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성교수 칼럼

[홍창성 철학 에세이] 7. 말로 깨우치는 선(禪)

통융 2021. 10. 14. 17:32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7955 미디어붓다

[홍창성 철학 에세이] 7. 말로 깨우치는 선(禪)
의식이 없는 모든 것은 깨달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부처는 아니다






말로 깨우치는 선(禪)*
(*본고는 필자가 2005년 가을 미국철학회 회보에 발표한 “How to Teach Zen in a College Classroom”을 수정 및 보완해서 완성했다. “말로 깨우치는 선(禪)”에서 ‘선(禪)’이란 엄밀히는 ‘간화선(看話禪)’을 의미한다.)


전설에 따르면 부처는 “진리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단지 말없이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임으로써 답했다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모인 많은 청중은 모두 이 뜻밖의 답변에 어리둥절했다. 제자 가운데 오직 가섭만이 부처의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고는 살며시 웃음 지었다. 이 유명한 일화는 진리를 말없이 가르치고 깨우친다는 선(禪) 전통의 기원으로 여겨져 왔다.

이 ‘無言(무언)’의 가르침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전수하려는 시도는 물론 신명나기야 하겠지만 어려운 강의가 될 것임이 자명하다. 강의실에서는 말로 요점을 설명하고 질문과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설명과 질문 및 토론을 모두 없애야 깨달을 수 있다는 선의 진리를 어떻게 강의실에서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부 불교도들은 진리에 대한 어떤 개념적 접근도 인정하지 않는 선의 전통을 고려하면, 선의 가르침을 말로 설명하려는 생각과 시도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는 언뜻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해 낼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실은 부처도 무수히 많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다양한 方便(방편)을 사용했다.



무언의 진리를 말로 가르치려는 생각이 모순일 것 같지만, 만약 이 시도가 불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는 서양 (미국) 학생들이 ‘깨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생각이 전혀 모순일 이유가 없겠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방편을 사용할 기회가 한번이라도 주어진다면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다. 십칠 년 전 필자는 오직 무모한 젊은이라야 선택할 방식으로 이런 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필자가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칠 무렵 분석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현대인식론을 강의할 교수직에 지원해서 미네소타 주에 있는 한 대학에서 총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이 때 보여 준 필자의 시범 강의의 주제로 禪(선) 이야기를 골랐다. 청중 안에 불교를 많이 알고 있을 교수나 학생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그들이 현대 철학인 분석철학만을 강의할 지원자의 강의 능력을 관찰하고 평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어서 더욱 그랬다. 내게 주어진 도전은 이 서양인들에게 禪(선)의 無言(무언)의 진리를 ‘말’이라는 방편을 사용해서 주어진 50분 안에 그들이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언의 진리를 말로 가르친 필자의 방편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어쨌든 청중 속에 있었던 교수들의 추천으로 교수직을 얻었고 – 물론 필자의 방편이 그들을 깨닫게 해 주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아직도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시범 강의는 지원자의 입장에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긴장 속에서 진행되기 십상이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실제로 무척 재미있고 신명난 경험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강의실에서 禪(선)을 가르치거나 가르치려는 다른 미국 철학자들과도 이 경험을 나눌 기회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시범 강의를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 놀라지 말기 바란다. 禪을 전혀 모르는 분들 특히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이었을 테니까. 필자가 강의 제목으로 제시한 것은 <부처가 왜 개똥인가>였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강의했다. 옛날 옛적 고대 한국에 유명한 禪僧(선승)이 있었다. 어느 날 그의 제자가 “스님,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선승이 답하기를, “개똥이다!” 표면상으로만 볼 때 이 대화는 무척 아리송하고 또 우리를 당황하게도 만든다. 도대체 어떻게 부처가 개똥이란 말인가? 선승과 제자는 둘 다 불교 승려여서 이 유명한 선승이 제자에게 부처를 모독하는 가르침을 주었을 리는 만무하겠다. 그러나 분명 선승의 답변은 부처가 개똥임을 의미하고 있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禪에는 이와 같이 아리송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禪의 가르침을 수많은 농담과 재밋거리, 그리고 한바탕 웃음과 함께 배워왔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위의 이야기 어디에도 부처에 대한 모독이 시도된 곳은 없다는 점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어떤 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면 그가 의미하는 것은 손가락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禪 전통에 가득한 어리둥절한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들을 표현하는 문장의 문법적 특성과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예를 들어 위의 禪僧의 답변은 “개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위의 대화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 대화 그 자체를 보고 분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강의의 목적도 표면 구조상으로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아리송한 禪問答(선문답)을 그래도 의미 있는 대화로 보이게끔 이해하도록 돕자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미국 학생들을 상대로 禪의 정수를 가르치려면 먼저 불교의 기본 원리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 불교의 철학적 가르침을 논의하기에 앞서 필자는 어느 강의에서나 학생들에게 불교에 대해 아무 것이라도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어 본다. 대부분의 경우 그다지 대답들이 없다. 학생들은 달라이 라마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배불뚝이 부처(실은 부처가 아니지만)나 명상 등을 언급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그러면 필자는 다시 “부처”라는 말의 의미를 아느냐고 질문해 본다. 이번에는 거의 언제나 아무 반응 없이 그저 침묵이 흐른다. 그러면 필자 스스로 학생들에게 답을 준다. “부처”란 말은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고. 語源(어원)을 따지자면 이것이 옳은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적으로 좋은 답변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면 부처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냐고 다시금 질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된 것인가?

