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깨어 있으면 ‘당신은 붓다’입니다.
한 선승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비가온 뒤라 개울물이 불어나서 돌다리가 물에 잠겨 있었다. 그 때 한 젊은 아낙네가 물을 건너려고 왔으나 돌다리가 물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던 선승이 아낙네을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네주었다. 스승의 행동을 지켜봤던 제자는 승려는 절대 여자를 가까이 하거나 몸을 만져서는 안 된다고 늘 스승이 가르쳐놓고 당신은 계율을 어기면서 여인을 등에 업을 수 있단 말인가? 말과 행동이 다른 이런 스승을 내가 따라야 할 것인가…. 제자는 산길을 걸으며 내내 스승의 행동과 등에 업힌 아낙네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제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스승께 질문을 했다.
"스승님은 어째서 계율을 어기며 여인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네 줄 수 있습니까?"
스승이 " 야, 이놈아! 너는 아직까지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왔느냐? 나는 물을 건너고 땅에 여인을 내려놓는 순간에 다 내려놓고 왔다."
깨달은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모든 행위는 스승이 했지만 오히려 행위에 대한 업장은 제자가 짊어지고 있지 않는가. 선승은 모든 행위를 그냥 할 뿐이었다. 오직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줬을 뿐 어떤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제자는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일이면서도 모든 생각과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우리 중생들 대부분 이 제자와 같은 행동과 마음으로 늘 밖의 경계에 끄달려 본래 여여한 자성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아 일상 속에서 늘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깨달음을 특별한 방법이나 고도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진리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 있고 우리 모두가 이미 깨달아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깨달아 있는 사실을 믿지 않고 온갖 생각과 분별 심을 내기 때문에 본래의 청정함으로 살지 못하고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 때 120살을 살다간 고불 조주스님이 스승인 남전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물으니 '평상심(平常心)'이라 했다. “
평상심이 도라면 어떻게 해야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얻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얻을 수 없다."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도'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은 망상(妄想)이 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자각이 없는 무기(無記)이다. 안다 모른다하는 분별을 없애면 바로 거기서 도가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맑게 갠 하늘같아서 분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
분별없는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이 평상심이라 했는데 중국 유원율사가 묻고 대주선사가 답한다. “수행할 때 열심히 하십니까?” “열심히 하지.” “어떻게 열심히 하십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지.”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같지 않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밥을 먹지 않고 온갖 것들을 바라고, 잠을 잘 때도 잠을 자지 않고 온갖 생각을 꾸민다. 그래서 같지 않다.”
그렇다. 우리는 일상의 매 순간을 분별심 없이 모든 일을 행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일으키고 있는 생각들과 마음이 얼마나 외부에 끄달려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불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한다.
대상을 보거나 생각을 일으켜서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마음만 내려놓고 '오직 할 뿐!'
매일 10분도 좋고 30분도 좋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
당신이 지금 숨 쉬고 있는 들숨과 날숨을 가만히 집중해서 침착하게 들이쉬면 들이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 쉬면 내쉰다는 것을 챙겨 보자.
그러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라.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고 '나'를 부르면 알아차리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뭤고?' 이렇게 늘 자신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 마음속에서 질문이 점점 더 커지면서 매 순간을 깨어 있게 된다.
이러한 시간이 몇 분씩 늘어나면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나 생각들을 관찰하게 된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뭣이지? 이렇게 스스로를 관조하게 되고 생각이 밖을 향하던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직접 때와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늘 행하는 것이다.
불교는 절에서 법당에서만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법당이고 지금 쉼 쉬는 순간을 바로 알아차린 때가 공부이고 수행이다.
사실 한 순간에 자신이 본래 부처이며 한 찰나에 온 우주와 너와 내가 분별없는 하나임을 알게 되면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생겨 일체중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느끼며 자비심과 사랑으로 늘 여여하여
지금 깨어 있으면 ‘당신은 붓다’입니다…….通
한 선승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비가온 뒤라 개울물이 불어나서 돌다리가 물에 잠겨 있었다.
그 때 한 젊은 아낙네가 물을 건너려고 왔으나 돌다리가 물에 잠겨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보던 선승이 아낙네에게 가서 당신이 등에 엎고 건너줄 것이니 등에 업히라고 했다. 아낙네는 어떤 방법이 없는지라 선승의 등에 엽혀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는 스승의 바랑을 대신 들고 뒤를 따라 개울을 건너면서 생각을 했다.
