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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법문

통융 2011. 12. 3. 22:10

우리는 오늘 자신을 사랑하는가?

■ 수행의 향기

장적스님 / 본지 주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파사세왕과 말라카왕비는 부처님 전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설법 듣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파사세왕은 왕비와 함께 왕궁성의 높은 누각에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에 코살라국의 산과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참으로 웅대한 경관이었다. 그때 왕이 갑자기 왕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말라카왕비여, 이 넓은 세상 속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보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소?”

왕비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말하였다.

“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왕께서는 어떠하십니까?” “말라카왕비여, 나도 그런 생각이 드오.”

두 사람의 생각은 일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결론이 어딘가 틀린 곳이 있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 여쭙기로 하고 부처님이 계신 제타숲 정자로 가서 이것에 관해 가르침을 청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의 결론을 듣고 깊이 수긍하여 게송을 설하여 가르치셨다.

“사람은 어디라도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더 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출가한 스님들은 매일 아침 새벽 도량석과 함께 아침예불을 드리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 간절히 발원을 한다. 부처님께서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나를 사랑스럽게, 나를 행복하게, 사랑과 행복의 향기가 수행을 통하여 나를 생각하는 이나, 나와 함께하는 이, 모두가 평화의 세계에 함께 살아가기를 아래의 게송으로 축원을 한다. 축원 중 나오는 한 게송이다.

문아명자면삼도 (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 (見我形者得解脫)

여시교화항사겁 (如是敎化恒沙劫)

필경무불급중생 (必竟無佛及衆生)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여의옵고

내 형상을 보는 이는 다 해탈을 얻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시간동안 교화하여

마침내는 중생과 부처가 구별 없는 평등 세계 이루어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처절한 수행 속에 내 수행의 향기가 나를 생각하는 이와 함께 있는 모두가 즐거움과 편안함과 기쁨과 행복으로 승화하기 위한 보살의 향기를 피우자는 간절한 축원 수행의 서원이 서려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자신을 사랑하는가? 자신은 행복한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을 맞이하는 불자들의 자세

■ 일의 진실

보경스님 / 서울 법련사 주지

벌써 3월이 다되었다. 겨우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아직도 가득 밀려있는데, 다시 한 계절을 맞게 된다. 강남역 근처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와 샌드위치 체인점을 운영하는 신도에게 들은 바로는 매주 월·화, 매해 1·2월은 매출이 준다고 한다.

모든 일의 순환에 있어 그 시작에 해당하는 시점에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3월은 각별한 달일 수 있다. 과거 중국의 당대(唐代)에는 진사에 급제한 사람들을 위해 곡강에서 연회를 베풀고 난 후 자은사의 대안탑 벽에 이름을 남기는 행사가 있었다.

과거급제의 방이 붙여지는 시기가 살구꽃이 피어나는 3월이고, 그래서 붙여진 별칭도 “급제화(及第花)”다. 이처럼 봄은 여러 가지로 좋은 소식과 행복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때이다. 새학기를 준비하는 모든 학생과 부모 모두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일이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어차피 할 일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일의 긍정과 부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대로 부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이 없으니 매사 불평불만이요 삶의 즐거움이 없다. 가장의 마음이 우울하면 그 가정이 어두울 것이고, 절의 주지가 행복하지 않으면 신도들에게 소원을 빌어줄 수가 없다.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에는 적성이 있다. 그렇지만 일이 사람을 따라오는 법은 없으니까 사람이 일에 적응하고 맞춰가는 길이 더 현명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에 한 남자가 살았다. 그는 사냥꾼이었고, 스스로 생각해도 사냥이 자신에게 잘 맞았다. 그의 꿈은 큰 사슴을 한 마리 잡는 것이었으나 원을 이루지는 못하고 늙어 버렸다. 이제 그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농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생각하는 천직이 사냥에서 농사로 다시 바뀌었다고 사족을 달았다. 과연 그럴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이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임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자신의 천직처럼 즐겁게 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신묘년 새해 인사를 오는 분들에게 내가 드린 덕담은 <시경>에 나오는 ‘구복불회(求福不回)’였다. 덕 있는 군자는 복을 구하는 데 있어 어긋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回’는 소용돌이를 보고 만들어진 글자로 ‘어긋난다’는 뜻이 있다.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승단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한번은 죽림정사에 계실 때에 설법을 하던 중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비유삼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재가자의 집에 가거든 마땅히 달과 같은 얼굴을 하고 가라. 마치 처음 출가한 사람처럼 수줍고 부드러우며 겸손하게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라. 또한 훌륭한 장정이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높은 산을 오를 때처럼 마음을 단속하고 행동을 진중하게 하라.”

부처님께서 보름달을 보시고는 당신의 제자들도 얼굴이 그처럼 구김살 없이 밝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셨을 것이다. 일에 대한 긍정적이고 진실한 자세가 삶을 복되게 하는 원천이다.

원인과 결과는 한뿌리서 나온다

■ 환경재앙을 바로보자

보산스님 / 고양 길상사 주지

지난 겨울은 무척 춥고 폭설도 많이 내리고 구제역으로 인하여 많은 축산농민과 공무원 등이 방역활동 하느라 추운 겨울을 힘겹게 보내야 했고 아직도 구제역 방역은 계속되고 있다.

춘삼월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든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고 닫았던 문들을 열어 젖히며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와 폭설을 견디고 다시 돋아나는 생명들을 바라 볼 때면 생명의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다들 걱정들을 한다. 이게 무슨 징조냐 면서 어찌하여 이런 기후 변화를 겪는지에 대해서 환경전문가 기후학자 등등 많은 전문가 그룹들의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환경전문가들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분석할 것이고 기후학자들은 기후과학적인 측면서 분석 할 것이며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의 뜻의 측면에서 볼 것이며 우연을 믿는 이들은 우연이란 측면에서 볼 것이고 인과를 믿는 그룹은 인과의 측면에서 보려고 할 것이다.

불자들은 이러한 환경재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환경(環境, environment)은 모든 생물들을 둘러싸는 외위(外圍)를 말하고 있다. 자연의 모든 것이 환경이라 말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한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나와 나 아닌 생명체는 동일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 저지르는 포악한 자연파괴는 나를 파괴하는 것이요 나에게 포악하게 하는 등식이 성립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살피신 것이 연기의 법칙이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든 물질이든 서로 인연에 의하여 화합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 연기의 법이다. 그래서 불법을 다르마(Dharma, 法) 또는 법칙(法則)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들도 환경 속에 살고 환경 속에 죽고 있다. 환경이 죽고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환경이 죽는다면 우리의 삶이 어떨까. 이것이 죽으면 저것도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정복의 논리,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이며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법이다.

우리들의 일상은 환경을 떠나서 이야기 할 수 없다. 삶을 생각할 땐 생활환경, 수행자들의 수행을 생각할 땐 수행환경, 교육을 생각할 땐 교육환경, 정치를 생각할 땐 정치 환경, 처녀 총각 결혼할 땐 가정환경을 살피게 된다. 그것은 환경의 중요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가 있다. 하물며 자연 환경이야 더 말 할 수 있으랴.

에너지 과소비로 대기오염, 폐수배출로 수질오염, 종합적으로는 환경오염으로 우리들의 삶은 점점 고통스럽고 숨이 막혀 오고 질병은 늘어나고 환경을 정화하는데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개울물을 마음대로 마셨지만 지금은 석유보다 비싼 것이 물값이다. 바다의 오염은 어족자원의 씨를 말리고 대기환경의 오염은 지구의 사막화를 재촉하고 있다. 환경 재앙은 결국 산업화하면서 스스로 뿌린 업보다.

온 우주가 나와 둘 아닌 하나임을 자각하고 자연과 나와 둘 아님을 자각하고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있음을 알아서 작은 것부터 소중히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환경을 지키고 재앙을 예방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환경과 생명이 하나임을 깨닫고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환경운동이야말로 수행 가운데 중요한 수행이 아닐까.

“출가의 길은 단호해 번민이 없다” - 출가절

보경스님 서울 법련사 주지

출가절 법문을 준비하면서 떠올랐던 것은 ‘삼십세’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였다. “일생을 병 아니면 고통에 있다” 하듯이 어느 순간이건 삶의 번민이 없을 수 없겠지만,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나이가 바로 이때일 것이다. 결혼과 직장이 우선의 문제이고, 어떻게 인생을 설계할 것인지 자신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여 전력하기가 녹록치 않을 것 같다.

심리학자 칼 융(1875~1961)에 따르면 30대 초반이 되어야 참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개인화 과정(individuation process)’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정도 세상의 연륜이 쌓여야 인생의 여러 문제를 나 자신의 문제로 심각하게 볼 수 있는 힘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이면서 심리학자인 버크(1837~1902)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느 단계에서는 극적인 의식의 변화가 생기는데, 이 새로운 의식을 그는 ‘조명(illumination)’ 혹은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이라 하고, 보통 30대 초반에 경험한다고 했다.

예수, 무하마드, 노자, 장자, 루터 등도 30대에 종교적 체험을 했다. 공자는 나이 삼십에 “뜻을 확고히 한다(而立)”고 했다. 또 짜라투스트라가 고향과 고향의 호숫가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던 나이도 서른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신 뒤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소란스러움과 혼잡을 피하여 숲으로 들어가 ‘홀로 있음’에 몰입하셨다.

최소한 서른다섯 이전에 영혼의 선지자들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 꽃망울을 터트렸다. 눈멀지 않는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빛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는 빛을 안다. 오직 눈먼 자만이 빛을 믿고 갈구한다. 그는 빛을 모르니까. 이 ‘눈멂’을 벗어나면 비로소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 진리에 눈뜬 이들이 진리를 멀리서 구하지 않고 일상에서 도를 보는 것도 영혼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보기 시작하고서다. 출가자는 아무런 권태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면서 진지하게 살아야지 헛된 일로 바쁠 수 없다.

수행의 터널을 지나면 곰팡이가 음식을 숙성시키듯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쉽고 옳을 것이다. 출가의 길은 단호하기 때문에 번민이 없고, 번민이 없기에 쉬울 수 있다. 출가자의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에 있어 <비화경> ‘제보살본수기품’에는 여섯 가지 승가의 화합하는 법이 나온다.

“첫째, 함께 같은 계율을 지키라. 둘째, 대중의 합의에 맞춰 행동하라. 셋째, 공양을 똑같이 나누라. 넷째, 한 장소에 함께 모여 살라. 다섯째, 상대에게 항상 자비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항상 존중하라.”

부처님의 출가에서 열반까지 8일 동안을 흔히 ‘출가절’이라 하여 각별한 자기 정화의 주간으로 삼아왔다. 29세에 출가하여 숲과 길 위에서 대중과 함께 살다 가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출가재일에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정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최근 대통령이 한 종교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체통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뉴스를 접하기가 불편했고, 승가의 출가, 재가 할 것 없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둥근 머리를 몇 번이고 만져보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나요? - 출가 열반절을 맞아

장적스님 / 본지주간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코살라국 파사세왕의 방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설하였습니다.

“대왕이여,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네 종류의 사람들은 첫째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둘째 어둠에서 밝음(光)으로 나가는 사람들, 셋째 밝음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넷째 밝음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대왕이여 첫째,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란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하며 더구나 몸(身)으로 악한 행위를 하고 입(口)으로 악한 말을 하며 마음(心)으로 악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는 이 세상에서 악한 업을 계속 지어 죽은 뒤에 악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둠에서 어둠으로 암흑에서 암흑으로 가는 사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대왕이여,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으로 착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 착한 말을 하며 마음으로 착한 생각을 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착한 업을 계속지어 점점 행복해 질 것이며, 죽어서는 틀림없이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이 자를 일러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간다고 말할 것입니다.

셋째,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러한 사람을 말합니다.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신.구.의(身.口.意) 3업을 닦지 않고 악한 일만 저지른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악업을 계속하여 점점 불행하여 질것이며 죽어서 악한 곳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는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가는 자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넷째, 밝음에서 밝음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고귀한 집에서 태어나 부유하고 행복에 겨운 생활을 하면서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청정한 수행을 하며 지혜롭고 자비스러운 선업을 쌓는 것입니다. 이 자는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갑니다. 이 자는 밝음에서 밝음으로 가는 사람입니다.”<잡아함경>

우리의 모든 삶은 불안, 초조, 긴장, 스트레스, 욕망, 탐욕 등의 근본으로부터 안정, 편안함, 만족, 행복 등의 삶으로 가꾸고져 생각하고(意), 말하고(口), 행동하며(身), 하루의 일과속에 수행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 기쁨, 행복의 마음을 진실한 말과 자비의 실천으로 수행은 날로 더하여 갑니다. 마음에 연꽃을 피우면 그 연꽃의 향기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제사의식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慈光照處蓮花出 (자광조처연화출)

慧眼觀時地獄空 (혜안관시지옥공)

“자비 광명 비추는 곳 연꽃이 피고 지혜의 눈길 이를 때 모든 고통 사라지네.”

부처님의 가르침과 도량은 지혜를 닦아 슬기로운 실천으로 밝음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요 깨달음입니다. 샘물처럼, 봄기운처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양식을 따스한 햇살처럼 보살의 서원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수행공동체의 정체성을 마음의 뜻(意)과 말(口)과 행동(身)의 청정성에 담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출가재일과 열반재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말(口)과 행동(身), 생각(意)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떤 수행을 하며 어떤 길을 가는 사람입니까?

우리 삶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어

보경스님 / 서울 법련사 주지

■ 말 길들이는 법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말 조련사인 촌장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가서 공손하게 문안을 드리고 한쪽에 물러앉았다. 부처님이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말을 잘 길들이는 방법이 몇 가지나 되는가?”

촌장이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부드럽게 다루는 것이고, 둘째는 강하게 다루는 것이며, 셋째는 한편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하게 다루는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 세 가지 법으로도 말이 길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촌장이 말하였다.

“쓸모없는 말이니 죽여 버립니다.”

이제는 촌장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조어장부(調御丈夫)이십니다. 부처님은 몇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길들이십니까?”

