀雙修)-‘사마타(samatha)’위빳사나(vipassanā)’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술어이며 특히 상좌부 불교(초기불교)의 수행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핵심 술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두 술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와 관()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지와 관을 고르게 닦을 것을 강조하여 지관겸수(止觀兼修,지관쌍수)로 정착되었고, 이것은 다시 선종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계승되었다.사마타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는 삼매를 개발하는 수행(삼매, , samādhi)이며, 위빳사나는 유위제법[]을 명상하고 관찰하여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수행(통찰지, , pannā)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계신다.

고행고주고와고기 개응지관구행(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대승기신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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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의(坐禪儀)
좌선을 할 때는 그 기초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뿌리가 깊을수록 나무가 잘 자라듯이 기본적인 좌선의를 갖추는 것은 꼭 필요한 기초를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제방선원에서는 남종(南宋) 휘종(徽宗)때 자각(慈覺)선사가 지은 좌선의를 규범으로 하여 좌선하고 있다. 아함경 말씀과 천태지관과 백장청규를 토대로 하여 좌선의 전통적인 격식을 집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참고로 하며, 호흡법에 대하여 부연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자각선사의 좌선의를 분석해 보면 좌선의 기본법식으로 열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큰 원을 발하는 것이고(서원誓願), 둘째는 모든 인연을 놓는 것이며(사연捨緣), 세째는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고(조식調食), 네째는 잠을 조절하는 것이며(조면調眠), 다섯째는 처소를 선택하는 것이고(택처擇處), 여섯째는 몸을 조정하는 것이며(조신調身), 일곱째는 호흡을 고르는 것이고(조식調息), 여덟째는 마음을 고르는 것이며 조심(調心), 아홉째는 마장을 판단하는 것이고 변마(辨魔), 열재는 두호하여 지켜나가는 것이다 호지(護持).   

a, 서원(誓願)-도를 배우려는 대장부는 무엇보다도 그 뜻이 커야 한다. 불보살의 서원을 자기 서원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이 보살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자는 일체중생을 맹세코 건지겠다는 대비심과 대서원을 일으켜야 하니 ,만약 자기 일신만의 해탈을 생각한다면 이는 보살일 수 없고 따라서 바른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b, 사연(捨緣)-좌선하는 데는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인연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 마음속의 세간 잡사나 세간적 욕망이나 원한이나 구하는 생각이나 잡념을 가지고 있고서는 그 마음에 밝은 달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c, 조식(調食)-음식을 조정할 일이다. 힘을 낸다고 과식해서는 안 된다. 수도인의 식기(食器)를 응량기라 하듯이 자기 양에 맞추어서 적당히 먹어야 한다. 먹고 싶은 양의 부를 먹는 것이 선가식의 적량(適量)이다. 좋다고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거칠다고 덜 먹어서도 안된다. 음식은 이것이 몸을 부지해 가는 약이다. 이 약은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히 대하여야 한다. 오래 씹어 천천히 먹어야 한다. 먹으면서 잡념을 해서도 안된다. 생식(生食)을 하거나 담식(淡食)을 하는 것은 권할 바가 못 된다. 비시식(非時食)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단식은 병을 고치기 위한 이유 외는 마땅하지 않다. 참선에서 그 양()을 알아서 먹는다고 한 것은 수행하는 정신자세와 환경을 꾸며 가는데 중요한 것이므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일즙(一汁) 일채(一菜)가 선가의 식사지만 이 식사에 무성의하면 안된다. 식사를 고루하지 않으면 필경 마음이 고르지 아니하여 공부가 한결같지 못하게 된다.