부처가 깨달은 것은 스스로의 삶과 존재 세계에 대한 진리이겠다. 그의 가장 초기 설법의 내용들로 미루어 유추해 보면 그의 깨달음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이 존재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고 (2) 이러한 불행의 원인은 우리의 渴愛(갈애)와 그에 대한 집착이지만 (3) 이런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근본적인 불행을 피할 수 있는데 (4) 그런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것이 부처가 깨달은 四聖諦(사성제 Noble Fourfold Truth)이다. 이 사성제는 불교의 모든 학파가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어서, 비록 禪 전통이 가진 특색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강의에 주어진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좀 더 주의 깊게 논의할 가치가 있다.

사성제의 첫째 가르침은 존재 세계와 그 안의 우리 삶에는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많은 중요한 측면들이 고통스런 경험들로 얼룩지어 있다. 출생은 산모와 아기 모두에게 분명 무척 고통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젊은 날은 짧고 우리는 어느덧 늙어 간다. 노화는 병과 쇠약함도 가져온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죽게 된다. 윤회가 있다면 죽음도 끝이 아니어서 출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 아무도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삶의 단계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렇게 生老病死(생로병사)와 같은 실존적인 문제들과 함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고통스런 일들도 많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며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없다 –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종종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고, 우리 또는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서로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부모와 떨어져 지내며 학교에 다니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부모를 잃었는가. 이것은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결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다. 참으로 불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같은 동전의 다른 측면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 우리는 종종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문제가 있다. 거의 모든 학생이 룸메이트들과 안 좋은 경험이 있을 테니 이와 같이 불만족스러운 삶의 단면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로 가득 찬 나치 독일에서 살아야만 했던 유태인들이 어떻게 느꼈을 것인가를 한번 상상만 해 보라. 더 이상 예를 들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위의 가르침의 요점은 삶과 존재 세계가 문제에 가득 차 있기만 하다는 어떤 염세주의적 관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삶의 불만족스러운 면을 개선할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그런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함을 일단 용기 있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는 더 나아가 이 불행의 원인을 분석하고 우리의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바로 지나친 욕구와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이 사성제의 두 번째 가르침이다. 그런데 욕구와 집착이 우리 불행의 근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다소 어설프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행복의 공식이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행복 = 충족 / 욕구 (집착). 행복은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생겨난다. 만일 같은 양의 욕구를 유지한다면 그 욕구를 더 많이 또는 더 잘 충족하여야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욕구를 더 충족할 수 없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 충족량을 줄여야 하게 되면, 우리가 전과 같은 수준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욕구를 더 늘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줄이려 해야 한다. 그리고 부처는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언제나 불필요하거나 지나친 욕구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 세상에 있는 물자와 서비스는 언제나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서 점증하는 우리의 욕구를 끊임없이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조차도 가지고 있다 – 예를 들어, 노화와 병, 그리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그런 것들이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는 이런 욕구들을 가지지 말아야 함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어떤 이가 그의 욕구나 집착을 많이도 줄여서 거의 無(무)에 가까이 갈 정도가 되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그러면 위의 공식에 따라 그의 행복은 거의 무한대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욕구와 집착을 완전히 제거한 부처를 묘사한 조각이나 그림을 보면 부처가 언제나 신비로운 悅樂(열락)의 미소를 짓고 있음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삶의 불만족스러움을 그것의 원인인 욕구와 그 대상에의 집착을 제거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는 것이 사성제의 세 번째 가르침이다. 사성제의 마지막 네 번째 가르침은 이런 욕구와 집착을 제거할 효과적인 길이 있다는 것인데, 이 방법으로 부처가 제시한 것이 바로 八正道(팔정도 Noble Eightfold Path)이다. 주어진 시간의 제약이 있어 이 여덟 가지 올바르게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 가르침의 요점은 올바른 지혜를 닦아 올바른 덕을 갖추고 올바르게 명상하며 수행하면 불필요하고 지나친 욕구와 집착이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고뇌로부터 벗어난 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사성제는 부처가 득도한 후 행한 첫 설법의 내용이며 불교의 모든 학파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禪 전통의 철학적 기초와 밀접히 연관된 부처의 가르침은 실은 無常(무상)과 緣起(연기)의 가르침들이다. 무상의 가르침은 고대 희랍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과 비유될 만하다. 이 세상 아무 것도 같은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좋은 예를 제시하며 이 점을 선명히 설명한다.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있을까? - 그럴 수 없다. 강은 물로 가득 차 있고, 그 물은 쉼 없이 흐르며, 두 번 다시 같은 강바닥 위의 같은 물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비록 우리는 예를 들어 “미시시피 강”과 같은 동일한 이름으로 어떤 강을 지속적으로 지칭하기에 동일한 강이 한 곳에 오랫동안 흐른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남아있는 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체라도 그 (소립자까지 포함하는) 구성 입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다른 곳으로 나가기도 하고 이 물체 안으로 다른 입자들이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에 동일한 물체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 또한 그 속에 언제나 상이한 믿음과 생각들이 오고 가기 때문에 한시라도 변치 않고 같은 마음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불교는 어느 찰나에도 동일하게 남아 있는 존재자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어느 것에라도 마치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서 그것에 집착함은 단지 無知(무지)의 소치일 뿐이라고 경계한다. 이렇게 無常(무상)의 가르침은 우리의 집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준다.

