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본 임재록 강의 내용을 요약한다.(성본스님 동국대교수)
*上堂示衆-開示悟入
자유는 상대적 자유-남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를 느끼는 것
절대적 자유- 자신이 일체의 경계에서 자유(출세간의 반야(空)의 힘에서 가능하다)
선문답은 무엇인가?
언행의 선문답을 언어를 그대로 기록한 것을 어록이라 한다. 본인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제3자가 듣고 보고 그대로 기록한 말들이다.
불법이 있느냐에 따라 어록이 되고 아니고를 구분한다.
일대사 인연으로 불법을 개시한다(구제한다)는 나누는 힘이 원력행이다. 원력행은 시절인연에 따라 이루어진다. 본분사라 한다.
원력이 있을 때 신심이 생긴다. 본인이 각자가 깨닫는다.
보살행은 자신을 위대한 인격적인 삶을 살게하는 것이 보살행이다. 자비심은 내가 인연을 맺어지게 하는 것이 원력에 의해서 일어난다.
인도의 불교는 법의 체계이기에 논리적이다. 수학이다.
1,요청은 시대적 요구에 의해서 불교는 충효정신이 없어서 위경(僞經)이 탄생된다. 중국인에게 필요한 경전이 탄생되는데 지역에 따라 요청의 종교가 일어난다. 부처님의 법을 빌려서 가짜 경전이다. 경전에 입을 빌리고,말씀인 형식,권위을 빌려서 만든 것이다.
육조단경도 권위주의 산물이다.
-지나서 조사선의 시대가 온다. 종교운동=생활종교운동.(마조도일이 조사선의 어록을 설하면서부터 독자적 언어로서 설법을 한다. -이후에 임제가 사상을 종합된 것이다. 즉 독자적 언어를 만든다.(어록의 시대이다)
a 역사-전등록(
b 청규-선원이 학교기관--법당을 세웠다.(부처님을 안 모셨다)불법중심의 전당
-노동을 했다.백장청규의 일일불작일일불식
-상단설법(어록이 생성)
*참문-불법을 바로 참여해서 묻는다. 독참이라고도 한다. 참선과 같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 핵심사상이다.
살인도-부정심, 활인검은- 불심을 살리는 것
임제의 구도중에 3도 피탈, 行業純一-순수하게 오로지 한 곳으로 공부하는 것 일념,일심
淸凉池(청량지)-큰 나무그늘 ,중생의 모든 고뇌를 번뇌를 씻어주는
청출어람,
無多子=至道無亂,至道無難(지도무난) 해탈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 쉽다
唯嫌揀擇(유혐간택) 자기의 손익에 따라 취사선택 하는것을 하지말라
但莫憎愛(단막증애) 단지 증오하거나 애착하지 않는다면
洞然明白(통연명백) 확 트여 환하게 분명해 질 것이다.
<신심명>-승찬대사 간단명료하다. 분별,간탐,조작하는 중생심이 없는 것
여래,부처를 선으로 바꿨다.= 불심의 지혜작용이다.
풍전한, 풍광인=미친사람,불가사의한 사람, 법부의 생각을 벗어난, 인가한
머리와 꼬리를 잡는다. 하나만 잡으면 당한다. 꼬리를 잡으면 머리에 당하고 머리를 잡으면 꼬리가 친다.
백장 밑에 위산과 앙산이 앙산은 소석가라 했다.
마조 백장 황벽 임제가 임제종의 정통이다.
불법의 대의를 채득한 사람이 시를 짓도록 하라, 홍인스님의 말
덕산과 임제가 같은 시대이다. 덕산은 사천생이다. 촉에 출신자자 마조도일,규봉,오조법연 등이 있다.
임제라는 말은 호타하의 호수옆에 암자.
생사대사를 해결하며 계정혜의 법을 자제자유로이 쓸 수있는 것
일대사인연의 본질은 불법을 개시하는 것
상구보리에서는 생사해탈이고 하화중생은 인연을 만든 것
2,대승계률에 정신빈약해서 보살계가 만들어진다.
3,생활실천사상에 경전이 빈약하다.-중국의 생활체계이다. 장자의 혼돈(카오스)왕이 있었다.하루하루 7구멍을 뚫는것에 대한 이야기 -------선불교다 (수능음경-조사선의 소의경전이다. ,원각경)
염불,수행등의 경전이다.
無位眞人- 노장자의 진인은 허심과 무심으로서의 삶,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지혜
자연은 본질적인 주체자의 작용이 없다. - 불교에서 자연은 외도라고 하는 이유
불교의 眞人은(법,,보,화신의 3신을 갖춘) 구족한 보살행의 목적이 다르다.
眞은 眞如法身을 말하며 眞相(법신)이다. 불법을 모두 구족한 사람을 말한다.
眞位 라고 위패를 쓰는 이유는 완전열반에 든 사람이기 때문에
임제의 무위진인은 喝, 방망이가 진인이다. 의식의 경계대상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
진인은 원력과 회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법이 다르다.
육조,남선종에서의 관점= 불성,법성,자성 등은 우리의 근본을 말하는데 견성은 진여자성을 깨닫는데 치우치는데
마조 도일- 평상심이 도다, 마음이 부처다 卽心是佛 여기서는 몸과 마음을 구분하여서
임제시대는 人인데 眞人으로 바뀐다. 무위진인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다.
즉 모든 경지는 오직 本來人이다.
원시종교인 의존형의 종교인데 샤머니즘적 주술적 종교가 오늘날 종교다,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의존형이 아니라 주체자가 된다. 선불교는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라.
독자적인 지혜와 자비를 법신의 보살도를 행하라.
상대적인 자유는
무위진인은 절대적인 자유인이다.
진여삼매
한도인 무의도인
임제의 무위진인은 의존형이 없는 자유로 자신를 자유롭게 주최자가 되는 本來面目이다.
임제의 인의 사상은 인간성 회복이다. 물질에 결려있으면 부처나 신의 의존해 있으면 아니다.
부처의 작용을 이름과 모양을 붙쳐서 의미 부여한 것이다. 편의적인 방편일 뿐이다.
부처는 고정된 상과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하는 작용하는 경계일 뿐이다.
무위진인 인 정법안목을 갖춘 사람은
法身=불법의 지혜(의학)지금 眞心國土 淨妙國土. 불법을 깨달은 몸(불법의 지혜와 작용을 구족하는 것)
報身=원력(의사의 자격증) 여기 無差別衣 無差別國土. 32덕상을 모두 구족한 것
化身=실행,지혜 자기 解脫國土 법을 설하는 몸(형체보다 시절인연에 따라 변하는 것)을 나투는 것 자비(의술 처방)의 작용에 있다. 국토는 방편의 언어 일뿐
삼신은 일체이다.(의사가 법을 공부해서 환자를 고치는 작용은 하나에 작용이다.)
즉 부처는 구족한 것을 작용할 때 부처의 원력행이 회향되는 것을 부처라 한다.
시절인연
인간은 80%을 과거. 15%는 미래. 현재는 5%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시절인연에 따라 본분의 생명활동이며 창조적인 삶이 할이다.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법신을 체가 되어 공부해서 보신과 화신은 용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분별상이 생겨서 깨달음에 생활은 이뤄어 지지 않는다. 셋은 모두가 하나이다. 다만 방편으로 체와 용을 나눠서 논리를 설명할 뿐이다.
불국토을 건립한다는 것은 방편적인 지혜로서 자신의 삶을 건립한다는 것이다.
부처는 항상 작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지혜광명(마음에서 작용하는 힘)
어떤 정지된 상태 목적이 있는 경계의 상태는 아니다.
부처가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고 그냥 부처일 뿐이다.
법은 설한다는 것은 언어로써 이해해서 깨달도록하는 것이다.
자신의 중생심을 재도하는 것 번뇌망염을 다 아는 것
* 正法眼藏의 안목을 구족하고 있다.