d, 조면(調眠)-잠을 고르게 자야 한다. 수면을 즐기는 자는 도에 들 수 없다. 그렇다고 수면을 너무 절제하여도 공부에 지장이 된다. 수면부족은 의식부족과 함께 퇴타 인연이 된다. 대개 처음 선에 드는 사람들이 잠을 줄인다고 애쓰는 것을 본다. 우선 일정한 시간을 자는 것이다. 그리고 좌선의(坐禪儀)에 따라 정성스레 공부해야 한다. 좌선의에 따라 좌선을 계속하면 절로 수면시간이 단축되는 법이다. 특히 좌선의 호흡법은 중요하다. 되도록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일이다 . 저녁 참선을 오래하고 늦게 일어날 생각하면 안된다. 저녁 공부시간을 줄이더라도 아침 공부시간을 지키는 것이 좋다. 혹 피곤하다고 저녁공부를 궐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피곤 할 수 록 정성들여 좌선하여야 한다. 피곤한 밤의 30분 참선은 다음날 심신을 가볍게 하고 2시간의 수면을 절약시켜 준다. 수면은 망념에서 온다.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수행에 따라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든다. 수면시간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좌선을 성실히 하면 저절로 수면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힘찬 정진을 할 수 있다. 대개 선원에서는 연중 한두 차례는 수면을 전폐하는 용맹정진을 갖는다. 그런 때에 평소부터 좌선자세를 엄격히 한 사람이라면 일주간의 용맹정진은 무난히 넘어갈 수 있게 된다. 수면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할 일이다. 선객 중에서 눕지 아니하고 마냥 앉아 있는 용맹지사를 흔히 본다. 그리고 좌선 중에는 조는 것도 흔히 본다. 졸면 좌선이 아니다. 졸면서도 좌선코자 하는 정신은 장하나 그것은 좌면이다. 그러므로 장좌불와(長坐不臥) 한다 하여 좌면하는 것을 권할 수는 없다. 공부는 마땅히 진실 하여야 한다. 잘 만큼 잤거든 오뚜기 처럼 일어나 공부를 잡두리 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e, 택처(擇處)-장소를 가려야 한다. 자각 선사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을 말하였다. 古來로 좌선은 깊은 산중이나 세간을 떠난 한적한 곳이나 세속과 경계를 달리한 사찰을 적당한 곳으로 일러왔다. 처음 좌선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소란스런 환경은 좋지 않다. 되도록 조용한 환경이 좋다. 그러나 조금만 좌선에 힘써 본 사람이면 무리하여 고요한 곳을 찾을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간절한 발심과 착실한 좌선기초의 수업이다. 스스로 좌선의가 바로 서고 뜻이 간절하면 웬만한 장소면 다 상관이 없게 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고 했다.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어디에서 어디든지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수행도량이요 수행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버스나 전철 안에서, 산행하면서, 운전하면서, 설거지 하면서, 산이나 바다에서, 들에서나 등등 어디에서건 할 수 있다.


f, 조신(調身)-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 좌선할 때에는 우선 두꺼운 방석을 준비하고 허리띠를 늦추어 몸과 호흡을 자유스럽게 한다. 그 다음에 방석위에 가부좌(跏趺坐)를 한다. 가부좌는 반가부좌도 무방하다. 반가부좌는 다만 왼발을 오른쪽발 위에 놓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른 손을 왼발 위에 놓고 왼손을 바른 손바닥 위에 겹치며 양쪽 엄지손가락 끝을 서로 둥굴게 맞댄다. 이것이 대삼마야인( 大三摩耶印) 또는 법계정인(法界定印)이다. 그 다음에 몸을 서서히 바로 일으키며 허리를 반듯이 편다. 이때에 몸을 전후로 약간 움직여서 허리를 단정히 세우고 또한 좌우로도 반복 흔들어 몸을 자연스럽게 단정하게 한다. 몸이 기울어지면 안된다. 앞으로 굽거나 뒤로 제쳐도 안된다. 어깨에 힘을 주어도 안된다. 턱은 당기고 눈은 반쯤 떠서 코끝을 보는 상태로 한다. 귀와 어깨가 서로 대하고 코와 배꼽이 서로 대하도록 반듯이 한다. 혀는 입천정에 대고 입을 가볍게 다문다. 가부좌나 반가부좌일 때 익숙할 때 까지는 다리가 쉬 아프다. 그럴 때는 너무 참지 말고 다리를 바꿔가며 앉도록 한다. 혹 다리가 저릴 때가 있다. 이런 때는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면 가벼워 진다. 또한 허리에 힘을 주었을 때는 잠시 힘을 늦춘다. 공부가 순숙하여지면 어느덧 몸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혹 다리나 어깨가 아파오더라도 이것은 좌선이 익을 동안 잠시 지나가는 것으로 알면 된다. 정법계인은 등한히 하기 쉬운데 마음을 안정시켜 정신을 집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니 등한히 여겨서는 안 된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인을 맺어야 한다. 참선 초학자는 눈을 감기 쉽다. 그러나 반드시 떠야 한다. 옛조사는 눈감고 참선 하는 자를 흑산귀굴(黑山鬼窟)이라 하였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정신이 집중되는 듯하지만 어느덧 혼침에 떨어지기 쉽다. 특히 오후나 새벽 좌선시에 눈을 감는다는 것은 잠을 청하는 거와 같다.