부처님께서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세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길들인다. 어떤 것이 그 세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부드럽게 하는 방법이요, 둘째는 강하게 다루는 방법이며, 셋째는 한편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하게 다루는 방법이니라.

촌장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 가지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죽여 버린다.”

“부처님은 살생을 나쁜 일이라 하여 금하시는데 어찌 제자를 죽인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살생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 가지 방법으로 길들이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그와 더불어 말하지 않고 가르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잡아함 조마경(調馬經)>

초기경전을 보면 흔히 등장하는 설법의 방식이 있다. 질문자의 일상사를 비유로 하여 수행이나 출가자의 정신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다. 불교가 막 태동하는 시기라서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래도 많은 것이 생소했을 것이다.

질문자 중에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이도 있었고,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상을 성실하게 가꿔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말하고서, 이것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삶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 촌장도 마찬가지인데, 말을 다스리는 자신의 방식에 빗대어 부처님께서 “사람을 죽인다”고 하시자 적잖이 놀랐다. 이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우선 친절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질문을 역으로 하여 가르침을 펴셨다.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때론 엄격하게, 그리고 이 둘을 적절히 혼용하셨다.

‘슬픔의 새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걸 막을 수야 없겠지만, 이 새들이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건 막을 수 있다’는 중국 속담처럼, 우리의 삶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정신이다. 가정에서건 직장에서건 조화롭고 발전적인 분위기를 만들려면 구성원간도 이런 노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는 교사의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동서양에서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의지하고 위안 받고 싶어 한다. 친절하고 따뜻한 불교로 달라져야 한다. 지금 우리에겐 이런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생명들은 다 소중한 것

보산스님 / 고양 길상사 주지

■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부처님께서 설하신 소중한 경전 가운데 하나인 <법화경>에서는 세상이 온통 불타는 화택(火宅)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많이 죽어 공식집계조차 포기한 일본의 9.0지진과 쓰나미 해일, 그리고 인류의 자원보고인 중동의 민주화 바람으로 잡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동족과 벌이는 전쟁, 이웃나라로 번져가는 모래바람의 뜨거운 민주화 열풍은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는 물론 전 세계 국가에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

인류는 생긴 이래 전쟁과 질병 자연재해와의 싸움으로 진화해 왔다. 우리도 과거 동족간의 전쟁으로 수십만 명이 죽고 부상을 당하고 이산가족이 되어 남북으로 가라져서 가족간에도 만나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다. 심지어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천안함 폭침으로 아까운 생명들이 46명이나 죽어갔고, 연평도 포격으로 생명과 재산을 잃고 고통 받는 분들이 너무 많다.

인류는 이런 전쟁과 질병, 자연재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해결의 길은 없는 것인가? 부처님이 말한 화택이란 표현이 꼭 맞지 않는가. 학문의 발달은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잘못된 믿음과 어리석은 행동들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만들고 있는지를 일깨우고 있는 오늘날이지만 아직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탐욕으로 엄청난 불행과 아픔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잘못된 일을 반복한다. 역사를 통해서 전쟁의 비극이나 권력의 무상함 인간들이 만든 문명의 흔적들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지 통찰하면서도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은 <열반경>에 등장하고 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부처될 성품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미물까지도 성품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만 업장에 가리워서 밝은 마음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원효스님은 <열반경종요>에서 불성을 일심이라 설명하고 있다. 불성의체는 바로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성품은 모든 변견(邊見)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도무지 해당되는 것이 없다. 해당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 것도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중세에는 초목실개성불(草木悉皆成佛)이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초목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뜻이다. 초목성불론은 원래 중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초목성불론의 주장은 공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에 기반을 둔 이론으로 사람이 성불하면 초목도 성불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평등하게 바라본 이론이다

근대의 고승인 만공스님도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강조했다. 수덕사 부도에도 큰스님의 사상이 표현되고 있다.

세계는 한 송이 꽃 /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있어 /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이다.

일체중생이 모두 한 몸이요 모두가 불성이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한소식이 여기 아닌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아라

장적스님 / 본지 주간

“비구들이여 이제껏 나의(부처님) 가르침을 듣지 않은 사람도 (세상을 살면서) 즐거운 느낌 (樂受)을 받기도 하고 괴로움의 느낌(苦受)을 받기도 하며, 또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非苦非樂受)을 받는다. 또한 이미 나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도 역시 즐거운 느낌을 받기도 하며 괴로움의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받는다. 대체 나의(부처님)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은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대덕이시여 우리들의 가르침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삼고 세존의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것을 저희들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비구들이여 아직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으면 비탄에 잠기면서 매우 혼미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맞고 난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반대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혼미하게 되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라고 말한 것이다.” <잡아함경>

불교의 가르침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하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합니다. 고통을 여의고 항상 즐거움을 얻는 것이며 나의 청정성을 열반락으로 이끌어 불성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리석음을 일깨워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느낌(受)을 통한 감정이, 의식으로 스며들어와 마음 주변에 맴돕니다.

혹여 괴로운 느낌이 자리 잡아 쓸데없이 비탄에 빠져 혼미하게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고득락과 상락아정의 수행정진을 다져가야 될 것입니다. 괴로움을 마음에 담아 소화시키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끙끙대거나 끙끙거린 감정과 의식, 그리고 고통의 생각으로 말과 행동을 일상사속에 토해 낸다면 두 번, 세 번의 화살을 맞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안팎으로부터 어리석은 성냄(화)과 탐심으로 또 다른 고통과 함께 괴로움을 이끌어 온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담아 놓은 괴로움의 느낌과 감정을 불법의 가르침으로 소화시켜 텅 비울 것과 생각을 비우고 일상사를 단순명료하게 지혜롭게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요 공(空)이며, 고․집․멸․도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며 목표를 제시하여 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불제자라 하여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즐겁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빠져 일탈하는 행동을 불제자는 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즐거움에 취하여(집착) 일탈하면 두 번째, 세 번째의 화살은 괴로움의 느낌을 데리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 두 번째 화살을 받지 않는 것이야말로 불제자가 불제자 아닌 사람과 다른 점이라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하여 얼마나 수행하는지요?

함께 믿고 함께 행복해야 불교

■ 삶의 괴로움과 즐거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염원들을 가지고 있다. 원하지 않고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줄어들고, 원하고 유쾌하고 마음에 드는 일은 늘어나기를! 그러나 사람들이 대부분 이와 같이 염원한다 할지라도 원하지 않고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더욱 늘어나고, 원하고 유쾌하고 마음에 드는 일은 점차 줄어든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야하는지, 무엇을 따르지 말아야하는지, 무엇을 연마해야하는지, 연마하지 말아야하는지를 모른다. 따라서 따라야할 것은 따르지 않고, 따르지 말아야할 것은 따르고, 연마해야할 것은 연마하지 않고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늘어나고, 원하고 유쾌하고 마음에 드는 일은 줄어든다.

그러나 여기 가르침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을 따라야하는지, 무엇을 따르지 말아야하는지, 무엇을 연마해야하는지 연마하지 말아야하는지 알기 때문에 연마해야할 것은 연마하고, 연마하지 말아야할 것은 연마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원하지 않고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줄어들고, 원하고 유쾌하고 마음에 드는 일은 늘어난다.”<맛지마니까야> ‘마하담마사마다나경’

삶은 단순하다. 우선 알아야 한다. 모르면 부끄러운 법이니까. 가장 부끄러운 일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탄식했다. 남은 아는데 자신만 모른다면 이보다 부끄러운 일이 없다. 공자께서 배움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항상 탁마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르는 것보다는 묻고 배우는 것이 덜 부끄럽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시작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불행할 확률이 더 적고, 행복할 이유는 더 늘어날 것이다. 난 법문에 자주 말한다. “행복을 원한다면 책을 보고 머리를 쓰라. 잘 살고 싶으면 복을 지으라.” 삶을 단순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에서 부처님은 유쾌하고 불쾌한 심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말씀하셨다. 핵심은 마땅히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면 좋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삶이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주역> ‘계사’에 “길흉은 득실에 있고 회린(悔吝)은 근심에 있다”고 했다. 회린은 작은 결함을 말한다. 결함이 없다는 것은 허물을 잘 보완하는 것이라 했다. 사소한 것부터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열정이 있다면 우린 분명 좋아진다. 최근 본사에 회의가 있어 다녀왔다. 상대적으로 나았던 송광사도 최근 들어 출가자가 감소하는 상황이라 했고, 회의 후에는 세찬 봄비 속에서도 민족문화수호결의대회가 있었다. 난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에게 진정 급하고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지금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좋은 불교가 이뤄지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함께 믿고 함께 행복해야할 종교로서의 사명, 그리고 사회에 대한 자비의 실천과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에 소홀했던 잠깐의 간극이 오늘의 이런 불균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한다. 좋은 법문이 불교를 살리는 시작이다.

신묘년 7월 초하루법회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 연기법은 자연의 법칙

나그네가 봄을 찾아 남쪽을 헤매다가 지친 몸 이끌고 집에 와보니 뜰 앞에 매화꽃이 핀 것을 보고 봄이 온줄 알았다. 공연히 봄을 찾아 고생한 나그네 담 넘어 소뿔이 보이면 소가 있는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안목이 아닌가. 부처님께서 부다가야 금강보좌에서 새벽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연기법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라는 말이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별로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물질계는 원소기호가 혼자인 자체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라는 안정된 상태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다. 인간의 몸도 70%가 물로 존재한다고 하니 말이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몸도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에서 얻어지는 영양소와 각종 물질들이 화합하여 이루어졌다.

그 기능과 역할이 다하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연기의 법칙이다. 부처님께서 깨닫기 이전에도 이 법은 있었고 이후에도 이 법은 만인에게 통하고 있다. 불교를 믿던 다른 종교를 믿던 이 도리는 태양빛이 대지에 고루 비치듯, 평등하게 차별 없이 고루 통하는 것이 불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신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연기인가? 무명을 조건으로 행들이 있다. 행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 물질(名色)이, 정신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 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老), 죽음(死)과 근심(優),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인 고통, 절망 등이 있다.”

실상이 이러하기에 부처님은 이러한 조건도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전에 TV에 출연한 어떤 유명한 연예인이 인생을 토로하며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본적이 있었다. 내용은 가장 소중한 아들을 먼저 보냈다는 내용이다.

옛말에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던가. 그도 눈물을 흘리면서 아픔을 이야기 하지만 정작 자식의 인연이라는 조건을 만들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어도 그냥 그런가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스스로 조건들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갇혀 힘겨워하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지식이 많아도, 권력이 있어도, 돈이 많아도 이런 조건들에 노예가 되어 삶을 천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타파해야 자유롭고 마음의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깨달았다. 불법(佛法)이란 특별한 곳이나 특별한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있는 곳에 중생이 머무는 시간에 함께하지만 우리들의 의식에는 특별한 곳에 특별한 시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잘못된 인연과 조건들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며 그 수행의 기본은 계(戒)에 있다.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며, 경(經)은 부처님 말씀이고 계(戒)는 부처님의 행이라 하였다. 조건들을 만들지 않는 삶은 부처님 일러주신 계를 스승삼아서 실천한다면 삶에 평화가 찾아온다. 일상을 살면서 불필요한 조건을 만들지 않아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길 가르쳐 주는 인도자

부처님오신날 맞이하기 위해

혜안의 깊은 수행 필요한 때

절 주변 봄소식에 진달래와 벚꽃이 피고 있습니다. 금년에 피는 진달래꽃은 지난 겨울 혹독한 추위와 폭설을 이겨내서인지 꽃을 바라보는 느낌이 왠지 새롭습니다. 군데군데 핀 진달래꽃도 해갈이를 하는지 자세히 보면 전년과 금년의 꽃모습이 다르게 보입니다.

뭉실뭉실 힘있게 핀 꽃봉우리가 있는가하면 홑겹으로 축 처져 피는 둥 마는 둥 힘없는 꽃들이 있습니다. 벚꽃나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산에 자란 벚꽃나무는 날씨탓에 잎과 꽃이 함께 피어 도시 근교의 벚꽃과는 새삼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경전에 보면 연못의 홍련 백련 청련 꽃을 보시면서 물속 중간에 핀 꽃, 물 위에 핀 꽃, 물 위에 피지만 물들지 않은 연꽃을 보시면서 다양한 감상에 젖어있기도 하였습니다. 중생의 다양한 업의 인연에 따라 청정한 마음을 많이 오염시킨 삶,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는 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삶, 아름다운 모습의 능력을 지닌 삶, 가르치기 쉬운 삶, 가르치기 어려운 삶들의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아침 저녁에 올리는 예불문에는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칭명합니다. 도사(導師)는 잘 가르치고 인도하며,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여 깨달음 무상안은(無上安隱)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의 제자들은 모두 다 무상안은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러지 못한 자도 있습니까? 세존께서 도사(導師)로서 계시는데 어떤 이유로 이른 자가 있고 이르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왕사성(라자가하)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내가 왕사성 가는 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어도 잘 듣고 무사히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르쳐주는 도사일 뿐입니다.”

봄소식을 전하는 꽃들도 나뭇가지의 새잎과 땅위 새싹들도 불법을 전하는 도사(導師)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삼계의 도사로서 온 우주의 중생들에게 부처님 오심을 일깨우며 또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 땅을 장엄하고 있지는 않는지 혜안(慧眼)의 깊은 수행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와 연기적 존재의 불성을 일깨우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나는 다만 길을 가르쳐 주는 도사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꽃을 보고 봄소식을 듣고, 새싹의 움틈을 대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깨워 마음의 행복과 이 땅의 평화를 장엄하라 부촉하신 모습 같지는 않는지요?

