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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노예가 되지마라! 종범스님

통융 2016. 4. 1. 09:15

 

 

'목요일 날 아침에 꽃의 광장에서 나폴리 놀라 출신의 그 흉악무도한 도미니코 수도사가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죠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가 우주론을 주장하며 '지구는 돈다' 고 한 것이 신의 진리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처형 당하는 모습을 당시 로마의 신문 <아비시 디 로마>가 1600년 2월 17일자에 보도한 내용이다.


 

 지금은 상식인 지동설을  신의 창조론으로 인식된 당시의 종교관으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지키기 위해 결국 화형까지 당한 브루노와는 다르게 당대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지구가 자전을 하고,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해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었으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풀러났다. 풀려 나오면서 한 유명한 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 는 말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 인간의 지식은 변한다. 하지만 참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만약 종교재판에서 주장한 신의 진리가 참이었다면 그들은 영원히 이단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들은 위대한 선구자적인 과학자로 업적을 인정 받는다.

이러한 무지한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죽어간 역사가 있으면서도 아직도 그 신의 이름을 앞세워 지식의 잣대를 들리대고 그것을 믿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특히 우물안 개구리 처럼 자신들이 신앙하고 추앙하는 지식의 카테구리 속에서만 세상을 내다보는 식견일 때 더욱 그렇다. 

 

' 너 자신을 알라'는 아테네 청년들에게 진리를 깨달으라고 가르킨 죄 밖에는 없지만 역시 신을 모독한 죄로 " 악법도 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BC 399년 5월7일 사형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있다.

 안다는 것은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한 것이며 참 지혜는 우리의 삶과 자신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을 때 나타난다고 했다. 결국 누구에의헤서 어떤 신의 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깨달을 때 신이 영접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하니까 누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은 누구인자 아십니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를는 것을 압니다"

결국 지식으로 우리 자신을 알 수는 없다. 오직 깨달음이란 스스로 행함 일 때 그것이 일뿐이지 지식을 무엇이니 뭐라고 하는 것은 설멸하는 사족인 것이다.

 

목사이면서도 유··, 동양 삼교를 꿰뚫고 동서양 철학에 막힘이 없다이화여대 교목으로 40년간 목회자로 활동한 김흥호목사의 이야기다.

그는 법화경, 원각경, 화엄경, 양명학 등 다른 경전에 대한 책도 많이 썼다.

다른 종교의 경전도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것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말한다.

결국 그는 지식이 아닌 진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리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통하게 되어있다. 통한다는 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말이다.

우주의 모든 법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며 나 또한 그 우주 속에서 하나의 개체이잔 결국은 우주 전체를 품는 큰 하나로 우주 통체로 나가 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거기에는 분별이 없다. 너와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기된 나이기 때문에 어떠한 신도 어떠한 대상도 모두가 사랑과 자비만 존재 할 뿐이다.

그럴 때 내 안에서 흐르는 기운은 만리무운 만리천 천강유수 천강월 만리무운 만리천이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같이 푸른 하늘에 떠가는  희 구름의 속삭임 같이 환희와 기쁨만 존재한다.

 

지식으로 집착하는 분별심만 내려놓고 확장된 의식을 깨닫기만 한다면 말이다.

안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인간의 능력으로 분별해 놓은 지식은 변한다.

그것을 능가하는 지식이 나타나면 사장되고 만다. 그러한 현상이 시간적으로 빠르나 아니면 늦는 차이일뿐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한 것들을 증명하고 있다.

한 개인의 생각도 그렇게 변해간다.

자신이 확신하게 믿었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서 아니면 어떤 상황에 따라 변해간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ㅇ ㅔ대해서 불안해 한다. 늘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은 늘 새롭게 깨어나지 않으면 않된다.

시절 인연에 따라 지식은 변한다. 지식뿐만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한 찰나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즉 변하지 않는것이 없다는 지식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지식이다. 이러한 것을 진리라고 한다.

 

 

 

 

하지만 지혜는 영원하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대학생이 된 만 20세 이후 서서히 역량이 떨어져 35세부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가 되고, 55세 이후엔 밑바닥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일단 통과하면 추락이 지속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주호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리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정책 세미나에서 이 같은 내용의 '한국인의 역량과 연령: PIAAC 데이터의 실증 분석'을 발표한다. OECD 21개 국가를 대상으로 2011~12년 실시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자료와 2012년 치러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자료를 활용한 연구 결과다.

고교생에 해당하는 17~19세 한국인의 PIAAC 성적은 여전히 높았다. 수리력(수학)·언어 영역에서 각각 네덜란드와 일본 다음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이후인 20세 이후부터 순위가 급격히 떨어져 10위권 안팎을 기록하고, 이런 추세는 29세까지 이어졌다. 35~44세 때에는 OECD 평균보다 떨어졌고, 55세 이상에서는 조사 대상 21개 OECD 국가 중 20위였다. 40년 기간을 거치며 한국인은 세계 1위에서 OECD 최하위권으로 역량이 추락한 것이다.

연구진은 두 가지 요인을 지적했다. 우선 초중고 시절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이 나이가 들수록 학업 동기를 떨어뜨려 성인 학습 의지를 감소시키고, 한국 대학 교육의 질이 국제적 수준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한 명문대 공대 2학년에 올라가는 김모(21)씨는 "중·고교 때 공부를 너무 지치도록 해 대학 입학 후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입시 위주 공부를 독려하면서 "좋은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는 식으로 조언하는 것도 학습 의지를 약화시킨다는 게 연구진의 결론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잇는 민족이 대한 민국이다.

 

앎은 만족이 끝이 없다. 무상과 허망하기 때문이다.