*보림전이라는 조사선의 역사서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이심전심으로 마하가섭에게 전했다.
이심전심으로 전했다. 라고 했을 때 전해주고 전해 받을 수 없다.
유상의 법은 전해주고 받는데서 있는데 이는 아니다.
불교는 무상법이다. 전해 받을 수 없다. ‘무지역무득’반야심경 지혜란 얻어 받을 수 없다.
무자성 무실체가 있다고 생각하 것은 중생이다.
*부처(깨달음)가 되는 법이다.-어떻게 깨닫는가?-법을 알았기 때문에
무명에서 의심을 세계를 확실히 아는 것 경험한 자가 그 길을 안내하는 자
즉 그 길을 알았다. 그 길은 법이다. 그래서 삼보가 있다.
불법승은 자신의 의심을 소멸시키는 것
法性-法相 법은 의식이 있을 때만 작용한다. 의식이 없으면 법은 존재치 않는다.
佛性
부처나 사바국토을 쓰지 않으면 중생과 극락을 구분하여 방편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無所求(有求皆苦), 無所得(無所有)=本來無一物, 마음 밖에서 안에서 마음을 구하거나 찾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창조적으로 작용하여 쓰는 지혜를 알아라.
불교는 현실의 확실한 지혜로 삶을 사는 종교다.
*증득,수행, 깨달음을 구하려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다. 소유이고 얻으려고 하는 대상 경계를 갖기에 것이기에 설사 수행해서 얻은 것이 있다 해도 생사망념인 업장을 만들어 윤회를 만드는 것이다.(법에 의거하지 사람에 의거하지 마라)
육바라밀도 행한다는 대상이 있을 때 중생심이고 부처의 행도 대상이 의식할 때 중생심의 업을 짓는 행이다. 참는다는 것도 의식이기에 정법이 아니다. 여법하게 시절인연 일 뿐
임제종의 정법안장의 법을 전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된다.
열반시에 임제가 ‘내가 죽으면 정법안장이 멸각시키지 마라’고 했다.
삼성의 제자가 나와서 ‘어찌 임제의 정법안장을 멸각할 수 있습니까?’
임제가 ‘그러면 불법의 대의가 무엇인가.?’
삼성이 ‘할‘을 했다. 정법안장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때 임제는 ‘눈먼 당나귀가 정법안장을 날려버릴 줄’ 하면서 앉아서 입멸했다.
불법은 길이다. 성자의 체험적인사실은 삼보가 있다.
불교의 신심은 자신의 의심을 소멸시키기 위한 불법승이다.
의심을 소멸시킬 수 있는 각자의 진여에서 나온다.
결국 법은 석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고 부처가 없어도 법은 그냥 있다.
*開示(법화경)라는 것은 일체의 모든 제불(법)이 본래 진여로 작용하는 것이 개시이다.(타력), 모든 생명이 각각 본래의 진여의 자성으로 살아가는 것
생명활동으로 사는 것이 법이다.
수행은 본분으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진여의 생명활동을 사는 지혜를 구족하는 것이다.
본래의 진여로 돌아가서 편안하고 안심인명으로 사는 것
*悟入은 각자가 깨달아 채득하는 것, 들어가는 것(자력)
소리를 내는 것은 개시(타력) 듣고 깨닫는 것은 오입인 (자력)이다.
*사리불이 숲속에서 좌선을 하는데 유마거사는 시끄러운 곳을 조용한 곳을 취사선택의 망념에 좌선을 하느냐? 왜도의 수행이지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 모두가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마구니이다.
* 하택신회- 육조의 제자 그대들이 마음을 멈추기 위하여 마음을 적정 고요하게 하려하거나 마음을 이르켜서 마음 밖의 대상 경계를 비춰보려 하거나 마음을 안으로 깨끗하게 응집시켜 선정에 들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조작된 행위이다. (북종선의 수행인 신수의 관심론,비문,대승오방편) 모두가 번뇌 선,악,더러움,깨끗함, 등이 모두가 내가 만든 분별작용에 의해서 조작된 망념인 의식작용에서 업을 짓는 중생심이다. 도 닦는다고 좌선하고 앉아서 언제 보살행을 할 것인가. 섭심(攝心내정(內定))
*입정(入定=본래의 안정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곳)-不二(일여,여여)法門=침묵(유마경), 되돌아간다=자각=견성. 진여의 법문으로
還源,歸嫁=본래의 심
*修行은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淸淨心 -------방향(본래상태)
방법은 본래의 열반묘심(지혜의 작용=nirㅍna) 으로 自覺하는 것이 방법(정지된 것이 없는 상태) 자각하는 지혜작용이 선정이다.
본성의 지혜로 자각하는 방법이 見性이다. 생명활동이 보살행이다.
*불법을 배운다
8만4천법문=계정혜(방편) 부처님이 일체모든 존재가 법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개시오입(깨달아채득하는 것)한 것이다. (자신의 지혜의 안목으로) 일대사(본분사) 인연으로 출현했다.
법문을 통해서 자신의 지혜로 작용해야 일대사 인연으로 작용한다.
3학(84법)= 계정혜을 신구의 3업 청정하게 하는 것이 깨달아 채득한다고 한다.
진실은 시간인 지금과 공간인 여기에서 작용하는 것
시간공간과 사람과 사람이 진실 된 지혜의 삶이다.
중국의 속설에
눈썹이 빠진다. 시주의 은혜를 받아서 바른 법을 행하지 못하면 눈썹이 빠진다.
*법의 공부는
불법-사람에 의존하지마라,
뜻(대의-,언어문자에 의존하지 말라,
지혜-지식과 대별- 지금여기 자기의 진실된 삶(불법의 공부의 목적)
了義-법을 완전히 전체의 우주법을 깨달음, 不了義-부분적인 공부
생각데로 불법을 공부하는 것은 무모하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
일체삼라만상이 각자가 생명활동이 법이다. 물리 흐르고 꽃이 피는 생명활동이 법이다.
목적의식 없이 시절인연에 일어나는 것인데 인간만이 목적이 있다. 목적이 각자의 자존심과 의식이고 오욕이다. 정법이다.
*선정=입정(각자의 본래심으로 되돌아 가는 것)
3업청정한 생활이 좌선수행이다.
禪=安定(유마경),安坐,靜坐,安禪,坐禪은 本心을 말한다. 行住坐臥 語黙動靜
본래면목 되로 시절인연에 생명활동이 법이다.
水流花開-불법의 대의다.
*선의 4가지
不覺(무명),相似覺(조금 깨달음), 隨分覺(보살도,곳에 따라 깨달음을 이룬 것),究竟覺(自覺聖智)
禪問答,-법의 중심이다. 원력으로 자기본분사이다. 불법의 지혜에 의거해서
주객이 나눠지면 않된다. 上堂法問에는 선문답이 이루어진다.
開示悟入-법을 펼쳐서 깨달게 하는 것
아상 인상이 있으면 않된다. 정검하는데 사량분별적 시험하는 작용으로는 선문답이 아니다.
도를 실행하는 자리에서는 나이에 연륜에 선후는 없다.
중국선종시대는 불전을 모시지 않았다. 수행중심이었다. 좌선수행 하루4번
機智의 對話-상대방 주객을 지혜를 과시와 승부욕심이 하는 대화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자력과 타력이 불이에서 이루어 질 때 진여의 진리에 깨달음이 불이법문이다.
부처로써의 깨달음의 지혜나 방향과 방법이 모두가 방편이다.-도구이다.
유식작용,
수지-마음데로 활용해서 쓸 수 있는 경지
독송
설법은 깨달음에 경지을 이룬 사람이 전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인연을 만들어 주는 것이 설법이다.
방편 도구를 활용해서 자각 성찰하는 것이지 그 도구에 끄달리면 않된다.