<천수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원아정혜 속원명 (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 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 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 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원컨대 마음과 몸, 안과 밖 수행의 깨달음이, 지혜와 자비로 더하여 공덕 성취된다면 수승한 깨달음의 복과 공덕, 중생 삶에 장엄되게 하시어 모든 중생 깨달음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들의 기도와 수행 그리고 그동안 닦은 복과 공덕 그 모든 것들이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가 잘 장엄되어 회향되기를 발원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르침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각각의 마음 그릇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아무리 많은 비가 와도 각자 가지고 있는 그릇 양만큼 빗물이 담기듯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그 길을 차근차근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라

뜻이 거룩하면 작은 욕구의

충족여부는 대단하지 않아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판차사라 마을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번인 아침공양을 얻기 위해 탁발을 나가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날은 마을의 젊은 선남 선녀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는 축제일이었다. 모두 축제로 들떠 있던 탓에 아무도 음식 공양을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빈 발우를 들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부처님을 본 사악한 마라가 속삭였다.

“당신은 전혀 밥을 얻지 못했습니까? 어떻게 하루 종일 굶을 수 있습니까. 규칙을 어기고 다시 마을로 들어가십시오. 내가 음식을 얻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령 음식을 얻지 못하였다고 해도 나는 즐겁게 살아간다. 저 광음천(光音天)과 같이 나는 법열의 기쁨을 양식으로 삼아 기쁘게 살아간다.” (<잡아함>39권 ‘걸식경’)

이 법문을 읽으면서 우선,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생명이고 사랑이다. 우리는 이 생명인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아기가 엄마를 만나는 것도 음식으로서 시작된다. 엄마는 자신을 먹임으로써 아기를 성장시킨다. 음식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다스리는 일은 중요하다. 본능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면 아름다울 수 없다. 본능은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처님은 뜻이 거룩하면 작은 욕구의 충족여부는 대단하지 않음을 여기에서 보여주셨다. 단적으로 말해서 음식으로 얻는 기쁨(食樂)이 법의 기쁨(法悅)을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찰의 대중공양 하는 곳의 편액이 ‘선열당(禪悅堂)’으로 내걸리는 뜻이 여기에 있다. 음식은 이차적이다. 심리적인 갈증과 굶주림이 일차적이다. 이 심리는 영혼이 풍부한 사람만이 극복할 수 있다. 니체(독일, 1844~1900)가 말하는 초인이 그런 존재다. 황제라면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왕국에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안달할 이유가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적어도 영혼만큼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은 우리 내면의 갈등과 유혹이다. 부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뿐히 이를 넘으셨다. 삶에 무슨 대단한 비결이 필요하랴. 음식이 없으면 하루 굶으면 될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탐내는 마음(貪).화내는 마음(嗔).어리석은 마음(痴), 이 삼독(三毒)이 모든 재앙의 문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곧 유가에서 말하는 ‘근신(謹愼)’인데, 공자님은 “현명한 사람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世), 어지러운 땅을 피하고(地), 나쁜 태도를 피하고(色), 좋지 않은 말을 피한다(言)”고 했다(<논어> ‘헌문’).

‘피()’는 ‘피(避)’의 옛 글자다. 이 ‘네 가지 피함’은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적극적으로 뜻을 펼 시기를 기약하며 궁구하고 수양하는 자세다. 이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 당신의 삼천제자 중에 일곱에 지나지 않았다고 공자님은 술회했다. 유학의 골간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는” 것이니 이 비장함이 천고의 진리로 이끈 힘이 아닐까. 어려움을 헤치고, 인내하면서 흔들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가라 하신 부처님, 우리 곁에 오셔서 감사합니다.

원력생과 업력생

운명 개척해 깨달음의 길을 가자

송화가루 흩날리고 봄꽃이 도량 가득하고 나뭇잎은 연초록 빛깔을 머금고 온통 푸르름 가득하니 삭막했던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더없이 평화롭고 편안함을 느낀다.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 날 가장 큰 행사를 치른 탓인지 아직 봉축행사의 열기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를 정리하면서 다시한번 부처님의 탄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의 생명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지혜롭고 뛰어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고 그 중에서 남자로 태어나기 힘들고 그 중에서 출가해서 수행하기 힘들고 그 중에서 도를 이뤄 성불하기 힘들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 생에 태어나는 생명이나 죽어서 가는 생이나 두 가지 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원력수생(願力受生)이요, 다른 하나는 업력수생(業力受生)이다. 원력수생이나 업력수생모두 전생에 지은 업력에 의하여 받게 되는 결과들이다. 쉽게 이야기를 풀자면 지금까지 닦은바 과보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차이점이라면 업력수생이 운명에 그냥 자신을 맡기는 것이라면 원력수생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깨달음의 길 해탈의 길로 가려는 노력 보살의 길로 가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바국토에 오기 전에 이미 보살로서 500생의 수행을 통해 깨달은 성자로서 도솔천에서 이 땅을 살피다가 법을 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땅이 어디인가 살피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려고 이 땅에 강탄하신 것이다.

혈육과 권세와 부귀영화를 버리고 출가를 한 것은 보살의 서원이 아니면 하기 힘든 결정이 아닐까? 작은 권세도 휘두르기를 좋아하고 재물에 눈이 멀어 서로 헐뜯고 가족조차 죽이는 범부들에 비교한다면 참으로 위대한 성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몸소 보이셨다. 삶의 고통도 보이셨고 수행의 과정도 보이셨고 깨달음의 결과도 보이셨다. 우리들에게 명확히 보이셨다. 그 길을 따라서 오면 정토의 세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우리들이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쪽은 욕망에 좇아 운명에 자신을 맏기는 것이요 다른 한쪽은 고행(苦行)과 난행(難行)을 통해 운명을 거슬러 정토의 세계를 향해가는 길이다.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는 쉽지만 그 끝은 짠 바닷물이 있고 다른 하나는 무척 어렵지만 도달하면 달콤한 일급 청정수가 기다리고 있다.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할 뿐이다.

삶을 살면서 작은 것 하나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경험하고 바꾸려고 몸부림친다. 주변의 예를 들면 요즘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다 점점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것도 있지만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결심을 해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작은 담배하나 못 끊는 결심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만이 심각한데 음식조차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무슨 수행을 할 수 있을까. 수행은 결코 먼 곳에 깊은 산속에 있지 않다.

우리들 일상 속에 잘못된 행동 잘못된 습관 등을 고쳐나간다면 그곳에서 아름다운 수행의 향기가 나온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듯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수행 하느냐에 따라 향기롭기도 하고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작은 것이라도 하나하나 실천하다보면 우리가 세운 원력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기본이기도 하다. 다시한번 부처님의 원력생을 생각해 본다.

경전 말씀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라

옷에 때가 묻으면 비누로

빨아 깨끗이 하는 것처럼

절에 오르는 길목 서울 도봉산 무수골 계곡은 나에게는 자연과 꽃과 새를 맞이하는 춘영화조(春迎花鳥)의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도량입니다.

요즈음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 연두색깔의 무성한 나뭇잎. 어쩌다 하나 둘씩 피어있는 철쭉꽃과 이름모를 야생화, 이 모든 것들이 내 오감(五感)을 감동시키며 기쁨과 즐거움 행복한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옛 선사께서는 춘영화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셨나 하고 스스로 음미해 봅니다. 또한 이 계곡의 이름을 나만이라도 ‘무우수(無憂殊)골’로 바꾸어 ‘근심 걱정이 없는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길목’으로 해석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춘영화조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찰에 오르는 길목을 더욱 아름답게 내 마음의 도량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찰 주지로 부임하여 무우수골을 오르고 내릴 때는 보이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음이 이제는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어느 시인이 ‘올라가며 보지 못한 꽃 내려오며 보았네’라는 구절처럼 말입니다. 가끔은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마음의 때를 씻는 경전의 가르침을 음미하며 부처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수행자여 항상 경전을 가까이하여 마음속에 간직하라. 마치 옷에 때가 묻으면 잿물(비누)로 몇 번이고 빨아 깨끗이 하는 것처럼 마음에 때가 낄 때에는 경전의 말씀으로 마음의 때를 씻어야 할 것이니라.”<불반니항경>

마치 옷에 때가 묻으면 비누로 몇 번이고 빨아 깨끗이 하는 것처럼 이 계곡을 오르고 내리는 반복의 연속이지만 오르고자 하는 급한 마음을 놓으니 기쁨과 즐거운 행복을 주고 있습니다. 달빛이 환하게 비친 지난 보름날 밤에 나는 일부러 절 마당을 걸으면서 달도 쳐다보고 달빛에 비친 내 모습의 그림자를 보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또한 달빛에 비친 뒤 산의 우이암과 서울시내 야경을 보면서 고요히 흐르는 적막 속에 걸음걸음 소리도 귀담아 들어 보았습니다. 아직도 메마른 내 심성에 여유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껴집니다. 옛 조사스님께서는 월하공산(月下公山)를 노래하시며 경전독경의 낭랑함에 수행정진의 행복함을 노래합니다.

“수행자여 항상 경전을 가까이하여 마음속에 간직하라.”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텅 빈 산사에서 고요히 울려 퍼진 경전독경의 염불소리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마음의 때를 씻으며 법열의 노래로 춤을 추며 산사의 극락을 맛보는 노래였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반열반경>에 말씀 하셨습니다.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법의 깊은 뜻을 생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나에게 공양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아직도 다양한 부처님 말씀의 경전 독경에 소홀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시며 생생한 모습으로 자상하시며 당당하게 설하셨던 초기경전부터 중생세계와 자연세계 그리고 부처님세계까지 아름답게 장엄한 대승경전까지…

경전을 더 많이 읽고 공부하고 음미하며 마음의 영성을 따뜻하게 가꾸는 것이 필요할 때입니다. 경전의 말씀은 나를 비쳐 보는 거울이며 나를 변화시키는 수행의 원동력입니다.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심란한 마음에 안온과 평온을 줄 것입니다 마음이 무겁거나 짜증이 날 때 자연과 함께하는 사찰 도량에서 향 하나 공양 올리고 부처님 경전을 한 줄씩 독경한다면 마음의 때는 어느덧 환희의 법열에 함께 할 것입니다. 이 좋은 계절 신심의 원력으로 <법구경>이나 <숫타니파타경> 등 독경을 통하여 마음의 때를 씻으시고 여유와 행복 갖기를 기원 합니다.

영혼을 청정하게 하라

■ 좋은 장소에 머물기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전에는 여러 다른 지역에서 우기(雨期)의 안거(安居)를 마친 비구들이 여래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의 마음을 고무시키는 존경스런 비구들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가시고 나면 우리는 이렇게 마음을 고무시키는 비구들을 맞이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심을 가지고 방문해야할 네 곳이 있다. 이 장소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첫째, 여래가 태어나신 곳이다. 이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심으로 방문해야할 곳이다. 둘째, 여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이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심으로 방문해야할 곳이다. 셋째, 여래가 진리의 바퀴를 처음 굴리신 곳이다. 이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심으로 방문해야 할 곳이다. 넷째, 여래가 열반한 곳이다. 이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심으로 방문해야 할 곳이다. 아난다여, 이 네 곳이 믿음을 가진 이가 신심으로 방문해야할 곳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세상에는 두 가지 큰 힘이 작용한다. 종교적인 천재들은 항상 이 상반된 힘을 응시한다. 서양의 사유전통에서는 선과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윤리와 정의가 중심 주제를 이룬다. 인도에서는 연기(緣起)적으로 본다. 연기라는 것은 일의 원인과 결과가 대칭관계에 있다. 이 촘촘한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선결요건이 된다.

중국은 음과 양의 순환으로 파악했다. “어둠이 밝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웃는다. 밤 12시에 캄캄한 밖에 데리고 나가 밝음이 진거냐고 물으면 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음과 양, 선과 악은 상호 보완되고 자극받고 개선되는 것이지 승패와 득실로 논할 성질이 아니다. 득실은 오직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갖는 사고일 뿐이다.

승패도 마찬가지다. 남의 돈으로 노름을 한 사람이 아침이 되어 주인에게 모두 돌려주고 문을 나설 때 그에게 득실이 있었는가? 우린 이 세상에 잠시 와서 빌려 쓰다 흘러갈 뿐이다. 이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로는 경전에 의지하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려 한다. 실제 선방에 들어 앉아 있어보면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종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마음을 닦는 데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허언이 아니다. 마음을 보는 데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다. 빈 방 같기도 하고 동이 터오는 아침의 잔잔한 여명 같은 은근한 느낌인데, 극한으로 몰아가지 않으면 잘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다. 이 깨달음을 선종에서는 사람에 따라 ‘돈(頓)’과 ‘점(漸)’, 빠르고 느림의 속도감으로 압축하여 말했다.

나는 선종이 인류정신사에 안겨준 선물이 이 두 글자에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영혼을 청정하게 하라. 청정심은 좋은 환경, 영험한 장소에서 영혼은 더욱 탄력을 받는다. 그 장소의 극치가 부처님 사성지다. 부처님께서도 성지순례를 말씀하신 게 무척 소박하게 다가온다. 난 사성지에 세 번을 갔는데도 항상 그립고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 그곳에 있으면 행복해지니까!

수행의 근본은 마음 낮추는 것

- 하심(下心) -

출가수행자나 재가수행자나 수행의 근본에 하심에 있다. 하심이란 마음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하심이다. 하심 하나만 제대로 실천해도 보살이라 칭송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법화경> ‘상불경 보살품’에 상불경보살은 이름그대로 항상 상대를 부처님같이 공경하는 뜻이 있다. <금강경>에도 가장 버려야 할 것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들고 있는데 그 첫째가 아상을 버리라고 설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누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백낙천(호 거이, 향산거사, 772~846)은 당송팔대가에 꼽히는 문장가에 뛰어난 학문의 대가였다. 엄청난 독서를 하여 알음알이는 누구도 당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교만하고 오만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샘을 받고 좌천이 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한번은 지방 근무를 명받고 근무를 하던 중 도림선사라는 분이 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만나기로 하고 찾아갔다. 백낙천은 질문하기를 “부처님 가르침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도림선사가 말씀하시길 “모든 죄를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백낙천은 실망하여 속으로는 ‘공연히 왔다’고 실망하고 “그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하니 도림선사 말씀이 “세 살 먹은 아이는 다 알지만 팔 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하니 백낙천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돌아보니 머리와 입으로는 수없는 성현의 글을 읽고 머리에 가득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오만하고 남을 무시하고 다녔지만 정작 실천은 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도림선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학문을 많이 하고 참선을 많이 하고 계율을 잘 지닌들 마음속에 아만과 독심이 가득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행자는 모름지기 자기의 마음을 살펴서 만심(慢心)을 경계해야 한다. 만심을 품은 사람은 자신만이 옳고 자신만이 바르다고 하고 타인은 무시하거나 능멸하게 된다.

