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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열면 밝은세상(생명존중과 참 사랑)

통융 2011. 2. 15. 11:32

생명 존중과 참 사랑


인도의 정신이며 아버지인 간디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기독교를 알게되고

기독교의 정신인 인간사랑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로 돌아와서 불교를 접하면서 만(우주) 법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그의 비폭력과 무저항의 기본 정신은 사랑에 있다고 봅니다.

그 사랑이 생명 존중이며 불 살생에 있었습니다.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 자였으며 사랑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인은 물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중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성당과 사찰에는 사랑과 자비의 목소리만 넘쳐나고 있습니다.

살생으로 차려진 식단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부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먹이와 쾌락과 이익을 위해 그 어떠한 생명도 예외 없이 살생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들 간에도 각자의 기득권과 명분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있습니다.

단지 그들 보다 힘이 세고 다스릴 줄 알고 우월하다는 착각으로 너무나 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스스로 죽고 싶어하지 않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살생입니다.

그리고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온 開我가 하나이기 전에는 모든 것은 本性에 말을 빌려온 자기 합리화입니다.


창세기9장4절에"너희는 피가 들어있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고 " 했습니다.

석가는 "살생은 나를 죽이는 거"라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도살장이 존재하는 한 전쟁터도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맹자는"네가 그것이 살아있는 것을 본다면 네 어찌 죽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신음 소리를 듣는다면 네 어찌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지난 위대한 모든 분들은 생명을 사랑 할 줄 알았습니다.

석가,예수,플라톤,소크라테스,뉴톤,레오나르도 다빈치,다윈,바그너,아니슈타인,타고르,간디, 슈바이쳐,폴유먼,마돈나,린제이와그너,켄디스버그 등

이들은 채식주의자였습니다.

물론 식물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채소나 풀들은 잘라주면 더욱 번성합니다.

과일이나 열매는 죽고 썩어야 더욱 종자를 번식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스스로 죽음을 싫어하는 뭇 생명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참된 신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원래가 채식동물입니다.

육식동물은 장의 길이가 짧은 반면 채식동물은 장의 길이가 깁니다.

인간도 무려 수m에 달하는 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대학교의 헌팅건 박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채식 동물은 육식동물보다 힘이 세고 몸집이 큽니다.

코끼리, 소, 말, 공룡 등이 있으며

그 동물들은 인간에게 이로움을 줍니다.

하지만 육식이나 잡식동물들은 포악하고 사납고 체구도 적습니다.

인간에게는 해를 끼치는 동물들이 태반입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본래의 성품 데로 육식을 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최소한 가장 기본적인 생명존중과 불 살생을 깊이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역사는 점점 더 많은 질병으로 고통 받고 인격들은 더욱 사악해지고 포악해 질 것입니다. 왜냐면 살생으로 죽어 가는 동물들은 원한과 악을 품고 죽습니다.

인간들은 그런 나쁜 기운으로 죽은 시체들을 먹고 농약으로 키운 채소들을 섭취하고 있는 한 말입니다.


먼저 교당이나 법당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자비를 베풀라고 설교하며 법문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참 의미를 깨닫고 성직자들이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바로 섭니다. 그래야 믿습니다.

그래야 사회가 부드러워지고 아름답고 조화로운 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라 해도

지구 위에 인간만이 절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보다 살기 좋은 천국과 낙원을 꿈꾸며 살고 싶다면

뭇 생명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함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듯이 뭇 생명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존중해야할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지혜를 갖고 있는 만물의 영장이니까

신의 참 뜻을 거스르지 않고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봅니다.


살생은 다만 우리 인간들이 분별한 기준을 서로 말을 통해 뜻을 전달 할 뿐입니다.

즉 생과 사를 구분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생사를 하나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살생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생사를 초월한 마음 일 때는 살생 또한 아름다운 현상입니다.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은 모든 것 생명뿐만 아니라 전체를 하나로 바라보는 마음 일 때

생사를 구분 짓지 안는다고 봅니다. 즉 이 우주 법계의 모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라는 큰 덩어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큰 하나를 만드는 현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다에 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할 때 그 고기는 나와 다른 모습일 뿐 나의 다른 한 부분으로 바라본다면 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살생이 아닌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의 참 질서를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능력으로는 한계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만법)이 신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인간의 삶은 신의 뜻에 거슬리지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신의 뜻이란 신성으로 귀의하는 것을 말하며 우주 법계의 만물을 하나로 보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자비를 행하는 큰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내 몸에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르듯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최소한의 영양이 필요하고 음식을 섭취해야겠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육신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음식이 아니라 과용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것들은 오직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분별하는 이기적 생각들로 재미와 쾌락을 위해 다른 생명(나)을 한 부로 죽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다른 부분인 나를 죽이고 병들게 하고 있다면 나는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생명 존중은 큰 나를 생각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가장 밑바탕에 깔려있는 양심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살생은 그 양심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 나와 하나라는 열려진 마음으로 살생을 즐기지 않는 것이라면 스스로 살생을 말로서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식으로 자기 합리화의 만용이지 참 신성(성품)이 아닌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나와 하나라는 생각<착을 벗을 때>일 때는 살생이 아니라 현상이며 그렇지 않고 나와 타의 것으로 구분된 생각 <양심이라는 인간의 식견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일 때의 모든 행위는 분별이며 살생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진실로 열려진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우리사회의 대부분이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생명 존중의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깨달은 듯 양심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오래 동안 생활 해 온 인간의 습성이 변화와 자존심이라는 이기성을 벗길 꺼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기득권을 버리기 싫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모든 사람들 또한 나라는 생각이 되는 자만이 살생을 해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