일체의 모든 소리는 진여이며 무정설법이며 모두가 법음이다.
소리를 내는 것은 개시(타력) 듣고 깨닫는 것은 오입인 (자력)이다.
천동산 여정선사의 風鏡頌=법음
* 無心, = 佛法의 1,언어,글자, 문자로 앎
2,뜻,의미 개념
3,사상,정신-자비와 지혜
4, 실천수행--방편=방법(자각),방향(중생심에서 불심으로)
5,생활속에서 지금여기자기가 삶(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십악참회)
*법력은 계정혜의 8만4천 법문의 뜻을 바로 알아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3현3성, 10지보살
不如無事, 好事不如無, 一日是好日(운문),
3아승지겁- 十住,十行,十廻向-1아승
一地-7地--2아승
8地-10地--3아승
* 賓主句(빈주구)
부모미생전의 이렇게 보면 중생심인데 이 중생심 이전의 본래면목
불법을 기신론에는 眞如智(여래법신)-불심의 지혜작용
正命=생활
불법이 구족되지 않는 할은 중생말이고 빈주구분이전에 할이
진여삼매는 주,객,과 주,빈, 인,법 등이 하나되는 것이다.삼매=心一境性
자기 목소리를 자기가 자각할 때는 일경성인 삼매이다. 마음의 소리를 본인이 자각하여 들릴 때,境界至性
*拂子,주장자의 도구는 법의 작용하는 방편이다.
불법의 대의는 여래의 지혜작용이다. 할, 불자 들어 보임,
법화경에서는 ‘개시 한다‘ 생활의 생명력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곧 바로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 ‘직지인심‘
언어는 자체로는 진실을 보여줄 수 없다.
본래로 돌아가기 위해서 견성이 생긴다.
*生死는 마음의 생멸을 말한다.= 삼사라(samsara=윤회)고 한다.
월명제망메가에서 생사가 나오는데
생각하다는 것은 자기와의 언어대화이다. 즉 생각은 분별심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업을 만드는 요소이다.
진정한 불법의 안목,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다. 라는 것은 확실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
언어를 중요시해야 한다.
언어는 방편을 진실된 삶을 실현하는 방편이다. 체험하기위해서 도와주는 것
모든 생각을 언어를 통해서 현실생활의 대화를 통하고 생활을 할 수 있다.
불교는
1, 언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2,내용을 확실히 이해(사상,정신)
3,실천,방향과 방법인 자기화 시킨다.
4,생활(보살행으로 회향하는 생활로 풀어내는 것, 그렇지 않으면 관념불교가 되고
불교는 생각속에 불교이지 아니다. 종교이며 자신의 위대한 생활을 인격으로 창조한다.)
*正見(반야의 지혜로서 바로 보는 안목, 사물의 본질을 思量分別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보는 것)
衆生心인 생사번뇌망념에서 해탈한다.
육체적인 해탈이 아니라 정신적 마음에 해탈이다.
불교는 영혼이 없다. 우파니샤트는 영혼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기독교도 영혼의 안식을 하지만 영생 등의 미래세를 이야기하지만
불교는 현세의 보살도에 자비로 구현하는 종교다.
불교의 윤회는 현생의 마음에 병을 말한다. 영원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하는 것이 불법의 지혜로 깨달음을 통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법은 모두가 法燈明이다. ---언어라는 방편을 참구(참선)하여 지혜를 (진정한 견해,안목) 얻는 것에 있다.(개시오입)
*노모하고 처하고 나하고 가다가 홍수에 떠나려간다.
누구를 먼저 할 것인가., 노모를 먼저구한다.
부인은 죽는다고 했을 때 자신의 부인에게 죄의식 느낀다. 죽을 때 까지 가는데 업장이다.
처를 구하고 노모를 못 구했을 때 또한 평생 업장이 만들어진다.
즉 선택을 할 경우에 업장을 짖게 되는 것이 남는다. 생사번뇌가 업장이 되는데 과거 업장을 소멸하지 말고 지금업장 소멸을 해라.
지금 이 순간에 진정한 견해를 가지고 업장을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불법 공부를 하면 안목이 생기고 정견이 생겨서 바로 본다.
見- 직관 지혜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본다. 전체로 본다. 직관으로 아는 것
知-지식,인식 아름아리인 순간 분별심이나 판단력이 업을 만든다. 그 업이 업장이 되어 평생 남게 된다. (이런 마음은 중생심이다.), 부분적으로 본다. 편견,단견,등이 생긴다. 법으로서 아는 것
*꽃의 실상을 보는데 전체를 보지 않고 색깔 모습,꽃잎을 보는 구조로는 분석해서 보는 것은 분별심이다.
지식으로 공부해서 어떻게 지혜로 전환할 것인가, 방법을 반복하는 것이 참선공부이다.
정법안장이다.
서산대사 제자인 청매인오선사 1,不信正法 苦行無益이다.
수행을 해서 깨달아야지, 한소식해야지 하는 것들이 모두가 중생업을 짓는 일이다.
그냥 정법을 바로 행하는 것이지
법에 의존하고 사람에 말에 의존하지 마라. 남의 말에 끄달리는 노예의 생활이다.
요의경전에 의하고 불요의경에는 의존하지 말라.
신병과 공병과 선병이다. 불법의 대의를 알지 못하는데 있다.
信은 믿다가 아니다. 확신 확인하는 것 대승기신론에서 신은 신심,확신이다.
見보다는 아니다.
벽암록에 양무제와 달마의 이야기-공덕과 복덕
깨달음에 작용은 시각과 청각에 의해서 일어난다.
*숲의 종교다 숲은 불안한 상태 이므로 집을 진여로 보며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것이다.
구경각은 진여의 지혜가 작용해야 된다.
깨달음에 체험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구족하는 것이다. 질서에 맞추는 여법함
지혜작용을 통해 견성성불이다.
*업은 일이다. 일(業)을 하는 것이 생명운동이다. 일을 지혜롭게 깨어있지 못하면 업이 생겨서 업장이 된다. 모든 삶이 업인데 업을 잘 알아야 한다.
마음(心)---知-지적착오(무명,무지)-(慧)
-情 감정(미혹) 번뇌장 -열반(定)의 경지-眞如自性인 견성이다.
- 意
*중생심은 생사심,생멸(삼사라)이 일어나는 것을 自覺하라
禪은 지금, 여기,,자기의 일이다. 현실에 자각하는 지혜이다. 현실의 삶이다.
그렇지 않는 지식으로 떨어져 있는 것은 선병에 걸려있다.
*불교는 법을 발견했다. 불법을 깨달으면 모두가 자유인이 되고 평등하다.
법은 만든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었다. 발견한 것에 있다.
법은 물이 흘러가듯이 如法이라 한다. 시절인연에 따라서 변해갈 뿐, 수평과 만물을 생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양육,성육할 수 있도록 무심으로 하는 것,
如法(분별심이 없는)할 때 업이 생기지 않는다.
*一心-부처의 삶의 방향(방편 법문) 방향과 방법을 제시(開示)하는데 의미가 있다.(자각문)
-중생의 삶의 방향-미혹과 생사윤회 한다. <자동문(자동적 업을 짓는다)>
부처가 될려고 할 때 문제가 된다. 중생심의 의식의 작용으로 모양과 형상의 부처가 아니라
과거의 지식의 부처이지 실체가 없는 생명활동하고 지혜 작용하는 살아 있는 부처는 아니다.
진실된 삶의 현장 지금,여기,의 살아 있는 부처를 알아야 한다.
정법안장을 구족했다는 것이 현제까지 불법이 살아온 이유다.
부처를 찾 는마음은 중생심이나 그 근원은 부처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신구의 삼업을 딲는 것이 계정혜이나 이것을 딲으려고 한다면 아직 의심이 남아서 중생심이다.
