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창성교수 칼럼

“인식론적 비유를 존재론적 방식으로 해석”[홍창성 철학 에세이] 5. ‘한자경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비유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손가락 생김새만 문제 삼는 셈”

통융 2021. 10. 14. 17:36
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7641 미디어붓다
“인식론적 비유를 존재론적 방식으로 해석”
[홍창성 철학 에세이] 5. ‘한자경 교수의 비판’에 대하여
“비유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손가락 생김새만 문제 삼는 셈”


수불 스님의 글에 대해 비판적 글을 게재해 ‘깨달음 논쟁’이 불붙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홍창성 교수(美 미네소타주립대)가 한자경 교수(이화여대)의 비판에 대해 한 달 만에 응답을 글을 보내왔다. 홍 교수는 이 글을 보내오면서 박용태 교수의 ‘홍 교수가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이번 논쟁에 참가해 여러 논의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21세기 새 시대의 새로운 교상판석을 한국불교계가 (특히 <미디어붓다>가 선도해서) 주도하면 신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현재와 같은 열띤 논쟁이 주제를 여럿 바꾸면서 몇 해 계속 된다면 한국불교계는 21세기 세계 불교를 위해 새로이 교상판석을 시행할 역량을 갖출 수도 있겠다고까지 상상해 보았다”고 이번 논쟁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홍창성 교수의 철학에세이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불교식 보름달 그리기는 논리적으로만 해석해야


박용태 교수는 그의 최근 글 <한자경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서 한자경교수가 나의 <초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 내용 일부에 대해 반론한 논점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며 반박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내 글에 대한 한교수의 반론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 줄 것을 친절히 권했다. 아직 한국식 토론 및 논쟁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몇 가지 이유로 한교수의 논지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미루어 왔는데, 박 교수의 제안도 있으니 이제 간단히 몇 마디 해야 할 인연이 모인 것 같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미국 대학들은 1월 중순에 봄 학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개강 3주째인 나는 미리 계획해서 시간을 배정해 놓은 글들 외에는 현실적으로 예정에 없이 새로 글을 시작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래서 원래 계획에 없던 이 글도 더 길고 섬세하게 쓸 여력이 없음을 <미디어붓다>의 독자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린다.

중국 송대 성리학자들인 정씨 형제가 불교에 대해 쓴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비판문들을 몇 해 전 영어 번역으로 읽으며 가슴이 서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심 반사적으로 불교를 그 비판들로부터 방어해 보려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쉽사리 반박할 수 없어서 난감했었다. 그러면서 불교가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을 통해 그 여러 체계를 더 진화시켜 나가려면 불교에 대해 역사상 아마도 가장 가혹한 비판을 가했을 성리학자들의 요점을 새기고 새기면서 그것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성리학 전공자이면서 불교를 애호한다고 하는 박용태 교수가 이번 깨달음 논쟁에 참가하여 스스로가 보는 바람직한 불교관을 개진해 주어서 반갑고 기쁘다. 아마도 그의 불교관은 성리학자들의 예리한 비판을 피할 수 있는 형태로 형성된 것일 테고, 한편 그가 이번 <한자경 교수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서 펼친 논의가 내 생각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나의 불교에 대한 견해가 성리학자들의 비판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안도하며 고무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한자경 교수가 내가 사용했던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이용해 개진한 반론에 대해 내가 왜 지금까지 반박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박용태교수의 견해 가운데 한 두 논점에 대해 코멘트를 더해 보겠다.

몇 년에 겨우 한 번 한국을 방문하는 나는 한자경 교수와는 3년 반 전에 학회에서 한 번 만난 적 밖에 없다. 그런데 당시 쓰고 계시던 원고의 몇 챕터를 친절히도 내게 이메일로 보내주셔서 나는 2012년 가을에 원고지 39매 분량의 글을 써 나의 코멘트로 한 교수께 보내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지난 3년 이상 아무런 답변이 없으셔서 어찌 된 일이지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이번 깨달음 논쟁과 관련하여 <미디어붓다>에 내신 글로 내게 공개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셨다. 반갑기도 했지만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도 공개적으로 반박문을 써야 하나 망설이다가 하나의 논쟁에서 같은 주제에 대해 한 개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공정하지도 또 적절치도 않은 것 같아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박용태 교수가 이번에 다른 주제를 선택해 새로 낸 글에서 나도 한 교수에 대해 내 의견을 제시하기를 권하고 있어서 이제는 때와 인연이 맞는다고 판단되어 그에 응하기로 했다.