禪 전통과 더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또 더 흥미로운 부처의 가르침은 緣起(연기)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관되어 생성 지속 소멸한다. 이 가르침은 원래 모든 것이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성 변화한다는 因果(인과) 관계 (causal relation)를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존재 세계의 어떤 것도 인과의 그물에 속해 있어서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스스로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된다. 연기가 단지 이런 인과 관계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그렇게까지 놀랍거나 신기할 이유는 없겠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로 퍼져 나가면서 연기의 가르침은 여러 학파에 의해 그 적용되는 外延(외연)이 무한으로 확장되며 철저히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예를 하나 들어 이 새로운 해석의 특성을 설명해 보겠다. 필자는 지금 미국 중부지역에 있고 이곳 시간은 오후 두 시다. 그러면 중국은 새벽 네 시경이 되겠다. 지금 현재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중국에 시장기를 못 참아서 찐만두를 허겁지겁 먹고 있을 중국인이 최소한 한 명은 있을까? 중국은 지금 야심한 시각이지만 독자와 필자 모두 중국의 거대한 인구를 고려해 보면 지금 배가 무척 고파 찐만두를 급히 먹고 있을 중국인이 최소한 한 명은 분명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내용을 우리의 의식에 뚜렷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인식론에서는 이런 믿음을 성향적 믿음(dispositonal belief)이라고 한다.) 필자는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 찐만두를 먹고 있는 중국인이 있다는 믿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그를 지구 반대편에 가지고 있다는 방식으로 그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이 중국인이 찐만두를 너무 급하게 먹다가 갑자기 목에 걸려 뜻밖에 질식사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필자는 필자가 가진 여러 속성들 가운데 지구 반대편에 이 중국인을 가지고 있다는 속성을 하나 잃게 된다. 필자에게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 사람의 존재를 전혀 의식한 적조차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기술한 방식대로 필자가 이 사람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이런 관계가 인과적 관계는 아니지만 우리가 이런 종류의 관계도 존재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로 포함시킨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생성 변화함이 분명해 진다. 다른 은하계에 있는 작은 별에 돌 하나가 굴러도 그것이 나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 돌에 일어나는 변화가 나의 변화의 일부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조명해 보면 禪 전통에서 유명한 다음의 詩(시) 구절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풀잎 끝에 달린 아침 이슬 한 방울에 삼천대천세계가 다 들어가 있다” -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존재 세계의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연관되어 서로 철저히 삼투(滲透)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부처는 위에서 논의한 無常(무상)의 요지도 연기로부터 설명된다고 가르친다.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서만 생성 지속 소멸하니 어느 존재자에나 그것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들이 있는데 그 중 최소한 하나는 변하고 있을 테니 그 주어진 존재자도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無常의 가르침은 연기의 요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기도 하다. 한편 연기의 가르침은 그 유명한 空(공)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오직 서로 연관되어서만 생멸한다. 그래서 어떤 존재자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또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니 그 스스로의 본질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스스로 실체와 본질이 없어 空한 것이다. 그런데 이 空은 새로이 발견되어야 하는 어떤 신비로운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알고 지내온 모든 사물의 存在 樣相(존재 양상 mode of existence)일 뿐이다. 예를 들어 지금 독자 앞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테이블은 다른 존재자들과는 아무 의존관계도 없이 존재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이 테이블은 다른 존재자들과 뚝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을 독립적 실체로 존재하게 해 줄 테이블의 영원한 본질 같은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無인 것도 아니다. 독립적 실체는 아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생멸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無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들은 독립적 실체와 無 사이 어디엔가 妙(묘)하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물의 존재 양상이 空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런데 원래 사물의 존재양상(mode of existence)을 일컫는 이름으로 “空”이라는 단어가 생겨났지만 나중에 시간이 많이 경과하면서 空이 만물의 존재 그 자체라면서 空에 實在性(실재성 reality)이 부과되며 實體化(실체화 reification)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학파들에서 “空”이라는 이름이 모든 사물의 실재성을 지칭하게까지 되었다. 이런 학파들은 존재 세계의 모든 것에서 空을 보았으며, 결국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空과 동일시하게까지도 되었다. 그래서 空이 존재자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실재하는 것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다. 그리고 부처는 空의 진리를 깨달았기에 부처가 되었다. 그래서 空이야말로 바로 부처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 부처가 空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는 위의 조잡한 추론 과정에서 수많은 논리적 오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본고의 주제와 거리가 있어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는 없지만, 위 단락 요점들의 轉移(전이 transition)에는 용납할 수 없는 많은 논리적 비약과 문제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空은 원래 존재의 양상을 기술하는 표현이었는데 이 空이 존재자 자체와 동일시됨은 분명 잘못이다. 책상이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책상과 직사각형이 동일한 것이 아니듯이, 존재자 자체와 그것의 존재 양상인 空을 동일시함은 명백한 오류다. 더욱이 空의 가르침을 이끌어 내는 緣起의 가르침이 부처 자신까지를 포함해 어떤 존재자에도 본질이 존재함을 부정하고 있는데도 부처의 본질이 空이라고 주장함은 단적으로 논리적 모순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여러 학파들이 위의 조잡한 추론을 받아들여 이 세상 모든 사물의 본질이 空이라고 주장했음 또한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空이고 空이 바로 부처의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이미 부처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佛性(불성 Buddha-Nature)을 가지고 있다. 이 학파들은 그들이 보는 모든 사물에서 부처를 보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개똥 한 조각에조차도 불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 주장들이 필자가 이 강의의 서두에서 소개한 아리송한 대화를 해석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개똥 한 조각처럼 쓸모없는 사물에조차도 부처가 깃들어 있다!” 역사상에는 이 대화에 대해 이토록 당혹스런 해석과 일치하는 견해를 가진 학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 불교도들은 이런 해석을 실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런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1) 이 해석은 위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너무도 오류가 많은 추론을 토대로 한 견해와만 양립가능하고, (2) 이 해석은 부처에게 그의 연기론이 스스로 부정하는 어떤 본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또 (3) 필자가 보기에 禪 전통에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다른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禪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당혹스런 대화를 더 잘 이해하도록 시도해 보겠다.

