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성교수 칼럼

"여래장, 불성, 참나, 참마음을 실체가 아닌 성향 또는 가능성으로 보라. 그리고 이 성향 또는 가능성을 실재(實在)하는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개념 또는 단어로만 보라."

통융 2021. 10. 14. 17:39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8330 미디어붓다

[홍창성 철학 에세이] 9. 대승불교형이상학-비판불교를 넘어서-
"여래장, 불성, 참나, 참마음을 실체가 아닌 성향 또는 가능성으로 보라.
그리고 이 성향 또는 가능성을 실재(實在)하는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개념 또는 단어로만 보라."



본고는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사상과 선문(禪門)에서 강조해 온 ‘참나’ 및 ‘참마음’에 대한 견해를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적으로 해석해서 이 주장들이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無我 anatman non-self)와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 dependent arising)의 연장선상에 있는 교리들로 이해되어야 함을 보인다. 이를 위해 필자는 현대 분석형이상학에서 제시된 이차 개념(second-order concept) 또는 이차 지시어(second-order designator)에 대한 논증을 방법론으로 사용해 불성 및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實體)나 형이상학적 실재(實在)로 보면 안 되고 단지 개념이나 이름으로만 보아야 함을 주장한다. 대승 및 선불교의 주요 주장들에 대한 나의 유명론적 해석은 이 주장들에 대한 일본 비판불교의 반대 논점들을 철학적으로 극복해 넘어설 수 있다. 또한 남전(南傳)불교와 북전(北傳)불교를 모두 붓다의 일관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이 해석이 원효 이래 한국 불교의 이상(理想)으로 여겨져 온 회통(會通)불교를 구현하는데 일조(一助)할 것으로 기대한다.


기능적 속성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상은 나무로 되어 있다. 윗부분은 직사각형 모습이고 네 개의 다리가 버티고 있다. 톱밥으로 되어 있어 무겁고 짙은 갈색으로 칠해져 있다. 좀 작고 낡았지만 쓰기에 큰 불편은 없다. 평소 나는 이것이 책상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상의 경험에 대해 철학적이고 또 불교적인 질문을 해 보자. 이 책상을 책상이도록 만들어 주는 속성 즉 이 책상의 본질(本質 essence 또는 자성(自性))은 무엇일까?

나무가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어도 이것은 책상이다. 윗부분이 타원형이거나 다리가 셋 또는 다섯이어도 여전히 책상이다. 톱밥이 아니라 통나무로 된 고급형이고 또 갈색이 아니라 흰색이어도 책상은 책상이다. 알래스카 같이 추운 곳에서 얼음으로 둥그렇게 만들어도 책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만든 재료나 모양 또 색깔이 책상의 본질적 속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책상을 책상이게끔 해 줄까? - 그것은 통상 책상이 수행하는 기능(function)일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보통 책을 읽고 서류작업을 하는데 편리하게 사용하는 가구가 책상이다. 그것의 재질이나 빛깔 또는 모양과는 별 상관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러한 책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물체라면 모두 책상이 된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보통 책상의 기능적 속성(functional property)이 책상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모든 속성이 기능적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을 정도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이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된다. 지금 내가 작업하고 있는 컴퓨터, 쓰고 있는 펜, 차고 있는 시계, 사는 집, 자동차, 비행기, 종이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우리는 그것들의 기능을 본질로 삼아 이해한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인간이 만든 종들(artificial kinds) 뿐만 아니라 물, 금, 나무, 광물, 호랑이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종들(natural kinds)도 근본적으로 볼 때 그것들이 가진 인과적 기능(causal function)에 의해 그 속성이 결정된다. 금 같은 원소나 물 같은 분자도 각각의 구성입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 내는 인과적 기능 또는 인과적 잠재력(causal function or causal potentials)으로 그 본질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능 또는 기능적 속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기능(function)이 객관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essence) 또는 자성(自性 svabhava)이라고 무(無)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능에 대한 개념과 단어가 존재한다고 해서 존재세계에 그에 상응하는 존재자가 실제로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개념의 실체화 또는 실재화(實在化 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서 더욱 잘 조명될 수 있다.