만심을 잘못 가지게 되면 상대방이 어질고 훌륭한 덕성을 지닌 좋은 사람이라도 나쁜 사람으로 폄하하거나 자기만 못하다고 온갖 이유들을 갖다 붙이게 된다. 자신의 허물은 교묘히 감추고 남의 허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이에나처럼 공격하여 상처내고 할퀴고 결국 심한 경우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만심을 일곱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만(慢): 자기보다 다른 이에게 우월감을 갖는 것을 말한다.

과만(過慢):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교만심을 내는 것을 말한다.

만과만(慢過慢): 상대방이 나를 능가하는데도 반대로 자신이 상대방을 능가한다 하여 앞의 과만보다 더욱 교만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아만(我慢): 자신이 아는 것만 믿고 여타의 것을 부정하는 마음.

증상만(增上慢): 깨닫지도 못하고서 깨달은양 행세하는 것.

비하만(卑下慢): 절대평등의 성품을 모르고 스스로 비하하는 비굴한 마음.

사만(邪慢): 사악한 행동을 하고도 자신을 스스로 높이면서 타인을 타박하는 것 등을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곱 가지 만심 중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으면 남이 먼저 알고 멀리하게 된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자신을 잘 살펴 볼일이다. 잘나갈 때 만심이 가득하였거나 베풀지 않아서 그렇지 않을까? 자신을 잘 살펴서 만심을 버리고 하심을 잘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 아닐까.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마음에 상처 남길 일이면 더욱 용서하고 참회해야

여러분은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덕스러운 사람입니까? 당당하며 원리원칙에 의한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또한 마음을 쓰되, 속상한 일이나 기분상한 일 화내는 일이 있을 경우 그 여운을 어떻게 남기십니까?

옛날 어떤 노스님께서 임종을 앞두고 제자를 불러 놓고 그 제자에게 자신의 입 속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님의 치아는 다 빠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 빠지고 없는데 혀는 남아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단하기 때문에 다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특성 덕분에 오래 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 항상 이것을 명심해라.”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은 물리적 세계나 정신세계에서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은 불교의 시작과 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에 상처를 남길 일이라면 더욱 용서하고 참회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텅 비워야 하겠습니다. 마치 물위에 자취가 금방 사라지듯 말입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도 화를 내는 모양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하셨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화내는 모양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바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 땅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 물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이 있다. 바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주 화를 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성냄은 오래 간다. 그것은 마치 바위에 새긴 글이 바람과 물, 세월의 흐름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자주 화를 내고 그 성냄은 오래 간다. 땅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화를 낸다 하여도 그 성냄은 오래가지 않는다. 마치 땅 위의 자취가 바람이나 물, 세월의 흐름으로 쉽게 지워지는 것처럼 그는 화를 잘 내지만 그 성냄은 오래가지 않는다. 물에 새기는 것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남이 심하게 말을 하거나 무례하게 말을 해도 그와 쉽게 화해하고 우호적으로 지낸다. 그것은 마치 물 위의 자취가 즉시 없어지는 것처럼, 그는 남의 무례하고 심한 말에도 성내지 않고 오히려 그와 화해하고 우호적으로 지낸다.” <앙굿따라 니까야>

여러분들의 화(성냄)내는 유형은 어느 것입니까? 수행은 마음 씀씀이를 따뜻하고 온유하며 물 위에 새기는 것처럼 그 마음에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을 바라지 말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날란다의 빠와리까의 망고 숲에 계셨다. 그때 젊은 장자 께왓다가 부처님께 와서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 이 날란다는 부유하고, 번영하고, 인구가 많고, 부처님께 신심이 돈독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어떤 비구에게 보통사람을 초월하는 힘으로 기적을 행하게 하신다면 이 날란다는 더욱 더 부처님께 신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께왓다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께왓다, 나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가서 흰 옷 입은 재가자들을 위해 보통사람을 초월하는 힘으로 기적을 행하라’고.”

그러나 젊은 장자 께왓다는 부처님께 똑같은 요청을 두 번, 세 번하였다. 이에 부처님을 초능력이나 기적의 위험을 그에게 설명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께왓다, 나는 기적의 위험을 보기 때문에 기적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디가 니까야, 께왓다 경>

사람들은 항상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좋고 즐거운 일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루해한다. 항상 새롭고 안락하고 행운이 가득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열망한다. 노력보다 큰 결실을 바라는 게 인간세의 큰 문제다. 또 하나, 구경하기 좋아하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다.

요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대세가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이라 한다. 경쟁을 붙이고 탈락시켜나가는 과정에서 환희와 눈물이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난 좀 잔인하다 싶은데, 이게 재미있는지 온통 화제가 이런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다. 내가 남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남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공식에 우린 이미 익숙해져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특히 종교인에게 기적을 보고 싶어 한다. 위의 내용만 봐도 부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능력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신은 물론이고, 제자들에게도 기적을 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기적의 위험을 보기 때문에 기적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을 내보이는 순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재물과 권력의 유혹이 따르게 마련이다.

기적에는 바로 ‘권력’이라는 함정이 있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성현들을 살펴봐도 통과의례처럼 이 시험이 있었다. 부처님도 세속의 절대왕인 전륜성왕과 붓다의(깨달음을 얻는) 길이 동시에 놓여있었다. 조로아스터도 악마로부터 자신에게 경배하면 권력을 주겠다는 제의가 있었다.

예수에게도 돌을 빵으로 만들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마귀의 권세에 굴복하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주권을 주겠다는 유혹이었다. 인류역사에 영혼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이 함정에 빠져들지 않았다.

공자는 51세~55세까지의 아주 짧은 시기에 잠간 벼슬에 올랐을 뿐이고, ‘3년만 맡겨주면 커다란 성과를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가 오지 않았다. 선종(禪宗)에서 주목한 것이 ‘일상성(日常性)의 도(道)’ 아니던가! 작금, 우리 절 덩굴장미가 ‘벌교꼬막’보다 작은 꽃을 피워 올렸다.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일체가 새롭고 기적 아닌 게 없다. 난, 불교의 이런 정신이 좋다.

‘고귀한 희생’ 되돌아보아야 한다

6월 호국보훈의 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전쟁과 자연재난에 많이 시달려왔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주변의 열강들과 반도의 특성상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다툼으로 엄청난 인명과 재화의 손실로 국력을 소모했다.

우리 민족 최대 비극이요 국제적인 전쟁의 장이었던 1950년 6월25일은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이고 수많은 젊은 군인과 무명용사 학도병 경찰관 그리고 좌우이념의 희생물이 된 사건이다. 유엔군 중공군 등 수 백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이산가족이 되어 서로 아파하며 살고 있다.

당시는 민주진영과 공산진영간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국제전적인 성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 땅에 남아 젊디젊은 영혼들이 이 강토 곳곳에 묻혀서 아직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따뜻하게 위로조차 못하고 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영광이 있었을까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지난 역사의 상처를 없앨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지켜서 후손들에게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전승해야 한다.

1990년대에 하와이를 가 본적이 있다. 그 가운데 인상에 남는 것은 진주만 바다 속에 침몰한 함정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관광자원화 하고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는 미국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힘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있는 진실을 보여주고 잠시의 안이함으로 맞은 대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과거를 잊지 말고 역사를 바로 알고 이 땅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예를 보면 6.25때 북한에서 숨진 자국의 병사들 유해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본국으로 송환해서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있다.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친 그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에 몇 분이 묻혀 있는지 국군포로가 몇 분이 있는지 국군의 유해를 송환하려는 의지는 있는지 궁금하다.

부처님 당시 밧지족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당시 강국인 마갈타국이 밧지족을 정복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자문을 구하기로 했는데 마갈타국왕의 의사를 신하에게 비쳤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함께 행하는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트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는 일은 없는가. 안과 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 등을 아난에 물었다. 아난다는 답하기를 “그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처님께서는 밧지족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목숨으로 지킨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번영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부처님의 설법처럼 밧지족처럼 민주적인 의사표현과 단합된 힘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국민이 되어야 하겠다.

남에게 복 짓는 것이 진정한 행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을 이익케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나 중생이 자신의 그릇에 맞게 이익을 얻는구나. - 의상스님 ‘법성게’ 중에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法性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이신 의상스님(625~702)께서 중국 당나라에서 화엄종의 시조 지엄 화상 회상에서 공부한 뒤 깨달음의 경계와 법(法)에 대하여 표현한 7언 30구 210자의 게송입니다.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교리를 도해한 것입니다. 그 30구 중 스물한 번째와 스물두 번째의 구절이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입니다.

우보(雨寶)의 사전적 의미는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을 보물에 비유함’이니 중생을 이익케 하는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이 허공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묘법이란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교법을 이릅니다. 부처님께서 교설하신 묘한 법문이든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 불성(佛性)이든, 그것은 항상하고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그릇대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 정도에 따라 과(果)를 증득(證得)한다는 것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 묘법이 허공에 가득한들 들을 귀가 없고 알아 볼 눈을 갖추지 않으면 별무소용인 것처럼, 모든 것이 구족(具足)해 있더라도 노력과 준비가 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큰 그릇을 준비하면 많게, 작은 그릇이면 적게, 이도저도 없으면 두 손을 오므린 만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묘법의 공덕이 중생들에게는 복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복 받을 그릇을 키워야 많이 받을 수 있겠지요. 많은 이들이 복을 갈구하여 목말라합니다만 종교의 부정적인 면을 말할 때 기도하여 복을 구하는 기복(祈福)을 그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한 지적이고 탈피해야 할 신앙인의 마음가짐이긴 합니다.

그렇게 비난하는 이도 복을 준다면 마다할까요. 우리네 새해 덕담이 “복 많이 받아라”인 것처럼 복을 받는 일이 덕담과 함께 주어지는 어른 쌈지에서 나오는 용돈과 같이 여겨져 살아온 세월 또한 아득합니다. 그러나 복이 어른 쌈지에서 나오는 용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어 내가 거두는 농사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른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31권에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여래는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말씀하며 여섯 가지 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보시요. 둘째는 교훈이요. 셋째는 인욕이요. 넷째는 법과 이치에 맞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다”라 하시며 게송으로 이르시길, “이 세상에 있는 힘 중에 천상과 인간에서 노닐게 하는 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나니 그 복으로 불도(佛道)도 성취하네.”

복의 힘, 복력으로 불도까지도 성취하신다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더 지으려고 노력하시는 복을, 하물며 중생인 우리가 짓지 아니하고 거저 받기를 고대하며 감나무 밑에 누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시절 어려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이때, 나보다 어려운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복(作福)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아무리 많이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여섯 가지 가운데 보시를 첫째로 꼽으셨습니다.

마지막 설법’의 큰 호소력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依法不依人 依義不依語 依智不依識 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 <열반경> 제6권 ‘사의품(四依品)’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을 담은 경전이 <열반경>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한 달간 중생들에게 설한 가르침이다. 80 평생 전법(傳法)을 위해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부처님께서 남긴 ‘마지막 설법’ 이라는 점에서 그 어느 경전보다 호소력이 크다.

후학들(통화불교전강원)을 위해 매달 두 차례 동국대 문화관 2층 학명세미나실에서 <대열반경> 강의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강백 각성스님(부산 화엄사 회주)도 <열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각성스님은 “열반경은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최고의 대승경전”이라면서 불자들이 ‘필수적으로 공부해야할 경전’임을 역설한다.

<열반경>의 모든 내용이 소중하지만, 특히 비구들에게 설한 내용을 담은 ‘사의품(四依品)’은 출가수행자는 물론 재가불자들도 깊이 받아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수행정진하면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며,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 ‘사의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에 의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자칫 진리를 소홀히 여겨 삿된 길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말’ 보다는 ‘뜻’에 의지하라고 했다. 그럴듯하게 들리거나 포장된 말에 속지 말고, 그 보다는 내포된 ‘의미’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사실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들은 말에 속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장 듣기 좋은 말에 현혹되기도 하고, 싫은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교활하고 아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말에 마음을 주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고, 그 ‘뜻’에 있다고 했다. 외형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교법(敎法)의 영원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어 부처님은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을 멀리할 것을 당부했다. 지식(知識)은 ‘어떤 대상에 대해 알게 된 인식’이며, 지혜(智慧)는 ‘이치를 깨달아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다. 단순히 알음알이에 머물러 있는 지식의 경계를 넘어, 이치를 알고 또 이를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별의 단계인 지식을 지양하라는 가르침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할 것을 당부했다. 요의경의 사전적인 의미는 ‘불법(佛法)의 도리를 명백하고 완전하게 나타낸 경전’이다. 쉽게 이해하면 요의경은 대승(大乘)이요, 불요의경은 소승(小乘)이라고 할 수 있다.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대중과 함께 나누지 않는 것은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회향(廻向)의 중요성을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의 최후 설법을 담은 <열반경>의 ‘사의품’에서 강조한 가르침을 배우고 익혀 대승(大乘)의 진리를 체득하는 수행자가 되기 위한 정진을 계속 할 것이다.

수행자의 여섯 가지 도리

첫째, 몸으로 부처님 행을 하여 화합하고 (身和敬),

둘째, 입으로 부처님 말을 하여 화합하고 (口和敬),

셋째, 뜻으로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하여 화합하고 (意和敬),

넷째, 율법을 서로 지켜 바른 행동을 하여 화합하고 (戒和敬),

다섯째, 바른 견해를 가져 화합하고 (見和敬),

여섯째, 자리이타에 충실하여 화합하라 (利和敬).