조작심은 모든 의구심 깨달음,한소식,계율 등등 이다.
불교의 업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법을 바로알아 일심으로 샇면 부처의 삶이요, 아니면 중생심의 업장이로 6도 윤회한다.
우파니샤트의 업은 영혼이라 한다.
*心地法門-
心地는 진여본성의 작용
육조혜능에서 부터사용 불법은 심법에서 시작하므로
불법의 대의를 모르면 철이 없다. 시절인연의 변화를 깨달지 못하고 고정된 망상 속에 사는 것이 착각이다. 전도몽상하고 있다.
一心법은 시절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현재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시절이연의 본분사를 알아서 철이든 것이 심지법문이다.
불법의 大意=玄旨(자취)
진여(심지,현지)-공=망념=무, 本來無一物 =眞空
- 불공=지혜작용(無虛),지혜,자비=妙有
한 수도원 원장의 고양이를 기둥에 묶어두고 미사를 봤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유명한 곳이 된다.
의미부여가 되면 성스러워진다. 진실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마음 씀의 지헤가 마음이다.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자기가 일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 작용하는데 있다.
좌선하고 참선하는 것이 선이 아니다.
* 출가(포기하다)- 1,世俗家 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다.
2,煩惱家 체념하다.- 공의 실천이다.
3,三界家
*기사고타미 부처님 시절에 아들 죽은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아들을 살려다라고 부탁한다. 부처님이 사람죽지 않는 집에가서 겨자씨을 구해오면 살려준다고 한다.는이야기
포기는 근본으로 돌아간다. 진실한 삶이 된다. 자각이다.
불법을 알 때 포기와 자각을 할 줄 안다.
불교는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자기 중심의 판단이기에 또한 마구니가 된다.
선도 악도 버려라, 마구니 부처도 죽여라.
포기해라- 방법은 자각적 방법, 근원적으로 돌아가라. 망념이 일면 자각하라.
차별대상이 있으면 분별심에서 업이 생겨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지 마라.
의심이 자신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삶을 사는 것, 지금 여기 삶을 창조적인 삶이다.
本來無一物 = 無所求, 有求皆苦, 無所得,無所有
구하려는 허상에서 벗어나서 진실 된 삶에서 살려는 것이다.
허상과 환상과 공산에서 업을 짓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현실에 진실을 두고 있다. 현실의 지혜적 삶이 반야의 삶이다.
한 소식, 깨달음, 해탈을 얻어야 한다 라는 등은 생사윤회를 만들어가는 업장이 된다.
구한다는 것, 닦는다, 증득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有所求이녀 생사(삼사라)윤회를 짓는 업장이다.
부처 구하는 것도 법을 구하는 것도 지옥에 떨어진다. 보살이 되려는 것도 경전을 보고 육바라밀하는 것도 업장을 짓는 것이다. 모두가 얻으려는 대상 경계를 만들고 있을 때는 모두가 망상일 뿐이다. 의식의 대상 경계(분별심)가 있을 때는 모두가 중생이며 망상이다.
의식이 없을 때 진정한 법행이 되는 것이다. 無心眼目의 玄地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불법의 안목이 없으면 자신이 업을 짓는 행위 인지도 모른다.
번뇌망념이 없는 상태, 이뭐꼬 하는 것도 번뇌망념에 소식을 잡고 있을 때는 망상이다. 업장 짓는 일이다.
조용한 곳을 추구하는 마음 또한 정박이라 업을 짓는 것이다. 취사선택이기 때문에 분별심이요,선과 악을 분별하여 쫒는 것도 업장일이다.
수행을 공부해서 설사 얻은 것이 있다 해도 생사번뇌의 망념일 뿐이다.
부처와 조사는 無事人이다. 번뇌망념이 없는 사람이다.
유마경에 사리불이 숲 속에서 좌선하는 모습을 보고 연좌(宴坐)는 어리석은 분별심에 떨어진 선 수행이다. 조용한,시끄러운,부처, 등이 모두가 의식 속에세 대상경계일 뿐이니 분별심이다. 의식 대상은 모두가 업이다.
수능엄경에 연약달타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찾아다니는 어리석음
모든 것은 법에 의거한 설법을 들어야 정법안목이 생긴다.
사람의 소리는 자기 식 안목이 될 수 있다.
모든 이치는 법에 의거한 안목 수행이 필요하다.
미르바나(nir-vana 끄다,불)=열반 *불을 켜는 버너의 어원이다.
*業-身口意 삼업이 청정(空)하면 부처요. 청정하지 못하면 중생의 업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다. 보살행을 하려고 하는 마음은 업장이요 그냥 보살행일 때 보살이다.
즉 모든 의식적인 세계에서 행하는 것은 망념의 업을 짓는 행위다.
불법을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알 뿐이지 진전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진실된 삶을 통해서 마음 없이 현제 지금 여기에서 지혜의 작용인 실행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하택신회선사-육조제자--住心看(대상)淨(대상)
起心外照
攝心內征
擬心入定
기신론에 不覺, 相似覺, 隨分覺, 究竟刻=自覺, 佛知見
불이법문을 유마경에서는 침묵이라 했다.
*入定- 입은 되돌아간다. 還源 歸家, 본래의 眞如自性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禪定에 든다.
1,방향-중생심에서 불성을 깨달는 쪽으로의 방향,見性
2,방법-자각을 통해서, 자동문은 중생심이고 자각성지
*선병,신병(마음으로 일으키는 병)은 업장을 만드는 행위다.
법박(法縛)-불법,계율,선정방법을 의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 지식의 아름아리
淨박-청청하게 하려는 조작심
靜박-조용함을 추구하는 것
坐相-집착좌선 자세(방법)
坐禪作佛-마조좌선의 스승회향이 기와장을 거울만드는 것
지혜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지금여기네서 자기가 행하는 것
念起卽覺=自覺聖智=如來
覺=如來는 實知實見(금강경)
중생=무명=불각=업이다.
대승의 운동은 신앙의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지헤를 구족하여 보살행을 하느냐이다.
수능엄경에서 이근능통,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자각이다.
수생은 자각을 통하지 않고는 업을 짓는다.
*부처가 됐다는 것은 목적이 됐다는 목적이 됨으로 틀린다.
지혜의 삶을 작용하여 부처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불심의 지혜가 작용하는 것=자각하는 것
불교는 자각하는 종교다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이 여법한 것인가 아닌가를 작가하는 것이다.
즉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여 재도하는 것이 여래이다.
마음- 知=지적착오 (무지.무명)-慧
情-감정,(미혹)=번뇌망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열반=진여자성,견성---번뇌장
意
*불을 켜는 것이 부처는 촛불을 켜고 가섭은 호롱불을 켜고 아단다는 등불을 켜고 달마는 장작불을 켜고 임제는 전기불을 켰다는 것은 목적은 불을 켜는 것(지혜광명)이고 방법은 다른데 이것은 불은 법(보살도의 삶을 보게하는 설법)이고 켜는 방법은 화신이고 시절인연에 따라 무상한 존재이다. 불을 켜서 비추는 방법은 보신인 것이다. 밝음 자체를 성불인 부처이다. 법이다.
*법계는 시간과 공간이다.(하지만 시공간은 없다)
- 시간은(지금) 겁(가장 긴것),찰나(가장 짧은 시간, 측정할 수 없다), 인식의 시간과 의식의 시간
자연의 시간=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시간(생사의 변화) 물리적인 시간인 시계와 측정 기계
불교의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기에 모두가 망념이 된다. 시공을 초월할 때 자신의 지혜작용(몸과 목숨의 무분별심), 목숨,수명,주위의식 자신의 과시하는 의식 등을 의식할 때 지혜작용이 아니다. 불법은 의식의 시공간이 무시한 지혜작용 일 때 법이다.
존재의 가치는 시공간의 분별이기에 법이 아니다.
