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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융 2011. 12. 3. 22:09

도(道)의 세 가지 핵심

링 린포체

먼저 이렇게 한국을 다시 방문하여 한국 불자님들을 만나게 된 점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방문한 목적은 무엇보다도 부처님 법을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제 쫑카파 대사의 저술 중의 하나인 「도(道)의 세 가지 핵심」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쫑카파 대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티베트에서 활약하신 분으로,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제에 들어가지 전에 이런 법문을 듣는 마음에 대해서 3가지 허물을 그릇에 비유한 말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엎어놓은 그릇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과 쌀을 담으려고 해도 엎어놓아져 있는 그릇에는 법을 담을 수 없습니다.

둘째는 구멍이 난 그릇입니다.

법을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아도 곧 구멍으로 새어나가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물입니다.

셋째는 더러운 때가 묻어있는 그릇입니다.

그 안에 우유나 쌀을 담는다면 그 음식은 곧 그릇과 함께 더러워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허물을 잘 생각하시고 법문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항상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법을 주시는 스승은 그 병을 치료하시려는 분이고, 그 약(藥)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생각을 항상 하여야 합니다.

「도의 세 가지 핵심」은 바로 공성(空性)과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출리심(出離心)입니다.

이것은 귀경게(歸敬偈)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첫 단계 청정한 출리심(번뇌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윤회 떠나는 것. 해탈. 깨달음. 이탈하여 있는 것. 생사를 반복하는 미혹의 세계를 떠나는 것.)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마치 손가락으로 갠지스강의 모래를 찍었을 때 나머지 강바닥의 모래에 대비하여 손가락에 올라가 있는 모래의 수만큼의 확률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렇게 원만한 기회와 조건을 가지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번 기회에 공덕을 쌓고 10선업을 쌓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일 것입니다. 마치 금이 사방에 깔린 어떤 나라에 간 사람이 금 조각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면 다른 사람들이 무척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생에 대한 집착(재물, 수명)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도 해가 되는 것으로 현세에 안주하지 말고 내세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출리심을 내어야 해탈을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번째인 보리심(보리-bodhi 智. 覺. 깨달음. 지혜 작용에 의해 무명이 없어진 상태. 번뇌 끊고 얻은 열반. 깨달음을 구해 불도를 행하려는 마음.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 깨달음을 얻고 싶다고 원하는 마음. 대승불교-자신보다 타인 구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마음.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불도를 수행하고 모든 생류를 고통에서 구제하려고 서원하는 마음)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것은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는 자비심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월칭(다르마끼르띠)논사께서 하신 말씀 중에 밭에서 농사를 지을 때도 그 종자와 영양분, 결과가 모두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윤회의 모습이라는 것은 손발이 묶이고 쇠 그물에 걸린 채 바다에 빠져 가끔씩 파도가 출렁일 때만 숨을 헐떡이는 그런 모습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우리 가족, 특히 어머니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빨리 그것을 풀어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일체중생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생사윤회 속에서 한 때는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일체 중생에 대해서도 그런 자비심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쇠 그물은 바로 아집(我執)을 뜻하는 것인데, 세 번째로 이 아집을 없애고 공성을 체득하는 것이 부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공의 지혜는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명확한 인식과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것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의 금융위기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때도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듯이 「연기가 곧,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집을 끊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공(無自性, 無所得, 無執着)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성(自性 因緣生起, 因緣和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간단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두 가지 부분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집이라는 그물에 다시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수보살의 화신이신 제 쫑카파 대사로부터 제 1대 달라이라마를 거쳐 현 14대 달라이라마에게 전수되었고 저는 달라이라마 성하로부터 이 가르침을 듣고 이제 여러분들에게도 전달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법의 전수로써 이 법회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하고, 가능한 한 계속 떠올리고 마음을 정화하며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 전에 향을 올리고 기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수승함과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에 옮길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스님들만 공부하는 게 아니고 재가자들도 배우고 익히고 선한공덕을 짓고 나쁜 업을 소멸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늙은 여인네가 부처님께 출가하고 싶다고 하였으나, 그 노인의 공덕을 보아하니 출가까지는 아니고 계를 받을 수 있는 공덕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공덕이 그 노인이 전생에 벌레였을 때 어떤 탑 주위에 파놓은 도랑에 떨어진 나뭇잎 위의 소똥에 있었는데, 바람에 이끌려 그 탑을 한번 돈 공덕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부처님의 본생담(本生談)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여러분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현재 우리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티베트를 위한 마음을 내고 기도가 전달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법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국 하북성에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 아들을 둔 부모가 있었다. 부모의 걱정은 비가 오면 작은 아들 장사가 안 되고, 날이 좋으면 큰 아들 장사가 안 된다. 이에 겸호스님이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다. 비가 오면 큰 아들이 좋고, 날이 좋으면 작은 아들이 좋다고 생각해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라.

破車不行 老人不修

知足常樂 能忍自安 -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고, 능히 참으면 저절로 편안해 진다.

미국 식물학자 버뱅크-화초와 대화를 즐겼다. 만물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고 생각하여 식물에게 생각과 감정이 전파된다.(가시 없는 선인장 만들기 위해 시험-“너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러니 방어를 위한 가시도 필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주면 되잖니?” 그랬더니 가시 없는 변종으로 나타남(설화). 깊이 깨달아 일상생활 속에서 자재하게 쓸 수 있는 길을 이웃에게 제시 할 수 있기를 기원 합니다.)

천수천안(아름다운 동행)

옛날에 한 선비가 꿈속에서 천신을 만났다. 가난에 포원이 졌던 선비는 천신을 붙들고 제발 잘 살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천신은 수많은 크고 작은 복주머니들이 달린 곳간으로 선비를 데려갔다. 그리고 선비 자신의 주머니를 찾아보도록 했다. 한참 만에 선비는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 주머니에 자기 명패가 달린 것을 보았다. 그가 낙망한 채 돌아서자 천신은 다른 사람의 복주머니를 빌려주었다. 깨어나 보니 벌써 부자가 되어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복주머니의 진짜 주인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자 그는 다시 가난뱅이가 되었다. 선비는 또 다시 천신에게 애원했다. “이 사람아, 그러게 부자가 됐을 때 남을 부지런히 도와 복주머니를 한껏 키울 일 아닌가” 큰 복주머니의 비법이 바로 선행에 있었다니!