- 육화경법(六和敬法)의 ‘여섯가지 도리’

‘육화경법(六和敬法)’은 불교의 진리를 깨치고자 수행하는 사람들이 서로 공경하며 화합하여 깨달음을 성취해야 하는 여섯 가지 도리로 송(宋)나라 고승(高僧)인 목암선향(睦庵善鄕)스님이 설했다고 한다. ‘육화합(六和合)’ 혹은 ‘육화(六和)’ 라고도 하는 이 여섯 가지 도리는 행자시절부터 마음속에 담아 온 구절이다.

이 도리는 불교교단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며 수행생활에서 생기는 불화나 분열을 막는 역할을 한다. 분명하고 확실한 도덕적 윤리적 해결책이 부처님 가르침 안에 있는데 이것이 ‘육화경법’의 가르침이다.

육화경법의 실천을 구체화한 것으로 제시되는 6가지 도리가 있다.

첫 번째가 신화동주(身和同住)다. 이는 “몸으로 화합하여 같이 살라”는 뜻이다. 수행자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이 모여 생활하다 보면 함께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고 생각하는 바도 비슷비슷해진다. “대중이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이 있듯 대중생활을 통해 서로가 규율을 지켜가면서 배움을 얻기도 한다.

두 번째가 구화무쟁(口和無諍)이다. “입으로 화합하여 다투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입으로 많은 죄업을 짓고 살아간다. 그래서 경전을 독송할 때는 언제나 입을 깨끗하게 하는 진언인 ‘정구업진언’을 염송하는 것이다.

세 번째가 의화동사(意和同事)다. “뜻으로 화합해 함께 일하라”는 뜻이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화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뜻하는 바가 있으면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모름지기 큰 뜻을 이룰 때는 대중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소납이 불교세가 약한 인천지역에서 포교를 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구절이다.

네 번째가 계화동수(戒和同修)다. “계율로 화합해 같이 수행하라”는 뜻이다.

다섯째가 견화동해(見和同解)다. “바른 견해로 화합하여 같이 해탈하라”는 뜻이다. 두 덕목 모두 수행자가 갖추어 실천해야 할 도리다.

여섯째가 이화동균(利和同均)이다. “이익을 균등히 나누라”는 뜻이다.

어느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생긴 이익은 고르게 분배해야 잡음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출가수행자는 원칙적으로 ‘무소유’다. 그래서 승가공동체의 재산은 모두가 함께 소유하는 ‘총유(總有)’ 개념이다. 출가수행자로 살아온 지 30년이 넘었지만 언제나 이 도리를 지키기 위해 매일 삭발한 머리를 만져 본다.

신묘년 7월 초하루법회

‘무엇을 짐이라 하는가~’

중생이 짐을 지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리라. 무엇을 짐이라 하는가. 자기 육신에 집착하는 것이 짐이요. 자기 생각에 매달리는 것이 짐이다. 중생은 왜 짐을 지는가?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멀리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짐을 벗을 수가 없다. 항상 무거운 짐을 버리고자 할지언정 새로운 짐을 만들지 말라. 짐을 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병이요. 짐을 벗어나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반드시 애욕을 끊고 모든 법답지 못한 행동을 버려라. 그것들을 모두 버리면 다시는 윤회의 몸을 받지 않으리라. - <증일아함경> 中

이 경전에서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버려야 할 짐으로 육신에 대한 집착과 분별심에 매달리는 짐이며, 다른 하나는 짐을 벗을 수 있는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많은 꿈을 안고 사는데 꿈이 인생여정에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경우가 있으며, 어떤 꿈은 짐을 벗어버리고 훌훌 날아가는 즐거움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꿈이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하면서 노력하고 있는 꿈이 독이 되는 건지 약이 되는 건지 관찰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심성을 속박하는 짐, 즉 집착은 버려야 합니다. 즉 무엇이든지 소유하여 영원히 가지려고 하면 이것에 의해 속박되어 괴로움을 받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돈을 버는 것은 좋으나 이것을 나와 남을 위해 쓰지 않고 영원히 간직하려고 하면 돈에 의해 속박되고, 권력을 이타적인 면에 활용하려고 하면 약이 되지만 권위적인 의식 속에 남에게 권세를 행사하면서 영원히 가지려고 하면 권력에 속박되어 불행한 삶을 삽니다. 결혼을 하면 여자는 남자의 소유, 남자는 여자의 소유로 속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갖게 되면 묶이게 되는 것이 집착입니다. 집착하게 되면 여기에는 불편과 부자유가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1억이란 돈을 소유하면 ‘내 것’이란 고정된 관념이 발생하고 이것을 도둑이나 강도, 그 누구에게도 억울하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어 돈에 속박이 됩니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어떤 사안에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허구심입니다. 이 집착은 무상법(無常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생기는 것으로 이러한 집착을 버려야만 인간의 건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되풀이하는 윤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의 길인 니르바나에 오를 것입니다.

<증일아함경>에서 말하는 집착하는 짐은 버려 쓰려고(보시) 하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려는 것은 탐욕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경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짐을 버리는 수행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등 삼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삼독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먼저 현상세계의 일을 자세히 관찰하여 이 세간의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한없이 변한다는 무상한 이치를 깨달아 하나하나 탐하는 마음을 제거하므로 인해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진심(瞋心)과 치심(癡心)도 엷어져 결국 대도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묘년 7월 수요법회

‘전도를 떠나라~’

불교의 목적 생생하게 전해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간과 신들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전도를 떠나되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 <잡아함경> 제39권

불자의 길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수행과 교화, 둘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줘

불교를 신행하는 사람들에게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불’ ‘해탈’ 또는 ‘깨달음’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특히 불교에 대한 소양과 지식을 가진 불자들의 경우 그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깨달음에 대한 현실적인 가능성과 피부로 느끼는 수행의 진보는 또한 막연하기만 하다.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깨달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교의 목적이 아니다. 부처님 당신께서 도달한 궁극의 경지를 다만 ‘열반’ ‘해탈’이라고 표현한 것 일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과정과 수행자의 삶의 방법, 불자들이 가야할 길을 일러주셨지 깨달음에 집착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수행의 완성을 열반 또는 깨달음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좋지 않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죽음을 삶의 목적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면에서 유명한 3층집을 짓는 비유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층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다지고, 1층부터 2층, 3층을 차례로 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기초를 다지는 일과 1층, 2층을 지어나가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 현재 적지 않은 우리 불자들과 수행자들이 열반과 깨달음에 집착하여 이와 유사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전도선언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육성으로 생생하게 불교의 목적을 설하고 계신다.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승보살의 근본정신을 잘못 이해해서 ‘먼저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전도교화 해야 한다’고 인식하는 스님과 불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전에 나타나는 가르침을 살펴보면 수행과 교화가 둘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행과정 자체가 전도교화행이 되고, 전도교화행을 통해 수행이 깊어지는 것이다. 불교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성공과 완성보다 오히려 그 과정의 노력과 열정에 더 의미와 가치를 두는 안목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이런 안목과 지혜를 갖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저 다른 종교인들이 항시 그들의 기도문을 외우듯이 우리 불자들은 어떤 법회에서라도 전도선언경을 지니고 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탈열반과 깨달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목표에 매몰되어 현재와 현실에서의 진정한 불자의 수행과 기도를 잊고 있다면 전도선언경은 무엇보다 뚜렷하고 분명한 불자의 길을 알려줄 것이다.

삼세심 불가득(三世心 不可得)

삼세심 불가득(三世心 不可得)

過去心不可得 (과거심불가득)

現在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

未來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아니하며, 공연히 망상에 젖지 말며, 오직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지어다.

- <금강경>중에서

“지금 충실히 살지어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는데 퍽이나 분주하다. 마치 훌훌 벗어 버리면 큰 재앙이라도 내릴 듯한 오래된 관습처럼. 그래서 보내는 것을 묵은해라, 맞이하는 것을 새해라 이름들을 붙인다. 태양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대로의 무심(無心)한 태양인데 무시무종(無時無終)이란 영겁의 세월 속에서 시공(時空)을 굳이 구분 지으려는 것은 그리 급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지난날을 돌이켜 오늘날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것이리라.

살아가면서 아픔이나 상처, 슬픔이나 불쾌한 감정, 서운함, 미련 등 이런 다양한 일들로 인해 우리는 후회와 원망, 증오와 분노, 혹은 적개심이나 복수심의 응고를 마음속에 품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도 했듯이 살면서 이런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들이고 그로 인해 문득문득 네거티브한 감정에 번민 할 수도 있으리.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현재 오늘을 흐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 아프고 더 어리석고 더 불행한 삶인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것도 흔적 없이(過去心 不可得).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지우지 않고 의업(意業)의 탱크 속에 화석화 하려는 것은 행복과 원수진 부질없는 집착심의 소산이라.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을 버리지 못하고 부둥켜안고 안절부절 딜레마에서 허덕이는 것이나, 아직 오지 않는 미래를 잡아 당겨(未來心 不可得) 현재 오늘을 궁상 청승에 한숨짓는 것도 또 다른 맹목적 습관이리라. 우린 미래에 대한 공연한 근심 걱정과 그에 따른 불안 초조 긴장이나 혹은 지나친 기대나 허황된 계획, 망상, 공상으로 인해 이것이 만족되지 않을 땐 좌절과 절망, 회의감, 원망, 우울 등으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그대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일없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근심 걱정이 씨앗(因)이 되어 또 다른 근심 걱정거리를 불러들이는 고통으로 재생산(果)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고는 부정적인 삶으로 이어지고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緣起)의 합법칙성 아닐까?

“법의 공덕을 이야기하라”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그때 많은 제자들이 모여서 먹고사는 이야기, 도적들과 싸운 이야기, 술 마시고 즐기던 이야기 등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잡담을 그만두어라. 그런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하고 착한 일도 아니다. 그런 일로 수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너희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 법의 공덕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라. 수행자로써 만족할 줄 아는 이야기.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은 용맹의 이야기. 남을 위한 설법의 이야기 그리고 지혜를 얻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으려는 것들을 따져라.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라.”<증일 아함경>

모름지기 불자는 대화에 있어서 부처님 이야기, 신앙체험 이야기, 수행을 통한 마음의 평온을 얻은 정진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중요한 대화는 어떤 내용입니까? 가정에서 자녀와 남편과의 이야기,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법의 공덕과 번뇌를 끊는 좀 더 많은 수행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족할 줄 아는 감사의 이야기. 남을 위해 설법하는 이야기, 삶의 지혜 속에 행복이 넘치는 웃음꽃 피는 수행이야기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대화의 내용에 따라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도 있으며 행복과 고통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의 내용은 마음을 열고 닫는 중요한 도구이며 더구나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나누는 대화는 무한한 공덕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대화를 나누는 장소와 상대에 따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다보면 필요 없는 말이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서 진짜 중요한 내용을 나누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화의 주제나 분위기에 관계없이 엉뚱한 말로 썰렁하게 하여 성냄과 화를 불러오거나 욕심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천수경에는 정구업진언과 구업의 참회”를 말씀 하셨습니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이란 말이 있듯이 쓸데없는 말이나 과한 참견 그리고 필요 이상의 이야기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성스러운 진검을 꺼내서 사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하고자 하는 목적을 벗어나게 됩니다. 모름지기 불자는 대화에 있어서 부처님의 이야기, 신앙체험의 이야기, 수행을 통한 마음의 평온을 얻은 정진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불자는 만족할 줄 알아 감사한 마음으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로 시작하여 우리가 하나 라는 인연 연기의 삶속에 신행과 수행이야기를 나누며, 칭찬과 참회, 언젠가 성불할 것이라는 “법화경의 상정진보살의 원력”을 배워 희망의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이야기! 땅위의 꽃처럼, 행복을 노래하는 이야기! 수행에서 우러나는 향기처럼, 여유로움과 편안함으로 진실하며 부드럽게 화합을 이끄는 수행이야기로 이끌어 갑시다.

또한 사찰이나 종단의 건강한 신행공동체를 위한 이야기도 중요합니다. 얼마 전 총무원장 자승스님께서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 주신 전통문화의 보존과 자성과 쇄신의 5대 결사가 새로운 수행운동으로 거듭나야 할 중요한 대화의 주제입니다. 이는 새로운 신행운동의 공동체로써 종단구성원으로, 조계종 신도등록과 불교신문 구독으로 당당한 불자, 부처님 가르침을 나누는 법우, 수행을 함께하는 도반으로 이야기의 웃음꽃을 피웁시다. 이제 불자들은 행복한 수행 이야기로 우리의 주변을 즐겁게 법의 공덕으로 인도합시다.

만물은 활동과 휴식이 조화 이뤄야

편안한 수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알라위 근처에 머무셨고, 싱사빠 숲의 마차길이 있는 곳의 나뭇잎 위에 앉아 계셨다. 마침 핫타까 왕자가 산책하러 나왔다가 이 길을 지나면서 앉아계신 부처님을 보았다. 왕자는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렇게 여쭸다.

“부처님,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왕자여, 나는 잘 잤소. 나는 아마 세상에서 편히 잘 자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밤은 춥고 한 겨울엔 눈이 오기도 합니다. 소 발굽으로 다져진 땅은 딱딱하고 떨어진 이파리 더미도 얇고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갈색의 가사만으로 견디기는 바람과 추위가 몹시 강합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편안히 주무신다고 하십니다.”

“왕자여, 하나 물어보겠다. 어떤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있다고 하자. 그는 무척 부자여서 궁궐 같은 집에서 부족함이 없이 편하게 살고 있다. 그대 생각에 이 장자는 편안한 잠을 자겠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하겠는가?”

“그는 편안히 잠을 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자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면 그의 몸과 마음에 번뇌의 열기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번뇌의 열기가 일어날 것입니다.”

“왕자여, 장자를 괴롭히고 잠을 편히 이룰 수 없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여래에게서 버려졌고, 뿌리 채 뽑혀졌고, 야자수의 잘린 밑둥처럼 다시는 자라지 못하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왕자여, 그러므로 나는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에 느긋하게 쉰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몸살기가 좀 있기도 했지만 일찍 밤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창밖에 다가온 어둠이 잠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쉰 듯 했는데도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 공양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고 여전히 밖은 장맛비가 어둠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건물로 새어 들어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빗물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올해는 더욱 많은 비가 올 거라는 말을 듣고는 대대적인 방수공사를 했더니 효과가 있어 이젠 큰 근심 하나를 덜게 되었다. 올 여름의 편안함은 이런 작은 이유도 빼 놓을 수 없다.