첫째로, 내 앞에 놓여 있는 나무로 되어 있는 이 가구가 우리는 변치 않는 책상으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상은 그 모든 물리적 속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도 책상이 아닌 전혀 다른 물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덩치 큰 사람이 이것을 다른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집어 던진다면 이 물체는 더 이상 책상이 아니라 무기로 기능한다. 한편 추운 겨울에 땔감이 없어서 이것을 벽난로 속에 넣어 태우며 열을 낸다면 이 물체는 연료가 된다. 또 책상들을 모아 어떤 구조물을 만든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건축 재료가 된다. 이와 같이 내 앞에 놓인 이 물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변치 않는 고정적인 본질 또는 자성(自性)이라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예들이 기능을 어떤 물체의 본질 또는 자성으로 보기 어려운 첫째 이유다.

철학적으로 보다 중요한 둘째 이유는 기능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한 회의(懷疑)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평소 “책상(desk)”이라고 부르는 이 나무로 된 짙은 갈색의 직사각형 물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특성은 알래스카 사람들이 “책상(desk)”이라고 부르는 투명한 얼음으로 된 둥근 물체와는 그 물리적 속성이 사뭇 다르다. 예를 들어 전자는 연소가능(combustible)해서 경우에 따라 땔감도 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으며, 전자는 뜨거운 그릇을 올려놓고 밥을 먹는 밥상으로도 쓰일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게 사용될 수 없다. 이러한 여러 물리적 차이점 때문에 이 둘을 같은 책상으로 분류시키는 어떤 기능적 속성이 이 두 물체들 자체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책상의 개념과 용도에 맞추어 물체들을 찾아내거나 만들고 나서 우리가 이 물체들을 “책상”이라는 말로 부른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설명이다. 기능 또는 기능적 속성이 대상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본질적 속성 또는 자성(自性)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들을 우리의 목적에 따라 분류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성향(性向 disposition) 또는 가능성(potential)은 기능적 속성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의 연소가능성(combustibility)이란 그것이 짧은 시간에 산소와 급격히 결합하는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그런데 가솔린, 숯, 석탄, 나무, 천연가스, 수소, 그리고 다른 여러 원소(element) 등 그 원자 및 분자구조상 많은 차이점을 가진 다양한 물질들이 모두 연소가능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에 연소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어떤 공통된 물질적 토대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연소)가능성도 결국 우리가 우리의 어떤 목적을 수행해 주는 물질들을 분류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개념 또는 단어로 보아야 한다. 성향(disposition)도 마찬가지다. 열을 내려주는 성향을 가져서 해열제(antipyretic)로 사용되는 약들은 각각 상이한 분자구조를 가진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지만 ‘열을 내려주는 약’이라는 우리의 개념에 합당하기 때문에 같은 그룹에 속하는 약들로 분류된다. 이와 같이 성향이나 가능성은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되고, 위에서 논의했듯이 기능은 존재세계에 있다고 보기 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시 말해 성향이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단어로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과 비판불교론자들이 비(非)불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Buddha-Nature)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겠다. 먼저 (1) 불성을 모든 유정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유정물이 본래부처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붓다의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연기 및 공(空)의 가르침과 어긋나서 쉽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2)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달리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해석이 원래의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 Buddha-embryo 또는 the womb of the thus-come-one)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불성(佛性)이란 깨달을 수 있는 성향(性向 disposition)이나 가능성(potential)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위에서 우리는 성향이나 가능성이란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되는데 기능이란 실제로는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우리의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논의했다. 그리고 나는 여래장 및 불성을 성향이나 가능성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불성이란 결국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이나 단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형이상학은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이나 비판불교론자들이 비판하는 실체(實體) 또는 실재(實在)로서의 불성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음을 보이려 한다. 밑에서 상세한 논의를 진행하겠다.