승려는 절대 여자를 가까이 하거나 몸을 만져서는 안된다고 늘 스승이 가르쳤는데 어째서 당신은 여인을 등에 업을 수 있단 말인가? 말과 행동이 다른 스승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야. 이런 스승을 내가 따라야 할 것인가,... 제자는 산길을 걸으며 내내 스승의 등에 업힌 아낙네의 모습과 스승의 행동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제자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스승께 질문을 했다.
"스승님은 어째서 계율을 어기며 여인을 등에 업고 물을 건내 줄 수 있습니까?"
스승이 " 야, 이놈아! 너는 아직까지도 그 여인을 등에 업고 왔느냐? 나는 물을 건너고 땅에 여인을 내려 놓는 순간에 다 내려놓고 왔다."
깨달은 자와 그렇지 않는자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모든 행위는 스승이 했지만 오히려 행위에 대한 업장은 제자가 짊어지고 있지 않는가.
선승은 모든 행위를 그냥 할 뿐이었다. 어떤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제자는 자신이 행하지도 않은 일이면서도 모든 생각과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런데 우리 중생들 대부분 이 제자와 같은 행동과 마음으로 늘 밖의 경계에 끄달려 본래 여여한 자성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가 지금 당장에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늘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희망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지금의 삶을 살지 못한다. 또한 현실이 마음 먹고 생각한데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늘 깨달아서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깨달음을 특별한 방법이나 고도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진리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 있고 이미 우리 모두가 깨달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진리를 바로 믿고 행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신의 온갖 생각과 분별심을 내기 때문에그르치게 된 것이다.
당나라 때 120살을 살다간 고불 조주스님이 스승인 남전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를 물으니 '평상심(平常心)'이라 했다.
조주스님 "그 마음을 얻으려면 애써야 합니까?" 남전스님 "애쓰면 이미 그르친다."
"애쓰지 않고 어찌 도를 알겠습니까?"라고 조주스님이 다시 여쭈니,
남전스님 "도는 알고 모르고는 관계 없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상(忘想)이고 모른다고 하는 것은 무기(無紀)이다. 의심없이 도달하는 도는 허공과 같이 맑고 넓은데 이를 어찌 옳다 그르다 시비로 가릴 수 있겠느냐."
우리가 일상의 삶인 평상심이 도이고 진리라면 누구나가 배고프면 밥먹고 잠오면 잠을 자는데 어째서 깨달자가 되지 못합니까? 깨달은 자는 밥을먹을 때 '오직 밥을 먹을 '뿐이고 잠을 잘 때 '오직 잠을 잘 뿐'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온갖 망상과 번뇌로 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일상의 매 순간순간을 깨어 있는 삶이냐 그렇지 않는 삶이냐다.
지금 당신이 일으키고 있는 생각들과 마음을 들어다 봐라. 얼마나 외부에 끄달려 내 자신를 잊어버리고 불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지를, 당신이 지금 당신의 본마음을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꿈 속을 헤메는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와 역대 조사들이 몽둥이로 떼리고 할!과 방!을 하면서 꿈 속에서 깨어나 정신차리라고 그렇게 애뜻하게 자비와 사랑으로 일깨워 준 것이 아닌가. 방하착(放下着),모든 생각을 내려 놓아라고 한다. 오직 모를 뿐!으로 늘 깨어 있어라고 한다.
매 순간순간 대상을 보거나 생각을 일으켜서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마음만 내려 놓고 '오직 할 뿐!' 으로 행하라고 한다.
산길을 가면서 들리는 새소리를 '오직 들릴 뿐!'
푸른 솔나무를 보면서 '오직 볼 뿐!'
걷고 있는 자신의 걸음을 인식하면서 '오직 걸을 뿐!'
무엇이 되려하거나 얻고 버리려고 애쓰는 것도 망상이다. 호수에 물리 고요하면 바닥이 다 비치듯이 우리 마음도 분별심만 내려놓으면 본래의 자성을 단박에 볼 수 있다.
그래서 불법은 코만지는 것 보다 쉽다고 합니다.
사실 한 순간에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됩니다.
한 순간에 온 우주가 너와 내가 없는 하나임을 알게됩낟.