한자경 교수는 3년 반 전에 있었던 학회 당시 종합토론시간에 내가 사용한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에서 그림의 바탕인 종이의 흰 색이 마음이나 불성의 밝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게 질문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더 이상 답변을 부연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사실 어떤 학자들이 내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그렇게 오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많은 청중 앞에서 그 오해를 바로잡아 준다는 것이 (내가 기억하던 소중한 옛) 한국적 정서로는 너무 민망할 것 같아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박용태교수가 내 의견의 제시를 권하고 계시니 이제 내가 학회에서 답변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두 이유를 설명하겠다.





사진=장명확

당시 학회에서 나는 선불교와 현대 언어철학의 관계를 논의하는 논문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내가 든 보름달의 비유는 “불성”이나 “참마음” 같은 단어들이 언어철학에서 지시(reference)의 문제와 관련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성,” “진여,” 그리고 “참마음” 같은 말들이 빈번히 쓰이는데, 나는 이 말들이 지칭하는 것들이 아뜨만이나 브라흐만과 같이 어떤 고정적 본성을 가진 궁극적 실재가 아니면서도 그 지시대상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던 Yogacara-Sautrantika학파(부끄럽게도 나는 이 학파의 한국어 이름을 모른다)의 불교인식론 및 불교논리학, 특히 디나가(Dinnaga)의 아포하론(Apoha Theory)을 원용했다. 내가 보름달 그리기와 관련해 아포아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당시 학회에서 배포한 내 발표문 안에 있는 주석과 본문에 내 견해와 아포하론과의 연관성이 언급되고 관련 문헌들까지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할 것이다.