세계적 액션스타(청룽(청룽)이 4000억 원대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청룽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것처럼 죽을 때 역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천신의 곳간대로라면 청룽이나 이미 재산의 80% 이상을 기부한 워런 버핏 회장, 수백억 달러의 자산을 기부 하겠다고 나선 빌 게이츠 회장 등은 모두가 엄청나게 큰 복주머니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도 578억원의 재산을 KAIST에 기부한 한의학 박사 류근철씨가 있다. 이들 거액 기부자들은 하나같이 평소 검약한 생활을 즐기며, 유산상속대신에 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큰 원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교계 최초의 기부 재단이면서 공동모금 기관인 ‘아름다운 동행’이 벌여온 ‘네모의 꿈 만들기’가 첫 결실을 맺었다는 소식이다. 보시행 중에는 습선시(習先施)라는 것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비심이 훈습되어 있을 때 자신의 욕구를 줄이고 남에게 베푸는 선행이 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어린 불자들에 의한 ‘네모의 꿈 만들기’는 기부문화 확산이란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이와 함께 뜻있는 어른들에 의한 큰 베풂의 아름다운 동행이 줄 잇기를 기대한다.

인연을 귀하게 여겨라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맑고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치고 흔들리다가 거기에서 바람기운이 생기고 마찰력에 의해서 불기운이 생겼으며 불에 탄 것은 물이 되었고 굳은 것은 흙이 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엄경(華嚴經)》에서는 「흙은 물의 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물은 불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불은 바람기운이 함께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바람은 흙의 기운이 함께하지 않으면 존재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사대육신은 따로따로 나누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흙에는 물기운과 불기운, 바람기운이 함께하고, 바람에는 물기운과 불기운, 흙기운이 함께 할 때라야 만이 온전한 지수화풍으로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노병사(老病死)도 결국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물기운이 흩어지고 있는 모습이도, 병들었다는 것은 불기운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며,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바람기운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항상 바뀌어간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그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기다림도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마음은 바람과 같고 머무르지 않는 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무상)

그래서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우리 중생의 마음은 바람과 같다. 멀리 떠남으로 잡을 수 없으며 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머무르는 일 없이 일어났다가는 곧 사라져버리는, 그러나 파도와 물이 다르지 않듯 물과 거품이 다르지 않듯 우리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체험이 없으면, 마치 눈먼 장님이 등불을 들어서 남을 밝혀주지만, 자기 스스로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실천의 중요성)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나치게 인색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국 욕심이 많거나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에게 등지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가운데 ‘원망하지 말라’ 고 한 것 또한 이러한 이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나니, 내가 쉬어야 원망은 사라진다.」는 법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윤회(輪廻)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고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이가 장애가 없는 것처럼, 지혜가 없으면 복을 짓지 못하는 것처럼,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장애가 생기고 곤란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상계에서는 오해와 혼돈의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요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 浮雲滅)이며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 本無實)이요 생사거래 역여연(生死去來 亦如然)」이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생이라는 것은 한쪽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한쪽 구름이 바람결에 흩어지는 것과 같음이요, 구름이라는 것은 실다움이 없는 것처럼 우리들의 이 육신을 근간으로 해서 생각하고 있는 나도 또한 오고감이 그와 같은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되면 나라는 실체도 기실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에 따라서 오고가고 할 뿐, 본래 청정무구한 내 본체는 오고감이 없이 다만 모양이 다르게 보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업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수행정진이 필요하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간간히 사진을 찍어 놓았을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찍어놓은 사진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그 사진 중에 어떤 것이 참 나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살 때, 어떤 모습일 때가 나를 나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내 모습을 은사스님이 걱정했을 정도로 좋아 했는데, 지금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아 아이들만 보면 예뻐 보이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절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내가 아이를 예뻐해 주면 ‘할아버지 스님께 합장인사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할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면 ‘내가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었는가?’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기면서도 문득, 모르고 있는 사이에 나도 지구 돌아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늙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 말씀은 통도사(通度寺)창건주이신 자장율사(慈裝律師)의 법문이기도 합니다. 자장율사께서 통도사에서 수행하고 계실 당시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율사의 인품을 흠모하여 왕실에서 조정 일을 맡아줄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율사께서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한사코 거절을 하자 선덕여왕은 마지막으로 다시 사신을 보내면서 ‘시원찮게 답변을 하면 알아서 처리해라’고 하면서 장수를 함께 딸려 보냈습니다. 그때 율사께서 하신 말씀이 ‘하루를 살지라도 출가자답게 살다가 가지, 출가자 모습을 잃어버리고 100년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덕여왕이 크게 깨닫고 손수 가사를 지어 말을 타고 통도사를 찾아와 율사께 직접 지은 가사를 바쳤습니다. 그 가사가 현재까지도 보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자장율사 친착가사입니다.

자장율사의 이 가르침은 그림자만 좇는 허상 속에서 머물러있지 말고, 나답게 모두가 이해되고 납득 할 수 있는 나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라는 법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이 몸이 물거품 같고, 불꽃같고, 파초줄기 같고, 꿈같고, 산울림 같고, 뜬구름 같고, 번갯불 같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우리 몸은 무상하기 때문에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거나,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줄 알다가 상처받지 말고, 살아있을 때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따라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은 늘 이 마음자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 그 자체는 결국 삶의 현상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가 결국 내일도 오늘이 되었을 때 열심히 살 것이고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이는 이미 어제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힘들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괴로움이라는 고통, 슬픔이라고 하는 아픔, 이런 것들을 말을 바꿔서 말하면 혼란과 착각을 가져오는 두 축이라는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는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 신경질을 잘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듯이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사물을 정상적으로 비춰보지 못하기 때문에 착각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야하겠습니까? 수행(修行)과 정진(精進)을 통해서 치유해야만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생활 속에서 우리들이 보고 느껴야 할 것은 그 무엇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삶의 현상에서 드러나는 덕목입니다. 그것은 수행과 정진을 통해 나타나는 지혜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은 기본입니다. 서서 밥을 먹는 것 보다, 돌아다니면서 밥 먹는 것보다,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이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앉아 있으면 밥이 저절로 먹어집니까? 거기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배가 불러집니까? 거기에 앉으면 밥 먹기가 편리할 뿐입니다. 즉, 행위는 내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선수행도 마찬가지이고, 염불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져있는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가 내 스스로 했을 때, 그 자리가 진정한 수행이고 진정한 정진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나를 스스로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다보면, 함께 살아가는 이들도 이에 동화되어 변화되게 마련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나를 사랑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나만 좋아해서는 안 되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엄격한 사람이, 나에게 자애로운 사람이 모든 일에도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계속 이어져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인생은 단 한번 뿐입니다. 그러할 진대, 세상을 살면서 하심 못할 일이 뭐있고, 겸손하게 살지 못할 일이 뭐 있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살지 못할 일이 뭐 있습니까? 진정으로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왜 진심으로 그런 것을 요청할 수 없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기도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인데, 하물며 부모형제 처자권속으로 맺어진 숱한 인연들 속에서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어 주었고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그늘이 되어 주었던 분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직간접적으로 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을 주었던 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각자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나는 다른 중생들의 생명(수고로움)과 봉사로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러한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항상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들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그러한 자양분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고 윤활유가 되어주고 비타민이 되어줄 수 있는 삶, 그러한 삶이 보살의 바라밀을 행하는 생활불교입니다.