의식의 대상 경계를 모두 초월 할 때
-공간(여기)
-자기(불심)
지금 여기 자기의 삶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일(불법의 지혜=생사일대=원력의 보살도=목적이 없는 시절인연)을 통해서 삼매일 때이다.
선이 생활종교로 요약한다면 의식의 관념에서 탈피했다, 의식이나 관념의 불교에서 벗어났다.
현재 지금 자기의 일이 불법의 지혜로 작용할 때 부처요 분별심으로 일어나면 중생이다.
일은 관계다. 관계는 연기의 법칙이며 불법의 지혜로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명활동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다. 밥먹고,똥누고 잠자고 하는 일들...
업장을 소멸하는 것은 지혜의 삶일 때
자기가 부처를 구하려고 한다면 부처가 윤회하는 존재가 된다.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는 자는 모두가 외도다.
수능능엄경 4권에 나오는 이야기 연야달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해서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회광반조와
전도몽상(착각) 착각를 하지마라.
차별상에서 분별심에서 벗어나라. 착각 부처,도가 있다는 것이 마음 밖에서 구한다.
환상에서 벗어나라.
선문답이 붓다의 법의 경지로 돌아가자. 경전이 모두가 대화법으로 되어 있다.
중생교화의 자비법이다.
機智의 對話= 승부심이 들어간다. 나와 너의 차별심이 작용
禪問答=구법의 정신 아상 인상 있으면 않된다. 지혜의 도둑놈이다. 안목이 형편없다고 하는 것은 기지의 대화이지 선문답이 아니다. 내가 아직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상 인상에 대상의 분별하여 중생심이다. 선문답은 비슷한 경지가 통해야 한다.
조용부동시다.
禪은 지금여기 자기가 하는 일이다. 선은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지식으로 관념의 선은 죽은 선이다.
賓主의 對話=학인과 선승의 대화
和光同塵, 同事攝 아상 인상을 다 초월해야 보살이다.
법화경,유마경에서 진정한 보살도는 연꽃이 진흙탕에서 피는 것이기에 보살은 진흙탕에 들어가서 함께 경지에서 서로의 지혜를 나눠 보살도를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正法眼目을 판단하는 구족하는 것이 진정안목이다. 무사인(번뇌망심이 없는 본심의 마음,진여자성=진여=여래=부처라 한다) 귀인
법은 문자에 의거하지 말고 불법의 뜻에 의거하라. 사람에 의거하지 말고 법에 의거하라.
야호정매(들여우들의 선승) 의심이 많다.
* 心地法門- 육조단경에서 나온다. 본성=지혜로 작용하는 것이며 조산선의 모든 법문의 핵심이다. 一心의 법(경계에 얽메임이 없이 자유자재하는 것)이다. 마음을 땅에 비유한다. 땅은 모든 것을 생산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 문수를 地母라 한다. 선승들의 핵심이 심지법문이다. 불법심법
*사량분별인 깨끗한 더러움 등의 장의식의 가치기준을 판단하는 경계에서 얽메여서 스스로 만든 것이다. 중생심이다.
진여, 일심, 심지는 분별이름이 없는 무명과 무상인데 이름이 생기는 것은 자기의식 가치기준이 중생심이다.
진실(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 불교의 뜻이며 무상)과 현실(고정된 의식을 벗어나야)
*철(현실을 작용하는 힘이다)이 없다는 것은 시절인연의 대의를 모르는 것이다.(전도몽상)
매화가 이른 봄에 피는 것 등이 시절인연에 따른다.
*생명활동은 시절인연과 함께 작용하는 것이 일심법이다. 지금여기에서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지혜 있는 삶이 이루어져야한다.
*佛法의 玄旨,大意= 眞空妙有의 작용이다.-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진여(心地)-空=妄念=실체가 없다, 本來無一物, 眞空
-不空=지혜작용(無虛),지혜,자비 妙有
장자의 혼돈(混沌)과 현지(玄旨)가 같다.
* 참선은 마음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쉴 수가 없는 것이며 작용하는 것은 망념이다.
신신명에 마음만 고요하게 하려는 헛된 세월만 보낸다고 한다. 마음 비우라는 데는 비울 수가 없다. 불법의 현지를 모르는 이유다. 마음으로 여법하게 생명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현지이다. 참선이다.
마음을 업에려는데 없는 마음을 없엘 수가 없듯이 이것이 문제가 있다. 노파가 암자를 테우는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이디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여래는 실지(實智)실견(悉見)한다.=佛知見=심지법문의 요지다.
*번뇌망념 없이 무사이 지내는 것이 도이다. 대소변보고 밥 먹고 누워서 쉬는 것이다.
명찬스님의 락도가에서 자신의 마음 밖에서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불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신통묘용아라고 착각해서는 않된다.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의 지혜로 작용하는 것이 법이지 중생심의 삼계윤회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불법의 지혜로 살게하는 것이고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라는 이름을 갔다 붙친 것이다.
무명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했다. 부처로서의 께달음의 지혜로서 살게하는 것
부처의 이름이나 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만약 그것을 만든다면 내가 속박되어 업을 짓는 중생이 된다. 착각과 환상 속에서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려고 한다.
지혜는 지금 여기 시절인연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무심(일심=무사)으로 사는 것이 불심의 지혜로운 작용이다.
불법의 신통묘용의 비법이 있다는 착각(망념)하지 마라. 조작의 마음(중생심)으로 얻으려는 것 부처가 되려는 것,한소식,크게 깨달으려는 생각 등이 착각이다.
마조도일 좌선할 때 부처가 되려는데 조작심, 스승이 기와장을 바늘로 만들려는 교훈.
조작심은 영원히 부처가 될 수가 없다 ,그런 목적을 비우는 것이 무사심이다.
한 소식하면 모든게 끝난다는 생각 등이 조작하는 사람이다.
지금현실의 자신의 생활이 없다는 것은 헛일이다. 꿈일뿐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생각도 과거의 생멸력이지 지금은 아니다.
불교는 철저히 현실지혜생활이다.평상심이다. 이 일을 떠나서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착각이 문제다.
중생은 똑같은 일을 하지만 주체적인 자각 없이 건성으로 하고 몸따로 마음따로 부분적인 삶9업장)을 살지만, 부처의 삶이란 법은 오직 일심으로 할 뿐이다. 진여의 지혜로운 삶으로 사는 것이며 전체이다.
법의 지혜를 앎으로 지금여기서 자기가 일을하는 부처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불법으로 살아가는 삶은 자각적인 생활이다. 지식은 오직 노예일 뿐이다. 지금 여기서 할 일을 못한다.
*수처작주 입처개집(隨處作主 立處皆眞)
자신의 주인공이 된다면 자기가 그곳에서 주체자가 되어 깨달음에 삶을 사는 것이 불법을 건립한다.
참회는 진정한 자각적인 지혜가 작용할 때 일어난다. 중생심의 조작심을 모두가 소멸시키는 것 (念記卽覺)
부처의 경지를 목적으로 두고 있으면 지옥으로 가게 하는 쇠고랑이가 된다. 부처의 경지를 초월해야한다.부처를 죽이라.
종교라는 틀 속에 갖쳐 버리게 되니 감옥에서 허덕인다.
출가 -1 세속의 집을 나오는 것
-2 번뇌의 집을 나온것을 출가
-3삼계의 법을 벗어나는 것을 출가
출가는 포기하다- 세간의 모든 오욕락을 포기할 때
체념할 때 * 기사고타미 죽은 아들을 살려고하는 것, 큰 일이나면 진실을 볼 수 있는 사고를 눈멀게 한다.
기사고타미가 스스로 확인시키는 작용을 통해 포기하게 되면 본래의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진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각이다.
불법을 알아야 방향과 방법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기식 데로 착각하게 되어 업장을 짓게된다. 마구니 집을 나와서 다른 마구니 집을 들어가는 거나 같다.