이차 지시어(second-order designator)로서의 여래장과 불성


플라톤은 우리 세계에는 완전한 삼각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신들이 사는 천상(天上)에만 이런 삼각형이 실재(實在)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 세계의 삼각형이란 모두 이 천상의 삼각형의 불완전한 복제품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이 주장이 보편자(普遍者 universal)에 대한 실재론(實在論 realism)의 원조인데, 영원불변한 고정적 실체의 형이상학적 실재를 주장하는 플라톤류의 견해는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및 공(空)의 가르침에 위배되어 불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현대철학자들 가운데는 기능 및 성향과 가능성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자처럼 이해하며 그것들이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주장은 그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으며 오히려 불교의 견해와 가까운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유명론은 보편자로서의 기능, 성향, 그리고 가능성은 모두 이름에 불과할 뿐 그것들이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존재자의 수를 더 적게 유지하는 유명론은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의 원리(Occam’s Razor, the principle of lightness)에 더 적합하기도 하다.

이제 기능적 속성을 이차 개념 또는 이차 지시어로 보아야 하는 철학적 이유를 살펴보겠다. 현재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 캠페인이 한창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어떤 이가 “나 미국 대통령 후보 한 사람을 안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런데 정치에 대체로 무관심한 이 사람은 그 후보의 이름을 모른다. 현재 미국 대통령 후보가 버니 샌더스, 힐러리 클린턴, 테드 크루즈,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네 명밖에 없다고 가정한다면, 이 사람이 안다는 후보는 이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미국 대통령 후보’가 이 네 명의 후보와는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인가 하는 문제이다. {버니 샌더스, 힐러리 클린턴, 테드 크루즈, 도널드 트럼프}라는 집합의 한 원소가 아니고 이 네 후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미국 대통령 후보’가 존재할 수 있는가? - 그럴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모두 다섯 명의 후보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네 명밖에 없고, 따라서 ‘미국 대통령 후보’는 독립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표현은 위의 집합 안에 존재하는 네 명의 후보들 가운데 한 명을 골라내어 지시해 줄 뿐이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지시어는 “버니 샌더스”나 “테드 크루즈”와 같이 버니 샌더스와 테드 크루즈를 직접 지시하는 일차(一次) 지시어와는 다른 형태의 지시어이다.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표현은 그 고유한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일차 지시어(first-order designator)가 아니라 위의 집합에서 어떤 한 후보를 그때그때 경우마다 편리하게 골라내어 간접적으로 지시해 주는 이차(二次) 지시어(second-order designator)로 보아야 한다. 이 사람이 알고 있는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그의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이차 지시어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시할 것이고,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라면 그의 이차 지시어는 트럼프를 지시한다.





강원도 철원에 소재한 주식회사 그래미 '남종현센터'에 설치된 인공 무지개 모습.

원색(primary color)에도 위에서와 마찬가지 관점이 적용된다. 화가들에게 “원색”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색깔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 가운데 하나를 그때그때 골라내어 지시하는 이차 지시어다. ‘원색’이라는 하나의 색깔은 없다. 그래서 “원색”이라는 말은 그 고유한 지시대상이 없기 때문에, ‘원색’을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원색”이라는 단어가 빨강, 노랑, 파랑 가운데 하나를 그때그때마다 알맞게 골라내어 지시하는 이차 지시어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원색”이라는 단어가 골라내는 그때그때마다 다른 색깔들일 뿐 하나의 ‘원색’이라는 색깔이 아니다. 위에서의 ‘미국 대통령 후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다.