禪 전통에 있어서도 많은 불교도들이 모든 사물에서 각각의 모든 순간순간 空을 보았다. 연기가 바로 존재의 양상이고 부처를 포함해 모든 것이 空하다. 그래서 空을 이해함이 부처나 보살과 같은 깨달은 존재자들을 이해함의 열쇠다. 그러나 空을 파악하기 위해 부처나 보살을 직접 만나 설법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空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물도 어느 순간에나 깨달음을 위한 도구로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단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도 숨쉬기가 그 자체로 空함을 알기만 하면 우리는 깨달음과 열반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아침을 열심히 잘 먹는 것도 불성을 실현해 내는 행위다; 한 잔의 향기로운 차 속에도, 일단 이해하기만 하면, 부처들이 가득하다; 형언할 수 없는 보름달의 아름다움에 충격 받아 즉시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坐禪(좌선)은 깨달음을 얻게 도와주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禪 전통에서의 이 모든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용수(龍樹 Nagarjuna)의 유명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겠다: 윤회(이 속세에서의 삶)가 바로 열반(깨달아서 고뇌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머묾)이다. 속세의 삶 자체가 실은 열반의 삶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궁극의 空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깨달음도 지금 바로 여기 모든 곳에 있는 것들이 다른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존재하고 있다. 한편 이런 직관과 관련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문화적으로 무척 매력적인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禪의 문화가 空의 관점을 道敎(도교)의 가르침과 조화시켜 동아시아 사람들이 자연 사랑하는 마음을 크게 북돋아 준 것이었다. 자연의 구석구석이 부처로 가득 차 있다면 어찌 누구라도 자연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를 하나 들겠다.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에는 오직 소수의 동아시아 계통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가을에 단풍이 한창일 때 미국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답다는 뉴햄프셔의 화이트마운틴에 가보면 관광객의 태반이 동아시아 계통 사람들인 것을 곧 알아차리게 된다. 이들은 일 년 중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가장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禪의 전통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일찍 뿌리를 내렸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환경 문제가 훨씬 덜 심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禪 전통 대부분의 학파들은 단지 모든 존재의 양상이 空의 진리를 보여준다고 해서 개똥 조각과 같은 물체조차 부처라고 하지는 않는다.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으려면 그 당사자는 의식이 있는 지적인 존재자야만 한다. 의식이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은 깨달음을 위한 도구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 자체가 부처는 아니다. ‘마법과 같은’ 이상한 형이상학으로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지 않으려면, 필자는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한다. 개똥이 부처일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우리 강의의 첫머리에 소개된 어리둥절한 대화를 이해하려면 다른 해석을 찾아보아야 한다.