매일 10분도 좋고 30분도 좋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만드십시요.
당신이 지금 숨쉬고 있는 들숨과 날숨을 가만히 집중해 보십시요.
침착하게 들이쉬면 들이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 쉬면 내쉰다는 것을 챙겨보십시요.
그러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십시요. 숨 쉬고 있는 놈믄 누구인가. '나'라고 부르는 이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가?
'이뭤고?' 이렇게 늘 자신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 속에서 질문이 점점 더 커지면서 매 순간을 깨어 있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이 몇 분씩 늘어나다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나 생각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이 뭤이지? 이렇게 스스로를 관조하게되고 생각이 밖을 향하던 것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밖의 대상이나 환경에 시각이나 생각이 끄달려 내 참 자신인 주인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밖의 대상에서 발견된 상황을 가지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반응을 만듭니다. 화를 내거나 슬프다거나 기쁘다는 등의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에 끄달려 본인의 본성을 잊어버립니다.
지금 깨어 있는 그 순간이 당신은 깨달은 자 부처님이 십니다.
불교는 절에서 법당에서만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가 법당이고 지금 쉼 쉬는 순간을 바로 알아차린 때가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람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밖에서 찾거나 얻으려고 합니다. 밖에서 얻어진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비교되는 또 다른 조건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헨드폰을 최신형으로 바꿀 때는 행복했지만 몇 달 지나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벌써 불행 해 지기 시작 합니다. 비교해서 신형이 더 좋아뵈기 때문에 갖고시픈 욕망이 행복을 빼앗아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내면으로 찾아가는 행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면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기쁨이나 행복은 오래 갑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챙겨갈 때 지혜를 얻게 됩니다.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매순간 깨어있게되며 나와 나 이니것들들이 함께 보이게 되며 사랑과 지비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선의 목적은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찰나찰나 꺠어있게 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삶 즉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각 개인의 인격이나 성격 생활 태도를 바뀌게 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념이 시각이 달라져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순간 대상을 보거나 생각을 일으켜서 옳다 그르다 분별하는 마음만 내려 놓으면 된다. 호수에 물리 고요하면 바닥이 다 비치듯이 우리 마음도 분별심만 내려놓으면 본래의 자성을 단박에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모두가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깨달아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다.
얻거나 버릴 것이 있거나 기적같은 변화나 특별해 지는 것이 아니다.
혹 깨달았다고 기행적이며 특별한 언행을 행하는 것은 모두가 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고 혹세문민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이나 배고프면 밥먹고 잠 오면 잠을 잔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치면 똑 같이 아프다. 다만 깨달은 자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냥 할 뿐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그냥 볼 뿐이다. 일어난 일에 끄달려 마음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단순해지고 늘 그 순간을 살 뿐이다. 먹으면 먹을 뿐, 아프면 아플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깨달음을 말로 할 수는 없다. 스스로 체험 할 뿐, 불입문자라 문자를 세우는 순간에 참법을 그르친게 된다. 다만 방편으로 설명할 뿐이다. 사과의 맛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무리 다양하게 설명해도 사과의 참 맛은 알 수 없다. 직접 먹어보면 바로 맛을 알게 된다. 참선은 직접체험해서 자신의 근기만큼 스스로 알아차림에 있다.
왜 깨달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중생심으로 살고 있느냐 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맞으며 맛 보며 느끼는 생각들이 일어나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물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물이 고요한데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생기고 바람이 없으면 다시 고요한 바다가 됩니다. 바닷물은 파도가 일어나기 전이나 파도가 일어날 때나 파도가 없어져 다시 고요할 때나 바닷물 일 뿐이 었습니다. 우리가 분별하여 파도라는 이름을
깨달은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세상을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늘 이웃만을 위해서 일할 뿐입니다. 복이나 명예를 구하거나 탐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은 실천에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불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부처님처럼’ 살려고 애쓰는 것을 불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방편에 불과하다. 부처님처럼 산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로써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는 삶이다. 부처님처럼 되려고 애쓸 때 그 순간 우리 마음의 평화는 깨어진다. 되고자 하는, 바라고자 하는 ‘부처’가 있고, 아직 되지 못한, 이루지 못한 ‘나’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의 부자유와 분리가 우리를 괴롭게 한다. ‘부처님처럼’ 혹은 ‘수행자처럼’ 된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어떤 특정한 삶의 모습이나 양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산과 바다가, 새와 짐승들과 곤충들, 꽃과 나무가, 온전히 독자적이고 온전한 자신만의 본래 모습을 갖추고 있듯, 우리 또한 ‘나’만의 독자적이고 온전한 모습이 있다. 나무가 꽃이 되겠다고 애를 쓰거나, 산이 바다가 되겠다고 노력을 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저 내가 나 자신으로 살면 될 일이지, ‘누구처럼’ 살겠다고 노력하고 애를 쓰게 된다면 자신 스스로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 나 스스로의 본래 모습을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어야 내 안의 불성을 그대로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되어라. 그것이 있는 그대로인 나이며 중도(法性)이다.