생사의 고통에서 윤회를 하는 없을 짓는다.
진정한 선과 악은 존재치 않는다. 자기 중심적 판단이기에 부처도 마구니도 범부와 성자 선과 악을 떨쳐버릴 때
*포기하려면 방향과 방법을 알아야한다. 방향은 본래의 자신인 안으로(安心立命) 방법은 자각적인 지혜작용이 방법이다.
부처는 지혜로 작용하는 현실의 작용성이 부처이지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은 대상과 목적이 생겨서 중생심이다. 판단 능력은 확실한 판단이어야 되며 의심을 같으면 않된다.
귀감에서의 출가--생사해탈 부처님의 해명을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 =여법하게 수행하라.
如法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마음은 물과 같다.
眞如(불심)가 참된 그대로의 모습에 반대되는 마음이 衆生心이다.
불심을 참되게 깨닫도록하는 것이 선의 방편법문이다.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법이 정법인 공부이다. 마음 밖(5음,육식)에서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업을 만드는 경계) 착각인 煩惱妄念을 自覺하는 것이 지혜이며 부처의 경계다.
자각하는 것은 지금여기 자기가 일을 하는 것
의심이 일어나면 분별심이며 참법을 의심하는 것이며 확신을 갖게하는 힘을 상실하게 하며
의심의 대상이 일어나면 아무리 보살이라도 중생이다.
확신은 불법에서 나온다.
중생은 모든 생각을 의심으로 이루어지고 부처는 신심으로 이루어진다. 신심을 일어나게 하는 힘은 불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신심은 본인 스스로 깨닫는 방법 밖에 없다.
무엇이 나타난다. 무엇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은 대단한 경지의 사람이 아니라. 중생심의 경계인 착각이며 환상인 번뇌망상일 뿐 참 법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의식 속에 있는 환상 착각을 알아라. 법이 고정되고 실상이 있다고 착각하지마라.
부처의 경계는 지혜작용에 있고 시절인연에 따라 흐르는 것일 뿐
여법은 물이 흘러가는 것이 듯 정지함이 없이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변해가는 것(항상흐르는)이 지금 여기서 현재 일어나는 사실이며 진실이다. 이것이 불법이며 지혜로 사는 것이 여법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지혜,현실,지금)
진리는 머리 속에서 인식하는 공상이나 착각이다. 의식은 과거 미래가 모두가 대상 경계일뿐 현실은 오직 현재 지금 작용일 뿐이다.
전유경에서 화살을 맞은 사람의 비유이듯 불교는 현실의 삶을 실현하는 종교이다.
생각으로 말로 나타나는 것은 망상과 의식으로 나타나는 죽은 환상일 뿐이다. 모든 경전에 나타난 사실은 의식일 뿐 지금 여기 내가 시절인연에 따라서 행을 할 때가 생명운동인 지혜의 삶이며 불법인 것이 여법한 진여의 법이다. 철이 든 사람이라고 한다.
극락세계 사바세계 등은 경전에서 듣고 알았다. 경전은 방편법문일 뿐 진실을 체득하게 하기 위해서 언어문자로 사용하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방편으로 썼다. 어느 누구도 극락,사바세계를 다녀오고 본 사람이 없다.
*불법은 심법이다. 깨달음의 지혜로운 보살행을 하는 것이 부처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을 기신론에서는 진여심을 不立文字(언어문자로 초월), 心行處滅이며 여법하게 사는 것인데 우리는 중생심으로 사는데 이를 깨달게 하는 방법이 언어문자이다.(법화경의 7유) 중생심은 자동문이고 불심은 자각문이다.
유마경에는 직심이 정토이다 진여의 마음이며 극락(安心立命)이다. 의심은 삼계유혹의 지옥이다.
수행도 모르고 깨달음도 모르면서 행해봤자 번뇌망상을 만든는 윤회의 중생의 삶이다.
* 無有定法 -실체가 없다.고정된 정법도 없다. 모두가 방편법문일 뿐이다.
부처가 실지하는 존재는 없다 부처는 지혜롭게 작용하는 것이 부처이다.
*實型有法-
*불법(여법)=자기자신의 본분사 계(sila),율(vinaya)
삼학을 잘 지키고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지마라는 자신의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사회를 구제하고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자기 자신이 자신의 중생심을 구제할 때 자각할 때
불법을 개시하는 것은 계정해을 통해 보살행을 해야한다.
개 차 법- 열고 닫을 줄 알아야 한다.
죄의식을 소멸시켜야 청정하게 되지 죄의식을 양성시켜서는 않된다.
죄무자성 종심기- 죄의식에서 속박당해서는 않된다.
계율자체에 집착하고 몰입하면 안된다.
경전 공부도 자체에 집착하지 마라. 자신의 지혜로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안목의 증장이다.
경전과 계율은 처방전과 같다.
중생의 병을 치료하게하는 지혜가 안목이다. 捨敎入禪(사교입선)은 틀렸다.
선악,시끄러움과 조용함, 등이 분별심이다. 정법의 암목을 구족하는 본분으로
<傳燈錄-중국 송나라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에 고승 도언(道彦)이 쓴 불서. 석가모니 이래의 역대의 법맥(法脈)과 그 법어(法語)를 수록한 것으로, 조선 시대 승과 과목에 들어 있었다. 30권. 300년의 가장 선법이 전성기 때에 1,701명의 선사가 등장하는(1700공안) 선의 이야기남송 도원스님 편저
1701명 선사 행적 기록
전등록(傳燈錄)은 과거7불과 천축의 28조, 진단(震旦)의 초조 보리달마와 그 후대로 이어지는 인도와 중국의 두 나라, 우리나라의 중국 유학승 등 선문의 선장(禪匠)들을 전등상승(傳燈相承)의 차례에 따라 열거한 선종의 인물사다. 각 조사와 선사의 성, 속가의 가계, 출생지, 수행 경력, 주석한 곳, 입적한 연대, 세수, 시호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름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다. 경덕은 남송(南宋)의 연호인데 연호가 책의 이름 앞에 붙은 것은 저자 도원(道原)이 남송 원년에 이 전등록을 황제인 진종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진종은 1년 동안 이 책을 교정토록 했는데 그 이전에 도원이 언제부터 저술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현재 전하는 전등록이 그대로 도원의 편작이라고 볼 수 없다. 가감과 첨삭이 이뤄 졌다는 것이다. 전등록의 편자인 도원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다. 일부의 기록에 의해 그가 동오(東吳) 출신으로 천태덕소(天台德韶)의 법을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등록은 모두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글대장경에 있어서 간행 번호는 19번부터 81권까지의 3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권에는 비파시불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에 이르는 7불과 제1조(祖)인 마하가섭으로부터 제14조에 이르는 용수에 이르는 14명과 제2조 아난에서 방계로 뻗은 천축의 15명 조사들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 중 과거 7불과 13명 조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전등록은 그야말로 도도하게 흐르는 불교의 역사 가운데 큰 줄기인 선불교의 인물사인 셈이다. 28권까지는 선사들의 행적과 문답 등에 대한 기록이 차지하고 있지만 29권과 30권은 그들이 남긴 대표적인 기록들을 정리했다. 29권에는 귀종지상(歸宗智常)과 백거이 등의 찬, 송, 게, 시 등이 17종 222수가 실렸으며 30권에는 부대사의 심왕명(心王銘)을 비롯한 23종의 명(銘) 기(記) 잠(箴) 가(歌)를 싣고 있다.