좌선 중 수면에 시달릴 때는 눈을 크게 뜨도록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심하게 수마가 밀어닥쳐 오거든 어금니를 굳게 물고 두 눈을 부릅뜨며 심호흡을 깊고 느리게 십 여차례 반복한다. 그리고 들이쉰 호흡을 한참동안 단전부위에 가두고 견디다가 아주 천천히 토해낸다. 이렇게 하면 대개 졸음은 사라진다. 좌선 중에 결코 졸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앉아서 졸음이 쫓아지지 않거든 일어서서 온 몸에 힘껏 힘을 주고 나서 앞서와 같이 호흡하여 보라. 사라지지 않는 잠은 없을 것이다. 좌선은 수시 포행과 겸하는 것이 좋다.

오늘날 우리 한국선원에서는 50분 좌선하고 5-10분간 선방내를 포행하는 것이 관례지만 포행시간을 좀더 늘려도 좋다. 포행 할 때는 금강권을 하고 두 손을 곧게 내려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이때도 앉았을 때와 같이 호흡을 한다. 걸을 때 발끝과 온 몸에 힘을 반복해 주면서 서서히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때에 좌우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뚫어지게 앞만 보고 앉을 때와 같은 자세로 걷는 것이다.

포행은 바로 행선이다. 앉았을 때와 같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포행은 피로가 풀리고 맑은 정신이 돌며 몸에 활기를 준다. 따라서 용맹정진 때나 야간좌선시는 더욱 활기있게 포행할 필요가 있다. (금강권은 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의 아래 마디를 누르고 주먹을 쥔 것.)

그리고 특히 재가불자나 일반 수행자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비용 등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방법을 바로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좋겠다.


g, 조기(調氣)-호흡을 고르게 하여야 한다. 선에는 원래로 좌법도 호흡법도 필요 없지만 좌선하는 데는 반드시 좌선의 기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상기(上氣), 기타 신체상의 장애가 생겨 공부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다. 먼저 몸을 3,4회 전후 좌우로 흔들어 자세를 바르게 한다. 처음에 호흡을 한번 크게 내쉰다.(깊게), 다시 서서히 호흡을 들이쉰다.


h, 조식(調心)-마음을 고른다. 이미 몸이 안정되고 호흡이 고르게 되면 저절로 번뇌가 끊어져 맑은 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체 생각을 하면 안된다. 도 깨치기를 바란다거나, 성인이 감응하기를 기다린다거나, 또는 이것이 좋은 공부다 하는 분별심을 내어서는 안된다.


I, 변마(辨魔)-공부하는 데는 마군의 장난이나 공부가 바로 되고 잘못됨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도가 높아지면 마()가 성한다. 마음이 밝아지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스스로 여러가지 경계가 나타난다. 경계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공부를 방해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마군의 장난이나 삼매력에 상응하는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구하는 것이 있거나 망념이 잠복되어 있을 때, 혹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에서 희한한 생각을 갖거나 그 경계를 인정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의 나타남이다. 어떠한 마장이 와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화두를 참구하라.
j 호지(護持)-좌선 할 때의 마음 상태를 어느 때나 끊임이 없도록 잘 지켜야 한다. 좌선에서 일어서 포행 할 때와 같이 선실에서 나와 밖을 거닐더라도 항상 좌선하는 마음 상태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서 나올 때는 조용히 몸을 움직이도록 하고 갑작스레 일어서면 안 된다.

행 자세는 수행하는 사람이 편한 자세면 된다. 행주좌와(行住坐臥)로 그냥 평상시 걷거나 바닥에 앉는 자세도 좋고 누워 있는 자세도 좋고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자세도 좋다.