신묘년 음력 8월 초하루법문

송광사 유나 현묵스님이 들려주는 수행이야기

“참 웰빙은 마음의 평화”

“진정한 웰빙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수행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동안거 해제를 하루 앞둔 지난 20일 조계총림 송광사 유나 현묵스님은 세간에 들려주고픈 당부를 시종 담담하고 쉬운 언어로 전달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법구경〉의 한 구절을 들려주면서 “이 게송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기본이 된다”고 전했다. 스님에 따르면, 사바세계에는 두 가지 소리가 있다. 칭찬과 비난이 그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두 소리에 모두 초연해야 한다. 두 번째 구절은 사람과 물질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말라는 말이다. 인연은 가고 오는 것, 자신과 인연이 아니면 상관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텅 비우는 것으로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연꽃은 선(禪)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본성을 잃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면서 참나를 찾아 정진해야 합니다. 마지막 구절의 무소는 코뿔소를 말합니다. 무소는 사자와 코끼리도 피해간다고 합니다. 혼자서 가라는 것은 집중된 마음으로 일념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당혹스런 일도 일념으로 살면 좋은 시절이 온다는 것이 진정한 뜻입니다.” 현묵스님은 시끄러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는 이 게송에 모두 담겨 있다고 전했다. “팔만대장경을 함축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귀감이 될 것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현대사회에서 수행은 필요한 것일까. 현묵스님은 이에 대한 해답도 내놓았다. “수행을 하면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는 축복이 4가지가 있다”고 말을 꺼낸 스님은 차례대로 짚어갔다.

4가지 중 첫째는 용모가 밝아지고 아름다워진다. 둘째는 힘이 생기고 용기가 솟는다. 셋째는 건강이 좋아지고 장수한다. 마지막은 안정의 힘을 얻고 지혜와 덕을 갖춘다는 것이다.

“수행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내면이 안정됩니다. 그러면 마음의 그림자인 몸뚱이에도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 불평 불만을 자기 탓으로 돌려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숭례문 방화범도 불평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이 수행을 했다면 자기의 부덕함으로 치부해 남에게 하나라도 더 베풀게 될 것입니다.”

4가지 축복을 받는데도 수행을 하지 않을 것인가, 스님은 되물었다. “지혜는 판단력입니다. 잔잔한 물이 모든 것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수행은 반드시 필요합니다.”(海印三昧)

현묵스님은 지난 1971년 구산스님을 은사로 송광사에서 출가해, 1972년과 76년 구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지난 1976년 수선안거 이래 수십 하안거를 성만했다. 9년전부터는 송광사 유나 소임을 맡고 있다.

“많은 분들이 요즘에는 깨달음을 얻는 스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난존자도 부처님 해탈 이후 득도했듯이, 이 깨달음은 시절 인연과 관계있습니다. 쌓이고 쌓이면 움트듯이 자신의 자성을 보는 것은 구름 뒤의 해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나타 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른 봄 매화꽃이 피는 걸 보면 머지않아 산천의 꽃들이 필것을 알 수 있듯이 부처님께서 성도를 하셨다는 것은 우리 중생들도 곧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지혜 : 사물의 실상을 비추어 미혹을 밝혀 깨달음을 완성하는 작용. 사물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진리를 판별하는 인식, 예지.

法句經(dhammapada) : 진리의 말씀. 시집-기원전 4세기 경(불전 중 가장 오래된 것.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부처님을 응공(應供)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응공,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공양’이라는 말은 부처님께만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있다가 공양하실 거죠? 조금 있다가 공양을 하실 건데, 생각해보세요. 받아서 먹는 건 부처님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서 우리는 중생 노릇만 하고 있잖아요. 또 ‘보살님, 보살님’ 하죠? 대접은 보살님 대접을 받으면서 실제 행동은 옆집 동네 아줌마만도 못한 경우가 간혹 한 번씩 있죠?(供이바지할養기를-존경심을 갖고 봉사하고 섬기는 것. 웃어른을 모시어 음식 이바지 함. 불법승 삼보나 죽은 이의 영혼에게 음식, 꽃 등을 바치는 일 또는 그 음식.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번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공양을 올린다

보현행원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거듭 얘기 하지만 ‘내 옆에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다’라고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심을 가진다’라고 할 때도 신심의 기초는 ‘내가 부처’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의 말을 하고, 부처의 행을 하고, 그래서 그것이 완성된 세상을 불국토라고 얘기를 하고, 혹은 정토라고 하기도 합니다. 널리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수행을 닦으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으로 대하고 부처님께 하듯이 대접하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부처님에게 내가 부처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는 수행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고, 또 뭔가 맛있는 것을 사 드리고, 선물을 사 드리고 하는 이유가 뭔가요? 안 드려 봐서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께 우리가 왜 용돈도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 드리고, 좋은 옷도 사 드리고, 여행도 시켜 드리고, 왜 그러죠?

그 분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왔고 그 분으로 인해서 성장하고, 그 분으로 인해서 사람이 되고․ ․ ․ 그러니까 부모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님으로 인해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교육을 받고, 부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부처가 되고 ․ ․ ․. 그래서 그 감사의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하듯이, 중생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왜 올리는가 하면,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공양을 올린다’라고 하는 것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공양을 올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번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공양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내에서 과일 하나라도 사들고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 그 절은 아무 생각 없이 와서 하는 절하고 또 틀리죠? 들고 올 때 과일의 무게가 더하면 더할수록 가서 올리는 그 마음도 더 하고 ․ ․ ․ . 그래서 제가 “독성각에는 절에서 과일을 사서 올리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면, 스님이 독성각은 별로 안 좋아하시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법회날만 되면 절에서 더 많이 사서 막 쌓아두니까 보살님들이 와서 공양 올릴 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독성각에는 절에서 공양물을 사서 올리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떡 하나든, 과일 하나든, 무슨 사탕 하나든, 초쿄파이 하나든, 뭐든 공양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와서 보면 다 차려놨는데, 그 위에 뭐 갖다 또 올리면 미안하거든요. 그래서 그런데는 “그릇만 놔둬라” 그랬습니다. 불기(佛器)만요.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귀의한다는 것이고, 귀의한다는 것은 자신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면서 상대를 공양하고, 공경하고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첫째는 부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마치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봉양을 하듯이 불자는 불보살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공양을 올리고, 동시에 그 공양은 자기 자신이 번뇌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그래서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공양을 공양이라 하는가?

‘공양’이러면 사과, 떡, 차, 꽃, 향, 등(燈) 6가지 육법공양을 생각하고, 그리도 더러는 불전이나 혹은 절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양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공양이 뭔가 하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에게 공양을 하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향과 꽃과 풍악 따위로 할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절에 올 때 아무것도 안 가져와도 되겠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공양을 하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향, 꽃, 풍악 따위로 할 필요 없다. 그럼 뭘로 해야 되겠느냐?