책상, 펜, 엔진 등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이 그 물체들의 본질이라고 여겨져 온 것들에도 위에서와 같은 관점이 적용된다. “책상”이라는 말은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 책상, 알래스카에 있는 얼음 책상, 그리고 화성인들이 쓰고 있을지도 모를 실리콘 책상을 그때그때 그 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주어진 대상을 지시하게 된다. 이런 모든 책상들에 공통된 어떤 객관적인 물리적 속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책상”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어떤 물리적 속성도 없다. ‘책상’이란 단지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 놓은 개념일 뿐이며, 우리는 이 개념에 해당되는 구체적인 물체를 이 “책상”이라는 말로 그때그때 편리에 따라 지시할 뿐이다. 그래서 “책상”이라는 표현 또한 이차 지시어이다. 그리고 ‘책상’은 시공(時空)을 벗어난 어떤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다. 이렇게 기능을 기능적 개념 또는 지시어로 이해하는 관점은 모든 성향과 가능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향과 가능성을 표현하는 모든 단어들은 그것들이 직접 지시하는 고유한 대상이 없고 실제로는 이 성향과 가능성을 실현시켜주는 각각 다른 물질적 토대를 그때그때 지시해 주는 이차 지시어들일 뿐이다. 수면제가 가지고 있는 ‘수면성(dormitivity)’은 제품에 따라 시코날 또는 다이어제팜이라는 화학물질에 의해 실현된다. 그래서 “수면성”이라는 단어가 직접 지시하는 추상적인 성향은 존재하지 않지만 수면성은 각각 주어진 수면제를 구성하고 있는 화학물질에 의해 실현된다. 진통해열제로 시중에 판매되는 애드빌이나 타일레놀도 각기 다른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것들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이 각각의 화학약품에 의해 그 진통해열성이 실현된다. 그래서 “수면성”과 “진통해열”이라는 단어들은 그 고유한 속성을 존재세계에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수면성과 진통해열 각각을 실현시켜주는 물리적 토대들을 그때그때 간접적으로 골라내어 지시해 주는 이차 지시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향이나 가능성과 같은 기능적 속성들은 실제로는 존재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말들이 이차 개념 또는 이차 지시어로 사용될 뿐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선호하는 기능적 속성들에 대한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입장이다. 이제 유명론의 관점으로 여래장과 불성을 이해해 보겠다.

위에서 여래장과 불성을 성향 또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무상과 무아 그리고 연기와 공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 불성이 어떤 영구불변의 고정된 본질 또는 자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여래장’과 ‘불성’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대상이 존재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단지 “여래장”과 “불성”이라는 말을 여래장과 불성이라는 가능성과 성향을 실현시켜주는 몸과 마음의 그때그때마다 다른 토대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이차 지시어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서의 여래장이나 불성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 한다.

