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불교/통융스님의 반야심경 해석

41. 우리말 반야심경<본문> 언덕(中道)으로 가는 길(道) 3

통융 2023. 1. 8. 09:30

41. 우리말 반야심경<본문> 언덕(中道)으로 가는 길(道) 3

반야 바라밀다는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이다.

반야'는 범어 프라즈나(prajna)'지혜'

 

'바라밀다'는 파라미타(paramita)로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이른다는  '완성'을 뜻한다.

 

‘para’저 언덕’, ‘mita’건너다’ '길(道)'을 의미하며

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다.’ ‘완전한 것(피안)을 이루다의 뜻이다

 

피안(彼岸)은 깨달음 열반으로 완전한 상태 · 구극(究極)의 상태로

현실의 괴로움에서 열반인 행복한 도피안(度彼岸)으로 해석한다.

 

부처님은 설법 중에 강을 건너 저쪽으로

간다는 길(道)의 비유를 많이 하고 있다.

 

이 땅은 사바세계라 하며,

중생은 몸과 마음인 오온에 끄달려 분별심으로 사는 괴로운 삶을 의미한다. 

 

강물은 거센 물결과 풍랑으로 험난한 괴로움과 인내하는 수행이고

강을 건너는 수단과 방편은 4성제 8정도 혹은 4섭법과 6바라밀 수행 방법이다.

 

이 강은 건너 도착한 곳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본래의 성품 자리

 

도피안이라 하며 정토, 열반, 극락,

중도의 자리 그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참 진리(연기법)를 바르게 깨달아

내가 부처임을 알아차리는 견성성불이다.

 

모든 존재는 동체대비의 또 다른 나임을 자각하고

나눔과 자비가 그냥 일어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경전(經典)이고 부처님의 마음은 선(禪)이라고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 설명하듯

 

수행 방법은 교학과 수행으로 경전공부, 염불, 사경,

주력, 4념처, 37도품, 사마타, 위파사나, 참선 등이 있다.

 

<법화경> 법사품에서 수지(受持), 독경(讀經), 송경(誦經),

서사(書寫), 해설(解說)로 경전공부 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수지는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 독경은 읽기만 해도,

송경은 읽어주는 것, 서사는 사경하는 것, 해설은 법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의 진리는 이름일 뿐

어떤 진리를 말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여래는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며

진여를 말하는 이며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32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듯이 만약 모양이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과 글만 가지고 이해하려면 말장난 같이 들린다.

말한 적 없다고 하다가 진실을 말한다 했다가…….

 

우리가 강을 건너서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지

강을 건네주는 도구인 배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고 나서

그 뗏목을 짊어지고 가야 하느냐? 라고 질문했듯이

 

언어나 문자는 단지 강을 건네주는 방편이고 수단이지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에 집착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이나 글귀에 속아서 원리와 지식으로 논한다면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놓는 사람이라 우기는 경우와 같다.

 

그래서 말과 글에 속지 말고

그 말 이전에 뜻을 스스로 체험하여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을 선불교에서는 공안(公案) 혹은 화두(話頭)라 한다.

즉 문자 이전에 진리가 있음을 간파하여 알아차리는 것.

 

참 진리를 단밖에 깨닫는 돈오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이며

볼뿐, 들을 뿐, 할 뿐으로 즉시 부처가 되는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했다.

 

즉 언어나 문자로 세울 수 없고 그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어서

불입문자(不立文字)라하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계현스님과 제자 신찬스님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계현스님이 햇빛이 밝게 비치는 들창문 밑에서

한쪽의 창문을 열어놓고 경전을 읽고 있었다.

 

마침 그때 벌 한 마리가 방에서 밖을 나가려고

닫혀 있는 창문에 가서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자 신찬스님이

시를 한 수 읊는데

 

텅 빈 문()으로는 기꺼이 나가지 않고

창문에 가서 부딪치니 참 어리석도다.

 

공문불긍출(空門不肯出)

투창야대치(投窓也大痴)

 

백 년 동안 옛 종이만 뚫은 들

어느 날에 벗어날 기약 있으리오.

 

백년찬고지(百年鑽古紙)

하일출두기(何日出頭期)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다.

불자라면 대부분 반야심경쯤은 모두 달달 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반야심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의 참뜻을

화두를 참구 하듯 스스로 골똘히 체험해 봤는지?

 

아니면 문자나 지식으로 경문에만 매몰되어 어리석은 벌처럼

창호지만 열심히 뚫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한다.

 

공은 뭐요? 하면 색즉공 공즉색이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지역무득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이 말과 글로 설명도 지혜도 없다 했으니

설명을 떠나서 공의 도리를 말해 보시오? 라고 다시 질문을 받으면

 

우물쭈물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글과 말로는 AI보다 더 잘 외우던 사람도...

 

까궁! ’

정신 차리십시오.

 

깨달을 각()에 내 몸 궁()이다.

내 우주를 깨달아 대자유인 주인공이 되라고

옛 어른들이 가르쳐준 화두이다.

 

경전만 외우고 시간만 뚫지 말고

누가 공도이가 뭐요? 하면

 

양손을 번쩍 들어서 손뼉을 한 번 쳐 보세요.

! ’

 

이렇게라도 흉내를 내다가 보면 아하! 그렇구나.

이것이 공()도리 구나! 하면서 알아차릴 때가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