수행-신심(부처의 종자(성품), 나도 부처다(말, 행동))-부처님 감동(기쁘게 해야 한다.)-공양(자식이 부모에게 하듯)

진정한 공양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모든 법의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나에게 진정한 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은 집을 사드리고, 차를 사 드리고, 옷을 사 드리고, 떡을 사 드리고, 밥을 사 드리는 것인가요? 이보다 중요한 게 뭐죠? 제일 원하는 게 뭡니까? 방금 한 보살님이 ‘마음 편한 거’라고 했는데, 그보다 가장 큰 게 뭐죠? 부모의 뜻을 따라 주는 것이죠 그렇잖아요?

가장 큰 효도는 아무리 돈을 잘 벌어서 집을 사고 뭘 사고, 뭘 사도 다~~, 그 부모의 마음에 자식이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입니다. 그러나 그 뜻이 맞지 않으면 어떤 공양을 올린다 하더라도 마음이 풍족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 하나 사오는 것도 없고, 사 드리는 것도 없지만 부모의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게 자식으로서는 가장 효도하는 자식이 된다 말이죠. 그렇죠?

그와 마찬가지로 불자로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할 때 반드시 육법공양이 아니더라도, 어떤 공양이 아니라도, 어떤 금은보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공양을 하는 제자는 어떤 불자인가 하면,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모든 법의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 이 불자가 부처님께서 가장 원하는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현행원에서 원하는 공양의 3가지 의미

여기 오늘 이 자리에 앉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하면,

“오늘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고 경전을 일고 외우고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생각하는 불자가 되면 가장 소중한 공양을 올린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보현행원에서는 어떤 공양을 원하는가. 먼저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죠.

첫째는 부처님 공양을 통해서 일체 중생을 공양하는 것을 배운다.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중생들에게 공양하는 것을 배운다. 모든 중생은 곧 부처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가 부처님 앞에만 와서 머리를 숙이고 절하는 것이 공양이 아니라,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인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공양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것이 보현행원에서의 첫 번째 공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상묘공양(上妙供養)이라고 합니다. 위 상(上)에다, 묘할 묘(妙)자로, 가장 위에, 가장 좋은 묘한 것을 가지고 공양을 하라. ‘가장 좋은 것으로 공양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얘기 듣기로, 요즘은 뭐,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지만, 옛날에는 공양미를 올릴 때에도 집에서 한 알 한 알 골라서 깨진 거, 부서진 거, 싸래기 다 골라내고 쌀 한 톨이라도 온전하게 된 것만 부처님께 골라 가지고 가서 한 번 머리에 이면 중간에 절대 내려놓지 않고, 부처님 전에 와서 내려놓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게 상묘공양의 첫 번째입니다.

요즘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죠?

봉지가 바로 됐는지, 거꾸로 됐는지, 그냥 와서 사 올리죠? 그 안에 싸래기가 들어 있는지 온전하게 들어 있는지․ ․ ․. 마음이라도 온전하게 해서 올리세요.

과일을 올릴 때에도 삐뚤어진 거, 못생긴 거, 덜 익은 거, 이런 게 아니라, 가장 원만한 거, 가장 잘 익은 거, 가장 맛있게 잘 생긴 거, 이런 것만 골라서 공양을 올립니다. 하나를 올리더라도. 그것은 뭐냐하면, 그 모양이 모양이 아니라 그 모양을 통해서 원만한 것을 추구하는 우리의 수행심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법공양입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계율을 지키고, 서사수지독송위인해설(書寫受持讀誦爲人解說)즉, 경전을 쓰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기도 하는, 이와 같은 공양을 상묘공양이라고 얘기합니다.

7가지 법공양(보현행원 : 수행광수공양)

그와 같은 법공양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지금부터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여설수행공양(如說修行供養)이라고 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수행을 하는 공양입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말로 좀 더 부드럽게 바꿔 보면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따라하는 공양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했는지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우리가 따라간다. 그대로 행한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한 번 해보겠다는 공양입니다.(자식은 거울(부모님) 부처님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두 번째는 이익중생공양(利益衆生供養)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 다른 중생, 옆의 사람, 남을 위해서 이익을 주는 그와 같은 수행, 그와 같은 공양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나 혼자는 살수가 없듯이, 모두 더불어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한 송이 꽃처럼 조화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마치 화단에 꽃이 한 송이만 있으면, 그다지 아름답지 않지만, 이것저것 어울려서 자신의 모양을 드러내면 화단이 조화를 이루듯이, 결국 자신을 위하는 것이 이웃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익중생공양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진리를 베푸는 것입니다. 진리를 베풀어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공양이 가장 수승하나 공양입니다.(경찰서장의 시민을 위한 기도법회)

세 번째는 섭수중생공양(攝授衆生供養)입니다. 섭수중생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중생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고, 다독여 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공양입니다. 내 주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할 때 말로라도 관심 가져 주는 그와 같은 행을 섭수중생공양이라고 얘기합니다.(어려울 때 옆에서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네 번째는 근수선근공양(勤修善根供養)입니다. 무조건 닦는데, 무얼 닦느냐 하면, 선근(善根), 좋은 일이 있도록 좋은 인연을 만드는 그런 수행, 그런 공양입니다. 이것을 근수선근공양이라고 얘기합니다.(복 지을 기회 제공, 일요일에 법회에 동참(배우자) 오늘 저 밖에는 ‘놀토’를 하고 있습니다.(홍법사는 격주로 토요일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가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체험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주) 부모가 자식에게 놀토 가자.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선근을 심어주려고 법회에 가자, 기도하러 가자 하고, 여러 사람에게 선근을 심어주려고 108산사 가자, 봉정암 가자고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선근을 심어 주는 공양이 된다’는 것입니다.(산악회, 교양대학 공부 등 자원봉사)

다섯 번째는 대중생고공양(代衆生苦供養)입니다. 대중생고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라는 것이죠. 이건 뭣이죠? 자리를 양보해 주고, 다른 사람이 짐을 들고 가면 들어주고, 마음에 부담스러운 것이 있으면 얘기를 통해서 그것을 해소해주고, 즉 어떤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아 주는 그와 같은 보살행, 이것을 대중생고공양이라고 얘기합니다.(공양간에서 노보살에게 자리양보, 법당에서 자리양보, 길거리에서 지리 설명 등)

여섯 번째는 불사보살업공양(佛捨菩薩業供養)이라고 하는 것인데,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입니다. 보살업이라 하는 것은 6바라밀을 행하는 공양입니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선정(禪定)과 정진(精進)과 지혜(智慧)라고 하는 수행 자체가 결국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이 마음을 다 베풀면 이게 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부터는 힘들고 어렵게 공양 올리려 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행하신 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대로 부처님 같이 사는 것이 가장 크고, 가장 넓은, 가장 상묘공양을 해야 합니다.(대승불교 핵심 실천 수행 지침)