2권에서 주목할 점은 보리달마가 과거 7불과 천축 28조의 법맥을 이어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선종의 초조로 확고하게 삼음으로써 중국 선종이 인도의 7불이래 면면히 사자상승한 불교로서의 권위를 확립한 것이다. 3권에서는 보리달마의 기록이 등장하고 5권에서 혜능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또 하나 전등록이 갖는 중요성은 공안이라는 선불교의 전통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1700공안이라고 하는 말이 전등록이 52세(世) 1701명의 이름을 들어 그 어구를 수록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10세기의 중국은 당에서 송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사회 전 분야에서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였고 그로부터 반세기 이전에 불교는 무종에 의한 회창(會昌) 법난을 겪었었다. 선은 이러한 과도기의 전란이 미치지 않는 양자강 이남의 평화로운 땅에서 공안이라는 새로운 가풍을 형성하며 줄기를 힘차게 뻗어갔으며 그 과정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승들의 문답과 행적들이 알알이 선불교의 지침이 된 것이다. 조당집에 비해 훨씬 하대의 선사들까지 망라해 소개하고 있는 점과 공안의 집록이라는 성과로 인해 전등록은 돋보이는 것이다.
*전등록에는 촛불을 비유하고 있다. 달마의 초와 혜능의 초와 임제의 초는 달라도 불은 같다.
심병,선병과,공병이 생긴다. 병을 치료하는 것은 정법을 안목을 구족할 때
법은 전할 법이 없다. 방향과 방법을 정법안장을 지혜작용을 통해 제시할 뿐이다.
착각은 전도몽상이다.
마음을 비울려는 병이 선병이다. 무엇을 구할려는것.
공병은 번뇌망심을 비우는 것이 방편인데 허무주의 일 때 단멸상
*한국불교는 요청의 불교다
요청은 민족성의 복합되어 있다.
한국 불교는 조상과 부모공양 호국충효사상의 토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한 정신토대위에 만들어진 불교의 종교이기에 수용, 포함하는 모든 정신이 불교적 정신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신이라도 수용하는 정신이 불교정신일 수도 있다. 즉 불교의 진리를 알고 나만 공부해서 열반에 들 것이 아니라 비록 죽은 조상신들에게 까지 좋은 불법을 알려줘서 함께 해탈을 했으면 하는 효행심의 근본이라 하겠다.
효사상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참 불교의 정신과는 개별 되지만 민족성의 근본정신 현상을 인정하고 확실한 본질을 알고 행해야 한다.
즉 재를 지내고 조상을 모시는 정신을 인정하고 수용하여 불법의 정신과 잘 조화롭게 성장했던 것이 불교이다.
思議(사량분별)-衆生心
不可思議적 해탈,지혜-佛心
물질은 공간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없다. 불교는 心法으로 하나가 되는 정신이다.
규정선사와 이만권재상의 대화 유마경의 수미산과 사해의 문제를 질문
당신의 만권의 책이 어디에 들어 가 있느냐?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
생사해탈이 몸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 좌탈, 서서죽는다 등의 문제가 그렇다.
생사해탈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방거사와 단화화상이 과거 시험보러 가다가 주막에서 스님 만나서 불교 공부를 마조도일 스님에게로 갔다.
스님들의 구슬과, 거울을 갖는다.
여의보주는 본래 요술을 부린다. 어디를 비추더라도 그것에 따라 색이 변하기에
거울도 그렇다. 본래의 청정함은 변하지 않고 비쳐주는 것이라서 그렇다.
示衆시중=설법=言
行은 실행
言行錄이다. 語黙動靜 行住坐臥=禪
작불 마조좌선과 회향의 기와장 이야기
수행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조작적인 작위적인 생각 목적의식의 생각 등은 모두가 외부의 힘에 의하여 이루려는 생각은 타력은 틀렸다.
자연적인 것 본래의 진여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수류(水流)개화(開花)
중생이 회심(回心)작불(作佛)이다. 불법으로
중생심의 마음을 되돌리켜서 불심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중생심에서 수행이라는 힘을 첨가시켜서 얻은 것이 아니다. (적멸상)
돈오요문-중생이 마음을 바꿔서 부처가 되지만 몸을 바꿔서 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은 시절인연과 더불어 작용하는데 있다.
불성(진여)의 지혜로 작용할 때가 부처가 된다. 여여한 것이다.
도를 행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시절인연에 지금여기 자신의 일을 통해 일어나는 시절작용이다.
듣는 주체가 부처이고 자각하는 그 주체가 부처이다.
방편을 쓰는 사람은 본래인이고 내용은 방편의 내용이다.
부처,보살, 도의 이름을 붙쳐진 내용을 가지고 부르는 작용하는 때만이 주체자가 부처이다.
보살행은 교만만 하는 것이다. 낮추는 것이다.
사량분별을 텅 비우는 것이 낮추는 것이다. 공격하는 나쁜 버릇이 아상이다.
겸손이 더 대접 받는다.
언어문자 그 자체를 가지고 도라 불법이라 하지 말고 본래의 본분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일심--- 불심- 여법하게 지혜 작용 탄소의 배합에 따라 다이야몬드와 석탄과의 차이다.
중생심-무명
*오무관지옥에 떨어지는 수행론-- 작용론에 초점을 맞춰 지혜작용이다.
오역(五逆)죄업(罪業), 글자가 아니라 불법으로 봐라.
1,아버지를 죽이는 것, -무명이 아버지다.= 반야지혜 자아의식에서 의식대상 소자장
2,어머니 - 탐욕과 애욕
3,부처의 몸에 피를 내는 것- 부처라는 의식의 속박에 사로잡혀 분별심의 경계 (부처는 작용성에 있는 것이다)
4,화합 승단 - 진여의 근본으로 되돌아 갈 때에 만법이 하나 된다.(강물이 바다에 가서 일미(一味=一如=不二)가 되는 것이다. 해인(海印)삼매(三昧)-바다로 되돌아 갔을 때 삼매다.
의견을 맞추는 것은 화합이 아니라 화쟁사상이 각자가 분별심을 버릴 때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다시 본분으로 되돌아가서 생명활동이 이루어진다.-현지(玄旨)이다.
무이독탈
5,불성 불상- 인연으로 존재한 것은 모두가 공(空)한 것이다.
오역(五逆)문뢰(聞雷)- 살인도(번뇌망념이 다 죽는다)
유마경 불도품에서 五逆이 나온다.
非道를 행하는 것--중생심으로 도를 행하지 않는 것(불심으로 작용하는 것)
악도 선도 행하지 마라. (선과 악을 한꺼번에 초월할 때),살인도와 활인검=진여작용
우뢰는 유마의 침묵이다.
불도
비도(非道)을 행한다.(유마경)- 부모를 죽이는 것이 효행이다.-불교에서의 효행이다.
천제는 신심이 없는 것인데 오간 지옥에 떨어진다.
*참회- 죄의식을 가지고는 참회가 안된다. 죄의자성 죄의 실체를 가지고는 참회가 않된다.
즉 청청한 마음에서 참화가 되는 것이다.
본래면목 부모미생전
내공-불법의 지혜를 바로 알아서 작용하는 힘
법화경의 소신공양- 중생심의 아상인상을 다 태울 때 (중생심을 모두 제거할 때)
신명을 돌보고는 불득이 어렵다.(중생심이기에)
중생심이 모두가 죽을 때 살아나는 것은 불성이다.(살인도와 활인검)
극락왕생- 지혜작용으로 태어나는 것이다.(불국토에 태어나는 것도)
*마조 도일(강서지방에서 출현,농경문화의 풍토적성향- 낙양장안까지 전래 백거이 등과 교류)
문하에 선지식이 800-1000여명 과 10대 제자가 있고, 10대에는 이름 조차 없는 백장, 남전은 88명중에 나타나는 제자이다.
*입내(入內)설법-황궁에 들어가서 법당에서 법을 전하는 것, (신수,신수제자,화택신화, 마조제자흥성유관.해익 등이 있다.)
서당-마조의 수제자 ,동당이 있다.
마조 도일(중국조사선의 중심인물) 1,-서당의 지장 제자 4명중 3명인데 구산선문개척자 신라사람(마조의 법은 신라에 거의 들어 왔다.)