나는 불교의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과 유식론을 我論(아뜨만론)이라고 보며 배척하는 비판불교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교인식론 및 논리학의 아포하론을 도입했다. 아포하(apoha)란 타자의 배제(他者의 排除, the exclusion of the other)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물에 존재하는 본질(본성 svabhava)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어떻게 하나의 명사(예를 들어 “소”)로 다수의 사물들(여러 소들)을 지시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소”라는 말은 여기 검은 소, 저기 흰 소, 또 얼룩 소, 살찐 소, 마른 소, 사나운 소, 순한 소, 등등 온갖 천차만별의 소를 각각 지칭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모두 같은 소이기 때문에 갖는 어떤 공통된 본질(svabhava)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소”라는 말이 이 모든 소들을 하나하나 성공적으로 지칭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불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도에서 불교인식론 및 논리학을 연구했던 사람들이 “소”라는 단어는 소가 아닌 것이 아닌 것들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소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소”라는 말이 소들을 지시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했다. 지금 이 글에서는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는 논리적으로 다소 복잡한 논증이 필요하지만, 쉽게 말해 소들의 여집합의 여집합은 소들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일단 “소”라는 말의 지칭 대상을 찾기 위해 소의 집합을 찾으려 하지 말아 보자. 그보다는 먼저 이 문제 상황을 논리적으로 접근하며 소가 아닌 것들의 집합 즉 소들의 여집합을 생각해 보자. 그런데 소들의 여집합은 소가 아닌 이 세상의 모든 다양한 사물을 다 포함하므로 그것들 사이에 어떤 공통되는 본질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공통된 속성을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의 여집합을 또 생각할 차례다. 이때 공유하는 본질이 없는 다양한 집합의 여집합 또한 본질을 공유하는 것들의 집합일 필연성이 전혀 없다. 즉 소들의 여집합의 여집합은 본질을 공유할 필요가 없는 소들의 집합이 되는 셈이다. 언어철학적으로 더 복잡한 논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도의 불교인식론자 및 논리학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타자의 배제라는 아포하의 개념으로 “소”를 비롯한 모든 명사들의 지시체를 그 지시체들의 본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성공적으로 지칭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내가 당시 학회에서 비유로 든 보름달 그리기의 예는 이렇게 지극히 논리적이고 언어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논의를 위해 제시된 것이었다. 나는 “불성,” “여래장,” “일심” 등의 말들이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을 지칭한다는 비판불교론자들의 반론을 극복하면서 불교 안에서 이 말들이 문제없이 쓰이게 하려고 아포하론이 가진 논리적 통찰을 도입하려 한 것이고, 그 이해를 돕고자 보름달 그리기의 예를 사용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한자경교수가 생각하듯이 비판불교론자들을 도우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여래장 사상과 유식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학회에서 한자경 교수가 내 보름달 그리기의 예를 스스로가 선호하는 존재론적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그 흰 종이 바탕을 마음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더 이상 답변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순수하게 인식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관점으로 접근하며 든 예를 존재론을 끌어 들여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덧붙이기가 민망해서였다. 나는 아포하론을 원용해 여래장 사상과 유식론이 직면할 수 있는 언어철학에 있어서의 지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도입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러한 논리적 차원의 문제를 누군가는 그 흰 종이 바탕을 언급하며 존재론의 차원으로 해석하면서 잘못 이해할 가능성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점은 내가 답변을 더 부연하지 않았던 다음의 두 번째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내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에서 어떤 흰 종이를 바탕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그 흰 바탕이 마음, 아뜨만 또는 브라흐만을 상정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모두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완벽한 비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래서 학문할 때는 그 비유가 목표로 하는 논점에만 주목해 주는 것이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 서로가 지켜야 할 암묵적인 규칙이고 예의이다. 자꾸 미국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미국 철학회에서 내가 참가한 수십 (수백?) 차례의 토론회에서 이런 규칙이 한 번도 어겨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농담이라면 모를까 그 어느 누구도 비유가 가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함을 꼬투리 잡아 논점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원칙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비유의 한계를 이용해 그 비유가 가진 우연적인 속성을 끌어들여 비유가 원래 지향하는 논점을 공격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을 그 학회에 참석한 많은 청중 앞에서 차마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말을 안했을 뿐이다.

아포하론을 원용하며 내가 보여주려 한 바는 보름달의 밝음이 ‘밝지 않음이 없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림 그리는 비유를 들기 위해서는 흰 종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부차적인 문제를 이용해 그림에서 보름달의 밝음이 바탕인 흰 종이 때문인 것처럼 깨달음이나 열반이 바탕이 되는 참마음이 새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牽强附會(견강부회)다. 그리고 이 바탕이 된다는 참마음에 대한 한교수의 기술은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에 대한 표현과 다름이 없다. 내가 완벽하지 못한 비유를 들어 오해를 초래한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완전할 수 없는 비유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생김새만 문제 삼는 셈이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실은 보름달 그리기의 비유를 사용한 논문을 발표한지 3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더 나은 비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서 이해해야 하는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비유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비유가 불완전함을 이용해 논점을 흐린다면 이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못생긴 내 손가락을 탓할 수밖에.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 보름달 그리기의 예를 한번 존재론적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며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겠는데, 박용태 교수가 이미 그의 새 기고문에서 충분히 좋은 논의를 펼치고 있어서 내가 굳이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박 교수는 치밀한 분석으로 논의를 전개하며 내가 하고 싶었을 말을 거의 다 했을 뿐 아니라 내가 많이 접하지 못한 동양철학의 맥락에서 그 논의의 내용을 참 풍부하게도 만들어 주었다. 실은 내가 한자경 교수에게 3년 전에 보낸 코멘트와 많은 부분에서 그 논점들이 겹친다: 一心(일심)의 존재론적 성격에 대한 문제, 비판불교론자들의 견해, 梵我一如(범아일여)의 문제, 마음 밖 외부세계 존재의 문제, 그리고 한교수의 견해가 唯我論(유아론)이 된다는 문제 등. 그래서 여기서 내가 굳이 내 글을 더 보탤 이유가 없겠다.