마지막으로는 불리보리심공양(不離菩提心供養)이라고 해서, 보리심(참 불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 깨달음을 일으키는 마음)을 여의지 않는 수행을 하는 것을 불리보리심공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리는 모든 공양은 과일, 떡, 향, 등(燈), 이런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설한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경전을 읽고 외우고,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 경전을 설하고, 경전을 깊이 이해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나에게 올리는 가장 수승한 공양”이 된다. 참다운 공양을 올릴 때 그 공양의 공덕이 나에게 오게 된다. 어떤 공양보다도 수승한 공양은 법공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보현행원 세 번째 수행 광수공양(廣修供養)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자, 공양을 언제 올려야 되죠? 언제 공양을 올려요? 네? 사시에 올리죠. 매일 올리고, 사시에 올리는데, 매일 사시가 아니라, 언제나 항상 내가 부처님의 행을 하면 그것이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내가 부처님의 행을 하지 않으면, 공양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공양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대접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스스로 공양을 올리고 베푸는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마침내,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불자가 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정우 스님

부처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믿음은 보시(布施)가 되어 나타나서 마음에 인색함이 없게 하며, 믿음은 능히 기쁨을 낳아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게 하며, 믿음은 능히 지혜의 공덕을 증장(增長)시키며, 믿음은 여래지(如來地)에 반드시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은 생명력이 있어야 하고, 그 생명력을 통해서 원력(願力)을 발현해야 하며, 그렇게 발현된 원력으로 정진(精進)을 하게 되면 진지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진정한 믿음이요, 신심(信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신심이라는 생명력을 가진 이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함이요, 둘째는 성내는 마음을 끊음이요, 셋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름이요, 넷째는 연민(憐愍)의 정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일이니라.』

보리심은 자기의 본심인 참마음을 의미합니다. 참마음을 지니고 있고 참마음을 일으키는 이는 이와 같이 좋은 벗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성냄을 끊을 수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연민의 정을 일으키며, 진지한 자세로 부지런히 정진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 명제(命題)를 가지고 항상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분별이 없고, 시비가 없고, 한결같았을 때에 진정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자세를 갖춘 뒤에라야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따뜻한 기운을 간직할 수 있고, 찾을 수 있고, 전해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수지방원지기(水隨之方圓之器)요, 인의지선악지우(人依之善惡之友)라는 말씀입니다. 즉, 물은 모나고 둥근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지듯이, 가지가지 종성을 가지고 중생계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 또한 누구와 함께, 어떤 입장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옭아매고 거기에만 집착해서 스스로에 매몰된 삶을 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현재의 이 마음이 본래 착한 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는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열반경(涅槃經)》에서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나면 가지가지로 나쁜 업(業)을 일으키고 만일 몸과 말과 뜻으로 여러 가지 나쁜 업을 짓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 범부중생이 몸과 마음에 괴로움을 만나면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중생들은 생각하는 지혜(智慧)가 없어서, 선근(善根)이 없어서 그러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본래가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 고운 모습은 선근에서 시작하며 선근이 자양분이며, 지혜로움이 보살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업이라는 것은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결정된 것은 현세에 받기도 하고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또 그 다음 생에 받기도 합니다. 결국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며,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아니한 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믿고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살기 좋아졌다고 하면서도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노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우리와 한 세상을 사시다 열반하셨던 경봉(鏡峰) ․ 월하(月下) ․ 성철(性徹) ․ 석주(昔珠) ․ 일타(日陀)스님 같은 큰스님들이 노후를 걱정하며 사셨을까요? 그 어른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출가해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열심히 사신 흔적밖에 없습니다. 그 어른 스님들은 노후나 돈, 죽는 것, 사는 것, 세상살이 등에 관해서 일체 걱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살기가 좋아졌다고 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왜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노후를 걱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열심히 잘 살면 성불도 하고, 극락도 가고, 복도 받고,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는데, 늙어서 걱정할 인생을 살 것이 뭐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고마움을 느끼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일반적인 우리의 인생을 세 단계로 나눠보면 처음 20~30년은 부모 밑에서 각자의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20~30년은 서로의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사회생활을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세 번째 단계의 20~30년은 그 생을 마무리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인생은 길게는 90년, 짧게는 60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그 인생을 잘살고, 노후걱정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몫입니다. 따라서 결코 짧지 않은 각자의 인생 속에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스스로가 되어야 합니다. 거울 앞에 앉아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이 진정으로 내가 바라던 모습인가를 한 번 더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내 모습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고, 오늘 살고 있는 내 인생이 또한 내일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기의 모습을 찾는데 시간할애를 해보십시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미래의 인생 때문에 쩔쩔 매지 말고, 인연이 합해지면 반드시 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금생에 복을 지을 수 있는 나로 전환을 해야만 합니다. 복은 비는 것이 아니고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도 “진정으로 선근과 지혜를 드러내서 자비심을 가지고 살려고 한다면 물질을 나눠주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자비심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장 빵 한 조각과 밥 한 그릇이 필요하고, 노숙자에게는 당장 컵라면 한 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날마다 빵과 밥, 컵 라면을 주면서 객체적(客體的)인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어부에게 물고기 몇 마리 잡아주는 삶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줘야하고, 가난한 농부에게 우선 당장 겨울을 날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진정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고 싶거든 먼저 자기 내면의 변화를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이 변화할 것이고 거기서 범위가 점점 넓혀지면서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현생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단지 인생의 업적과 영적인 씨앗만 안고 간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업이 탐 ․ 진 ․ 치 (貪瞋癡) 삼독(三毒)의 업 덩어리인지, 계 ․ 정 ․ 혜(戒定慧) 삼학(三學)의 자비심(慈悲心)인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각자의 행동에 따라 한쪽은 안락국(安樂國)이 되고 한쪽은 삼악도(三惡道)가 된다는 그 이치를 충분히 인식했으면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일만을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불자(佛子)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어가고, 가져간 만큼 돌려 줘야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인과법(因果法)의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 없는 기도를 해야만 하고, 기다릴 줄 아는 불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중생의 마음이라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머무를 일 없이 일어났다 사라져버리는 것이 중생의 생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것 또한 별것 아닙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다보면 작은 깨달음도, 큰 깨달음도 얻게 됩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좇아가는 객체적인 인생이 아니라, 스스로가 당당하게 살면 그림자와 같은 허상(虛相)은 언제든지 자신이 가는대로 따라온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성적(理性的)이고 주체적(主體的)인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벽에 귀를 기울이라

법정스님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예불하고 점점 밝아오는 창 앞에 허리를 마주앉아 있는 이 투명한 시간을 나는 즐기고 싶다.