자연과학과 공학이 발달한 21세기에 우리는 인간의 인식과 실천을 주관하는 모든 의식의 존재론적 토대가 뇌(brain)라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대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서의 여래장이나 불성도 뇌에 있는 어떤 물리적 현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이차 개념 또는 이차 지시어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현대 심리철학과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수많은 사람마다 그 뇌의 구조와 작용방식이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이 모든 사람들의 뇌에 공통된 물리적 구조나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뿐 아니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온갖 다양한 유정물들과 또 존재 가능할지도 모를 외계인들의 뇌의 구조와 현상을 고려해 본다면 이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정물에 공통된, ‘깨달을 가능성’을 실현하는 보편적인 물리적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성”이나 “여래장”이라는 말은 유정물마다 각기 다른 뇌의 물리적 토대를 그때그때마다 주어진 상황에서 편리하게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차 지시어일 따름이다. “불성”이나 “여래장”이라는 같은 말들을 여러 상이한 물리적 토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세계에 이 말들에 해당되는 변치 않는 고정된 대상이나 속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불성과 여래장은 고정된 자성을 가진 독립적 존재자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미국 대통령 후보’와 같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고 경우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대상을 지시하는 이차 개념 또는 이차 지시어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불성의 토대가 되는 뇌의 구조와 현상도 자성이 없이 생멸하는 연기 세계의 일부로서 공(空)의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 결국 “여래장”이나 “불성”이라는 말은 여래장이나 불성을 실현시켜주는 그때그때마다 사람(또는 유정물)에 따라 다른 뇌의 물리적 구조와 현상을 (공(空)한 현상을) 간접적으로 지시해 주는 이차 지시어들이다. 여래장과 불성에 대한 이러한 유명론적 해석은 여래장과 불성 사상이 붓다의 연기와 공의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1세기 철학의 주류인 물리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불교가 물리주의가 아니라 물질과 정신의 존재 모두를 인정하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라며 위에서 전개된 설명과 주장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붓다는 인간존재를 물질과 네 가지 정신적 요소의 결합(오온 五蘊 Five Aggregates)으로도 가르쳤고, 또 속성개별자(property trope)로서의 다르마(dharma 法)를 존재세계의 가장 기본적 단위로 보는 아비달마론도 반(反)물리주의(anti-physicalism)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물질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유식론은 반물리주의의 극단이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존재론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그러나 이런 존재론들에서도 성향 또는 가능성으로서의 불성과 여래장이 모든 유정물들에 공통된 어떤 영원불변한 고정된 속성 또는 자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도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불성”과 “여래장”이라는 단어들은 각각의 유정물마다 다르고 또 한 유정물에서도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심신(心身)의 또는 의식의 다른 상태(state)들을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가리켜 주는 이차 지시어로 이해함이 옳겠다. 이런 상태들은 물론 깨달음을 실현하는데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하겠다. 그리고 오온(五蘊)이나 다르마 그리고 모든 의식의 상태들은 연기의 그물 안에 걸려 있어서 자성(自性)을 결여한 채 공(空)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여래장 및 불성 사상을 유명론(唯名論)적으로 이해한다면 불성 사상을 유식론뿐 아니라 초기불교와 아비달마론에 대해서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성은 연기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어떤 고유한 본성을 가진 존재자가 아니며 “불성”이라는 말은 불성을 실현시켜주는 심신(心身)의 토대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토대가 오온이든 다르마이든 아니면 순수히 의식의 상태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지시되는 온갖 다양한 심신의 토대들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연기로 생멸하며 공(空)한 채로만 존재한다. 이와 같이 나는 내가 이 에세이에서 전개하고 있는 유명론적 대승불교형이상학이 남전(南傳) 불교를 비롯해 내가 아는 불교의 모든 학파에 여래장 및 불성 사상이 이론적 마찰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불성 사상은 다른 학파들의 주장들과 잘 조화될 수 있으며 그들 가르침의 체계와 내용을 더 세련되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불성”과 “여래장”이라는 말은 결국 유정물들에 있어서 깨달음을 가져오는 심신의 온갖 다양한 토대들을 그때그때마다 달리 지시하는 단어들이며, 이 극히 다양한 토대들은 모두 연기의 그물 안에서 생멸하고 있어서 자성(自性)을 결여한 채 공(空)함은 굳이 더 논의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 대승불교형이상학은 연기와 공의 가르침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오히려 대승불교가 ‘여래장’ 또는 ‘불성’이라는 단순화된 개념으로 여러 복잡 다양한 심신의 토대들을 경우에 따라 쉽게 골라내어 지시할 수 있게 해 주는 편리한 장치를 추가로 제공하고 있다고 판단함이 공정(公正)하겠다. 여기서 이 개념들을 편리한 장치로 이해함이 마땅함은 이 둘이 불교의 소중한 자산인 ‘방편(方便)’의 좋은 예들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방편으로만 여겨져야 할 이차 지시어 또는 이차 개념으로서의 여래장과 불성을 마치 그것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실재(實在)하는 고정불변한 어떤 본성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개념의 실체화 또는 실재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상 대승불교의 여러 학파들이 위와 같은 실재화의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승의 모든 학파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며, 또 일부 학파들이 한 동안 범한 논리적 오류 문제 때문에 우리의 언어 사용을 위해 편리하고 또한 매우 불교적인 방편적 도구로서의 여래장과 불성 사상을 불교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나는 반대한다. 비판불교론자들의 ‘비판’은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파괴적인 ‘비난’에 가깝게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유명론적으로 접근하는 대승불교형이상학으로 비판불교의 반대 논점들을 극복하고 한국불교의 이상(理想)인 회통(會通) 불교를 향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차 지시어로서의 참나와 참마음