한 가지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문제는 박교수가 여래장계와 유식계에서 말하는 불성, 여래장, 진심, 진여심, 일심 등의 개념을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비판자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로 가져 온 ‘모든 중생이 깨달을 수 있는 능력(작용성)’의 존재론적 위상이다. 나는 이 ‘능력’의 존재론적 속성이 궁금하다. 그것이 능력이라면 어떤 힘(power)이나 성향(disposition) 또는 기능(function)일 것인데, 통상 사람들은 이것들을 각각 어떤 본성(svabhava)을 가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열(heat)이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현대심리철학과 과학철학에서는 이 성향이나 기능을 단지 어떤 작용들을 가리키는 편리한 지칭어로만 보지 그 스스로 고유한 본성을 가진 어떤 존재자로 보지는 않기도 한다. 비유를 들자면, “미국 상원의원”이라는 말로 힐러리 클린턴, 버니 샌더스, 또는 엘리자베쓰 워런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세 명 각각의 사람들 이외에 따로 미국 상원의원이라는 추상적인 개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어서 “미국 상원의원”이라는 말은 단지 이 세 사람 각각을 경우 경우에 따라 지시해 주는 편리한 지칭어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 교수가 말하는 능력(작용성)이라는 것도 이런 저런 작용들을 그때그때 편리하게 각각 가리키는 편리한 개념에 불과할 뿐 어떤 독자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자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글로부터는 박 교수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설혹 내 희망대로 박 교수가 능력을 그냥 편리한 개념(또는 지칭어)로만 보는 唯名論的(유명론적 nominalist)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그 말이 가리키는 각각의 작용들은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다시 꼬리를 물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이 글에서는 다룰 수 없는 많은 분량의 논의가 필요하다.

한편 빈 마음(空心)이 원효의 일심(一心)이 아니겠느냐는 박 교수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지금껏 불교철학에서 분명하지 않았던 점 하나가 또 마음에 걸렸다. 서양철학에는 도교에서 말하는 體와 用(체와 용)의 구분과는 다소 다르게 보이는 기체(基體 substratum 또는 실체)와 속성(attribute 또는 property)의 구분이 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예를 들어 이 개념을 설명해 보겠다. 이것은 붉다, 가볍다, 이러저러한 모양이다, 촉촉하다, 표면이 거칠다 등등의 수많은 속성들의 다발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것을 이것이게끔 해 주는 속성이 있다면 그 속성이 이것의 본성 또는 본질이라 불릴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속성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 하나에 모여서 이 장미 한 송이를 구성하는 것일까?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까지만 해도 이 속성들을 모두 함께 걸어두는 ‘속성 걸게(property hanger)’로서의 기체(substratum)가 존재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속성들을 한 곳에 묶어서 하나의 대상을 구성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모든 속성들을 하나도 가지지 않는 기체(substratum)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가 뒤따른다.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설혹 이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속성도 없는 한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18세기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이 기체(substratum)를 ‘불가해한 괴물(unintelligible chimera)’이라고 부르며 그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체가 없다면 그 수많은 속성들이 도대체 어떻게 한 다발을 만들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빈 마음(空心)은 어떤 自性(자성)도 가진 것이 아니니 아무 속성도 없는 기체(substratum)라고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렇다면 이것은 데이비드 흄이 그 존재를 부정한 불가해한 괴물체와 어떻게 다른가? 박 교수를 비롯해 여러 불교학자들이 어떻게들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나는 불교의 연기와 공의 가르침이 자성과 기체의 존재를 모두 부정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위에서 제기한 모든 문제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공한다고도 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도 다른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박용태 교수나 한자경 교수의 논점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위와 관련해 한 가지 마지막으로 추가하고 싶은 것은, 사물이 가진 자성과 기체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있지 않다고 주장할 때 그것이 반드시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중도의 어떤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검은 색을 싫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흰 색을 좋아할 이유는 없고 알록달록한 색깔을 좋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주론에 반대했다고 해서 반드시 단멸론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非有非無妙有(비유비무묘유)는 대승불교에서는 상식이다.







*홍창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미국철학회 아시아철학 분과위원회장 역임.