좌선을 할 때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가 편한 사람은 그대로 하면 된다. 수행하는 데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의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수행 자세를 강조하다 보면 수행하는 그 시간에만 열심히 하게 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수행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수행은 하루 24시간 하는 일이다.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절차나 방법 그리고 형식에 너무 취우침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재가불자나 일반 수행자들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비용 등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방법을 바로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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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두(話頭)
 화두는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나 행동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의도적으로 의문의 말을 주어서 대오(大悟)의 묘경(妙境)으로 유도하는 일종의 교육적 과제를 말한다. 이러한 화두를 모아놓은 것을 공안(公案)이라하고 조사공안이 전등록(傳燈錄)에 1701개나 되는데 그 예를 몇 개 들어본다.

최초의 화두라면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고 가섭존자가 웃음으로 답하는 것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心磨)로 불리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대 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그러한 의심이 골똘하여 더이상 물러 설 수 없는 때에 스승의 점검이나 사물 대상등이 졸탁동기(卒琢同機)의 효과를 낸다.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동기(卒琢同機)라고 한다
화두(話頭)의 원래 의미는 말머리라는 뜻 이지만, 말과 뜻 이전의 모습이며 온전히 그의 뜻에서 벗어난 자리이다. 즉 화두의 목적은 달에 있는 것이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수단에 있지 않다. 그런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화두이다 보니 그 손가락을 의심하는 것이 화두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시말해 화두는 지식이나 생각으로 문제의 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각없는 의심 하나가 의정이되고 의단이 될 대 화두가 제대로 들렸다고 한다. 
이렇듯 화두는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이끌어내는 질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받는 것은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의문을 선지식에게 물어 그 해결책을 마음으로 받는 것이다.


a, 화두(話頭)참구의 세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의 모든 법은 연기(緣起)의 이치로 독립된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어 보이더라도 본성은 본래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성품이 자신의 본성임을 자각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일체중생과 원래 자신과 더불어 하나임을 알기에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화두는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의 무지와 종말 짖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 ?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 덥는다. 말을 해도 틀리고 말 하지 않아도 틀린다. 오직 모를 뿐인데 무엇을 찾으란 말인가?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심이 되면  큰 의정[大疑情]이 생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의단이 되어 몰록 본분사를 타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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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우(尋牛)도와 선()
심우도는 동자와 소를 등장시켜 참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때 소는 인간의 진면목인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기 때문에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1) 심우(尋牛) 2) 견적(見蹟) 3) 견우(見牛) 4) 득우(得牛) 5) 목우(牧牛) 6) 기우귀가(騎牛歸家) 7) 망우존인(忘牛存人) 8) 인우 구망(人牛俱忘) 9) 반본환원(返本還源) 10) 입전수수(入廛垂手)를 말한다.
심우도(尋牛圖)’의 의미
사찰에 가면 법당 벽화로 심우도를 볼 수 있다.
소는 도가에서는 유유자적, 유가에서는 의()를 상징했지만 불가에서는 인간의 본래 자리를 의미했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비유한 심우도가 이같은 의미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그만큼 소는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 불자와 친숙하다. 대부분의 법당 벽화에 심우도가 그려져 있고, 불경 곳곳에 소를 비유한 상징들이 들어 있다.
선사들도 이러한 소를 수행의 채찍으로 삼아왔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 지눌은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했다. ‘소를 기르는 사람즉 참다운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도 만년에 서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이라 했다. ‘불성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우도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심우(尋牛) 처음에 사람이 들에서 소를 찾는 모습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춰진 원성(圓成)인 심우(心牛)를 잃어버린 뒤 그것을 찾는 것.
견적(見跡) 소 발자국을 발견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서 순수한 열의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본성의 자취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는 것.
견우(見牛) 수행자가 멀리서 소의 모습을 어렴풋이 본 것을 묘사한 그림으로 문법수학(聞法修學)의 공()에 의해 마음의 소를 발견한 것을 상징화하는 불화.
득우(得牛)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낀 모습으로 아직 번뇌와 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므로 더욱더 열심히 수행전진해야 함을 표현한 것.
목우(牧牛) 소에 고삐를 물리고 돌아오는 모습으로 삼독의 때를 지우는 보임(保任)의 단계, 즉 깨딸음 뒤에 오는 방심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책한 것.
기우귀가(騎牛歸家) 동자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는 모습으로 드디어 망상에서 벗어나 본성의 자리에 들었음으로 피안의 세계에 나아가게 된다는 것.
망우존인(忘牛存人) 집에 돌아왔지만 소는 간데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 남아있음을 묘사, 즉 본각무위(本覺無爲)로 들어왔으나 쉬지 않고 수련해야한다는 뜻.
인우구망(人牛俱忘) 자가자신도 잊어버린 상태를 묘사한 텅빈 원만상. 주객분리 이전 상태로 정()을 잊고 세상의 물()을 버려 공()의 세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낸 것.
반본환원(返本還源) 티끌 하나도 없는 수록산청(水綠山靑)의 광경으로 사람의 본심은 본래 청정하여 아무 번뇌가 없어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보게 된 것.
입전수수(入前垂手)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는 모습. 중생들에게 복과 덕을 베풀어 불교의 궁극적인 뜻이 중생의 제도에 있음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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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흡하는데 주의할 몇 가지