차가운 개울물소리에 실려 어김없이 쏙독새가 ‘쏙독 쏙독 쏙독’ 하고 집 뒤에서 한참을 울어댄다. 달밤이나 새벽에 많이 우는 쏙독새를 일명 머슴새라고도 하는데, 부지런한 이 새의 생태로 봐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윽고 휘파람소리로 4박자로 우는 검은등뻐꾸기와 이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웅 웅 웅’하고 벙어리뻐꾸기가 새벽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소리는 메말라가며 굳게 닫혀 진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해준다. 새벽에 일찍 깨어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조촐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간에 거리에는 그 전날 사람들이 어질러놓은 자리를 묵묵히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의 거룩한 움직임이 있다. 또 시장에는 새벽장을 여는 부지런한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있다. 그리고 고속도로에는 밤잠을 자지 않고 밤새워 짐을 나르는 화물차의 행렬이 있다.

이와 같은 새벽 풍경은 곁에서 바라보기에도 뿌듯하고 든든하다. 활기찬 생명력이 이웃에까지 번져오는 것 같다. 하루가 시작되는 이른 새벽에 깨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전문가들의 체험에 의하면,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이런 시간이 하루 24시간 중에서도 명상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고 한다. 명상이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과 다른 무엇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묵묵히 쓸고 닦는 그 일이, 시장에서 무심히 사고파는 그 행위가, 또한 맑은 정신으로 차분하게 차를 모는 그 운전이 바로 명상으로 이어진다.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슨 일을 좋아하며,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고, 무엇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고 있는지, 곰곰이 헤아려보면 자기 존재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이런 명상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바깥 소용돌이에 자칫 휘말리게 마련이다.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일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날이 갈수록 사막이 되고 황무지가 되어간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이 총체적인 부정부패로 전락하게 된 것도(물론 가진 사람들의 경우다)따지고 보면 구조적인 모순으로 돌리기에 앞서, 개개인이 하루 한때라도 자신의 삶을 안으로 살펴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지 못한 데에 그 요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저마다 자기 삶의 몫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자신이 살고 있는지를 한때라도 생각을 가다듬고 살필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건강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물질적으로 너무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밥술이나 먹고 살게 된 오늘에 와서까지 물질지향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대정권에서는 국민총생산량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국민의 총 행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였다. 그러나 요즘 정신세계의 흐름을 보면 물질지향적인데서 벗어나 삶의 질을 문제 삼는 영적인 변혁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같은 생물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반 동물과는 달리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사간의 갈등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것도 피차가 노동의 대가인 임금만을 문제 삼고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데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근로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가진 기업이라면, 근로자들에게 지불되는 보수나 휴가에 못지않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 많은 산업재해는 인간을 한날 도구로 여긴 결과 아니겠는가.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노동의 목적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간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형상이 물건에 새겨지기 때문에 노동은 인간의 자기 표현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량제품은 그 만들어낸 사람의 삶이 불성실하다는 표현이다. 자신이 만드는 물건을 사용할 사람들의 편의와 처지를 염두에 두고 일을 한다면, 그 제품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인간적인 유대가 형성된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임금노동자가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는 구도자일 수도 있다.

농사철에 맞추어 씨앗을 뿌리고 부지런히 땀 흘려 가꾸는 농부도 자신이 지은 곡식과 채소가 수많은 사람들의 영양과 건강에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다면, 그 농삿일이 단순한 생업이 아니고 인간 형성의 길과 하나가 된다.

나는 요즘 해거름에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매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벗은 발로 부드러운 밭 흙을 밟으면서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며 김을 매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느긋하고 편안하다. 흙은 이렇듯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힘의 원천이다.

어떤 명상가는 말한다.

“명상은 창문을 열어놓았을 때 들어오는 산들바람이다. 그런데 일부러 창문을 열고 억지로 불러들이려 하면 그 산들바람은 들어오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자신의 삶에 귀를 기울여보라. ‘나는 누구인가’하고 스스로 물어보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

여러분 그동안 보람 있게 지내셨습니까?

누구 덕에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부처님 덕이라고요.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왜 여러분에게 덕을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이 좀 이상합니까? 부처님이 공연히 여러분에게 덕을 베풀어 주신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뭔가 부처님의 덕을 받을 만한 일을 하였기에 덕을 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부처님께 하신 것 중에 제일 잘한 것 한 가지만 말씀해 보십시오.(잠시 대답을 기다린다.)

부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부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을 했을 때, 부처님의 덕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처님은 뭐든지 다 좋아하시는 것 같지요? 부처님은 원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난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은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신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덕을 볼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해야 부처님의 덕을 볼 수 있고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법구경』「분노품」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 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합장 하시고 『법구경』에서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경구를 염불곡조로 낭송하고 다 같이 염불한다.)

“언제나 자신의 몸을 보호하되 성난 행동에 빠지지 않도록 잘 지키어라. 이 몸이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덕행을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라. 또한 자신의 입을 보호하되 성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잘 지키어라. 이 입이 더럽고 악한 말을 버리고 언제나 법다운 말을 할 수 있도록 수련하라.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보호하되 성질이 나지 않도록 마음의 평안을 지키어라. 이 마음이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도(道)를 생각할 수 있게 하라. 나무아미타불!” 『법구경』「분노품」제 17

여러분! 어떠십니까? 잘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잘 되신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잘 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좀 어렵다고 생각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부처님의 덕을 보시려면 이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부처님도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부처님도 손을 쓸 수 없는 사람을 어느 누가 구제하겠습니까!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은 부처님이나 불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활에 평안과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만들기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탈과 열반,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탈은 자유로움이고, 열반은 평화로움이고, 성불은 행복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생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이끌어서 마침내 행복이 보장되는 인생을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이 되려면

우리 불교도인들은 이러한 불교의 내용에 대하여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과연 행복이 보장되는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그 동안 불교를 믿어 오신 경험으로 보아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말씀대로 실천해서 생활이 잘 되셨습니까?

부처님 말씀대로 하였는데도 생활이 잘 안 된 경우는 없으십니까? 누가 경험담을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잠시 기다린다.) 아직 경험이 없으신 분, 그리고 생활이 잘 안 되신 분들은 지금부터 잘 들으십시오.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자신의 생활에 확신을 갖는 것, 자기의 행위에 자신을 갖는 것은 인생의 향방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교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는 것, 불교인으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자신을 갖는 것이 불교를 믿는 생활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과 자신이 없는 생활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의 생활에서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들은 평소에 수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외우면서 그 의미를 깨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믿음과 실천의지를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들어 보신 『법구경』의 말씀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각자가 자기의 자신을 잘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사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소원성취를 위해서 반드시 가슴에 사무치도록 깨우쳐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법구경』에서 말씀하신 것은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된 것입니다.