만물은 활동과 휴식의 순환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활동이 건강하면 휴식이 편안하고, 충분한 휴식은 일상에 활력을 준다. 휴식의 절정에 수면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일어나는 불면증은 예외로 하더라도 대부분의 수면장애는 일상에서의 근심과 불안이 큰 원인이 된다.

알라위 국의 왕자가 부처님께 올린 질문의 핵심은 아무리 부와 권력을 가져도 편안함을 갖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답변은 결국 탐․진․치를 어떻게 다스리느냐로 귀결됐다. 작금의 세상은 누구나 부를 축적하고 개인의 권익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에 대한 들끓는 열망을 우린 좀 더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은 이 마찰의 열기가 중생에게는 도리어 속박이 되지만, 여래는 탐․진․치가 뿌리 채 뽑혀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이 항상 중생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뇌와 안락은 생각의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가?

세간과 출세간

‘우리는 지금 어디에 머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다. 선(善)과 악(惡), 흑(黑)과 백(白) 등이 있는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세간과 출세간은 불법에서 말하는 세계이다.

사전적 의미의 세간은 세속(世俗), 범속(凡俗)으로서 세상의 사물이나 번뇌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의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세속적인 것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 즉 욕계, 색계, 무색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출세간은 세간의 반대개념으로 열반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복잡하고 다양한 고통과 고민과 갈등, 증오 등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일같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집단자살사건, 각종비리와 부정으로 연일 언론에 거론되는 사건 사고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심적인 고통과 아픔, 불안과 초조 등 그들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

비단 재가불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출세간을 지향하는 출가수행자들도 이런저런 일들로 고통 속에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있다 하니 인생사 고통은 재가나 출가나 다름이 없다. 재가의 길을 걸으며 출세간을 사는 분들이 있고 출가의 길을 가면서 세간의 길을 가는 분들을 많이 본다. 재가나 출가의 구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수행의 입장에서의 소중한 가치는 삶의 과정과 목표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세간의 고통을 여의고 출세간의 길을 제시한 경전이 <숫타니파타>인데 제1장 뱀품을 보면 “연못에 핀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넘쳐흐르는 애착의 물줄기를 남김없이 말려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안으로 성냄을 없고, 밖으로는 세상의 영고성쇠를 초월한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달려갈지라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고 모든 것은 허망하다고 아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숫타니파타> 제2장 ‘소치는 다니야’ 편을 보면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이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방에는 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했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완강한 미혹을 벗어버렸다. 마히이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은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 거던 비를 뿌리소서.”…(중략)…

악마 파아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이 집착하는 근본은 바로 기쁨이다. 집착할 것도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스승은 대답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근심하고 소를 가진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참으로 사람이 집착하는 근본은 근심이니라. 집착이 없는 이는 근심할 것도 없느니라.

세간의 근심과 걱정과 괴로움은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생겨나고 출세간의 열반락은 탐욕과 집착을 버림에서 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세간과 출세간의 차이는 한 생각 차이임을 알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세간도 출세간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리듯이, 다 비어있는 지극히 공(空)한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라”

스스로 깨끗한 그 마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自淨其心 是諸佛敎 - <법구경>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고통의 바다(苦海)를 헤맨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쉽지 않다. 오히려 고해에 더욱 깊이 빠지고 만다.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을 맑히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구경>에 나오는 ‘자정기심(自淨其心) 시제불교(是諸佛敎)’는 불교의 이 같은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무명(無明)을 없애고 탐욕을 끊는 수행의 근간이 바로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출가자는 물론 사바세계에 사는 재가불자들도 늘 마음에 새겨 수행의 지침으로 삼았으면 하는 경구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신도들에게도 ‘자정기심’의 부처님 가르침을 강조한다. ‘자정기심’이 불과 넉자에 지나지 않지만 담겨있는 뜻만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갖는 일이 쉽지는 않다. 때문에 순간순간 번민하고 고뇌하는 경우가 많다. 부처님은 무명이 탐진치(貪瞋痴) 삼독에 의해 생긴다고 지적했다.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중생들은 번뇌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반대로 마음을 맑히고 깨끗하게 하면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되면 번뇌를 제거하고 무명이 사라져 광명세계(光明世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되는 정도(正道)이자 지름길이 바로 ‘자정기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이를 속이는 일도 나쁘지만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임을 불자들은 특히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제자로 살아가는 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복 짓는 것이 진정한 행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을 이익케 하는 보배비가 허공에 가득하나 중생이 자신의 그릇에 맞게 이익을 얻는구나. - 의상스님 ‘법성게’ 중에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法性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이신 의상스님(625~702)께서 중국 당나라에서 화엄종의 시조 지엄 화상 회상에서 공부한 뒤 깨달음의 경계와 법(法)에 대하여 표현한 7언 30구 210자의 게송입니다. 화엄일승(華嚴一乘)의 교리를 도해한 것입니다. 그 30구 중 스물한 번째와 스물두 번째의 구절이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입니다.

우보(雨寶)의 사전적 의미는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을 보물에 비유함’이니 중생을 이익케 하는 묘법(妙法)의 공덕(功德)이 허공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묘법이란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교법을 이릅니다. 부처님께서 교설하신 묘한 법문이든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 불성(佛性)이든, 그것은 항상하고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그릇대로 이익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수행 정도에 따라 과(果)를 증득(證得)한다는 것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 묘법이 허공에 가득한들 들을 귀가 없고 알아 볼 눈을 갖추지 않으면 별무소용인 것처럼, 모든 것이 구족(具足)해 있더라도 노력과 준비가 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큰 그릇을 준비하면 많게, 작은 그릇이면 적게, 이도저도 없으면 두 손을 오므린 만큼….

중생을 이롭게 하는 묘법의 공덕이 중생들에게는 복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복 받을 그릇을 키워야 많이 받을 수 있겠지요. 많은 이들이 복을 갈구하여 목말라합니다만 종교의 부정적인 면을 말할 때 기도하여 복을 구하는 기복(祈福)을 그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물론 당연한 지적이고 탈피해야 할 신앙인의 마음가짐이긴 합니다.

그렇게 비난하는 이도 복을 준다면 마다할까요. 우리네 새해 덕담이 “복 많이 받아라” 인 것처럼 복을 받는 일이 덕담과 함께 주어지는 어른 쌈지에서 나오는 용돈과 같이 여겨져 살아온 세월 또한 아득합니다. 그러나 복이 어른 쌈지에서 나오는 용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어 내가 거두는 농사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어른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31권에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여래는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고 말씀하며 여섯 가지 법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보시요. 둘째는 교훈이요. 셋째는 인욕이요. 넷째는 법과 이치에 맞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는 것이다” 라 하시며 게송으로 이르시길, “이 세상에 있는 힘 중에 천상과 인간에서 노닐게 하는 복의 힘이 가장 훌륭하나니 그 복으로 불도(佛道)도 성취하네.”

복의 힘, 복력으로 불도까지도 성취하신다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더 지으려고 노력하시는 복을, 하물며 중생인 우리가 짓지 아니하고 거저 받기를 고대하며 감나무 밑에 누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어려운 시절 어려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이때, 나보다 어려운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복(作福)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아무리 많이 해도 만족할 수 없는 여섯 가지 가운데 보시를 첫째로 꼽으셨습니다.

선행은 결과조차 생각지 말라

보시행하며 형식적인 것에 매여 행하지는 않았는지 새겨 볼 말

妙行無住(묘행무주) “아름다운(좋은 일)행을 함에 머무르는 바가 없다”

- <금강경> ‘묘행무주분’ 중에서

금강경 제4장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묘행무주(妙行無住)-아름다운(좋은 일)행을 함에 머무르는 바가 없다”는 말씀이다. 어구가 가르치는 내용이 실로 향기롭고 그윽하지 않은가.

살아 있는 생명은 어떤 행위를 통해서 살아간다. 삶이란 하루하루를 엮어가는 것, 그 엮어가는 삶이 좋고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지만 만들어가는 행위를 메아리처럼 돌아올 결과에 집착과 애증을 결부시키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뚤어진 마음은 인연과 업에 상처주고 아픔을 준다. 잘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마음을 주거나 물질을 주거나 간에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 무엇을 주었는가? 라는 생각이나 어떤 것을 어떻게 주었다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면 因(원인)에 대한 果(결과)에 집착과 병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마음이나 물질을 받는 이는 편한 마음으로 그 보시를 받아드리며 행복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출세간을 아울러 봉사와 보시행을 함에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매여 행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말이다.

요즘 세간의 화두는 봉사활동이다. 기도 열심히 다니던 신도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면, 곧 어느 단체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곤 하니 우리나라도 이젠 복지 분야에 예산과 정책의 많은 부분 할애하니 좋은 현상이다. 복지 분야의 활동이 두드러질수록 그 나라의 경제 문화수준이 높다니 말이다.

인도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테레사 수녀처럼 무조건적인 봉사는 아니겠지만 이웃을 배려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한 봉사와 기부가 진정한 보살행의 실현이 아닌가. 하지만 그곳에 봉사로 헌신하는 보살행이 아닌 자신의 이익과 결부시켜 때만 되면 철새처럼 쫓아다니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듯 하며 그들의 행위로 인해 진심으로 일하는 봉사자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적잖이 있음은 방송매체를 보아 아는 일이다.

인천의 사표가 될 일부 스님들조차 개인과 단체 이익을 위해 무주상보시가 아닌 이익과 결부된 기부를 하고 있어 정작 필요한 곳은 그 공덕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욱 우스운 일은 무주상보시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마음의 상을 내게 하여 그 공덕의 의미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반성하고 경계 할 일이다. 이처럼 정당과 단체의 이익을 위해 또는 개인의 영리를 위하여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는 묘행의 빛을 퇴색시키는 일이 허다하니 통탄할 일이다.

중생교화를 목적으로 한 포교의 현장이거나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활동의 현장에서나 모양은 있으되 그 모양에 집착하여 본분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진 말아야한다.

상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말씀만으로도 좋은 이웃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는 이 삶의 욕심이 배제되고 절제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행하는 불자는 묘행무주(妙行無住)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또한 이 말씀들을 법보시함에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법에 머무름 없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이른바 형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되 모양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같은 뜻으로 일승 보살행하라”

지혜를 완성, 성취하는 환희지

상입과 육상의 원리를 체계화

同志一乘 同修萬行(동지일승 동수만행)

같은 뜻인 일승으로 같은 수행인 여러 가지 보살행을 한다.

- <화엄경> 십지품 초환희지(初歡喜地) 중

화엄경에서 수행계위를 말할 때, 크게 10주(住), 10행(行), 10향(向), 10지(地)라고 한다. 이 중 10지는 타화자재천궁에서 금강장보살이 보살대지혜광명삼매에서 일어나 설하는 지혜의 내용으로, 앞의 10주, 10행, 10회향을 통 털어서 십지보살의 행으로 보이는 곳이다.

초지는 비심(悲心)을 시작으로 지혜를 증장시키고 선교방편으로 포섭하며, 범부의 지(地)를 넘어 보살의 위(位)에 들어가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 즉 도솔천궁에서 태(胎)에 들고 태(胎)에 머물다가 태어나서 출가하여 도(道)를 이루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모두 큰 서원으로 지(地)의 법 즉 지혜를 성취하는 곳이라 환희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경전에서는 이곳의 원(願)은 나는 곳마다 불보살을 떠나지 않고 같은 의행(意行)을 얻으며 일승(一乘)을 같이한다고 한다. 뜻을 같이하여 일승의 보살행을 같이 행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곳마다 좋은 벗(良朋)을 만들고, 곳곳마다 서로 좋은 친구(善友)가 되는 것이 만행(萬行)이며 보현의 행이다.

뿐 만 아니라 환희지(歡喜地)의 원은 일체 국토가 하나의 국토에 들어가고, 하나의 국토가 일체의 국토에 들어간다고 하는 상입(相入)의 원리와 총별, 동이, 성괴의 육상(六相) 원리를 체계화하는 지위다.

원(願)은 불보살과 뜻을 같이 하는 하나의 수행법으로, 실천적 요소가 강한 한국불교에서는 원을 더욱 강조한다. 의상스님은 10불(佛) 중에 원불(願佛)을 중요시하였고, 균여스님은 향찰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짓고, 그리고 의천스님은 불교를 익히는 학도(學徒)들이라면 배워야할 관법(觀法)으로 제시하였다.

의상스님의 제자들은 법성게(法性偈)에 쓰인 10불을 다음과 같이 활발발한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붉은 줄을 따라 법성게의 글자 글자를 차례로 이을 때 나타나는 것을 반시(槃詩)라고 한다. 이 반시에서 만약 ‘불(佛)’자의 도장으로 찍으면 깨달음 분상, 증분(證分)의 10불이며, 만약에 ‘보(普)’자의 도장으로 찍으면 가르침 분상, 교분(敎分)의 10불이다. 이렇듯 10불은 도장을 찍듯이 그 모습을 나타내는 출생이 있는데, 두 번째 원불은 출생(出生)의 뜻이 있다. 해인(海印) 속에서 삼세간의 모든 법을 내며, 삼세간의 낱낱 법은 법계의 모든 법을 낸다. 생각생각 끊이지 않고 항상 새로이 다함없는 도장을 찍는 출생을 한다.

균여스님은 보현보살의 10원이 아주 쉬운 말로 이 세상에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현십종원왕가를 지었다. 의천스님은 같은 뜻으로 같은 수행을 하면 큰마음은 변하지 않고 큰 서원은 내 몸에 있고, 또 내 손바닥에는 보현의 오름(乘)이 있으며 편안하고 한가로움은 노사나불의 경계라고 한다. 이것은 화엄교가들이 관(觀)과 교(敎)를 동시에 닦는 수행법이다.