왜 아까운 시간을 그렇게 힘들게 고생합니까? 요즘은 다양하고 필요한 모든 지식을 바로바로 알 수 있는데
오직 스스로 체험을 통해서 내면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체험을 통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고 인내하며 참고 견뎌내는 가운데 스스로 쌓여진 습관인 업장(業障의 장애을 소멸시키고 밖을 향해 있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 내가 누구인가를 찾게되면 분주하게 들뜬 마음들이 고요해 지기 시작한다. 전생의 기억은 내 몸속에 있는 디엔에인 유전자이다. 그 유전자 속에 메모되어진 기억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내가 생각과 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과거전생의 습관인 업을 한치의 오차가 없이 제현해 내는 것이다.
선지식을 찾아가는 것은 운수행각이라한다. 물처럼 구름처럼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당신은 지금 어떤 생각과 의식으로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에 누구에게 당신의 인생을 빌고 부탁하고 있습니까?
당신 밖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이 마음을 낼 대 당신은 행복도 불행도 당신이 짓고 당신이 없엘 수 있습니다. 그 당신이 짓은 죄와 복을 누가 당신을 대신해서 벌을 받고 복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중해도 자식이 짓은 죄를 부모가 대산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것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없고 목이 마르면 오직 내가 물을 마셨을 때 갈증을 해소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도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 부모라도 대신해서 물을 먹어준다고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왜 깨닫지 못하고 밖을 향해서 구원하고 찾아 헤메고 있을 까요? 모든 것은 인과에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땅에 씨앗을 심는
당신이 아침 출근길에 시간이 늦어서 서두르다가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그 때 당신은 차에서 내려서 어떤 행동을 취할 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내리자 마자 상대를 추궁합니다. 왜 운전을 똑바로 하시지, 왜 신호를 보지 않고 운전하느냐. 지금 이자리가 끼어들 곳인가 등등 목소리가 큰 사람이 기선을 제압한다는 말처럼 우선 모든 상황이나 생각을 밖을 향해서 상대 잘못을 따집니다. 결국 나는 잘못이 없다는듯이 말입니다. 과연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우리는 모든 일을 이렇게 밖을 향해서 내 안에 마음을 일으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보험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일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아침을 늦게 해준 아내를 원망합니다. 왜 신호를 잘 보고 운전하지, 상대 운전수를 나무랍니다.
당신의 분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어리석고 탐내고 화내는 마음 때문에
어 사고가 일어났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왜,왜, 하면서 일어난 일에 끄달려 안 밖을 분별하여 생각을 내고 마음을 일으킨다. 즉 이유라는 것은 나와 너라는 분별에서 일어나며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분별심인 이유를 제거하는 반복되는 행동이 수행입니다. 밖을 향하여 있는 내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내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고요한 바다가 파도가 생겨 출렁이다가 바람이 쉬면 다시 고요한 바다가 되고 물이 고요하면 그렇게 분주한 마음을 고요하게
막연하게 마음을 집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집중하게 하는 것이 선불교의 화두 참선법입니다. 마음을 집중하는데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합니다.
화두는 처음에는 내 본성의 마음이 화두를 의심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만 어느정도 의심하는 마음이 집중되면 이원화 되었던 마음과 화두가 온전히 하나된 의심만 남게됩니다.
그러면 바보처럼 되는 것인가? 바보는 부분적인 것만 인식할 뿐 전체를 알지 못합니다만 깨어 있는 것이 전체를 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이 다릅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벗어난 앎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늘 지혜롭고 여유가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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