첫째, 각자가 자기의 몸을 잘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건강을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동보다는 육신의 건강을 우선으로 생각하시겠지만, 건강한 육신이 여러분의 생활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훌륭한 행동이 여러분의 생활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훌륭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걸 모르시는 분은 안 계시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악(惡)한 행동을 하지 않고 선(善)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내용은 여러분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평소의 생활 속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행동을 거칠게 하는 것, 성난 행동을 하는 것, 사나운 행동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자기의 몸을 얼마나 다치게 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뒤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몸을 해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어찌 그것뿐이겠습니까? 손을 놀리는 것에서부터 발을 움직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조심하지 않고 행동하여 몸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조심하지 않아서 몸을 다치게 되었는데 그 순간에 먼저 반성을 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탓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도 고통스럽고 마음까지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평소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감정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조심하여 자기의 몸을 다치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조심하여도 몸을 다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겠지만, 비록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다친 몸을 더욱 다치게 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상식적으로 잘 알면서도 실제 상황에 부딪히면 행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온 오랜 습관 때문입니다.

이 오랜 습관을 불교에서는 다생(多生)의 업(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업이라는 것을 이겨야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자기 몸을 잘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습관을 이기기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이기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튼 여러분이 각자가 자기의 몸을 보호하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오랜 습관을 다스려 굴복 시켜야 합니다.

둘째, 여러분이 각자가 입을 잘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먹는 일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하는 우리의 입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입을 보호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입으로 하는 말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자기의 입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입으로 나오는 말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대로 말하여 결국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생활에서 자신의 입으로 추악하거나 사나운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도에 맞는 좋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말만 골라서 하기가 쉽지 않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손해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유명한 학자였던 주자(朱子)라는 분은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와 같이 하라(『명심보감』「존심편」)”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입으로 저지르는 잘못을 구업(口業)이라고 하여 대단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고승이신 야운(野雲)스님은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니 반드시 엄히 지키라(『자경문』)”고 하셨습니다. 말을 조심하지 못하는 우리의 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면 옛 어른들이 이처럼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우리 불교인들은 이 점을 가슴 깊이 새겨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평소에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하여 여러분은 입을 병마개처럼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려우시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진실로 평화로운 생활과 소원의 성취를 원하신다면 평소에 입으로 불필요한 말이 함부로 나오지 않도록 결사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는 평소에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늘 정신을 차려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자연히 입에서 불필요한 말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도할 때만 염불을 하고 이야기하거나 수다를 떨 때는 염불을 하지 않으니 입을 보호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습니까? 그것도 듣는 사람에게 유익하고 기분 좋은 말이라면 몰라도, 듣는 사람이 싫어하거나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말은 오히려 말을 한 사람도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남의 허물을 말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를 다치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말하는 것보다는 염불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는 것을 더 많이 하시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입니다.

셋째,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잘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마음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특히 자기 마음에 평온을 깨뜨리는 감정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그 바탕이 마치 맑은 호수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어떤 경우든 흔들리기 쉬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감정이 마음의 평온을 잃게 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나쁜 감정이 마음의 평온을 망쳐 놓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운수가 나빠서 그럴까요? 재수가 없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자신에게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아마 여러분은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이유를 더 많이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소의 생활에서 생기는 나쁜 일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유를 더 생각하기 때문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의심과 두려움과 걱정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라면 이러한 이치를 잘 깨우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 자신의 생활에 관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특별히 단속하지 않으면 생활하는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잘 보호해야 평소의 생활이 원하는 대로 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마음을 어떻게 보호하라고 하셨습니까? 성나지 않도록 마음의 평안을 지켜야 하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도(道)를 생각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깨뜨리는 첫 번째 범인은 ‘성내는 것’입니다. 누구는 성내고 싶어서 내느냐고 하시겠지만 성질이 나면 자기의 마음도 엄청난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서 성내지 않도록 철저하게 보호하지 않으면 여러분 생활의 평화는 부처님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는 평소의 생활에서 나쁜 일이 생겨 기분이 안 좋을 때 순간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어서 마음의 평온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어렵다면 재빨리 염불을 하는 것이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생활에서 나쁜 일이 생길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생활에서 나쁜 일이 생길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그 나쁜 일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요? 나쁜 일에 대하여 자기반성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의 생활에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이유를 생각하기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불교신자이므로 부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좋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믿음을 철저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 『법구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몸과 입과 마음을 잘 단속하여 잘못하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자기의 인생을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안전한 인생이기를 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짓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이 자기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이 자기의 노력과 책임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 자기의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분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여러분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몸과 입과 마음을 이 세상 어느 누가 보호하여 주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자기 생각대로 행동과 말과 마음 씀을 나쁘게 하는데, 이것을 누가 말리고 보호해 주겠습니까? 그러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신자들은 이러한 이치를 깊이 생각하고 평상시에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생활에 실천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힘이 있으면 결코 피해를 입거나 실패를 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하기 어려우면 그저 부처님께 지극정성으로 공양하고 예배하며, 복 받을 수 있는 보시공덕이라도 부지런히 닦아야 합니다. 이것도 어려우면 여러분 인생의 평안과 성공의 길은 멀어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께 가르침대로 하겠다고 발원하고 또 발원하여 실천의지를 키워야 합니다. 다 같이 합장하시고 따라하십시오.

(다음 게송을 선창, 합창하고 마친다.)

저희들은 오로지 거룩하신 부처님만 믿고 의지하오리다!

저희들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 믿고 의지하오리다!

저희들은 오로지 청정하신 수행자만 믿고 의지하오리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족 간의 윤리(효)

특히 5월은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시며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거룩하신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부처님이 오신 날이 있어 더욱 의미 있는 달입니다.

화목의 비결

부처님께서는 『본생경』에서 ‘가정은 한 가족의 마음을 가장 가깝게 접촉하며 사는 곳이므로, 서로 식구가 화목하면 꽃동산과 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만일 마음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사납고 무서운 풍파가 일어나서 파멸을 가져오는 지옥과 같아진다’라며 가정 화목의 중요성에 대해 설하셨습니다.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가정이 화목해지면, 그 사회도 화목해지고,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그만큼 차가운 사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자비와 이해로써 가족 구성원 간에 자신을 서로 희생하는 관계의 수련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정에서 원만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이 사회인으로 남들과 원만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포용력, 이해력, 화합을 잘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는 불교 교단을 ‘승가’라고 하는데 ‘승가’는 화합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불자 가정도 화합을 생명으로 해야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법비〔法雨〕를 함께 맞으며 깨달음의 바다로 흘러가는 도반들의 수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은 가정이란 단순한 혈연의 동거가 아니라 자비와 이해로써 친교하는 인격적 공동체임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싸움만 하는 집’과 ‘화목한 집’이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싸움만 하는 집’ 주인이 ‘화목한 집’ 주인을 찾아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서 “비결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댁의 집은 모두가 착한 사람뿐이고 저희 집은 모두가 악한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목한 집’ 주인은 “가령 제가 방에 들어가다 방에 놓여 있는 물그릇을 발로 차서 엎질렀을 때, 저의 아내는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물그릇을 그곳에 놓지 않았으면 될 텐데”라며 민망해 합니다. 그러자 저희 어머님께서도 “아니다. 그것은 이 늙은이의 불찰이다. 물그릇이 내 앞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민망해 하십니다. 그는 이어 “우리 식구는 모두가 자기 잘못이라 하여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이 되질 않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마음이 중요하다.)