선문(禪門)에서 가르쳐 온 참나와 참마음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 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중국에서 불교 도입 초기에 중국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한 도교(道敎)의 체(體)와 용(用)의 개념 때문에 동아시아 대승불교에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 혼란의 자취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나는 이제 우리가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속성들의 존재 기반이 되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는 불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연과학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상식에 의해 보아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그런 독립적 존재자는 없다. 또한 17세기 뉴튼의 물리학 이래로 형성되어 온 우리의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볼 때 아무런 기체(基體 substratum)의 존재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대상이 소립자들로 되어 있고 각 소립자들도 에너지와 다른 소립자들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은 이제 우리의 상식이다. 존재자는 기체가 없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각 속성들도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로부터만 즉 연기의 관점에서만 그 존재가 이해된다.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브라흐만, 또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같은 실체 또는 기체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연기로 존재세계를 이해하는 불교나 우리 21세기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실체나 기체의 존재를 더 이상 이야기할 이유가 없다. 실체 또는 기체로서의 참나나 참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미국 대학에서 학부 교양 철학개론의 한 주제로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자아(自我 Self 참나 참마음)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이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곤 한다. 거의 모든 학생이 독실한 기독교인인 내 대학에서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흄의 철학을 가르치기는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일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일에든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지만, 어린 대학생들이라면 종교문제에 관련해서는 누구 못지않게 감정적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은 자아가 있다면 우리의 몸 안에 있을 수는 없겠고 의식 안에 존재할 것이라면서 한번 눈을 감고 의식의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며 자아를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물론 우리는 의식 안에서 스스로의 자아와 직접 마주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아 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논의가 진행되면 나의 기독교인 학생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몇 학생이 반론을 제기한다. 의식 속을 관찰하는 그 주체가 바로 나의 자아 또는 영혼(참나 또는 참마음)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다. 그러나 곧 생물학이나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반박을 시도한다. 자아의 존재에 대한 느낌 또는 ‘환상’은 뇌신경학으로 충분히 설명되며, 뇌에는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고유한 부분조차 없고 일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다른 부분으로 옮겨가곤 한다고들 한다. 결국 고정불변한 자아의 물리적 토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컴퓨터 공학 전공 학생들은 컴퓨터의 자기 모니터링 (self-monitoring) 기능을 예로 내세우면서 스스로의 의식을 관찰하는 의식이 있다고 해서 자아(참나)나 영혼(참마음?)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 이 자기 모니터링 기능조차도 다른 기능에 의해 관찰될 수 있다고도 한다. 마음의 자기 모니터링 기능은 경기 때마다 주장(captain)을 바꾸어 뛰는 농구팀 같이 생각하면 될 것이다. 농구팀이 있다고 해서 그 팀을 언제나 이끄는 고정된 캡틴이 있을 필요가 없듯이, 자기 모니터링 기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전담하는 고유한 실체(참나, 참마음)가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반박을 제기하는 학생들은 자기 모니터링 기능을 언급하면서 참나와 참마음의 존재를 주장하는 논증들이 솔직히 좀 의외라고들 생각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실체성과 기체성을 인정하지만 않는다면 선문(禪門)에서 참나와 참마음을 이야기하는데 그다지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은 여러 다양한 상태(state)를 겪으며 변화하고 있고 이런 상태들 가운데는 아무래도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자비행에 이르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의식의 상태들이 있기 마련이겠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의식의 여러 상태들이 모두 질적(質的)으로 동일해서 이 모두에게 공통된 어떤 고유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공(空) 사상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선문(禪門)에서 그 풍요로운 전통으로 전해 주고 있는 온갖 다양한 경로의 의식 상태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야기의 가르침과도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다양한 의식의 상태들을 그때그때마다 사람에 따라 달리 지시하는 편리한 이차 지시어로서의 “참나”와 “참마음”을 유용한 방편적 도구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침묵하며 좌선(坐禪)하던 학인의 깨달음을 가져 온 그의 의식의 상태로서의 참마음과, 임제의 고함소리에 문득 깨달았을 당시 젊은 스님의 마음(의식) 상태, 그리고 덕산의 몽둥이질에 깨달은 사람의 마음(의식) 상태는 질적으로 모두 다르겠지만, 우리는 “참마음”이라는 같은 단어로 이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각각의 경우에 따라 적절히 지시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이차 지시어들은 버릴 이유가 없는 편리한 도구들이다. 또 한편, 한번 깨달은 이들의 의식상태가 깨달음 이후에도 계속 변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연기와 공(空)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의 다양한 의식 상태가 모두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실현 및 유지시키는 것들이라면 이들 모두가 참나를 찾았고 또 참마음을 제대로 계속 지니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래서 고정된 본성 또는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의 참나와 참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깨달음을 실현하고 유지시켜주는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마다 간접적으로 지시해 주는 이차 지시어로서의 “참나”와 “참마음”은 존재하며 또 그것들은 선문의 가르침을 위한 훌륭한 방편으로 간주될 만하다.