부처님도 말씀하셨듯이 숨이 모든 수행의 기본 챙김을 알아야 한다. 법 자체를 직접 보고 자신의 원래의 참모습을 찾는 참선을 하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호흡을 잘 관찰하여 챙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호흡을 하면서 끊임없는 번뇌 망상을 잠재우고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맑고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발견해나가는 것이 참선수행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호흡방법은 깨달음의 성품을 보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좌선 입정 중의 호흡에 대해서는 풍(), (), (), ()의 네 가지 방법이 있다. 풍상(風相)은 앉았을 때 콧속의 숨이 들고나면서 소리가 나는 것, 천상(喘相)은 소리는 나지 않지만 들고나며 맺히고 막혀서 통하지 않는 것, 기상(氣相)은 소리가 나지도 않고 맺히거나 막히지도 않았지만 들고 나는 것이 세밀하지 않은 것, 식상(息相)은 몸을 안온하게 돌보며 기분에 기쁨과 즐거움이 품어지는 것이다.  식상의 호흡은 숨소리도 없고 거칠지도 않고 숨 쉰다는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하는 호흡이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정신을 아랫배에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고 호흡을 한두 번 토해낸 다음에 이어 서서히 들이쉰다. 고르고 깊은 호흡이 되도록 힘쓰며 다 들이쉰 다음에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코로 토해내지만 실지 의념은 명문혈로 숨이 들고 남을 관찰하면 훨씬 편하다. 특히 호흡할 때는 무리해서는 안 되며 생각과 힘이 호흡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호흡하는 속도: 호흡속도를 처음부터 느리게 하려고 힘쓸 것 없다. 처음에는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의식적 호흡을 하면서 평상시 보다 약간 깊고 느리고 미세하게 하면 된다. 호흡이 익어감에 따라 더욱 미세하여지고 깊어짐에 따라서 속도도 느려지게 마련이다. 들이쉴 때는 가볍게 내쉴 때는 비교적 느리게 한다. 참선 이외의 호흡에서는 느리고 미세한 호흡을 강조하나 참선에서는 그보다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서서히 의식적 호흡으로 향하도록 하고 성급하게 느린 호흡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도는 사람따라 다르게 된다.
호흡을 들이쉬고 머무는 정도 : 호흡을 가볍게 들이쉬고 잠시 머무는데 이 머무는 시간을 오래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흔히 있다. 또한 그런 호흡법도 있는 것이다. 이것도 무리하지 않도록 짧은 시간에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서서히 시간이 늘어나게 하는 것이 좋다. 무리하게 긴 시간 머무르면 호흡이 도리어 거칠어지기 쉽다. 오래 머무는 것을 주장하는 호흡법은 좌선에서는 취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배에 힘주지 마라.: 호흡을 하복부 단전으로 하려고 하면 저절로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랫배에 힘이 들어 가게 마련이다. 생각이 호흡을 추적하면서 단전으로 진행함을 따라 배에 힘도 서서히 더해 간다. 호흡이 단전에 이르러서 호흡을 잠시동안 멈추게 되면 배에 힘이 가중된다. 이와같이 자연스러운 호흡에서 배에 모아지는 힘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무리하게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여 배에 힘을 주거나 또는 단전의 힘을 기른다 하여 의식적으로 과하게 힘을 주면 여러가지 위험이 따르다. 참선에서는 무리하게 배에 힘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호흡은 앉아서만 하는가?: 호흡은 앉아서 시작된다. 앉아서 하여야 힘을 얻기 쉽다. 그러나 차차 익어감에 따라 서서 하기 도 하고 좀 더 익숙해지면 걸어 다니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할 수있게 된다. 호흡은 앉아서 시작하여 걷고 눕고 하는 어느 동작에 서도 한결 같이 되도록 확충하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삼매가 현전하기를 기다리지 마라.: 좌선에 있어 호흡법은 이것이 선을 하는데 조도로서 하는 것 뿐 이다. 그런데 개중에는 호흡으로 어떤 삼매의 힘이나 신기한 현상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 삼매에 들고 망념이 끊어져 의식차원이 높아지는 것은 공부에 따른 자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호흡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기다린다는 것은 도리어 공부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 되고 망념을 일으키거나 속효심을 내고 치구심을 내어 참선하는 기본자세와 어긋나게 된다. 주의할 일이다. 참선에 있어 호흡은 언제까지나 조도 방편이다. 호흡을 목적으로 삼고 다시 구하는 것이 있다면 외도의 소견이다.
호흡하는 마음 상태: 앞서 말하여 온 바에 따라 여법하게 자세를 바로하고 호흡을 바로하여 나아가면 저절로 마음이 고루어 진다. 번뇌가 쉬고, 마음이 밝고, 경쾌하게 된다. 수식관을 하는 중 호흡하는 수효를 세는 것을 멈추고 오직 생각으로 호흡을 함께 하여가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은 사뭇 맑고 담담해 간다. 이런 때 담담하다는 생각이나, 맑다 하는 생각이나, 고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바로 망념이다. 오직 호흡을 정밀히 관하여 망념이 쉬게 하여야 한다. 고요하고 말끔한 정신이 있는 마음 상태 이것이 좌선하는 마음상태다. 좌선규식이 자리가 잡히면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화두를 들어 마음을 잡두리해 나아가면 자성을 깨치게 될 것이며, 설사 화두가 아니더라도 선지식의 바른 지도를 받아 말끔한 정신 성성(惺惺)와 고요 적적(寂寂)를 함께 닦아가면(등지=等持) 대도의 문이 열리게 된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 자각선사의 좌선의에 이르기를 [만약 좌선하다가 일어나고자 하면 몸을, 천천히 움직여서 평온하게 일어나라. 결코 갑작스레 움직이지 마라.] 정에서 나온 뒤에는 항상 방편을 지어서 정력을 호지하기를 어린 아기를 다루듯이 하라 . 그러면 정력을 쉽게 이룰 것이다.]하였는데 이것을 올바로 행하자면 무엇보다 호흡을 정밀히 하는 기본적 좌법이 몸에 배어야 하는 것이다. 좌선에서 일어날 때는 먼저 수인(手印)을 풀어 무릅 위에 놓고 호흡을 크게 3,4회 토한 다음 몸을 좌우로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가부좌한 다리를 일으켜 세워 몸 자세를 편하게 하고 조용히 일어선다.