사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려 하면 끝이 없습니다. 오직 자비와 이해만이 원망을 사라지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본생경』에서 ‘이런 경우에는 각자가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고쳐 바른길을 정당하게 밟아가야 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우바새계경』에서는 ‘남의 장점을 들추어 주고 단점을 감추어 주어라. 남의 부끄러운 곳을 건드리지 말고 비밀을 지켜 주어라’가족 간의 윤리적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범부 중생은 이익은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은 남에게 돌리려는 무의식적 태도 때문에 화목해야 할 가정이 파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심의 소치입니다.

『능엄경』에 보면 ‘여래가 중생을 생각하는 것은 어미가 자식을 생각하듯 하지만 자식이 멀리 달아나 버리면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고 했습니다. 자식이 부모 생각하기를 부모가 자식 생각하듯 한다면 부모와 자식은 이생과 내생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지나도록 마치 몸에 그림자 따르듯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변소에서 기생하는 구더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구더기는 어떤 인연으로 살아가고, 우리가 기르는 돼지는 어떤 인연으로 살아가는지, 또한 우리 인간은 어떠한 인연으로 살아가는지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효

진정한 효란 은혜를 아는 일이며, 그 은혜를 알고 갚아 이웃과 사회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가정과 가문의 무사안일만을 강조하는 것은 유교적인 효이며, 중생의 은혜를 알고 갚는 길은 보상의 효입니다. 부처님의 크나 큰 대비심은 일체 중생에 대한 은혜이자 효인 것입니다.

자식 된 사람으로서 부모님의 은혜를 외면한다는 것은 인류 도덕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 열 가지로 부모님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아이를 잉태하여 열 달 동안 보호하는 은혜, 둘째 해산할 때 괴로움을 겪는 은혜, 셋째 자식을 낳고 모든 근심을 잊는 은혜, 넷째 입에 쓴 음식은 삼키고 단 음식은 자식에게 먹여 주는 은혜, 다섯째 마른자리 젖은 자라 갈아 눕히시는 은혜, 여섯째 시간 따라 젖을 먹여 주시는 은혜, 일곱째 똥오줌을 가려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 여덟 번째 먼 길을 떠날 때 생각하고 염려하시는 은혜, 아홉째 자식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감수하시는 은혜, 열째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부모님의 은혜를 열 가지로 중생에게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선생경(善生經)」에서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갖추어 참된 부모 자식의 도리를 실천하는 다섯 가지 조건의 규정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녀가 부모를 공경히 봉양해야 되는 다섯 가지 규정은 첫째, 모시고 봉양하되 다함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먼저 부모에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셋째, 부모가 하는 일에 공손히 따르되 뜻에 거슬리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부모의 바른 분부를 감히 위배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부모가 하시는 바른 가업이 끊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다섯 가지 규정은 첫째, 자녀를 잘 보호하여 나쁜 일을 보고 듣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둘째, 항상 좋은 일하는 것을 가르치고, 보게 하여야 합니다. 셋째,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치게 해야 합니다. 넷째, 자녀들의 좋은 혼처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다섯째, 수시로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면 불효는 없을 것이다’ 라 하였으며, 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자기를 공경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말씀하시를, ‘인간은 세상에 홀로 태아나 홀로 죽으며, 홀로 와서 홀로 간다. 즐겁고 괴로움을 당하여도 몸은 혼자 갈 뿐 누구도 대신 할 자는 없다’라고 하셨으니, 인간은 항상 무상하게 왔다가 허무하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한 즐거움은 이 무상의 고락을 벗어나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데 있으니, 부모가 생존했을 때는 모시고 절에 가서 해탈법문을 듣게 해주고, 돌아가셨을 때는 천도 독경을 잘 모셔드리고 49제를 정성껏 봉행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극락왕생토록 해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어려서부터 부모 봉양하는 법을 잘 익혀 효도의 가풍이 잘 계승되고 또 신앙도 한결같이 잘 이어져야 자손대대로 가정이 화평하고 자손이 창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께서 「미생원경(未生寃經)」에 말씀하시를 ‘대저 선(善)의 근본은 효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악(惡)의 큰 것은 불효보다 더한 것은 없다. 어른과 어린이가 서로 섬기면 하늘도 마땅히 도울 것이니 하물며 어버이라 라고 하셨으니 효는 인륜의 가장 큰 근본이 되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를 잘 봉양하면 가정은 자연히 평화로워 지고, 그러한 가정이 모인 사회는 당연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밝고 명랑한 불국정토 사회가 실현될 것이다.

우리 한국불교에서도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신 스님이 많이 계셨으니,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인 진각 혜심국사는 홀어머니의 뜻을 따라 출가를 늦춰 노모가 돌아가신 후 망모의 천도재를 조계산 수선사에 지낸 후 출가했습니다. 진묵 스님은 노모를 위해 모기 없는 마을을 만들어 모셨고, 그밖에 많은 절이 부모님의 은혜를 위해 지어졌으니, 신라의 김대성은 과거의 부모님을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세의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어 오늘날까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나라 문화재의 걸작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또 출가함으로써 부모님께 효성을 다 바친 경우가 있습니다. 신라 진정스님은 노모님이 혼자 계시는 것을 염려하여 출가를 하지 않고 있자 어머니는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너무나 빠른데 내가 죽은 뒤 출가하면 너무 늦어지니 어서 출가를 하도록 해라. 만약 내가 너의 출가에 방해가 된다면 내가 죽은 후 필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참으로 내게 효도를 하려면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떠나 출가토록 해라”라고 간절히 재촉하여 수도의 길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출가 수도가 비록 부모를 떠나 이별하는 것이나. 더욱 적극적으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란 점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빈자일등

5월이 우리 불자들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부처님 오신 날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가정의 소중함과 효와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뭇 중생이 참 생명의 존귀한 빛을 모른 채 끝없는 생사(生死)에 윤회(輪廻)하면서 한없는 죄업 속에 빠져 있음을 아시고, 대자비로 생명의 참뜻을 일깨우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 不思故有惑 不求故無得 不問故莫知

* 기도 하는 자와 기도 안 하는 자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반응합니다. 그 마음을 오롯하게 정리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기도 하는 사람이며, 들떠 있는 허깨비 같은 마음의 그림자에 끌려가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기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의 조작일 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그 이유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은 기도 하고 노력하여 자기의 꿈을 이룬 것이고, 불행한 사람은 세상을 탓할 핑계를 찾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