내가 이번 에세이에서 주장하는 유명론적 대승불교형이상학에 의하면 실체 또는 기체로서의 참나와 참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이차 지시어들은 깨달음을 가져오고 유지시키는 그때그때의 다양한 의식 또는 의식의 흐름을 가리키는 편리한 방편들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말이 있으면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이 존재세계에도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참나’와 ‘참마음’의 개념에 실재성(reality)을 부과해서 참나와 참마음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체화 또는 실재화(reification)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선문의 가르침을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 및 비판불교론자들의 논점에 취약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즉 이차 지시어로서만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이와 같이 참나와 참마음을 유명론(唯名論)적으로 해석하면 참나와 참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체성을 인정할 필요가 없고 또 아뜨만이나 영혼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실재성을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가리키는 다양한 의식의 상태들은 모두 연기에 의해 생멸하며 자성이 없이 공(空)하기 때문에, 선문의 참나와 참마음에 대한 가르침이 불교의 다른 학파들 안에도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라는 개념은, 그것에서 실체성이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제거하기만 하면, 대승과 선불교의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해 주면서도 그 가르침을 더 효과적으로 전해 줄 수 있는 좋은 방편적 도구가 될 수 있겠다. 나는 유명론적 대승불교형이상학이라는 방패가 비판불교가 선불교에 대해 겨누는 날카로운 칼을 부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적 회통(會通)불교를 향하여


지난달에 발표한 나의 <깨달음과 열반, 그리고 자비행>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불교에 소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고 논의함으로써 남전(南傳)불교와 북전(北傳)불교가 모두 자비행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을 보이려 했다. 그래서 자비를 실천하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있어서 두 전통이 실은 회통하고 화쟁을 이룬다는 것을 보였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서는 대승과 선문의 가르침을 유명론적으로 해석하면서 형이상학적 교리에 있어서도 대승과 선문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여래장과 불성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이 모두 붓다의 무아(無我)와 연기(緣起) 및 공(空)의 가르침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이려 했다. 말하자면 대승 및 선의 가르침이 붓다의 기본 가르침들이 보여주는 넓은 스펙트럼의 다른 부분들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대승불교형이상학의 유명론적 해석이 한국불교의 이상(理想)인 회통(會通)불교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보며, 이런 유명론적 회통불교는 일본 비판불교의 가혹한 논점들을 극복하며 여러 불교학파간의 화쟁(和諍)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