 

5) 점검과 보임

참선은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법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른 견해를 가지지 못하면 손가락을 달로 보는 착각에 빠지고 아무리 오래 수행을 한다 해도 깨달음이 멀다.

정법을 가르치는 선지식을 만나야 하고 반드시 점검을 하여 옳은 길로 수행을 하는지 점검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 완전히 깨친 도인들은 어떤 화두나 선문답은 하나의 비밀열쇠가 있기에 그 열쇠로서 모두 열 수가 있고 풀 수가 있다. 그 열쇠를 찾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견성(見性)했다고 공부를 다 해 마쳤다고 볼 수는 없다. 개개인의 가지고 있는 과거생의 업()과 금생의 업()이 있고 개개인의 개성이 모두 다르므로 늘 깨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점검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병에 대하여 너무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가를 점검한다. 그리고 높은 절벽에 올라 절벽 밑을 바라볼 때의 그 마음이 어떤지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역경에 처했을 때의 마음의 자세나 화가 치밀어 있을 때의 그 마음은 어떤지 점검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 특히 부인이나 남편에게서 욕하는 소리, 큰소리치는 소리, 신경질적인 소리, 등을 들었을 때의 그 마음도 보아야 한다. 그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수행을 돕는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수행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험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의 깨침의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속 수행정진에 돌입하여야 한다.