이와 같이 원불과 관법은 화엄행자라면 누구나 행하는 보살행이며 수행법이다. 초지의 비심에서 시작하는 보살은 선근을 깊이 심고 모든 행을 잘 닦아 동수만행(同修萬行)하는 서원을 내야 한다. 중생계가 끝나면 이 원도 끝나는 것이며, 중생계가 다할 수 없으면 이 원의 선근도 다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만행의 출생이 좋은 친구가 되는 수행자의 행이며 여래가에 나는 것임을 서원하며, 언제나 나의 마음에 담고 있는 경구이다.

진흙 늪에 활짝 핀 연꽃이 되자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마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1970년대를 산 사람 중에 은하철도 999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연 은하세계를 달릴 수 있는 기차가 있을까마는 없다 해도 좋다. 은하철도는 우리 국민 마음속에 달린다면 달리는 그런 철도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꿈이 있으면 살 수 있고, 꿈이 없으면 살기 힘든 땅이 바로 사바세계다. 사람은 꿈이 있어야 달릴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승려가 되는 것도 성불(成佛)이라는 꿈 때문에 하는 것이다. 결혼, 사업, 학업, 농사, 정치,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있게 된 이유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꿈 때문이다. 종교적인 기도와 배움이란 바로 이런 꿈을 이뤄준다고 말한다. 이 세상의 가르침도 여러 종류가 있다. 과연 나는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가르침을 따라할지 어지러울 지경이다.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작은 은하세계 이루는 것”

인간은 멀고 먼 옛날, 그 옛날, 미지의 세계로부터 은하철도를 탔다. 그리고 무한정 달렸다. 얼마를 달려왔는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지구라는 역에서 내려 온갖 것을 경험했다. 산과 바다와 들, 온갖 꽃들과 아름다운 새들의 모습과 노래들, 온갖 생명들이 넘쳐흐른다. 아름다운 지구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부동산도 사서 등기도 하고, 예금통장도 만들고, 물론 뱅크카드도 여러 개 만들었다. 사람들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그리하여 수도 없는 인간들의 모습이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하나씩 직업을 가져야 살게 돼 있다. 온갖 직장이 생겨났다. 학교와 수도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을 세상이라 한다. 전쟁이나 투쟁이라면 끝도 없다. 모두가 인간의 욕심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모두는 은하철도를 타는 것을 깜박해 버렸다. 그들은 은하철도를 어디서 어떻게 타는지조차도 잃어 버렸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어딘지 모두 잃어버렸다. 우연히 정차한 은하철도 999, 지구라는 역이다.

그래서 여기에 살고 있는 이곳은 인류의 공유재산이다. 인류가 가꾸고 살아가야 할 유산이다. 인류가 공유해야할 유산이니 우린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을 어떻게 가꿔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이 풍부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유토피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다. 그곳은 광명이 찬란한 세계란다. 어떤 어려움이나 괴로움이나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세계라고 한다. 이름하야 ‘부처님 나라’라 한다. 또는 ‘하나님 나라’라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세계를 달려갈 길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는 곳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곳이 바로 지구다.

그러나 이곳 지구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세상에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다 있지만 그래도 지구는 고통스런 땅이니 죽은 후에는 천당 가라 하고, 극락 가라 한다. 어떻게 해야 천당 극락에 갈 수 있을까. 11조를 내고 탑을 세우고 불상을 모시면 가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천당 극락 거기에는 주소도 없다. 찾아갈 길도 막막하다.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천당 극락가길 원하면 어떤 비난에도 흔들리지 말며, 어떤 칭찬에도 기뻐 흔들리지 말라.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실패에도 흔들리지 말 것이며, 주눅 들지도 말라. 꾐에도 넘어가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진흙 늪에 활짝 핀 무수한 연꽃이 되자. 오고 가는 사람들에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작은 은하세계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가벼운 생활이 필요할 때입니다

뗏목의 비유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살이 빠르고 깊은 강을 건너기 위해 풀과 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들어서 깊은 강을 건너 안전하게 다른 언덕으로 갔다. 그러고서는 강을 건네 준 뗏목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서 뗏목을 어깨에 메거나 머리에 이고 간다면 과연 이롭겠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뗏목을 다음 사람을 위해 물에 두거나 혹은 강가 언덕에 두고 간다면 이롭겠느냐?”

“이로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긴 세월동안 뗏목의 비유법으로 설명하여 좋은 것에 집착 하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쁜 것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야 말로 말 할 필요가 없다.”

<중아함 사유경>

-우리의 삶도 지울 것 지우고 버릴 것 버리는 ‘포맷’이 필요합니다. 생활이나 생각의 습관까지도 초기화가 필요합니다.-

도봉산 우이암 원통사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자연 환경에 따라 서울이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맑은 날은 시내가 한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야경에서부터 안개나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아침이나 저녁때는 구름 가운데 섬처럼 보인다하여 ‘무중부도(霧中浮島)’ 또한 하나의 돛단배가 망망대해에 떠가는 모습으로 보인다하여 ‘편주괘범(片舟 掛帆, 뗏목)’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옛 선배스님들께서는 자연환경이 주는 아름다움을 경전의 가르침으로 되새기고 산사의 경치를 음미하며 행복의 위안으로 느끼면서 부처님 말씀으로 수행 정진을 장엄하신 것 같습니다. 깨달음의 세계인 무중부도에 반야바라밀의 편주괘범(뗏목)을 타고 가는 모습이 우리의 수행 모습 같아 <금강경> ‘지아설법 여벌유자(知我說法 如筏喩者)’의 수행의 가르침을 떠올려 봅니다.

경전은 언어의 묶음인 진리가 담긴 그릇으로 비유되고, 신앙과 수행은 고뇌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뗏목)라 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으며 병을 진단하여 처방하는 약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달을 보면 손가락이 필요 없고 병이 나으면 약이 필요 없으며 강을 건너면 뗏목이 필요 없듯이 부처님의 진리에도 빠지지 말고 진리가 없다는데도 빠지지 말라하신 참 자유 대 해탈의 선언이십니다. 오직 열반락인 기쁨과 즐거움, 행복은 스스로 느끼면서 맛보는 겁니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 처방전을 수 백 번 읽는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의학 서적을 천만번 읽는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처방전에 따라 약을 먹어야 하고 그 서적에 따라 치료해야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수행은 종교적 이상을 종교 체험 속에 실현하기위한 그 행동체계를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절, 염불, 참선 등으로 마음을 닦는다고 합니다.

삶에 지친 어느 유명한 학자가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시골 노스님을 찾아 왔습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노스님의 감로수 같은 수행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은 아무 말 없이 차만 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학자 앞에 있는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득 찬 찻잔에 계속해서 차를 따랐습니다. 철철 넘치는 찻잔을 바라보다가 학자는 말 하였습니다. “스님 차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만 따르시지요.” 노스님은 그때야 말문을 열었습니다. “이 찻잔과 같이 그대 마음에 분별의 생각과 앎의 고집이 가득 채워져 있거늘 어떻게 불법이 무엇인지를 일러 줄 수가 있겠소? 먼저 그대 자신의 잔과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않는다면 말이요.”

이제 여러분의 뗏목은 무엇입니까? 혹시 뗏목을 물가나 언덕에 놓으셨는지요? 아니면 어느 학자처럼 끙끙 지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의 삶도 지울 것 지우고 버릴 것 버리는 포맷이 필요합니다. 생활이나 생각의 습관까지도 초기화가 필요합니다. 과한 짐은 내려놓고 버릴 것은 버리는 가벼운 생활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인으로 살아가기

수행자는 탐심 없어야 공경받는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많은 비구들이 코살라의 산기슭 숲 속에 있었다. 그런데 비구들은 마음이 들떠있고, 자만심으로 가득하고, 허영심으로 들떠있고, 시끄럽고, 거친 말을 하고, 조심성이 없고, 지혜가 없고, 집중하지 못하고, 침착하지 못하고,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못했다.

그때 보름날의 포살에 하늘 사람 잔뚜(실제의 존재가 아니라 비구들을 경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등장시켜 꾸짖는다)가 비구들에게 다가와서 게송으로 말했다.

“예전에 붓다의 훌륭한 제자들은 행복하게 살았네. 바라는 마음 없이 음식을 구하고, 바라는 마음 없이 거처를 구하고, 세상의 무상함을 알아 괴로움의 소멸을 이뤘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마을의 촌장처럼,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고, 먹고 또 먹고 드러눕고, 다른 이의 집에 있는 것을 탐내네. 나는 승가에 공손히 합장하고, 여기 있는 일부의 사람에게 말하네. 이들은 돌보는 이 없이 버림받고, 죽은 시체처럼 버려진다네. 나는 게으른 이에게는 충고하지만, 부지런한 이에게는 공손히 예경 드리네.” <쌍윳다 니까야>

이 장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존경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수행자가 탐내는 마음이 없으면 공경을 받지만, 세상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집착하고 탐욕 부리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시체처럼 버려질 거라 했다.

인간의 성취동기는 여러가지로 자극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은 ‘칭찬’이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가 그중 하나인데,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하며, 교사 기대효과, 실험자효과라고도 한다.

조각가였던 피그말리온이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는 스스로 사랑에 빠져들자,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인상에게 생명을 주고는 함께 살게 해준 것에서 유래한다.

흥미롭게도 심리학자인 미국의 에드워드 L.데시가 여기에 의문을 갖고 25년에 걸친 심리학 실험을 통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잘 다룰 수 있는지’를 연구하여 ‘자기 결정성 이론’을 내놓았다. 누구에게나 칭찬을 하면 점점 칭찬 받는 쪽으로만 움직이는 함정이 있었다. 따라서 자율과 책임에 중점을 둔 행동관리가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때 동기부여가 잘 되고, 최고로 몰입하며, 성취감이 크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마음의 작동법’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자율성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능력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이 절대적인 자유의지가 ‘몰입(flow)’의 효과를 낳는다.

평범한 존재의 순간보다 더 높은 차원이 이때 열린다. 세상에 완성이나 끝은 없다. 어느 단계에 올라선 순간 이미 다른 차원이 보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지금까지 알았던 것 이상의 무엇이 항상 펼쳐지는 것이다. “억지로 웃는 웃음은 즐겁지 않고, 억지로 우는 울음은 슬프지 않다”고 했다. 승단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자유의지를 신뢰하는 종교의 교단이기 때문이다.

신묘년 9월 다라니기도 법문

‘生死의 강’ 건너는 세 가지 요소

주인으로 살아가기

생사의 강을 건너는 데는 큰 신심과 큰 분심과 큰 의심의 배가 필요하다. 하안거 해제가 지나고 전국 선원의 눈 푸른 납자들은 결제동안 문을 닫아걸고 안심입명을 얻고자 오로지 화두와 씨름하고 생과 사의 문제를 바로 알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거룩하기 까지 하다. 몸을 조복 받고 마음을 조복 받고 호흡을 조복 받고 큰 신심과 큰 의심 그리고 큰 분심은 생사를 건너 안심을 얻는 기본이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마치 영양결핍처럼 어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전하여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솥단지에는 세 발이 붙어 있다. 세 발은 균형을 이루는 최상의 조화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선요>에서는 “온 종일 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출 수 있다면 반드시 하루가 다하기 전에 공을 이루는 것이 독 속에 있는 자라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이 마침내 못 쓰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요 신행의 기본이다. 초발심 때의 순수와 불타는 신심과 열정이 항상 하다면 어찌 도를 이루지 못할까 신심이 없으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신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고 <화엄경>에 말씀하셨다.

고봉화상의 <선요>에도 화두 공부인은 대신심이 있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만약 진실로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첫 번째가 크게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하니, 이 일은 수미산을 의지한 것과 같이 흔들림이 없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어떤 이들은 기복을 비판하고 작복을 이야기 하지만 작복은 교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불교의 모습이요 기복은 범부의 모습에서 바라보는 불교의 모습이다. 기복으로 불교에 들어와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작복의 경지에 들어간다면 그만큼 공부가 잘된 사람이고 수십 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 하면서도 기복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을 두고 헛공부라 하지 않을까?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큰 분심이 필요하다. 비단 참선뿐이겠는가. 학문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무엇을 하던 간에 성취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큰 분심을 낸다는 것이다. 반드시 뚫고 고시에 합격도 하고 출세도 하고 사업을 성공하기도 하는 원동력은 큰 분심이다.

분심이 없이는 출가인이나 재가인이나 참으로 할 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분심이 큰 만큼 크게 이룬다. 깨달음도 큰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다. 염불인이 큰 분심을 내서 염불한다면 구품연화대 중에서 상품상생하지 않는가?

<선요>에서는 “크게 분한 생각이 있어야하니, 마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그 원수를 당장 한칼에 두 동강을 내려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생사의 강을 건너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큰 의심이 있어야 한다. 큰 의심은 큰 깨달음으로 이르게 한다. 몸이 병들면 약을 먹는다. 부처님 설법도 중생의 병에 따라 설법하신 도리는 중생의 병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모 국회의원이 “팔만대장경이 다 필요합니까” 묻길래 “중생의 마음병이 각각이니 필요합니다.” 했던 기억이 난다. 간화선에서는 화두가 있으니 병든 중생을 고치는 명약 중에 명약이다. 이것만 잘하면 여기에 중생의 생사병을 고치고 미혹에서 벗어나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양약이니 잘 받아먹고 고치는 길이 최상의 선택이다.

얼마 전에 세탁기가 고장나서 무조건 서비스센터에 연락해서 고쳐달라고 할까 하다 한번 고쳐 보자 마음먹고 나니 매뉴얼이 생각났다. 매뉴얼대로 정비를 했더니 잘 돌아가지 않는가.

모든 것에는 매뉴얼이 있고 매뉴얼대로 하면 고쳐진다. 수행이나 마음공부도 마찬가지다. 스승을 만나 지도를 받고 가르침대로 공부하면 대오를 이룰 것이다.