선 전통은 그 교육상의 목적으로 흥미롭지만 一見(일견) 아리송하고 당혹스런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 내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다. 禪師(선사)가 일군의 학생들에게 묻기를, “고요한 연못 위에 달이 비치어 있다. 그것이 물이냐 아니면 달이냐?” 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한 학생이 대답하기를, “스님, 어젯밤 남쪽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았습니다.” 선사는 “옳거니!”하고 손뼉 쳤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남쪽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는 것이 불가능함을 안다. 그런데 왜 선사는 학생의 엉뚱한 답변을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을까? 이 또한 무척 어리둥절한 대화인데, 선사의 질문은 실은 학생들이 답변을 구하려 용맹정진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고안된 것이다. 이렇게 아리송한 질문들은 전통적으로 公案(공안) 또는 話頭(화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이것들을 좀 더 쉽게 “禪 수수께끼(Zen riddle)”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이런 수수께끼들을 풀려고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를 오랜 시간 동안 무척 고통스러울 정도로 노력하게 되어 있다 – 역설적이게도, 답이 없다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제는 서구에도 禪 전통에서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떨어버리는 坐禪(좌선 sitting meditation)이 중요함이 잘 알려져 있다. 마음속에 어떤 특정한 생각을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은 모든 생각을 털어 버리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지우는 일은 극히 어렵다. 한번 한 순간이라도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해 보라. 독자는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선 전통에서는 진리 그 자체인 空을 파악하고 경험하기 위해서 이 좌선 명상법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고 여겨져 왔다. 한편 대승 전통에서 연기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그 스스로부터 나올 수는 없어서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만 生起(생기)하고 유지되며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서로 철저히 滲透(삼투 inter-penetrate)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필연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사물 (또는 사물의 그룹)을 다른 모든 것들과 구분하려는 시도는 불가피하게 부처의 연기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된다. 이런 시도는 우리의 시야로부터 존재의 참된 속성을 가리며 (물론 이 참된 속성이란 실은 그런 고정불변한 속성이 없이 空하다는 것일 뿐이지만), 따라서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다. 이제 禪 전통에서 침묵의 가치가 그토록 강조되는 이유를 알아보자. 언어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나 사물의 그룹을 개념화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것들과 그것들 아닌 것을 差別化(차별화 differentiation, discrimination)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차별화는 존재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물들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시도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의 참된 모습을 뚫어보는 것을 막는다.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해 보겠다. 독자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독자가 인간들로부터 차별화하여 구분해 내는 것이 과연 있을까? - 실은 너무도 많다. 