지식이기 때문에 지식은 늘 변해가기 때문이다. 무엇을 한다는 것도 그와 같다.

깨달음은 지식의 많이 아는거와 많이 보여주는거를 하는거와는 다르다.

悟證이라 하는데

自淨自己 자기를 스스로 깨끗하게 한다. 자기는 색수상행식인데 생각을 연마하여 채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끗하게 비워내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는 것, 비워내는 것이다 그칠정,,끄칠지 것이다.

아는 것은 채우는 거지만 깨달음은 비우는 것이다.

길이 다르다. 아는 것은 생각을 움직이지만 깨달음은 그치는 것이다.

한 생각이라도 헛된 생각이 남아 있으면 깨달음이 되지 않는다.

습관이나 업장이 깨달음을 방해한다. 이것이 어려운거지 깨달음자체는 어려지 않다.

 

 

自見自己 보는 것이다. 의심 없이 그냥 스스로 보는 것

다음은 自用自己 스스로 자기를 쓰는 것이다.

의심을 하는 것과 자수용삼매 그대로 수용하는 것,

자기를 께끗하게 하고 자기를 보고 자기를 쓰는 것

생각을 일으켜서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아는데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 맹점이다. 어리석음이다.

수만권의 책을 쓰지만 책을 쓴 자기는 모른다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아는 것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챙피한 일리다.

장자의 추수편에 정와이

정와불가이어어해- 우룸안 개구리는 바다를 모르고

하충불가이어어빙- 여름 벌레는 얼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몽식경계-꿈에 아는 것,,의식경계-생각으로 보는것,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영식경계-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

사물을 보는 견해가 다르다.

온전한 것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 망견이고-생로병사를 보는것

조견은 더 깊이 보는 것을 불생불별을 보는 것---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원격- 그냥 그대로 청정자성 진여자성, 법계대용

필경에는 무불급중생-불중생이 없다.

생노병사는 법계대용 뿐이다.

원견이 원각대용이다.

장자가 몽위호접 인간이 아는것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있었다.

인몽호접이냐 접몽화인-나비꿈에서 사람되는것이냐 꿈인지 무엇인지 모른다.

꿈은 깨기도 하고 꾸기도 하는 것을 아는 것 이 영식이며 원각이다.-자견자기이다.

망견 떄문에 그 속에서도 모른다.

마음을 고요하게 그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보이고 그것을 도통 이라한다 무량수님 무량광님이 보인다.

보고 드드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을 집중하여 그치는 것이다.

하는 마음 아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다.

그친마음으로부터 지혜가 나오는데 그것을 개달음이라하고 정법종해 그침으로 지혜가 나온다.

원아근수 계정혜----

 

선정이 그치는 것이다. 왜 무라 했을가?

그치지 않으면 아는데로 들어가고 뭐든지 알려하고 하려한다.

 

깨달음에 비유을 환호환탄환사- 마술사가 마술로 만들어낸 호랑이에게 도리어 자기가 잡아 먹힌다.-불성론 4번째 나온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경계는 오직 식뿐(견공유식)이다. 경계는 공하고 식만 있다.- 첫 번째 밝아진 증거

경계는 내 의식의 그림자이다.심생법생-유식지- 오직 식박에 없구나 성관성지’-관이 유식지가 생긴다. 그쳐서 관찰하는 지관이 성립되면

지관이 성립되면 경계는 공하여 오직 식밖에 없어진다.

의식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서 본래의 본식까지 없어진다. 자기가 만든 호랑이가 자기가 잡아먹힌다.

깨달으려는 생각으로 애쓰다가 경계가 겅하는 것을 알면 의식이 소멸되어 욕구가없어져서 깨달으려는 마움까지 살아져서 원각대지가 현존한다. 나타난다.

친견미타는 몽불수기 돈오무생 무량수불을 친견하는 것

빙산연화 어름위에다 장작불을 태우면 화맹빙액 불이 얼음을 녹이며 녹은 물이 불을 끈다.

 

양목상개 두 나무를 비비면 불이나서 나무를 태운다.

세상을 바로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눈을 떠야 한다. 확철 대오 걸림없는 허공같은 텅 비여 있을 때는 그 대로 나타난다. 세세상행 보살도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을 각자의 안목으로

지식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하버드나 서울대 박사학위를 백만 개를 가지고 있다 한들 소용없습니다. 또한 책만 많이 본다 한들 그것은 은행에서 남의 돈을 세는 것일 뿐이지 나하고는 아무 관견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공부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참선공부밖에 없습니다.

 

 

 

천사불여일행-생각으로 천만번 해봐도 한번 실행하는거보다 못하다.

 

지 정 의가 하나가 되어 인생관과 우주관이 하나로 정립될 때 행으로 하는 것이다.

 

 세 끝을 주심하라 세 끝이 가장 무섭다.

칼끝에 굴복하지말고 혀끝에 놀아나지 말고 붓끝에 속지 말아야 한다.

학문이 우수한 사람은 만으나 학문ㄷ과 도덕이 겸비한 사람이 부족하다.지식은 녹음테이프와 같은 것이다.

건혜-학문만 있는것. 실천하여 지혜가 나와 도덕이 성취더ㅣㄴ다.

인간성회복에 있다.

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정감록에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 선한 인간성으로 돌아가야만 자신은 물론 이웃과 국가가 평등자유 평화의 세계가 건설된다.

유가에 팔조목-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잠연저 일물마-말고 깨긋한 그 한물건은 무엇이냐?

유가에느 조문도이면 석사라도 가야라 햇다. 불가에느 자성을 깨달으면 생사가 없다.

대자비동체요 대보살도라

 

대도무문이요 설두무골이라 도처춘색하니 유록화홍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