2,-백장의 제자-위산(백장을 나타낸 준다.,앙산(위양종시조)소석가라 할 정도로 안목과 예언이 뛰어나다.
2, 백장의 제자 -황벽-임제가 등장한다.
3, 남전-조주가 등장하면서 남전이 보이게 된다.
*용담스님의 제자 2대 덕산 (제1대 마조의 제자)
불법의 대의를 말해도 30방 말 안해도 30방
말하는데 어떻게 30방망이를 때리시니까? 만약 때리면 방망이를 뺏어 던지고
어떻게 하는지 봐라? (낙보라는 시자를 통해서 확인을 했다)
덕산은 방장실로 되돌아 갔다.(집은 본분사의 살림살이로 일이 끝났으므로 다시 본부사로 되돌아간다.)
낙보에게 덕산의 참 眞相(참살림살이)을 보았느냐? 각보가 주저하니(疑心卽差, 動念卽乘)
본분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달마의 眞相은 무엇인가?
선의 역사는 제자가 뛰어날 때 스승이 나타나게 된다.
명상을 공상 환상 자신의 의식속에 빠지게 하는 심리현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선이라고 착각.
자신의 의식속에서 환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심리현상은 선이 아니다.
정법의 안목을 바로 봐야한다.
수행이나 명상은 의식 속에 빠지는 것은 모두가 아니다.
의식을 초월해야 참선이다. 선 심리현상 등은 같이 쓸 수 없다.
심리를 초월하는 것이 참선이다.
*도는 무엇인가? 장경화상
1, 無心是道- 지식으로 잘 알고 있다
2 ,融目是道-일체처에 눈에 보이는 두루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있느냐. 도가 두루 하다는 사실을 아는 정도다
3, 깡충깡충깡 손뼉을 쳤다.- 도를 안다.
* 종지는 같으나 종풍은 다르다.
불교의 영혼(아트만)윤회는 없다---無我설이 등장한다.
불교는 업이 윤회를 한다.
업은 妄念인 희노애락,탐진치 분별심 등이며
지식적인 (무염과 무지)을 바로 보게하는 안목을 불법의 지혜를(반야의 지혜)통해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기신론-- 중생의 본각에서 불각으로 되돌아간다. 자각이다.
일어나는 망념을 없에거나 버린다고 할수록 더 일어난다. 마음작용을 자각하여 바꾸는 것이 수행이다. 참선이다.
중생심에서 불심으로만 벗어나야 유일한 돈오견성이다.(이것만 가지고는 않된다.)
돈오현지,대의(지혜작용이 있어야 한다.
중생심에서 불심으로 전환시켜주는 작용이 염불이다.
정법안목,
선불장-부처를 선별하는 것.
부체가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이 있을 때 바람이 일어난다.
變相圖- 경전를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진 것을 말함. 중국에서 시작된다.
능가경 변상도는 중국에 없다. 돈항본에서 최초로 등장.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것이 참선이다.
간경- 글자의 의미를 채득하도록 읽는 것을 말한다.
호흡과(기력)
마음이 중요하다.
*신수의 견해는 능가경의 유상의 종교를 설명한 것이다.(불교의 원칙론적인 공부의 제시해 놓은 것)
-반야의 진리를 득해야 만이 대승의 진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보리는 지혜의 나무요 마음은 면경대
혜능의 무상의 종교의 견해는 반야의 지혜이다.(혜능은 열반경의 고수다)
심즉보리수 신위면경대
보리는 본래무일물 마음은 불면경대 (본래무일물)
1,초발심(信)=願力으로 찾으려는 마음이 --- 심우(尋牛)
견성-마음을 찾는 것이고 원력
마음을 활용(쓰는 것)을 성불이라 한다.---견성성불
2,견적(見積)-이정표( 모든 경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법이 이정표이다.
불법은 심(心)법이다.-84천법이 필요한 것은 중생의 근기에따라 이정표가 다르다.
3,견우(見牛)-
견성을 하기 위해서는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환, 바꾸는 것이 자신의 자각에 의해서만 바꿀 수 있다.
돈오(頓悟)見性-단번에 자신의 자각(識心)에 의해서 바꾸(중생심에서 불심으로)는 것을 말한다.=識心見性(하택신회가 설명해 놨다.)
마음-중생심과
불심으로 나눈다.
식심(識心)은 중생심을 불심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 念起卽覺 覺之卽失,-失은 空,無自性=선사상체계을 정립한 것이 육조단경과 신회이다.
서암화상이--- 주인공아! 예.
스스로 중생심에 끄달려 있는 자성을 자각하게 하는 것
4,得牛-소를 찾은 것
5,牧牛-소를 길드린다.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만들어간다. 불법을 가지고 만드렁갈 때 검은소가 희소가 된다. 목우지눌
6,소를 끌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인우구망(주객관이 없어진 경지, 차별이 없어진 경지=불이의 경지, 삼매의 경지)
환본환원(아무것도 없다)
입전수수(중생교화,보살행),안전입명,= 원력의 일이다. 무목적의 일
목적의식이 있으면 안된다. 깨달음,불성 한소식 등의 목적이 있을 때는 헛이다.
돈오견성은 지금 여기서 내가 본분사의 일이다. 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느냐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본심으로 일을 해야 견성을 할 수 있다.
*견성의 기준은 호흡(기력과 힘)과 마음(자신의 모든 삶의 방향,기준)으로 기준을 잡아라.=牧牛,見性
대화.명상, 행주좌와 등 모두가 먼저 호흡을 정리하라,
*불교는 자각의 종교이며 심법의 종교이다.
1,중생심은 무명의 업장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生滅門
不覺-의심,상,경계,의식의 대상이 생기는 것--本覺(돈오견성,식심견성,
始覺-주인공아! 無! 자기자신을 경각시키는 작용하게 하는 것이 시각의 방편이다.
無자 회두는 의심을 하면 중생심이 생긴다. 무자는 소리를 통한 자각을 통해 중생심에서 불성으로 자각하게 하는 방편인 것이다.
지혜를 체득해야 자각의 본성에 도달한다. 소옥아!
頻呼小玉元無事(빈호소옥원무사)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 양귀비와 안록산 현종이 퇴청하면 소옥아 부르면 내 방을 오라는 암호다. 다만 알아듣도록 하는 뜻없는 소리일 뿐 무자 화두도 그렇다.
무자화두의 구조를 확인하는 글귀이다.
<선의 수행은 중생심의 작용에서 불성으로 가게하는 작용성이 수행이다.
수행을 하게하는데 뒷받침은 지혜가 필요하고 지혜를 작용하는 것이 경전이다.성자의 체험을 통한 방편문이다.>
2,불심으로 지혜로운 작용(지금여기서 본분사 작용)-眞如門(불성),무념,정념,일념,무심
<선의 생활>
불성은 지혜작용에만 있다. 정지된 상태는 없다. 만약 정지된 상태는 대상이 된다.
깨닫는다, 본다, 했다,줬다,참다,도달한다. 등의 모든 것은 상애 떨어진다.
번뇌망념으로 망념을 만들지 마라. 신이 있다고 생각할 때 신이 존재한다. 인간이 만든 망상이 또 다른 망상을 만든다.
사상과 불법의 대의가 빈약하고 바른 안목이 없어서 바른 전달이 어렵다.
불성의 지혜작용- 覺,見,觀,看 확인을 통해 확신을 갖는 것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 무아설이다.
아비담마는 인체의 75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서 분해해도 아트만(고정된 나)는 없다.
그래서 내가 현재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된다.
살인을 하면 살인자가 되고 덕행을 하면 덕행인이 되고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내가 된다. 무아설이라해서 허무주의 염새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자신이 무엇이나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능동적이고 창조주의다. 만약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어떤 것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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