독자는 존재 세계에서 인간인 것들로부터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을 차별화하여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속에서 어떤 개념이라도 사용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 세계 전체를 (개념적으로) 분리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 세계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깨달음이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선 전통에서 침묵이 그토록 중요시되는 이유다: 단지 말을 안 한다는 의미에서의 침묵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차별화하는 생각들을 모두 멈춘다는 의미에서의 침묵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말이나 개념의 사용도 차별화를 함축하게 되고 차별화는 존재의 참된 양상인 연기에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부처가 왜 말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말로 된 어떤 답변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참된 모습을 왜곡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그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침묵했어도 되었겠고, 또는 “차 한 잔 하시게,” “새들이 예쁘게 지저귀고 있네” 등과 같이 주어진 질문과는 전혀 관련 없는 답변을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 위에서 논의한 다른 선 수수께끼도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고요한 연못 위에 달이 비치어 있다. 그것이 물이냐 아니면 달이냐?” - 제대로 된 답변이 불가능한 이 질문은 그 자체로 넌센스다. 넌센스인 질문에 대해 가능한 유일한 답변은 또 다른 넌센스 뿐이다. 그래서 학생이 “어젯밤 남쪽 하늘에서 북극성을 보았습니다”라고 했을 때 선사가 옳다고 손뼉을 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 이 강의를 시작할 때 처음으로 소개한 대화에 주목할 차례다. 선 전통에 있어서 “부처란 무엇인가?”는 그 자체로 진실을 誤導(오도)하는 잘못된 질문이다. 불교에서 “부처”는 종종 진리를 일컫는 다른 이름으로도 쓰이는데, 주어진 질문은 진리가 말로 표현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로 된 답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사의 답변 “개똥이다!”는 실제로 ‘넌센스’를 의미한다. 서구인이라면 넌센스를 의미하기 위해 “쇠똥이다(bullshit)!”라고 했을 텐데, 소와 같은 가축을 별로 키우지 않고 벼농사를 주로 짓고 살았던 한국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아무래도 쇠똥보다는 개똥이 더 흔해서 개똥을 들먹였을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어떤 이가 엉터리 소리를 계속 하는 것을 보고 서구인이 그가 ‘쇠똥같은 소리(bullshitting)’를 한다고 하면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그가 ‘개소리’를 한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禪 전통은 온갖 농담과 유머로 가득하고, 제자들의 교육 목적상 가끔은 고함과 몽둥이질마저 허용되기도 한다. 많이 웃고 재미있게 놀면서도 깨달을 수 있다면 禪은 정말 신나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한편 선 전통은 집착을 버리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비록 연기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 가르침에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본질을 결여해 空하지만, 모든 것이 空하다는 가르침 그 자체도 본질이 없이 空함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空하다는 가르침도 空하다는 주장 또한 본질이 없이 空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空하다는 가르침도 空하다는 주장 또한 본질이 없이 空하다는 주장도 실은 본질이 없이 空하다. 어떤 주장도 본질이 없이 空하다는 이 비판의 과정은 논리적으로 무한히 소급되며 지속된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비판하며 무한히 부정하는 과정 자체가 실은 바로 깨달음과 열반의 과정이라고까지 한다. 禪 수수께끼를 하나 더 들어 禪 전통이 空의 가르침과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을 얼마나 철저히 받아들이는지 보이겠다. “깨달으려거든 제일 먼저 부처와 조사들을 죽여라!” 아마도 이것이 禪 전통에서도 가장 당혹스럽고 아리송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수수께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부처나 조사의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그들의 가르침이 말의 형태를 빌어서 된 것일 때 더욱 그렇다. 그리고 부처와 조사, 또 그들의 가르침 모두 본질을 결여한 채 空하니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하나에라도 집착함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필자는 이 강의 50분 동안 청중에게 禪 전통의 無言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다. 필자의 강의를 이해한 독자라면 이제 지금까지 필자가 강의한 모든 내용이 실은 본질을 결여한 채 空함을 깨달을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말로 표현해 보았으니까. 그래서 독자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자가 이 강의에서 말한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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