“지혜로 가르침의 뜻을 새겨라”

지식 통한 비판·반박은 분열과 혼란만 초래해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여기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배운다. 그러나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새기지 않는다. 지혜로 그 뜻을 새기지 않기 때문에 가르침이 선명하지 않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배우기 때문에 가르침의 배움에서 결실을 얻지 못한다. 여기 어떤 훌륭한 사람들이 가르침을 배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배우고 나서 지혜로 그 뜻을 새긴다.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때문에 가르침이 선명하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가르침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가르침의 배움에서 결실을 얻는다. 바르게 배운 가르침들은 그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행복과 이익을 준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바르게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그것을 마음속에 잘 새기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에게 질문하든지 또는 지혜로운 비구들에게 물어야 한다.”

(중부경전.22 알갓두빠마)

불교의 공부는 잘 듣고(聞) 그리고 들은 내용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思) 실천 수행하는(修) 공부법이라 말합니다. 훌륭하게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잘 듣고, 듣는 내용에 대하여 잘 궁리하는 것이 가르침에 대하여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배움에 대한 결실을 얻는 것은, 선명한 이해를 통한 지혜로 모든 이의 행복과 안락의 이익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또한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때문에 배움이 선명하다고 하였습니다.

불교의 신행단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믿고(信) 자신이 믿고 있는 가르침은 어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고(解) 그리고 믿고 이해한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 삶의 형태로 실천하며(行) 부처님께서 이미 체험하셨던 것을 증득한다(證)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종교입니다. 절대적 신에 대한 믿음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실천 수행을 통한 스스로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모든 존재물들의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배움은 그 가르침을 지혜로 새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교리를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해 배우는 것이며, 훌륭한 사람들의 배움은, 지혜로 그 뜻을 새겨 오랜 세월동안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안락 그리고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하여 배움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리석은 배움과 훌륭한 배움의 차이가 될 것입니다. 송나라 설송선사는 “배우는 사람은, 도(道)와 덕(德)이 자신에게 가득하지 못함을 걱정해야지, 세력과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존귀하기로는 도(道)보다 존귀한 게 없고 아름답기로는 덕(德)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와 덕이 있는 곳에는 비록 범부라 해도 막히지 않으며(心通) 도와 덕이 없는 곳에는 천하의 왕(王)이라 할지라도 통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가르침에 따른 배움의 결실은 도와 덕을 갖추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곧 배움은 도와 덕을 가꾸어 스스로 아름다움과 행복을 모든 이에게 회향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도는 마음이 통하는 것이며 나와 너 자연과 우리 모두가 인연생기의 연기를 깨닫는 것이며 덕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아 행복의 문을 여는 해탈의 참 자유세계인 것입니다. 지금은 배움과 지식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지혜로 그 뜻을 새기기 보다는 지식의 앎을 통한 비판과 반박으로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여 배움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배움뿐인 것 같습니다. 진정 배움의 결실이 지위와 세력에 관계없는 자신의 행복과 모든 이의 안녕을 위한 도와 덕을 갖추어 지혜의 안목을 얻는 공부의 자세가 필요할 때입니다. 불교의 공부법이 절실히 필요할 때 입니다.

교양대학 입학식 법문

나는 ‘십악’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十惡懺悔(십악참회)

殺生重罪今日懺悔(살생중죄금일참회) 偸盜重罪今日懺悔(투도중죄금일참회)

邪淫衆罪今日懺悔(사음중죄금일참회) 妄語衆罪今日懺悔(망어중죄금일참회)

綺語衆罪今日懺悔(기어중죄금일참회) 兩舌衆罪今日懺悔(양설중죄금일참회)

惡口衆罪今日懺悔(악구중죄금일참회) 貪愛衆罪今日懺悔(탐애중죄금일참회)

瞋碍衆罪今日懺悔(진애중죄금일참회) 癡暗衆罪今日懺悔(치암중죄금일참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은 잘못이지만, 일부는 알고도 잘못을 행하기도 한다.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잘못을 하지 않고 살기란 어렵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문제는 잘못을 한 후에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뉘우치지 않고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른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자세이다. 불교에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참회(懺悔)’라고 한다.

참회에서 참(懺)과 회(悔)는 산스크리트어 크샤마(ks.ama)와 관련이 있다. 즉 참은 크샤마를 음역한 것이고, 회는 크샤마를 의역한 것이다. 참은 ‘용서를 청하는 것’이며, 회는 ‘뉘우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다른 이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왕사성 지바카 동산에 머무실 때 “세상을 살아가면서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잘못을 스스로 참회하고 고치면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上人)이다. 바로 지금이 참회할 때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한바 있다. 부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은 잘못 자체보다는 잘못을 ‘바로 지금’ 스스로 참회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는 것이다.

불자들이 가장 자주 독송하는 경전 가운데 하나가 <천수경(千手經)>이다. 조석예불과 사시불공은 물론 각종 법회, 재, 기도 등을 지낼 때 봉독한다. 이 경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이 바로 ‘십악참회(十惡懺悔)’이다.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과오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되풀이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십악참회에는 인간이 살면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짓는 열 가지 업과, 이를 참회하겠다는 원력이 담겨 있다.

십악을 삼업으로 구분하면 △몸으로 지은 죄(살생.투도.사음) △입으로 지은 죄(망어.기어.양설.악구) △마음으로 지은 죄(탐애.진애.치암)이다. 우리가 살면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짓게 되는 구체적인 잘못을 표현하고 있다. 출가 후 지금도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십악참회’ 구절에 이르면 정신이 번쩍 든다.

과연 나는 출가사문으로서 ‘십악’을 저지르고 있지는 아닌지, 그리고 과연 ‘참회’를 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단순히 독송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다시 업을 짓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신구의 삼업을 바르게 하여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고, 혹여 잘못을 저지르면 참회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마음을 다진다. 십악참회뿐 아니라 천수경을 비롯한 경전을 잘 독송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수지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몸과 말과 뜻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는 이 시대에 진정한 참회와 선행(善行)을 실천하는 정진으로 참회 이전에 업을 짓지 않아야 할 것이다.

출가 초기 은사스님께선 “업(業)은 습(習)이 되니, 늘 참회하는 마음으로 수행 정진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살겠다는 원력으로 발심(發心)한 만큼 늘 수행의 마음과 자세를 잃지 말라면서 ‘참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당부였다. 오늘도 마음에 깊이 새긴다.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불살생이 자비요, 지혜”

모든 법은 목숨으로 근본을 삼고/사람은 다 제 목숨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살생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목숨을 주는 것이요,/ 목숨을 주는 것은/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 <정법념처경> 中

요즘 뉴스를 보면 온통 죽음의 소식들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고 기차가 추락하고 다리가 끊어지고 테러가 발생하는 등 한번 터지면 100여명의 목숨은 한순간에 날아간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집중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20대 젊은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희생됐고, 또 지난해에는 연평도와 천안함 사건 등으로 젊은 군장병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예고 없는 죽음이 도처에 깔리다보니, 사람 목숨이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다. 무슨무슨 사고로 서너 명이 죽었다는 뉴스는 이제 뉴스 축에도 못 들 지경이 된 것이다.

내 주변을 돌아보면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난데없이 죽어 사라진다면 어떠하겠는가. 모두 다 남의 일이려니, 하면서 어이없는 떼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요상한 세상이 된 것이다.

자살문제도 심각하다. 과거에는 정말이지 죽음 외에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어리석게도 자살의 길을 선택했지만, 요즘엔 다르다. 얼마 전 20대 젊은이들이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인연을 맺어 몇 날 몇 시에 만나 함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죽음을 선택할 이유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기껏해야 돈 문제, 이성친구 문제, 학업 문제 아니겠는가. 그런 문제들은 인생살이 속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번뇌망상임을 채 깨우치기도 전에, 그저 힘들다고 못살겠다고 죽음을 선택하다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낙태문제도 심각한 사회문제다. 유교주의적 영향 때문인지, 부적절한 상황에 놓여 임신한 경우, 낙태를 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임신이 될 경우, 십중팔구는 주변사람 입에서 ‘아이를 지워야 한다’는 말이 금방 새어나오는 형국이다.

그러니 실제 상황 속에서는 어떠하겠는가. 물론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 낙태가 법적으로 금기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의별 방법을 동원하여 낙태를 자행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는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면서 “불살생은 자비요, 지혜”라고 강조한다. ‘생사에 헤맬 때에는 오직 살생하지 않는 것이 귀의할 곳이 되고, 생사의 어두움 속에 들어가서는 살생하지 않는 것이 등불이 된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바로 자비이다. 바른 생각으로 살생하지 않는 선을 생각하면 그 마음에는 항상 기쁨이 생긴다.’

여기서 살생은 자살도 해당되는 의미로 해석된다. <정법념처경>은 “만일 남의 살생을 말릴 때, 남이 그것을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생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살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구절도 눈에 띈다. ‘어떤 사람을 따르든 그와 같이 살생하지 않으면 그는 곧 열반에 가까워진다. 그는 항상 좋은 벗과 함께 다닌다. 그는 좋은 그릇의 중생으로서 자기와 남의 복덕을 잘 거두어 가진다. 그는 이 세상의 복밭으로서 지옥과 아귀, 축생의 세계에 가지 않는다.’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지혜요, 자비요, 보시임을 백중을 기해 다시 한 번 되새겨볼 일이다.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나’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이여

함부로 난잡하게 걷지 말지어다.

오늘 그대가 걸어가는 이 발자국은

훗날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 서산 휴정스님

옛날 수많은 스님들께서는 부처님 성지인 천축국(인도)을 찾아 목숨을 건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혜초스님도 그렇게 하여 <왕오천축국전>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겼고, 어떤 스님은 천축까지 가서 나란다 대학에 입학해 수학을 했지만, 이미 나이가 들어 돌아오지 못한 채 하염없이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짓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천축을 가보지도 못한 채 어느 사막위에 해골로 남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언젠가 광고에도 등장한 서산스님의 이 게송을 떠올리게 됩니다. 부처님을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는 이’라는 뜻으로 도사(導師)라고 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 줄 뿐 그곳에 이르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 위에 서 있으며, 어느 길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근대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魯迅)은 ‘고향’이란 소설에서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길 위에서 태어나시어 팔십 평생을 그 길 위에서 함께 하시다가, 마침내 그 길 위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께서 위법망구하고 가시던 그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또 갈 따름입니다.

출가 전 대학시절에 가끔 긁적인 글을 모아 작은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석천세설>이란 제목 아래에 부제를 달고 미당 서정주 님의 싯구에서 따온 ‘글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어느 곳에도 없었다’는 글을 써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통도사 지형스님께 한권 드렸더니, 한 장도 넘겨보지 않은 채 “왜 길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길은 어느 곳에도 없다고 했습니까?” 물으셨습니다. 아무 말도 못한 채 쩔쩔매다가 거꾸로 물었더니 “당신이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출가를 결심하고 스승이신 호진스님께 출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번의 만남과 길에 대한 교훈으로 인해 마침내 덕숭산으로 출가를 하였으니, 길은 언제나 내게 희망이고, 화두이자 깨달음이 아니었나 합니다.

임제의현 선사께서는 “도를 배우는 이여, 부디 길과 원수 맺지 말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선채 어느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지, 어느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길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조고각하 한 채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르고 여법한 길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가야할 길만을 고고(孤高)하게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도전하며, 나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책상위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은, 누군가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이어라!”

“평소 변함없는 마음을 유지하라”

일부러 꾸미지 않고 단견과 상견 버리며 평이한 표현이면서도 음미할수록 깊은 진리 담겨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스님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더러움에 물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바로 더러움에 물든다고 하는 것이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평소의 이 마음이 바로 도이다. 평소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단견과 상견을 버리며 평범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경에 이런 말이 있다. 범부처럼 행하지도 않고 성인 현자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마조스님의 법문이다. 평소 변함없는 마음을 유지하라는 의미이겠다. 참으로 평이한 표현이면서도 음미할수록 깊은 진리의 내용이다. 어찌 일상에 평상심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그간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세월만큼 대중 생활을 하고 포교현장에 나온 지 6개월이 지났다.

다행히 도심에 자리했으면서도 산중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량이기에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60년이 넘는 사찰의 역사에 걸맞게 신도들 또한 기본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부임한지 한 달 남짓 지나 <법화경>과 초심반 강의를 시작해서 예상보다 호응이 좋아 조짐이 좋았다. 약간은 고무된 느낌이다. 그에 반해 근간에 결정해야 할 일이 있어 며칠 밤을 지새며 고민했다. 때맞춰 어느 사찰의 대웅전 상량문 글씨 청탁과 함께 신도들 법명(法名)을 일일이 붓으로 적어야 할 일이 있어 거의 동시에 날밤을 샜다. 이런 경우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된 상태에서 사물이나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로 평정심(平靜心)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

2005년 백양사 강원에 강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바로 앞에 30여년 가까이 강주로 계시던 스님께서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학인 스님들을 제접한 훈기가 있어 3년여 강원에 별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엔 간간이 판단해야할 일이 생겼다.

몇 번 그러한 일을 겪는 순간, ‘아차!’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진력이 미치지 못해 생긴 일이라는 것을. 해서 4년을 채우지 못한 일이 있다.

일찍이 포교 현장을 경험한 스님들로부터 듣는 말이 있다. “1년을 잘 넘기면 이후엔 문제없다”고. 실감이 난다. 처음에 백일기도를 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에 임했다. 50여일이 조금 지나 몸에 별 이상이 없는데도 힘에 겨운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기도한 스님들의 경험에 의하면 그때가 고비란다. 무사히 넘겼다. 이젠 100일을 훌쩍 넘겨 기도가 일상이 되었다.

요즘 신도들과 웬만큼 익숙해져 간다. 이런저런 일들로 제접하다보니, 일부에서는 친소(親疎)의 모습으로까지 비춰지는가 보다. 조심스럽다. 그간의 일들이 미숙하고 자연스럽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간절한 기도와 정진으로 평정심이 아닌 평상심으로 극복될 일이 아니었나 싶다. 당나라 때 방(龐)거사의 게송처럼 일상 ‘물 긷고 땔감 줍는 일’에도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정진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