공부를 마치신 도인들은 모든 세상일에 만족하며 감사히 여기면서 걸림 없는 행복한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보시하며 자기 자신이 공부한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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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좌선에 들어갈 때의 방법
1, 좌복을 펴고 반좌(盤坐)로 편안히 앉은 후에 머리와 허리를 곧게 하여 앉은 자세를 바르게 하라. 어깨와 전신의 힘을 뺀다.

2, 가급적이면 단전에 모든 의념을 집중하며 숨을 쉬면서 배(단전)가 들고 남을 집중하라.

3, 입은 지긋이 다물며 혀끝이 천장에 닫게 한다. (이빨을 너무 세게 깨물면 이빨이 운동하는 상태가 되므로 주의하고, 혀를 입천장(은교혈)에 붙이는 것은 임맥과 독맥이 회통하게 하는 것이다.) 원활한 기혈 순환과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되면 맑고 윤활한 침(玉水)이 입에 가득 하다.

4, 숨은 편하게 들숨과 날숨을 쉬되 들이쉬면서 배가 부풀어짐을 의식하고 내 쉬면서도 배가 들어감을 의식하라.(처음에는 집중을 유도하기 위하여 숫자를 세면 좋다.) 숨이 고르게 되면 숨을 옴 몸으로 들이쉬고 내쉰다는 생각을 갖고 호흡을 하게 되면 내 몸이 살아짐을 챙기게 되고 그럴 때 화두를 들숨과 날숨에 실어 놓으면 저절로 화두가 들려지는데 온전히 화두만 남게 된다. 그렇다고 화두를 의식으로 상념하면 안 된다. 그냥 일뿐, 알려 해서도 안 되고 오직 모를 뿐이다.

5, 눈은 자연스럽게 뜨며 가급적이면 눈은 5분 이상 감지 말며 (눈은 항상 뜨는 것이 수마(睡魔)를 제거하는 데 필요하다.) 정신 기운이 상쾌하여 눈을 감아도 수마의 침노를 받을 염려가 없는 때에는 혹 감고도 하여 보라. 만일 혼침이 오면 화두를 가볍게 소리 내어 보고 그래도 잠을 참기 어려우면 가볍게 일어나 주위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게 행선을 한다.
6, 정신은 항상 적적(寂寂)한 가운데 성성(惺惺)함을 가지고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는데 머리로 의심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생각은 단전으로 모으고,

내 주위에 벽이 막혀 있어서 밖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내 몸이 없다는 생각과 얼굴과 머리도 목 아래로 내려와 없다는 생각으로 오직 들숨과 날숨을 관조하면 화두가 달아나지 않는다.

7, 처음으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흔히 다리가 아프면 잠깐 바꾸어 놓는 것도 좋으나 가급적이면 아픔을 참아보라, 그러면 어느 한계를 지나면 몸의 살아짐을 경험하게 되며 집중이 빨라진다. 또한 망념이 생기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고 그냥 내버려 두면 스스로 없어지니 의도적으로 없애려고 하지마라.
9, 좌선을 하다보면 얼굴과 몸에 개미 기어 다니는 것과 같이 가려움이 생기고 몸 떨림 현상이 나타는데 이것은 혈맥이 관통되는 증거이며 몸의 마구니에게 조복을 받는 것이니 긁고 만지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10, 의념이 집중되고 참선이 잘 된다고 이상한 기틀과 신기한 자취를 구하지 말며, 혹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연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마음에 두지 말고 오직 화두에 집중하라.

이상과 같이, 바른 좌선으로 참구하게 되면 의심과 의정과 의단의 경계에서 오래오래 계속하면 몰록 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만 경험한 각자의 느낌이니 달리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그 때는 선험자나 선지식을 찾아서 정검을 받고 스스로 그러함에 행복하라.



<위의 내용 중에 일부는 스님들과 불교학자들의 책과 법문 등 자료를 참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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